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위력
예수에 의한 픽션은 어떻게 예수에 관한 픽션이 되었는가?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
The Power of Parable
How Fiction by Jesus Became Fiction About Jesus
John Dominic Crossan(2012)
한국기독교연구소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대가 존 도미닉 크로산 교수가 복음서 저자들의 예수 해석을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2천년 동안 성경과 교리 속에 박제된 예수의 아름다운 혼과 창조적인 신학, 그리고 예수의 비폭력적인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 교육방법론읕 통해 복음의 진수를 밝힌 혁명적인 책이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나 달란트 비유를 오해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 익숙해져 진부한 이야기들이 된 전통 신앙을 예수는 어떻게 뒤집어엎는가?
예수가 여러 형태의 비유들을 통해 정말로 가르치려고 의도했던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은 어떻게 상반되는가?
예수는 당시의 전통적인 주류 신학의 패러다임을 왜, 어떻게 바꾸었는가?
예수는 왜 하필이면 도전하는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는가?
복음서들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인가, 픽션인가, 그 둘이 결합된 비유들인가?
마가, 마태, 누가, 요한으로 갈수록 왜 예수의 언어 폭력이 더욱 심해지는가?
복음서 저자들은 왜, 어떻게 예수의 메시지를 훼손시키는 것으로 끝났는가?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의 참된 위력은 무엇이며, 그 위력은 어떻게 드러났는가?
복음서 저자들이 훼손시켜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 예수의 참된 복음은 무엇인가?
유혈이 낭자한 교회사를 오늘도 되풀이하는 근본주의를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가?
"다른 시절이라면, 크로산의 관점들은 학술잡지에 갇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베스트셀러들은 성서학자들의 작업방식을 바꾸어놓았다."
- CNN.com
"복음서들이 비유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신선하고 놀라운 통찰력이다. 크로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신약성서 학자라는 그의 명성을 굳혔다."
- 존 쉘비 스퐁,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의 저자
"크로산은 날카로운 역사적 탐구와 도전적인 신학적 관찰을 결합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는 성서 전통의 심오함과 도발성을 회복시킨다."
- 에이미-질 리바인, 『성서의 의미』의 공저자
"성서를 보다 잘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매우 중요하고 탁월한 책이다. 크로산은 그가 습관처럼 보여주는 문학적 및 역사적 명민함과 신선한 통찰을 결합시켜, 예수의 비유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성서 전체에 대해서도 광채를 비춰준다."
- 마커스 보그, 『기독교의 심장』저자
"존 도미닉 크로산은 또 다시 해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에 관한 그의 혁신적인 해설은 복음서들과 나사렛 예수의 생애 속의 비유와 은유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롭고 눈부신 관점들을 제공해준다."
- 마빈 마이어, 『나그 함마디 문서』 번역자
값 15,000원
목차
프롤로그 이야기와 은유 __ 7
제1부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
1장 수수께기 비유들 __ 23
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2장 본보기 비유들 __ 45
가서 너희도 이처럼 행하라
3장 도전하는 비유들: 1부 __ 69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4장 도전하는 비유들: 2부 __ 99
말씀에 맞서는 말씀
5장 도전하는 비유들: 3부 __ 13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6장 하나님의 나라 __ 171
협동하라는 도전
중간극
비유적인 역사의 유혹 __ 213
루비콘 강의 카이사르
제2부
예수에 관한 비유들
7장 이름 없는 사람들을 위한 찬양 __ 235
마가에 따른 비유 복음
8장 수사학적인 폭력 __ 267
마태에 따른 비유 복음
9장 로마, 그 새로운 예루살렘 __ 295
누가-사도행전에 따른 비유 복음
10장 하나님의 환상적인 꿈 __ 329
요한에 따른 비유 복음
에필로그 역사와 비유 __ 367
옮긴이의 말 __ 383
성경색인 __ 391
존 도미닉 크로산은 드폴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역사적 예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 미국 성서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역사적 예수>,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가장 위대한 기도> 등 베스트셀러를 썼다.
