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ger to Love
The Alternative Way of Francis of Assisi
말라죽어가던 교회에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새로 생명을 불어넣었는가?
그리스도교는 왜 성육신 종교로 시작해서 탈육신 종교로 둔갑했는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개신교 대속신앙은 왜 예수장사꾼을 양산했는가?
빌라도가 죽이지 못했던 예수의 꿈과 정신을 교회는 어떻게 죽였는가?
독생자의 피로 용서하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왜 대개 폭력적인가?
인간의 영혼 구원만을 강조하는 신자들은 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태어날 필요도 없었는가?
예수는 정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오신 것인가?
예수와 바울로, 프란치스코가 살아낸 혁명적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보나벤투라, 스코투스의 핵심적인 신학 전통은 무엇인가?
믿음의 반대는 왜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과 확실성에 대한 요구인가?
자연 파괴와 팬데믹 사태에 대한 전통신학의 근본적 책임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되살아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신학적인 혁명은 무엇인가?
리처드 로어 신부(1943- )는 프란치스코회 사제로서, 오랜 영적 지도와 상담을 통해 애니어그램, 남성들의 영적 성숙, 역사적 예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보편적 그리스도』(2019) 등 20권 이상의 주옥같은 책들을 발표했다. 1986년에 “행동과 관상 센터”를 설립하여 토머스 머튼을 이어 관상 전통을 되살려내는 일에 헌신해왔다.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영향보다 플라톤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아 성육신 종교를 탈육신 종교로 둔갑시켰다고 믿는 그는 성육신 신비주의 전통과 프란치스코의 평화주의 전통의 관점에서 에고 중심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경쟁과 폭력의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예수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따르는 사랑, 지혜, 체험 중심의 관상 전통을 통해 온전한 인격과 평화 실현의 길을 역설한다. 그는 복음을 원죄론과 대속신앙이라는 부정적 관점 대신에 하느님의 철저한 사랑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삶이 우리를 더욱 잘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에고의 변화와 신화(theosis)라는 적극적 관점에서 구원을 해명하는 그는 이 책에서 프란치스코가 되찾은 진정한 복음을 “대안적 정통주의”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밝혀준다. 교회가 제국의 종교권력이 된 이후,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 나라의 체제변혁적 삶을 살아내기보다는 예수 자신을 예배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예수를 따르는 모험과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던 교회를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되살려냈는지, 혁명적 복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클라라와 보나벤투라, 스코투스의 신학 전통은 무엇인지, 왜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바리사이들이 되기 쉬운지,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떻게 초인격적이며 동시에 인격적인지, 그리고 대속신앙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인류문명과 교회가 모두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한 시대에 근원적 돌파구를 제시한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비밀을 풀어냄으로써 리처드 로어 신부는 또 다시 프란치스코 전통의 기초적인 주제들을 알기 쉽고 놀랍게 적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그 영성의 영원한 특질을 우리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밝혀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느 곳에서 살든지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큰 선물이다.”
—Daniel P. Horan, O.F.M, The Last Words of Jesus:
A Meditation on Love and Suffering 저자
“리처드 로어 신부는 직조(織造)의 대가로서, 새로운 개념들을 씨줄로 삼고 새로운 이해를 날줄로 삼아 아름답고 근본적으로 통합된 전체로 짜낸다. 이 책에서 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걸어간 길이 온전함을 향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13세기의 영성을 빅뱅 우주론 속에 직조함으로써 로어 신부는 프란치스코의 삶의 방식을 우주가 펼쳐지는 선봉에 자리매김 한다. 이 새로운 책은 그의 영적인 천재성을 반영한다.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
— Ilia Delio, O.S.F., Compassion:
Living in the Spirit of St. Francis 저자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지혜를 밝혀주는 가장 진정한 목소리 가운데 한 분인데, 이 영원한 지혜는 오늘날 합창으로 울려 퍼지면서 우리를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모든 문화의 중심에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말로 이 책은 깊은 관상의 삶으로 인도하며, 매일 시장 한복판에서 산(山) 정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델일 뿐 아니라 산에 대해 성찰하는 삶의 모델이다. 이 책을 여는 순간 지혜의 노래가 울려 퍼져 우리로 하여금 기쁨 가운데 복음을 이 세상 속에서 춤추도록 초대한다.…
로어 신부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어둠 속에서 알게 된 빛을 우리가 감지하도록 손짓함으로써, 프란치스코와 그의 친구이자 자매였던 클라라를 빛과 생명의 스승이라고 가리킨다. 여기서 그는 왜 지혜가 영원한지를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고통 속에서 관상의 삶을 살 것을 제시하며, 또한 어두운 세계이지만 빛으로 가득한 자비의 장소로 안내한다. 로어 신부의 기쁨과 번득이는 유머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복음과 오늘의 세계를 대조시키는 것을 통과해서 그 자비의 장소로 가도록 도와준다.
