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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리처드 로어
번역자 김준우
출판일 2020-10-15
가격 14,000원
ISBN ISBN 978-89-97339-62-4 94230 ISBN 978-89-87427-87-4 94230 (세트)


앞표지 입체.png


Eager to Love

 

The Alternative Way of Francis of Assisi

 



말라죽어가던 교회에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새로 생명을 불어넣었는가?

그리스도교는 왜 성육신 종교로 시작해서 탈육신 종교로 둔갑했는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개신교 대속신앙은 왜 예수장사꾼을 양산했는가?

빌라도가 죽이지 못했던 예수의 꿈과 정신을 교회는 어떻게 죽였는가?

독생자의 피로 용서하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왜 대개 폭력적인가?

인간의 영혼 구원만을 강조하는 신자들은 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태어날 필요도 없었는가?

예수는 정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오신 것인가?

예수와 바울로, 프란치스코가 살아낸 혁명적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보나벤투라, 스코투스의 핵심적인 신학 전통은 무엇인가?

믿음의 반대는 왜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과 확실성에 대한 요구인가?

자연 파괴와 팬데믹 사태에 대한 전통신학의 근본적 책임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되살아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신학적인 혁명은 무엇인가?


 

 

리처드 로어 신부(1943- )는 프란치스코회 사제로서, 오랜 영적 지도와 상담을 통해 애니어그램, 남성들의 영적 성숙, 역사적 예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보편적 그리스도(2019) 20권 이상의 주옥같은 책들을 발표했다. 1986년에 행동과 관상 센터를 설립하여 토머스 머튼을 이어 관상 전통을 되살려내는 일에 헌신해왔다.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영향보다 플라톤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아 성육신 종교를 탈육신 종교로 둔갑시켰다고 믿는 그는 성육신 신비주의 전통과 프란치스코의 평화주의 전통의 관점에서 에고 중심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경쟁과 폭력의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예수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따르는 사랑, 지혜, 체험 중심의 관상 전통을 통해 온전한 인격과 평화 실현의 길을 역설한다. 그는 복음을 원죄론과 대속신앙이라는 부정적 관점 대신에 하느님의 철저한 사랑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삶이 우리를 더욱 잘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에고의 변화와 신화(theosis)라는 적극적 관점에서 구원을 해명하는 그는 이 책에서 프란치스코가 되찾은 진정한 복음을 대안적 정통주의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밝혀준다. 교회가 제국의 종교권력이 된 이후,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 나라의 체제변혁적 삶을 살아내기보다는 예수 자신을 예배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예수를 따르는 모험과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던 교회를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되살려냈는지, 혁명적 복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클라라와 보나벤투라, 스코투스의 신학 전통은 무엇인지, 왜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바리사이들이 되기 쉬운지,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떻게 초인격적이며 동시에 인격적인지, 그리고 대속신앙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인류문명과 교회가 모두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한 시대에 근원적 돌파구를 제시한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비밀을 풀어냄으로써 리처드 로어 신부는 또 다시 프란치스코 전통의 기초적인 주제들을 알기 쉽고 놀랍게 적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그 영성의 영원한 특질을 우리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밝혀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느 곳에서 살든지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큰 선물이다.”

Daniel P. Horan, O.F.M, The Last Words of Jesus:

A Meditation on Love and Suffering 저자

 

리처드 로어 신부는 직조(織造)의 대가로서, 새로운 개념들을 씨줄로 삼고 새로운 이해를 날줄로 삼아 아름답고 근본적으로 통합된 전체로 짜낸다. 이 책에서 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걸어간 길이 온전함을 향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13세기의 영성을 빅뱅 우주론 속에 직조함으로써 로어 신부는 프란치스코의 삶의 방식을 우주가 펼쳐지는 선봉에 자리매김 한다. 이 새로운 책은 그의 영적인 천재성을 반영한다.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

Ilia Delio, O.S.F., Compassion:

Living in the Spirit of St. Francis 저자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지혜를 밝혀주는 가장 진정한 목소리 가운데 한 분인데, 이 영원한 지혜는 오늘날 합창으로 울려 퍼지면서 우리를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모든 문화의 중심에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말로 이 책은 깊은 관상의 삶으로 인도하며, 매일 시장 한복판에서 산() 정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델일 뿐 아니라 산에 대해 성찰하는 삶의 모델이다. 이 책을 여는 순간 지혜의 노래가 울려 퍼져 우리로 하여금 기쁨 가운데 복음을 이 세상 속에서 춤추도록 초대한다.