크로산은 이 책의 1부에서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을 그 형태별로 구분해서 분석하고 해설한다. 특히 룻기, 요나서, 욥기와 같이 도전하는 비유가 그 당대에 율법에 근거한 사회정치적 절대주의에 어떻게 부드럽게 도전했는지를 밝힌다. 이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게 상반되는지를 규명한 후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메시지)와 도전하는 비유들(매체) 사이의 상관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중간극에서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사건에 대한 여러 역사가들의 기록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어떻게 역사적 사실과 픽션이 결합해서 역사적인 비유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한다.
제2부에서는 예수에 관한 비유들, 즉 네 복음서 저자들이 구성한 예수 이야기들의 특징적 줄거리를 차례로 분석하고, 그 저자들이 어떻게 예수의 언어폭력의 수위를 점차 높여감으로써 결국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훼손했는지를 규명한다. 즉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도전하는 비유들로 가르친 비폭력적이며 참여적인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어떻게 공격적인 비유들로 만들어버렸는지 그 과정과 상황을 밝힌다. 사랑으로 충만한 예수는 도전하는 비유들의 참여적인 교육방법을 통해 그 적대자들의 폭력의 출발점인 생각의 폭력성을 성찰하도록 부드럽게 초대했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오히려 예수의 언어폭력 수위를 높여가는 공격적인 비유들로 만들어, 예수의 메시지를 훼손시켰다는 주장이다. 복음서들의 예수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완전히 재해석하여 이제까지 훼손되었던 예수의 아름다운 혼과 창조적 신학과 평화 교육방법론을 온전히 되살려낸 이 책은 폭력적인 기독교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는 혁명적인 책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실패한 것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계속해서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
삶이 힘겨워질수록 예수를 붙들게 된다. 예수를 믿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실현하는 일에 예수처럼 지극정성으로 참여하는 일임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꿈은 불(태양), 흙, 물, 공기를 원(圓)으로 둘러싸고 있는 생명의 영원한 순환을 상징하는 켈틱 십자가가 보여주듯이, 거룩한 신비 가운데 줄기차게 진행되는 생명의 역사 속에서, 특히 예수가 온몸으로 살아낸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지배체제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 속에 드러난다. 예수운동은 우리가 운명이나 지배체제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며, 또한 이기적 욕망과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나, 그 우주적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웅장한 영혼과 풍성한 생명과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다. 즉 지배체제와 자기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생명의 주체가 되도록 우리의 거룩한 원(願)을 크게 품는 일이다. 태평양을 가로질러 건너는 바다거북, 대륙을 오가는 철새들, 남극지방에서 겨울 내내 태양도 뜨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슴에 알을 품고 그 굶주림과 혹한을 견디는 수컷 펭귄들만이 아니라 온갖 벌레들이며 풀 나무들까지 모든 생명체들은 이처럼 생명의 장엄한 행진에 발맞추어 정성껏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꽃피우기 때문이다. 물론 시지푸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웅혼한 꿈과 인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우리 시대는 기후붕괴와 대멸종으로 인해 지질학적으로 지난 6천5백만 년 동안 생명을 가장 풍성하게 꽃피워왔던 신생대를 끝장내고 있으며,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꿈 자체를 파괴하는 시대다. 미국과 영국의 안보 전문가들조차 현재와 같은 온실가스 배출 추세로는 인류 문명이 앞으로 75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할 만큼, 우리는 자기-파멸의 벼랑 끝을 향해 질주하고 있으며, 역사상 자손에 대한 보호본능과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되었을 만큼 집단최면에 걸려 있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들은 절박한 당면 과제를 분별하고,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위한 마지막 투쟁에 지혜와 힘을 모으고 있다. 특히 종교인들은 이 우주의 신비한 진화과정 안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창조를 계속하는 사랑과 생명의 영을 우리의 몸 안에 모시는 일, 그리고 그 창조적인 영이 이끄시는 풍성한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분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따르는 일은 우리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온갖 고통과 절망, 억압과 착취, 폭력과 전쟁의 비극적인 상극(相剋)의 세상에서, 우리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한 모태(母胎)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로서, 모두가 더불어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서로 한 마음으로 보듬는 상생(相生)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보다 약한 생명체들의 고통에 함께 공감하며 또한 가능한 한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지배체제에 맞서 힘껏 저항하는 것이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삶의 원리라고 믿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이 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주적 삶의 원리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해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가 먼저 그 우주적인 존엄의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간 것을 본받아, 우리도 다시 감히 용기를 내어 그 거룩한 길에 참여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사회적 진보를 거부하는 영원한 수구적 정신의 온상”(김상봉)으로 작용하는 근본 이유는 성서의 전근대적인 신화적 세계관 때문에 당면 과제조차 하나님 손에 떠넘기고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지 못하는 경향 때문만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를 강조할수록,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특수계시의 절대성과 유일회성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권위주의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외부 집단”에 대해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주의 신학자 로날드 사이더 교수(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2005)가 여러 통계자료를 통해 보여주듯, “성령세례를 받고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아내 구타, 이혼율, 인종혐오에서 미국의 평균치보다 훨씬 높을 만큼 폭력적이며 성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자비하심에 근거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기독교가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종교가 되었을 정도로 잔혹하고 폭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여성혐오와 억압, 십자군 전쟁과 종교 전쟁, 종교 재판, 마녀 사냥, 유대인 혐오와 학살, 노예무역, 제3세계 식민지 정복이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가 아무리 “내부 집단”의 결속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들”을 그처럼 대량학살하는 만행들을 어떻게 예수 이름으로 자행할 수 있었는가?
