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는 존 쉘비 스퐁 주교의 25권의 책들 가운데 이제까지 9권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45년 동안 매우 진보적인 성직자로 살아오신 스퐁 주교의 저술들 중에서 특히 성서 해석은 최근의 성서해석학의 획기적인 발전에 근거해서 매우 명쾌한 분석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메시지를 찾는 과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과 나의 신앙(목회)"라는 제목으로 A4 용지 두 장 정도 분량으로 글을 작성해서 댓글로 올려주시는 분들께는 한국기독교연구소가 간행한 책들 가운데 원하시는 책 5권과 앞으로 1년 동안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서적들을 모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8월 31일까지입니다.
이예찬 님 댓글
한국기독교 연구소 이벤트에 참여합니다. 김준우 박사님 좋은 이벤트 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뉴왁 주교로 역임했던 스퐁 주교님의 글을 읽어보길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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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존 쉘비 스퐁 주교(뉴왁 교구)님의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을 최근에 읽어봤다. 국내 번역된 지 지났음에도 스퐁의 악명을 익히 들어 읽기에 부담을 느꼈다. 보통 성공회에서는 톰 라이트, 로완 윌리엄스와 같은 보수로 대표되는 저명한 인사들을 읽는다. 반면에 마커스 보그와 존 쉘비 스퐁이란 진보적인 인물을 읽는 것에 대해 성도들 사이에서 암막리에 싫어하는 분위기다. (최소한 내가 속한 교회에서 그렇다) 필자의 경우 마태복음이 곧 출판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이전 번역작 요한복음을 읽어보기로 했다.
필자는 정경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을 가장 읽기 난감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후대에 저술됐고, 그 내용이 상당히 난해하다. 특히 교조주의의 시작: 니케아 신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공부하는 상기 본인에게 있어서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사상과 맞닿아 있음에도 정경의 권위를 누리는 것이 솔직히 별로였다. 이런 필자의 불온한 생각을 아는 듯, 존 쉘비 스퐁 주교님(이하 저자로 표기)도 자신의 경험담으로 요한복음 주해를 시작했다.
저자의 복음서 해석은 교조주의 색이 짙은 한국에서 매우 낯선 개념이다. 우선 저자가 정의한 “신화 만들기”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시적 상상력은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친숙하다. 엘프와 드워프는 존재하지 않지만 돌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고 영화로 시청하면서 흥분한다. J. K. 롤링의 해리포터처럼 영국에 마법사들이 실제 살지 않지만 그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자라왔다. 앞서 경직된 사고를 대표하는 장로교 신자라 할지라도 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에 대해서 칭찬이 일색이다. 그런 C.S 루이스가 성공회 신자로, 켈트 문화 :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영미문학에 한 획을 그었다. 바로 시적 상상력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소로 “문학자의 감정과 생각을 이입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요한복음에도 시적 상상력, 문학적 장치들이 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국내에서 복음서는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문서로 역사성을 가진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문서라 말한다. PCK(통합) 교단에서는 신조는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로 시작한다. 이처럼 경직된 사고를 가진 집단에서 복음서에 대한 논증은 학계에서만 가능하지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저자는 성공회 주교로 사목 현장에서도 끝없이 “수정주의” 관점을 설명했고, 주교직을 벗어나도 일관된 목소리로 21세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문자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문자주의란 각자의 기준으로 자기만의 근본주의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동정녀로부터 탄생을 어떤 이는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온갖 이론을 가지고 와 논쟁한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보면, 그것은 “신비”라는 언어로 묶어 놓거나, “하나님이 하셨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로만 설명될 수 없다. 신학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의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이 와닿게 될 것이다.
문자주의 극복에 놓인 문제는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놀라운 이적들이다. 저자는 요한복음 제1부에서 요한복음에 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자신이 연구한 관점을 제시한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자들의 문헌이나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영향을 다분히 받은 문서라기보다(물론, 언어는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했지만), 유대 신비주의 영향을 받은 문서라는 것이다. 이는 지혜전승 속에서 찾아가는 은혜로운 여정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진 지혜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긍정성과 세상의 타락을 이해하는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다. 여기에 신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제2부에서 표적들의 책에 다룬다. 기적은 불가능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다. 스퐁 주교는 양축 속에서 참으로 열심히 모험을 한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1) 고대 문서의 허무와 2) 의미 과잉은 광신을 만드는 종교의 참혹상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정주의”가 종교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을 더듬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청룡언월도로 대가리를 댕강 자르는 것이 아닌, 매우 섬세한 메스 칼로 수술하는 생명 살리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 이전에 실제로 나사로가 부활했을까? 그렇다면, 예수 부활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는 실로 부활을 했는가? 그리고 그 부활의 의미는 어떤가? 필자는 이 지점에서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의 <예수의 의미>와 비교하며 읽어본바, 존 쉘비 스퐁은 한 발 더 들어가 “연합”의 의미를 가지고 온다. 예수를 통한 참된 평화를 꿈꾸게 된다.
앞서, 저자의 복음서 읽기를 엿봤다. 그리고 그 감각을 내 신앙에 적용하는 여부를 놓고 고민해보자. 지금 글을 쓰는 필자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는 이미 한 번 교회를 완전히 떠나 불가지론자로 살아봤다. 그 이후에 지금은 매우 독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바로 “믿음의 조항들”이란 질문에 당당히 맞서 대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조항은 구원받기 위해 보험 약정에 싸인 하듯 이뤄지지만, 21세기 현대 지성으로서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영역들이다. 아무리 보험회사가 보험 상품을 팔아야 한다고 해도, 고객을 망하게 하는 상품을 팔아서는 안 된다.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나만 알게 하는 복음은 가짜 복음이다. 그런 신조적 복음은 폭력성이 매우 강하다. 신조 말 그대로 믿음의 고백들처럼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나, 현실 속에서 강제되며 성직/목회자에게 억압 구조로 적용된다. 모든 신조는 시대에 따라 수정 가능하지만, 실제 수정되는 법은 적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머리는 16세기에 살아가는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신조를 넘어서 종교 간의 화합, 집단과 집단의 화합(나라, 이념 등), 개인과 개인의 화합을 이끌기 위해서 신앙인은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바로 “문자주의”다. 문자주의는 매우 고약한 녀석이다. 모두가 저마다 문자주의 하나 가지고 살아간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하나님이 하셨으니 가능하겠지’ 생각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그러나 이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여정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면 상당한 두통과 실제 삶의 자리를 위협까지 받는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않고 존재 근원 속에서 이뤄지는 합리성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종교 단체를 운영하며 폭력의 구조 속에서 타자를 억압하는지 알 수 있다. 바로 문자주의라 불리는 유령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엑소시즘은 바로 그 유령을 물리치는 것이다. 교조주의란 배타성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타자성으로 향해야 한다. 그 타자성은 내가 놓인 삶의 자리를 개혁하겠다는 의지와 주위의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21세기에 살아가는 내가 연구하고 고민하고 질문에 맞서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 “성찰과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21세기 속에서도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허무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언어 : 찬양과 설교 그리고 고백은 너무나도 문자주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시도를 몸소 저자가 보였다. 이제 후배들 그리고 시작할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새로운 여정 흐름: 배타성에서 타자성으로 향한 물결 속에 몸을 맡겨 나가자. 나는 그런 성직자가 되기를 꿈꾸며, 그런 아비로, 그런 남편으로 더 나아가 그런 한 명의 신앙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