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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2 15:06

포스트모던 신학과 그 의미 / 박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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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2012년 5월호

 

 

포스트모던 신학과 그 의미: 2012년에 1992년을 돌아보며

박일준(감신대)

본고는 21세기 신학의 빛에서 1991년의 포스트모던 신학을 재조명하면서, 신학자 홍정수의 메시지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그 재구성을 통해 20년이 지난 후 그의 신학이 여전히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흐름이 우리의 지적 공간에 도입된지도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포스트모던’이란 말의 의미는 언제나 모호하다. 문자 그대로 ‘근대 이후’라는 시공간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포스트’라는 말이 근대를 이탈한다는 말인지 극복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근대의 특정 부분을 비판적으로 승계한다는 말인지로 보느냐에 따라 ‘포스트-모던’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모던’이란 말도 결국 ‘근대’를 어떤 시대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탈-근대’냐 ‘근대-이후’냐 혹은 ‘후기-근대’냐로 다양하게 규정되기도 한다. 심지어 최근 라뚜어(Bruno Latour)는 『우리는 결코 근대적인 적이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마 이처럼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 그 자체가 우리가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이 비규정성은 다원성의 상황을 배태하고, 그 다원적인 상황은 각자가 터한 관점의 절대성을 해체할 것을 요청한다. 그로부터 동반되는 현상은 바로 더 이상 ‘진리’를 터할 기반 자체가 상실되어서, 그 어떤 것을 옳다 그르다 할 판단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극단적 상대주의의 상황이 유발된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바로 이것이 포스트모던에 대하여 넌지시 갖고 있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때 서구 정신이 추구하는 해법은 ‘다원주의’(pluralism)였고, 그 다원주의적 해법은 극단적 형태의 상대주의의 위험을 해소시키지 못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을 ‘포스트모던’이란 상표로 회자시키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찌 보면 당대의 유행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다수성’(the multiple 혹은 multiplicity) 혹은 ‘다중’(the multitude)과 같은 개념들이 ‘다원주의’라는 전대의 표현들을 대치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좌파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미 프롤레타리아나 민중 혹은 국민 개념을 ‘다중’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 바있고,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는 진리는 다수(the multiple)라고 선포한 바 있다. 다수성의 철학이 다원주의 정신과 다른 점은 상대주의라는 위협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있다. 사실 종교와 과학 분야에서 이미 중세부터 이어져온 실재론 대 유명론 논쟁에 대한 해법으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란 관점이 제시되어온 바 있지만, 실재(reality)가 존재하느냐의 물음과 달리, 우리 문화 현실 속에 다른 진리를 주장하는 다른 종교와 문화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에서 ‘비판적 실재론’은 설득력있는 대안적 관점이 되기보다는 지적 엘리트들이 수행하는 지식 검열의 권력성을 강화하는 담론으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바디우처럼 다수성의 철학을 주장하면서도, 진리는 존재한다는 확고부동한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전 시대 다원주의적 다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기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기표들의 차연적 운동들이 끊임없이 의미의 차이들을 양산해 내면서 운동한다고 본 반면, 바디우는 다수로 존재하는 진리를 하나의 종합사전적인 백과사전적 지식체계로 셈하여 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며, 오히려 진리는 언표될 수 없는 어떤 것 그래서 우리의 사유에 개념적으로 포착 혹은 포박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체계가 현실과 부합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곳에서 지식 체계의 구멍이 드러나며, 바로 이 구멍을 통해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진리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진리는 (기존 지식의 체계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우발적인 사건의 도래를 통해 우리에게 건너온다. 하지만 그 진리는 체제 밖에 있는 것이라서 우리의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건 이후 철학은 진리 절차들이 생산해내는 다수의 진리를 공정한다. 즉 철학은 진리 공정이지만, 진리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본래 ‘사건’이란 개념은 하이데거의 Ereignis나 화이트헤드의 event 개념을 통해 회자되기 시작했지만, 최근 하이데거 철학자로 시작해 데리다적 신학자로 변신하고 있는 카푸토나 데리다의 철학을 통해 바울 신학을 재해석해 내는 제닝스 같은 이들을 통해 의미있는 신학적 개념으로 변신 중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후기 데리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신학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러면서 사건 개념과 용서와 선물 개념들을 통해 근대의 로고스중심주의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의 의미

