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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랍비 조너선 색스
번역자 김준우
출판일 2022-05-09
가격 18000원, 384쪽
ISBN ISBN 978-89-97339-85-3 94230 (세트) ISBN 978-89-97339-86-0 94230
  • 한기연 2022.04.09 07:53 글쓴이

    서문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써넣기



    시반 라하브 메이르 


    시반 라하브 메이르(Sivan Rahav Meir)는 오늘날 이스라엘 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채널 2 뉴스의 골든아워 앵커로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신문 Yediot Aharonot에 칼럼을 쓰며, 매주 Galei Tzahal (Army Radio) 라디오 쇼를 진행한다. 그녀는 종교와 세속 영역 모두에 걸쳐 매우 존경받는 대중적 지성인이며, 소셜미디어에서 오경에 근거하고 가족 중심의 통찰력을 유대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많은 팔로워를 갖고 있다. 매주 오경 읽기 본문에 대한 그녀의 강의는 수천 명이 시청한다.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이 책은 랍비 조너선 색스(1948-2020년)가 선종하신 후 영어로 출판된 첫 번째 책이기 때문에, 당신이 이 책을 손에 들었다면, 이 책을 읽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이 책을 공부하십시오. 다른 누구와 함께 공부하는 게 좋으며, 가장 좋은 것은 다음 세대, 당신의 자녀들이나 손주들 가운데 한 사람, 혹은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젊은이와 함께 공부하는 것입니다. 랍비 색스는 추리소설, 요리책, 정치적 넌픽션 가운데 “또 다른 책”을 읽도록 이 책을 쓴 게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글을 소극적으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읽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우리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열정을 갖고 토론을 통해서, 질문과 대답, 호기심을 갖고, 우리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랍비 색스가 공부하고 가르칠 때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던 것을 누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유다이즘은 기계적인 암기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며, 학생들은 로봇이 되는 게 아니라고 그는 항상 우리에게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이 책은 역사상 우리의 영혼을 가장 사로잡는 이야기로서, 그 이야기 속에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써넣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랍비 색스의 유산은 읽을거리가 아닙니다. 그의 유산은 삶을 변화시키며 현실을 바꾸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들고 그 메시지를 내면화하도록 하십시오. 그 메시지에 동의하든지, 반대하든지 하십시오. 당신의 목표가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놀라운 생각들이 어떻게 나의 삶과 연관되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읽어주고 함께 토론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몇 문단을 읽은 후에 멈추고 당신 자신의 의견은 무엇인지를 숙고하십시오.
    둘째로, 당신이 이 책을 구입한 것으로 랍비 색스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그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을 때 우리는 모두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록 그가 코로나19의 희생자가 되신 것은 아니었지만, 팬데믹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라,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무덤까지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온라인에서는 수천 명이 함께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새로 서가에 꽂는 것으로 그를 기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랍비 색스를 사랑한다면, 그가 떠남으로써 유대인 세계에 만들어진 큰 공백은 채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공백은 우리 자신이 랍비 색스가 되려고 애를 쓸 때만 비로소 채워질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과업은 이 책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길을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가 루바비처 랍비에 대해 말한 것처럼, “그분은 추종자들을 만들기 원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을 만들기 원했습니다.” 랍비 색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복사하거나 인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갖고, 자신을 초월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고 또한 모든 유대인들이 오경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 역시 좋은 책을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유대인들이 무지하다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그는 자신의 삶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비록 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교수, 학자, 성서주석가였지만, 그는 무엇보다 먼저 랍비였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 괴테, 니체의 저작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보다 유대인들의 연속성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 레이디 일레인이 그의 선종 한 달 후에 추모예식을 진행한 방식을 듣고 내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인터넷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찰스 황태자와 캔터베리 대주교 등이 있었지만, 레이디 일레인은 개회사에서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수많은 편지들과 이야기들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남편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이 유대인 교육을 받도록 보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그 모든 명사들의 조사에 앞서서 그녀가 전한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참으로 랍비 색스의 핵심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호화스런 저택에서 왕들과 황태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아이가 한 명이라도 더 조상들의 길을 계속 걷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 * *

    이런 두 가지 “경고”를 함께 나눈 다음에 이 놀라운 책을 즐기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책은 유대인들의 영원한 심장박동, 곧 매주 읽는 오경 본문을 따르는 책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두 가지 본문을 공부할 때, 나는 정확히 내가 이제까지 말한 두 가지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랍비 색스는 안식일 오전에 선종하셨는데, 전 세계 유대인들이 매주 오경 본문 읽기에 따라서 ‘바예라’(Vayera, 창 18:1-22:24) 부분을 읽고 있었습니다. 랍비 색스는 이 본문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교육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였으며, 도대체 왜 그가 선택되었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처럼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되지도 않았으며, 모세처럼 불의에 항거한 인물도 아니었고, 다윗처럼 전쟁 영웅도 아니었으며, 이사야처럼 예언자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바예라’ 부분에는 오직 한 군데, 오경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를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창 18:19). 이 말씀을 요즘 식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마치 “나는 이 친구를 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가? 그는 좋은 선생이다. 좋은 부모다. 좋은 교육자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나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 군대가 아니고, 돈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아니다. 교육이다. 그는 그 불꽃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할 것인지, 그들의 눈동자에 어떻게 똑같은 불꽃을 일으킬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요점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들이 많은 책을 읽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책들과 일치하여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과업에 성공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랍비 색스는 안식일에 선종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길을 계속 걸어가도록,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지키도록 상기시켜 줍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까지 훑어보면서, 창세기의 토대가 되는 부분들,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 레위기의 거룩함과 성전에 관한 주제들, 그리고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떠돌던 이야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랍비 색스는 그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 독창적이며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내가 오경의 마지막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 빛이 사라졌음을 발견했습니다. 랍비 색스는 그가 선종하기 전에 그 마지막 부분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풀어내는 것을 끝마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그의 렌즈를 통해서 잠시 그 부분을 바라봅시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우리는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을 지킨다. 이 율법은 야곱의 자손이 가진 소유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보물이다”(신명기 33:4)라는 구절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삶의 좌우명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줄 최고의 유산은 오경이며, 우리의 정체성이며, 우리의 유산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의 마지막에서, 모세가 그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한 후에,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부 주석가들에 따르면, 오경의 모든 것을 쓴 모세는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인 여호수아가 그의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 오경의 마지막을 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랍비 색스가 우리에게 남겨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 책이 그 마지막 부분에 대한 주석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추종자가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라는 것, 그의 팬이나 방관자가 되지 말고 플레이어가 되라는 뜻입니다. 오경은 우리의 주석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한기연 2022.04.09 07:56 글쓴이

