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종교인 비율 2004년 46%, 2025년 60%.
비종교인의 호감 종교: 불교 15%, 천주교 11%, 개신교 6%
한국갤럽조사연구소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1) 종교 현황
20대 4명 중 3명이 '종교 없음'…신자도 성직자도 고령화 | 연합뉴스
[서영채의 인 / 문학 현장]‘오이디푸스 왕’, 민주주의와 함께 살다 - 경향신문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이주민,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분노에 앞장서는 집단이 개신교회인 현실이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혐오와 차별의 무기로 사용한다. 성경이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소수자들을 그토록 혐오한다면, 동성애자들을 만드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겠는가? 왜 한국에만 300만 명이 넘는 성소수자들을 만드셨겠는가?[지금, 여기]성소수자의 삶, 통계로 잡히다 - 경향신문
신앙 발달 단계와 미래의 교회를 위한 신학이 절실히 요청된다.

한겨레 그림판, 권범철 기자, "수치 창조: 내란이 극우와 만날 때" (2025년 8월 4일)
[아침을 열며]김문수와 이준석을 합하면 이 대통령을 이겼다 - 경향신문
기독교 통계(292호) - 기독교인의 정치 의식 지형 조사 (2025)
Faith and Facism, White Christian Nationalism
https://youtu.be/Q8QasbXXNZc
세계적인 묵시의 시간이다.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고 있다는 뜻이다. 제국들은 혐오와 분노를 구조화하며 세계화한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핵심 세력이 왜 백인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인지, 그들이 어떻게 예수의 복음을 자신의 성공과 자본주의 제국의 축복으로 둔갑시키는지, 왜 기후위기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지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비상계엄과 탄핵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지배층이 어떻게 검찰만이 아니라 군장성, 정치인, 고위 공직자, 사법부, 언론의 지배카르텔을 이루고 있는지가 드러났다. 또한 개신교 극우 지도자들이 어떻게 터무니없는 부정선거론을 확산시켰고, 탄핵에 반대했는지, 그리고 대다수 교회는 왜 동성애 반대에 올인했는지를 드러냈다.
복음주의 신학자 로널드 사이더가 <복음주의자들의 양심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Why Are Christians Living Just Like the Rest of the World, 2005)의 1장 "The Depth of the Scandal"에서 미국의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을 근거로 지적하듯이, 성경을 가장 많이 열심히 읽고 기도를 많이 하는 "중생한 기독교인들의 아내 구타 비율은 10.7%로서 일반인들의 경우 3%보다 300%, 또는 400% 많다. 또 그들의 이혼율은 미국 평균 이혼율보다 50%나 높고, 남침례교 교인들은 가톨릭 신자들과 비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보다 인종차별에서 두 배나 높다. 십일조 헌금과 인종차별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이 일반인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는 통계다. 한 마디로 “중생한 복음주의자들”이 이처럼 성경을 가장 열심히 읽으면서도 반복음적이며 폭력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성경 자체는 왜, 또 어떻게 비판적으로 읽지 않을 때 우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의 비폭력 정신을 살아내는 기독교이 될 수 있는가?존 도미닉 크로산이 심각하게 질문하고 책들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성경 안에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2015)는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잘 밝혀준다.
종교는 신비에 관한 놀라움과 찬양에서 출발하며, 인간의 탐진치 삼독의 해악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주된 업무이다. 신비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일이 겸손의 출발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기복주의, 승리주의, 교리주의, 교회주의, 성직자주의, 율법주의와 공적주의로 인해 프로메테우스적 종교가 되었으며, 성육신 종교가 아니라 여성과 몸과 자연과 물질을 멸시하는 탈육신 종교가 되었고,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소수자와 무슬림, 난민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폭력적 극우 세력이 되었다. 유명한 목회자의 자녀들이나 손주들조차 교회를 떠나는 사례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증거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라는 교회를 계속 출석하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식에 맞지 않는 교리적인 문제와 교회의 폭력적이며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교회는 빠르게 몰락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를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교회와 미래의 기독교를 위해 새롭게 예수의 복음과 기독교 신학을 분명하게 정리한 대표적인 목회자는 존 쉘비 스퐁 주교, 리처드 로어 신부, 그리고 브라이언 매클라렌 목사이다.
