<성서심층연구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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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전 세계 숲과 산호초는 기록적으로 파괴되었다(1년 전보다 숲 파괴 80% 증가, 전 세계 산호초 84% 파괴). 지구 평균기온은 1년 전의 상승보다 2.5배 상승하여, 재앙 마지노선 1.5도 상승을 넘었다. 지금처럼 빠른 기온상승 속도는 6,500만 년 이래 처음이다. 기온상승이 가속화되어 2045년에 2도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점차 세계 농업과 어업, 해류 순환이 붕괴하여, 3도 상승 이전에 식량난과 식수난, 해수면 상승, 전쟁으로 인류문명이 붕괴할 것으로 학자들은 경고한다. 정확히 3년 후에는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3도 상승 수준(550ppm CO2e)에 도달한다.
신생대 마지막 단계인 지금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보다, 또는 수운과 소태산 선생이 “개벽”을 선포할 때보다 훨씬 더 절박하다. 집단광기와 소멸의 시대일수록, 생명의 성스러운 광채는 훨씬 경이롭게 빛난다. 그러나 왜 성경을 가장 열심히 읽는 “중생한 복음주의자들”이 훨씬 더 폭력적인가?(로널드 사이더, 존 도미닉 크로산). 인구의 97%였던 기독교인들이 히틀러에 열광한 이유를 본회퍼는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했다.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스트가 온건파를 이기고 성공한 것은 소수의 훈련받은 광신자들 때문이었다”(크레인 브린튼). 자아팽창과 적대감에 기생하는 종교의 모순은 한국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관건은 기복주의와 적대감, 어리석음으로 돈벌이하는 중보종교의 반지성주의다.
생태계 붕괴와 인류문명 붕괴의 가장 큰 책임은 가이아의 양생 원리를 무시하고 자연과 노동을 무한 약탈하는 시장 전체주의 체제에 있다. 따라서 생태 문명으로 전환하는 과업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같은 선진국들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역사 개입을 인간의 책임에 넘겨주신”(조너선 색스)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생존을 위한 절박한 시간 싸움에서 99%의 인류는 세계 1%의 초국적 자본가들의 탐욕 앞에 패배하고 있다. 화석연료를 퇴출시키는 것이 절박하지만, 자본과 권력은 단기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결국 2040년대부터 “북반구에서 동시다발적 식량 폭동”이 예상되는(나오미 오레스케스) 미래 전망은 트럼프 2기 출범으로 훨씬 어둡게 되었다. 공정한 에너지 전환과 신속한 탄소 중립을 위한 “기후비상내각” 설치를 요구할 힘은 시민들의 정치 역량에 달려 있다. 인류가 자멸의 길에서 벗어날 희망의 돌파구는 이런 근시안적 자기중심성을 자기 존재의 터전까지 확장하는 “인식론적 회심”이다. 생명의 유일한 자궁이며 “공동의 집”인 지구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한 우리 세대의 생활방식 때문에 지금 어떻게 불타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생태 문명의 비전에 따라 이 자멸적 경제구조와 생활방식을 변혁시킬 노력보다 근본주의적 맹신과 폭력성을 보이거나, 세상 현실에서 물러나 내면의 영성에서 은둔처를 찾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공과 번영의 복음”을 통해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었다. 교회가 동성애 반대에 올인하는 것은 권력과 자본의 횡포에 대해 눈을 감도록 만드는 극우 세력의 탈정치적 세뇌 전략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인류문명을 이끌었던 종교가 오늘날 무속과 다를 바 없는 기복주의와 수구적 태도로 인해 문명 전환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세상에 대한 근본주의적 정복(개종)이나 내면적인 은둔 대신에 제3의 길을 찾던 사람들은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열심히 경전을 공부했다. 동유럽 유대인들은 일주일 내내 감자만 먹으면서도 저녁마다 모여 공부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불안과 폭력이 몰려올수록, 영혼의 촛불을 밝히고 어둠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경전 공부와 기도였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여성들은 공동변소에 모여 안식일 예배를 드렸으며, 그 대량학살의 땅을 “하나님이 거하실 합당한 장소”(멜리사 라파엘)로 만들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악화된 생태계 파괴 문제를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고,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출애굽하라!”고 외친 토마스 베리 신부는 성서를 몇 년간 읽지 말자고 제안했다. 존 캅 교수도 지적하듯이, 성서에 우주론이 결여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정복, 내세 구원, 초자연주의로 인해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킨다는 이유 때문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신 “역사의 하나님” 대신에, 여섯 번째 대멸종 시대에는 새로운 창조/진화의 기적을 통해 “우주/생명의 역사를 이끄시는 자연의 하나님”이 인류의 생존과 지구 생태계의 건강을 거의 전적으로 인류의 책임에 맡기셨다.
