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가 간행한 {기독교의 심장}(마커스 보그 지음, 2009)과 다음 주에 출고되는 {첫번째 바울의 복음}(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2010)에 대해 독후감(200자 원고지 30매)을 보내주시는 분에게는 선착순으로 각 10명씩에게, 한국기독교연구소가 금년도에 간행하는 모든 신간서적을 무료로 증정하겠습니다.
독후감은 한국기독교연구소 홈페이지 토론방에 댓글로 올려주시면 되며, 이름, 주소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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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향한 영혼의 여정-『첫 번째 바울의 복음』을 읽고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올림픽 피겨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우리는 모두 크게 환호했습니다. 피겨는 겨울 올림픽에서 꽃 중의 꽃이요 그 동안 선진국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종목인데,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땄으니 선수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국민 모두 벅찬 감격과 감동을 느꼈을 겁니다. 더욱이 경쟁자인 일본 선수를 누르고 이긴 것이기에 기쁨은 배가되었습니다.
그녀의 스케이팅은 매우 우아하며 다른 선수와는 격이 다른 것이었는데, 김주원 국립발레단 수석 발레리나는 “연기에서 부드러움을 표현 할 때는 우아하고, 강함을 표현할 때는 힘이 느껴졌다”고 했으며, 그녀가 얻은 점수는 세계 신기록으로서 현지 중계하던 미국의 스케이팅 분석가는 달리기 100m 경기로 환산하면 8초대 기록의 경기를 본 것이라고 했으니 가히 그 기량의 출중함은 남달랐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목표를 향해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고 스포츠를 빼어난 예술로 승화시킨 김연아 선수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한국인으로서 기쁨과 자긍심을 한껏 누려도 될 듯싶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이야말로 모든 미의 근원이자 ‘미’ 그 자체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아름다움은 감각적 미의 원천입니다. 인식론적으로 보면 감각적 미는 초감각적 미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미를 파악하는 건 감각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미를 파악하려면 감각과 연을 끊고, 물질에 묶여있는 우리 영혼을 정화해야 합니다. 이 때 신의 빛은 우리의 길을 밝혀줍니다.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따라 상승하는 과정은 ‘구원을 향한 영혼의 여정’입니다. (진중권,『미학 오디세이1』
이번에 김연아 선수가 보여준 모습은 신의 빛이 인도한 것이고 그의 스케이팅은 ‘구원을 향한 영혼의 여정’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물론 인간의 힘만으로는 근원적 존재에 이를 수 없고 구원은 신의 은총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개신교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와 가톨릭 신학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이 함께 지은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은 바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지은이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울의 서신 열 세편을 분류하여 바울이 쓴 편지들과 바울이 쓰지 않은 편지들, 그리고 저자가 불확실한 편지들을 구분합니다.
첫째, 바울이 쓴 편지들(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은 1세기 중엽에 쓰여 진 신약성서의 최초의 문서들로서, 이 7개의 편지를 쓴 바울을 ‘급진적인 바울’(radical Paul)로 부릅니다.
둘째, 흔히 목회서신으로 불려지는 3개의 편지들(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은 바울이 쓰지 않은 것으로 기원 후 100년 경, 혹은 그보다 10년이나 20년 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하는데, 3개의 목회서신의 바울을 ‘반동적인 바울’(reactionary Paul)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편지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단순히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점들에서 바울의 메시지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머지 세 개 서신(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은 바울 이후의 편지들, 즉 바울이 죽은 후 한 세대 정도 지나서, 그의 진정한 편지들과 후대의 목회서신들 사이의 중간에 기록된 편지들로 간주합니다. 이 편지들의 저자는 바울의 사상을 당시의 관습들에 강력하게 조화시키므로 ‘보수적인 바울’(conservative Paul)이라 부릅니다.
지은이들의 주장은 바울의 본래 모습은 ‘급진적인 바울’이며, ‘반동적인 바울’과 ‘보수적인 바울’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가짜 바울의 서신들로 인하여 진정한 바울의 모습이 왜곡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편지들은 바울을 길들인 편지들로서, 바울의 열정을 순화시켜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살고 있었던 로마 제국의 전형적인 세계에 순응하도록 만든 편지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은 도리어 로마제국이 이 세상의 지혜를 구현했다는 사실, 곧 이 세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것을 고발한 것입니다. 곧 소수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물, 지혜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영혼의 구원을 향한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 2)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지혜”에 따라 조직된 세상, 사람들이 만든 세상으로서, 지배, 불의, 분열, 폭력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제국의 세상(world of imperial normalcy)입니다.
