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KICS)

banner1.gif
banner2.gif

인터넷서점
바로가기

알라딘서점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top^

로그인



mobilew.jpg 

 

[최근 출간서적]

[최근 댓글]

조회 수 417 추천 수 0 댓글 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한국기독교연구소는 존 쉘비 스퐁 주교의 25권의 책들 가운데 이제까지 9권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45년 동안 매우 진보적인 성직자로 살아오신 스퐁 주교의 저술들 중에서 특히 성서 해석은 최근의 성서해석학의 획기적인 발전에 근거해서 매우 명쾌한 분석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메시지를 찾는 과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과 나의 신앙(목회)"라는 제목으로 A4 용지 두 장 정도 분량으로 글을 작성해서 댓글로 올려주시는 분들께는 한국기독교연구소가 간행한 책들 가운데 원하시는 책 5권과 앞으로 1년 동안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서적들을 모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8월 31일까지입니다.

  • ?
    한기연 2020.06.17 10:39

    이예찬 님 댓글

     

    한국기독교 연구소 이벤트에 참여합니다. 김준우 박사님 좋은 이벤트 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뉴왁 주교로 역임했던 스퐁 주교님의 글을 읽어보길 간절히 원합니다.

    ==========
    필자는 존 쉘비 스퐁 주교(뉴왁 교구)님의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을 최근에 읽어봤다. 국내 번역된 지 지났음에도 스퐁의 악명을 익히 들어 읽기에 부담을 느꼈다. 보통 성공회에서는 톰 라이트, 로완 윌리엄스와 같은 보수로 대표되는 저명한 인사들을 읽는다. 반면에 마커스 보그와 존 쉘비 스퐁이란 진보적인 인물을 읽는 것에 대해 성도들 사이에서 암막리에 싫어하는 분위기다. (최소한 내가 속한 교회에서 그렇다) 필자의 경우 마태복음이 곧 출판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이전 번역작 요한복음을 읽어보기로 했다.

    필자는 정경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을 가장 읽기 난감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후대에 저술됐고, 그 내용이 상당히 난해하다. 특히 교조주의의 시작: 니케아 신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공부하는 상기 본인에게 있어서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사상과 맞닿아 있음에도 정경의 권위를 누리는 것이 솔직히 별로였다. 이런 필자의 불온한 생각을 아는 듯, 존 쉘비 스퐁 주교님(이하 저자로 표기)도 자신의 경험담으로 요한복음 주해를 시작했다.

    저자의 복음서 해석은 교조주의 색이 짙은 한국에서 매우 낯선 개념이다. 우선 저자가 정의한 “신화 만들기”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시적 상상력은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친숙하다. 엘프와 드워프는 존재하지 않지만 돌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고 영화로 시청하면서 흥분한다. J. K. 롤링의 해리포터처럼 영국에 마법사들이 실제 살지 않지만 그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자라왔다. 앞서 경직된 사고를 대표하는 장로교 신자라 할지라도 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에 대해서 칭찬이 일색이다. 그런 C.S 루이스가 성공회 신자로, 켈트 문화 :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영미문학에 한 획을 그었다. 바로 시적 상상력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소로 “문학자의 감정과 생각을 이입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요한복음에도 시적 상상력, 문학적 장치들이 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국내에서 복음서는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문서로 역사성을 가진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문서라 말한다. PCK(통합) 교단에서는 신조는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로 시작한다. 이처럼 경직된 사고를 가진 집단에서 복음서에 대한 논증은 학계에서만 가능하지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저자는 성공회 주교로 사목 현장에서도 끝없이 “수정주의” 관점을 설명했고, 주교직을 벗어나도 일관된 목소리로 21세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문자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문자주의란 각자의 기준으로 자기만의 근본주의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동정녀로부터 탄생을 어떤 이는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온갖 이론을 가지고 와 논쟁한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보면, 그것은 “신비”라는 언어로 묶어 놓거나, “하나님이 하셨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로만 설명될 수 없다. 신학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의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이 와닿게 될 것이다.

    문자주의 극복에 놓인 문제는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놀라운 이적들이다. 저자는 요한복음 제1부에서 요한복음에 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자신이 연구한 관점을 제시한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자들의 문헌이나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영향을 다분히 받은 문서라기보다(물론, 언어는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했지만), 유대 신비주의 영향을 받은 문서라는 것이다. 이는 지혜전승 속에서 찾아가는 은혜로운 여정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진 지혜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긍정성과 세상의 타락을 이해하는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다. 여기에 신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제2부에서 표적들의 책에 다룬다. 기적은 불가능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다. 스퐁 주교는 양축 속에서 참으로 열심히 모험을 한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1) 고대 문서의 허무와 2) 의미 과잉은 광신을 만드는 종교의 참혹상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정주의”가 종교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을 더듬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청룡언월도로 대가리를 댕강 자르는 것이 아닌, 매우 섬세한 메스 칼로 수술하는 생명 살리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 이전에 실제로 나사로가 부활했을까? 그렇다면, 예수 부활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는 실로 부활을 했는가? 그리고 그 부활의 의미는 어떤가? 필자는 이 지점에서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의 <예수의 의미>와 비교하며 읽어본바, 존 쉘비 스퐁은 한 발 더 들어가 “연합”의 의미를 가지고 온다. 예수를 통한 참된 평화를 꿈꾸게 된다.

