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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1 14:33

첫 번째 바울의 복음

(*.127.226.39) 조회 수 13997 추천 수 0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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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번역자 김준우
출판일 2010-02-20
가격 12,000원

첫 번째 바울의 복음: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 김준우 옮김

The First Paul:  Reclaiming the Radical Visionary Behind the Church's Conservative Icon

최근의 바울 연구를 통해, 바울 완전히 새로 보기
Meet Paul Again for the First Time

바울은 왜 예수의 복음을 왜곡한 보수반동 기독교의 원흉으로 비판받는가?
바울이 정말로 노예제도, 여성억압, 권력에 대한 무조건의 복종을 가르쳤는가?
바울의 메시지는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급진적 메시지와 어떻게 똑같은가?
초대교회는 왜 바울의 급진적인 메시지를 무디게 만들고 길들이게 되었는가?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대속 교리를 가르쳤는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말은 당시에 무슨 뜻이었는가?
바울은 루터처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칭의 교리를 가르쳤는가?
로마의 제국신학에 맞서서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전시켰는가?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은 기독교 메시지를 재해석하는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이다." - Dallas Morning News

"어느 세대에나 '그가 쓴 글을 모두 읽어라'고 말할 수 있는 몇몇 대가들이 있다. 마커스 보그는 오늘날 그런 대가들 가운데 하나다. 그의 글은 보기 드물게 분명하며, 학자로서의 독창적인 통찰력, 심오한 영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실생활과 연결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그는 당신의 마음과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학자이다." -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저자

"존 도미닉 크로산은 대단히 흥미롭고 박식하여,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 National Catholic Reporter

"크로산은 독창적이며 박식하며, 흔히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 일레인 페이절스

ISBN 978-89-87427-91-1 94230
ISBN 978-89-87427-87-4 (세트)

정가 12,000원

 

마커스 보그는 오레곤 주립대학교의 종교와 문화 명예교수이며 포틀랜드의 트리니티 성공회 대성당의 주재 신학자이다. 
그는 {기독교의 심장}을 비롯해서 {새로 만난 하느님}, {예수} 등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시카고 드폴대학교 종교학부의 명예교수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하나님과 제국}
등 베스트셀러 이외에도 고고학자 조나단 리드와 함께 Excavating Jesus(2001), In Search of Paul(2004)을 썼다.

바울은 기독교의 탄생에서 예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교회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지만 여전히 기독교인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바울의 편지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철저한 은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노예제도, 여성억압,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동성애 단죄 등 억압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는가?
오늘날 세계 신약학계의 대표적인 학자들인 보그와 크로산은 최근의 신약학 연구를 바탕으로 바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이유들을 설명하며, 특히 바울이 안셀무스의 대속론과 루터의 칭의론에 의해 오해된 부분들을 바로잡아, 바울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저자들은 오늘날 신약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1) 바울이 직접 쓴 진정한 편지들 7개와, 바울이 죽은 후에 바울의 이름으로 쓰여진 편지들 가운데 (2) 논쟁이 되는 편지들 3개, (3)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한 목회서신들 3개의 내용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신약성경 안에 실제로 세 명의 바울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급진적인 바울"과 "보수적인 바울"과 "반동적인 바울"이 있는데, 왜 노예제도, 가부장제도, 후견인제도 등의 문제에서, 첫 번째 바울의 급진적인 메시지가 점차 보수화되고 반동적으로 둔갑하여 안티 바울(anti-Paul)의 메시지가 되어버렸는지를 해명한다. 또한 인류문명이 19세기 제국주의, 20세기 전체주의를 거쳐, 21세기 테러리즘과 생태계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더군다나 종교 자체가 폭력의 원천이 되는 상황에서, 바울의 복음은 오늘날 어떤 세계사적인 의미를 주는지를 밝혀준다. 