한국에 포스트모던 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도입하는 홍정수 박사의 책 『베짜는 하나님: 이단자를 위한 신학』은 영문 제목을 안쪽에 기입하고 있는데 God the Weaver: Christian Message for the Postmodern Korean이다. 책 자체가 국문으로 출판된 것이기 때문에 영문 제목이 전체 책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부제가 다르다는 점이 눈에 띈다. 국문은 “이단자를 위한 신학”이라 했고, 영문 부제는 “포스트모던 한국인을 위한 기독교적 메시지”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국문 제목과 영문 제목 사이의 평행이 눈에 들어온다. 즉 ‘이단자’라는 표현과 ‘포스트모던 한국인’이란 표현 간의 평행 말이다. 즉 그의 책은 이단자 말하자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였는데, 여기서 ‘이단자’란 과거에 교회에 나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발 더 나아가 여기서 홍정수가 쓰고 있는 이단자는 다른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데, 여전히 교회 내에 머무르고는 있지만, 교회가 주장하는 정통적인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함의한다. 왜 이단자를 위한 신학인가? 왜 포스트모던을 이단자들의 신학과 등가시하는가? 홍정수가 보기에, 예수도 “교회에 의해서 거부당한 이단자”였기 때문이다. 즉 이단자란 독단적이고 외설적인 사유를 전개하는 괴팍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을 끊임없이 넘어서서, 변화해가는 시대 속에서 새로운 창조성을 구현하려는 사람으로서, 홍정수는 ‘이단자’란 표현 속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들을 탈근대의 계기들과 연관하여 사유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홍정수가 생각하는 ‘포스트모던’이란 말의 의미를 더듬어보면, 그는 포스트모던을 정통적 기독교의 사유를 넘어서는 사유로 간주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서구에서 포스트-모던이 근대를 넘어서는 사유 즉 탈 근대의 사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될 때의 “탈”(post)의 의미를 기존의 정통적 사유를 넘어선다는 의미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A. Badiou)는 진리는 언제나 우리의 백과사전적 지식체계 바깥에 있으며, 그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지식체계 안에서 비존재로 간주되던 것이 우리에게 난입하는 사건을 통해서라고 말했다. 비존재로 간주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무)이지만, 비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스템의 셈법으로 셈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셈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체제의 관점으로 보자면 ‘무’와 동등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계산에 고려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비존재들이 어느 순간 시스템에 구멍을 뚫고 등장하면, 체제 내 정신들에게 그것은 ‘난동,’ ‘난입,’ 혹은 ‘침입’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돈된 시스템에 혼돈과 혼동을 초래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존 시스템의 수혜자들에게 이러한 비존재자들은 귀찮거나 위험하다. 자신들의 기득권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정수의 말처럼 ‘이단’으로 간주하여 축출하려 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근대 제국주의의 잘못이었다. 근대라는 시기는 우리에게 그러한 ‘이단화’가 얼마나 혹독하고 잔인한 결과를 유발할 수 있는지를 2차 세계대전의 아이슈비츠를 통해 증언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이단자의 자리를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홍정수의 신학은 21세기를 위한 진리론에 가깝게 느껴진다.

본래 홍정수는 자신의 신학을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상표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서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포스트모던적 사유 운동을 소개하고 있었고, 특별히 감리교 종교재판 과정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포스트모던 신학자’라는 명칭을 부여해 주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탈-근대를 의미하는 포스트모던은 그러나 근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홍정수의 시각에서 근대적 사유는 우리에게 “철저한 비판정신”을 물려주고 있는데, 바로 이 철저한 비판정신이 주어진 것의 절대성을 합리적 이성으로 성찰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는 그 안에 탈-근대의 계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정신을 철저히 적용할 경우, 우리는 역설적으로 탈-근대, 즉 근대를 넘어설 계기를 갖게 되는데, 이는 과학언어의 절대성과 종교적 절대성을 포함한 어떤 형태의 절대성도 거절하도록 만든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유일회적 절대성이 아니라 다원성을 열어주는데, 이 다원성에 대한 포용은 결국 근대의 원자론적이고 개체론적인 인간 이해를 넘어 관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포스트모던적 당위성을 설파하도록 한다.