    서론


    시간의 한복판에서 영원을 느끼기





    매주 오경 읽기 본문(parashot)에 관해 해설한 이 책은 영성에 관한 책이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그분이 계신 곳을 찾는 일에 관한 책이다. 어디에서 또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는가? 하나님을 발견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유다이즘은 어떻게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보다 민감하며 관대한 개인이 되도록 돕는가? 유다이즘은 어떻게 우리의 정서생활에 영향을 끼치는가? 그것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어 단지 긴급한 것들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들을 돌보도록 하는가? 우리가 힘겨운 시간에 살아남도록 힘을 주며, 추락과 실패와 상실에도 불구하고 삶을 계속 이어가도록 힘을 주는가? 그것이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고 견디도록 도움을 주며, 에너지를 잃지 않고 존속하도록 도움을 주는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며 용서하도록 가르치는가? 우리를 환희에 이르도록 하는가?
    영성은 ‘종교’와 비록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영성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보다 더욱 큰 무엇에 우리 자신을 개방할 때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영성을 자연, 예술, 음악의 아름다움 속에서 발견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성을 기도, 선행, 또는 성스러운 본문을 공부하는 데서 발견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영성을 타인들을 돕는 데서, 아니면 우정이나 사랑에서 발견한다.
    영성은 우리에게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기 8:3)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생물학적 욕구를 지닌 육체적 존재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희망, 꿈, 두려움, 사랑이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의미를 찾는다. 초월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발견한 것은 깊은 절망 속에서, 그리고 벅찬 환희 속에서였다. 예루살렘의 스코퍼스 산에서 유다 지역 산등성이들을 바라볼 때, 석양에 온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광채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일 때 나는 그분을 발견했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들에 그분은 나를 일어서도록 부축하셨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셨다. 우리 자녀들과 손주들이 태어날 때, 사랑이 새 생명을 낳을 때, 그분을 느낀다. 매주 금요일 저녁 나는 그분이 우리의 안식일 식탁을 영광의 구름으로 에워싸시는 것을 느낀다. 인생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때마다 그분께 힘을 간구한다. 그분이 나에게 원하셨을 무엇인가를 했다고 느낄 때마다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내가 영성에 관해 이 책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내가 만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찾고 있으며, 오늘날 유다이즘에서 항상 영성을 발견하지는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을 찾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이 항상 전통적 의미에서 종교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세속적인, 또는 문화적인 유대인, 혹은 인종적으로 유대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 관해 “그들이 저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출 4:1)라고 하나님께 말한 것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탈무드(Sabbat 97a)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들은 믿는 사람들이며,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이지만, 마지막에는 네가 믿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자신을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모두가 유대 율법의 선생인 것은 아니지만, 영성은 우리의 모든 영혼에 새겨져 있다. 코츠크의 랍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들어오시게 하는 곳마다 들어오신다.
    오늘날 유대인들의 영성에 위기가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슬픈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도취되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시다”(스가랴 4:6)라는 선언이다. 유대인들은 결코 큰 권력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그런 권력은 항상 환상이었다. 힘을 가졌던 적도 없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거대하며 기념비적인 제국들을 건설했다. 유대인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넉넉하게 가졌던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깝게 느꼈다. 유대인들이 이런 느낌을 묘사하기 위한 사용했던 단어에는 감동적인 측면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쉐키나’(Shekhina)라고 불렀는데, 보통 하나님의 임재/현존으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더 뚜렷한 무엇을 뜻한다. ‘쉐키나’는 이웃, 즉 옆집에 사는 사람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느꼈던 하나님의 특성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가장 멀리 있는 갤럭시보다 멀리 계시지만, 우리들 자신보다 더 가깝게 우리 곁에 계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위엄 가운데 보좌에 앉아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부모, 파트너, 이웃, 스승, 친구이시기도 하다.
    오랜 세월 동안 그래왔다. 그러나 여기서 분석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근대의 특정 시점에 이르러 많은 유대인들이 극도로 합리주의자들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물리학, 의학, 사회학, 인류학, 수학, 철학 분야의 개척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근대정신을 형성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상실했는데, 그런 친밀감은 우리 조상들에게 매우 강력해서 그들에게 희망, 용기, 독특성에 대한 인식을 주었다.
    어느 신앙도 하나님을 그토록 가깝게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 우리는 그분과 씨름을 했으며,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질문을 제기했고 따졌으며 도전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분과의 관계는 항상 격동적이었다. 그러나 관계 이하였던 적은 없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마틴 부버가 말한 것처럼, 항상 당신이었지, 그것이 아니었다.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었고, 형이상학적 추상이 아니라 사랑의 원천이었다.
    이 책에서 나는 보통보다 약간 더 개인적인 글쓰기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유다이즘에서 영성은 한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형태가 있다. 오경은 미묘한 방식으로 이것을 알려준다.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언약)에 동의했는지를 세 차례 읽게 되는데, 처음 두 번과 세 번째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모든 백성이 다 함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naaseh].” (출 19:8)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과 법규를 모두 전하니,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우리가 행하겠습니다[naaseh].” (24:3)

    그리고 그가 ‘언약의 책’을 들고 백성에게 낭독하니, 그들은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실천하고 또한 듣겠습니다[naaseh venishma].” (24:7)