바울의 목적과 열정은 “이 세상의 지혜”가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에 대한 대안적인 사회를 구현하는 공동생활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급진적인 바울은 급진적인 예수(radical Jesus)의 신실한 추종자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의 공동체들은 “성령 안에” 공동체들로서, 예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영에 기초를 둔 공동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교회는 바울의 공동체와는 너무 다르게 변모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친 말씀 대신 세상의 가치가 교회를 점령한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김두식 교수는 오늘의 교회가 “세상 속의 교회”가 되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끝없는 상향성 추구’라는 세상 논리에 매몰되어, 이제는 완전히 ‘교회 속의 세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겁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조차 교인들 모두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에게는 물질을 나누어주자는 메시지는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자는 메시지는 없다는 겁니다. 즉 자신의 교회에는 쪽방에 사는 분들, 노숙인, 새터민, 장애*인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변호사이며 법학교수인 김두식 교수의 “교회다운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힘”이라는 그의 주장은 한국 교회의 진정한 회복을 바라는 절규처럼 들리며 ‘구원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 초대하는 부름으로 들립니다.
올림픽을 개최한 밴쿠버시는 약 10억 달러(우리 돈으로 1조원)의 적자를 볼 것이라는데, 올림픽이 엘리트들의 경연장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화합의 무대이자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고의 선수를 인정하고 평가해야 하겠지만, 과도한 애국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가는 올림픽이 본연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날,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기뻐했던 그날, 이명박 정부는 MBC 사장으로 자기 사람을 임명했습니다. 이렇듯 세상 권력은 끝없는 욕망을 찾아 멈출 줄 모르는 기관차 같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곧 찾아올 것입니다.
바울의 공동체들은 작은 규모였습니다. 기원후 60년까지 로마제국 전체의 그리스도인 숫자가 2,000명으로 추산되는데,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 대부분, 혹은 전부가 60년까지는 완료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본토에 대략 1,000명 정도, 나머지 1,000명은 제국의 나머지 지역, 주로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와 멀리는 로마에까지 있었을 것이며, 바울이 공동체를 세운 도시들에서는 한 두 곳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인 숫자가 1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도 몇 명, 혹은 몇 십 명이었습니다.
흔히 가정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상점교회라는 말이 더 적절할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은 상점에서 모였는데, 상점은 일반적으로 공동주택과 기타 건물들의 1층에 있었습니다. 한 도시에는 몇 개의 “상점 교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한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경험한 바울 사도의 선교로 많은 이들이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구원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5, 17)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 이 두 신학자의 이름은 매우 낯이 익다. 학교에서 교재 혹은 부교재로 쓰이는 까닭이다. 한편, 진보적인 신학적 입장을 따르고 있기에, 신학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필자는 감리교신학대학교 학부를 졸업하면서 그들의 책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우연히 독후감 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구입하여 읽었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보그와 크로산이 조직신학이나 신약학계에서 많이 알려지기는 했으나, 바울에 대한 그들의 연구실적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 연구의 연장선 상에서 '역사적 바울'에 대해서 다룰 것이기에 그들만의 메시지를 기대해본다.
'첫번째 바울의 복음'은 총 8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그동안 바울에 대해 있었던 다양한 오해들을 소개한다. 자신이 가진 정치/신학/사회적 관점이 어떠한 위치에 서있느냐에 따라서 바울서신의 글들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올수 있고, 반대로 매우 역겹게 다가올 수 있다. 그 내용을 1장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바울은 어거스틴, 루터, 칼뱅 웨슬리 등 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하다. 그 바울을 바르게 유대 계약전통과 로마 제국신학의 대조로 올바로 파헤쳐보자. 바울서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3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바울이 서신을 썼을 당시의 역사적 맥락-왜 어떤 상황에서 그 서신을 쓰게되었는가-이다. 둘째, 4얼굴을 지닌 바울-급진,반동,보수,극보수의 다양한 전제의 서신들-이다. 셋째, 신비주의자-부활절체험-로서의 바울이다.
( 바울의 중요성은 어거스틴, 루터, 칼뱅, 웨슬리 등등 교회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을 통해 입증된다.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서 위대한 신학자들이 회심을 경험하기도 했고, 그 서신을 토대로 신학을 집대성한 까닭이다.