로어 신부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어둠 속에서 알게 된 빛을 우리가 감지하도록 손짓함으로써, 프란치스코와 그의 친구이자 자매였던 클라라를 빛과 생명의 스승이라고 가리킨다. 여기서 그는 왜 지혜가 영원한지를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고통 속에서 관상의 삶을 살 것을 제시하며, 또한 어두운 세계이지만 빛으로 가득한 자비의 장소로 안내한다. 로어 신부의 기쁨과 번득이는 유머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복음과 오늘의 세계를 대조시키는 것을 통과해서 그 자비의 장소로 가도록 도와준다.

          Fr. Dan Riley, O.F.M., Mt. Irenaeus Franciscan Mountain Retreat 창립회원

 

 



목차

 

 

 

 

머리말   옛 것과 새로운 것 __ 13

1 신비주의란 무슨 뜻인가? __ 25

2 행복한 내리막길: 고난을 겪은 이들의 내적 권위 __ 45

3 내부의 가장자리에서 살기: 단순함과 정의 __ 61

4 본거지(Home Base): 자연과 길 __ 73

5 관상: 앎의 다른 방식 __ 91

6 대안적 정통주의: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 __ 115

7 프란체스코의 천재성: 부정적인 것들의 통합 __ 139

8 가벼운 가슴과 확고한 발: 여성성과 남성성의 통합 __ 159

9 클라라의 유산: 깊이의 삶 __ 179

10 타인의 세상에 들어가기: 프란치스코와 이집트의 술탄 __ 195

11 보나벤투라: 사랑에 맡기는 것 __ 203

12 존 던스 스코투스: 멍청이 말고는 무엇이든 __ 219

13 프란치스코: 타고난 영적인 천재 __ 237

 

부록 1 나사렛 예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역동적 일체성 __ 257

부록 2 하느님이 인격인가? 신의 본성에 관한 프란치스코의 견해 __ 279

부록 3  온갖 일은 어떻게 “초래되는가”? __ 299

후기 __ 319

옮긴이의 말 __ 324


본문 속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프란치스코 이후에 나타난 지속적 영향과 완전한 새로움을 검토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아마도 그의 혁명적인 생애를 더욱 큰 놀라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5-16)

 

우리 자신의 정신, 가슴, , 영혼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너머에는 어떤 구원도 없고, 하느님을 알거나 기쁘시게 할 비밀스러운 도덕적 명령도 없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가르침, 즉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간절히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핵심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을 오직 사랑으로(Eager to Love)라고 정했다.(35-36)

 

제도화된 종교는 예수께서 결코 단 한 번도 언급하시지 않은 문제들(산아제한, 낙태, 동성애)에 훨씬 많은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또한 그분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마태오 19:21])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왔다.(131)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혁명적인 복음의 핵심이며, 바울로의 깊은 체험의 핵심이며, 또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그처럼 단순하고 우아하게 살아낸 핵심적 통찰이라고 믿는다. 부정적인 것을 통합시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야손의 집에 모였을 때처럼 여전히 온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사도행전 17:6)을 만들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장님이며(요한 9:39-41),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장님인 것이다.(140)

 

나는 대부분의 처음 종교적 훈련이 테레사의 작은 길대신에 큰 길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두렵다. 어떤 경우에는 신학교들, 수련자 교육, 심지어 주일날 강론이 전문적이며 고차원적인 훈련이 되어 바리사이주의나 공적인 자세와 가식적 태도를 훈련시키는 것이 되었지만, 대부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 문제가 항상 존재한다는 점은 복음서들 속에서 예수님의 가장 강한 말씀으로 드러났다(마태오복음 23장의 대부분은 종교와 위선에 대한 분노 때문에 우리가 숨을 죽이게 만든다).(152-53)

 

그리스도교가 지난 몇 세기에 걸쳐서 더 많은 신비가들과 성인들을 낳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또는 흔히 의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 아버지 하느님과 연합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자신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기 위해 피로 갚아드려야만 했는데, 이것은 옹졸하고 처벌하는 모습이며, 따라서 우리는 일관성 없는 메시지와 우주로 끝장나게 되었다. 바울로는 우리에게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1 고린토 13:5)라고 말했지만, 분명하게 하느님은 이 규칙에서 예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혼이나 성숙한 영성을 위해서는 먹히지 않는다. (232)