특히 지난 40년 동안 탁월한 신학자들, 영성가들, 목회자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처럼 무너져내리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횡포를 막아내지 못한 때문이다. 따라서 묵시적 대재앙의 임계점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은 종교가 문명 전환을 위해 창조/진화의 원리인 동시에 모든 경전의 기본적 가르침인 양생의 원리, 즉 다양성, 서로주체성, 친교(상호의존성) 원리를 우리의 생활방식, 산업구조와 정치를 통해 구현하기 위해 혁명적 변화를 추구할 때다. 제도종교의 “영적인 파산”(존 캅)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적 변화 없이는 사탄의 체제와의 영적 투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월터 윙크). 사회적 불의와 착취를 지속시키는 문화적 구조는 성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이며, 예수와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환대, 차별철폐를 통한 문명 전환의 복음이다.
성서해석이 흔히 문자에 매여 과거지향적이 됨으로써, 당면 위기와 미래 세대의 생존을 위한 과제를 무시한 채,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수구적 태도를 조장해 왔다. 특히 여성, 물질, 몸, 자연을 멸시하는 탈육신 신학, 초자연주의 신론, 승리주의 기독론, 4영리와 번영의 신학에 매몰된 때문이다. 시장 전체주의 사회에서 성서가 탐욕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성서의 심층적 의미를 배우고, 지배 문화와 “자본 질서”를 변혁시켜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책임이 부족했다.
성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정치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문서이며, “하나님 나라”라는 대안적 세상을 위한 체제전복적 저항문서다.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는 텍스트는 [악마의] 프리텍스트가 된다”(크리스티안 베커)는 점에서, 지금은 문자 근본주의와 결탁한 폭력적 극단주의를 막아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성서의 심층적 의미를 공부하고 함께 토론하며,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연대할 때다. 지구 적자(Earth deficit)로 인해 팬데믹 사태와 경제 위기와 기후재앙이 서로 악화시키는 “퍼펙트 스톰” 시대엔 불안과 무력감, 약자들에 대한 혐오를 이용하는 극단주의 정치와 폭력이 더욱 심해지기에, 성서가 가르치는 생명 외경과 만물이 한 몸인 것, 그리고 양생의 구체적 방법인 급진적 분배정의(희년, 예수의 무차별적인 밥상공동체), “지배 없는 섬김과 나눔과 용서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와 그에 근거한 체제비판 정신과 자비의 휴머니즘만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생각하는 시민의 힘이며,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공부와 토론 문화이며,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말씀 한마디를 붙잡는 연대이기에, 대선 직후 다음 세대를 위해 <성서심층연구 시리즈>를 기획했다. 생명의 노래에 맞춰 신명나게 춤추며, 시대의 광기를 견디면서 공부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 일조하게 되기를 바란다.
“현재 매일 히로시마 원폭 40만 개씩 폭발하는 열이 지구에 추가되고 있다”(제임스 핸슨). 그 결과, 급격한 기후 붕괴로 인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전체가 여섯 번째 대멸종을 겪고 있다. 그러나 파리협약 이후에도 세계 대형은행들은 화석연료에 7조 달러를 투자했고, 정부들도 매년 수조 달러(2023년 7조 달러)의 보조비를 지급한다. 기온상승이 가속화되어 2030년에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2도 상승은 농업의 본격적 붕괴를 초래하며, 3도 상승 이전에 식량난과 기후전쟁으로 사회와 문명이 붕괴할 것으로 학자들은 경고한다. IPCC는 2100년까지 3도 상승을 예측한다. 이처럼 인류가 화석연료를 마음껏 태워 기후붕괴를 초래하고 자멸을 향해 돌진하는 결과,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인 지금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보다, 또는 수운과 소태산 선생이 “개벽”을 선포할 때보다 더 절박하다.