그러한가 한편, 오늘날 이해하는 바울의 중요성은 다양하다. 마커스 보그는 루터교, 개신교 출신의 신학자로서 바울의 중요성을 어려서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다. 반대로 크로산은 카톨릭 출신의 신학자로서 바울을 단지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쌍둥이 영웅 혹은 순교자, 화해자로만 이해했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에 대조되는 바울이 아니라, 로마의 제국신학과 유대인들의 계약전통에 대조되는 입장을 올바르게 정리하는 것이다.)
2장은 바울서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한다. 한 편지를 분석할때, 편지자체.수신자정황,문화/사회적맥락을 살펴야 올바르게 파악할수 있듯이, 바울서신도 그렇게 분석해야한다. 이런 방법과 역시비평적 방법-본문비평,양식비평,편집비평,문헌비평,자료비평-으로 접근할 때, 본래 바울서신은 매우 급진적(radical)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에 몇 문서들이 편집되면서, '고의적인 바울 길들이기'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급진적이던 바울서신은 보수적(consentive)으로, 보수적인 바울서신은 반동적(reacrionary)으로 왜곡되었다. 노예제도, 가부장제도를 주제로 역사적바울시대의 문헌들-요셉푸스의 '유대고사', 루시안의 '우정' 등-과 바울서신들(몬,골,엡,고전 등)을 비교해가면서 크로산과 보그는 우리에게 친절히 설명한다.
3장은 역사적 바울에 대해서 때로는 간략하게 때로는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의 고향 다소에 대해서 긍정적인 부분 3가지, 부정적인 부분 1가지를 언급한다. 한편, 사도행전의 기록은 2차 자료이기 때문에 역사성은 낮아, 바울서신을 1차 자료로 먼저 권위를 두어 분석해야 한다. 그래서 그동안 교회에서 선포된 이야기들-가말리엘 문하, 바리새파, 개종/회심-이 역사적 사실이라 말하기 어렵다. (누가의 기록목적-하나님의 선교 소개-와 바울의 서신기록목적-각 교회의 문제해결책 제시, 사도성 입증, 감사인사 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내용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기원후 8년에 태어난 바울의 출신지는 다소이다. 다소는 (오늘날로 표현하면) 동양과 서양의 경계선으로 학업의 지평이 넓은 장소였고, 노동의 의미-수고함으로 역사를 바꿀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장소였고, 수사학, 논쟁력, 설득력을 배우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하지만, 말라리아라는 병을 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한편,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바울이 가말리아 문하생이거나 바리새파 사람이라기는 조금 문제(가말리엘은 예수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가 있다. )
4장은 '주님'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로마제국신학과 바울의 기독교신학을 비교한다. 로마의 제국신학과 바울의 기독교신학의 처음과 끝은 같다. pax romana, shalom. 즉, 평화이다. 종교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 과정은 상이하다. 이것을 당시 문헌들, 고고학적 자료들과 비교하면서, '주님'이라는 칭호를 비교하여, 그 칭호를 로마 황제 외의 사람에게 붙일 때의 그것의 의미를 소개한다. 로마서 13장의 철저히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 역시 그 맥락을 잘 살펴야함을 논의하면서, 역사적 바울의 입장을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종교에서 평화로 가는 길은 로마의 폭력과 승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과 분배적 정의임을 주장한다.
(당시,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볼때, 신적 칭호(divine title)는 매우 다양-하나님의 아들, 성육신한 하나님 등- 했고, 통용되었다. 로마황제 혹은 상관에게 이러한 칭호를 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주'로 사용한다는 것은 로마황제의 지배를 거부하겠다는 반역행위로 간주되었다.
빌레몬서에 대한 바른 해석, 로마서13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결국 평등성, 분배적 정의를 나타낸다.)
5장에서는 바울이 이해한 예수의 십자가를 논의한다. 십자가, 부활, 속죄의 참 의미는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합일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내적변화, 정치적으로 예수가 주인이라고 한다. 예수를 대속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희생물로 본다. 즉, 바울이 주장한 속죄atonement는 하나님의 대청소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6장에서는 로마서를 새롭게 본다. 소위 개신교 정통적인 입장-이신칭의-으로부터 바울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로마서의 저술목적인 기독교인과 유대인, 유대기독교인과 이방기독교인의 화합과 그 화합을 가능케 하는 칭의를 새롭게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는 성령이식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원상복귀-분배적 정의- 사역에 동참해야함을 크로산과 보그는 주장한다.