    앞서, 저자의 복음서 읽기를 엿봤다. 그리고 그 감각을 내 신앙에 적용하는 여부를 놓고 고민해보자. 지금 글을 쓰는 필자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는 이미 한 번 교회를 완전히 떠나 불가지론자로 살아봤다. 그 이후에 지금은 매우 독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바로 “믿음의 조항들”이란 질문에 당당히 맞서 대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조항은 구원받기 위해 보험 약정에 싸인 하듯 이뤄지지만, 21세기 현대 지성으로서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영역들이다. 아무리 보험회사가 보험 상품을 팔아야 한다고 해도, 고객을 망하게 하는 상품을 팔아서는 안 된다.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나만 알게 하는 복음은 가짜 복음이다. 그런 신조적 복음은 폭력성이 매우 강하다. 신조 말 그대로 믿음의 고백들처럼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나, 현실 속에서 강제되며 성직/목회자에게 억압 구조로 적용된다. 모든 신조는 시대에 따라 수정 가능하지만, 실제 수정되는 법은 적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머리는 16세기에 살아가는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신조를 넘어서 종교 간의 화합, 집단과 집단의 화합(나라, 이념 등), 개인과 개인의 화합을 이끌기 위해서 신앙인은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바로 “문자주의”다. 문자주의는 매우 고약한 녀석이다. 모두가 저마다 문자주의 하나 가지고 살아간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하나님이 하셨으니 가능하겠지’ 생각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그러나 이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여정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면 상당한 두통과 실제 삶의 자리를 위협까지 받는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않고 존재 근원 속에서 이뤄지는 합리성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종교 단체를 운영하며 폭력의 구조 속에서 타자를 억압하는지 알 수 있다. 바로 문자주의라 불리는 유령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엑소시즘은 바로 그 유령을 물리치는 것이다. 교조주의란 배타성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타자성으로 향해야 한다. 그 타자성은 내가 놓인 삶의 자리를 개혁하겠다는 의지와 주위의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21세기에 살아가는 내가 연구하고 고민하고 질문에 맞서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 “성찰과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21세기 속에서도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허무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언어 : 찬양과 설교 그리고 고백은 너무나도 문자주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시도를 몸소 저자가 보였다. 이제 후배들 그리고 시작할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새로운 여정 흐름: 배타성에서 타자성으로 향한 물결 속에 몸을 맡겨 나가자. 나는 그런 성직자가 되기를 꿈꾸며, 그런 아비로, 그런 남편으로 더 나아가 그런 한 명의 신앙인이 되고 싶다.

  • ?
    한기연 2020.06.30 07:43

    ‘기독교 혐오에서 새로운 기독교 전통으로’
    -새로운 세계로의 개안(開眼), 존 셸비 스퐁

     

    (조성기)