목차

1장. 바울: 은혜로운가 아니면 너무 보수적인가? … 7

2장. 바울의 편지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43

3장. 장거리 사도의 생애 … 83

4장.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 127

5장.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 167

6장.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 211

7장.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는 삶 … 253

에필로그 … "한 사도의 죽음" … 291

옮긴이의 말  ...  305
성경본문 색인 … 307

 

  • ?
    한기연 2010.02.06 09:25 (*.204.40.90)

    옮긴이의 말

     


    어느 봉쇄수도원의 사계절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위대한 침묵"을 보았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마저 "부질없는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시대에, 오로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침묵 속에 일생을 헌신하는 이들의 얼굴에 배어나는 거룩한 고뇌의 흔적들과 잔잔한 기쁨을 보면서, 철저한 헌신을 통해서만 교회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신앙의 신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수녀원에서 7년을 보냈던 카렌 암스트롱의 자서전을 생각하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신앙의 바다"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도만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님에 대해 정직하게 고백하고자 치열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했던 분들의 연구 성과를 배우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로 이미 명성이 높은 저자들의 명석한 해설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 앞에 자주 옷깃을 여미게 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들어왔던 익숙한 말씀들이란 그 역사적 상황을 모른 채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했던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흔히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대결한 인물, 혹은 종교개혁자들의 관점에서 가톨릭의 공적주의와 대결한 인물로 보거나, 혹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사적인 영적 복음으로 왜곡시킨 보수반동의 원조로 보는 것에 익숙했던 나에게, 이 책 저자들이 로마제국의 제국신학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바울의 복음을 해명한 것은 매우 적절하며 의미 있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안셀무스의 대속론과 루터의 칭의론에 의해 바울의 복음이 오해되어 왔던 점들을 좀 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역자주를 달면서, 새삼 학문의 시대적 사명을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는 짙은 어둠과 절망, 참담한 인간 소외 현실만이 아니라, 계급갈등과 민족모순, 생태계 위기를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헌신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용산참사나 4대강 사업, 대북 식량원조 문제에서, 기독교인들조차 생명과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꿈에 헌신하기보다는 보수언론의 편향적인 이념공세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교회 안에서부터 화합을 이루어나갈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교회 일반의 배타주의와 교회성장주의, 탈정치주의와 친미-반공주의라는 이념적인 문제들과 비교할 때, 사도 바울이 대결해야 했던 이방인 개종자들의 할례 문제나 정결음식 문제는 분명히 매우 사소한 문제였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교회 안의 이런 풀기 어려운 이념적 갈등만이 아니라,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인간 소외와 폭력, 사회적 불의, 착취와 전쟁을 종식시키고, 지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은 바울의 복음과 비전을 통해 매우 분명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자유와 기쁨을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누릴 수 있도록 안내해준 저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이 책을 통해 우리들 속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
    우아 2010.02.07 20:46 (*.152.172.67)
    번역 출간을 기쁘게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분들의 또다른 저작 "The First Christmas"도 이번 성탄절이 오기전에 번역되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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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2.09 18:00 (*.127.226.39)