Bishop John Shelby Spong -- His last public lecture, 2018
Richard Rohr, How Jesus Interpreted the Scripture
https://youtu.be/JjUlQDwEIH0
Richard Rohr on God, brokenness and healing | The Spiritual Life Podcast
Fr. Richard Rohr: Everyday Wisdom From a Master Theologian
A New Kind of Christianity, Brian McLaren speaks at St. Paul's Cathedral in London, United Kingdom
https://youtu.be/nOK51FO0XoM
Faith After Fundamentalism, Brian McLaren, TheoTalk
https://youtu.be/rH2BNCYNJo4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적으로 수많은 탁월한 신학자들과 영성 지도자들, 일생을 복음전파에 바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 그리고 사회운동가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빠르게 몰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빈부격차는 더욱 극심해지고,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는 더욱 악화되어, 이제는 인류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멸종 가능성까지 염려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빌 매키븐이 2022년에 출판한 책 The Flag, The Cross, and the Station Wagon에서 슬쩍 지나치면서 던진 질문이다.
더군다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망자가 가장 많은 미국(121만 명 사망)과 브라질(70만 명 사망)은 유독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큰 국가들이다. 미국, 브라질, 한국처럼 복음주의/근본주의가 개신교의 중심 세력을 이루는 국가는 천민자본주의 국가로서 극심한 빈부격차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한 국가들이며, 그만큼 사람들의 경쟁이 심하며 생존 자체가 불안한 국가들이다. 서유럽의 대다수 국가에서는 복음주의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단적인 예로, 서유럽의 대다수 개신교회들과 달리, 미국, 브라질, 한국의 개신교회 대다수가 성소수자들을 반대하는 데 올인하는 이유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유지하는 자본과 권력의 구조적 횡포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들고 오직 성소수자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하게 만드는 극우 세력의 문화 전쟁 전략에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예수의 복음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친미 극우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도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 성소수자들의 생명을 무시하며 과학과 인권을 무시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둔갑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최근에 넷플릭스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열대의 묵시록>은 빌리 그래햄 이후 미국과 브라질의 복음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다수 사람에게 문제는 생존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이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돈, 군대, 믿음에 의존한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절대적 권위에 매달리고 싶은 것이라서 성경무오설 같은 근본주의에 의존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연 파괴와 지구 적자로 인해 세계 경제가 더욱 경쟁적이 되고, AI가 노동을 대체할수록, 사람들의 삶은 더욱 불안해지기 쉽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증가하더라도,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복음주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이며, 그런 원리주의자들은 ISIS처럼, 하느님과 예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묵시록을 문자적으로 믿어 예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폭력의 대리자가 되고, 생태계 파괴에 앞장서겠다는 식으로 실제로는 반기독교적이며 하느님을 능멸하는 자들이 되려는 것이다.
Top 10 Countries by Total Confirmed COVID‑19 Deaths
| Rank | Country | Confirmed COVID‑19 Deaths |
|---|---|---|
| 1 | United States | ~1.21 million |
| 2 | Brazil | ~700,000 |
| 3 | India | ~530,000 |
| 4 | Russia | ~405,000 |
| 5 | Mexico | ~390,000 |
| 6 | United Kingdom | ~240,000 |
| 7 | Italy | ~200,000 |
| 8 | France | ~180,000 |
| 9 | Germany | ~160,000 |
| 10 | Iran | ~150,000 |
These figures reflect officially reported confirmed COVID‑19 deaths as of the last available dataset on April 1, 2025.
Top Countries by Total Evangelical Christians
Data compiled from various sources (counts in millions, rounded):
| Country | Estimated Evangelicals (M) | Population (approx.) | Per 100,000 |
|---|---|---|---|
| USA | ~93 M | 332 M | 28,012 |
| China | ~66 M | 1,425 M | 4,632 |
| Nigeria | ~58 M | 218 M | 26,605 |
| Brazil | ~47 M | 215 M | 21,860 |
| India | ~28 M | 1,420 M | 1,972 |
| Indonesia | ~16 M | 276 M | 5,797 |
| Ethiopia | ~18 M | 124 M | 14,516 |
| DR Congo | ~15 M | 103 M | 14,563 |
| Kenya | ~20 M | 52 M | 38,462 |
| Philippines | ~13 M | 114 M | 11,404 |
| South Korea | ~9 M | 52 M | 17,308 |
🌍 Top Countries by Evangelical Percen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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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ya – Approximately 45.4% are Evangelical Christians research.lifeway.com+424/7 Wall St.+4위키백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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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ganda – Around 33.2% Evangel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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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 Roughly 26.5% of the population identifies as Evangel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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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eria – About 26% Evangel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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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zil – Around 26.9% (26.8–27%) are Evangelical, according to the latest 2022 cen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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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 Close to 19.2% Evangel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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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iopia – Approximately 18% Evangelical 24/7 Wall 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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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xico – Roughly 10.5% Evangel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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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 About 9.2% Evangelical, meeting mostly in house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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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ines – Around 2.8% Evangelical
결국 복음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 이유는 에고 자체가 회심과 같은 변화를 매우 싫어할 뿐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중독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사람의 생각과 감정의 93% 정도가 과거나 미래에 대한 반복적인 부질없는 생각들과 감정들인 이유는 거의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새로움을 경험하기 힘들게 된다고 한다.
