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명시리즈 06
불타는 세상 속의 희망 그리스도
Fortress Press, 2021.

<1.5도와 2도 이하 상승을 위한 온실가스 배출 감축서약과 실제 배출량 격차.
각국이 서약한 대로 이 격차를 빠르게 줄이지 않으면,
21세기 중반에 사회와 문명의 붕괴를 피할 수 없다. >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서구 문명의 환경 파괴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
왜 초자연주의적 신론과 대속론이 기후비상사태에 책임이 있는가?
왜 불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가?
왜 하느님 '아버지' 모델 대신에 '친구' 모델이 "어른의 신학"인가?
왜 현재 평균기온 상승 속도가 과거 대멸종 시대들보다 훨씬 빠른가?
왜 1.5도 방어 댐이 붕괴되듯이, 2.5도 방어 댐도 붕괴될 것이 확실한가?
왜 3도 방어 댐이 붕괴되기 전에, 사회와 문명의 붕괴가 불가피한가?
왜 학자들은 기후붕괴와 농업붕괴로 인해 2100년까지 최소 60억 명이 죽게 될 것을 경고하는가?
왜 석유재벌들은 지난 50년 동안 매일 30억 달러의 이윤을 낼 수 있었는가?
왜 세계 정부들은 에너지기업들에 매년 보조금을 5조 달러씩 지급하는가?
왜 산유국들은 탄소배출 절반 감축은커녕 두 배 늘려 생산하는 중인가?
왜 2050년까지 매년 200억 톤 이상씩 격차가 초과하는 데도 대중매체는 잠잠한가?
왜 99%는 1%의 자본가들이 장악한 금권정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가?
왜 20년 후에는 "동시다발적 식량 폭동"과 사회적 붕괴가 불가피한가?
왜 트럼프는 미국의 기후대책들을 모두 폐기할 것을 공언하는가?
왜 서유럽 대다수 국가들도 극우 포퓰리스트가 권력을 장악했는가?
왜 자본 카르텔은 긴축정책을 통해 민중들의 숨통을 더욱 조이며 각자도생에 몰아넣는가?
왜 지배층은 역진세와 긴축정책들을 통해 노조운동을 파괴하며 파시즘체제를 구축하는가?
왜 앞으로 7년 동안의 정책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게 되는가?
왜 물질과 생명의 현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리키는가?
왜 생태계를 파괴하는 시장자본주의를 돌파할 희망이 “자기 비움”인가?
왜 자아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는 기쁨의 길인가?
왜 삼위일체의 신비는 생명의 극대화와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가?
왜 샐리 맥페이그 교수는 이 책을 탈고하기 전에는 숨을 거둘 수 없었는가?
왜 자본의 학살구조라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이 실존적 위협으로 경험될 때 세계 변혁의 힘이 생겨나는가?
Sallie McFague (1933-2019)
샐리 맥페이그(1933-2019) 교수는 밴더빌트대학교와 밴쿠버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미국의 생태여성신학을 이끌었던 대표적 신학자였다.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리처드 니버와 고든 카우프만의 영향을 받은 그는 가부장적이며 절대군주적이며 전능한 하느님은 생태 위기와 핵 위협 시대에는 적실성을 상실했다고 보고, 하느님을 부모, 연인, 친구로 이해하고, 세계를 “하느님의 몸”으로 제시했다. WCC의 기후 위기 대응 신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저자가 80대 중반에 완성한 이 책은 기후 위기가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제시한 책이다.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위해서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나 주요 산유국들은 배출량을 줄이는 대신 화석연료 생산량을 1.5도 탄소예산보다 2배 늘이는 중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2020년대에 1.5도 상승 목표를 넘어, 2050년까지 2도 상승, 2100년까지 3도 상승을 예상한다. 현재 매년 700만 명이 대기오염으로 죽지만, 2도 상승하면 매년 1억5천만 명이 대기오염 탓에 죽게 되며 또한 “북반구에서의 동시다발적 식량폭동”이 예상된다. 3도 상승하면, 사회와 문명의 붕괴가 예상된다.