기본적으로 우리가 스코투스가 주장한 것처럼, 하느님의 완전하며 절대적인 자유와 사랑에 열심이시라는 이해를 잃어버리게 되면, 인간은 계산의 세계로 전락한다. 모든 것은 측정하고 계산하고 조금씩 베풀고 갚아야만 한다. 이것이 영웅적인 희생이나 필요한 속죄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의 심리에 끼친 영향이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성전종교가 하느님의 은총을 사고파는모든 시도들과 함께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 2:13-20). 그런 모습에서는 하느님을 달래주어야 하며, 그처럼 기분에 좌우되며 화가 나 있는 신에게는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가르친 메시지가 아니다. (232-233)

 

우리가 공식적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었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탓에,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오직 신이었던 반면에, 우리는 오직 인간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매우 중요한 요점을 놓쳤는데, 그것은 그분 안에 인간성과 신성을 함께 놓은 다음에는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서도 그와 똑같은 것을 감히 발견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포용적인 구원자(Savior), 즉 우리가 모방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구원자를 매우 배타적인 하느님으로(오직 예수님만이 하느님이라고 믿고) 예배해야 하는 속량자(Redeemer)로 둔갑시켰다.(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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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20.08.28 00:22 (*.65.240.150)

     대속론은 많은 진지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장삿속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화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마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처럼 매우 어렵게 흥정하시는 분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느님이 사랑하실 수 있고 자기 자녀들을 용서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빚을 갚을 필요가 있으며 심지어 (독생자의 피를 요구하는) 매우 폭력적인 거래를 필요로 하시는 분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이것은 화가 나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학대하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서 우리가 믿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일반적이며 매우 잘 먹혀들어가고 있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깊은 치유를 필요로 하며, 내가 남성들의 영성에 관해 쓴 책들의 핵심이었다.) Richard Rohr, From Wild Man to Wise Man: Reflections on Male Spirituality (2005),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남자들의 영성에 관한 성찰』(김준우 역, 2016), 특히 11장(아버지에 대한 굶주림), 12장(아버지로 인한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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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20.08.28 12:29 (*.65.240.150)

    역자주: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흔히 “만족설”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교회 역사에서 “가장 불행하게 성공한 주장”인 이유는 가장 일반적인 속죄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정의와 명예가 실추된 것에 대해 하느님은 반드시 당신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정의와 명예를 회복하실 필요가 있었으며 따라서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서 하느님은 만족하셨다는 이런 주장은 중세시대의 정의와 명예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특히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 나온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정의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피를 흘린 것처럼, 십자군 역시 무슬림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군주들과 하느님의 명예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피를 흘릴 필요가 있다는 정치 선동적 맥락에서 이용된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Cross Purposes: The Violent Grammar of Christian Atonement (Harrisburg,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2001), 103-4; Kwok Pui-lan, Postcolonial Imagination & Feminist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13; Elizabeth A. Johnson, Creation and the Cross: The Mercy of God for a Planet in Peril (Maryknoll, New York: Orbis, 20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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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20.10.04 06:44 (*.65.240.150)

    역자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기간(1182-1226)은 “아더 왕의 원탁의 기사”와 파르시팔(Parsifal, “완전한 바보”) 같은 성배(Holy Grail) 찾기 이야기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때(1180년대부터 1350년까지)와 일치한다. 저자는 당시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우주적 지배자로서 예배하는 일에 몰두했으며, 믿음이 사랑과 희망과 같은 삶의 문제보다는 교리 문제에 치중하여 신학조차도 “달을 바라보지는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관해서만” 옳고 그름을 다툼으로써 예수님의 위대한 복음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모험적인 영적 여정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신도들이 영적 여정의 필요성 때문에 성배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성배 찾기 여정은 에고가 원하는 작은 틀(세계)을 벗어나 예수님처럼 보다 큰 생명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이런 성배 찾기 이야기들은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 이야기 이후 2천 년 만에 다시 등장한 남성들의 영적 모험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교회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칠 뿐 아니라 참된 여성성을 잘못 오해하여 사제들은 성전종교에만 몰두하고 신자들을 “교회의 쥐새끼들”처럼 교회생활 중심으로 만드는 시대에도 남성들의 위대한 영적 여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Richard Rohr, Quest for the Grail, pp. 9, 55, 68;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6), pp.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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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20.10.04 06:46 (*.65.240.150)

