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톰 홀) __ 7
서문 (로이드 기링) __ 13
제1부: 출발점
1장. 하느님과 나 / 21
2장. 의심하는 신앙 / 43
제2부: 스승들로부터 배운 것
3장.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하느님은 경험된다 / 67
4장.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하느님은 투사된 인간성이다 / 83
5장. 카를 융: 하느님은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 / 99
6장. 떼이야르 샤르댕: 하느님은 진화한다 / 115
7장. 존 로빈슨: 하느님에게 솔직히 / 133
제3부: 그런 도전들에 적응하기
8장.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들었는가
9장. 과학과 유대-기독교 전통
10장. 교회 안의 우상숭배
11장. 하느님 없는 윤리
12장.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제4부: 미래에 대한 성찰
13장. 내일의 영성
14장. 생태시대를 위한 영성
참고문헌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인간 실존의 본성에 대해 성찰할 때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지만, 그 내용이나 의미는 우리가 공급해야만 하는 무엇이다.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단어에 부여하는 내용은 가치들과 열망들, 즉 우리에게 도덕적이며 영적인 주장을 하는 것으로 우리가 인정하는 가치들과 열망들, 또는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최고의 가치들과 목표들이다.
사람에 따라서 그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방법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이 집단적 차원에서는 모두 유일신론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똑같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다. 우리가 하느님의 정체성을 결정하기 위해 갖고 있는 유일한 기준은 하느님의 ‘속성들’이다. 이런 속성들은 ‘하느님’이라는 단어의 내용을 이루며, 그런 속성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이 자신들의 조상들을 노예생활로부터 구출하고 이스라엘 땅을 주신 분(the One)이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시다. 무슬림들에게 하느님은 무하마드를 마지막 예언자로 임명하시고 그를 통해 꾸란을 주신 분이시다. 이들 각각의 경우에서 그 속성은 해당 종교의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다른 종교의 속성들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젊어서 포이에르바하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쓴 ≪하느님의 일식≫(The Eclipse of God)이라는 책에서, 현대 이후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과거에 흔히 뜻했던 의미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하느님 개념이 일시적으로 일식 상태에 가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그는 “고상한 노인 사상가”와 만난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다른 대학의 신학생들에게 강연하기 위해 방문해서, 그 유대인 노인과 함께 지냈다. 그 노인은 부버에게 그의 강연 원고를 좀 읽어보라고 요청했다. 그가 읽기를 끝마치자, 그 노인은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계속해서 ‘하느님’을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의 말 가운데 그 말처럼 남용되고, 더렵혀지고, 모독을 받는 말이 또 있는가! 하느님이라는 말 때문에 흘려진 무고한 모든 피들이 그 빛을 빼앗아버렸다네. 그 말을 사용해서 은폐했던 모든 불의가 그 특징들을 모두 지워버렸다네”라고 말했다. 부버는 노인의 자상한 눈빛이 감정과 분노로 불타올랐다고 표현했다. 그들은 한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마침내 부버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단어는 인간의 모든 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의미가 적재된 단어입니다. 그 단어처럼 더럽혀지고 훼손된 단어가 없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 단어를 포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세대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한 삶의 짐을 그 단어 위에 얹어놓았지요. … 그 단어처럼 가장 높은 것을 묘사할 단어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씻어낼 수 없고, 그 단어를 온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더렵혀지고 훼손된 상태이지만, 우리는 그 단어를 땅에서부터 일으켜 세워 잘 돌볼 수는 있습니다.” 노인은 일어서서 부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우리 친구 합시다.” 부버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대화는 끝났다. 두세 사람이 진정으로 함께 하는 곳에는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함께 한다.”
우리가 신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할 건지 말 건지는 이제 각자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모든 어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신앙에 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그 단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오해와 혼돈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버처럼 계속 그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한 단어를 사용해서 신앙인의 신뢰를 가리키고자 한다면, ‘하느님’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용한 단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 단어가 무엇을 담고 있는 말인지를 스스로 밝히는 데서 자유로워야만 한다. 나에게 그 말은 나자렛 예수를 포함해서 고대인들이 뜻했던 것, 또는 중세 사람들이나 오늘날 전통적 유신론자들이 뜻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나는 그 단어가 이 우주를 계획하고 창조했으며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던 어떤 영적인 존재의 이름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내가 이 우주에 관해 배운 것은 이 우주가 어떤 디자인에 의한 것 만큼이나 우연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 자신의 존재와 나의 육신의 독특한 생리학을 이루는 특정 DNA 자체는 특정한 정자와 특정한 난자의 우연한 만남의 결과이다.
이 우주는 놀랍고 신비하기는 하지만, 이 우주 안에 궁극적 의미나 스며있는 목적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우주는 단순히 현재의 모습대로이다. 우리가 여기서 사는 잠시 동안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만 한다.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다. 나에게 ‘하느님’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용한 상징으로서, 내가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의미와 가치들, 내 자신이 열망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느끼는 목표들을 가리키는 유용한 상징이다. 따라서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하느님은 이 세상에 관한 나의 모든 지식, 사랑, 정의, 자비처럼 내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 모든 미덕들을 하나의 단일체 속에 서로 묶어주는 상징이다.” 내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나의 동료 인간들과 더 큰 세상을 신뢰할수록, 나는 인간의 존재가 더욱 가치 있으며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놀랍게도 나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언어의 상당수가 여전히 나에게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이해하는 하느님은 사람들 속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나 자신의 생각 속에서, 모든 생물체들의 신비 속에서, 그리고 별들과 멀리 있는 성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많은 것을 뜻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나의 동료 인간들을 신뢰한다.
나는 세계를 신뢰한다.
나는 ‘삶/생명’에 대해 긍정한다.
나는 새로운 매일을 희망과 신앙 속에 기대한다.










“교육받은 종교 경멸자들”에게 기독교를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중에,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개인적 경험에서 기독교의 기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 일반의 기원도 재발견했다. 전통적인 순서는 과거 오랫동안 그랬을 뿐 아니라 지금도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교리를 믿으면 구원의 경험이 뒤따른다!”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순서를 뒤집어서, “기독교인의 경험에서부터 교리가 등장하며, 이런 방식으로 교리가 원시 기독교에서 생겨났으며, 오늘날에도 이런 순서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그는 교리, 신조, 확증, 그리고 실제로 신학 전체는 살아있는 경험에 뒤따르는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항상 시간, 장소,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종교 경험은 항상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또한 나이에 따라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신앙을 말로 표현한 권위적인 말들은 결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도 없다. 그는 교리적인 획일성(creedal uniformity)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인류에게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비종교적인 것은 없듯이, 종교에서 획일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욱 비기독교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