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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트라우마

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셸리 램보 지음, 박시형 옮김

Spirit and Trauma: A Theology of Remaining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0.



인간의 고통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

 

램보는 트라우마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에 근거해서,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이 생겨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주장을 다시 검토한다. 램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성토요일(Holy Saturday)의 관점에서 재검토한다. 램보는 트라우마의 여파 속에서 살아가는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신학을 추구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남아있기”(remaining)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그녀는 전통적인 구원 개념에 도전하는 새로운 성령 신학을 제안한다. 이 책을 통해, 램보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깊음 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의 끈질긴 지속까지 아우르는 성령의 증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셸리 램보는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서, 트라우마와 폭력에 대한 종교적 응답에 초점을 맞추어 그리스도교 전통을 탐구하며, 최근에 Post-Traumatic Public Theology (Stephanie Arel과 공저, 2016)Resurrecting Wounds: Living in the Afterlife of Trauma (2017)를 발표했다.


이 책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에 근거해서 십자가와 부활, 구원을 재해석하고 아우슈비츠 이후의 관점에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새롭게 제시한 책이다. 전통신학의 십자가 해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희생과 죽음 중심의 구원론을 만들었으며, 부활과 구원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지옥 정복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죽음을 이긴 부활의 승리로 해석되는데, 이런 해석은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성공을 약속하지만, 승리에 대한 보장이 없는 트라우마의 끈질긴 고통에 대해 침묵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위험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승리 중심의 허울 좋은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이라고 보는 저자는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성토요일의 심연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발타자르의 설교들, 스페이어의 지옥에 대한 환상들,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와 애제자에 관한 본문들, 캐서린 켈러의 성령 해석 등에 근거해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제시한다. “성토요일의 성령은 죽음과 삶 사이에 아주 미약한 모습으로 현존하며 예수의 죽음과 제자들의 활동을 목격하고 증언한다. 저자는 숨, 위로자,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고, 성령의 지속적인 목격과 증언을 사랑과 동일시한다. 죽음과 삶 사이의 증언이 말하는 진실은 사랑이 남았고, 우리가 그 사랑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박시형 목사는 서강대학교 수학과,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Boston College에서 영성 전공으로 신학석사를 마쳤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는 공동체를 꿈꾸며 2018년부터 경기도 광주에 야곱의 우물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죽음과 삶 사이에 존재하는 끔찍한 영역을 탐구하면서, 램보는 트라우마 이론, 신학, 성서 연구의 통찰력들을 결합시켜 성령에 대한 풍부한 어휘들을 발전시킨다. 저자의 독창적인 작업은 삶의 견디기 어려운 상황들에 대해 신학이 빛을 비춰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증언한다. 나는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KWOK PUI-LAN, Episcopal Divinity School

 

이 책은 구성 신학에서 새로운 목소리의 도래를 알린다. 램보는 다양한 자료들에 기초해서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의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과 씨름하면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인간의 고통이라는 트라우마 경험에 응답하는 새로운 길들을 제시한다.”

EMILY A. HOLMES, Christian Brothers University

 

트라우마 이론에 해박하고 또한 뛰어난 해석가의 재능을 갖춘 램보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 즉 눈에 띄게 폭력적인 죽음과 기괴한 생존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램보가 다시 들려주는 그 이야기는 주석적이고, 건설적이며, 목양적이다. 램보가 전하는 이야기는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MARK JORDAN, Harvard Divinity School

 


옮긴이의 말 __ 7

서문 (캐서린 켈러) __ 13

감사의 말씀 __ 19

 

서론 __ 23

트라우마 27 / 신학 29 / 방법 37 / 개요 43 / 결론 46

 

1. 트라우마를 증언함 __ 49

트라우마라는 렌즈 54 / 증언 62 / 트라우마를 이론화하기 70

트라우마의 증언과 신학 78 / 증언의 신학적 모델들 93


2. ()토요일을 증언함 __ 107

성토요일의 발견 114 / 성토요일을 기록함 124 /

성토요일을 신학화하기 142 / 십자가 형태의 증언 153 /

중간의 성령을 향하여 161

 