    역자주: Jon Sweeney는 당시 교회와 금욕적 성자들이 이 세상을 멸시하고 실제 삶보다는 교리 논쟁에 몰두하고 또한 일곱 가지 성사(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가르쳤지만, 프란치스코는 피조세계를 받아들였으며, 신학 논쟁과 교리적 진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삶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불가지론적이었고, 또한 성사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교회 밖에서 아름다움, 노래, 숲, 타인들, 예술 속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찾고 믿음을 경축하도록 격려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중세 시대에 방랑하던 “하느님의 음유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그는 수도원의 안정과 특권과 신학연구보다는 충만한 영혼으로 자신의 신앙적 기쁨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했으며, 이런 변화가 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번째 회칙이 신학이 아니라 “복음의 기쁨”이라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When Saint Francis Saved the Church, pp.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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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20.10.04 13:51 (*.65.240.150)

    옮긴이의 말


    문명전환을 위한 혁명적 복음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가 다스리신다. 현대 그리스도교의 진짜 업무는 예수를 계속 십자가에 처형하고 또 처형해서 그의 입으로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Barbara Ehrenreich, Nickel and Dimed


    2020년은 인류의 공멸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해다. 전 세계 1만여 명의 과학자들이 “지구가 기후비상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핵 과학자회는 “인류가 최후를 맞게 될 시간이 자정 100초 전으로 다가왔다”고 선언할 만큼 대파국의 임계점이 초읽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1.5도 상승하기까지 남아 있는 탄소예산 350기가톤이 앞으로 8년 내에 모두 소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지금까지 예상대로 2100년까지 2배 증가하면 섭씨 5도 이상 상승하게 되어” 5억 명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역사상 “여섯 번째 대멸종”은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다. 1970년 이후 세계 야생동물들이 이미 평균 68%가 감소했다(The Guardian, 2020/9/10).
    그리고 올해 초부터 본격화된 코로나 팬데믹 사태는 인류문명이 봉착한 이런 전대미문의 위기를 여실히 드러낸 빙산의 일각이다. 전 세계적인 생태계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산업혁명 이후 인류문명이 지속 불가능한 문명이라는 분명한 사실과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 매우 시급하다는 사실을 이미 100만 명 넘는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인류가 하루 빨리 화석 에너지를 재생가능 에너지로 전환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상생의 길을 찾지 못하면, 조만간 공멸을 피할 수 없다는 많은 과학적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 전역에서 대형 산불과 살인적인 태풍과 홍수가 더욱 많이 발생하고 있지만 생태계 파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암담한 현실이다.
    이처럼 전 지구적인 식량과 자원의 독점으로 인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종족학살(genocide)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종자학살(biocide), 기후붕괴로 인한 지구학살(geocide)은 약한 생명체들부터 대량 학살하는 “전 지구적 아우슈비츠 체제”이며 인류 스스로 벼랑 끝을 향해 치닫는 자멸적인 체제다. 인류 역사상 인간의 죄와 악의 구조가 전 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시대, 특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시대, 그리고 적자생존과 각자도생, 숙명론과 허무주의라는 악령이 더욱 휩쓸고 있는 묵시종말적 시대는 교회가 “악마의 맷돌”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고, 상생의 가치관과 생태문명의 비전을 제시하고, 정치경제 구조를 변혁시킬 생태공동체 건설과 생태신학/영성 형성과 확산에 전념할 때다. 시장자본주의 체제의 무한 경제성장과 사적 이윤 추구는 이처럼 대량 학살의 체제이기 때문에, 에고 중심의 탐욕과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특히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뿐 아니라 만물의 하나됨과 연결성/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이 시급히 요청된다. 그러나 성서보다 “새로운 우주론”에 기초한 창조영성/신학은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를 막지 못한다. 만물의 연결성은 서로 돌봄의 기초인 동시에 포식자/피식자의 연결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Daniel Castillo, 2019:15). 따라서 성서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죄와 구조악을 극복하기 위한 구원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한 인간의 구원과 정치적 생태학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한국적 생태해방신학을 구성하는 과제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의 근본 원인인 생태위기에 대해 교단 총회들은 아무 언급조차 없다. 