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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연구소는 존 쉘비 스퐁 주교의 25권의 책들 가운데 이제까지 9권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45년 동안 매우 진보적인 성직자로 살아오신 스퐁 주교의 저술들 중에서 특히 성서 해석은 최근의 성서해석학의 획기적인 발전에 근거해서 매우 명쾌한 분석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메시지를 찾는 과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과 나의 신앙(목회)"라는 제목으로 A4 용지 두 장 정도 분량으로 글을 작성해서 댓글로 올려주시는 분들께는 한국기독교연구소가 간행한 책들 가운데 원하시는 책 5권과 앞으로 1년 동안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서적들을 모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퐁 주교의 복음서 해석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8월 31일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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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20.06.17 10:39

    이예찬 님 댓글

     

    한국기독교 연구소 이벤트에 참여합니다. 김준우 박사님 좋은 이벤트 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뉴왁 주교로 역임했던 스퐁 주교님의 글을 읽어보길 간절히 원합니다.

    ==========
    필자는 존 쉘비 스퐁 주교(뉴왁 교구)님의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을 최근에 읽어봤다. 국내 번역된 지 지났음에도 스퐁의 악명을 익히 들어 읽기에 부담을 느꼈다. 보통 성공회에서는 톰 라이트, 로완 윌리엄스와 같은 보수로 대표되는 저명한 인사들을 읽는다. 반면에 마커스 보그와 존 쉘비 스퐁이란 진보적인 인물을 읽는 것에 대해 성도들 사이에서 암막리에 싫어하는 분위기다. (최소한 내가 속한 교회에서 그렇다) 필자의 경우 마태복음이 곧 출판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이전 번역작 요한복음을 읽어보기로 했다.

    필자는 정경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을 가장 읽기 난감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후대에 저술됐고, 그 내용이 상당히 난해하다. 특히 교조주의의 시작: 니케아 신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공부하는 상기 본인에게 있어서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사상과 맞닿아 있음에도 정경의 권위를 누리는 것이 솔직히 별로였다. 이런 필자의 불온한 생각을 아는 듯, 존 쉘비 스퐁 주교님(이하 저자로 표기)도 자신의 경험담으로 요한복음 주해를 시작했다.

    저자의 복음서 해석은 교조주의 색이 짙은 한국에서 매우 낯선 개념이다. 우선 저자가 정의한 “신화 만들기”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시적 상상력은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친숙하다. 엘프와 드워프는 존재하지 않지만 돌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고 영화로 시청하면서 흥분한다. J. K. 롤링의 해리포터처럼 영국에 마법사들이 실제 살지 않지만 그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자라왔다. 앞서 경직된 사고를 대표하는 장로교 신자라 할지라도 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에 대해서 칭찬이 일색이다. 그런 C.S 루이스가 성공회 신자로, 켈트 문화 :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영미문학에 한 획을 그었다. 바로 시적 상상력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소로 “문학자의 감정과 생각을 이입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요한복음에도 시적 상상력, 문학적 장치들이 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국내에서 복음서는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문서로 역사성을 가진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문서라 말한다. PCK(통합) 교단에서는 신조는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로 시작한다. 이처럼 경직된 사고를 가진 집단에서 복음서에 대한 논증은 학계에서만 가능하지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저자는 성공회 주교로 사목 현장에서도 끝없이 “수정주의” 관점을 설명했고, 주교직을 벗어나도 일관된 목소리로 21세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문자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문자주의란 각자의 기준으로 자기만의 근본주의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동정녀로부터 탄생을 어떤 이는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온갖 이론을 가지고 와 논쟁한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보면, 그것은 “신비”라는 언어로 묶어 놓거나, “하나님이 하셨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로만 설명될 수 없다. 신학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의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이 와닿게 될 것이다.