    처음 두 구절에서는 단지 행동(naaseh)만 언급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백성들은 “함께” 대답하고, “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나 세 번째 구절에서는 행동뿐 아니라 듣는 것(nishma)도 언급하는데, 이 구절에서만 그렇다. 여기서 “듣는 것”은 귀를 기울임, 주목함, 이해, 응답 등 많은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해서, 이것은 유다이즘의 영적 차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유다이즘의 특별하며 독특한 특징은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고 느끼기보다는 행동하는 공동체라는 점이다. 유대인 율법규정은 권위적이다. 그것이 할라카, 즉 유대인들의 행동방식에 관한 문제가 되면, 우리는 합의를 찾는다. 그러나 마이모니데스(1135-1204)가 그의 ≪미슈나 주석≫ 예를 들어, Commentary to Mishna, Sanhedrin 10:3를 보라.
    에서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유다이즘의 할라카 이외의 측면들에서는 권위적인 규칙이 없다. 우리들 각자는 유다이즘을 나름대로 이해하는 방식이 있으며, 하나님께 이르는 각자 나름의 길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제사장의 방식이 있고, 예언자의 방식이 있다. 유다이즘에는 우리의 시인들, 철학자들, 합리주의자들, 신비가들이 있다. 하시디즘은 기쁨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은 공부하는 중에 하나님을 발견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환상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기도 중에 발견했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분의 현존을 인지했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았고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영성의 책은 시편으로서, 유대인 영혼의 사전이다.
    우리 모두는 자아가 떠들썩하게 요구하는 것들을 침묵시킬 시간이 필요하며, 창조세계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내면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오늘날처럼 깊이 상처가 난 세상에서 그 상처들 가운데 한 부분을 고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 오경의 아름다움은 우리 민족의 과거 영웅들을 완벽한 전형들이 아니라 인간들, 하나님과 씨름하고 그분이 우리와 씨름하시는 인간들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적 존재들이다. 우리는 단지 유전자들의 우발적 변이들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유전자들을 복제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단지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들, 또는 쾌락만 추구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삶에서 의미를 찾으며, 일상적 행동들에 거룩한 카리스마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정신이 솟구친다. 이런 점에서 우리보다 먼저 위대한 삶을 살았던 조상들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거룩한 문서에 기록되어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비범한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이, 우리들 안에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들 너머에 계신 분에게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이 말씀은 2100년 전의 믿음의 음성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참된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힘보다 영적인 힘이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생명이 성스럽다는 것, 재물, 권력, 성공, 명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행복에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비록 인생은 짧지만 우리로 하여금 복된 순간들에, 시간의 한복판에서 영원을 느끼게 할 변혁적 환희의 힘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영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수록된 주석들이 갖고 있는 매우 개인적 성격의 글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현존에 나아가는 각자 나름의 길을 발견하도록 돕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소음 아래를 흐르는 음악 속에, 떠들썩함 밑에서 속삭이는 부르심 속에, 인간의 영혼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속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 한기연 2022.04.09 07:59 글쓴이