자기 안에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 미워하는 부분은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추구해왔는지, 자신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무엇인지, 자신의 삶과 본성과 인격에서 무심코 부주의했던 에너지는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대면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그림자는 내버리고 싶은 "버린 돌"이지만, 자신의 눈을 가로막던 비늘을 벗겨내고 자신을 새롭게 성찰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자신을 새롭게 세우는 "모퉁이 돌"이 되기도 한다. 로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관상 수련의 초기에 중요한 과제는 우리 자신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과제인데, 자신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관찰하다 보면, 마침내 이처럼 내면의 고요한 인식과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살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해 증오하거나 축하할 필요 없이 자신에 대해 미소를 짓고 한숨을 내쉬고, 울게 되는데, 그 이유는 마침내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특히 악이란 얼마나 미묘하게 선으로 가장하는지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사탄도 빛의 천사의 탈을 쓰고 나타나지 않습니까?"(고린토후서 11:14). 가자지구 학살에서 보듯이 전쟁과 차별, 혐오, 학살에 앞장서는 유대교 시온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독교 국가주의는 애국과 평화의 이름으로 악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자영업자 가운데 폐업한 사람이 100만 명에 이르는 생존 전쟁의 시대다. 경제성장도 1%로 떨어질 것이라 한다. 기후 전쟁과 생태계 파괴는 인류가 봉착한 최대의 생존 위기이지만, 무역전쟁에 덮여버린 상태다.
점점 더 마음이 메마르고 영혼이 핍절해지는 세상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생기를 되찾도록 위로하는 과제가 그만큼 중요할 뿐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위해 도전하는 과제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는 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에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기보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 교인들 사이의 신앙적 갈등 또는 정치경제적 갈등 문제에 몰두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가? 교회가 예수의 정신으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에고중심성이 그토록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에고가 만들어낸 가짜 자기를 추구하느라 진짜 자기를 잊어버린 채 살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Richard Rohr, Enneagram as a tool for spiritual discenrment
리처드 로어 신부는 애니어그램을 은총의 복음과 연결시켜 영적 분별의 도구로 설명한다. 우리의 에고중심성이라는 죄는 너무나 철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주의로 만들며, 프로메테우스의 공적주의로 만든다. 로어 신부는 로마서, 노르위치의 줄리언, 아빌라의 테레사,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그림자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관상의 복음을 설명한다. 우리의 덫이 되는 육신, 가슴, 머리는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왜곡하고 중독에 사로잡히게 만드는지, 우리는 어떻게 그런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로어 신부는 간단히 루터를 언급하지만, 참고로 설명하자면, 루터가 <로마서 주석>에서 밝힌 것처럼, 로마서 1장 17절,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라는 말씀 앞에서 루터는 절망한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 속에 가득하며 그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처벌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의 상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우리의 마음조차 하나님은 꿰뚫어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는데, 복음 속에마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얻을 수 있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이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이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스콜라신학의 능동적/처벌하는 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는 수동적 의라는 것을 발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도대체 왜 평생동안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노예제도를 신학적으로 지지했는가? 또한 도대체 왜 한국의 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이 전광훈, 손현보 같은 사이비 기독교 극우세력에 대한 영적 분별력을 갖지 못한 채 그들의 맹목적 추종자가 되는가?
한국 교회가 매우 빠르게 몰락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회 내적 이유는 무엇인가? 대다수 교회가 모든 생명의 타고난 잠재력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보다 오히려 4영리, 성공과 번영의 복음, 교회 성장 신학에 매몰된 채 기복적이며 보수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창조론과 진화론을 양자택일적인 것으로 믿어 진화론을 배격하며,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고 퀴어들을 축복한 목사들을 출교시키는 등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형태를 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종교란 에고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실재중심성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과정이지만, 흔히 종교가 기복적이며 주술적이 되어 에고를 더욱 팽창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문제를 키우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건 지금은 파국과 소멸의 시대이다. 성서와 신학, 교회의 사명을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재구성할 필요성이 시급하다.