필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박익수 교수에게 신약주석과 바울서신(II)를 각 한 학기씩 배웠다. 박익수 교수는 매우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기에 학교에서 말이 참 많았다. ‘첫번째 바울의 복음’을 읽으면서 동일한 점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있었다. 박익수 교수의 논지와 크로산/보그의 논지를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이점을 정확하게 분별해낼 재주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만 논술하고자한다.
가장 큰 논쟁은 로마서 3장과 갈라디아서 3장의 ‘πιστις Χριστου’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박익수 교수는 -주체적 속격용법으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믿음으로 이 땅에서 철저히 순종하며 살았기에 모든 인간이 칭의를 받았다고, 인간의 행위 혹은 공로 등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하게 하는 것이라는 논지이다. 반면에 크로산/보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석하여 소위 개신교정통의 입장을 따른다. 그렇다고 해석 크로산/보그의 논지가 소위 개신교정통의 입장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바울이 주장한 칭의를 크로산/보그의 눈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그것은 -보복의 정의가 아닌-분배의 정의, -의의 전가가 아닌-정의의 도구로의 변화, -대속물 예수가 아닌-참여의 희생제물이다. 그래서 공기처럼 거저주어지는 성령이식을 받아들여 화합을 이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비폭력, 분배적 정의로 원상복귀 시켜야 할 의무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
7장에서는 역사적 바울의 공동체-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바울의 공동체는 돌봄과 나눔, 평등의 공동체였음을 데살로니가후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밝힌다. 역사적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유대인의 관습을 배제한- 할례 없는 복음을 통해 위계질서를 비판하고, 평등성을 제시한다. 매우 격정적이고 논쟁적으로 말이다. 고린도전서를 통해서는 경제적 부자와 빈자 사이에, 은사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평등성을 주장한다. (한편, 은사 자체에 위계질서가 있어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큰 은사임을 강조한다.) 빌립보서를 통해서, 특히 그리스도 찬양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개인적인 변화를 강조한다. (아담과 예수의 대조, 선재적 그리스도의 전통적 해석들이 아닌, 제3의 해석을 소개한다. 이는 로마황제와 예수의 대조이다. 권력와 통제가 아니라 분배적 정의와 비폭력의 길이 해결책이라는 논지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가볍게 바울의 말년을 소개한다. 그는 아마 석방되지 못하고 참수형 당했을 것이며, 마지막편지에서도 분배적 정의를 주장했다을 크로산과 보그는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서 역사적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 학교에서 박익수 교수를 통해 박익수 교수를 통해 역사적 바울을 접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크로산/보그를 통해 보는 역사적 바울을 접했다. 필자는 박익수 교수의 논지에 상당히 긍정하고 있었기에 크로산/보그의 논지 역시 불편함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연구소가 이 책을 한국교회에 소개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명확해졌다.
한국교회의 문제.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항상 있었다. 필자는 이제 막 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한 신학도이자, 한 작은 교회의 교육파트전도사로 있다. 필자 역시 소위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문제점들을 발견한다. 필자가 발견한 문제점들을 고발해보겠다. 그리고 그 후 내 나름대로의 변호 혹은 문제해결을 제시해보겠다.
첫째, 위계질서이다. 16세기 루터가 카톨릭에 저항한 까닭 중 하나는 위계질서 때문이다. 교황과 사제, 평신도 등의 철저한 위계질서를 비판했다. 바울 역시 위계질서를 주장한 적이 없다. 평등성만을 주장했다. 현재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하는 취하는 많은 교회들 역시 위계질서를 가진다. 한 몸의 한 지체의 역할로 위계가 없는 교회이어야 교회일텐데, 역할만 다른 평등한 '직분'을 가져야할텐데, 혹자는 '직급'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의 사모가 말이다. 둘째, 상향성이다. 33년의 대부분을 빈민촌 갈릴리에서 보낸 예수의 삶을 모방해야 하는 교회가, 낮은 곳을 지향해야 교회일텐데, 철저히 높은 곳을 지향하고 있다. 설교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오열한 적이 있다. 설교의 내용은 '열외됨'이었다. 설교의 본문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설교 메시지의 결론은 이랬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구별되어야 한다.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에도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드려야 한다. 명절 때, 음식 만드는 일에서 열외되어야 한다.' 참 어이가 없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텐데, 희생해야할텐데,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해주어야할텐데, 거기서 열외되어야 한단다. 이웃의 고통은 이웃의 고통일뿐, 지극히 가시적인 종교행사에 참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하기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움을 주지 말란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것은 -한기연의 김준우 소장의 논지인- ‘자본과 권력의 노예’인 개교회들의 현실이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교인이나 목회자 할 것 없이 모두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었다. 시장논리, 경제논리에 젖어있다. 그래서 대형화, 외형화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숫자늘리기, 대중성늘리기, 종교놀음, 교회놀이에 푹 빠져있다. 자기영광에 도취되어 있을 뿐이다. 이 땅을 하나님의 새창조, 우주의 원상복귀 운동에 동참하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첫번째와 두번째, 위계질서와 상향성의 논리에 빠진 보수 진영에 대한 정리이다.
