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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위력: 예수에 의한 픽션이 어떻게 예수에 관한 픽션이 되었는가?>(2012)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대가 존 도미닉 크로산 교수가 복음서 저자들의 예수 해석을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2천 년 동안 성경과 교리 속에 박제된 예수의 아름다운 혼과 창조적인 신학,  그리고 예수의 비폭력적인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 교육방법론을 통해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진수를 밝힌 혁명적인 책입니다. 독후감을 200자 원고지 30매 정도로 작성하여  한국기독교연구소 홈페이지 토론방에 댓글로 올려주는 분들에게는 앞으로 1년 동안 연구소가 간행하는 모든 신간서적들을 기증하겠습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예수의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이벤트를 마련합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유념하고 독후감을 작성해주면 좋겠습니다.  

  

 

예수의 생애, 죽음, 부활, 재림에 관한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인가, 픽션인가,

아니면 그 둘이 결합된 비유들인가?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나 달란트 비유를 오해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 익숙해져서 진부한 이야기들이 된 전통 신앙을 예수는 어떻게 뒤집어엎는가?

예수가 여러 형태의 비유들을 통해 정말로 가르치려고 의도했던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은 어떻게 상반되는가?

예수는 당시의 전통적인 주류 신학의 패러다임을 왜, 그리고 어떻게 바꾸었는가?

예수는 왜 도전하는 비유들(매체)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메시지)를 가르쳤는가?

마가, 마태, 누가, 요한으로 갈수록 왜 예수의 언어 폭력이 더욱 더 심해지는가?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의 참다운 위력은 무엇이며, 그 위력은 어떻게 드러났는가?

복음서 저자들이 훼손시켜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 예수의 참된 복음은 무엇인가?

유혈이 낭자한 교회사를 오늘도 되풀이하는 근본주의를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가?

이 책은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에 대한 나의 이해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가?

이 책은 성서 전반과 신학에 대한 나의 이해에 어떤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주었는가?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에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점은 무엇이며, 나의 반론은 무엇인가?

 

독후감 마감일: 2012년 6월 20일

 

 

 

 

 

 

 

 

 

 

  • ?
    한기연 2012.05.21 23:38
    보낸사람
    : 홍동우 12.05.21 08:32 주소추가  수신차단
    상세보기
     
     
    저의 집주소는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86-4 삼정오피스텔 2021호 홍동우>입니다 ^^
     

    01.

    노라존스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가 있다. "What am I to you?"라는 노래다. 옛적에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What am I do you?"라는 가사로 듣고 이해했다. 물론 문법적으로 말이 안되겠지만 어린나이에 나는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까라는 말로 해석하고 이해했다. 그리고는 사랑을 노래하는 그 노래를 음미하며 내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다.

     

    02.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What am I to you라는 노래가 당신에 대한 나의 행위의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질문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나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도 바뀌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전형적인 복음주의자 내지는 선교단체 배경 학생의 질문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께 누구일까라는 좀 더 진지하고 고뇌에 찬 질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03.

    사실상 크게 잘못 듣고 해석했던 것들이 고쳐졌던 것 같지만 사실상 큰 의미의 전환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의 전환은 나에게 커다란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평신도로써 조금이나마 신학적 지식을 쌓아가면서 내 안에 쌓여진 종교적 문화의 패러다임이 벗겨지면서 나에게 저 노래의 제목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다 주었다. 사실상 What am I to you라는 제목은 What am I 내지는 Who am I라는 질문과 함께 What are you 내지는 Who are you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서 내게 다가오게 되었다.(WhoWhat을 혼용한 까닭은 어느새 인격신에 대한 패러다임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04.

    과연 하느님은 누구? 아니 무엇일까? 사실상의 인격신의 개념마저 깨어진 나에게 하느님이란 존재는 참 애매했다.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형이상학적 인격신(아빠, 친구, 제우스, 연인)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서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가치 내지는 하느님의 통치 개념 혹은 하느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사실상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이른바 그 분은 나에게 말씀 내지는 질문하시고 나는 삶으로써 대답. 아니 그 질문의 연장선상의 삶을 연명하고 있는 중이다.

