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그리스도
탈육신 종교의 혐오와 폭력에 대한 대안적 정통주의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19)
그리스도교에서 유일하게 참으로 절대적인 신비들은 존재의 깊이 속에서의 하느님의 자기 소통인데 우리는 그것을 은총이라 부르며, 역사 속에서의 하느님의 자기 소통을 우리는 그리스도(Christ)라고 부른다. — 칼 라너, 예수회 신부이며 신학자(1904-1984)
나는 물질을 예배하지 않는다. 나는 물질의 하느님을 예배하는데, 그분은 나를 위해 물질이 되셨으며 황송하게도 물질 안에 거하시고, 물질을 통해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 나는 나의 구원을 이룬 그 물질을 끊임없이 공경할 것이다. —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675-753)
우리들의 어떤 절망도 사물들의 실재를 바꿀 수 없으며 우주적인 춤(the cosmic dance)의 환희에 오점을 남길 수도 없다. 우주적인 춤의 환희는 항상 그곳에 있다. — 토머스 머튼(1915-1968)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왜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건 좋지만, 따르기는 싫다!”고 고백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으로 충분하며, 예수는 필요 없다!”고 고백하는가?
1054년 대분열 후, 서방교회가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부활에 대한 이해에 왜 그토록 큰 차이점이 있는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반성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지 자신을 예배하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가?
왜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종교적인 투사를 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는가?
왜 예수는 행동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더 중요시했는가?
왜 예수는 율법과 도덕 중심의 종교를 은총과 자비 중심의 종교로 바꿨는가?
왜 프란치스칸은 경험, 성서, 전통이라는 세 바퀴를 이성적으로 타라고 하는가?
그리스도를 오직 예수 한 사람에게만 적용시킨 정통주의의 결과는 무엇인가?
왜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보통 사람이라고 87회나 강조하셨는가?
화육(성육신) 종교로 출발한 그리스도교는 왜 탈육신의 종교로 둔갑했는가?
탈육신 종교는 왜 육신, 물질, 여성, 자연을 혐오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중생한” 신자들은 왜 비종교인들보다 가정폭력과 인종차별이 훨씬 심한가?
왜 하느님의 초자연적 전능성을 믿는 사람일수록 생태 위기에 무관심한가?
성경 문자주의와 종교적 광신주의는 왜 흔히 극단적인 폭력집단을 낳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교리들에 대해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가?
쇠퇴해가는 교회를 되살릴 수 있는 그리스도는 정말로 어떤 그리스도인가?
마지막 만찬이 그토록 제자들을 놀라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나?
한국교회는 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110만 명의 서명을 받았는가?
대한불교조계종은 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도회를 개최하였는가?
후천개벽과 해원상생을 꿈꾸었던 착한 백성이 왜 그토록 모질게 되었는가?
왜 천국에 간 사람들은, 악인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봐야 만족하는가?
“세상의 슬픈 소리를 보는”(관세음) 어머니의 마음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까?
경제적 불평등과 기후위기가 더욱 악화되는 시대에,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20년 후 본격화될 동시다발적인 식량폭동에서 종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명의 붕괴에 직면한 인류 앞에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되살려야 하는가?
멸종 위기종이 된 인류에게 그리스도교가 제공할 마지막 처방전은 무엇인가?