    듣기의 기술
    Bereshit




    인간이 저지른 첫 번째 죄는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무엇이었는가? 이런 종류의 지식이 그토록 나쁜 것이라서 금지해야만 했으며, 또한 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었는가? 선과 악의 차이를 아는 것은 인간이 되는 데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그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지식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지식을 갖기를 원하셨을 것 아닌가?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금지하셨는가?
    어쨌든 간에, 아담과 하와는 정확히 “하나님의 형상과 닮음”으로 지어진 존재인 덕분에, 그 열매를 먹기 전에 이미 그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는가? 분명히 이것이 함축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열매를 맺고 번창하라, 자연을 다스리라,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실에 있다. 사람이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일이며 불순종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선과 악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런 질문들은 너무 깊이 파고드는 질문들이라 그 전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 정도다.
    마이모니데스(1135-1204)는 이런 점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의 거의 시작 부분에서 이 선악과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의 대답은 당혹스럽다. 그는 처음 인간들이 그 열매를 먹기 전부터 진실과 거짓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얻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었다. Maimonides, Guide for the Perplexed, I:2.
    그러나 마이모니데스가 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란 무엇인가? 살인은 악하며 정직은 선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마이모니데스는 도덕이 단순히 인습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그가 뜻한 것은 그 열매를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점에 당황했으며, 이것이 단지 사회적 관습의 문제인 이유는 벌거벗었다고 모두가 당황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벌거벗었다고 당황해하는 것을 어떻게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종류의 문제는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옷과 관련된 관습은 윤리보다는 미학과 더 관련된다.
    선악과 이야기는 나에게 매우 불분명했었다. 그러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역사의 매우 흥미로운 순간들 가운데 하나와 마주치게 되었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인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할 때라는 것을 알았지만,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20세기의 위대한 인류학자 중 한 사람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들에 대해 설명해줄 것을 의뢰했고 그녀는 그 과제를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국화와 칼≫ Ruth Benedict,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Boston: Houghton Mifflin Harcourt, 1946), 박규태 역, ≪국화와 칼≫, 문예출판사, 2008.
    을 통해 발표했다. 그녀의 핵심적 통찰 가운데 하나는 수치심의 문화와 죄의식의 문화 사이의 차이였다. 수치심의 문화에서 최고의 가치는 명예다.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의로움이다. 수치심은 타인들이 우리에 대한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이다. 죄의식은 우리 자신의 양심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살아내지 못할 때 느끼는 것이다. 수치심은 타인 지향적이다. 죄의식은 내면 지향적이다.
    버나드 윌리엄스를 포함해서 철학자들은 수치심의 문화가 보통 시각적이라고 지적했다. 수치심 자체는 우리가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또는 우리가 어떻게 보인다고 상상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다. 수치심에 대한 본능적 반작용은 우리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 또는 우리가 다른 곳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죄의식은 훨씬 더 내면적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서, 또는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란다고 해서 죄의식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따라 오며, 우리가 남들에게 보이든 안 보이든 상관없이 따라온다. 죄의식의 문화는 눈의 문화(culture of the eye)가 아니라 귀의 문화(culture of the ear)다.
    이런 대조를 유념하면, 우리는 이제 첫 번째 죄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온통 외면, 수치심, 시각, 눈에 관한 것이다. 뱀은 여자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 3:5)라고 했다. 사실상 실제로 벌어진 일은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았다”(7절)이다. 오경이 강조하는 그 나무의 모습은 겉모습으로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6절)였다. 이 이야기의 핵심적 감정은 수치심이다. 그 열매를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 열매를 먹은 후 그들은 수치심을 느꼈고, 숨으려고 했다. 이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 즉 열매, 나무, 알몸, 부끄러움은 수치심의 문화에 전형적인 시각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러나 유다이즘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귀에 들리는 하나님이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담과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3:8). 하나님에게 아담은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3:10)라고 대답한다. 아담과 그 아내의 의도와 심지어 그들이 행동한 우스운 아이러니를 주목하라. 그들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들은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3:8). 우리는 음성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 숨는다는 것은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치심에 대한 즉각적이며 직관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오경은 수치심의 문화가 아니라, 죄의식의 문화의 가장 탁월한 본보기이며, 우리는 숨는다고 해서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죄의식은 남의 눈에 띄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온통 양심, 즉 인간의 가슴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관련된 것이다.
    에덴동산의 처음 사람들의 죄는 그들이 귀가 아니라 눈을 따른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본 것에 의해 결정되었다. 즉 그 나무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했지, 그들이 들은 것, 즉 그것을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그들이 실제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얻었지만, 그것은 잘못된 종류였다. 그들이 얻은 것은 수치심의 윤리였지 죄의식의 윤리가 아니었고, 남들의 눈에 드러나는 것의 윤리였지 양심의 윤리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마이모니데스가 말한 참과 거짓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차이였다고 믿는다. 죄의식의 윤리는 내면의 음성에 관한 것, 즉 우리에게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내면의 음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수치심의 윤리는 사회적 관습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남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키는가, 아니면 충족시키지 못하는가의 문제다.
    수치심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순응의 규칙이다. 그런 문화에 속한 집단은 그 집단의 가치들을 내면화시키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가치들을 위반할 때 극심한 당혹감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한 행동을 발견하면 우리가 명예와 체면을 잃게 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유다이즘은 그런 종류의 도덕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 모두가 순응하는 것에 순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상 전체가 한 편에 설 때, 아브라함은 기꺼이 다른 편에 서려고 했다. 하만은 유대인들에 관해 “그들의 법은 다른 어떤 백성들의 법과도 다릅니다”(에스더기 3:8)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종종 우상타파주의자들이어서, 그 시대의 우상들, 받아들여지던 지혜, “시대정신,” 정치적으로 옳은 것에 도전했다.
    유대인들이 만일 대다수를 따랐다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성서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세상에서 유일한 유일신 신봉자들이었다. 성서 이후 시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에도 그들이 살았던 사회는 인구의 극소수만 그들의 믿음을 공유한 사회였다. 유다이즘은 떼거리 본능에 맞서는 살아있는 저항이다. 우리는 인류의 대화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다. 유다이즘의 윤리는 외면, 명예, 수치심의 윤리가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를 기울이는 윤리다.
    아담과 하와의 드라마는 비유대인들이 해석해왔던 것처럼 “타락”이나 원죄, 사과나 섹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도록 요청받는 도덕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도덕에 지배당할 것인가? 마치 도덕이 정치인 것처럼, 대다수의 의지에 지배당할 것인가? 우리 감정의 지평이 명예와 수치심이라는 두 가지 뿌리 깊은 사회적 감정에 국한될 것인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남들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것,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직면했던 것은 인간의 원형적 선택, 즉 그들의 눈이 본 것(선악과나무와 그 열매)과 그들의 귀가 들은 것(하나님의 명령)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다. 죄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한 형태이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잘못된 형태다.
    유다이즘은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이즘에 시각적 요소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있다. 그러나 일차적인 것이 아니다. 듣는 것은 성스러운 과제다. 유다이즘에서 가장 유명한 명령은 “들어라 이스라엘아”(Shema Yisrael)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달랐던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성서의 극적인 장면들 가운데 하나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가르치시는데, 회오리바람이나 지진, 또는 불 속에서가 아니라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로 가르치신다(왕상 19:12).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든지, 아니면 동료 인간에게 귀를 기울이든지 간에,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 속에 침묵을 창조할 능력과 훈련, 집중을 필요로 한다. 보는 것은 우리에게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듣는 것은 우리를 다른 사람의 영혼에 연결시켜주며,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세상에서 우리의 과업을 위해 우리를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영혼에도 연결시켜준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귀 기울이기를 배우라. 우주의 노래들, 곧 새들의 지저귐, 나무들의 바삭거림, 파도가 솟구쳐 올라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기도의 노래, 시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라.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깊이 귀를 기울이라. 오경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이 당신에게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라. 현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성서 본문들이 암시하는 것과 표현을 달리 한 것들을 들으려고 수고하면서 논쟁한 것들에 귀를 기울이라.
    당신이나 아니면 남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 남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가면, 위장, 은폐의 거짓된 세계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영혼과 영혼, 자아와 타인, 나와 하나님 사이의 심연에 다리를 놓는다.
    유대인 영성은 귀를 기울이는 기술이다. 유다이즘에서 귀 기울이기 주제를 더 보려면, 이 책에서 “침묵의 소리”와 “귀를 기울이기의 영성”을 보라.