    문자주의 극복에 놓인 문제는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놀라운 이적들이다. 저자는 요한복음 제1부에서 요한복음에 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자신이 연구한 관점을 제시한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자들의 문헌이나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영향을 다분히 받은 문서라기보다(물론, 언어는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했지만), 유대 신비주의 영향을 받은 문서라는 것이다. 이는 지혜전승 속에서 찾아가는 은혜로운 여정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진 지혜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긍정성과 세상의 타락을 이해하는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다. 여기에 신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제2부에서 표적들의 책에 다룬다. 기적은 불가능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다. 스퐁 주교는 양축 속에서 참으로 열심히 모험을 한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1) 고대 문서의 허무와 2) 의미 과잉은 광신을 만드는 종교의 참혹상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정주의”가 종교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을 더듬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청룡언월도로 대가리를 댕강 자르는 것이 아닌, 매우 섬세한 메스 칼로 수술하는 생명 살리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 이전에 실제로 나사로가 부활했을까? 그렇다면, 예수 부활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는 실로 부활을 했는가? 그리고 그 부활의 의미는 어떤가? 필자는 이 지점에서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의 <예수의 의미>와 비교하며 읽어본바, 존 쉘비 스퐁은 한 발 더 들어가 “연합”의 의미를 가지고 온다. 예수를 통한 참된 평화를 꿈꾸게 된다.

    앞서, 저자의 복음서 읽기를 엿봤다. 그리고 그 감각을 내 신앙에 적용하는 여부를 놓고 고민해보자. 지금 글을 쓰는 필자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는 이미 한 번 교회를 완전히 떠나 불가지론자로 살아봤다. 그 이후에 지금은 매우 독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바로 “믿음의 조항들”이란 질문에 당당히 맞서 대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조항은 구원받기 위해 보험 약정에 싸인 하듯 이뤄지지만, 21세기 현대 지성으로서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영역들이다. 아무리 보험회사가 보험 상품을 팔아야 한다고 해도, 고객을 망하게 하는 상품을 팔아서는 안 된다.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나만 알게 하는 복음은 가짜 복음이다. 그런 신조적 복음은 폭력성이 매우 강하다. 신조 말 그대로 믿음의 고백들처럼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나, 현실 속에서 강제되며 성직/목회자에게 억압 구조로 적용된다. 모든 신조는 시대에 따라 수정 가능하지만, 실제 수정되는 법은 적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머리는 16세기에 살아가는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신조를 넘어서 종교 간의 화합, 집단과 집단의 화합(나라, 이념 등), 개인과 개인의 화합을 이끌기 위해서 신앙인은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바로 “문자주의”다. 문자주의는 매우 고약한 녀석이다. 모두가 저마다 문자주의 하나 가지고 살아간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하나님이 하셨으니 가능하겠지’ 생각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그러나 이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여정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면 상당한 두통과 실제 삶의 자리를 위협까지 받는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않고 존재 근원 속에서 이뤄지는 합리성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종교 단체를 운영하며 폭력의 구조 속에서 타자를 억압하는지 알 수 있다. 바로 문자주의라 불리는 유령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엑소시즘은 바로 그 유령을 물리치는 것이다. 교조주의란 배타성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타자성으로 향해야 한다. 그 타자성은 내가 놓인 삶의 자리를 개혁하겠다는 의지와 주위의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21세기에 살아가는 내가 연구하고 고민하고 질문에 맞서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 “성찰과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21세기 속에서도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허무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언어 : 찬양과 설교 그리고 고백은 너무나도 문자주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시도를 몸소 저자가 보였다. 이제 후배들 그리고 시작할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새로운 여정 흐름: 배타성에서 타자성으로 향한 물결 속에 몸을 맡겨 나가자. 나는 그런 성직자가 되기를 꿈꾸며, 그런 아비로, 그런 남편으로 더 나아가 그런 한 명의 신앙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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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20.06.30 07:43

    ‘기독교 혐오에서 새로운 기독교 전통으로’
    -새로운 세계로의 개안(開眼), 존 셸비 스퐁

     

    (조성기)

