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KICS)

banner1.gif
banner2.gif

인터넷서점
바로가기

알라딘서점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top^

로그인



mobilew.jpg 

 

[최근 출간서적]

[최근 댓글]

조회 수 48744 추천 수 0 댓글 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존 쉘비 스퐁 주교의 신간서적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독후감을 모집합니다.

5월 20일까지 A4 용지 1매 이상 작성하여 한국기독교연구소 홈페이지 토론방에 올려주면 됩니다.

20명까지 선착순이며 독후감을 보내주신 분들에게는 앞으로 1년 동안

한국기독교연구소가 간행하는 모든 신간서적들을 증정하겠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질수록 삶의 의미를 찾는 데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예수를 믿고 싶어도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군다나 작금에 벌어지는 감리교 사태의 근본적인 신학적-종교적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감리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의 힌트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아래에 댓글로 달아주시고 이름과 주소를 남겨주시면 됩니다.

 

  • ?
    김승영 2009.03.31 19:27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거룩한 탐험의 길 안내자

    -<<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를 읽고

     

    저자 스퐁주교는 신앙전통의 중심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나사렛 예수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예수의 의미를 전한 전통적 상징들과 형식들로 부터 철저히 소외된 것에 대한 긴장감에서 이 책은 출발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낡은 초자연적인 형태의 기독교는 죽었다는 인식에서부터 새로운 기독교가 생성하리라는 강렬한 희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막연하게 문자적으로 읽었던 예수에 대한 탄생이야기에는 그저 나사렛에 평범한 출생으로 파악해야만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애초에 베드레헴 밤하늘에는 별이나, 천사, 동방박사, 목자, 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단호히 밝히고 있다. 예수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도 후대 가필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부모전승은 막강한 정서적 힘을 지녔으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스퐁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우리앞에 펼쳐놓은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의 관한 연구이다. 열두제자를 고지곧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예수 사후 바울교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예수 곁에는 늘 여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기독교는 의도적으로 여성을 예수의 제자의 명단에 올리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기록된 기적이야기도 덧칠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자연 기적이라는 것도 초자연적인 개입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고 제자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만났다고 믿게 된 것이 무엇인지를 전달하려는 것일 뿐이다는 것이다. 이런 기적이야기들을 정확하게 읽는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창출한 체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큰 차이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행한 모든 치유기적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것은 이런 치유 기적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 나라의 안내자로 지목하기 위해 예수 이야기에 덧붙어진 메시아적 표징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도 사실적 기록보다는 예배형식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직 예수의 죽음이 해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십자가 처형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실제 용어나 내용들이 목격자의 기억에서 온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스퐁은 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이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한 모든 것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방식, 십자가 이야기에 나타난 사람들과 사건들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고, 장엄하게 해석된 초상화에 불과한 것이라고 저자는 분노하고 있다. 이런 스퐁의 분노는 부활이라는 사건에서 절정에 올라선다. 이것은 부활이라는 내용은 인간 공동체가 개인적으로 또한 집단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한 체험을 표출한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표현방법을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의 내용은 제 1 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이른바 해석된 예수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논증이 함께하고 있는 내용이다. 저자는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마다 가지고 있는 문자적 이해는 신화화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기독교는 이런 콘크르로 위장된 내용들을 한겹씩 벗겨내어 참된 인간 예수의 모습에 한발작 다가가야 만이 생생히 살아있는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방향의 기독교는 스퐁은 아주 겸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단호하게 말한다. 이것은 참된 예수를 만나는 길이다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을 뛰게하는 것은 저자가 기존의 문자적 해석을 배격하고 새로운 기독교의 성서를 쉽게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전혀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는 안목에 주목해서만 아니다. 그것은 제2부의 참된 예수의 이미지 탐구가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 스퐁주교가 제시하고자 하는 길은 예수를 그의 원래적인 유대적 맥략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멈출수 없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우리 자신의 인간성 속에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결국 성서도, 신조도, 교리도, 교의도, 그리고 심지어 종교 자체도 초월하여 예수를 탐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거기서 하나님의 신비, 생명의 신비, 사랑의 신비 및 존재의 신비만 응시할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역시 필연적으로 우리 인간성의 신비, 자아의식의 신비 및 초월성의 신비에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퐁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다.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 처형과 복음서의 기록 어간인 40년대와 70년대 사이에, 유대인 회당에서 예배가 진행되었다고 본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회당에 예배를 드리러 왔으며, 해마다 안식일마다 그들은 성서 낭독을 들었으며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으며, 예수 체험이 성서와 예배 모두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체험이 드들에게 타당하고 의미를 주기까지, 공동 예배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그들의 기억들을 새롭게 만들어 나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예수 체험의 능력을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섰던 곳에 서고, 그들이 예수에게 적요한 이미지를 탐구하며, 예수를 이해하려고 사용한 상징들을 판독하며, 그들이 예수 안에서 만난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인자 예수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첫 복음서에는 예수 탄생이야기 없을 뿐더러, 예수도 죄를 씻기위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우리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기독교인이라면 꼭 한번을 넘어야 문제들을 솔직한 고백들을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새로운 눈으로 기독교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말해 스퐁주교의 이런 작업은 거룩한 탐험이자 진리에 대한 외로운 투쟁으로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 동안 고민과 번민으로 숨겨왔던 진실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꼭 일독을 권한다.