3. 요한복음의 증언 __ 177

막달라 마리아 180 / 애제자 197 / 고별 214 /

남아 있기 218 / 넘겨줌 224 / 중간의 영을 향하여 230 /

 

4. 중간의 성령 __ 237

생명의 영 242 / 심연의 성령 244 / 성령은 숨이다 248 /

영은 시간 속에서 다르게 움직인다 265 /

성령은 사랑이다 274 / 사랑이 남았다 281 / 결론 288

 

5. 사랑 안에 남아 있기 __ 295

구원하는 자기 299 / 20081, 뉴올리언스 305 /

러브스토리 313 / 중간으로부터의 구원 319 /

저류를 추적하기 329 / 삶을 느끼기 331 /

신학의 증언 336 / 사랑 안에 남아 있기 347



옮긴이의 말

    

한 권의 책이, 그것도 학문적인 작업을 담은 책이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그런 책이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나의 딸 이레는 임신 251일만에 810g의 몸무게로 태어났다. 이레가 NICU(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수없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다섯 달 동안, 우리 부부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에 있었다.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고, 삶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레가 세상에 온 지 3개월이나 되는 동안 우리는 딸을 한 번 안아볼 수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없었다. 하루에 20, 우리에게 허락된 그 시간 동안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경계처럼 보이는 NICU의 유리창 밖에서 어린 딸을 면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어린 딸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 그것은 죽음과 마주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갓 태어난 딸아이의 생명을 계속해서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이 뒤섞인 트라우마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처절하게 경험했다. “하느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공허한 울림에 불과했고, “고통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야기는 저주처럼 들렸다.

유학 시절 우연히 수업에서 발표하기 위해 읽었던 이 책은 내가 그저 버텨냈다, 아니 여전히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트라우마와 고통 속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책을 읽으며 수없이 울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나의 고통의 의미를 이 책이 설명하고 있었다. “죽음의 고통을 목격하는 성령이라는 신학적 통찰은 내가 그동안 씨름했던 고통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 책은 트라우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램보는 기존 신학이 트라우마 경험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통신학이 신앙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혹은 신앙으로 죽음은 극복될 수 있다”)는 지나친 승리주의(triumphalism)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램보는 트라우마가 죽음과 마주했던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며, 생존자는 트라우마 사건 이후에도 반복해서 그 트라우마를 다시 경험하기 때문에 승리주의로는 그들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생존자들은 트라우마 사건의 플래시백(flashbacks: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과 몸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포함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재경험한다. 트라우마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트라우마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그 중 일부는 평생 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통해 램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내러티브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램보는 성토요일(Holy Saturday)에 주목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예수의 갑작스럽고도 처참한 죽음 앞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고통 가운데 있어야만 했던 성토요일의 제자들, 성령은 그 제자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램보는 신앙으로 죽음을 정복하는 승리와 기적이 없었던 그 토요일에, 성령이 모든 고통을 목격하며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다고 역설한다.