시작하기 전에 / 9
제1부 모든 것을 위한 또 다른 이름
1. 그리스도는 예수의 성(姓)이 아니다 / 21
2. 당신이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을 받아들이라 / 39
3. 우리 안에, 우리로서 계시된 것 / 57
4. 원죄가 아니라 원선 / 77
5. 사랑이 그 의미라는 것을 / 95
6. 성스러운 온전함 / 111
7. 어떤 좋은 곳으로 / 123
제2부 위대한 쉼표
8. 행동과 말 / 143
9. 사물들의 깊음 / 149
10. 여성적 성육신(화육) / 165
11. 이것이 내 몸이다 / 177
12. 왜 예수는 죽었는가? / 191
13. 그것은 혼자 지고 갈 수 없다 / 219
14. 부활의 여정 / 233
15.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한 두 증인들 / 259
16. 변화와 관상 / 277
17. 단순한 신학을 넘어: 두 가지 수행 / 301
에필로그 / 313
후기 사랑 이후의 사랑 / 315
부록 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 / 317
부록 1 네 가지 세계관 / 319
부록 2 영적인 변화의 패턴 / 327
참고문헌 /337
옮긴이의 말 / 349
저자와 역자
리처드 로어(1943—)는 프란치스코회 신부로서 1986년에 “행동과 관상 센터”를 설립하고 토머스 머튼을 이어 관상 전통을 되살려내는 일에 헌신했다. 초창기에는 몇 년 동안 미국과 독일에서 애니어그램을 가르쳤으며, 오랜 영적 지도와 상담, 특히 카톨릭 신부들을 위한 피정을 17년 넘게 인도하고, 앨버커키 교도소 지도신부로 14년 넘게 사목한 경험을 바탕으로 『불멸의 다이아몬드』, 『물밑에서 숨쉬기』, 『위쪽으로 떨어지다』 등 20여 권의 주옥같은 책을 발표하여 많은 이들에게 회심을 경험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의 글에는 “아름다움이 구원한다”는 동방교회 신학방법론과 성인 프란체스코의 적극적 평화주의가 배어 있어서, 세상과 교회 안에서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을 치유하며 온전한 성숙함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는 짐 월리스, 토머스 키팅, 랍 벨 등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영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준우 박사는 『역사적 예수』, 『불멸의 다이아몬드』 등 2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출판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아마존서점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의 독특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으로 초대한다.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특성인 화육(성육신) 종교가 예수보다 플라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서, 물질, 육체, 자연, 여성을 혐오하는 탈육신 종교로 둔갑했다고 보는 그는 이 책에서 만물 속에 현존하는 보편적 그리스도 신비와 비이분법적(non-dual) 관상 전통을 되찾아 “대안적 정통주의”를 제시한다. 즉 예수 한 사람만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왔던 오랜 정통주의에서 “잊혀졌던 실재,” 곧 만물 속의 “신적 현존,” “초월적 내재,” “만물의 충만함”으로 표현된 실재를 되찾아 “보편적 그리스도”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예수에게만 적용한 “특수계시”라는 정통주의는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모든 사람들과 만물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 신비를 간과하는 한편, 예수가 경계했던 종교적 투사와 배타주의, 타자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 생태계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되심으로써 사랑하신다”고 역설하는 저자는 빅뱅 이후 계속되는 화육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 신비의 계속성과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근거해서, 모든 피조물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 그리스도 신비를 닮으려는 이들의 온전한 성숙과 제자도, 공동체적 구원, 생태계에 대한 책임성의 초석을 마련해준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 속에 들어 있는 신적 현존의 보편성을 역설하는 그는 하느님의 본성과 화육, 원죄와 십자가, 구원과 성만찬(영성체), 속죄론, 부활의 여정, 관상의 의미와 수행에 대한 설명을 통해, 탈육신 종교의 혐오와 폭력에 대한 대안적 정통주의를 제시한다. 물론 이런 대안적 정통주의는 우리의 에고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우리들과 만물 속의 신적인 신비를 찬미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자기 파괴적인 인류문명에 대한 처방전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이런 보편적 그리스도론의 근거는 저자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요한복음과 바울로의 편지들, 프란치스칸 전통의 화육 신비주의, 존 도미닉 크로산이 밝힌 동방교회의 공동체적 부활 이해, 그리고 카를 융, 떼이야르 샤르댕, 칼 라너 등의 통찰력이다. 특히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항상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이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폭력이 구원한다”는 메시아주의에 반대한 ‘안티-메시아’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절실했다. 또한 인류문명은 에고 중심적이며, 남과 비교하며 판단하고 경쟁하며 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내는 혐오와 폭력의 문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되살려내는 “잊혀졌던 실재,” 곧 그리스도라는 만물 속의 “신적 현존,” 그리고 관상 전통과 비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모든 피조물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되찾게 함으로써, 문명의 붕괴와 생태계 파괴로 인해 혐오와 폭력이 더욱 악화되는 묵시종말론적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귀한 복음인 동시에 제도권 교회가 빠르게 몰락하는 시대에 화육 신비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위한 “대안적 정통주의”이며 새로운 종교개혁의 초석이다.
서평
“로어 신부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역사적 인물)에 대한 생각과 그리스도(구세주)에 대한 생각을 함께 결합시켜, 자기 주변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인식하도록 초청한다. 그의 혁신적인 성찰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본성에 관해 깊이 생각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Publishers Weekly
“로어 신부는 우리가 믿음의 껍질 속을 탐구하여, 모든 사람과 만물 안에 있는 거룩한 것을 보도록 도전한다.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이들은 이 책에서 영감과 격려를 발견할 것이다.”