    2007년 늦가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당시까지 현실 기독교에 염증과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한 진보문화단체에서 알게 된 지인으로부터 (지금은 이름이 바뀐) 한 기독교모임의 세미나를 소개받고 열심히 참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진보 신학자가 이끌고 있던 모임으로 진보계열의 학자들과 목회자, 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연사들과 더불어 각종 훌륭한 서적들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과 어울리며 읽고 토론했던 대부분의 교과서들이 바로 존 셸비 스퐁 주교의 저술들이었지요. 이후 저는 스퐁의 책들과 ‘한기연’에서 출간한 책을 자양분 삼아 뒤늦은 기독교 공부에 빠져들었습니다.
    크로산을 비롯해 마커스 보그, 존 로빈슨, 게르트 타이쎈, 월터 윙크, 떼이야르 드 샤르뎅, 리처드 호슬리, 로이드 기링, 존 캅, 데이빗 그리핀까지. 그 과정에서 리처드 도킨스와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데니얼 데닛 등 과학적 무신론자들과 게리 윌스, 일레인 페이젤스, 바트 어만, 얼 도허티, 폴 니터 등을 병행해 읽으며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가운데 단연 압권이 바로 스퐁 주교의 책들을 통해 깨달은 그의 기독교관이었습니다.
    40 년 넘게 모태신앙, 그것도 목회자의 아들로 30년 이상을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저의 본심하고는 관계없는 먼 객체였을 뿐이었지요.
    제가 몸담고 있던 교단 ‘예장 합동’의 보수적 전통은, 나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고 자부했던 저로서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했던 마술적 세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그들의 기준에서 신앙이 없는 스스로가 밉고 비참할 때도 있었어요. 왜 내게는 신비체험이 없는가? 왜 내게는 방언이 없지? 하는 자괴감에 몹시도 서글펐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커가면서 제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믿어도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문제들, 일테면 복음서들 간의 사실 불일치, 예수의 부활, 동정녀 탄생, 승천과 재림,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갖가지 이적들 등이 그런 것들이었지요. 그리고 청소년기를 지나며 그런 문제들은 믿을 수 없는 신화적인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뿐이며 그것은 바로 자살에 관한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카뮈의 책을 좋아했던 청년기의 제 모습. 대학시절 운동권 주위를 맴돌았고 이후에도 진보적인 세계관에 빠져들었던 인간으로서 아직도 고대적 교리에 머물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미 파산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던 청년기의 기억만이 씁쓸하게 떠오릅니다. 그 때문에 청년기 이후의 제게 성경은 말도 안 되는 신화적 이야기들로 가득한 허무맹랑한 책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와중에 만나게 된 한기연의 책들, 특히 스퐁 주교의 책들은 제게는 새로운 개안(開眼)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의 책을 접한 후 저는 그동안 성경문자주의의 폐해에 갇혀 예수의 의미와 본질로서의 존재론적 가치를 놓쳤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흔한 말로 달을 봐야 하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봐왔던 것이었죠. 바울의 일성처럼 어른이 되면 아이의 것을 버려야 하는 데 저는, 그리고 우리 기독교는 아직도 걸음마하는 아이의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성경을 보고 예수를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스퐁의 언급 가운데 가장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이 바로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일성입니다. 이러한 일갈은, 인간 예수에게 덧씌워진 신화적 요소들의 껍질들을 벗겨내고 ‘역사적 예수’에 접근하는 작업의 중요성과 필연성을 방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그것은 전통적 교리를 따라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인간, 완전한 인간 해방의 길에 나서는 것임을 스퐁은 절실하게 보여줍니다.
    스퐁은 저술들을 통해 ‘전통적인 신앙은 죽고 새로운 신앙이 열리고 있다’고 호언합니다. 그는 교회와 서구문명이, 제국주의 종교로 몰락한 로마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초자연적 유신론의 포로가 되면서 어떻게 흑역사를 만들어왔는지(특히 <성경과 폭력>), 자신만의 화법으로 조감도와 세밀도를 모두 제시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 스스로도 ‘인간의 가슴에 신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저술했다고 언급한 <만들어진 예수, 참사람 예수>는 새로운 예수상의 정립과 현실 기독교의 혁명적 재건을 위한 필수 지침서입 니다.(제 개인적으로는 스퐁의 저술 가운데 최고의 역작이라고 봅니다.)
    ‘베들레헴 상공에 별을 없었다’, ‘예수의 부모는 소설적 합성물’ 등 도발적인 소제목들이 이채로운 이 저작에서 스퐁은, 정통 기독교 역사가 만들어 낸 전통적 상징과 형식들이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의 역사는 “전통 종교법과 나자렛 예수에게서 힘차게 흘러나오는 자유사이의 지속적인 투쟁”이었습니다. 그 투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퐁이 역설한 신학적 방법론을 통한 기독교인들의 각성된 시선과 예수의 의미를 깨닫고 그 본질에 대한 접근만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스퐁은 새로운 기독교의 미래를 입안하는 데 온 생을 바쳤습니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 등의 저술을 통해 본 훼퍼가 강조한 ‘종교없는 기독교’를 향한 첫 벽돌쌓기를 시도한 선각자이기도 하지요.
    더불어 그는 <성경을 해방시켜라><예수를 해방시켜라> 같은 저작에서, 전통 기독교가 그동안 문자적 방법으로 읽은 복음서들을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거울을 통해 유태적 시각이라는 새로운 독법으로 읽어냄으로써 복음서의 원저자들이 의도한 작법을 지혜롭게 캐치해 내기도 했습니다.
    스퐁의 열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책이라고 강조한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통해 인간 종교의 발생과 발전, 변화를 거쳐 제도화된 다양한 종교의 얼굴을 그려내는 등 종교학의 범주로까지 그의 인식 체계를 확장시키고 있지요.
    스퐁의 성서해석학과 연구론에 대한 저의 인식은 아직 미숙한 단계이지만, 그간 번역된 책을 읽으며 지난 2000년 간 인간 역사 속에서 숱한 병폐를 만들어 온 제국주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허물고 새로운 기독교의 주춧돌로 기능하는 데 그의 이론과 신앙은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혐오와 조롱은 엄청납니다. 그러한 혐오와 조롱의 배경에는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과 이에 기초한 천박한 맘몬이즘이 교회를 점령한 이유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고대적 세계관에서 배태된 경직된 교리가 더 큰 원인일수도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대적 교리의 근본적 해체와 함께 그 위에 참된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예수상을 세우고, 굳게 닫힌 교리의 수호성으로서의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데 스퐁의 연구와 저작들이 맞춤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선택만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제국주의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기존의 기독교, 독선과 무지로 인간들을 현혹한 성경문자주의의 신봉자로 남을지, 아니면 생명과 평화, 풍성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가 보여준 삶의 길을 좇기 위해 이제는 낡아져 버린 교리와 문자주의의 버리고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세워나갈지 말입니다.
    후자의 길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서 ‘스퐁’은 훌륭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뱀발.
    스퐁 주교님의 혁명적 저술들을 번역하고 소개해주신 한국기독교연구소의 임직원들과 특히 김준우 선생님께 한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드립니다. 더불어 이번과 같은 좋은 이벤트를 만들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번 이벤트를 계기로 한기연의 책들이 더욱 사랑받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
    오르카훌다 2020.07.07 15:53