램보는 성토요일의 성령을 중간의 성령(the middle Spirit)이라고 명명한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고, 삶이 죽음을 이길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곳, 성토요일의 심연(abyss)과 같은 그곳이 바로 성령이 있는 중간이다. 램보는 자신의 성령론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의 창조론을 언급한다. 켈러는 전통신학의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가 하느님을 질서를 부여하는 지배의 주체로 상정함으로써 힘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다양성을 묵살하는 내러티브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전통신학과는 달리 켈러는 혼돈(chaos)으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면서,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한 혼돈의 심연에 있는 하느님의 영(ruach elohim)에 주목한다. 켈러는 창조 이야기 속에서 혼돈의 심연에 있는 성령은 지배하고 다름을 묵살하는 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들과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는 영이라고 주장한다. 램보는 켈러의 성령론을 언급하며 중간의 성령역시,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성토요일의 심연 위를 운행하는 영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수난에 대한 전통신학의 내러티브가 죽음 뒤에 이어지는 부활에 성급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램보는 성토요일의 어둠 가운데 머물러 있는 성령에 집중한다. 그리고 성토요일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혼돈 속에서, 좌절과 절망을 목격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NICU 창문 앞에서, 나는 여리디 여린 작은 몸으로, 죽음 앞에서 삶을 향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레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는 그 바라봄(witness)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아내의 고통을, 내 아내는 나의 고통을, 그리고 우리 부부는 이레의 고통을, 이레는 우리의 고통을 목격했고, 그것이 바로 우리 가족의 사랑이었다. 하느님이 부재한 것과 같았던 그 고통의 한 가운데에, 말없이 우리의 고통을 목격하신 성령의 함께 하심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램보는 신앙의 승리로 고통은 사라진다승리주의의 메시지는 트라우마의 후유증(aftermath, 예를 들면 PTSD)을 거듭해서 겪는 생존자들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트라우마 생존자들의 사라지지 않는 고통과 아픔은 곧 승리를 주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마저도 무너뜨리게 된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성토요일, 성령이 제자들과 예수님이 겪었던 고통의 목격자(witness)가 되신 것처럼, 트라우마라는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목격자가 되신다는 셸리 램보의 신학적 통찰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랑을 보여준다. 램보는 성토요일의 이야기가 비극도 승리도 아닌,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는가?”(이 책 마지막 페이지)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신학은 승리주의로 만연해 있다. 램보의 지적대로, 승리주의는 계속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의 아픔을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고통은 신앙의 힘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빨리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선포되며, 지속적인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은 부족한 신앙인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부서를 소망부희망부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항구적인 장애조차 천국의 소망을 통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승리주의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애를 겪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항구적인 장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희망이나 죽음 뒤에 있을 천국의 소망만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삶의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뿐 아니라, 승리주의는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의 어려움에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의 문제가 그저 개인의 문제혹은 그들의 행동의 결과로 해석하게 한다. “고통은 신앙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승리주의는 사회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또 다시 절망하게 만드는 일이다. 승리주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상정하고 있지만, 모순되게도 고통의 문제를 한 개인의 부족한 신앙 탓으로 돌리며 남아 있는 희망마저도 앗아가 버린다.

트라우마나 항구적인 장애와 같이 사라지지 않는 고통은 우리들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 책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런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승리주의로 만연한 한국교회가 인간의 깊은 절망과 고통에 대해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은 트라우마가 억압되고 부정되는 것은 개인의 의식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한다(트라우마, 29). 어느 세월호 희생자 가족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제 좀 그만하라는 말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노컷뉴스, 2016416).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세월호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를 억압하고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고통을 지워버리려고 하거나, 없었던 일처럼 살아가려고 해도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를 다루기 위해서는 트라우마 생존자와 목격자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트라우마, 28). 우리는 특히 세월호 참사라는 트라우마 이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그저 고통을 묵묵히 목격했던 수많은 목격자들과 함께 했다. 비록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고통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많은 목격자들의 연대가 작지만 희망의 불씨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전히 트라우마들로 가득 차 있으며, 트라우마 생존자들과 함께 할 목격자들을 필요로 한다.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 속에서 처절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우리는 고통의 목격자요 증인으로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과 쌍용차 사태, 용산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억울한 죽음들이 너무나 많다. 또한 시장전체주의라는 악마의 맷돌(칼 폴라니) 속에서, OECD 최악의 산재사망률과 자살률이 보여주듯이, 더욱 많은 이들이 몸과 마음이 으스러지고 있으며, 자연재해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고통을 진정으로 치유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트라우마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시대는 트라우마 생존자들과 함께 할 목격자들을 필요로 한다.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 속에서 처절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우리는 고통의 목격자요 증인으로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일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학살 때문에 피에 물들지 않은 땅이 한 자락도 없는 한반도(문규현)에서, 지금도 여전히 트라우마로 인해 온갖 생지옥을 견디는 이들과 그들 곁에서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두 손만 모으고 있는 이들이 성령과 함께 목격자요 증인이 되기를!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새롭게 전개한 이 책이 따스한 등불이 되어 생명을 찬미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