기후 위기가 초래한 여섯 번째 대멸종 사태로 인해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가 진행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창조사역과 구원사역에 참여하는 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모든 생명의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도록 돕는 신성한 과제이다. 모든 생명의 타고난 잠재력을 실현하는 신성한 과제를 가장 앞장서서 방해하는 세력은 예를 들어, 식량 독점과 노예제도, 전 세계적 석유 재벌들과 석유회사들에 엄청난 돈을 대출해주는 대형 은행들처럼, 기후붕괴와 대멸종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의 특권을 재생산하고 영속화하려는 정치경제적 권력이다. 지배계급은 성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을 통해 혐오를 확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해왔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의 일차적인 계획은 고대 세계의 파라오와 카이사르의 지배체제처럼, 지배계급과의 투쟁과 변혁이 하느님의 창조사역과 구원사역의 핵심적 과업이다. 하느님의 그런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목표를 위해 개인적 믿음의 성장뿐 아니라 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관심과 변혁운동이 필수적이다.
하느님의 창조사역과 구원사역의 구체적인 핵심은 모든 생명의 잠재력 실현을 앞장서서 가로막는 권력과 자본의 횡포에 맞서는 일이며, 계급투쟁에서 약자들의 편에 서는 일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계급투쟁에 관해 교회가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 신자유주의 계급투쟁에 노조뿐 아니라 지식인과 교회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낙태 문제, 성소수자 혐오 등 문화전쟁을 부각시켜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데에 돌리게 만드는 전략에 넘어간 때문일 것이다.
에고중심성에서 벗어나 실재중심성으로 변화되는 것이 종교의 본분이기에, 신앙 발달 단계에 따라 목회자들 자신과 신자들의 믿음을 성숙하도록 돕는 일이 미래 교회를 위해 매우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1. 제임스 파울러의 <신앙의 발달 단계, Stages of Faith, 1981>
1) 원초적-미분화된 신앙 (0-2세):
매우 어린 유아기에 해당하며, 신앙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
2) 직관적-투사적 신앙 (3-7세):
직관과 상상이 중요하며, 신앙이 구체적인 이미지와 투사로 표현된다.
3) 신화적-문자적 신앙 (8-12세):
이야기를 통해 신앙을 이해하며, 문자적인 의미에 집중한다.
4) 종합적-관습적 신앙 (청소년기):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따라 신앙을 받아들이고, 집단 속에서 신앙을 경험한다.
5) 개인적-반성적 신앙 (청년기 이후):
신앙을 개인적으로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만의 신앙 체계를 형 성한다.
6) 보편적-통합적 신앙 (중년 이후):
다양한 신앙 경험을 통합하고 초월적 차원을 추구하며,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2. 브라이언 매클라렌의 신앙 발달 단계 (Faith After Doubt: Why Your Beliefs Stopped Working and What to Do About It, 2022)
Simplicity 단계
Complexity 단계
Perflexity 단계
Harmony 단계
3. 리처드 로어의 신앙 발달 단계 (The Wisdom Pattern: Order, Disorder, Reorder, 2001)
Order 단계
Disorder 단계
Reorder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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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으로 가는 하느님
우리의 인생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보편적이며 심지어 영원한 패턴의 한 사례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한생명(One Life)은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우리로서 살아계신다.
이런 깨달음은 뇌에서 일어나는 지진이며, 가슴에서 일어나는 허리케인이며, 정신에서 일어나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며, 의식에서 일어나는 획기적인 변화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상상하기에는 너무 크며, 오직 서서히 드러날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서만 하느님과 분리된 적이 있을 뿐, 결코 하느님과 분리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점차 우주 안에 있는 무수한 생명 형태들이 완벽하게 다양하며 동시에 철저히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삼위일체가 “그 자체와 완벽한 사랑 안에 있는 다양성”으로서 하나(Oneness)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밑으로 가는 하느님”(undergoing God)이며 그 최고의 과업은 모든 실체를 “하나로 엮는 일”(oneing)이다. “하나로 엮는 일”은 내가 노르위치의 줄리안에게서 빌려온 아름다운 말로서, 에고와 정신이 임의적으로 만든 이원론과 분열을 극복하는 과정을 묘사한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등에서 엄청난 짐을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기쁘게 그 일에 참여하기로 동의하는 일이다. 영적인 삶은 어느 특정한 교리에 관해 배우는 것 이상으로 사로잡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앞으로 성결과 온전함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 동기를 부여하며 그 여정을 떠날 계기가 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이미 그곳에 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더 많은 존재를 위한 공간 만들기
진정으로 의식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고립된 자아라고 믿고 무조건 집착하는 강박적 동일시, 그 가장 일반적인 망상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순수한 의식은 결코 나의 자아 내면에서 덫에 걸린 나만이 아니다. 오히려 순수한 의식은 거리를 두고 “나”를 관찰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이 친절하게 제공하신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 관점을 내주하시는 성령이라고 부른다(참조, 로마 8:16).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눈이 아니라 훨씬 큰 눈으로 보게 된다.