    솔직히 복음서에 큰 관심은 있지 않았다. 비유에 대해서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역사서는 재미 있어서 관심이 있었지만 그러나 복음서는 비유들과 기적들이 많기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퐁 주교의 복음서 책들은 이러한 나에게 복음서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게 하였다. 기존의 복음서 해석과는 다르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져다 준 스퐁주교의 복음서 해석은 나에게 있어서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처음으로 요한복음에 대해 스퐁주교의 책을 읽었을 때 기존의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해석으로 요한복음을 다시보게 하였다. 이후 마태복음에 대해 새로 나온 책을 읽었을 때는 이전보다 더 성서의 의미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문자적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문자주의적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이후 자유주의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간격이 생겼고, 복음서나 서신서들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스퐁주교의 해석을 통하여 복음서들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신비주의 복음서인 요한복음과 유대적 배경을 지닌 마태복음은 나에게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물론 스퐁주교의 해석에 100퍼센트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다르게 생각이 들어지는 구간들도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전도사가 될 수 있겠다. 그때엔 스퐁주교의 복음서책들로 설교를 준비하겠지. 그것은 최근에 가정예배에서 내가 복음서로 설교하면서 느낀 것과 비슷하다. 요한복음으로 본문을 준비하면서 스퐁주교의 책을 읽으면 다시금 새롭게 다가오며 제대로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역시 발제나 설교를 해야 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하고 또다시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대한 책도 소망하긴 한다. 물론 고령의 스퐁주교에게는 힘들겠지만 변목사님 정도 되면 써볼 수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데, 이것은 욕심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러한 책들에 대해서 지인들에게 선물을 줄 의향도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 대한 스퐁주교의 책은 모두에게 추천할만하다. 요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읽는 좋은 책이지만 반유대주의의 도구로 쓰일 정도로 잘못 쓰여진 역사를 지닌 불쌍한 책이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의 참 의미인 신비주의를 깨닫고 나면 요한복음만한 좋은 책도 없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어쩌면 지금 세계는 요한복음 공동체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쫓겨난 난민 공동체부터 공동체로부터 멀어진 성소수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은 쫓겨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왔다. 가난하고 핍박받고 차별과 혐오로 무너져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는 존재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스퐁주교의 성경의 시대착옥적인 폭력들도 추천할만하다. 아무튼 스퐁주교의 복음서책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녹이고 있으며, 문자주의적 신앙을 넘어서 진실한 신앙으로 다가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추천할 만한 책이다.

  • ?
    가나다라 2020.08.08 17:43

    “내가 목회자로 살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요한복음에 대해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사실상 나는 그 책을 거의 불쾌하게 여겼다.” 스퐁 주교의 담백한 고백으로 책은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가장 호불호가 심한 책이다. 초신자에게, 복음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 요한복음을 먼저 읽게 하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구절도 이 책의 3장 16절이다. 오죽하면 차에 스티커까지 달고 다니니 말이다. 그리고 소수지만 사복음서 중에 요한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유인즉슨, 요한의 예수에겐 인간적인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말씀(logos)이며, 빛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십자가를 앞두고 피땀을 흘리는 겟세마네 이야기도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따라야 할 스승 예수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신앙의 대상으로만 보여진다는 것이다.

    스퐁이 요한복음을 싫어한 이유도 이와 같다. 그러나 그는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데, 책의 부제에도 나오는 ‘신비주의’이다. 신비주의란 무엇일까? 우선 스퐁이 강조하는 것은 신비주의는 문자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일점일획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요한복음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나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목자인 동시에 양의 문이다. 누구도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받아들이는 게 가능하지도 않다. 스퐁은 이런 구절들을 표지판 삼아 요한복음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자주의가 아닌 신비주의는 어떤 것일까? 가장 중점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합일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합일, 그 생명과 사랑의 내적인 연결은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가 되게 하며, 존재의 근거와 존재를 하나가 되게 한다. 계속해서 요한복음은 이 핵심으로 돌아간다. 하느님은 외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실체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참여해야 할 생명이며, 나누어야 할 사랑이며,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종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비한 합일을 향한 것이다. (266p)

    즉 생명이며, 사랑이자,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에 스며드는 것. 인간과 신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에 뿌리 내려 충만히 살게 되는 것이 신비주의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합일을 이룬 사람은 더 이상 독립된 인간이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일부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온전히 합일을 이루었던 이가 바로 요한이 이해하는 예수이다. 다시 말해, 요한에서 예수의 신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예수를 숭배할 대상으로 그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합일을 이룬 인간 속에 신성이 충만히 담겼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신성이 강조될수록 인성 또한 온전히 드러나는 역설적인 진리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들으면 사실 요한복음이 가장 레디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 한 발 더 남아있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빛이고, 말씀인 예수는 이제 우리를 그의 곁으로 부른다.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14:20),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20:17). 그리고 인간이 신을 인식한 이후로 영영 깨질 것 같지 않았던 벽. 즉 신과 인간, 무한과 유한, 주와 종, 심지어 아버지와 자녀라는 두터운 벽을 박살 내버리는 것도 요한의 예수다. 하나님인 예수는 우리를 새로운 관계로 부른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예수는 우리를 삼위가 추는 춤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 또한 자신과의 합일로,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합일로 불러낸다.

    사실 이런 사족들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요한복음은 그 자체로 꽤나 매력적인 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서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는 예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무덤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르는 예수, 배신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아니, 사실은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예수는 요한복음만이 간직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다. 공관복음과는 다른 이런 독특함과 섬세함이 요한복음의 큰 매력이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을 싫어할 사람들과, 스퐁의 책을 싫어할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좌우대통합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이제껏 얘기했던 것과 요한복음의 신학적 연구 이런 거 다 던지고 한 문장만 남긴다면 단연코 이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다.”(3:16) 이것은 신학의 입장, 좌우를 다 떠나서 우리 모두의 뿌리인 말씀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것 같이 우리 역시 그 사랑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 역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 세상을 향해 무한히 쏟아붓는 극진한 사랑이 바로 스퐁이 말하는 하느님과의 합일인 것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 비밀이다.