— Fr. Dan Riley, O.F.M., Mt. Irenaeus Franciscan Mountain Retreat 창립회원
목차
머리말 옛 것과 새로운 것 __ 13
1장 “신비주의”란 무슨 뜻인가? __ 25
2장 행복한 내리막길: 고난을 겪은 이들의 내적 권위 __ 45
3장 내부의 가장자리에서 살기: 단순함과 정의 __ 61
4장 본거지(Home Base): 자연과 길 __ 73
5장 관상: 앎의 다른 방식 __ 91
6장 대안적 정통주의: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 __ 115
7장 프란체스코의 천재성: 부정적인 것들의 통합 __ 139
8장 가벼운 가슴과 확고한 발: 여성성과 남성성의 통합 __ 159
9장 클라라의 유산: 깊이의 삶 __ 179
10장 타인의 세상에 들어가기: 프란치스코와 이집트의 술탄 __ 195
11장 보나벤투라: 사랑에 맡기는 것 __ 203
12장 존 던스 스코투스: 멍청이 말고는 무엇이든 __ 219
13장 프란치스코: 타고난 영적인 천재 __ 237
부록 1 나사렛 예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역동적 일체성 __ 257
부록 2 하느님이 인격인가? 신의 본성에 관한 프란치스코의 견해 __ 279
부록 3 온갖 일은 어떻게 “초래되는가”? __ 299
후기 __ 319
옮긴이의 말 __ 324
본문 속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프란치스코 이후에 나타난 지속적 영향과 완전한 새로움을 검토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아마도 그의 혁명적인 생애를 더욱 큰 놀라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5-16쪽)
우리 자신의 정신, 가슴, 몸, 영혼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너머에는 어떤 “구원”도 없고, 하느님을 알거나 기쁘시게 할 비밀스러운 도덕적 명령도 없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가르침, 즉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간절히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핵심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을 『오직 사랑으로』(Eager to Love)라고 정했다.(35-36)
제도화된 종교는 예수께서 결코 단 한 번도 언급하시지 않은 문제들(산아제한, 낙태, 동성애)에 훨씬 많은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또한 그분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마태오 19:21])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왔다.(131쪽)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혁명적인 복음의 핵심이며, 바울로의 깊은 체험의 핵심이며, 또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그처럼 단순하고 우아하게 살아낸 핵심적 통찰이라고 믿는다. 부정적인 것을 통합시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야손의 집에 모였을 때처럼 여전히 “온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사도행전 17:6)을 만들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장님이며(요한 9:39-41),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장님인 것이다.(140)
나는 대부분의 처음 종교적 훈련이 테레사의 “작은 길” 대신에 “큰 길”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두렵다. 어떤 경우에는 신학교들, 수련자 교육, 심지어 주일날 강론이 전문적이며 고차원적인 훈련이 되어 “바리사이주의”나 공적인 자세와 가식적 태도를 훈련시키는 것이 되었지만, 대부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 문제가 항상 존재한다는 점은 복음서들 속에서 예수님의 가장 강한 말씀으로 드러났다(마태오복음 23장의 대부분은 종교와 위선에 대한 분노 때문에 우리가 숨을 죽이게 만든다).(152-53)
그리스도교가 지난 몇 세기에 걸쳐서 더 많은 신비가들과 성인들을 낳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또는 흔히 의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 아버지 하느님과 연합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자신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기 위해 피로 갚아드려야만 했는데, 이것은 옹졸하고 처벌하는 모습이며, 따라서 우리는 일관성 없는 메시지와 우주로 끝장나게 되었다. 바울로는 우리에게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1 고린토 13:5)라고 말했지만, 분명하게 하느님은 이 규칙에서 예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혼이나 성숙한 영성을 위해서는 먹히지 않는다. (232)
기본적으로 우리가 스코투스가 주장한 것처럼, 하느님의 완전하며 절대적인 자유와 사랑에 열심이시라는 이해를 잃어버리게 되면, 인간은 계산의 세계로 전락한다. 모든 것은 측정하고 계산하고 조금씩 베풀고 갚아야만 한다. 이것이 영웅적인 희생이나 필요한 속죄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의 심리에 끼친 영향이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성전종교가 하느님의 은총을 “사고파는” 모든 시도들과 함께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 2:13-20). 그런 모습에서는 하느님을 달래주어야 하며, 그처럼 기분에 좌우되며 화가 나 있는 신에게는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가르친 메시지가 아니다. (232-233)
우리가 공식적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었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탓에,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오직 신이었던 반면에, 우리는 오직 인간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매우 중요한 요점을 놓쳤는데, 그것은 그분 안에 인간성과 신성을 함께 놓은 다음에는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서도 그와 똑같은 것을 감히 발견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포용적인 구원자(Savior), 즉 우리가 모방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구원자를 매우 배타적인 하느님으로(오직 예수님만이 하느님이라고 믿고) 예배해야 하는 속량자(Redeemer)로 둔갑시켰다.(269)
대속론은 많은 진지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장삿속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화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마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처럼 매우 어렵게 흥정하시는 분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느님이 사랑하실 수 있고 자기 자녀들을 용서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빚을 갚을 필요가 있으며 심지어 (독생자의 피를 요구하는) 매우 폭력적인 거래를 필요로 하시는 분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이것은 화가 나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학대하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서 우리가 믿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일반적이며 매우 잘 먹혀들어가고 있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깊은 치유를 필요로 하며, 내가 남성들의 영성에 관해 쓴 책들의 핵심이었다.) Richard Rohr, From Wild Man to Wise Man: Reflections on Male Spirituality (2005),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남자들의 영성에 관한 성찰』(김준우 역, 2016), 특히 11장(아버지에 대한 굶주림), 12장(아버지로 인한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