     

    ** 이름 : 김승영 **주소 :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오투그란데아파트 106동 1502호

  • ?
    이필완 2009.04.25 09:50
    평화를 빕니다. 위의 독후감 쓰신 백남호님, 김승영님, 오랫동안 새글이 올라오지 않는군요. 두 분의 글을 당당뉴스에 게재하고 싶습니다. 허락하시면 leewaon3@chol.com 으로 허락 이메일 주시거나 010-9147-7449 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감이 5.20 인데 독후감 모집 다시 한번  보다 널리 광고하는 의미에서....
  • ?
    김기범 2009.04.27 23:17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를 읽고

    성경에서 초자연적 기적의 신비를 제거하고 예수의 본래 모습과 그의 가르침을 찾으려는 학문적 시도는 많이 있어 왔다.

    과문하지만 몇 사람을 언급하자면 슈트라우스는 기적이 신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신앙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하였고, 불투만은 성서의 기적은 신화라고 선언하였다.

    존 도미닉크로산은 [예수는 누구인가?]에서 고대인들이 상징적으로 성경에 표현한 것을 오히려 현대인들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하였다.

    국내학자로는 홍정수 목사가 [베 짜는 하나님]에서 자연법칙을 역행하는 기적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는 이제까지 있어 왔던 성서의 탈신화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복음서가 구약의 이미지에 의해 각색되었다고 하면서 구약과의 연관성을 더 많이 강조한 것이 눈에 띄었다.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알기 위한 시도로써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화로 귀결될 소지가 크다고 생각한다.

    케리그마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에 종속변수가 될 때 예수는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던 인물정도로 격하된다.

     

    저자도 이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는 당시의 편견과 불의를 타파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휴머니즘을 실천한 혁명적 사상가였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처형된 후 그의 삶에서 비범한 요소들을 상기하고 그의 탄생, 기적, 죽음을 구약의 메시아 대망과 연결시켜 그의 삶을 신비롭게 복음서에 묘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대해 나의 다른 생각을 두 가지 정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저자는 예수에게 있었던 특별한 것(온전한 사람됨)이 그를 신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가 개연성을 가지고 구약과 연결 지으면서 후대의 각색이라고 하는 것들을 모두 골라내고 나면 예수에게 남는 것이 별로 없게 된다.

    고작 당시 소수자에 대한 사랑, 기존의 편견타파 정도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가 메시아로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당시에 또는 예수 이전과 이후에도 예수 정도의 혁명적 사상을 가지고 휴머니즘을 실천한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그들도 제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핍박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가 되지 못했다.

    예수와 늘 함께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행동을 지켜본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예수가 처형당할 당시에 그들이 안타까와 했다던가 스승은 죽더라도 자기들끼리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전승해가자고 결의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십자가 처형과 함께 철저한 패배로 끝났었다.

    저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스승의 삶을 회고할 때의 황홀한 체험이 스승의 육체적 부활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휴머니즘이 아니라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 대로 살자고 설파하는 것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외치는 것보다 훨씬 쉽고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왜 제자들은 목숨 걸고 예수의 부활을 전파했을까? 예수 처형당시에 다 도망가고 고향으로 내려가 과거의 삶을 다시 살던 겁쟁이 제자들을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순교자로 만든 것은 그들과 부활한 예수의 만남이지 예수의 사상과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나 깨달음 같은 심리 현상이 아니었다 .

    예수에게는 다른 인간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신적인 특별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에 모든 것을 걸어왔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빌.2:6)

     

    둘째로 저자의 사상에는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에게 있었던 신의 모습은 온전한 인간됨이다.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가는 온전한 인간은 사랑, 용서, 자유함, 개방됨을 소유한 사람이다.

    인간의 죄의식은 인간을 주눅들게 만들므로 온전함에 방해만 될 뿐이다. 저자의 주장을 발전시키면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인간끼리의 교육, 훈련, 사회운동을 통해 휴머니즘이 실현되면 또는 완전한 복지와 충분한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세상을 만들면 인간은 신의 영역에 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선포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한데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 구원의 방식도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바꾸시고 끝을 내시는(종말)방식이지 인간들의 인간성 회복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들의 의식 변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가 재창조 되는 방식이다.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은 그 구원사업의 증거이고 선취이다.