  • ?
    아싸라비 2020.08.28 15:45

    1. 존 쉘비 스퐁의 <유대인 예배력에 따른 예수의 의미 마태복음>을 완독했다. 이 책을 통해서 <마태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였다. 지금까지 공관복음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신화적인 내용들과 기적 사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몰랐다. 또한 마태, 마가, 누가와 같은 공관복음의 유사 내용의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순과 문제에 대해 교회 내에서 일관적인 방법으로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교회 내에서만 이야기될 뿐 교회만 빠져나오면 그러한 이야기는 다시 되뇌이지 않았다. 교인들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에겐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2. 존 쉘비 스퐁의 상기 책은 현대에 사는, 정직하게 성서를 읽고 싶은, 문자로서의 성서해석에 만족하지 않는 기독교인에게 한 가지 답을 준다. 바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복음은 교회력에 따른 전례문서로, 회당의 창작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성서를 문자로 혹은 사실로 보는 것은 성서를 곡해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스퐁은 성서 문자주의는 이방인들의 이단이라고 한다.

    3. 존 쉘비 스퐁은 오순절-안식일들-신년절-초막절-안식일들-수전절(하누카)-예루살렘으로 여행-유월절과 같은 교회력의 전례 순서에 마태복음이 창작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사실에 바탕한 예수의 전기로 이해했던 마태복음을 다르게 혹은 바로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4.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은 상호텍스트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약에서 제시되었던 성서 귀절과 인물형들이 마태복음을 창작할 때 쓰이고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아버지로 나오는 요셉은 구약의 요셉에서 왔다거나 예수 자신도 새로운 모세로서 그 시공이나 행동이 모세로부터 나온다. 또한 유월절이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의 재현이라고 보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5. 하나 덧붙이자면 공관복음을 읽을 때 마가-마태-누가의 순으로 읽어야 내용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질 것이란 점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공관복음을 읽으라고 권해주는 이가 없었는데 도움이 되었다.

    6. 존 쉘비 스퐁은 한 가지 방법론으로 상당한 분량을 서술하였다. 교회력에 따른 전례문서로 마태복음을 읽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다. 책의 목차를 봐도 10부까지 전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7. 그러나 몇 가지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내용이 있다고 보인다. 먼저,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동정녀 탄생 등을 침묵하고 있다고 그것이 정말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의 부활도 공관복음과 바울의 진술은 다르다. 부활의 증인도 다르고 그 양상도 다르다. 그러나 일관되게 내려오는 공통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점에서 스퐁 주교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한다.

    8. 문자적 해석은 결국 이방인이 유대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해석이라는 것이 이 책의 취지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문자적 혹은 역사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글들은 모두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일까? 스퐁의 마태복음 해석의 등장으로 마태복음 해석들이 갈등이 일어난 셈인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9. 스퐁은 구약의 반향과 유사성에서 신약 마태복음이 출발했다고 본다. 이러한 점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주목되고 지적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연구들과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하다.

    10. 나는 평신도다. 나는 오랫동안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서를 공부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에서는 충분한 질문을 할 수 없었고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대화가 불가능했다. 또한 중고등부를 거치면서 많은 선배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도 보았다. 세계는 변하고 성서학계와 신학계는 발전하는데 교회만 제자리였다. 그래서 답답한 면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정수 교수의 책을 비롯하여 한기연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 예수 세미나 책들이 주류였던 것 같다. 한기연의 책들은 지금까지 도움을 주었다.

    11. 앞으로 기독교는 어떻게 가야할까, 나는 어떻게 믿어야 할까에 관심이 많다. 존 쉘비 스퐁의 책은 솔직하다. 그리고 고민을 나누려고 한다. 고민하고 생각하는 현대에 사는 기독교인에게 인사이트와 계발을 줄 수 있다고 본다.

  • ?
    김형통 2020.08.31 16:43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과 나의 신앙(목회)” / 김형민

    최근 인터넷 신문은 “예장통합 대전서노회 재판국은 19일 허 목사가 2019년 펴낸 저서 '동성애는 죄인가'에서 동성애를 옹호했고, 이는 성경 레위기 20장 13절 등에 반하는 주장이라며 면직과 출교 조치를 내렸다.”고 8월 23일 자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이번 발제 인물인 John Shelby Spong의 행적과 대비되었고, 저서 인 The Sins of Scripture의 제4장 성경과 동성애에 대한 12절과 15절의 내용을 다시 읽으며, 요한복음 10:10 하반 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성경 구절에 의지하여 탈종교의 예수를 얘기하는 저자의 복음서 해석이 삶에 시사하는 바를 서술하고자 한다.

    일천 한 내 삶의 경험(성경과 삶)에서, 평생을 성경이 삶에 말하는 것을 들어 온 저자의 저서를 한두 권 읽어보고 풀어내기란 우문우답일 수밖에 없지만, 평소 애독해 왔던 2018년 생애를 마친 유진 피터슨 목사의 저서와 인식이 겹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이 땅의 교회들이 사람이 만든 전통을 지키느라고 하나님의 관계를 장식물같이 여기는 현상과 싸움에 과감히 나선 분들이며, 교회에서조차 파산당한 성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외로운 여정에 헌신한 분들이라는 내 인식의 공감이다.