     

    05.

    그런 고민은 나에게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게끔 만들어주었다. 2000여년의 기독교사를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한국교회만의 예수와 한국교회만의 하느님을 만들고 그런 자신이 만든 우상에서 발생하는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이른바 개독교 신자의 모습은 나에게 커다란 실망 이전에 원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 원죄의 개념은 사실상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넘어서 인간의 결핍이요 부족에 대한 개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2000여년의 기독교사를 나름대로 갖고 있는 우리조차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어 있고 부족하여 우리의 가치관/세계관/고유의 역사에 따라 하느님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사실상 성서의 저자들도 그렇지않을까라는 질문이 내 삶에 다가온 것이다.

     

    06.

    어쩌면 존 도미닉 크로산 교수는 나보다 앞서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그런 질문하고 해답하는 삶. 아니 어쩌면 하느님의 질문되시는 임재를 느끼고 그 앞에서 살아가는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선지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성서저자들의 예수왜곡 내지는 그들의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생겨진 왜곡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상 우리는 그것이 진짜 왜곡인지 아니면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인정하기 싫은 예수 내지는 하느님나라의 모습인지는 죽는 날까지 알 수 없다. 다만 상식적이고 우리의 형이상학적 하느님에 대한 기대 때문에 고백하는 왜곡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하여튼 그가 콕 찝어낸 복음서의 저자들의 왜곡은 마치 이 시대의 현실을 동일하게 보는 것 같다. 레이디 가가문제라던지 일전에 있었던 데이비드 오워라고 불리우는 한 흑인목사에 의해 선포된 한국교회의 회개와 남북전쟁이 연관된 문제. 그리고 이른바 종북의 문제에 대해서 피끓게 선포하는 보수기독교 목회자 내지는 성도들의 외침을 들어볼 때 사실상 지금이나 예수부활체험을 한 성도들의 시대나 동일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07.

    갑자기 이른바 진리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상대편과 피를 토하며 씨름하고 외쳤던 루터, 칼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실상 그들은 예수의 팔복에 나오는 평화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가요. 피의 외침을 부른 책략가요. 어쩌면 빌라도 내지는 헤롯대왕에 더욱 가깝지 않았던가? 물론 나 또한 공동체내에서 나름의 가치판단 차이로 인해서 비판하고 싸우고 때로는 비인격적인 행동까지했었던 과거가 있다. 어쩌면 이런 비판들은 나에게 하는 것에 가깝겠지만 어쩌면 이런 내용들이 결국 인간의 원죄. 즉 부족하고 결핍된 인간의 실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08.

    부족하고 결핍된 인간의 실존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고 결핍된 인간을 창조하고 재창조하시며 궁극적으로 부활생명으로 완성하실 그리스도의 신앙의 전통에 서있는 우리는 사실상 구도자가 아닐까? 마치 또다시 넘어질 것이 뻔하지만 일어서서 걸으려 애쓰는 걸음마를 막 시작한 갓난아이처럼 우리 또한 인식의 한계가 있고 완전하게 왜곡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속에서 진짜 예수의 메시지를 조금이나마 파헤치고 긁어내기 위해 애써야 되는 그러한 엄중한 구도자로써의 부르심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며 좁은 길 좁은 문을 향해 걷는 예수의 제자라는 생각이 든다.

     

    09.

    크로산 교수의 은 사실상 여기에서 귀중한 가치를 담고 있다. 그가 펴낸 이 책에는 사실상 인간의 한계가 만들어내는 가치관/세계관의 집합체인 종교/문화를 향한 하늘의 외침을 분석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담겨 있다. 보통 사단의 시험과 하느님의 용인이 섞여져서 우리에게 고난/환난 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시련/연단이 온다고 해석해버리는 욥기. 야훼 하느님만이 진정한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시어머니(가족으로 예표되는)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며느리에게 축복이 주어진다고 해석되어버리는 룻기는 크로산 교수의 날카로운 칼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다. 그것은 신명기적 사고관. 즉 유대인이라는 고유의 문화/종교에 의해 굳어져버린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한 날카로운 외침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유적 이야기의 양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잠잠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비유를 알아차린 즉시 마치 나단 선지자앞에 다윗과 같이 자복하고 엎드려지며 그 분의 위대함 앞에 우리의 가치관/세계관이 부서지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는 문학적 부비트랩인 것이다.