우리 대부분이 이런 인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지나가는 생각, 감정, 인지의 강박적 패턴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지만, 적절한 거리를 두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다른 모든 것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 철저한 연결이 성결이다.
영적으로 출발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초연함이 절대로 필요하다. “초연함, 초연함, 초연함”이라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는 말했다. 내려놓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의 작은 자아 속에 더 많은 존재를 위한 공간, 그리고 모든 다름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예수는 자신의 첫 설교의 시작에서 이 요점을 말씀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오 5:3).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는 내려놓는 것, 또는 “가난한 마음”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소비자이며 자본주의자로서 훈련받고 습관을 들인다. 그러나 삼위일체에서처럼, 자기 비움이 먼저 앞서야만 채워짐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관에는 결코 방이 없게 마련이다.
취약함과 능력
우리가 먼저 빈 공간을 만들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비워내는 것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채워진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임을 계시하셨으며, 또한 이 모습으로 만들어진 만물(참조. 창세기 1:26-27)은 이와 똑같은 운동을 계속한다. 다시 말해서, 취약함과 능력은 영원히 교대한다. 그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영역에서 취약함은 상처, 슬픔, 또는 욕망으로 드러난다. 이런 길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채워짐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데, 그분은 어떤 빈 공간이든 항상 들어가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한 초청하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자연이 빈 공간을 싫어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어떤 영적 공간이든 기다리고 계시며 그 안으로 들어가시길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결코 초청받지 않은 공간, 불필요한 공간, 갈망이 없는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으신다. 심지어 마리아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대답한 것도 반드시 필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점차 삼위일체의 패턴을 따라 사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All Mighty)이며 동시에 극히 취약하신 분(All Vulnerable)임을 알게 된다. 이것만 알게 되면 우리는 인간의 모든 상황을 다룰 수 있게 된다. 또한 하느님이 우리의 고난을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그런 고난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고난의 일부분이심을 알게 된다.
공식적 기도가 대부분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시작된 것처럼, 우리는 이제까지 대체로 하느님의 절반만 믿고 있었다. 비록 극히 취약하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분명히 계시되었지만, 인간의 논리와 에고의 저항은 그걸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자비의 강바닥
우리 안에는 오거나 가는 것,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선과 악 모두에 대해 참을성이 있는데, 마치 하느님이 그러신 것과 같다. 그 공간은 서둘러 판단하지도 않고, 지금 당장 끝장낼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공간은 거의 모든 순간에 맞닥뜨리는 비극적 현실에 대해 경계하며 인내한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일 수 있을까?
하느님은 자비의 강바닥이다. 그 강바닥은 우리 인생의 모든 덧없는 잡동사니와 버려진 것의 밑에 있다. 그 강바닥은 무척이나 넓고, 고요하며, 쉴 수 있으며 많은 것의 원천이다. 오고 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내보낸다. 그것은 인식 자체로서, 판단이나 생각하는 것과 반대된다. 그것은 삶의 대부분을 이루는 감정과 생각의 힘겨루기에 말려드는 것을 거부한다. 이처럼 손댈 수 없는 고요함으로부터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공간, 하느님이 매우 넉넉하게 거하시는 공간으로부터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만큼 찬란한 것을 떠올릴 수 없다. 영혼이 하느님의 이미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 장엄한 존귀함과 사랑스러움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 때문에 고통을 겪지만, 전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가 그들에게 공짜로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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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 朱熹, 《觀書有感》 제1수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한글 음독
반 무 방 당 일 감 개
천 광 운 영 공 배 회
문 거 나 득 청 여 허
위 유 원 두 활 수 래
현대어 번역
반 마지기 네모난 연못, 하나의 거울처럼 열려 있고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어른거린다.
어찌 이리도 맑을 수 있는가 물었더니,
그 까닭은 근원에서 살아 있는 물이 흘러오기 때문이다.
해설
이 시는 책을 읽는 데 있어 **끊임없는 사유와 생생한 흐름(活水)**이 중요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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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은 학문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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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은 살아 있는 이해와 끊임없는 사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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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에서 흘러오는 활수(活水)는 진리의 지속적 탐구를 뜻합니다.
주희의 성리학적 세계관, 곧 **리(理)**와 **기(氣)**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