    스퐁이 우리 개신교의 역사에 질문하는 것은 아마도 루터 이후에 계속 제기되어 왔던 성경이 말하는 것을 삶으로 온전히 살아내자는, 단순하면서도 단순하기에 무언가 덧씌우려는 교회의 인습을 절제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물음이요 개신교의 여러 전통을 발가벗기 워야 하는 아픔이다.
    스퐁의 저서 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에서 13장에 걸쳐 질문한 것같이 한국 개신교는 사역자들의 눈에서 비늘이 제거되어, 교회의 속박에서 성도들에게 자유를 주어, 소크라테스의 동굴에 갇힌 성도들이 삶에서 신앙을 살아내도록, 등불이 되어야 할 시급한 현실의 과제를 제기한다.

    지금 우리 개신교는 성도들이 신앙과 삶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인가. 교회는 성도들에게 신앙에서 영의 의미를 알아가도록 인도하고, 성경을 썼던 사람들이 경험한 하나님과 예수를 성도들의 삶에서 인식하도록 등불의 구실을 하여왔으며 하고있는 것인가. 아마도 극소수 일부이고 대다수는 단연코 아니라고 본다. 일부가 성경에 대한 인식을 고민하였지, 대부분은 기독교 전통이라는 퇴적층에 머물러있다는 의미이다. 스퐁은 기독교의 현실과 마주하여 유배된 성도라는 직설적인 어휘를 도입한다. 시대 상황에서 성도들이 마주하던 기존의 신앙과 삶의 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질문들을, 교리와 교권으로 덮어 온 많은 시간 들로 인해 교회 내에 생기는 구조적인 신앙과 삶의 병리 현상에 대한 상처에 유배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에게 들려진 성경을 어떻게 읽고 읽도록 할 것인가. 이것은 스퐁이 위에 말한 두 개의 저서에서 진술한바, 오늘의 교회가 여러 세월을 지나오면서 짊어지고 있는 전통이라는 퇴적층들을 걷어내고,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와 신자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다름 아닌 복음이라는 명제로 교회를 통하여 그동안 낮 익어 왔던 성경 이야기들에 대한, 스퐁이 지적하고 있는 확실성에 관한 재해석과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 전개되는 성도들의 삶과 교회 됨의 목적과 연관하여 성경을 낮 설게 대하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본다.

    시대마다 역사를 달리하며 사람들에게 주어진 지식의 등급이 진일보하고, 세상을 형성해 나가는 지혜의 영역도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스퐁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인들이 처한 삶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결부시켜, 포로기 이전과 대비 된 유배의 시기라고 명명한다. 몰락한 역사 가운데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외부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서구 문명이 의학과 과학이 발전되면서 종교관과 상충하던 시기에 성도들의 신앙과 삶도 유배의 시기에 처했을 뿐 아니라 현재의 성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이 그러하듯, 여전히 교회와 참여하는 성도들은 무덤덤하게 의식화된 습관 따라 찬송을 하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목사의 설교를 삶의 안전판으로 삼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본다. 날로 발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기독교의 이러한 무기력함이 성도들의 삶을 어떻게 규정 지워 갈 수 있으며, 하나님 곧 영의 세계에 의심을 품는 성도들 곧 유배된 성도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여기에 스퐁의 복음서 해석과 내 신앙에 대한 인식의 줄기가 맞닿아있다고 본다.

    복음, 복음서는 무엇인가. 스퐁의 저서에도 그렇고 성경학자들에 의한 신약의 처음 고백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로 본다. 여기에 단어로써 언급된 복음이 나온다.
    성경에 의하면 유대 광신자였던 바울에게 복음은 어떤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인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서에서 말한 복음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갈라디아 1장 4절에서 해석하고 있다. 곧 복음은 그리스도 인 예수라는 고백이다. 그리고 복음이 의도하는 바는 신앙과 삶의 자유라고 천명한다. 또한 스퐁은 복음과 관련하여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를 영의 사람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고 복음과 영의 의미를 풀어나간다.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며 구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유대인이 경험한 하나님의 메시야가 예수라는 당시의 정황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신약의 첫 문서를 쓴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하나님과 예수 경험을 복음서의 바탕으로 하고, 유대인 저자들이 그들이 믿어 온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약에 토대를 두어, 예수와 함께한 삶의 체험을 여러 모습으로 그들의 상상력과 결부된 언어로 고백한 것이라고 스퐁은 말하고 있다. 다만, 스퐁이 전개하는 복음에 대한 표면적인 해석의 흐름을 볼 때, 진일보하여 가는 광의의 시대를 일별하는 가운데 다윈, 도킨스, 심리학자들, 세계대전 전후의 사역자들을 등장시키면서 무신론까지 넘나드는 것을 보면, 비유신론자로 비추어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이것이 스퐁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박을 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스퐁은 신학에서 정립한 기독교의 속성인 속죄와 십자가의 구원을 요한복음에서 고백하는 사랑으로 지평을 넓히며, 사랑이 복음서 기자들이 묘사한 부활 이야기의 궁극에서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 됨이고, 유대와 기독교가 상호 관입하는 생명의 원천으로써 영이고 복음이라고 한다.

    성경을 오용하여 성도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교회는 참회합시다. 사역자들이 성경 문자 주의에 직면하여, 성경으로 삶을 살아내도록 몸부림칩시다. 성도든 아니든 인생의 모든 관계에서, 사도행전의 제자와 성도들이 본을 보인 모습을 삶에서 실행하고 확장한다면, 이것이 예수 생명의 영원함이며 스퐁이 얘기하는 기독교의 탈 종교의 예수 곧 온전한 복음이 아닐까요.