     

    10.

    또한 크로산 교수의 하느님나라의 이해 또한 흥미롭다. 사실상 평신도로써 이것저것 책을 읽다보니 세례요한과 예수사이의 미묘한 긴장관계에 대해서 심적으로는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 기회가 되질 않아 그것을 표현한다거나 정리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그의 하느님나라의 이해는 이 미묘한 관계를 풀어내고 이해시키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크로산 교수의 안경을 통해 이해한 예수와 요한의 미묘한 긴장관계는 마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조지 레드의 설명과 흡사한 것 같았다.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미묘한 긴장관계가 흐르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예수와 세례요한의 관계 속에도 여전히 묻어나 있었다. 세례 요한이 마치 새롭고 변혁적인 하늘나라를 갈구하며 정제되지 않은 표현과 외침으로 그 하늘나라를 외치는 반역자 내지는 선지자였다면 예수는 그 하늘나라의 로고스 자체였다.(사실상 그의 이름 자체가 바로 임마누엘이 아닌가?) 세례요한이 신원의 날을 선포했다면 예수는 은혜의 날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런 긴장관계는 사실상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스라엘 공동체와 야훼의 뜻의 긴장관계이다. 사실상 세례요한은 이스라엘공동체의 민중들을 대변하는 자가 아닌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읽어내고 금욕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갈구했으니 말이다.(철저한 신명기적 사고관에 의해서) 하지만 예수는 그와는 사실상 달랐다. 신명기적 사고관에 의하면 저주 속에 있거나 저주를 받아야만 했던 세리, 문둥병자, 손마른 자, 창녀, 이방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임재를 선포했다. 그런데 이런 크로산 교수의 이야기들은 사실상 세례요한과 예수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의 이야기조차도 도전적인 비유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미끼로써 탄탄한 역할을 하고 있는듯하다.

     

    11.

    사실 성경문자주의자에서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서로의 복음서별로의 해명이 다르다는 이야기들이다. 이른바 성서비평학적 관점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것이 탄탄하게 짜여진 스토리들이며 도전적인 비유를 담고 있는 하나의 책(마치 욥/룻기와 같은)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요한도 마태도 마가도 누가도 각자가 의도하는 트로이목마 전술을 위해서 각자의 시각과 틀에 맞춰서 예수사건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여 하나의 복음서를 구성하고 있다. 그 복음서는 여전히 도전적인 비유로써 기존의 체제를 꼬집고 헤집어서 은연중의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그것은 로마로도, 기존 유대교배경의 그리스도교에도 당당하게 아니 사실상은 몰래 유통되었다. 마치 트로이목마와 같이.. 하지만 이런 류의 복음서의 역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마음을 열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자(역사적/신학적 토대위에서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자)에게는 여전히 복음서의 트로이목마전술이 통할테니 말이다.

     

     

    마무리.

     

    이미 예수는 우리의 상상속에 살아 숨쉬고 있지 아니한가?

     

    이 책의 에필로그 부분에서 크로산 교수는 마틴루터킹을 언급하며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견고한 입장을 내비쳤다. (어쩌면 이것이 도전적인 비유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물론 농담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역사와 감화/감동을 주는 인물은 사실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가 그렇지 아니한가? 어쩌면 홍길동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감화/감동을 주고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에 필요한 것은 Fact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되어있는 갈망과 부합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야기는 세대와 문화와 인종을 넘어서 동일하게 혹은 흡사하게 역사했다는 것이다. 비록 제국주의, 식민지침탈의 역사와 함께 선교되고 전파되었을지라도 예수라는 인물이 사실이던 허구이던 모든 문화와 인종을 넘어 역사하고 있다.(과연 예수이야기는 마치 이솝우화처럼 그런 보편적인 이야기일까?)