Melinda Gates, The Moment of Lift 저자
“로어 신부는 그리스도를 단지 사람들 속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본다. 그는 하느님의 첫 번째 화육은 창조 자체 안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또한 ‘하느님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되심으로써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이런 문장뿐 아니라 많은 통찰력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 Bono
“이 책에서 로어 신부는 우리로 하여금 나자렛 예수가 가르치신 것, 행하신 것, 그리고 그의 존재 자체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듣고 보도록 도와준다. 즉 하느님의 사랑하며 해방시키며 생명을 주시는 표현과 현존으로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로어 신부는 그리스도교가 그 영혼을 새롭게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 Michael Curry, 미국 성공회 감독회장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책을 읽고 그 고백이 뜻하는 놀라운 의미를 파악해야만 한다. 이 책은 로어 신부의 최고 역작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왔던 그의 신학적 통찰력을 요약해준다.”
― Wesley Graberg Michaelson, 미국 개혁교회 증경사무총장
책 속으로
(p. 10) 수치를 당한 그리스도(the humiliated Christ)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이 오랫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빵을 구걸하면서 러시아 전역을 절룩거리며 걷는 그리스도(the lame Christ)의 모습이었다. 그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마다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 심지어 죄인들에게조차 찾아와 그분 자신의 궁핍을 통해서 그들의 자비심을 되살리려 오실 분이다. 눈 깜빡할 찰나에 나는 이 꿈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건한 백성의 꿈이 아니라, 공상이 아니라, 전설이 아니라, 러시아인들의 특권이 아니라, 사람 속에 계신 그리스도 …
(p. 13) 1054년에 대분열을 통해 서방교회가 동방교회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만물을 해방시키셨으며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이런 심원한 이해를 점차 잃어버렸다. 대신에 우리는 점차 신적인 현존을 예수라는 단 하나의 몸에 국한시켰다. 신적인 현존은 빛 자체처럼 어디에나 있으며 인간의 경계선들로 제한시킬 수 없는 때에 그렇게 국한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믿음의 문이 닫히게 된 부분은 초대 교인들이 “현현”이라고 부른 주현(Epiphany)에 대한 이해였다. 또는 가장 유명하게도 “화육(성육신, Incarnation)”에 대한 가장 폭넓고 아름다운 이해를 못하도록 믿음의 문이 닫혔으며, 또한 화육의 마지막이며 완전한 형태인 “부활”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들은 원래 이런 주제들에 대해 훨씬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서방교회의 카톨릭과 개신교회들은 모두 최근에서야 비로소 이런 통찰력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씀이 육신(flesh)이 되셨다”(요한 1:14)고 말하면서, 단 한 사람의 몸(body)을 가리키는 용어 ‘소마(soma)’ 대신에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용어 ‘사르크스(sarx)’를 사용한 이유다.
(p. 16-17) 그리스도에 대한 우주적인 개념은 어느 누구와 경쟁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포함하며(사도행전 10:15, 34),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전체 우주에 합당한 하느님이 되도록 허락한다.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렇게 이해할 때, 창조주의 사랑과 현존은 창조된 세상 속에 근거하게 되며, 또한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정신적 구별은 무너지게 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것처럼, “당신의 인생을 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마치 어떤 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마치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방법이다.” 앞으로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p. 23)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이처럼 물리적 피조물 속에 자신을 계시한 것이 첫 번째 화육(Incarnation: 성육신, 영이 육신을 입은 것에 대한 총칭적 용어)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 일어난 것으로 믿는 인격적인 두 번째 화육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프란치스코회 언어로 표현하자면, 삼라만상은 첫 번째 성서(the First Bible)로서, 두 번째 성서(the second Bible)가 기록되기 전에 137억 년 동안 존재했다.
(p. 25)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어둠이 이길 수 없는 빛”(요한 1:5)이라고 묘사한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확한 표현이었다. 사물들의 내적인 빛(the inner light)은 제거하거나 파괴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은 매우 희망적인 것이다. 그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요한이 능동태 (과거진행형―역자주) 동사를 선택한 것(“그 빛이 세상 속으로 오고 있었다.” 요한 1:9)은 그리스도 신비가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인 과정, 즉 우주를 채우는 빛처럼 불변의 상수(constant)로서 계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빛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창세기 1:3). 이것을 잊지 말라.