     

    정용섭목사의 말대로 성경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바른 해석을 위한 연구와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문자주의적 해석과 적용이 강한 한국기독교에서 본서와 같은 해석과 주장은 이단으로 배척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의 근본주의적 신앙과 문자주의의 문제는 맹신자를 양산하고 말씀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도구화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배타주의와 공격적 선교로 물의를 일으키고 휴거 소동과 같은 사이비 집단이 생겨나는 토양을 제공하면서도 기독교 내에서 자성이 없는 것은 성경의 일점일획도 그대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문자주의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서와 교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장에 대해 기본적으로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도 한국기독교가 진리논쟁을 계속함으로써 성서와 신앙 또 인간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점점 가까이 갈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기독교의 기원과 교리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김기범
    주소 : 서울시 노원구 중계4동 435-1 현대 APT 203동 608호 
     

  • ?
    하태혁 2009.04.30 15:17

      

    예수체험의 화두

    존 쉘비 스퐁의 『만들어진 예수 참사람 예수』를 읽고

     

    기대와 설렘: 사실과 의미의 통합을 향하여

    스퐁은 머리말에서 이 책을 통해서 두 개의 강력한 물줄기를 통합하는 비젼을 제시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두 물줄기 중 하나는 ‘예수에 대한 신앙과 헌신’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에 대한 상징들과 형식들로부터의 소외’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과 신념체계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지만, 예수에 대한 교리와 신념체계로부터는 자유로운 신앙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이 두 물줄기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신학을 공부한 수많은 신앙인들의 내면에 감춰져있을 것이다. 성서학의 기초지식을 접하면서 이미 ‘사실과 의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만다. 성서의 내용이나 교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수 없다는 수많은 증거를 접하고, 그럼에도 그 안에는 상당 부분 사실에 기초한 진실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의미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가? 아무도 그 경계선을 명확하게 제시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슬그머니 그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서 감춰버리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고 가르친다. 침묵의 전술에 모두들 방관적 공범으로 가담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퐁이 다시 그 상자를 활짝 열어서 바닥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럼에도 정직하고 진실한 신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종교인들에게도 의미 있고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의미와 사실, 신앙과 신념체계 사이의 갈등을 맛본 사람이라면 설렘과 기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퐁의 전술: 신화 해체와 원체험 재구성

    그의 전술은 크게 두 가지이다. ‘신화 해체’와 ‘원체험 재구성’이다. 이것은 종교언어에 대한 하나의 전제를 가진 전술이다. 예수에 대한 원래의 체험이 있고, 신약성서는 그 체험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적 언어에 다 담길 수 없는 초월적 경험, 곧 하나님 체험을 예수로부터 맛본 후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적 상징과 신화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신화적 언어를 해체하면 원체험이 무엇이었는지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제1부는 예수의 신화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스퐁은 동정녀 잉태, 예수 탄생, 예수의 부모, 열두 제자,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신화였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입증의 방식은 이 모든 것들이 구약이나 유대교 문서와 전통에 근거하여 잘 엮어진 문학적 구성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특별히 회당 예배를 위한 구성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신화라는 입증이 충분하다고 여긴 저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것은 왜 신약성서의 편저자들이 예수를 그렇게 표현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난 예수가 누구였기에 구약 전통의 종교적 언어를 통해서 그런 신화로서 고백했는가를, 그 의미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종교인들에게도 제시할 수 있는 인간 예수, 온전한 인간성의 충만인 예수라고 주장한다. 2000년 전 충만한 인간성의 온전함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줬고, 오늘날도 그 참사람 예수를 비종교인들에게 전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반문과 아쉬움: 해체의 실패와 원체험의 부재

    기대가 컸다면 실망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신화 해체의 작업이 너무 느슨해 보이기 때문이다. 스퐁은 신약의 기사들이 신화일뿐 사실이 아니라고 입증할 때 두 가지 논리를 사용한다. 하나는 ‘문학적 구성은 사실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 논리 자체를 입증 없이 반복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구성된 것은 무조건 허구인가? 목격자들의 진술이 구전되고 그것이 문학적 구성의 파편으로 자리 잡을 수는 왜 없는가? 문학적 구성임을 입증한 것은 단지 성서의 기사가 있는 그대로 사실일 수 없다는 것만을 보여줄 뿐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신화적 허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사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남는다. 또 초자연적 현상은 무조건 불가능한가? 오늘날도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초자연적 현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초자연적 현상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도 그렇게 쉽게 입증될 수는 없는데 무조건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스퐁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적 재구성이라는 충분한 개연성만을, 때론 새로운 개연성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럼에도 ‘문학적 재구성이므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충분한 연결고리 없이 비약해 나가곤 한다. 물론 저자의 의도는 비종교인들을 위한 ‘종교 없는 기독교’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은 제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온전한 인간성의 절정을 보여준 참사람일 때 예수 체험의 의미가 오늘날 비종교인들에게도 더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입증 없이 비약해나가는 논리가 오히려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차라리 문자주의적 해석의 불합리성과 기적에 대한 맹목적 믿음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서 멈추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학적 구성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왜 그렇게 구성해서 표현했는가를 물을 수 있지 않은가? 즉, 이어지는 인간 예수와 예수 체험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는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2부 ‘예수에 대한 원래 이미지들’과 제3부 ‘비종교인들을 위한 예수’는 어떤가? 여기에서 현대의 비종교인들에게 강력한 설득력과 매력을 지닌 예수체험의 원형을 구체적으로 기대했다면 역시 실망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유대인의 절기를 위해서 회당 예배의 틀에 맞도록 예수의 이미지가 구성되었다는 점은 신선한 관점이다. 그러나 희생양, 속죄양, 인자, 종, 목자의 이미지는 이미 성서학을 통해 익숙한 해석이 아닌가? 그것은 예수 이야기가 모두 신화라는 극단적 주장 없이도 가능한 해석이다. 비종교인을 위한 예수, 그는 부족 경계선, 편견과 상투성, 종교적 경계선의 파괴자이자 하나님의 사랑을 투명하게 드러낸 참인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원체험 자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렇게 느껴지도록 한 예수의 삶과 죽음이 있었다는 것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실망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 원체험에 접근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 혹은 최소한 신앙의 근원이다. 비록 종교 없는 종교라 할지라도 신화를 모조리 해체하고 난 후에도 예수를 통해서 종교적 진리, 궁극적 진리에 이르려 한다면, 오늘의 비종교인들을 위한 새로운 원체험이 요구된다. 초기의 제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체험이 오늘날 어떤 형태로든 필요하다는 것이다. 