    2007년 늦가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당시까지 현실 기독교에 염증과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한 진보문화단체에서 알게 된 지인으로부터 (지금은 이름이 바뀐) 한 기독교모임의 세미나를 소개받고 열심히 참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진보 신학자가 이끌고 있던 모임으로 진보계열의 학자들과 목회자, 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연사들과 더불어 각종 훌륭한 서적들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과 어울리며 읽고 토론했던 대부분의 교과서들이 바로 존 셸비 스퐁 주교의 저술들이었지요. 이후 저는 스퐁의 책들과 ‘한기연’에서 출간한 책을 자양분 삼아 뒤늦은 기독교 공부에 빠져들었습니다.
    크로산을 비롯해 마커스 보그, 존 로빈슨, 게르트 타이쎈, 월터 윙크, 떼이야르 드 샤르뎅, 리처드 호슬리, 로이드 기링, 존 캅, 데이빗 그리핀까지. 그 과정에서 리처드 도킨스와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데니얼 데닛 등 과학적 무신론자들과 게리 윌스, 일레인 페이젤스, 바트 어만, 얼 도허티, 폴 니터 등을 병행해 읽으며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가운데 단연 압권이 바로 스퐁 주교의 책들을 통해 깨달은 그의 기독교관이었습니다.
    40 년 넘게 모태신앙, 그것도 목회자의 아들로 30년 이상을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저의 본심하고는 관계없는 먼 객체였을 뿐이었지요.
    제가 몸담고 있던 교단 ‘예장 합동’의 보수적 전통은, 나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고 자부했던 저로서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했던 마술적 세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그들의 기준에서 신앙이 없는 스스로가 밉고 비참할 때도 있었어요. 왜 내게는 신비체험이 없는가? 왜 내게는 방언이 없지? 하는 자괴감에 몹시도 서글펐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커가면서 제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믿어도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문제들, 일테면 복음서들 간의 사실 불일치, 예수의 부활, 동정녀 탄생, 승천과 재림,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갖가지 이적들 등이 그런 것들이었지요. 그리고 청소년기를 지나며 그런 문제들은 믿을 수 없는 신화적인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뿐이며 그것은 바로 자살에 관한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카뮈의 책을 좋아했던 청년기의 제 모습. 대학시절 운동권 주위를 맴돌았고 이후에도 진보적인 세계관에 빠져들었던 인간으로서 아직도 고대적 교리에 머물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미 파산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던 청년기의 기억만이 씁쓸하게 떠오릅니다. 그 때문에 청년기 이후의 제게 성경은 말도 안 되는 신화적 이야기들로 가득한 허무맹랑한 책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와중에 만나게 된 한기연의 책들, 특히 스퐁 주교의 책들은 제게는 새로운 개안(開眼)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의 책을 접한 후 저는 그동안 성경문자주의의 폐해에 갇혀 예수의 의미와 본질로서의 존재론적 가치를 놓쳤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흔한 말로 달을 봐야 하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봐왔던 것이었죠. 바울의 일성처럼 어른이 되면 아이의 것을 버려야 하는 데 저는, 그리고 우리 기독교는 아직도 걸음마하는 아이의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성경을 보고 예수를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스퐁의 언급 가운데 가장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이 바로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일성입니다. 이러한 일갈은, 인간 예수에게 덧씌워진 신화적 요소들의 껍질들을 벗겨내고 ‘역사적 예수’에 접근하는 작업의 중요성과 필연성을 방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그것은 전통적 교리를 따라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인간, 완전한 인간 해방의 길에 나서는 것임을 스퐁은 절실하게 보여줍니다.
    스퐁은 저술들을 통해 ‘전통적인 신앙은 죽고 새로운 신앙이 열리고 있다’고 호언합니다. 그는 교회와 서구문명이, 제국주의 종교로 몰락한 로마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초자연적 유신론의 포로가 되면서 어떻게 흑역사를 만들어왔는지(특히 <성경과 폭력>), 자신만의 화법으로 조감도와 세밀도를 모두 제시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 스스로도 ‘인간의 가슴에 신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저술했다고 언급한 <만들어진 예수, 참사람 예수>는 새로운 예수상의 정립과 현실 기독교의 혁명적 재건을 위한 필수 지침서입 니다.(제 개인적으로는 스퐁의 저술 가운데 최고의 역작이라고 봅니다.)
    ‘베들레헴 상공에 별을 없었다’, ‘예수의 부모는 소설적 합성물’ 등 도발적인 소제목들이 이채로운 이 저작에서 스퐁은, 정통 기독교 역사가 만들어 낸 전통적 상징과 형식들이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의 역사는 “전통 종교법과 나자렛 예수에게서 힘차게 흘러나오는 자유사이의 지속적인 투쟁”이었습니다. 그 투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퐁이 역설한 신학적 방법론을 통한 기독교인들의 각성된 시선과 예수의 의미를 깨닫고 그 본질에 대한 접근만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스퐁은 새로운 기독교의 미래를 입안하는 데 온 생을 바쳤습니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 등의 저술을 통해 본 훼퍼가 강조한 ‘종교없는 기독교’를 향한 첫 벽돌쌓기를 시도한 선각자이기도 하지요.
    더불어 그는 <성경을 해방시켜라><예수를 해방시켜라> 같은 저작에서, 전통 기독교가 그동안 문자적 방법으로 읽은 복음서들을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거울을 통해 유태적 시각이라는 새로운 독법으로 읽어냄으로써 복음서의 원저자들이 의도한 작법을 지혜롭게 캐치해 내기도 했습니다.
    스퐁의 열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책이라고 강조한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통해 인간 종교의 발생과 발전, 변화를 거쳐 제도화된 다양한 종교의 얼굴을 그려내는 등 종교학의 범주로까지 그의 인식 체계를 확장시키고 있지요.
    스퐁의 성서해석학과 연구론에 대한 저의 인식은 아직 미숙한 단계이지만, 그간 번역된 책을 읽으며 지난 2000년 간 인간 역사 속에서 숱한 병폐를 만들어 온 제국주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허물고 새로운 기독교의 주춧돌로 기능하는 데 그의 이론과 신앙은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혐오와 조롱은 엄청납니다. 그러한 혐오와 조롱의 배경에는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과 이에 기초한 천박한 맘몬이즘이 교회를 점령한 이유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고대적 세계관에서 배태된 경직된 교리가 더 큰 원인일수도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대적 교리의 근본적 해체와 함께 그 위에 참된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예수상을 세우고, 굳게 닫힌 교리의 수호성으로서의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데 스퐁의 연구와 저작들이 맞춤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선택만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제국주의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기존의 기독교, 독선과 무지로 인간들을 현혹한 성경문자주의의 신봉자로 남을지, 아니면 생명과 평화, 풍성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가 보여준 삶의 길을 좇기 위해 이제는 낡아져 버린 교리와 문자주의의 버리고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세워나갈지 말입니다.
    후자의 길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서 ‘스퐁’은 훌륭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뱀발.
    스퐁 주교님의 혁명적 저술들을 번역하고 소개해주신 한국기독교연구소의 임직원들과 특히 김준우 선생님께 한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드립니다. 더불어 이번과 같은 좋은 이벤트를 만들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번 이벤트를 계기로 한기연의 책들이 더욱 사랑받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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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카훌다 2020.07.07 15:53