    신간안내 

    바울의 첫 번째 복음 -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312쪽

    신학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을 파괴하는 거짓 신학과의 싸움이다. 오늘날 지배계층이 법치라는 미명 아래 자행하는 패거리주의(just us)와 폭력은 생명의 존엄성과 정의(justice)를 짓밟는다는 점에서,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폭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중들은 항상 생존권 자체가 유린당하지만, 과거의 제국들과 달리 오늘날 시장전체주의가 동원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매스컴, 오락산업은 너무 교묘하기 때문에, 체제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에는 영혼이 마비되기 십상이다.
    이런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는 하늘의 질서(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대부분 지배자들의 행복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권력과 시장의 시녀들로 전락해버렸다. 생명의 신비와 공동체의 평화를 구가하기보다는 개인주의적 영혼구원과 현세적인 축복 논리에 입각한 교회성장주의에 매몰된 채,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민중의 아편으로 작용하거나, 아니면 뉴라이트 집단이나 한기총처럼 역사적인 보수 세력의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 물질주의, 교회성장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친미-반공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교회는 예수의 정신과 하나님나라 운동을 배반한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을 넘어 이제는 일반 사람들의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관심,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을 통한 삶의 변화와,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전략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조금씩 높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왜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이처럼 예수를 배반하고 개인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집단이 되어버렸는가? 왜 한국교회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교회 자체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일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집단이 되었는가?
    한국교회가 거짓 복음을 믿기 때문이다. 권력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예수와 바울의 복음을 왜곡한 탓이다. 즉 예수와 바울 모두 당시에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을 만큼 반체제적인 하늘의 질서,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한 가치관과 대안적 질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구체화시켰던 위험인물들이었지만, 그 이후 교회는 예수와 바울의 급진적인 가르침을 "이 세상의 지혜"로 길들이고, 제국의 불평등한 계급질서에 순응하도록 보수화시키고 반동적인 것으로 둔갑시킨 탓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무비판적으로 가르치는 십자가 대속론과 아울러 하나님의 은총과 믿음을 통한 칭의론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를 따를 수도 없고 (대속 때문에) 따를 필요도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따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은 교회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는 제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의 팬클럽으로 전락하게 된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준다. 한국교회는 흔히 바울을 유대교의 율법주의, 가톨릭의 공적주의와 대결한 인물로 간주하지만, 역사적 예수와 초기 기독교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저자들은 이 책에서 로마제국의 막강한 제국신학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발전시킨 바울의 생애와 복음을 새롭게 정리했다.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반동 기독교의 원흉으로 둔갑했는지를 밝힘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이 본래 어떤 것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안셀무스의 대속론과 루터의 칭의론 대신에, 첫 번째 바울의 참여적인 속죄와 실제적인 정의의 복음을 밝혀준다. 바울을 처음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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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2.10 13:02 (*.127.226.39)
    제국신학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피로 고백한 복음, 그리고 대속론과 칭의론에 대한 재해석

    {바울의 첫 번째 복음}-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312

    신학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 신학과의 싸움이다. 거짓 신학이란 가난한 사람들에게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체념과 권력에 대한 복종을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신학이다. 지난 시대의 대표적인 거짓 신학은 경제성장에 편승해서 교회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예수의 복음을 "성공과 번영의 복음"으로 둔갑시켜 무한경쟁과 업적주의를 정당화한 자본주의적 기독교였다. 이 시대에는 리처드 도킨스처럼 성서 해석 전통에 대해 전혀 탐구하지 않은 채 단지 과학주의와 성서 문자주의에 근거하여 기독교 진리를 매도하는 "새로운 무신론자들"과 그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다. 과학주의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라고 실증주의의 단순논리를 펴는 것처럼, 도킨스 역시 무신론에 대한 일방적 주장만이 아니라, "종교신앙에 대한 자동적인 존중의 원리를 폐기할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극단론과 다르지 않다. 포이에르바하나 마르크스같은 무신론자들은 인간 소외, 가난과 사회적 불의, 보다 인간다운 세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그 허무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예수와 바울의 복음을 왜곡하는 신학이야말로 거짓 신학의 뿌리다. 복음을 왜곡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가 권력과 맘몬의 시녀로 전락한 때문이며,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기억상실증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의 신학자 터툴리안이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기독교 진리는 피로 고백한 진리들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들, 곧 "주님"이라든가 "그리스도," 혹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이라는 익숙한 용어들이란 당시의 막강한 로마제국이 자행한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절망과 한숨 속에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정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분명하게 믿은 몇몇 사람들이 두 눈 부릅뜨고 목숨 걸고 외쳤던 신앙고백들이다. 이 놀라운 신앙고백이 당시의 절망과 어둠을 뚫고 나갈 창조적인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진리의 길을 열어제친 것이다. 즉 예수와 바울 모두 당시에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을 만큼 반체제적인 하늘의 질서,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한 가치관과 대안적 질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구체화시켰던 위험인물들이었지만, 그 이후 교회는 예수와 바울의 급진적인 복음을 "이 세상의 지혜"로 길들이고, 제국의 불평등한 계급질서에 순응하도록 보수화시키고 반동적인 것으로 둔갑시킨 탓이다.
    특히 기독교가 무비판적으로 가르치는 십자가 대속론과 믿음을 통한 칭의론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를 따를 수도 없고 (대속 때문에) 따를 필요도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따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은 교회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는 제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의 팬클럽으로 전락하게 된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준다. 교회는 흔히 바울을 유대교의 율법주의, 가톨릭의 공적주의와 대결한 인물로 간주하지만, 역사적 예수와 초기 기독교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저자들은 이 책에서 로마제국의 막강한 제국신학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발전시킨 바울의 생애와 복음을 새롭게 정리했다.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반동 기독교의 원흉으로 둔갑했는지를 밝힘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이 본래 얼마나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밝힌다. 전통적인 대속론과 칭의론 대신에, 첫 번째 바울의 참여적인 속죄와 실제적인 정의의 복음을 밝혀준다. 바울을 처음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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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2.12 12:18 (*.127.226.39)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공동저술한 The First Christmas(2009)도 저작권을 얻었습니다. 여름 전에 출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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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2.16 16:27 (*.127.226.39)