주일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사람일수록 생태계 문제에 대해 “지배와 정복”(창 1장) 모델을 따르기 때문이다(Wesley Granberg-Michaeloson, 1987:3). 창조주의 전능성을 믿는 초자연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기후위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David. R. Griffin, 2019:318). 이런 점에서, 동정녀 탄생을 종교적 진리가 아니라 생물학적 진리,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믿는 성서 문자주의는 결국 인간이 자행한 생태계 파괴와 그 회복에 대한 책임성을 부인하고 전능하신 하느님(또는 메시아)의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지하도록 만들 따름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한국 교회의 참담한 민낯이 드러난 점이다. 문명전환의 과제는커녕 방역마저 방해하는 반사회적 집단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특히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과 장로들은 반공주의에 입각해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극우파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들은 남북화해 정책을 계속 반대해왔을 뿐 아니라, 사립학교법 개정, 국가보안법 철폐를 계속 반대해왔다. 교회가 소유한 부동산에 대한 재산세와 목사들의 퇴직금에 대한 공정한 세금 징수도 반대해왔던 이기적인 집단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은 목사들 대다수가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동성애자들을 축복했다는 이유로 또 종교재판을 벌이고, 신학대학 교수 300여 명과 목회자 4100명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대다수 목사들은 반인권적이며, 반과학적이며, 반복음적이다. 성소수자들이 왜 한평생 숨 막히는 고통을 당하는지, 왜 성소수자들은 자살 시도를 가장 많이 하는 집단(미국의 십대 게이들의 29%, 트랜스젠더들의 40%)인지, 왜 종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신자들의 자살 시도가 38%나 더 많을 정도로 교회는 그 하느님의 자녀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지, 그들의 아픔의 원인을 헤아리기보다는 그들의 성 정체성 자체가 “죄인”이라고 율법주의적 정죄부터 하는 모습은 바리사이파의 전형적인 행태다. “7대 종단을 다 만났는데 개신교 빼고는 모두 성소수자를 인정하고 차별금지법에 찬성한다. 유림도, 천도교도 찬성인데, 개신교만 반대다”(최영애 인권위원장). 성소수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이성애자들로 바뀌지 않는 한, 하느님의 자녀들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성소수자들에게 차별금지는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또한 만물이 한 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한 피붙이”(a kindom)이며, 하느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며 무한하다는 예수님의 복음 대신에 혐오와 배제와 차별과 폭력의 앞잡이가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과 생태해방신학 구성이 시급한 때에 많은 교회는 이처럼 민족모순과 계급모순과 생태계 모순과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로 인해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을 줄일 방법을 찾기보다는 반공주의와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라는 종교적인 독선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고 있다. 성서 문자주의에 입각한 반지성주의라는 집단최면에 걸려, “자유를 향한 인류 역사”(헤겔)의 반동세력이며 혐오집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많은 대형교회들이든, 상대적으로 가난한 계층이 많은 신천지나 사랑제일교회든 간에, 많은 목사가 “인민의 아편” 판매상이 되어 자폐적인 현실 도피자들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극단주의자들을 만들어내는 첫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중독되어 있는 에고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며, 둘째 이유는 시장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에 그 착취와 모순 현실을 왜곡하고 그 희생양(성소수자들, 난민들, 이슬람 등)을 타도하는 일을 하느님이 주신 우주적인 사명으로 가르침으로써 교회 내부의 목회 세습과 성직 매매를 비롯한 부패 현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80% 이상이 혐오주의자 트럼프를 지지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종교인들의 이런 희생양 찾기는 성찰하지 않는 무사유의 결과다. 그리고 독일의 나치 정권이 이미 증명했듯이 생각하지 않는 집단은 아무리 문화가 발달했어도 온갖 잔혹행위를 자행하는 괴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죽음이 일상화되고 비대면이 ‘뉴 노멀’이 된 팬데믹 시대는 탄식과 질문, 성찰과 회개의 시간이다. 위기의 시대는 모든 껍데기가 벗겨질 수밖에 없고, 본질적 가치들만 남게 된다. 유다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지난 세기에는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세계의 구조악과 신앙의 본질적 저항을 치열하게 추구했던 많은 믿음의 선배들처럼, 지금은 성찰하고 신학을 재구성할 시간이다. 하느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 교회와 예배, 믿음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민의 아편” 판매상이 되어버린 집단적 환각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의 감각, 의지, 생각이 얼마나 중독되고 마비되었기에, “우주적 춤”(cosmic dance)을 마음껏 향유하지 못하는가? 