이처럼 엄중한 자기 파괴적 생명학살의 현실 앞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을 문제 삼는다. 서방교회의 개인구원적 대속론 대신에 예수의 삶과 가르침, 동방교회의 테오시스 구원론,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화론과 양자역학에 근거하여 “자기 비움의 그리스도론”을 제시한다. 기후 위기가 더욱 촉박해지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집단최면에서 벗어나 기후 행동을 실천하는 지름길은 신학의 재구성에 있으며, 또한 신앙의 본질을 되찾는 것은 붕괴와 소멸의 시대에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기쁨이며,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며 또한 능력을 부여하시는 희망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맥페이그 교수는 2019년 사망하기 전에 탈고한 이 마지막 책에서, 평생의 작업을 요약하고, 모든 생명이 번창하는 길을 분명하게 요청한다. 그 길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기 비움의 해석이다. 과거의 신학은 우리의 목숨을 얻으려 하지만 모두 잃게 되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삶, 공동체와 지구의 생명을 위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신학이다.
이 책을 추천하는 글
“샐리 맥페이그 교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선물을 남겨주고 떠났다. 그는 비길 데 없고 명료하며 설득당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후 변화가 우리의 지구와 그 모든 거주자들에게 끼치는 실존적 위협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과학과 신학은 하나의 공통적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그 삶과 죽음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의존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죽음은 모든 차원에서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며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기 비움의 사랑을 구현한다. 우리가 그의 권고를 따라서 생명의 순환 가운데 있는 우리의 위치를 끌어안고 사랑함으로써, 이 생동감 넘치는 세상이 번창하기를 기원한다.”
―Ellen T. Armour, Vanderbilt Divinity School
“샐리 맥페이그 교수님, 아, 거기 계시는군요! 그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의 말과 지혜는 이 사후에 발간된 책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분노하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죄인들의 잘못된 이야기를 넘어, 맥페이그 교수는 우리로 하여금 삼라만상과 신성과 더불어 관계의 춤을 추도록 초대하는데, 그것은 단지 인간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지구를 위한 구원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자기 비움(kenosis)의 요청 속에서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단죄하며 또한 우리가 점령한 지구를 단죄한다. 맥페이그 교수가 이 책에서 주는 통찰력 넘치는 도전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숙고하도록 요구한다.”
―Miguel De La Torre, Iliff School of Theology
“케노시스라는 고대의 상징을 엄정한 생태적 실천으로 되살려내는 책으로서, 우리의 숨을 멈추게 하는 동시에 숨을 쉬게 해주는 책이다. 포스트모던 관계주의와 자연과학과 협력하면서, 희생적 사랑이라는 난감한 가르침은 진화의 생명과 죽음의 순환과 한 점에서 모인다. 현재의 기후적 전환점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고 떠난 위대한 마지막 선물이다.”
―Catherine Keller, Drew Theological School
“맥페이그 교수가 신학 담론에 준 마지막 선물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른 생명체들과 지구 시스템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기후 위기를 감소시키기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박차를 가해야 한다. 개신교 신학을 상당 부분 지배했던 개인주의적이며 인간중심적이며, 패권주의적 인간 이해를 대체하려는 맥페이그 교수의 은유적 노력을 완성시키면서, 그는 통렬한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자기 비움의 자기 희생이다. 우리의 욕망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과 종자들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확보할 수 있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지구의 위기 상황을 심각하고 고민하는 ‘참다운 어른들’이 되며, 다른 피조물들을 친구들로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궁극적인 친구인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이 책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맥페이그 교수가 화육(성육신) 교리를 통렬하게 해석하여, 삼라만상 전체를 포함시키고, 또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벗어나 ‘나는 관계를 맺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전향한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메시지와 함께 울리는데, 교종은 만물의 상호연결성, 자기중심적 태도로부터 생태적 책임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우리 공동의 집이 번성하도록 지역에서 행동할 것을 강조하셨다.”