    신간안내    

    제국신학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발전시킨 바울의 창조성

    {바울의 첫 번째 복음: 급진적인 바울이 어떻게 보수 신앙의 우상으로 둔갑했는가}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312쪽.

    바울은 기독교의 성장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도로서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였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복음"(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예수에 관한 복음"(예수의 神性과 삼위일체, 代贖의 복음)으로 둔갑시켰으며, 예수운동의 이 세상적, 평등주의적, 물질적, 공동체적 성격을, 개인주의적이며 내면적-영적이며 저 세상적인 구원의 종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도와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쳤으며 반유대주의와 여성차별을 주장한 인물로 비판받아왔다.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을 유대교 율법주의와 대결하여 율법준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길을 가르친 신학자로 이해하여 중세 가톨릭의 교황무오설과 功績主義와 대결하여 오직 성경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 신학자로 이해해왔다. 이처럼 이제까지 바울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안셀무스의 대속론(代贖論)과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稱義論)이었다. 대속론은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갚은 제물이라는 교리이며, 칭의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교리다.
    개신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대속론과 칭의론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를 따를 수도 없고, (예수의 피의 대속 때문에) 따를 필요도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따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개신교인들의 믿음과 생활이 분리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이 책의 저자들은 1980년 이후 초기 예수운동 연구를 이끌어왔던 대표적인 학자들로서, 이 책 The First Paul(2009)에서, 바울을 "종교개혁의 관점으로부터 구출하여 본래의 로마 세계 속에" 정위치시킴으로써, 바울의 신학을 유대교와의 대결이나 가톨릭과의 대결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제국신학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파악한다. 우선 노예제도와 가부장제도 문제와 관련하여 신약성경 안에 바울이 직접 쓴 편지들 속에 나타나는 "급진적인 바울"과, 논쟁이 되는 편지들 속의 "보수적인 바울" 그리고 바울이 죽은 후에 그의 이름으로 된 편지들 속에 나오는 "반동적인 바울"을 구분하고, 바울의 인간평등에 대한 급진적인 메시지가 점차 로마제국의 계급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들어져 안티-바울이 되도록 둔갑시킨 과정을 분석한다. 이어서,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한 세기 가까운 혼란과 내전을 끝내고 45년 동안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한 하나님," "주님," "구세주"로 고백되던 당시에, 바울은 어떻게 이처럼 황제에게 붙였던 모든 신성한 칭호들을,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예수에게 의도적으로 갖다 붙였는가를 추적함으로써, "예수가 주님이다"는 고백의 반제국주의적 의미와 "로마의 평화"와 반대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해명하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바울의 이해, 그리고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는 삶의 본래적인 의미를 자세히 밝힌다. 이처럼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의 영성과 사회정치성을 해명함으로써, 기독교의 본래적인 진리와 문명사적인 의미, 그리고 바울의 창조성을 새롭게 드러낸다. 특히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義)"를 분배적 정의로 해석하며, 대속론과 칭의론을 대체하는 "참여적 속죄론"과 "실제적인 의화(義化)"는 기독교 진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개인의 온전함과 공동체의 화합, 지상의 평화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길인지를 보여준다.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계급갈등과 남북대결, 황금만능주의와 속물주의, 무한경쟁과 살인적 노동, 이념의 충돌과 종교적 독선마저 생명과 평화를 파괴하는 참담한 현실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자유와 기쁨의 길, 하나님의 평화계획과 교회의 사명을 밝혀준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진보적인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절실한 기독교의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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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3.02 15:49 (*.127.226.39)
    “바울의 ‘노예제 옹호’는 로마의 왜곡”
    직접 쓴 편지에 ‘그리스도 안에선 종도 여자도 없다’ 주장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기독교에서 바울은 예수 다음으로 중요하나 바울만큼 논쟁이 많은 인물도 드물다. 바울이 쓴 것으로 돼 있는 일부 편지에 노예를 억압하고, 여성들을 남성에 종속시키며,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친 구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의 편지에 근거, 중세의 안셀무스가 주장한 대속론(代贖論·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른 희생제물이라는 교리)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稱義論·행위나 업적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교리)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이에 따를 경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될 뿐 하나님인 예수와 그 가르침을 따를 수도, 따를 필요도 없고, 따라서도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연구소가 최근 번역, 출간한 ‘첫 번째 바울의 복음’(마커스 보그·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은 바울과 그의 편지들을 편지가 쓰여진 당시인 1세기의 로마 세계 속에 놓고 재해석, 인간 해방을 주장하던 바울이 어떻게 노예제와 가부장제를 찬성하며 권력에 맹종하는 신앙의 원조로 둔갑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책을 쓴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은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에 명성을 쌓아온 미국의 신학자들이다.