분명한 사실은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하나님이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보호하지 못하신 것처럼, 전대미문의 기후 붕괴와 대멸종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을 보호하지 못하신다는 점이다. 그 모든 책임은 가이아의 양생 원리를 무시하고 자연과 노동을 무한 약탈하는 시장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과업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같은 선진국들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 개입을 인간의 책임에 넘겨주신”(조너선 색스) 때문이다.
인류는 기후 위기와 대멸종을 해결할 충분한 지식과 기술과 자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류 생존을 위한 시간 싸움에서 99%의 인류는 세계 1%의 자본가들의 탐욕 앞에 패배하고 있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성장주의에서 벗어나고 화석연료를 퇴출시키는 것이 절박하지만, 정치와 자본 카르텔은 이윤추구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OECD 평균의 1/3도 안 되는 “압도적 꼴찌”(홍종호)이며, 1인당 탄소 배출 증가율은 세계 1위다.
결국 “2040년대부터 북반구에서 동시다발적 식량 폭동이 예상되는”(나오미 오레스케스) 현실에서 미래 전망은 비관적이다. 벌목 금지, 갯벌과 습지 보호, 대규모 식목, “공정한 에너지 전환”을 요구할 힘은 시민들의 정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결정한 이슈는 기후, 에너지 전환, 노동, 농민 기본소득, 세계 최저 출산율이 아니라, 안티-페미, 종부세, 지역주의였다.
인류가 자멸의 길에서 벗어날 희망의 돌파구는 이런 근시안적 자기중심성을 자기 존재의 터전까지 확장하는 “인식론적 회심”이다. 생명의 유일한 자궁이며 “공동의 집”인 지구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한 우리 세대의 생활방식 때문에 지금 어떻게 불타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생태문명의 비전에 따라 이 자멸적 생활방식과 구조를 변혁시킬 노력보다 근본주의적 맹신과 폭력성을 보이거나, 세상 현실에서 물러나 내면의 영성에서 은둔처를 찾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번영의 복음”을 통해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었다. 인류문명을 이끌었던 종교가 근시안적 에고중심주의(기복주의)와 수구적 태도로 인해 문명전환에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세상에 대한 근본주의적 정복(개종)이나 내면적인 은둔 대신에 제3의 길을 찾던 사람들은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열심히 경전을 공부했다. 동유럽 유대인들은 일주일 내내 감자만 먹으면서도 저녁마다 모여 공부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불안과 폭력이 몰려올수록, 영혼의 촛불을 밝히고 어둠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경전 공부와 기도였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여성들은 공동변소에 모여 안식일 예배를 드렸으며, 대량학살의 땅을 “하나님이 거하실 합당한 장소”(멜리사 라파엘)로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악화된 생태계 파괴 문제를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고,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출애굽하라!”고 외쳤던 토마스 베리 신부는 성서를 몇 년 동안 읽지 말자고 제안했다. 존 캅 교수도 지적하듯이, 성서에 우주론이 결여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정복, 내세 구원, 초자연주의로 인해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킨다는 이유 때문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신 “역사의 하나님” 대신에, 여섯 번째 대멸종 시대에는 새로운 창조/진화의 기적을 통해 “우주/생명의 역사를 이끄시는 자연의 하나님”이 인류의 생존과 지구 생태계의 건강을 거의 전적으로 인류의 책임에 맡기셨다.
