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숨겨진 지혜들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by

Richard Rohr

Cincinnati, OH: Franciscan Media, 2008.



이 책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삶, 환희와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초대하는 복음이다.”

월터 브루그만

 


리처드 로어 신부(1943- )는 프란체스코회 신부로서 특히 동방교회 전통과 카를 융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후 애니어그램을 가르쳤고, 1986년에 행동과 관상 센터를 설립했다. 그는 오랜 영적 지도와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불멸의 다이아몬드, 물 밑에서 숨 쉬기,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20여 권의 주옥같은 책을 발표했다. 오늘날 인류문명과 교회가 영적인 위급상태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는 그는 토머스 머튼을 이어 묵상 전통을 되살려내기 위해, 논리() 중심의 탈육신의 종교 대신에 성 프란체스코의 화육(성육) 정신을 바탕으로 대안적 정통주의를 제시한다.


영성으로서의 성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의 에고의 자기방어적인 특성, 곧 철저한 삶의 변화(회심)를 거부하며 하느님마저 통제하려는 에고의 특성과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흔히 성서와 영성을 서로 분리시킨 것을 다시 결합시키려 한다. 그는 성서에 관해 수많은 설교와 강의를 하면서 나는 실망할 때가 많았다는 자신의 솔직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이해하는 데서 주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처럼 서로 옳고 그름을 논쟁하는 일에 열심이며 외적 권위에 의존한 채 자신의 영적 경험에 근거한 내적인 권위를 찾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진정한 영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은 필연적으로 낯선 것을 향한 여정이라는 전제 아래 성서의 정말로 중요한 주제들을 성서의 숨겨진 지혜라는 관점에서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는 영적 돌파구들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한다. 우리의 에고가 지닌 여러 특성들과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성서의 낯선 지혜와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를 지적하면서, 창조, 원죄, 선악과, 노아의 방주, 유일신론, 귀신 들림, 현존, 부활의 신비, 건강한 종교, 율법과 은총의 관계 등을 인간 의식의 성숙과 연관시켜 새롭게 해명한다.

정준화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과 대학원, SMU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오랫동안 멕시코에서 목회했다.

 



목차

 

 

 

서론. 들을 연결하기 __ 11

1. 정보가 반드시 변화는 아니다 __ 19

2. 내가 누구인가를 올바로 알기 __ 49

3. 얼굴을 가진 사람들 __ 85

4. 권투 링 __ 111

5. 선한 권력과 악한 권력 __ 131

6. 칼날의 끝: 아는 것과 알지 못함 __ 165

7. 악마의 거짓말 __ 197

8. 분노한 잔치 __ 227

9. 십자가의 신비 __ 271

10. 서로 내재하기 __ 303

참고문헌

부록1

부록2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성서는 위험한 문서다. 이것은 교회의 최고위층에서조차도 미움, 편견, 폭력, 살인, 징벌, 배타적 체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서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왔다는 점에서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다. 예수께서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대하셨던 바로 그것들을 우리는 의롭게 정당화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성서를 올바로 읽지 않았음을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도대체 왜 거의 모든 인구가 그리스도인이며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독일에서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는가? 도대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그렇게 전적으로 무력할 수 있었는가?


3천 년이 지났지만, 십자가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식은 성결법을 넘어 멀리 발전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거룩함을 악으로부터의 분리로 정의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악을 흡수하고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하심으로써,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악의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는 대신에 내가 그 값을 치르게 하신다. 이는 폭력이 구원한다(redemptive violence)는 지속적인 신화로부터 고난이 구원한다(redemptive suffering)는 하느님의 계획으로 역사를 옮겨간다.





하느님의 사랑스런 시선 앞에 또는 적어도 의미 있는 한 사람 앞에서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였던 적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 태어나지 못한것이다. 당신은 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당신은 죽은 것이다. 그에 대한 철학적 단어는 비존재nonbeing. 우리가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우리 자신들을 내어주기 위한, 그리고 그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자아를 전달하기 위한 얼굴들을 갖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참된 존재가 아니다. 참된 존재는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한 깊이와 받아들임과 용서로 경험되며, 서로 공유되고 함께 아파하며 전적으로 선물인 존재의 특질로 경험될 것이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은 그림자의 원인인 에고를 다루신다. 우리의 문제는 자아의 그림자보다는 지나치게 방어적인 에고에 있다. 그 에고는 자신의 잘못들을 타인들 속에서 바라보고 미워함으로써 스스로의 회심을 피한다.

예수께서는 부인된 그림자를 당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로 묘사하시는데, 당신은 언제나 그것을 형제의 눈에 있는 티로 여긴다(마태오 7:4-5). 예수님의 충고,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충고는 전적으로 완벽하다. 그는 우리가 악을 다루어야만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먼저 당신 자신의 집을 깨끗이 청소하는 게 더 낫다. 예수님은 이후에 그것을 네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고 가장 급진적으로 표현하실 것이다(마태오 18:9). 우리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데서 그 들보를 찾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희생염소이신 예수님을 예배한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가 역사 속에서 수없이 희생염소를 만들어온 주된 사람들이 되었다. 유대인, 이단, 죄인, 마녀, 동성애자, 가난한 사람, 다른 교단, 다른 종교들을 희생염소로 만들었다. 우리의 악을 다른 곳으로 전파하고 거기에서 그 악을 의기양양하게 미워하는 패턴이 모든 사람들의 본성 속에 있다. 결국, 우리의 과제는 악으로부터 분리되는 ,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그 어떤 사고과정, 즉 어떠한 배타적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항상 어떤 차원에서는 폭력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