물론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 예수의 복음은 황제의 복음과 타협하여 정통주의라는 배제의 논리를 만들어, 그 획일적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고 처형하는 한편, 기독교 세계라는 패권주의적인 지배체제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라는 명분으로 불의한 사회 구조를 합리화시켰으며, 선교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예수를 이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자신들의 정통주의와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를 내세의 천국 혹은 내면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리고, 선악 이원론으로 세상을 단순하게 재단한 자신들의 교리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지배체제의 이런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의해 세뇌되고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교리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악마의 도구가 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된 그 모든 만행들은 결국 제국에 의해 학살당한 비폭력적인 예수를 패권주의 체제가 폭력적인 승리주의적 그리스도로 둔갑시킴으로써 초래한 비극들이었다.
교회사에서 획일적인 교리 절대주의에 기초한 제국주의적 승리주의가 초래한 이 모든 비극적 아이러니를 무수하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 문자주의와 교리주의에 근거한 근본주의 신학이 파시즘적인 승리주의와 패권주의를 조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 교리들, 특히 예수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을 학수고대하는 근본주의자일수록 폭력적이며, 타종교인들을 멸시하고, 특히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지지하며, 생태계 파괴 사태를 “예수 재림”의 징조로 환영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왜 성경을 열심히 읽을수록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생명과 정의와 평화운동에 헌신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며 폭력적이며 몰상식한 사람이 되기 쉬운가? 크로산이 ������하나님과 제국������(God and Empire, 2007, p. 237)에서 묻고 있는 것처럼, “폭력적인 기독교 성서에 근거한 폭력적인 기독교 안에서 비폭력적인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신적 계시를 통해 절대 불변하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기확신과 우월감과 그 진리를 기록한 문자를 절대화하는 문자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몇 개의 근본적인 믿음 조항들과 동일시함으로써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실현해나가는 역사에 대해 항상 새롭게 재해석해나간 과정이라는 점을 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전능한 모습이란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행할 수 있는 절대군주처럼 매우 자의적이며, 수시로 이방인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남김없이 진멸하도록 명령하는 매우 폭력적인 전쟁의 신이며, 전능한 동시에 정의의 신으로서 고통을 안겨주는 “새디스트 신”(도로테 죌레)인 마당에, 그 독생자 예수의 모습마저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히 재림 예수가 어린양 예수가 아니라 세상을 온통 피바다로 만드는 “도살자 예수”(계 19장)로 등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십자가의 폭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폭력”이라고 믿기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가 빛과 함께 경험하는 짙은 어둠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은 채 그 어둠을 타자에게 투사하여 악마화함으로써 그 어둠을 폭력적으로 타도하고 멸절시켜야 할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만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인품과 본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가 분노할 때와 절망할 때, 그리고 목숨이 걸린 싸움판에서이기 십상인데, 예수는 자신에게 적대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유대인들에 대해 얼마나 심한 저주와 욕설들을 퍼붓고 있는가(예컨대 마태 23:13-33, 요한 8:44)? 더군다나 마가, 마태, 누가, 요한으로 갈수록 왜 예수의 언어폭력이 점점 더 심해지는가? 이념적 폭력은 언어폭력을 거쳐 물리적 폭력으로 발전한다는 크로산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입술로부터 나온 것으로 기록된 그런 저주와 욕설은 타종교인들만이 아니라 기독교 안의 다른 종파들에 대한 저주와 폭력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외부 집단, 특히 다른 종교와 신학 노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저주한 예수의 모습은 정말로 예수가 가르친 “무차별적인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을 성육신한 모습인가? 