―James Schaefer, Marquette University
목차
서문: 예수 그리스도와 기후비상사태 / 9
서론: 케노시스, 그리스도, 그리고 기후비상사태 / 17
1장. 예수와 하느님의 케노시스 이야기들 / 49
2장. 기후비상사태를 위한 포스트모던 통찰 / 77
3장. 신과 인간의 관계적 존재론 / 91
4장. 친구 하느님과 세상의 친구들인 우리들 / 109
5장. 케노시스, 테오시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 에서 전개하는 그리스도교 신학 / 139
후기: 케노시스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성찰 / 165
부록 1: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Laudate Deum, 2023. 10. 4) 프란치스코 교종 / 169
부록 2: 임박한 기후 파국과 인류의 마지막 혁명, 김준우 / 203
우리의 행성 지구는 지금 확실히 결정적 “전환점” 가운데 하나에 처해 있다. 우리가 깨어나서 부인하지 말고, 심각한 자기 비움(희생)의 행동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그 밖의 생명체들의 차원 모두에서 지구 위의 생명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우리들의 삶에 대한 세계관과 이야기이다.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만물의 이치”에 맞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믿음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애니 딜라드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신비에, 죽음의 소문에, 아름다움, 폭력에 대해 깨어나기만 한다면 … 이것은 최근에 어느 여인이 나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가 여기에 있지만, 도대체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 지구 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의 인간들은 우리가 지구(의 생명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비를 설명하면서, 다른 생명체들의 존재 목적은 우리에게 봉사하고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공리주의적이며 위계적인 세계관으로서, 그 세계관에서는 우리만이 주체들이며, 다른 모든 존재는 우리의 사용을 위한 “대상”일 뿐이다. 이런 세계관이 초래한 것은 우리의 “집”이 외롭고 죽은 세계이며, 나머지 다른 존재들의 “집”은 파괴되고 생명이 없는 세계이다. 더군다나 미래는 모두에게, 인간과 또한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수십억 생명체들 모두에게, 소름끼치는 모습이다. 이런 세계관이 초래한 결과 가운데 하나인 광포하고 규제가 없는 자본주의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이런 세계관은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다.
우리는 만물의 이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세계 종교들의 작품이며, 그리스도교, 특히 자기 비움의 그리스도교(kenotic Christianity)는 매력적이며 강력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자기 비움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특징들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그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다른 많은 참된 종교들처럼, 사람들이 “타자를 위해” 사는 것이야말로 주고받는 공생과 나눔, 서로 간의 상호의존성, 삶과 죽음을 특징으로 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반응이라는 반문화적인(countercultural) 요청이다. 우리가 진화에서 보는 것은 철저하며 전적인 의존 체계로서, 그것은 지구 활동의 모든 차원에 나타나며, 사람들 가운데 다른 생명체들이 번창하도록 자기희생(자기 비움)의 활동 사례들도 포함된다. 밀알 하나는 다른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죽기 전까지는 그 운명을 완수하지 못한다. 자기희생적이며 이타적인 행동은 밀알 하나와 연속선 상에 있다. 비록 인간 차원에서는 그것이 삶의 길로서 자기 의식적인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종교들이 제공해야 하는 것은 지구 위의 유일한 자기 의식적 행위자들인 인간이 모두가 번창할 수 있도록 사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종교들이 제공하는 실재에 대한 그림(세계관)은 영적이거나 저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지구 위에서 정의롭고 풍성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이런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화육론(incarnationalism), 즉 하느님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신다는 주장을 통해서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는 현세적 삶의 고통에서 도망칠 방법들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현세에서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은 “집안 규칙들”을 따르는 것임을 가르친다. (1) 오직 너의 몫만을 챙겨라. (2) 네가 머문 곳을 깨끗이 치워라. (3) 미래 세대를 위해 집을 잘 수리하도록 하라. 이런 “규칙들”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첫 번째 규칙을 지키는 것만도 “황금률”처럼 우리들 대부분에게 심각한 도전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그리스도교와 자연은 공통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데, 본래적 관계성(intrinsic relationality)이다. 양자(quantum) 차원에서는 관계성이 존재(실체)보다 더 기초적이다. 따라서 “나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삼위일체론도 마찬가지를 말한다. 삼위일체의 “인격들” 사이의 사랑의 행위는 신적인 관계성이 핵심적임을 뜻한다. 진화론의 관점은 본래 극히 이타주의적인 것으로서, 주고받기, 나누기, 공생, 삶과 죽음 같은 특징들을 보여준다. 따라서 자연의 차원과 하느님의 본질(삼위일체)의 차원 모두에서 관계성은 기본이며 핵심이다. 개체가 홀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의 지위는 위와 아래 모두에서 또한 모든 면에서 관계적이다. 삼위일체론과 자연은 모두 철저하게 관계적이다.