       메아리,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의 울림
        만들어진 예수 곧 신화의 옷을 입은 예수에게서 그 신화를 벗겨내고 참 사람 예수를 드러내겠다는 저자의 뜻은 성공적으로 성취된 것일까? 적어도 내게는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그것은 그의 논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낳을 것이다. 성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건과 이야기는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의해서 전혀 다르게 구성되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퐁의 고백적 관점을 통해서 예수에 대한 성서의 기사도 결국 루빈의 항아리라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항아리를 볼 수도 있고 사람의 얼굴을 볼 수도 있는 것처럼 성서의 기사도 보고 싶은 방식대로 볼 수 있는 반전도형 같기 때문이다. 부활한 기적의 주인공인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도 있고, 신화의 가면을 쓴 참된 인간의 아들을 볼 수도 있다.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든, 이 책에 대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독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퐁의 도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실망이나 거부감은 오히려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실망이나 거부감은 진정한 바람이 무엇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강력한 음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퐁의 관점이든 그것을 부정하는 관점이든 어느 한쪽만이 진리라고 확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은 없다. 단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고집하는 것일 뿐이 아닌가? 부활한 기적의 주인공만을 고집하는 시선은 초월적 권위를 필요로 하는 근원적 불안의 시선이 아닐까? 반대로 참 인간의 얼굴만을 고집하는 시선은 비이성 혹은 초이성적인 영역에 대한 거부감의 시선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한쪽을 택하고 치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해도 분명 성서는 양쪽을 향해 다 열려있다. 결국 성서는 최종적 대답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비춰주고 되물어 온다. 왜 실망하는가? 왜 확고한 하나의 진리를 원하는가?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화두를 들다, 나의 예수체험을 찾아서 

    결국 스퐁의 고백적 관점에 대한 어떤 응답도 자기물음으로 되돌아온다. 끊임없이 메아리쳐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화두가 된다. 스퐁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해도 성서의 기사들이 문학적 재구성의 결과물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성서의 기사들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입증할 객관적 근거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최소한의 결론 앞에 정직하게 선다면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둘 것인가? 모든 것이 신화라면,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둬야 할까?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신앙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인가? 기적이 없이 하나님을 믿고 참인간 예수의 길을 따라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통해 고백할 수밖에 없게 한 그 예수체험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진실이다. 그 놀라운 체험 때문에 당시에 수많은 종교운동이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는 살아남았고 2000년을 이어져 성장해왔다. 그렇다면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은 예수체험뿐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체험이 있는가? 그 체험들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성을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 예수 체험이 없고 그로 인한 변화된 삶이 없다면, 기적과 교리에 대한 믿음이든, 참인간 예수에 대한 동경이든 그 자체의 진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거짓일 뿐이다.  

    스퐁 감독이 성직자이자 성서학자로서 평생을 다해 연구한 결과물로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핵심이 바로 그 예수체험의 문제이다. 비록 극단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주장을 하려 하는지 그 뜻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어야만 한다고 고집하면서 잃어버린 예수체험, 그 신앙의 뿌리를 되찾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까지도 돌려주려는 것이다. 그 뿌리는 예수를 통해 초기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참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을 통해 자신안에서도 신성 곧 참된 인간성이 깨어나 예수처럼 살게 되었던 경험이었다. 그 예수체험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바로 그 예수체험을 오늘 기독교인들과 비종교인들 모두의 삶 속에 참으로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스퐁의 관점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그 양측 모두는 대답해야만 한다. 제자들을 변화시킨 예수체험을 오늘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이렇게 스퐁의 질문과 대답 앞에 정직하게 선다면 결국 스스로의 삶으로 대답해야하는 화두를 짊어지게 된다. 나의 예수체험은 무엇인가? 궁극적인 의미를 향해 온 삶을 바칠 수 있도록 나를 매혹시키는, 예수체험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회원정보에 수정해뒀습니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지봉리 산24번지