(p. 35) 나로서는 완전한 그리스도 신비를 참되게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기초에서부터 개혁하기 위한 열쇠인데, 이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우리들만의 배타적인 집단 속에 집어넣거나 잡아두려는 어떤 시도에서든지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신약성서가 극적으로 또한 명백하게 표현한 것처럼, “천지창조 이전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으며 … 하느님의 자녀들로 선언되었으며, 태초부터 선택됨으로써”(에페소 1:3, 11), “그분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로 만드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1:10). 만일 이 모든 것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모든 몸을 포함하는 자연종교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는 태초부터 해결되었다. 그리스도교를 통해 세뇌된 당신의 머리를 떼어내어 세차게 흔들어 당신이 배운 것들을 떨어낸 다음에 다시 붙이도록 하라!
(p. 66)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도 신비에 주목하지 않는 가장 큰 본보기는 우리가 계속해서 행성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방식에서 볼 수 있을 것인데, 행성 지구는 우리 모두가 의존해서 살아가는 터전이다. 오늘날 과학은 대부분의 종교들보다 훨씬 더 물리적인 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는 과학과 기업이 대다수 사람들—심지어 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설명하는 주체들이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이나 구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물리적 우주를 포함하지 않았거나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이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있다.
(p. 150) 인류에게 지금 필요한 예수는 역사적이며, 우리들처럼 육체적이며 구체적인 실생활과 연관성이 있는 예수다.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삶이 우리를 더욱 잘 구원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본받을 수 있는 예수, 또한 충분히 인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기준을 세워주는 예수가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삼라만상을 하나의 조화로운 통일성 안에서 유지하기에 충분히 큰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p. 181) 그러나 여기서 그 수단, 매개물, 그리고 그 최종적 메시지는 육체적이며 먹을 수 있는 것이며 씹을 수 있는 것, 그렇다, 소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살이다. 고대 종교의 상당수는 신이, 제단에 바쳐진 인간이나 동물들을 먹거나 희생 제물로 삼았지만, 예수는 종교와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고 계신 것을 상상하도록 초대한다!
(p. 210) 20세기에 현대 심리학이 어떻게 인간들이 거의 언제나 자신들의 무의식적인 그림자(shadow)를 타인들과 다른 집단들에 투사하는지를 밝히기까지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패턴을 2천 년 전에 밝혔다. 즉 예수는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요한 16:2)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결함들을 증오하며, 또한 슬프게도 그런 투사(projection)를 흔히 가장 잘 은폐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과 종교는 우리의 대부분의 폭력을 정당화하며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숨는 데 이용되어 왔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하느님의 철저한 사랑과 삶의 실패자들의 고통이 갖는 의미에 눈뜨게 해주는 로어 신부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으로 초대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절실했던 이유는 다섯 가지다. 첫째로, 월터 윙크가 『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에서 강조한 것처럼, 참사람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다려왔던 정치군사적 ‘메시아’가 결코 아니었으며, 또한 자신을 ‘메시아’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항상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한 후, 그것이 정통이 되었다. 당시 자칭 메시아들은 모두 제국에 대한 폭력투쟁을 이끌었지만, 예수는 “폭력이 구원한다”는 메시아주의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로즈마리 류터 교수의 지적처럼 분명히 ‘안티-메시아’(anti-Messiah)였기 때문이다(2014:203).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적인 “특수계시”를 강조했던 기존의 정통주의가 초래한 종교적 투사 때문이다.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가 됨으로써, 예수의 하느님 나라 가르침은 시공간을 초월하게 되었고 보편주의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는 하느님의 유일한 화육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어, 교회는 예수가 목숨 바쳐 살아낸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기보다는, 예수 자신을 예배와 투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종교적 투사는 사람들의 온전한 성숙을 회피하는 핑계가 되기 때문에 예수가 그토록 경계했던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보다는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춘 특수계시가 초래한 배타주의와 타자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성 때문이다. 로날드 사이더가 『복음주의적 양심의 스캔들』에서 인용한 여론조사 결과가 보여주듯이, “거듭났다”는 복음주의자들의 아내 구타와 인종차별은 비종교인들보다 훨씬 심하다(2005:17-29).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성소수자들과 난민들, 무슬림을 더욱 차별하며, 인권조례와 차별금지법 제정조차 전국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넷째로, 그리스도교의 독특성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리스도 신화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거의 전부 모방한 것이기에 그리스도교의 독특성과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또한 플라톤의 영향으로 탈육신 종교가 되어 육신, 물질, 여성, 자연을 혐오하며, 구원을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존하도록 만들어 무책임한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기초한 그리스도론만이 그리스도교의 독특성과 진정성을 줄 수 있다.