  • 한기연 2022.04.09 08:00 글쓴이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갈 용기
    Noaḥ




    우리들 각자에게는 영적 여정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새로운 길을 걷게 만든 이정표가 있다. 나에게는 그런 순간 가운데 하나가 내가 유대인 대학에서 랍비 학생이었을 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랍비 학자 가운데 한 분인 랍비 나쿰 라비노비취(1928-2020) 박사님과 공부하는 특전을 갖게 되었을 때였다.
    그분은 거인이셨다. 근대 시대의 가장 심오한 마이모니데스 학파의 학자들 가운데 한 분으로서, 랍비 문헌 전체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세속 학문에도 정통하셨고, 그분이 발표하신 여러 권의 유대인 종교법 서적들이 보여주듯이 가장 담대하고 독립적인 율법 권위자셨다. 그분은 또한 영적이며 지적인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귀한 것임이 드러났다.
    그 기회가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분이 단지 우리에게 오경 주석을 가르치시던 때였다. 그 주간의 읽기 본문은 노아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인용하신 미드라쉬는 우리에게 비범한 것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찾기 매우 힘든 것이다. 그것은 1885년에 마틴 부버의 손자 슐로모가 고대 필사본에서 인용해서 발표한 ≪부버의 탄후마≫(Buber’s Tanḥuma)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은 매우 초기의 본문―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5세기의 본문이라고 말한다―이며, 오늘날 우리가 완전한 본문을 갖고 있지 않은 고대 미드라쉬 ≪미드라쉬 옐람데누≫(Midrash Yelamdenu)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 본문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와라”(창 8:16) 하고 말씀하신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 이 본문에 대해 그 미드라쉬는 이렇게 말한다.

    노아는 스스로 묻기를, “내가 방주에 들어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들어갔으니까 허락 없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복되신 거룩하신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허락을 구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허락한다. ‘방주에서 나와라.’”

    그리고 그 미드라쉬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한다. “랍비 유다 바 일라이는 ‘만일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방주[의 문]를 깨부수고 나왔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미드라쉬는 이 본문이 오경에서 동사 D-B-R(to speak)가 처음 사용된 구절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동사 어근 A-M-R(to say)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D-B-R은 보통 심하게, 비난조로 말하는 것을 함축한다. 이븐 에즈라 역시 그 본문에서 노아가 방주를 떠나는 데 주저했다고 이해한다.

    도덕적인 랍비 라비노비취는 이 미드라쉬에 근거해서, 우리가 깨어진 세상을 재건할 때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에게 그 일을 허락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앞서 나가기를 기대하신다.
    이것은 물론 고대 전통의 일부분으로서 라쉬(1040-1105)가 그의 주석(창 6:9)에서 언급한 것이며, 하나님이 도대체 왜 유대 민족을 노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셨는지에 대한 그 현자의 이해에서 핵심적인 이유였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창 6:9).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나보다 앞서 가라(Walk on ahead of me)”(창 17:1)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 요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미드라쉬의 드라마와 힘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이것이 유다이즘에서 믿음의 중요한 부분임을 파악했다. 믿음은 개척할 용기를 갖는 것, 새로운 무엇을 할 용기, 남들이 별로 걷지 않는 길을 걸어갈 용기, 알지 못하는 것 속으로 감히 나아갈 용기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들의 땅, 고향,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가졌던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시대에 광야로 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할 때 가졌던 믿음이었고,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만 받았다.
    믿음은 정확히 말해서 위험을 무릅쓸 용기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 23:4)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고대세계의 종교들, 특히 그 종교들이 당시의 강력한 제국들과 한 몸을 이루던 때에 그 종교들에 도전한 것이 믿음이었다. 헬레니즘 시대, 즉 고대 그리스와 알렉산더 제국의 코스모폴리탄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들이 왜소하고 촌스럽게 보였을 때에도 계속 유대인으로 머문 것이 믿음이었다.
    믿음을 갖고 랍비 예호슈아 벤 감라는 이미 1세기에 세계 최초로 보편적인 의무교육 체제를 세웠고(Bava Batra 21a), 또한 라반 요하난 벤 자카이의 믿음은 유대인들이 독립, 땅, 성전을 잃은 상태에서 유다이즘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학자들의 아카데미와 학문의 문화뿐이었음을 깨닫게 했다.
    근대에는 비록 많은 탁월한 유대인들이 믿음을 상실하거나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반사능력(reflex)은 살아남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유럽과 미국에서 소수의 무리가 그렇게 많이 근대정신을 형성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그들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개척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물리학의 아인슈타인, 사회학의 뒤르껭, 인류학의 레비스트로스, 음악의 말러와 쉔베르크, 그리고 혁신적 경제학의 데이비드 리카르도(비교우위이론), 존 폰 뉴만(게임이론), 밀턴 프리드만(화폐이론), 다니엘 카네만과 아모스 트버스키(행동경제학) 등등이다.
    그들은 정신의학, 심리치료, 정신분석 분야에서도 뛰어나서, 프로이트로부터 빅터 프랭클(의미치료), 아론 벡(인지행동치료), 마틴 셀리그만(긍정심리학)에 이르기까지 개척자들이었다. 할리우드와 영화의 개척자들은 거의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심지어 대중음악에서의 성취는 놀라운데 어빙 벌린과 조지 거쉰뿐 아니라, 밥 딜런과 레오나르드 코헨은 20세기 대중음악의 최고의 시인들이었다.
    이런 혁신가들의 운명은 많은 경우에 비판, 멸시, 반대, 무시라는 장애물에 직면해야 했다. 외로움, 기껏해야 오해를 받고, 최악의 경우에는 욕을 먹고 중상을 겪게 될 것에 대비를 해야만 한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만일 나의 상대성이론이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독일은 나를 독일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며, 프랑스는 나를 세계의 시민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나의 이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면, 프랑스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며, 독일은 내가 유대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개척자가 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역사를 통해 경험한 것처럼, 광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초기 시온주의자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어떤 이들은 1860년대부터, 다른 이들은 1880년대의 유대인 학살 이후부터, 드레퓌스 재판 이후부터, 유럽의 계몽주의와 해방은 엄청난 과학적 및 정치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유럽 본토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을 위한 장소가 없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부 시온주의자들은 종교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점은 그들 모두 ≪미드라쉬 탄후마≫가 그처럼 분명히 밝힌 것, 즉 깨어진 세상이나 깨어진 꿈을 재건할 때는 우리가 하늘로부터 허락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은 우리에게 앞서 나가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백지수표는 아니다. 모든 혁신이 건설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혁신은 사실상 매우 파괴적이다. 그러나 “앞서 걸어라”는 이 원칙, 창조주가 그분의 가장 위대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창조적이 되라는 원칙이라는 것은 유다이즘이 인간 개인과 인간 조건에 높은 가치를 둔다는 점에서 유다이즘을 독특한 것으로 만든다.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서나 사람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쓸 용기다. 먼 길을 떠나면서 가는 도중에 위험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맞추면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그 여정을 시작하는 용기다. 믿음은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갈 용기다.