     

  • ?
    한기연 2009.05.05 06:53
    하태혁 님 주소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
    들숨 2009.05.12 06:52

    이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를 읽고


    도입 


    책의 표지에 작업용 비대로 둘러싸인 리우데자네이루의 거대한 예수상이 있다. 이 겉표지는 저자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거대한 예수는 인간의 불안이나 교리에 의해서 거대하게 건축된 ‘현대의 예수’를 상징하리라 생각된다. 또한 작업용 비대는 ‘현대의 예수’에서 인간의 불안과 교리를 철거하고 ‘역사의 예수(real Jesus)’ 초상으로 환원한 후, ‘새로운 예수’를 건축하려는 상징일 것이다.


    책의 진행


    이 책은 먼저 성서의 예수 이야기에서 신화를 걷어낸다. 그리고 예수의 원래 이미지를 추적하여 ‘역사의 예수’ 초상을 그린 후에, ‘역사의 예수’ 초상으로부터 ‘새로운 예수’를 제시한다. 물론 ‘신앙의 그리스도’가 1세기 유대인의 예수생각을 반영하며, ‘교리의 그리스도’가 특정한 장소와 시기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났듯이, 스퐁 감독의 새로운 기독론도 한 시대를 위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해체와 재구축(reconstruction)을 반복하며 제공하는 기독론, 곧 신선하고 의미심장한 기독론은 짧은 시기나마 유배된 신자에게 돌파구를 제공하리라고 생각한다.


    책의 의미


       이 책에 학문적 새로움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학문적 새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해서, 스퐁 감독의 학문적 방법론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며, 중요하게 다가오는 단편들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비록 몇 가지 사소한 곳에 불만스런 점이 있더라도, 그것이 그의 학문적 치밀성과 논리성을 왜곡하거나 그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서 예수에 관한 구약과 신약 복음서의 밀접성을 빈번히 강조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구약의 예수와 신약의 예수의 간극이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스퐁 감독의 특별한 성찰이 있다. 그의 성찰은 인식의 지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찰은 솔직함과 겁 없는 행동에서 기인한다. 이 시대에는 유배된 신자, 즉 하나님이 만든 구멍이라는 공허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컴퓨터와 컴퓨터 사이에서 빛의 속도로 달리는 정보는 예수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주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에 관한 풍부하고 정직한 정보를 유배된 신자에게 여과 없이 제공한다. 그 정보들은 소논문식을 띠고, 참고문헌까지 기록하며, 제 각기 정확성을 자랑한다. 이제 그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신조로 덧입혀진 예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를 생각나게 한다. 성서의 허구성을 들며, 신성모독을 즐겨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성서는 권위가 있는 책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택되지 못한 인간'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예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는 '선택되지 못한 인간'이라는 명칭을 명예로 생각하는 경향도 감지된다. 유배된 신자가 생각할 때, 스퐁 감독의 새로운 기독론은 다양한 기독론의 목록에 단지 하나의 항목을 덧붙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직함과 실천은 유배된 신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유배된 신자들에게 예수를 보여주는 가장 큰 무기들은 예수가 그랬듯이 정직함과 실천이다.


       이시대의 많은 지적인 기독교인조차 ‘현대의 예수’를 ‘역사의 예수’로 생각하지만, 그러한 태도의 가장 큰 취약점은 현실에서 성서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역사 비평적 방법은 지난 수세기에 걸쳐, 유대인의 삶을 자리와 유대인이 말하려는 예수의 모습을 탐구하며 역사의 예수에 대한 솔직한 심상을 키워왔다. 이 책은 그 연구의 결과물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예수’ 곧 인성을 신성에 통합시킨 예수, 유대인이 보았으며 이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 비추어지는 하나님 예수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결론


       우리가 과거의 바리새인이 행한, 과거의 진리가 현재에도 진리라고 주장할 때, ‘현대의 예수’가 사멸함과 동시에 기독교도 쇠락은 가속될 것이다. 따라서 스퐁 감독이 말하듯이, 기독교가 소멸되어가는 이 시대에, 새로운 시대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기독교 재생의 희망을 좌우할 것이고, 유배된 신자들의 등불이 될 것이다.

    주소: 경기도 평택시 지산동 636-9 생명살림교회(우편번호 459-110)

  • ?
    김익배 2009.05.17 23:49

     

     새로운 예수는 어떻게 가능한가?

    -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를 읽고-

    김 익 배

     

    새로운 예수는 어떻게 가능할까? 또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어떻게 전환할까?  머리 속으로 고민하고 고민해 왔던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2000년 전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쉬고 행동하셨던 예수님이 목수였던, 일용직 노동자였던, 견유학자든, 농부든, 사회적 혁명가든 오늘 이 땅에서 헐떡이며 살아가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스퐁의 여러 글들을 읽으며 지적으로 조금씩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00년 동안 기독교란 이름으로 덕지덕지 페인트칠해진 예수의 본 모습을 어떻게 바르게 볼 수 있을까 고민하며 비신학도로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해 왔는데 이번 존 쉘비 스퐁의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를 읽고 예수의 얼굴에 덧칠해져 있던 페인트가 보다 선명하게 벗겨짐을 느낀다.