    책에 따르면 성경 속의 바울에 나오는 편지는 3종류가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처럼 바울이 직접 쓴 편지가 가장 많지만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처럼 바울이 죽은 뒤 바울의 이름으로 씌어진 편지(직접 쓰지 않은 것이 확실한 편지)가 있는가 하면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처럼 논쟁의 여지가 있는 편지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직접 쓴 편지는 노예제나 가부장제 찬성 등과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선언처럼 그는 당시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진적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쓰지 않은 것이 확실한 편지로 옮겨가면서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든지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써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와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렇게 바울이 노예제와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둔갑해 가는 것을 두고 책은 ‘로마의 바울 길들이기’라고 표현한다.

    이와 함께 로마의 십자가형이 반역자에게 가해지던 처형법이라는 점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란 구절에서 ‘예수가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반제국적인 인물’이라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책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론의 근거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힌다.

    성경 속 ‘그들을 대신해 피를 흘렸다’란 표현은 일상 언어에서 ‘희생’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그들을 위해서(for)’로 해석해야지 ‘그들 대신에(in their place)’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대속이라는 개념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는 재판장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어, 관대하고 은총이 넘치며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를 뒤엎는 불량한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또 바울 편지 속 ‘하나님의 의’를 보복을 통해 이룩하는 정의가 아닌, 분배와 나눔으로 성취하는 정의, ‘의롭게 됨’을 우리가 가지지 않은 정의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 즉 전가(轉嫁)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제적인 변화 등으로 읽는다.

    이에 따라 저자들은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절이 칭의론의 근거라기보다 기독교 진리가 철저하게 개인의 변화와 온전함, 공동체의 화합, 지상의 평화 등을 통해 실현되는 것임을 뜻하는 메시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문화일보
    기사 게재 일자 2010-03-0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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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아 2010.03.11 00:22 (*.38.179.101)
    혹시 월터 윙크의 Naming the power 라는 책도 번역 예정이 있으신지요?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와 시리즈인것 같은데요.
  • ?
    한기연 2010.03.18 11:32 (*.127.226.39)

    문명의 정상성을 뒤집는 복음

    -마커스 J.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의 <<첫 번째 바울의 복음>>

                                                                                                                                                                                - 김기석, 기독교사상 2010년 4월호

    “크리스천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주님을 따른다는 뜻이었으며, 제국의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되는 생활방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126)