무고한 떼죽음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 표징마저 외면하는 무감각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문명전환을 위한 교회의 첫 번째 역할은 무엇인가? 기업정치와 결탁한 종교적 우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제도종교의 껍데기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과 관련해서, 모세와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가 가르친 직접종교(브로커 없이 하느님과 만남)가 아니라 “은총의 수단들” (사제, 성소, 성일, 경전, 교리 등)을 절대화한 중보종교체제는 비판의 핵심이 된다. 예수는 중보종교체제를 반대하다가 처형당했지만, 예수의 무덤 위에 세워진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중보종교체제가 되어 직접종교를 가르친 신비주의자들을 처형했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The Lost Art of Scripture, 2019)에 따르면, 성서는 뜻밖의 역사적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염원의 문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 에서, 하갈, 이스마엘은 잔인하게 거절당한다. 대홍수, 계속되는 기근, 노예생활, 국가의 멸망과 유배생활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적 의심과 무의미성을 반영한다. 이집트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는 정책,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본문은 민족의 절멸 위기를 반영한다. 실제로 아시리아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가까이 계셔서 돌보시던 하느님은 성전 파괴 이후 자신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표현한다. “내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말고, 너희 자신의 일이나 염려해라!”는 뜻이라고 한다(p. 103).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초월적인 인격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물 전체 안에 내재하신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거룩성”을 존경해야 하며, 민족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희년법과 같은 철저한 평등주의가 요청된다. 낯선 사람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만 한다(레위기 19:34). 성서는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을 현실적 비극에 대한 극복 방법으로 제시하며 또한 하느님의 역사 개입을 염원해왔다. 그러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는 지금은 더 이상 하느님의 초자연주의적인 개입을 염원할 수 없게 만든다. 삼라만상 안에서 하느님을 인식해야 하며 생태계 파괴와 인류의 멸종은 철저하게 인간의 책임에 달려 있다. 따라서 성서를 철저히 재해석해야 하며, 예수님의 체제전복적 비전이 그만큼 중요해졌다.
    돌이켜 보면,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세음보살 신앙으로 삶의 온갖 아픔과 고난의 역사를 헤쳐 나갔다. 관세음(觀世音), “세상의 슬픈 소리를 보는” 보살은 인도에서는 남성 보살이었지만,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는 여성 보살로 그 젠더가 바뀌었다. 그 이유가 생명을 낳아 키워내고 살려내는 극진한 모성과 여성성을 통해, 가부장적인 종교들이 초래한 차별과 폭력과 죽임의 질서를 극복하려는 마음을 우주적인 원리로 본 대항문화적 통찰력과 종교성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의 차별과 폭력과 죽임을 확대시키면서 사람들의 심성마저 더욱 모질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묻게 된다. 차별금지법 제정조차 반대하는 지금의 한국 교회 대다수 설교자는 역사상 수많은 침략과 전쟁, 반란을 통해 온통 피로 물들었던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의 그 기나긴 고난으로 점철된 눈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관세음 신앙처럼 슬픔과 아픔을 온몸으로 품어 안는 어머니의 바다 같이 넓은 품을 내팽개치고,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사막종교의 막장 칼부림 버릇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의 목숨이든 온 천하보다 귀하며(마르코 8:36),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두고 찾아나서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마태오 18:12-14), 그러나 당시 성전 당국자들을 향해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태오 23:37)라고 탄식하신 예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특히 신음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되찾아야 할 때다.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분단체제만이 아니라 온갖 생지옥(세계 1위 자살률, 산업재해, 저출산)을 물려주면서, 그에 대한 최소한의 종교적 대비책을 모색하고 있는가? 약탈적 자본주의와 기후붕괴로 인해 생지옥이 더욱 악화될수록 어떻게 삶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은 어떻게 그 절망적인 강제노동과 휴지와 식수도 없어 목이 말라 도랑물을 마시며 자주 설사를 하게 되어 온몸에서 악취를 풍기는 짐승처럼 살아가던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이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기에 적합한 거룩한 성소(출 25:8)”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가?(Melissa Raphael, 2003: 82). 부헨발트 수용소 정문에 걸려 있었던 “각자 운명대로”(Jedem das Seine)라는 표어는 현재 우리 사회의 각자도생과 적자생존처럼 인간성을 박탈하는 구호였지만, “모든 유대인들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탈무드의 가르침처럼, 집단적인 생존의 위기 속에서 우리의 인간다움과 존엄성을 지켜낼 복음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하느님의 무차별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온몸으로 살아내신 예수님의 혁명적 복음만이 떼죽음의 현실 속에서 절망을 돌파할 유일한 희망이다.