     스퐁은 이 책 1부에서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가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에서 주장하는 것 - 예수는 신화적 인물이고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의식들은 상당 부분 이교도의 전통에서 기인한다는 것-과는 다르게  4복음서에서 예수에게 덧씌어진 신화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분리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프리크와 갠디와는 달리 그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신화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인물 위에 신화적 내용을 덧입혀 원래와 다른 예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렇게 할 만큼 충분한 ‘자기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초자연적 언어를 만들어냈’고 거기에 맞춰 복음서를 썼다.

     이렇게 하여 저작된 복음서 이야기를 스퐁은 “베들레헴 상공에 별은 없었다.(2장) 예수의 부모는 소설적 합성물(3장), 열두 제자의 역사성(4장), 복음서의 기적-자연 기적(6장), 치유 기적(7장),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8장), 십자가 처형 이야기(9장), 십자가는 성경대로 만들어진 이야기(10장), 부활과 승천 신화 속의 영원한 진리(11장)”를 통하여 인간 예수를 분리해 내고 있다.

      2부에서 저자는 예수의 원래 이미지를 탐구한다. 그는 “성서도, 신조도, 교리도, 교의도 그리고 심지어 종교 자체도 초월하여 예수를 탐구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 생명의 신비, 사랑의 신비 및 존재의 신비만을 응시하게 될 것이다”고 한다.

      스퐁은 초월적 유신론과 성서의 문자주의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 오늘을 위한 그리스도 이야기를 탐구하는 전제 조건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하여 탐구한 예수는 ‘하나님의 경이로 진입하는 입구일 따름’으로 보고 있다. “예수의 처음 추종자들은, 마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것처럼,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예수 자신이 그들의 여정의 일부였던 것처럼, 스스로를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the followers of the way)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의 길은 온존함(wholeness)을 향한 길, 곧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분을 향한 여정이며, 이를 위한 언어를 아직 찾지 못한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모든 종교는 긍극적으로 이 똑같은 신비의 실재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 예수는 그 여정의 목적지가 아니고, 그 목적지로 가는 수단이다.”

     이렇게 탐구된 예수를 통하여 제3부에서 그는 비종교인들을 위한 예수를 말한다.

    예수는 1세기에 살았던 실제 인간이었고, 예수의 독특성은 ‘그의 실제 인간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 속에 들어온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스퐁은 유신론에 대하여 사망을 선고한다. 그는 ‘하나님은 죽지 않고도 유신론은 죽을 수 있다’고 결론 짓는다.  왜냐하면 현대 과학의 성과에 힘입어 지구는 지구 행성은 17세기 아일랜드 주교 제임스 어셔가 기원전 4004년 10월23일 출생했다고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고, 생명의 오랜 진화 과정에서 온 불안 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유신론적 신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유신론은 하나님의 실재가 아니며, 유신론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인간이 만든 정의에 불과하다.

      그는 유신론이 인간성을 파괴하는데 작용하고, 무절제하고 파괴적인 종교적 분노를 야기시키는다고 보고 있다. 이는 작금의 현실로 볼 때 전적으로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기만과 죽임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제 유신론의 자리에 새로운 예수 체험을 넣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부족 경계선의 파괴자(22장)이고, 편견과 상투성의 파괴자(23)장 이며, 종교적 경계선의 파괴자(24장)이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초상(25장)이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온전함의 초상이다. 이 때문에 그의 완전한 인간성은 하나님의 궁극적 표현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제 인생의 막바지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한 평생을 크리스천으로 살아 온 노학자가 기독교 시대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새 시대에는 새로운 기독교-비종교인을 위한 예수-의 도래를 강력히 희망하는 메시지에 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되새겨 본다.

     철저한 유신론의 해체와 범재신론의 하나님 이해- 아직까지 안개 속인 것 같은 이해와 더불어 예수살기에 철저하지 못한 나에게 새로운 용기와 인식을 주었다.

     704-752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동 그린맨션 311동 1307호

  • ?
    오영민 2009.05.20 23:44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를 읽고

    스퐁은 머리말에 클리포드 스탠리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죽일 수 있는 하느님은 죽여야만 한다”

    여기서의 죽어야 하는 하느님은 전통적 유신론에서 만나는 하느님일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대를 불러오는, 숭배받기에 합당하고 완전한 모습! 이것이 우리가 여태껏 신에게 투사한 인간의 바람이다. 이는 전통적 신론의 핵심으로, 신은 우리에게 완전한 위탁을 요구하며 이에 부응해 인간은 신에게 전적으로 자신을 바쳐야 함을 주장한다.