    “로마의 제국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조용하고 질서가 잡힐 때 지상에 평화가 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독교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의로울 때 지상에 평화가 온다고 말했다.”(165)

     

    바울의 세 얼굴

    10여 년 전 로마 근교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에서 느꼈던 고적함이 떠오른다. 바울이 참수당한 곳으로 알려진 그곳에 세워진 예배당은 ‘세 개의 샘’(Tre Fontane)이라는 낯선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었는데, 그것은 잘린 바울의 목이 땅에서 세 번 튀어올랐고 그 자리에서 샘이 솟아났다는 전설 덕분이었다. 컴컴한 예배당 한 구석에서는 과연 물이 졸졸 솟아나오고 있었다. 볼 수는 있지만 마실 수는 없는 그 샘물은 누구의 가슴으로 흘러갔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예배당 저편에서 하얀 수건을 든 노 수녀 한 분이 장의자들을 마치 어루만지듯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고요함은 기도였고,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회심 이야기치고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없지만 바울의 경우는 단연 최고이다. 살기등등한 적개심, 빛, 소리, 눈멂…. 박해자에서 박해받는 자로의 극적인 전환은 압도적이다. 예수의 사도가 되어 그가 온 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온갖 시련(고후11:23-27)은 우리의 나른한 일상을 깨우는 쇠망치이다. 그런 바울을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의 시선은 고르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바울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할 위기에 있었던 기독교를 구한 인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바울을 기독교를 망친 인물로 보기도 한다. 갈릴리 사람 예수의 소박하고 역동적인 가르침을 지성화하고 교리화함으로써 생명력을 잃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은 노예제도와 반유대주의를 용인하거나 부추기고, 권력자들의 지배를 합법화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동성애를 단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했지만 바울이었다면 그 여인은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게 그의 견해이다. 정말 그러한가? 하지만 성경을 통해 보면 바울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다. 보수적인 바울이 있는가 하면 급진적인 바울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바울인가?

     

    저명한 종교학자이자 신약성서학자인 마커스 J.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함께 쓴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진짜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탐색하는 일에 착수한다.

     

    “우리의 공통적인 희망은 바울을 종교개혁의 세계로부터 구출하여 본래의 로마 세계 속에 자리매김 함으로써, 바울을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이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으로 볼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계약전통(covenant tradition)과 로마의 제국신학(imperial theology)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으로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것이다.”(15-16)

     

    진짜 바울을 드러내기 위해 저자들은 세 가지 전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첫째, 신약성경 안에는 한 사람 이상의 바울이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27권 중에 바울에게 귀속되는 책은 13권이나 되지만 진짜 바울이 쓴 서신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등 7개뿐이다. 이 서신 속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는 매우 급진적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의 메시지를 보수화해 계승한 후대의 책이고,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진짜 바울의 메시지를 철저히 뒤집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급진적인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이 공존하고 있다. 둘째, 바울의 진짜 편지들도 역사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속한 삶의 자리는 로마제국이 유포하고 있던 제국신학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시대였다. 바울은 제국신학에 맞서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셋째, 바울의 메시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전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저자들은 바울을 “유대인 그리스도 신비주의자”(a Jewish Christ mystic)라고 명명한다.

     

    급진적 바울에게 씌워진 재갈

    저자들은 바울의 메시지의 급진성을 입증하기 위해 빌레몬서를 정밀하게 분석한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자기에게로 피신해 있던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들려보낸 편지이다. 이 서신은 매우 짧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가 혁명적이고, 또 신앙인으로서의 바울의 입장이 오롯이 담겨 있기에 주목해야 할 서신이다. 저자들은 도망 노비인 오네시모가 옥중에 있던 바울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로마법의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법은 노예가 신전을 피난처로 삼는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친구에게 도망쳐서 중재와 자비를 구하는 것도 허락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와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바울의 급진성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종이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한다. 복음이 가르치는 해방의 평등성은 영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이 바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더불어 행위'(faith-with-works)에 입각해 처신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요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바울의 급진적인 메시지는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크리스천 주인과 노예 사이에 지켜야 할 상호윤리를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주인과 노예라는 그들의 관계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디도서에 이르면 상호윤리조차 실종되고 오로지 종들이 주인에게 즐겁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급진적 바울이 이렇게 보수화 과정을 거쳐 반동적인 형태로 타락해가는 것은 비단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바울은 가족 관계와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평등성과 사도 직분에서의 평등성을 강조하지만, 이런 그의 급진적 요구는 세월과 더불어 퇴색되고 보수화를 거쳐 반동화의 운명을 맞고 만다. 한 가지 단적인 예가 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동역자 27명의 이름을 그리움으로 호명한다. 남자가 17명이었고 여자는 10명이었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그 가운데 유니아를 남자로 둔갑시켰다. 유니아가 유니아누스라는 남자 이름을 축약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유니아를 남자로 둔갑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사도들 중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여자의 사도직을 부정할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로마가 닦은 길을 거슬러