진화는 밀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양육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삼위일체는 신적인 생명(과 사랑)이 삼위일체의 “인격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춤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과 사랑(실재)은 이처럼 필요로 하는 것과 주고받는 패턴으로 특징지어져 있다. 따라서 자기 의식적인 생명체(인간)의 근본적 자세는 매일 철저하게 감사하는 자세다. 그래서 “믿음”은 전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삶을 기꺼이 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타자로부터 생명을 받고, 또한 그 생명을 넘겨주려는 삶을 살려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한 개체가 “갖거나” 스스로 소유하는 멈춤의 장소는 없다. 즉 생명 운동은 항상 타자로부터 생명을 받고, 또한 그 생명을 넘겨준다. 따라서 진화 차원에서 실천되는 것은 오직 참다운 삶의 희미한 그림자다. 즉 주고받는 패턴이지만, 받는 것이 더욱 기본이며 먼저인 것이 참다운 삶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생명 자체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것을 우리는 받았다.
나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관한 견해들이 기후 변화 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어떻게 공헌하는지 아니면 방해하는지 하는 문제를 철저히 검토하고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하는 방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특히 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케노시스적 해석(kenotic interpretation)에 집중하고 싶다. 즉 당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잃어야만 한다는 이상한 관계 말이다. 십자가의 길은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 생명을 넘겨줄 수 있는 전적인 자기 비움이다. 생명은 결코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이 죄라고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한다). 대부분의 피조물은 진화를 통해 이 규칙을 지킨다.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고받기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계속해서 주고 또 받는 항구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선 진화의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보며, 또한 삼위일체의 자비 비움의 패턴 속에서 본다. 즉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이런 사랑하는 행동이지, 다른 어떤 종류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 우리 인간은 이 과정에 맡겨야 하며, 또한 그 능력과 결과를 믿어야 한다. 확실성은 없는데, 도대체 왜 확실성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이 해석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른 대안이 있기를 바라며, 또한 확실성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전략을 믿으려 기를 쓰지만 말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 식으로 말해서, 구명조끼 없이 물에 던져진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 확실성을 소유한다는 것이 그처럼 매력적인가? 그런 확실성을 소유한 채 이 세상에 초대받는다는 것이 왜 그토록 특권처럼 보이는가? 삶은 안락하지 않고, 확실하지도 않다. 삶은 작은 뗏목 귀퉁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유일한 생명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의 생명(God’s kenotic life)이라면 어쩔 것인가?
이 책의 전개는 서론에서 이 책의 논제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의 통찰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예수(와 하느님)의 자기 비움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기후 변화가 초래한 “전환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돕는 도구가 될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1장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자기 비움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기후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해석을 찾아볼 것이다. 2장에서는 마찬가지로 포스토모더니즘이 공헌한 것들을 폭넓게 다룸으로써 기후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3장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자기 비움 이야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통찰력을 통합시켜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에 공헌하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4장에서는 “관계적 존재론”을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실천할 것인데, 그 세 가지 방법은 친구 모델(model of friend), 아써 맥길(Arthur McGill)의 신학, 그리고 리처드 카니(Richard Kearney)의 신학이다. 5장에서는 포스트모던 통찰이 기후 변화에 대해 갖는 의미, 기후 변화에서 인간의 역할, 그리고 “희망”으로서의 하느님의 역할에 관해, 몇 가지 결론적 논평을 정리할 것이다.
서문을 끝내면서, 나는 이 책이 전적으로 직선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일정 부분 이 주제의 성격 자체, 즉 우리들 대부분에게 극히 어렵고 새로우며 복잡한 성격 때문이다. 나는 어떤 재료를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았으며, 또한 나의 논증에서 어떤 것은 기꺼이 “벼랑 끝까지” 밀어붙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도전받고 있는 진화, 자기 비움의 그리스도교, 그리고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비추어볼 때 불가결한 것이었다. 나는 신학자로서, 포스트모던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계관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다.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 전통 속에 화육할 정도로 우리가 포스트모던 세계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똑같이 철저하게 구현한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전환점들” 가운데 하나인 기후 변화를 다루는 데서 중대한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큰 그림”을 찾을 것인데, 그것은 내가 신학자로서 더불어 작업할 필요가 있는 과학적 세계관 형태라는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 내가 더불어 작업하는 그 과학적 세계관이 우리 시대에 합의된 것이라는 점, 즉 일반적으로 정확한 세계관일 뿐 아니라 다른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는 21세기의 현상이며, 또한 우리 시대에 소통할 수 있는 실재에 대한 그림(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https://www.theguardian.com/environment/2023/nov/08/insanity-petrostates-planning-huge-expansion-of-fossil-fuels-says-un-re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