    전통적 유신론자들은 신을 한정 짓는 것에 경멸한다. 곧 숭배의 대상으로써 가치가 경감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고 볼 수 있다. 안셀무스는 “주님은 그 이상 더 숭고한 존재자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자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신은 절대적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겠다. 하지만 만약 신이 우리보다 하나라도 약한 것이 존재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보완하는 또 다른 신의 등장을 기다릴 것이며 그 약한 것을 빌미로 다른 모든 것을 신에게서 빼앗기 위해 신을 협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통적 신론에서는 그 어떤 대상보다도 숭배의 대상으로써 인식하는 신을 우선시 하며 또한 절대시한다.

    이와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대 및 중세 신학자들처럼 안셀무스도 신의 무감각성을 주장한다. 고통이란 그것을 당하는 존재자에게는 해가 되는 부정적인 것이므로 완전한 존재자는 고통스러워할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지, 전능, 전선을 말하며 인간이 할 수 없는 모든 부분을 신에게 투사해 논리적이든 논리적이지 않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신에게 대입시킨다. 그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한 점의 악도 없는 무(無)로부터의 창조 주로 고백한다. 또한 신에게서 가변성을 없애기 위해 시간 밖에 계신 분을 말한다. 이것과 맥을 같이 하며 한번 약속하신 것은 결코 변함없는 선한 신을 말한다. 곧 인간처럼 기분에 따라 가변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한번 뱉으신 말은 되담지 않으시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시는 분으로 전통적 신론에서는 보고 있다. 이런 신은 부동(不動)의 동자로, 자신은 움직이지도 않음으로 삶 속에 침투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움직이는,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하느님을 그리고 있다 하겠다.

    위와 같은 창조주로써, 인격적 자유자로써, 전지 ․ 전능 ․ 전선으로써, 시간 밖에 계신 분으로써 신을 묘사함으로 인간은 감히 신에게 다가갈 수도, 그를 볼 수도, 그의 생각을 알아 낼 수도 없다. 신을 찾아 나선다는 것도 무지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이런 신께 경배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무지를 뛰어넘어 죄로 이어지기에 절대적 신을 늘 찬양해야 함을 전통적 신론에서는 강하게 주장한다.

     

    우리는 신에 대한 질문을 참으로 많이 한다. 이것은 우리가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미리 상정하는 것과 유사한데, 이것은 신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들어난다. “신은 모든 것을 아는가?” “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신은 숭배받기에 합당하고 완전한가?” “신은 모든 것을 창조했는가?” “신은 인격적인가?” “신은 자유한가?”……, 등 기대심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의 투사를 통해 신을 보려 한다. 이것은 질문을 통해 답을 구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과 같은데, 곧 질문은 하기도 전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에 대한 명확한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봐도 전지, 전능, 전선은 하나로 합해 질 수가 없다. 또한 가변적인 것을 빼기 위해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약속을 번복하지도 못하는 구제불능의 신을 상정한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이런 신에게 자유롭다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또한 고통도, 고민도, 거짓도, 번복도 없다면 과연 전능하겠는가? 전능이란 단어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인간적인 흔들림을 신에게서 빼버린다면 과연 우리는 누구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가? 기뻐하실 줄만 알고 아프거나 고민하지 않는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분명 인간보다 못한 하느님을 상정하는 꼴로 귀결되리라. 또한 구약에서 진노하시는, 후회하시는, 번복하시는 하느님은 기독교의 하느님이 아니란 말인가? 기록되어있는 성경의 신에 대한 인상을 왜 모두 말살하며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는 신 만을 전면에 내세우는가?

    과연 전통적 신론이 참 신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인간의 바람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는 성경을 좀 더 읽어보면, 세상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종교전쟁만큼 더 무서운 전쟁은 없을 정도로 서로의 내세사상을 내세우며 죽기를 각오한 그들의 삶은 누구를 위한 삶인가? 자신들의 신이 그만큼 관대하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또한 현재의 삶은 너무 암담하기만 한데, 오직 내세에서만 힘을 쓸 수 있는 신이라면 그 신이 어떻게 전능한 신이란 소리인가? 또한 가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꼭두각시의 마네킹과, 또는 프로그램화된, 그래서 입력된 것밖에는 출력을 할 수 없는 로봇의 신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런 자가당착의 전통적 신론은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신론을 기독교는 그대로 예수에게 투영한다. 예수의 인간성을 버리고 그 안에 “구원자”라는 이름을 집어 넣는다. 사실 구원자라는 의미를 재해석한다면 예수에게 구원자의 칭호를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렇게 된다면 “구원자”가 독식하고 있었던 유별란 별칭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것은(버려야 할 것은) 유일회적이고 이미 선택되어져 있는, 어떤 특정 대상에게만 부여되는 것에서의 의미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전통적 유신론에 빠져서 가장 강한 폭군의 신이 되거나, 가장 앞뒤가 맞지 않는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퐁은 바로 이 부분을 보았다. 예수가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고백하듯이 스퐁은 예수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가두고 있는 정통이라는 견고한 콘크리트 층을 파괴해서 진정한 예수를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입게 된 신화의 옷을 벗겨 하나씩 던진다. 그래서 그는 아주 구체적으로 전통적 입장을 보란 듯이 짓밟아 버린다.