    바울이 이렇게도 급진적인 견해를 갖게 된 것은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또 다른 요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들은 바울이 태어나고 자란 길리기아 지방의 주도인 다소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한다. 다소의 북쪽으로는 타우루스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고 남쪽으로는 따뜻한 지중해의 해안이 전개되고 있었다. 다소는 그러니까 해로와 육로의 교차점이면서 그리스 세계와 셈족 세계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고향 다소는 그에게 만성 말라리아라는 반갑지 않은 선물을 주었지만, 자연과 싸우며 삶의 터전을 가꾸어가는 검질긴 삶의 모습을 그에게 각인시켜 주었고 국제화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유대 전통은 물론이고 그리스 철학, 수사학, 변증론, 논쟁술을 익힐 수 있었기에 그는 준비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열성적인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던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물론 다마스쿠스 체험이다. 박해자였던 그가 박해받는 자로 삶을 급격히 전환한 것은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즉시 사도적 소명에 헌신했지만 그의 초기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바테아 선교는 갈릴리의 영주인 헤롯 안티파스와 나바테아 왕 아레사 4세의 갈등과 전쟁의 와중에 무산되고,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시작한 키프로스와 갈라디아 선교는 다소의 성과가 있었다. 안디옥 사건 이후 독자적인 선교의 길에 나선 바울은 지중해 세계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간다. 그는 반제국주의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동에서 서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도시 노동자들의 현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도시는 가난과 질병과 적개심으로 인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약고와 다를 바 없었던 도시에서 바울이 타깃으로 삼은 이들은 누구였을까? 저자들은 이 대목에서 매우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바울이 각 도시에 있는 회당을 찾은 것은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당 예배에 참석은 하면서도 개종은 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 유일신론을 받아들여, 유대인의 도덕, 가족 윤리, 공동체의 가치를 존경하고, 특히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했던 사람들”(120)이었는데, 바울은 그들을 철저한 헌신의 자리로 이끌려 했다. 바울이 두 세계 사이의 완충역할을 해주었던 유력한 이방인들을 빼앗긴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대인들의 위험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로마의 지배세력이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늘의 독백이 아니라, 땅의 현실에 대한 부정이요 초극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주'로 섬기는가?

    하나님의 아들, 성육하신 하나님, 주님, 해방자, 세상의 구원자라는 호칭은 거의 즉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이 호칭들은 예수가 아닌 다른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로마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침으로 제국을 통일한 그에게 원로원은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그는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를 중심으로 해서 제국 신학이 형성되었다. 제국 신학의 기본 구조는 종교→ 전쟁 → 승리 → 평화이다. 세상의 평화라는 역사의 목표는 신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쟁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국 신학은 여러 가지 문서들과 비문들, 동전들과 형상들, 동상들과 신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44). 제국 신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승리를 통한 평화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며, 국가들의 운명이며, 문명의 정상적인 모습이며, 하늘의 뜻이라고”(146) 믿었다.

     

    이러한 시대에 황제에게나 적용되던 호칭을 로마 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제국의 신학과 체제에 도전하는 매우 중대한 도발이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사실 자체가 반체제적 행동이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평화를 거둘 수 있다는 제국 신학을 해체하고 새로운 평화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의를 통한 평화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곧 처벌이 아니라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이다. 진정한 평화는 구성원 모두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공평하게 나누어 질 때 찾아온다. 바울이 제시하는 십자가 신학의 기본 구조는 종교→ 비폭력→ 정의→ 평화이다.