  • 한기연 2022.04.13 05:45 글쓴이

    틀을 새로 짜기
    Vayigash




    마이모니데스는 이상적인 인간, 즉 현자(rofe nefashot)를 “영혼의 치유자”라고 불렀다. Maimonides, Shemona Perakim, ch. 4.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사람을 심리치료사(psycho- therapist)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영혼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쉬케’(psyche)와 치유를 뜻하는 ‘테라페이아’(therapeia)를 결합한 말이다. 근대에 영혼 치유를 개척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초창기 정신분석학자들 거의 모두가 유대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아들러, 오토 랑크, 멜라니 클라인이 포함된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았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는 정신분석학이 “유대인 학문”이라고 알려졌다. 보다 최근에는 솔로몬 아쉬(순응성), 로렌스 콜버그(발달심리학), 브루노 베텔하임(아동심리학)이 기여했다. 레온 페스팅거(인지부조화), 하워드 가드너(다종지능), 피터 살로베이와 다니엘 골만(정서지능), 아브라함 매슬로(동기에 대한 새로운 통찰), 월터 미쉘(“마쉬멜로우 검사”를 통한 자기통제), 대니얼 카너먼와 아모스 트버스키(행동경제학)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보다 최근에는 조너선 하이트와 조수아 그린이 도덕 정서들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개척했다. 이런 목록은 계속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는 빅터 프랭클, 아론 벡, 마틴 셀리그만이 이룩한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의미를 찾는 것에 근거하여 의미치료(logotherapy)라고 알려진 방법을 창안했다. 아론 벡은 가장 성공적인 치료 형태인 인지행동치료의 공동 창시자였다. 마틴 셀리그만은 긍정심리학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심리학이 단지 우울증의 치료 수단뿐 아니라 낙관주의를 배워 행복을 성취하거나 번창하는 수단이라는 점도 뜻한다.
    이런 것들은 서로 매우 다른 접근방법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면 우리가 느끼는 방법도 변화시킨다는 믿음에 근거해 있다. 이 믿음은 매우 초기에 카바드 하시디즘에서, 리아디의 랍비 슈네우르 잘만의 ≪타냐≫(Tanya)에 제시된 믿음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인간 정신에 대한 다른 이론들과는 매우 대조되었던 혁명적 주장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성격이 유전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정서 생활이 초기 아동기의 경험과 무의식적 욕구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반 파블로프를 비롯한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행동이 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런 모든 이론들에서는 우리의 내적인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된다. 우리가 누구이며, 또한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주로 의식적인 정신 이외의 다른 요인들에 의해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은 빅터 프랭클이었다. 그는 인간이 겪었던 최악의 조건인 아우슈비츠에서 그 길을 보여주었다.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상태에서, 프랭클은 나치가 인간이게 만드는 거의 모든 것, 즉 소유, 의복, 두발, 이름까지 빼앗아갔다는 걸 발견했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전에 프랭클은 자살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전문가였다. 수용소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동료 수용자들에게 살려는 의지를 주었다. 사람들이 그 의지를 잃어버리면 조만간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근본적인 통찰을 발견했으며, 나중에 그는 이것으로 유명해졌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지냈던 사람들은 그 막사들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마지막 빵조각을 나눠주던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다.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하나만은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것, 즉 어떤 상황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고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빼앗아갈 수는 없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한다. Victor Frankl, 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translated by Ilse Lasch (Boston: Beacon Press, 1992). 이시형 역, ≪삶의 의미를 찾아서≫(청아출판사, 2017).


    차이를 만드는 것,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주는 것은 자신들에게 수행할 과제가 있다는 믿음, 성취할 사명이 있다는 믿음, 자신들이 아직 끝내지 않았으며 미래에 끝내기를 기다리는 사명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프랭클은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는 실제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Ibid., 85.
    는 것을 발견했다. 수용소 안에는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더 이상 인생에서 기대할 것이 없던 사람들이 있었다. 프랭클은 그들로 하여금 “삶은 여전히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외국에 살고 있는 자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책들을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미래가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프랭클은 그들로 하여금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조차 삶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
    이런 정신적 변화는, 특히 인지행동치료에서 틀을 새로 짜기(re- framing)라고 알려진 것과 관련된다. 그림을 다른 틀 속에 넣으면 다르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럴 수 있다. 사실들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는 방법은 변한다. 프랭클은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것은 매일 자신이 대학에 있는 것처럼, 수용소 안에서 심리학을 강의했던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일어나고 있었던 모든 것이 이처럼 마음의 행동 하나로 인해 변화되었다. 그가 강의에서 강조했던 요점들을 보여주는 사례들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그 상황 위로, 그 순간의 고난들 위로 올라서서, 그 상황이 마치 과거의 상황인 것처럼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Ibid., 82.
    틀을 새로 짜는 것은 우리에게 비록 우리가 처한 상황들을 항상 바꿀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상황들을 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데, 이것 자체가 우리가 느끼는 방법을 바꿔준다.
    그러나 이 현대적 발견은 실제로 재발견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첫 번째로 틀을 새로 짠 가장 위대한 사람은, 이번 주 본문과 다음 주 본문에 묘사된 것처럼, 요셉이었다. 사실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다. 그는 13년 동안 자유를 잃었으며, 22년 동안이나 가족들과 헤어져 지내야 했다. 그가 형들에 대해 원한을 갖고 복수할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감정을 털고 일어났는데, 정확히 자신의 경험들을 새로운 틀 속에 넣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형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때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 하나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셔서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창 45:4-8)

    나중에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그 형들이 복수당할 것을 두려워할 때,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 싶습니까?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50:19-21)

    요셉은 자신의 과거 전체를 새로운 틀로 짰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형들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필요했던 것은 그가 자신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목적은 그 지역 전체가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림으로부터 구하고, 또한 그의 가족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틀을 짜는 단 하나의 행동을 통해서 요셉은 분노와 불의에 대한 격한 감정 없이 살 수 있었다. 그것은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부정적 에너지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관심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바꾸어주었다. 요셉은 미처 알지 못한 채, 근대세계의 심리치료에서의 위대한 운동 가운데 하나의 선배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틀 짜기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과거에 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그것을 새로운 틀 속에 넣음으로써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 전체를 바꿀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살아남을 힘을 주며, 끈질기게 존속할 용기를 주며, 그리고 어둠의 반대편에서 새롭고 보다 나은 날의 빛 속으로 다시 솟아날 회복력을 준다.