다섯째로,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남기 위해서다. 전대미문의 기후위기 비상사태 속에서 다음 세대들의 생존권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단 10년 남았지만, 정통주의의 초자연적 권능을 지닌 전능하신 하느님(예컨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종교적/은유적 진리가 아니라 생물학적/산부인과적 진리로 간주하는 문자주의적인 의미에서)을 믿는 신자일수록 기후위기와 대멸종 사태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David. R. Griffin, 2019:318).
특히 개신교인들의 배타주의적 혐오와 이념적인 차별은 언어폭력을 거쳐 실제 폭력 행동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성서 문자주의가 그 뿌리 가운데 하나다. 성서 안에 폭력과 복수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원으로 선포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긴 세월 외국의 압제를 받아왔던 이스라엘 민족은 뼛속 깊이 복수심에 불타올랐고, 성서는 출애굽 사건 이후 구원을 “원수들에 대한 승리”로 선포했다. 그래서 크리스터 슈텐달은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오늘날의 생태학적 재앙들을 인식하면서 구원을 ‘승리’ 대신에 ‘니르바나(nirvana)’로, 즉 하느님 안에서 에고가 소멸하고 하느님과 연합하는 신비가들의 구원 이해로 바꿀 것을 요청했다(Roots of Violence, 2016).
또 하나의 뿌리는 종교인들이 쉽게 빠지는 자기 의로움이다. 세상에서 어둠과 악을 몰아내는 것을 사명으로 믿는 사람들의 열광주의는 특히 세상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신념을 통해 극단주의 정치와 결합하여 무자비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히틀러의 인종청소와 마오쩌뚱의 “문화혁명,” 그리고 옴 진리교의 무차별적 학살은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종교인들이 폭력적 원리주의자들로 둔갑할 때, 미국의 대다수 백인 복음주의자들처럼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극단주의 정치가를 뒷받침하게 된다. 경제적 불평등이 악화되고 기후재앙들이 악화될수록, 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종말을 재촉하는 광신자들의 폭력을 더욱 경계해야만 한다(Robert Jay Lifton, Losing Reality, 2019).
이 혐오와 죽임의 시대의 새로운 계시는 성소수자들과 난민들만이 아니라 삼라만상 전체가 하느님이 지으신 “한 피붙이”로서 모두가 “불가침의 권리”를 지닌 성스러운 존재라는 점이다. 극우파 민족주의라는 역사적 반동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큰 영적―도덕적 힘과 원칙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의 거룩함과 “한 피붙이”라는 보편주의뿐이다.
예수와 바울로 모두 제국의 폭력, 지주들의 폭력, 성전의 폭력 속에서, 만물의 하느님은 폭력적이 아니라 무차별적이며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인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로마의 제국신학자들 역시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것은 비너스 신, 승리의 여신, 전쟁의 신, 바다의 신, 군대의 신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 역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주님,” “죄를 속량해주시는 분”으로 고백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믿음과 로마제국의 질서와 가치들에 대한 믿음이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준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정의로운 세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정복한 지역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면서 잔인하게 학살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다가 노예로 부렸다. 성전조차 거룩과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약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선택했던 것이다.
인류문명은 이처럼 에고 중심적이며, 남과 비교하며 판단하고 경쟁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내는 폭력적 문명이다. 따라서 이 책이 되살려내는 “잊혀졌던 실재,” 곧 그리스도라는 만물 속의 “신적 현존,” 그리고 관상 전통과 비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우리의 에고 중심적 삶에서 벗어나게 하며 모든 피조물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되찾게 함으로써, 혐오와 폭력이 더욱 악화되는 묵시종말론적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처방전이다. 동시에 제도권 교회가 빠르게 몰락하는 시대에 화육 신비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위한 “대안적 정통주의”로서 우리가 되찾아야만 하는 “오래된 미래”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