어떻게 문제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역시, 말로는 안된다. 삶으로 밖에 안된다. 보수 진영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깨우쳐주어야한다. 교회공동체가 정경으로 고백하는 성서를 바르게 해석해야함을,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을.. 그것이 비록 보수진영에서 받아주지 않을지라도, 희생해야한다. 한편, 포스트모던, 다양성의 시대이기 때문에 보수진영 있는 그대로 방치하는 방법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최종결론에서 매듭짓고자 한다.
세번째, 자본와 권력에 대한 정리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로마황제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한 예수를 '우리 주님', '유일한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 행위가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는 반역행위이자 자살행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날, 21세기의 로마황제는 '자본과 권력'이다. 21세기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자본과 권력'을 '주님'이라고 그만 호칭해야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한 예수를 '우리 주님', '유일한 주님'이라고 호칭해야한다. 그 행위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스스로를 자해하는 행위일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와 교회, 온 우주를 살리는 행위이다. 그러할때 정말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다.
최종결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새로운 로마서가 필요하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화합이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화합이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죄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우리 모두 성령이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너 나 할 것없이 그 성령이식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그 방법은 크로산과 보그에 의하면 비폭력과 분배적 정의이다.
407-769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 신동아 아파트 11동 1201호 김민호
(글을 쓰다보니 '역사적 바울'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본문에는 그런 표현이 등장하지 않고, '4번째 바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인터넷에 올리는 독후감이라 상당히 성의가 떨어지는데, 계속해서 수정하겠습니다.)
독후감 [기독교의 심장] 을 읽고
같은 하느님을 믿는데, 같은 예수를 믿는데 어떻게 생각이 나와는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생각이 들때가 있다. 사실 생각이 다른정도가 아니라 생각이 거의 반대에 가까워서 어떨땐 혐오감이 생길정도다. 나의 이런 극한 감정은 주로 이대팔(2:8)의 비율로 매끈하게 쓸어넘긴 기름기 좔좔거리는 헤어스타일의 어르신들이 마이크 잡고 된발음으로 유창하게 자신의 무식함을 태극기 휘날리는 군중들에게 설파하는 일부 종파의 지도자들에게서 유발된다. 이들은 극단적으로 반공친미 이데올로기를 숭상하며, 권력과 부를 종교를 통해 세습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보다는 ‘승자가 구원받는 현실’을 옹호하며, 자기 종교만이 구원의 길이라 고집한다. 난 이들이 종교인이라기 보다는 물신적 반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이란 책읽고 감상문을 적어보려하는데 서두가 너무 길었다. 필요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인데, 종교인이라 볼 수 없는 ‘자칭 종교인’들을 논의에서 배제하고 싶어서다. 앞으로 논의되는 신앙인의 부류에는 위의 사람들은 배제하고 이해해 주시길.