  • 한기연 2022.04.22 09:45 글쓴이

    두 종류의 두려움
    Shelaḥ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가장 강력한 강의 가운데 하나는 루바비치의 의인 랍비 므나헴 멘델 슈니어슨이 이번 주 오경 읽기 본문에 나오는 첩자들의 이야기에 관해 강의한 것이었다. 나에게 그 강의는 삶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그는 명백한 질문들을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열 명의 첩자들이 사기를 저하시키는 패배주의적인 보고를 갖고 돌아올 수 있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그곳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강하며, 그 도시들은 잘 요새화되었고, 그들은 거인들인 반면에 우리는 메뚜기들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었는가?
    그 첩자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집트에 재앙들을 내리셨는지, 어떻게 고대세계의 가장 막강하고 가장 오래 지속된 제국을 무릎 꿇게 하셨는지를 보았다. 그들은 이집트 군대의 최신 무기들, 말이 끄는 전차들이 홍해에 빠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맨 땅을 걸어서 홍해를 건넌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이집트는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데서 맞서야만 할 작은 왕국들보다 훨씬 막강했다. 이것은 옛날의 기억이 아니었다. 고작 1년 전에 벌어졌던 일들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땅의 백성들이, 메뚜기들에 맞서는 거인들과는 딴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 민족이 두려워서 떱니다.
    블레셋 주민이 겁에 질려 있습니다.
    에돔의 지도자들이 놀라고,
    모압의 권력자들도 무서워서 떨며,
    가나안의 모든 주민도 낙담합니다.
    그들이 모두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 주의 권능의 팔 때문에 … 그들은 돌처럼 잠잠하였습니다.
    (출 15:14-16)

    가나안 땅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왜 그 첩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는가?
    더군다나 그 첩자들은 백성들 가운데서 임의로 뽑은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그 랍비는 이어갔다. 오경은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 자손의 우두머리들이었다”(민 13:3)고 말한다.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다.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힐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은 직설적이지만, 그 랍비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첩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했던 게 아니라, 성공을 두려워했다는 게 그 랍비의 대답이었다.
    백성들의 당시 상황은 어땠는가?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주는 만나를 먹고 지냈다. 기적적인 샘물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영광의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성소를 중심으로 진을 쳤다. 그들은 ‘쉐키나’(Shekhina)와 계속해서 접촉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서 살았던 적은 없었다.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면 그들의 상황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전투를 치러야 할 것이며, 군대를 유지하고, 경제를 창조하고, 땅을 경작하고, 곡식을 생산하기에 충분한 비가 내릴 것인지 염려하게 될 것이며, 그 세상에서 사느라 정신을 분산시켜야 할 것들이 수천 가지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렇게 가깝던 상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세상의 물질적 추구에 사로잡힐 것이다. 여기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광채 가운데서 오경을 배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들어가면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한 민족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다루어야만 하는 똑같은 경제, 사회, 정치 문제들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 첩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공(가나안 진입 성공)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실수는 모든 거룩한 사람들의 실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가능한 한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기를 원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은, 하시디즘의 표현으로, “더 아래 세상에서 거처”를 찾으신다는 점이다. 유다이즘과 다른 종교들 사이의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종교들이 사람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을 추구한다면, 유다이즘은 하늘을 땅으로 가지고 내려오는 일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오경의 많은 부분은 전혀 종교적이라 볼 수 없는 것에 관한 것들이다. 즉 노동관계, 농업, 복지제도, 융자와 빚, 토지소유권 등에 관한 것이다. 광야나 수도원 피정, 또는 아슈람에서는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갖는 것이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종교들에는 일상생활의 긴장과 피로에서 멀리 떨어진 채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과 거룩한 장소가 있다. 유대인 종파들 가운데도 사해두루마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쿰란 종파 등이 그런 집단이었다. 여기에는 전혀 이상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의 사명, 유대인의 프로젝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델 사회를 창조하기를 원하셨다. 즉 인간이 노예취급을 당하지 않고, 통치자들을 마치 신처럼 숭배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아무도 극빈상태에 처하지 않고, 아무도 고립되게 방치되지 않고, 아무도 법 위에 있지 않고, 삶의 어느 영역도 도덕과 무관한 영역이 없는 모델 사회를 창조하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사회를 필요로 하며, 사회는 땅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경제, 군대, 들판과 가축, 노동, 기업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것이 유다이즘에서는 ‘쉐키나’를 우리의 집단생활의 공유한 공간 속에 모셔 들이는 방법들이 되었다.
    그 첩자들은 성공을 두려워했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의 실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그것이 유대인 역사 2천 년에서 가장 큰 사건, 즉 유대인들이 다시 그 땅으로 귀환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세운 사건이 주는 영적인 도전이다. 아마도 시온주의자들의 그토록 많은 꿈들과 동반된 정치적 운동들은 역사상 없었을 것이며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예언자적 비전의 성취였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자기들 손으로 결정하게 된 민족의 세속적 성취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톨스토이처럼 그 땅과 연계된 것으로 보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니체 식의 의지와 권력의 주장으로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유럽의 반셈족주의로부터의 피난으로 보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메시아적인 구원이 처음 꽃피운 것으로 보았다. 모든 시온주의 사상가들은 유토피아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갖고 있었고, 상당한 정도까지 그 모든 비전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항상 보다 단순하고 보다 기본적인 무엇이었다.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의 4천 년에 이르는 역사에서 비극과 승리 사이의 거의 모든 운명과 상황을 알았으며, 지상의 거의 모든 땅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자신들이 부름받은 것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 있었다. 즉 자신들의 사회를 자신들의 가장 높은 이상에 따라 건설하는 것, 자신들의 이웃 사회와는 다른 사회로서, 사회, 경제, 교육체제, 복지 행정이 하나님의 현존을 이 땅 위에 가지고 내려올 수 있는 도구가 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이 부름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광야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이 손으로 노동해서 먹지 않고,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대신 싸우시는 것에 의존한다면 말이다. 그 랍비에 따르면, 열 명의 첩자들은 그런 생활방식을 영원히 살게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그 랍비는 주장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과 씨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병자를 치유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법의 모든 능력으로 불의와 싸우고, 보편적 교육을 통해 무지와 싸우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이웃과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랍비 아키바의 말처럼,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인간은 사랑스럽다”(Mishna Avot 3:14).
    유대인 영성은 삶 자체의 한복판에서, 사회생활과 그 제도들 한복판에서 살아간다.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두 종류의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실패의 두려움과 성공의 두려움이다. 실패의 두려움은 일반적이다. 성공의 두려움은 드물지만, 마찬가지로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그 둘 모두 위험을 무릅쓰기를 주저하기 때문에 생긴다. 믿음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믿음은 확실성이 아니다. 믿음은 불확실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보다 앞서 가라” (Walk on ahead of me, 창 17:1)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능력이다.
    그 랍비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았다. 그는 세상에서 유대인들이 사는 거의 모든 곳에 책임자들을 보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유대인의 생활을 변혁시켰다. 그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위험을 무릅쓸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점에서 도전적인 장소들에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랍비는 그들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유대인들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즉 유대인들이 서야만 하는 장소는 공개적인 광장이며 거기에서 우리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매우 실제적인 방식들로 우리의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광야를 떠나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모든 시험과 유혹에 맞선다는 것은 큰 도전이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기를 원하시는 장소이며, 그분의 영을 우리의 경제운영 방식, 복지체제, 사법체제, 건강서비스, 군대에 가져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또한 세상의 상처난 부분을 치유하고, 흔히 어둠 속에 감추어진 장소들에 하나님의 작은 빛을 가져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 한기연 2022.04.23 08:37 글쓴이