    작금의 세계적인 이념전쟁은 신자유주의의 가치관에 대한 세계종교들의 대항에 그 승패가 달려 있다. 인간은 탐욕과 사적 이익에 몰두하는 이기적 존재들에 불과해서 구원할 가치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적자생존 가치관에 맞서서 세계 종교들이 얼마나 공동체적 상생의 가치관을 살아내는가에 달려 있다. 차축시대 종교들의 등장 이유와 목표는 화폐-사유재산 경제의 탐욕에 맞선 상생의 공동체 건설이었다(울리히 두크로 외, 한성수 역, <탐욕이냐 상생이냐>). 예수님도 당시 붕괴되던 공동체를 되살려내기 위해 하느님의 무차별적 사랑의 복음과 그 실천을 위한 상생 공동체 건설에 목숨을 바쳤다.
    성서문자주의와 초자연주의에 근거한 근본주의가 특히 위험한 것은 그 폭력성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박해뿐 아니라 십자군과 종교전쟁 등 학살에 앞장섰다. 특히 나치 시대의 SS대원들, 한국전쟁 당시 서북청년단, 남미 군사독재 치하의 학살단 거의 모두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또한 히틀러 등장 당시 독일 인구의 97%가 개신교인들이었으며, 그 지지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대학교수들과 개신교 목사들이었다. 반지성적인 근본주의의 위험성을 특히 경계해야만 하는 이유는 영적인 순수함을 강조하는 종교적 열심당원들(zealots)은 절대악이 초래한 위기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흔히 묵시론에 근거해서) 매우 위험한 극단주의 정치에 빠져드는 경향 때문이다(Robert Lifton, 2019).
    이처럼 생존 위기에 봉착하면 신자들조차 이처럼 폭력적이며 잔혹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르완다 학살 사태 당시, 가톨릭 주교조차 수도원 안에서 학살을 방관한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과 성서 본문에 대한 정치적 비판 정신과 철저한 제자도를 동반하지 않는 복음화는 생존 위기와 공포심 앞에서 흔히 매우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제국의 종교권력이 된 이래로 선포해왔던 구원은 예수님의 체제전복적인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로마제국은 예수님의 육신을 죽였지만, 그의 꿈과 정신은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예수님 자신을 예배하고 “영혼 구원”과 “천당”을 가르침으로써 예수님의 꿈과 정신마저 상당 부분 죽여버렸다.
    예수님의 영향보다 플라톤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고, 삶보다는 말(교리, 논쟁)에, 가슴보다는 머리에, 사랑보다는 보상에 치중해 성육신 종교가 탈육신 종교로 전락했다고 보는 저자가 쓴 이 책은 우리의 교회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이 바울로의 신학을 오해하여 “오직 믿음”을 강조하고 대속신앙을 가르친 것이 어떻게 오늘날 수많은 예수장사꾼을 만들어냈는지를 깨닫게 한다.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의 피를 요구하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왜 대체적으로 폭력적인지,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날 필요조차 없었는지, 인간의 “영혼 구원”을 강조한 교회는 왜 소수자들의 인권과 생태계 파괴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혀준다.
    많은 설교자들이 “오직 믿음”과 “대속신앙”과 “영혼 구원”과 “천당”을 가르칠 뿐 아니라 “성공과 번영의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중산층에게든 가난한 사람들에게든 시장자본주의 체제의 수탈과 무한경쟁과 고통을 잊게 만드는 “인민의 아편” 판매상이 되는 이유는 설교자들이 사회적 기존질서(status quo)에 편승하는 것이 목회 현장에서 보수적인 평신도 지도자들과 신학적으로 다투지 않고 훨씬 편하게 목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하느님의 본성과 예수님의 복음을 완전히 왜곡한 채, 사회적 기득권자들의 “기생충”이 되는 길로서, 예수님의 체제전복적 꿈과 정신을 죽이는 길이며 교회를 죽이는 길임을 이 책은 분명히 깨닫게 한다.
    분명한 것은 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노예를 해방한 반제국주의적이며 반체제적 신일 뿐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서조차 반역적 신이라는 점이다. 야훼는 애당초 가나안의 지존자 “엘”의 아들들 중 하나로서 야곱족속을 할당받은 신이었다가(신명기 32:8-9) 나중에 엘과 병합되는데, 시편 82편에서는 야훼가 여전히 “엘의 아들들” 중 하나로서, 엘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편들지만, 야훼는 가난한 소작농들을 옹호하며 다른 신들을 탄핵한다. 사회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끝장내려는 체제변혁 과업에 참여하지 않는 유대-그리스도교는 야훼와는 무관한 집단일 따름이다.
    나아가 이 책은 생태계 파괴와 팬데믹 사태에 대해 전통 신학의 근본적인 책임은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특히 전 세계적인 경제적 불황만이 아니라 기후 재난들과 대규모 난민들로 인해 생존 조건이 더욱 악화됨으로써 이미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극우파 혐오주의자들이 사람들의 깊은 절망감을 이용하여 더욱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서 조만간 북반구에서 식량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때, 교회가 또다시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같은 폭력 집단의 선봉에 서게 되지 않을 수 있는 신학적 대책은 무엇일지 성찰하게 만든다.