아니면, 복음서 저자들이 그 적대자들에 대해 갖게 되었던 증오심과 적개심과 저주를 “예수의 입술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버린 탓인가? 애당초 복음서들에 나오는 예수의 생애, 죽음, 부활, 재림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들인가, 아니면 픽션들인가? 아니면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비유적 역사인가?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은 어떻게 당대의 근본주의였던 율법의 절대성에 도전했던 룻기, 요나서, 욥기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가?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 속에서 “외부인들”(outsiders), 즉 탕자와 사마리아인, 세리,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모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반면에, “내부인들”(insiders) 즉 큰아들과 제사장과 레위인, 바리새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결국 그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외부인들과 내부인들의 지위가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예수에 관한 복음서들의 이야기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유대인들에 대해 예수의 입술로 그처럼 저주와 욕설을 퍼붓고 있는가? 그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외부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낙인찍는 악질들이며, 또한 율법수호라는 명분으로 예수를 살해하는 데 앞장선 원수들이며, 그 이후 초대교회 역사에서 예수운동을 적대시했던 “악마들”이었기 때문인가? 유대교 안에서 시작된 예수운동이 극히 소수자들의 새로운 운동으로서 자기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대교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수 사랑”을 가르친 예수가 자신의 입술로 자신을 적대한 사람들에게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는 것은 결국 예수 자신을 “위선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복음서 저자들은 몰랐는가? 복음서 저자들의 증오심과 적개심이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하더라도, 저주와 욕설을 통해 과연 “원수들”의 회심과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악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동족 전체를 “악마의 자식들”(요한 8:44)로 규정한 예수의 발언과는 정반대로 실제로 악마가 된 것은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국가들이 아니었는가?
문제의 핵심은 예수가 자신을 적대했던 사람들을 실제로 “원수들”로 간주하고 그들에 대해 그처럼 심한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는가 하는 문제다. 예수가 가르치고 살아낸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처럼 살기등등하게 적대했던 세력들이 상극의 현실로 몰아갈 때, 예수가 선택한 길이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것처럼 그들에 맞서서 언어폭력을 사용하며 저주하는 상극의 길이었는가, 아니면 룻기, 요나서, 욥기처럼 부드러운 도전을 통해 비폭력적인 자기 성찰로 인도하는 상생의 길이었는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크로산 교수는 이처럼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복음서 저자들이 작성한 예수 이야기들에 근거해서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저주와 폭력을 정당화해왔던 것에 대해 크로산은 그들의 근본적인 성서적 토대를 완전히 뿌리뽑아버린다. 예수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완전히 재해석함으로써, 2천년 동안 훼손되었던 예수의 자유혼, 특히 “한 분 하나님”의 거룩한 꿈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충만한 예수의 자유혼과 그의 창조적인 신학과 평화교육방법론을 되살려낸 이 책은 폭력으로 점철된 기독교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는 혁명적인 책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실패한 것에서 우리가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그 실패를 계속해서 반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생태계 파괴로 인해 인류 문명의 붕괴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 “가이아의 평화”(Pax Gaia)가 절실하지만, 오히려 점차 파시즘의 망령이 다시 배회하는 시절에, 교회 안과 밖의 온갖 몰상식과 폭력성과 편가르기를 극복하고 시대의 어둠을 돌파해 이 땅의 역사를 앞장서서 견인하기 위해 곳곳에서 저항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원서가 출판된 지 한 달만에 번역판을 내놓는다. 세상의 모든 장벽들, 특히 종교와 신학의 노선 차이로 인한 증오와 적개심마저 온몸으로 끌어안고 뛰어넘게 한 사랑의 혁명가 예수께 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