    역자주: 홀로코스트가 “칸트, 헤겔, 바흐, 베토벤, 괴테, 쉴러”의 나라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은 인간을 인도적인 존재로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랍비 조너선 색스는 히브리성서가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며 세상을 바꾼 사상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과 안식일 개념이라고 밝힌다. 가톨릭 역사가들(Paul Johnson, Thomas Cahill, William Rees-Mogg)뿐 아니라, 유다이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이자 유대-기독교 윤리의 폐기를 주장한 프리드리히 니체를 인용하면서, 인류가 “철저한 논리적 사고”와 “엄격한 추론”을 배운 것은 유대인들로부터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기원전 1세기부터 힐렐 학파(율법 준수에서 관용적 입장)와 샴마이 학파(율법 준수에서 극단파)의 완전한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반대 입장부터 철저히 배우고 토론해왔던 결과다. 저자는 특히 하나님이 천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지상의 생명을 파괴할 능력을 지닌”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얼마나 큰 모험이었는지를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 창조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고 계셨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즉 “오경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책이다. 하나님은 우주 창조에는 단지 34개 구절을 쓰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작고 일시적이며 들고 다닐 수 있는 성소인 회막(Mishkan)을 만드는 데는 무려 500 구절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고, 사랑하며, 우리에게서 최상의 것을 희망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절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Jonathan Sacks, Judaism’s Life-Changing Ideas (Maggid Books, 2020), xvii-xxi, 5-8.

  • 한기연 2022.04.23 14:41 글쓴이

    역자주: 저자는 이야기의 기능과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오경은 본질적으로 율법 책이다. 그런데 왜 그 안에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공감이 없는 율법은 함께 아파하는 자비심이 없는 정의와 같기 때문이다. 라쉬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하나님은 정의라는 속성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려고 계획하셨지만, 정의만으로는 세상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의와 함께 자비심이라는 속성으로 시작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방식이며, 우리가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방식이다. 이야기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내면세계 속으로 상상력을 통해 들어가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다.” Jonathan Sacks, Judaism’s Life-Changing Ideas (Maggid Books, 2020), 94.

  • 한기연 2022.04.23 17:44 글쓴이

    역자주: 저자는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노아 홍수 이후 9장의 새로운 창조 기사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1) 창세기 1장과 9장에서 일곱 번 반복되는 단어가 1장에서는 “(보시기에) 좋았다”(tov)인 반면에 9장에서는 “계약(언약)” (brit)이다. (2) 1장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형상인 반면에, 9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계약은 관계에 관한 것이며, 사람들 사이의 도덕적 약정이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선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8:21).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 이후에 노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차이의 존엄성의 기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의 형상과 같지 않은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를 요청하신다.” 이처럼 낯선 사람을 위협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는 것이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피하는 길이라는 통찰이다. Jonathan Sacks, Judaism’s Life-Changing Ideas (2020), 9-12.

  • herdkmh 2022.07.14 22:46
    교수님 덕분에 잘 읽고 있습니다.
    오타 발견한 거, 이미 아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선 159쪽 마지막 문단 첫 문장, '체계저으로'.
    늘 좋은 책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셔요.
  • 을래 2023.02.04 08:29

    herdkmh 님에게 달린 댓글

    왜 다시 오경(토라) 읽기로 돌아가야 하는가? 누가 묻는다면 그것이 성경의 뿌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농부는 열매의 수확을 생각 하기 전에 뿌리의 건실함을 생각해서 토양에 거름을 낸다. 뿌리가 한해의 열매를 결정 짓는다. 신약은 열매이다. 그런데 그 열매의 근원은 생각하지 않고 홀 라당 따먹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먹을 열매가 없으니 별 짓을 다한다.
    부디 뿌리를 살피시길 부탁합니다. 뿌리가 나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조너선 색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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