    그리고 스퐁은 말한다. 신성은 완전한 인간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책, 뒷 부분에 “나는 사랑을 창조할 수 없으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일단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남에게 줄 수 있다”라는 말을 통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곧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창조(여기서 이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스퐁이 말한 문맥안에서만 이해하자)할 수 있는 신성에 이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 곧 편만한 하느님의 뜻 안에의 행하는 완전한 자유가 바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사랑)은 완성되어야 하고 (남과 나를 갈랐던, 교리로 인해 갇혀 있던)모든 울타리는 없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도 예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아 스퐁이 말하는 완전한 인간성이지 않을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 혼났다. 그만큼 기존의 전통 · 정통적 사유방식을 거부하며 낡고 변질된 개념을 땅에 묻었다. 아니 불태워 그 흔적마저 없애 버렸다. 혹자는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단순히 성서를 재해석하고, 예배의 모습을 재해석해 모든 부분을 버리지 않고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 현실을 보면 이미 음식으로 다스릴 수 있는 병적인 모습은 지난 듯하다.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강한 음식을 튀김의 옷이나, 양념의 맛으로 가려 아이들에게 제공한다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한 자녀에게는 분명 입에 쓴 약이나, 의사의 손을 빌어 절단하고 보강할 것이다. 지금의 기독교 모습도 이와 같다. 어르고 달래며 건전하고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신의 말씀을 전통적 유신론의 입장 안에서 풀어 줄 수 있는 상황은 지난지 오래다.

    스퐁은 죽음을 각오하며 글을 썼고 많은 강단에서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모습 아니겠는가? 세상의 기자들도 정확한 보도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 온갖 협박과 로비 앞에서도 올곧은 기자는 모든 것을 마다하고 왕따를 자청하며,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보도를 한다. 하물며 하느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예언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기자의 모습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잘못된 곳을 고발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다면 감싸주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값진 책이다.

    오영민 /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마곡수명산파크1단지 111동 201호

  • ?
    한기연 2009.05.25 09:59
    독후감 보내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1년 동안 저희 연구소가 간행하는 신간서적들을 증정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후위기와 선거제 개혁의 필요성 / 한승수 한기연 2019.07.08 25
공지 돈 타령, 생명의 울부짖음 / 우리 안에 있는 제국 / 조현철 1 한기연 2019.06.21 33
공지 죽음의 설교자들 / 고병권 한기연 2019.06.18 38
공지 "세상의 똥구멍" / 신평 변호사 인터뷰 한기연 2019.04.15 44
공지 의도된 모욕 / 4 16 참사 그 이후 4 한기연 2019.04.15 34
공지 영혼 없음에 대하여 한기연 2018.07.05 136
공지 세계는 다시 냉전시대 1 한기연 2018.02.10 478
공지 이제 남성이 변해야 한다 3 file 한기연 2018.02.05 478
공지 외환위기 이후의 '망탈리테' / 김호기 5 한기연 2017.12.01 1047
공지 수많은 좌절 속에 부모나 선생이 된다는 것 한기연 2017.11.23 1302
공지 <비유의 위력> 독후감 모집 1 한기연 2012.04.18 10501
공지 <기독교의 심장><첫번째 바울의 복음> 독후감 모집, 댓글로 달아주세요 4 1 한기연 2010.02.03 42113
»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독후감 댓글로 달아주세요 9 한기연 2009.03.31 48744
1179 학생에겐 곰팡이 감자, 영양사엔 상품권 한기연 2016.08.24 462
1178 북핵 포기하면 사드 철회 선언해보라/ 최승환 한기연 2016.08.19 521
1177 박근혜의 오만, 손경희의 용기 / 손석춘 한기연 2016.08.16 405
1176 분노사회와 압축 성숙 / 조희연 한기연 2016.08.16 363
1175 일본의 10억엔, 필요 없다 / 김창록 한기연 2016.08.16 357
1174 청년수당은 포플리즘인가 / 이정우 한기연 2016.08.05 343
1173 비리, 낭비로 얼룩진 사회 / 박종규 한기연 2016.08.01 339
1172 두 정권이 만든 업보, 나향욱과 사드 배치 한기연 2016.08.01 318
1171 바티칸 개혁 빼든 프란치스코 교황, 암살 위협 시달려 한기연 2016.07.06 415
1170 집회 구호 외치면 처벌받는 사회 / 김희진 1 한기연 2016.07.05 470
1169 김일성 삼촌들을 위한 변명 / 박찬수 한기연 2016.07.02 375
1168 지옥의 전관들 1 한기연 2016.07.02 375
1167 세월호특조위 조사활동 종료, 그럴 순 없다 / 이호중 한기연 2016.07.01 369
1166 인권사에 기록될 사건 한기연 2016.06.28 367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92 Next
/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