     

    개인적으로 대구성서아카데미의 정용섭 목사님을 참 좋아라한다. 그 분이 영향을 받은 판넨베르크의 관점에 의하면 세대가 지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 분의 계시가 밝히드러나는 것인데 예수가 사실이던 아니던(물론 판넨베르크와 같은 역사계시학적 관점에서는 예수의 삶과 십자가,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써 매우 중요하다.) 예수이야기는 궁극적인 하느님의 계시요 이야기라고 고백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예수이야기가 무조건 100% 사실이며 그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될수는 있겠지만 보편적 인간의 역사적 실체로써) 왜냐하면 사실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에 의해 재해석되고 변형된 사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정말 일어났던 것일까? 예수는 정말 죽었던 것일까?(사실 예수가 실존인물이느냐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겠지만) 그리고 부활했다면 그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신의 아들이라 고백되고 로고스라 고백되는 그의 부활이 왜 고작 500명에게밖에 보여지지 않았을까? 우리에게는 너무나 의문이 많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어린아이를 울음에서 그치게 하는 방법은 바로 곶감이다. 하지만 곶감이전에 호랑이가 존재했다. 호랑이가 실제로 역사적으로 임재하던 상상속에 임재하던 호랑이의 임재는 어린아이를 울음에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어린아이는 역사적실체를 경험하던 상상속의 실재를 경험하던 그는 울음에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나는 2000여년전의 사건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역사적으로 임재했던지 안했던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의 상상속에 임재하는 그 예수로부터 현실에서의 해방을 선물받았다. 그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현생활에서의 구원과 해방의 초대장을 보내온다. 이러한 현실 앞에 참여하고 그와 함께 연대하여 그의 꿈이 나의 꿈이 되는 동일화(갈라디아서 2:20)앞에 하느님나라의 샘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해방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의 해방을 덧입은 자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예수는 크로산교수의 지적처럼 시대의 문화/배경/종교에 의해 억압되고 속박되어있다. 분명 그 문화/배경/종교에 갇힌채로 선포되는 예수의 메시지는 사실상 예수라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자기동일화요. 우리 스스로의 형이상학적 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수와 연대하고 이런 예수의 삶에 참예하는 것은 곧 바알과 아세라에게 드리는 예배요. 맘몬신에게 드리는 예배가 아닐까 고민해본다. 사실상 한국교회 강단에서 반생명적, 반인권적, 비상식적 설교가 선포되고 그 이면에 맘몬신 내지는 바알과 아세라가 야훼의 탈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이런 현 실태속에서 크로산 교수의 이야기에 경청해야한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상 떨기나무로 불러내는 음성이다. 야훼가 모세를 꾀어(?)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하는 역사를 보여주었듯이 우리 또한 예수(?)를 꾀어 문화/배경/종교라는 강력한 애굽으로부터 불러내야한다. 그만이 근본주의기독교라는 문화/배경/종교로 무장하고 있는 애굽으로부터 성도들을 불러내는 모세가 되기 때문이다.(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앞에서 말했듯이 개인적으로 예수의 역사가 어디까지 진짜이고 가짜이느냐에 대한 논의는 나에게는 별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논의가 지속되고 발전되어야하는 까닭은 바로 예수로 말미암은 한국교회의 구원사건이라는 미래적 구원을 위함이다. 그런 진지한 논의야말로 예수를 근본주의기독교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케된 예수를 민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자유케된 예수를 마태/마가/누가/요한 내지는 룻기/욥기의 저자처럼 도전적인 비유로써 은근슬쩍 트로이목마전술을 활용하여 피폐한 한국기독교사회에 선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해방된 예수의 트로이목마전술이 우리 한국사회를 구원할 수 있기를 갈망하며 오늘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삶에 참예하고 연대하기를 갈망한다. 예수여 당신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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