지난 40년 동안 탁월한 신학자들, 영성가들, 목회자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횡포를 막아내지 못한 때문이다. 따라서 묵시적 대재앙의 임계점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은 종교가 문명전환을 위해 창조/진화의 원리인 동시에 모든 경전의 기본적 가르침인 양생(養生)의 원리, 즉 다양성, 서로주체성, 친교(상호의존성) 원리를 우리의 생활방식, 산업구조와 정치를 통해 구현하기 위해 혁명적 변화를 추구할 때다. 비폭력 혁명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거짓 자기에 사로잡혀 탐진치 삼독의 노예가 되는 현실이다. 제도종교의 “영적인 파산”(존 캅)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적 변화 없이는 사탄의 체제와의 영적인 투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고(월터 윙크), “대량파괴의 가장 큰 무기는 인간의 마음”(조너선 색스)이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이 흔히 문자에 매여 과거지향적이 됨으로써, 당면 위기와 미래 세대의 생존을 위한 과제를 무시한 채,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수구적 태도를 조장해왔다. 특히 여성, 물질, 몸, 자연을 멸시하는 탈육신 신학, 초자연주의 신론, 승리주의 기독론, 4영리와 번영의 신학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시장 전체주의 사회에서 성서가 혐오와 탐욕을 정당화하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성서의 심층적 의미를 배우고, 지배문화와 자본 질서를 변혁시켜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책임이 부족했다.
성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정치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문서이며, “하나님 나라”라는 대안적 세상을 위한 체제 전복적 저항문서다.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는 텍스트는 악마의 빌미(프리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문자 근본주의와 결탁한 폭력적 극단주의를 막아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성서의 심층적 의미를 공부하고 함께 토론하며,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연대할 때다. 지구 적자(Earth deficit)로 인해 팬데믹 사태와 경제 위기와 기후재앙이 서로를 악화시키는 “퍼펙트 스톰” 시대엔 불안과 무력감, 약자들에 대한 혐오를 이용하는 극단주의 정치와 폭력이 더욱 심해지기에, 성서가 가르치는 생명 외경과 만물이 한 몸인 것, 그리고 양생의 구체적 방법인 급진적 분배정의(희년, 예수의 무차별적인 밥상공동체), “지배 없는 섬김과 나눔과 용서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와 그에 근거한 체제비판 정신과 자비의 휴머니즘만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생각하는 시민의 힘이며,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공부와 토론 문화이며,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말씀 한마디를 붙잡는 연대이기에, 대선 직후 다음 세대를 위해 <성서심층연구 시리즈>를 기획했다. 생명의 노래에 맞춰 신명나게 춤추며, 시대의 광기를 견디면서 공부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 일조하게 되기를 바란다.
01. 매주 오경 읽기 영성 강론: 하나님보다 앞서 걸어라, 조나단 색스. 김준우 역.
02.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21세기를 위한 창세기, 조나단 색스. 김준우 역.
03.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 조나단 색스. 김대옥 역
04. 오경의 평화 강론, 조너선 색스, 김대옥 역
05. 생명을 택하는 믿음, 조너선 색스, 김대옥 역
06.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 리처드 호슬리, 김준우 역
07.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 존 도미닉 크로산. 한성수 역
08. 예수 대 카이사르, 외르크 리거. 정준화 역
09 랍비가 풀어내는 출애굽기, 조너선 색스, 김대옥 역
10. 예수의 대안적 계획: 산상수훈, 리처드 로어, 정준화 역 (근간)
11. 예수의 정치학, 오베리 헨드릭스 (근간)
12.마르크스와 성서, 호세 미란다
13. 랍비가 풀어내는 신명기, 조너선 색스
14. 바리새파 바울, 존 도미닉 크로산
15. 인생이란 그런 거야: 전도자와의 대화, 로이드 기링
16. 로마서의 반제국주의, 실비아 키스마트 & 브라이언 월쉬
17. 산상수훈, 에이미 질 레빈
18. 랍비 예수, 브루스 칠턴
19. 예수의 비유들에 대한 주석, 버나드 브랜든 스캇
20. 예수: 미리암의 아들, 소피아의 예언자: 페미니스트 기독론의 중심 문제들,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21. 예언자들, 월터 브루그만
22. 제국에 맞서는 성서의 희망, 월터 브루그만.
23. 신앙의 물적 성격과 물적 저항, 월터 브루그만
24. 바울의 역사와 메시지, 크로산, 조나단 리드
25. 기독교의 탄생, 크로산, 김준우 역
26. 예수 이후 기독교 이전까지, 웨스타르 기독교 세미나 편
27. 말씀의 권능,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28. 홀과 별: 사해 두루마리의 메시아 사상, 존 콜린스
29. 제국에서 나와라, 하워드 베스 브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