     

    참여하는 종말론

    이 책에서 저자들이 가장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Christ crucified)의 죽음이 갖는 구원사적 의미이다. 저자들은 매우 급진적인 명제를 내놓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보는 것은 틀린(bad) 역사이며, 해로운(bad) 인간론이며, 불량한(bad) 신학”(175)이라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진술 앞에 당황하거나 불쾌하게 느낄 것이다. 대속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토대라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우리가 기대고 있는 대속론이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1097년에 쓴 책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논증은 4단계를 거친다.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2)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변상 없이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3)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 진 빚은 유한한 인간이 갚을 수 없다. 4) 그래서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의 속죄적 죽음이 필요하다. 법정 용어로 설명된 대속 교리는 이렇게 탄생했지만, 이런 대속론은 예수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의미를 왜곡하기 쉽다. 본래 대속 혹은 속죄(atonement)는 화해 곧 ‘하나됨’(at-one-ment)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됨을 가져오는가?

     

    저자들은 먼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로마제국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이들은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저항자들이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오랜 시간 고통을 겪게 하는 십자가 처형을 통해 제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각인시킴으로써 제국에 도전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것(the nomalcy of this world)”(183)에 도전하는 것, 즉 소수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물, ‘지혜’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사회체제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일이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옛 정체성과 생활방식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정체성과 역동적 변화의 길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들은 예수는 우리가 치러야 할 죄 값의 대체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은 그 시대의 정신 곧 지배와 불의와 폭력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들은 이를 일러 ‘참여하는 종말론’(participatory eschatology)이라 한다.

     

    분배적 정의가 실현된 세상을 위하여

    이렇게 본다면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천당에 가는가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대로 죄 많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역동적 가르침이다. 저자들은 로마서가 "갈라진 세상을 치유하며, 폭력에 근거한 불의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세상을 종식시키며, 서로 화합하며 평화로운 세상(a unified and peaceful earth)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열정에 관심을 쏟고 있다"(215)면서 로마서에 주목한다. 로마서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이방인과 유대인, 유대인과 크리스천, 크리스천 유대인과 크리스천 이방인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 인데, 바울이 이들을 하나로 꿰는 실로 제시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보복적 정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분배적 정의'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이들 속에 성령을 이식함으로써 그들을 정의의 도구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를 경험한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을 분배적 정의가 실현된 곳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 여기에 있다.

    크리스천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이 세상의 정상적인 사회들 안에서의 생활방식과는 철저하게 다른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방식을 줄여서 부르는 말"(253)이다. 초대교회는 제국 신학이 당연시하고 있던 사회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돌봄과 나눔에 기초한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함으로써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는 물론 사랑이었고, 그 사랑의 사회적 표현은 분배적 정의와 비폭력, 빵과 평화였다.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첫 번째 바울은 침묵당했다. 문명의 정상성을 해체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의 역동성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전하기 위해 생을 걸었던 위대한 사도가 오늘의 교회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책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이미 빼어난 연구 성과를 학계에 내놓은 두 학자가 왜 공동 작업이라는 지난한 작업을 선택했는가이다. 짐작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학문적 명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침묵당한 성경의 메시지를 드러내야 한다는 절박한 소명의식에 응답한 것이 아닐까? 번역자인 김준우 박사도 이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성경의 여러 번역본들을 대조해 보여주고, 또 독자로 하여금 대속 교리의 역사와 논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충실한 역주를 달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드러난 첫 번째 바울의 급진적인 메시지는 과연 경청될 수 있을까? 체제 순응적으로 변해버린 교회,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교회는 이 책의 출간을 누구보다 경계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이 밝고 들을 귀가 있는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재확인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바울의 잘린 목에서 흘러나온 물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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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3.21 22:14 (*.204.40.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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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10.02.01 By한기연 Views13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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