    솔직히 복음서에 큰 관심은 있지 않았다. 비유에 대해서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역사서는 재미 있어서 관심이 있었지만 그러나 복음서는 비유들과 기적들이 많기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퐁 주교의 복음서 책들은 이러한 나에게 복음서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게 하였다. 기존의 복음서 해석과는 다르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져다 준 스퐁주교의 복음서 해석은 나에게 있어서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처음으로 요한복음에 대해 스퐁주교의 책을 읽었을 때 기존의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해석으로 요한복음을 다시보게 하였다. 이후 마태복음에 대해 새로 나온 책을 읽었을 때는 이전보다 더 성서의 의미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문자적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문자주의적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이후 자유주의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간격이 생겼고, 복음서나 서신서들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스퐁주교의 해석을 통하여 복음서들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신비주의 복음서인 요한복음과 유대적 배경을 지닌 마태복음은 나에게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물론 스퐁주교의 해석에 100퍼센트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다르게 생각이 들어지는 구간들도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전도사가 될 수 있겠다. 그때엔 스퐁주교의 복음서책들로 설교를 준비하겠지. 그것은 최근에 가정예배에서 내가 복음서로 설교하면서 느낀 것과 비슷하다. 요한복음으로 본문을 준비하면서 스퐁주교의 책을 읽으면 다시금 새롭게 다가오며 제대로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역시 발제나 설교를 해야 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하고 또다시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대한 책도 소망하긴 한다. 물론 고령의 스퐁주교에게는 힘들겠지만 변목사님 정도 되면 써볼 수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데, 이것은 욕심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러한 책들에 대해서 지인들에게 선물을 줄 의향도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 대한 스퐁주교의 책은 모두에게 추천할만하다. 요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읽는 좋은 책이지만 반유대주의의 도구로 쓰일 정도로 잘못 쓰여진 역사를 지닌 불쌍한 책이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의 참 의미인 신비주의를 깨닫고 나면 요한복음만한 좋은 책도 없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어쩌면 지금 세계는 요한복음 공동체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쫓겨난 난민 공동체부터 공동체로부터 멀어진 성소수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은 쫓겨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왔다. 가난하고 핍박받고 차별과 혐오로 무너져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는 존재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스퐁주교의 성경의 시대착옥적인 폭력들도 추천할만하다. 아무튼 스퐁주교의 복음서책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녹이고 있으며, 문자주의적 신앙을 넘어서 진실한 신앙으로 다가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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