  • ?
    김형통 2020.09.05 18:58
    주소, 핸드폰 번호는 회원정보에 있습니다.
    다섯 권의 책 - 토라와정경, 하느님의 강, 아인슈타인과 랍비,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
    내 인생의 잔 -
    Omnibus Omnia! 감사합니다.
  • ?
    한기연 2020.08.31 17:51

    독후감 모집 행사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약속했던 책 선물 다섯 권과 앞으로 1년 동안 연구소가 간행하는 책 선물 보낼 수 있도록, 선물로 받고 싶으신 책 다섯 권과 주소와 핸드폰 번호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
    아싸라비 2020.09.01 14:38
    선물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책 5권 제목 남깁니다. <떠나보낸 하느님>,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 <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 <예수의 역사: 고고학과 주석학의 통합>,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 주소와 핸드폰 번호는 회원정보를 보시면 될 듯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 ?
    가나다라 2020.09.07 01:39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가이아와 기독교의 녹색화, 역사적 예수(크로산), 히브리성서 개론, 예수와 제국
    주소 - 대구시 북구 경진로 12길 8-1 (파라곤2 307호)
    번호 - 010 2314 8386 입니다. 감사합니다.
  • ?
    Mayday 2020.08.31 22:10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과 나의 신앙
    (김 종 원)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이하 요한복음)을 비대면 공부방을 열어 매주 수요일 저녁에 화상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12명의 교인이 어려운 내용을 무릅쓰고 거의 빠지지 않고 모니터 앞에서 자신이 읽은 스퐁을 말합니다. 그동안 스퐁 주교의 ‘새 시대를 위한 기독교’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를 교회 여러 공부 모임에서 읽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해방시켜라’ 또한 나에게는 기독교의 새로운 재구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세 권의 책과 다르게 ‘요한복음’은 복음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상상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서명에서부터 ‘아름다운’ ‘합일’이라는 알 수 없는 표현에 이끌렸습니다. 오래동안 사회학적 성서해석, 비평학적 성서이해, 민중의 눈으로 읽는 성서 등 새로운 방법론의 성서공부를 해왔지만 스퐁의 요한복음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성서해석의 혜안 또는 새로운 경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퐁은 요한복음이 니케아회의 이후 교부들에 의해 기독교 교리와 신조를 만드는데 이용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예수 사후 기독교공동체들을 둘러싼 사상적 배경인 이분법적 사유체계 안에서 예수를 신(하나님)으로 만들어야 했고, 이런 신학적 틀에 의해 교회제도와 권력을 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교회는 예수로부터 멀어졌고, 성서무오설과 문자주의의 성에 갇혀 기독교를 왜곡시켜 왔습니다. 스퐁은 이러한 기독교 초기부터 교회역사는 요한공동체에 나타난 ‘유대 신비주의’를 몰랐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교리와 신앙행태가 생겨났다고 하였습니다.
    유대 신비주의는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들어 삶을 밝혀주는 존재인 예수’를 찾고, 그 예수를 통해 ‘의식의 새로운 차원을 열리게 하는 신성의 스며드는 현존/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의식에서 벗어나 우주적 의식을 통해 인간 구원의 새로운 차원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문자주의에 사로잡힌 교회와 신앙은 자기만의 구원을 최우선으로 하고 아니 그것 뿐이라고 규정합니다.

    급진적이며 엄격하게 비분리주의적인 나사렛 예수에게서 요한공동체는 ‘표적 이야기’을 통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표적을 기적으로 잘못 보거나 이해하지 말도록 안내합니다. 예수 사후 로마에 대항한 유대독립전쟁에서 패해 예루살렘이 파괴, 함락되면서 갈 곳 잃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대교를 중심으로 집결하게 됩니다. 그들은 파괴된 성전을 바라보며 회당에서 유대교 신앙과 공동체를 새롭게 형성합니다. 이 무리들 가운데 요한공동체와 같은 예수를 추종하는 집단은 다른 신앙집단으로 배격, 배제당합니다. 요한공동체는 그들의 부족으로부터 다시 한번 추방당합니다. 지배층과 유대교 집단으로부터 요한공동체는 종교적 삶에 대해 위협을 받았니다. 자신들의 신앙과 메시아적 소망을 지켜나가기 위한 흔들이지 않는 믿음, 신앙이 절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죽은 예수에 대한 기억을 다시 모으고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를 희망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사유와 인식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그렇지만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처형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들만의 신비적 해석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신실한 믿음을 세워 갑니다. 당시 요한공동체가 처한 상황과 프리즘 통해서만 요한복음의 수난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말씀이 바로 이 추방당한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본 예수의 삶과 전승을 오늘 우리에게 바른 신앙을 가지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지금 한국교회 즉 한국개신교는 사회와 시민들의 지탄을 받는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가 세계와 사회에 걸림돌이 된 처지에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19 전파 진원지와 통로가 되었습니다. 감염병 상황에서 무리 지어 드리는 예배와 모임, 식사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통제하도록 방역당국이 강력히 요구했지만 ‘생명보다 귀중한 예배를 지켜야 한다’며 마치 순교라도 하듯 이를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더나아가 정부가 계획적으로 교회에 바이러스를 퍼뜨려서 감염자가 속출했다는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한국개신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극단적인 주장과 행동에도 맨 앞에 서 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합니다. 이런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와 신자들은 극우 정치집단이 되어 시민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공공성, 즉 이웃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인권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하는 교회를 사유화하고 사교(私交)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기독교와 교회에서 희망과 새시대의 가치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교회에 대해 어떤 기대나 언급도 아까워할 것입니다.