사람들에게 종교관은 큰 차이가 있다. 뭐든 두 부류로 나누려는 좌우 두 쪽으로 이루어진 뇌의 특성상 종교관도 크게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흔히 보수적/진보적 신앙이라 불리는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 마커스 보그는 이것을 과거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구별하였다. 매우 간략히만 정리하면 이렇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성서 무오류설에 근거하며, 믿음(believing) 중심적이며 내세(afterlife)중심적이다. 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요구되는 것들과 보상에 관한 것들이다. 훌륭한 신앙인이란 기독교의 핵심주장들을 잘 믿고, 이어질 보상을 의심치 않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서를 역사와 은유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새로운 패러다임아래서는 믿음이란 교리나 신조에 대한 동의라기 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말하며, 세계는 이방종교와 투쟁해야하는 싸움터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은총으로 가득찬 무대라고 믿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백수십년전에 시작되었으며, 지난 20-30년동안 성직자 및 평신도들 사이에서 풀뿌리운동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나의 종교생활에 있어 큰 두가지 걸림돌이 있었는데, 하나는 신의 실재하심에 대한 의문이었다. 어릴적 성당에 다니면서 가지게 되었던 신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할아버지' 하느님이었다. 구름위에서(제3의 시공간에서) 지상을 내려 보다가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 그의 맘을 위로하고 때로 기적같은 일을 베푸시려 세상에 내려오시는 그런 하느님이었다. 이것을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한다. 과학적(유물론적) 세계관을 주입시키는 20세기의 교육과정을 밟은 사람으로서 가방끈의 길이만큼 신관과 세계관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할아버지 하느님이 과학적 세계속에 살아계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럴 때 신앙이란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어가는 과정이라 강요하고 다그치는 것이 대부분의 교회가 해 왔던 일이었다. 대학에 진학 후 진화생물학에 심취했던 나에게 있어 그 두 가지는 함께 갈 수 없는 지적 장애물이었다. 이것이 함께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읽었던 몇몇 책들 때문이었는데, 이 내용을 기독교의 심장에서는 매우 깔끔하게 정리를 해 놓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관은 자연과학과 충돌하지 않는 신관을 보여주었고, 더 나아가 생물의 진화과정과 물리적 실재들 너머에 있는 신비한 무엇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충돌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의 세계는 훨씬 더 깊고 오묘하며 신비롭기 때문이다. 신앙은 과학이 밝혀낸 존재와 더불어 존재의 신비를 함께 사모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계는 전체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철저한 피조물이라는 자각이 아닐까 생각한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인간의 관점도 인류의 집단 지성이 성장함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종교생활의 두 번째 걸림돌은 정치적으로 극우적 경향을 보이는 보수교회들이었다. 한국사회의 부조리함을 나름 느낀 사람으로서 이러한 보수교회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감아 버리고, 그 원인을 개인의 신앙으로 환원시켜버리는 - 한마디로 믿음이 없어서 가난하며, 신실하지 못해 불행하다는 - 경향이 어떻게 복음의 메시지일 수 있을까. 한편에서는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갔던 신앙인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예수, 다른 믿음’의 이중성은 교회 일반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기독교이 심장은 이 두가지 측면을 친절하고도, 세련되게 설명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앙관은 현실적 삶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믿기 때문에 현실참여적이며, 따라서 부조리한 개인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 신앙적인 책무로서 깊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내게 있어 마커스보그가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잘 맞추어진 양복을 입는 느낌이었다. 자연과학과 충돌하지 않는 신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기독교를 설명해 주었다. 책을 통한 한가지 추가 소득이 있는데 그것은 내 편견의 일부를 수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유아기적 미숙한 신앙관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숙한 신앙관이라는 편견이 그것이다. 아마도 서두에서 밝힌 일부 종교인들에 대한 혐오감이 과거 패러다임에 속한 사람일반에게로 확장이 되었던 것 같다. 마커스 보그는 반드시 새로운 패러다임이 옳고 과거의 패러다임이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신앙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가 하는 점이다. 절대 진리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물리적 실재 너머에 있기 때문에 종교의 역할은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너머’로 또는 ‘그 이상’(The more)로 우리를 데려다 주게끔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살아있는 종교와 죽어있는 종교를 구별하게 하는 포인트이다. 종교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지성적으로 이해가 되도록 깔끔한 이론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너머’로 안내해주는 성례전으로서의 역할을 못한다면 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며, 많은 ‘진보’를 좋아하는 종교인들은 지적인 교만에서 잘 벗어나질 못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생활이 하느님의 실재하심을 신뢰하는 데서 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필요하다는 믿음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역시 오강남 교수님 표현대로 심층이 아닌 표층적 종교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성서적 전통에서는 두 가지 패러다임 모두가 섞여 있다. 두 가지 모두 기독교적 신앙체계의 한 방법으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심장]을 읽으면서 그동안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하나의 모양을 꿰어 맞추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시원하게 설명해 주어 좋았고, 한편으로 나 역시 한계가 많은 놈이라는 것을 콕콕 찝어주어 시원했다. 이래저래 시원함을 주는 책이다. 겨울 한파에 읽으면 참 좋을 것이다. 한파에 하얗게 얼어붙은 몸뚱이를 뜨거운 국물이 녹여주는 느낌을 ‘시원하다.’하지 않는가. 뜨겁지만 시원한 국물처럼 마음을 녹여서 발딱거리는 심장을 느끼게 해줄 책이다.
<살아 있는 기독교의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