    결국 교회가 이처럼 문명전환을 위한 진보적 역할을 하기는커녕 “인민의 아편” 판매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우리의 에고 자폐증을 치유하지 못한 탓이다. 따라서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은 “더욱 풍성한 생명”을 위한 복음을 어떻게 우주-지구-생명-인류-문화 진화의 관점에서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복음이 우주적인 원리인 다양성, 서로 주체성, 친교를 확장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의 첫 번째 대안은 정통주의 신학에 결여된 복음과 구원의 우주적 차원을 회복하는 길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빅뱅에서 시작된 화육과 “우주적 알”(cosmic egg)이 우리의 정체성의 일차적 맥락이다. 우리의 구원을 가장 방해하는 에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실재 중심의 겸손한 신학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래야만 삼라만상의 모든 인연과 같은 근원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적대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 번째는 특히 개신교 전통의 “오직 믿음” 대신에 “오직 사랑”을 복음의 핵심으로 회복하는 길이다. 루터에게도 “믿음을 통한 칭의”는 우리가 자신의 불치병을 깨닫고 전능한 의사이신 하느님의 손(은총)에 완전히 내맡기는 결단이다. 하느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퇴원하여 세상에서 “정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로마 6:13). 말(신학, 설교)과 머리 중심의 탈육신 종교에서 벗어나 온몸으로 하느님의 아픔에 참여하고 상생을 실천하는 진정한 성육신 종교를 회복하는 길이다.
    세 번째는 하느님을 철저히 사랑한 예수님을 인간 영혼의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본보기”로 이해하고, 예수님과 프란치스코처럼 기존체제의 변두리 밑바닥에서 우리들 자신이 본보기가 되는 길이다. 대속신앙에 대한 대안적 돌파구가 여기에 있다. 본보기가 보여주는 실천적 사랑의 전염만이 고통당하는 이들 앞에서조차 돌처럼 굳은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에 열한 번째로 번역된 저자의 이 책은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의 구원과 우리의 이웃과 생태계에 대한 책임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매우 건강한 대안이다. 문명전환의 책임성과 교회를 죽이는 “인민의 아편”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우 시급하게 요청되는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을 강조한 건설적인 종교비판이기도 하다.
    성서 전체, 특히 예수와 바울로의 복음이 일차적으로 제국신학과 성전신학 같은 거짓신학과의 싸움인 이유는 그런 거짓신학의 특징이 에고의 팽창과 차별, 혐오, 배제와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짓신학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본성과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와 구원을 왜곡한 것이다. 그러나 빅뱅 이후 삼라만상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 그리스도”를 역설하는 이 책의 저자는 프란치스코의 지혜를 따라 날카로운 신학 논쟁이 아니라 “대안적 정통주의”를 온몸으로 살아내는 방법을 부드럽게 우리의 마음에 호소한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팬데믹 사태로 인해 고통을 겪는 우리들이 예수님과 바울로와 프란치스코가 살아낸 혁명적 복음의 기쁨을 새롭게 발견하고, 매순간 함께 찬미하며 견딜 수 있는 지혜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아가 오늘날의 암담한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근원적 방법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이 책을 통해서 이분법적 경쟁과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앞장서고 있는 우리가 “인민의 아편” 판매상 역할을 회개하고, 문명전환을 위한 예수님의 혁명적인 복음 운동에 새로운 불씨가 살아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
    한기연 2020.10.06 10:20 (*.65.240.150)

    저자는 독자들이 프란치스코의 생애애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 책을 썼다. 그의 생애나 시대, 당시 교회의 상황에 대해 미리 알고 싶은 독자들은 14, 57, 82 페이지에 있는 역자주들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
    한기연 2020.11.08 07:18 (*.65.240.150)

    249페이지 첫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미리 좀 더 쉽게 풀어 번역하지 못한 것 사과드립니다.



    우리가 “행동과 관상 센터”의 핵심 원리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듯이, “우리는 생각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방식에 따라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191 페이지 첫째 문단
    관상에 근거한 클라라의 철저히 단순한 복음적 생활방식이 없었다면, 에서 "없었다면"을 "없었던"으로 수정합니다.

    242 페이지 첫째 문단도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파들에서 우리의 역사의 상당 부분이 인간의 “첫 번째 의식,” 즉 주로 안전, 힘을 통한 질서와 소속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245 페이지 둘째 문단도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인간발달의 전문가들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도 우리들 자신보다 약간 뛰어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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