    스퐁은 이러한 한국사회와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진단할지 궁금합니다.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 갇힌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인간성의 차원 속으로 들어설 수 없’고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스퐁은 빛과 어둠, 자의식과 우주적 의식, 인간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 이런 상황들 가운데 예수가 보여 준, 신성을 내 안에서도 찾을 수 있고, 결국 신과 예수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합일, 신비롭고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종교나 제도가 아닌 교회의 본래의 모습과 신앙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전체가 이렇게 되는 것은 정말 기대할 수 없겠지요. 이런 지향을 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 둘 점점 많아지면 그것 또한 의미 있겠습니다.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하면서 스퐁의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두 책을 같이 읽는 것이 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러 가지 주제와 이슈를 잘 정리해 요한복음을 더 숙성하게 만듭니다. 특히 스퐁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그의 인생과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나와 우리 또한 스퐁과 비슷할 것입니다) 신앙의 의제들과 씨름해온 깊은 고뇌와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이 죽음에 대해 종교가 역할 하는 방식, 새로운 시대 죽음과 영생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신비주의를 접근할 때 성서에서 어떻게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를 깊은 통찰력으로 우리를 길잡이 합니다.

    앞으로 스퐁의 ‘마태복음’을 읽고 공부할 생각입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회의와 무가치의 유혹 가운데 스퐁의 복음서 해석과 통찰을 배우며 이를 극복해 볼 것입니다. 나와 우리 교회와 한국기독교가 스퐁의 신학과 사상을 읽고 배우며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기독교와 크리스찬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 ?
    김형통 2020.10.18 16:51
    지난 8월30일 이후 선택하여 받은 책 중에서,
    요한복음 62쪽 위에서12째 줄 중간에 '나그함마디의'는 '쿰란의'로 수정해야 되는 것아닌지요?
  • ?
    김형통 6 시간 전
    말씀 여쭙니다.
    제가 먼저 신청하여 받아 본 다섯권 이후, 신간 서적이 나오고있는지요.
    1년 동안 간행 서적을 보내 주신다고 하셨는데,
    궁금하여 문자드립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네오파시즘과 "인민의 아편," 그리고 예수의 길 / 김준우 1 updatefile 한기연 2020.11.02 72
공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신비에 맞서 싸우겠습니까? 5 한기연 2020.08.17 36
»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과 나의 신앙(목회) 13 update 한기연 2020.06.17 417
공지 윤석철 대하장편 <소설 예수> 1-2권 file 한기연 2020.04.27 50
공지 1+1 정당들의 헌정 유린 / 장덕진 1 한기연 2020.03.25 19
공지 '윤석열의 나라' 4 한기연 2019.09.10 123
공지 기후위기와 선거제 개혁의 필요성 / 하승수 1 한기연 2019.07.08 49
공지 돈 타령, 생명의 울부짖음 / 우리 안에 있는 제국 / 조현철 2 한기연 2019.06.21 77
공지 죽음의 설교자들 / 고병권 한기연 2019.06.18 79
공지 "세상의 똥구멍" / 신평 변호사 인터뷰 한기연 2019.04.15 73
공지 의도된 모욕 / 4 16 참사 그 이후 4 한기연 2019.04.15 58
공지 영혼 없음에 대하여 한기연 2018.07.05 164
공지 세계는 다시 냉전시대 1 한기연 2018.02.10 501
공지 이제 남성이 변해야 한다 3 file 한기연 2018.02.05 512
공지 외환위기 이후의 '망탈리테' / 김호기 5 한기연 2017.12.01 1077
공지 수많은 좌절 속에 부모나 선생이 된다는 것 한기연 2017.11.23 1536
공지 <비유의 위력> 독후감 모집 1 한기연 2012.04.18 10566
공지 <기독교의 심장><첫번째 바울의 복음> 독후감 모집, 댓글로 달아주세요 4 1 한기연 2010.02.03 42252
공지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독후감 댓글로 달아주세요 9 한기연 2009.03.31 48841
1295 백 년 전 칼 폴라니의 월급 시용법 한기연 2020.10.21 13
1294 분양가상한제 폐지 때마다 아파트, 전세값 폭등 한기연 2020.10.15 6
1293 폐지 수집 일의 기쁨과 슬픔 / 고금숙 한기연 2020.10.10 7
1292 전광훈은 어떻게 개신교계의 리더로 군림했을까/ 조현 1 한기연 2020.09.01 25
1291 한국의 현재 극심한 이념 충돌과 혐오 상황 / 전지윤 한기연 2020.08.30 14
1290 2020년 8월, 한국에서 개신교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 이현파 한기연 2020.08.23 10
1289 '저주의 굿판' 뒤에는 누가 있는가? 김택근 한기연 2020.08.23 6
1288 지구의 눈물, 인간의 눈물 / 원익선 한기연 2020.08.08 9
1287 88%가 차별금지법 찬성 한기연 2020.06.24 14
1286 감리교회, 지난 10년간 30만 명 감소 한기연 2020.06.22 14
1285 혐오 조장하는 개신교 참담하다 한기연 2020.06.18 1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93 Next
/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