그런데 홍정수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서구 신학을 수입하여 반복하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았고, 서구 신학의 탈근대 운동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여 토착화 신학 운동을 기존 정통 신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계기로 적용하고자 하였다. 홍정수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의 “열기와 영미권의 과정 사상(process thought)의 냉기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새 바람”이다. 그것을 한국적 상황 속에서 응용하자면 적어도 홍정수에게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진입한다는 것은 상극의 시대를 지나 상생의 시대가 요청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근대 제국과 식민지 시대를 지나, 계급적 투쟁의 시대를 지나 이제 “상생”(相生)의 논리가 요청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상생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말은 곧 절대주의와 이원론의 시기가 물러나고, 다원주의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로 홍정수는 해석한다. 정치 이데올로기적 절대주의와 종교적 절대주의와 문화사회적 절대주의가 물러난다는 말이다. 절대주의가 물러나고 난 자리를 채워가고 있는 다원주의의 시대에 요청되는 논리는 상극의 논리가 아니라 상생의 논리인데, 이는 한국적 사유를 통해 제 모습을 찾을 것임을 홍정수는 예감한다. 즉 상생의 시대에 다원주의에 대처하는 방식을 홍정수는 “기독교적,” “포스트모던적,” 그리고 “한국적”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서구의 다원주의는 패러다임의 다원성을 주장하면서, 다원성을 하나의 이상적 상태로 선언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원성에 대한 자신들의 관용적인 태도를 우월한 입장으로 상정하려는 제국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점에서 홍정수는 진정한 포스트모던적 기독교의 상생 논리는 한국적 논리로부터 배태될 것으로 믿고 주장한다. 이 한국적 방식을 홍정수는 “비판적 평화주의”라 이름하는데, 이는 인간이라는 문제의 심각성을 순진하게 이상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순진한 평화주의나 그 정 극단의 전쟁주의 그리고 이 세상의 악을 피해 저 세상으로 피난하는 이원론적 평화주의 모두를 거절하는 과격한 입장이다. 홍정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인간의 죄악의 심각성을 직시하며, 그래서 투쟁의 자리가 있음을 인정하나, 인간의 죄악을 원천적으로 극복하는 길―예수가 보여준 길―은 여전히 상호참회와 용서하는 평화적인 방식 밖에 없다고 믿는 평화주의를 일컫는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평화주의의 입장이 일차적인 관심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원주의적 입장 안에 내포된 극단적 상대주의의 위험을 간파하고 있었고, 그것을 한국적 상생의 논리로 극복하고자 하고 있었다는 점이 ‘포스트-모던’과 연관되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지금의 시대는 어쩌면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일지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융기하면서 제안되었던 입장과 관점들에 대한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홍정수의 상생의 논리는 탈식민주의 흐름과 맞물려 매우 앞서고 날선 통찰이었다.

● 탈 근대 신학으로부터 탈의 신학으로

홍정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은 사실 서구 신학의 운동을 한반도적 상황에서 수입해 재현하는 식민지 신학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탈-근대’의 ‘탈’(post-)을 무언가를 해체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탈(모습, 자기 규정)”을 새롭게 창출해 나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탈의 신학’을 위해 홍정수는 우리가 입고 있는 기존의 탈을 바꾸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기존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가 아니라, 기존이 담지하고 있는 미신적 요소를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홍정수는 포스트모던적 감수성을 지닌 모던 신학자 즉 근대 신학자였다. 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미신으로 치부하던 신화적 요소를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 의미있는 이야기로 재번역해 내는데 관심이 있다. 근대의 과제가 미신타파와 비신화화였다면, 포스트모던의 과제는 번역과 재신화화였다. 미신적 요소의 해체는 철저히 근대적 과제였다는 말이다. 아뭏튼 홍정수는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사유를 극복하고 벗어나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고, 그러한 시도 안에 ‘탈’(모습)의 두 번째 계기 즉 탈(脫)이 담겨있다고 보았다. 한국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당대 우리 문화에서 미신으로 작용하던 조상숭배를 거절함으로써 이러한 ‘탈’의 계기로 작용한 바 있다. 유교 문화의 조상숭배가 원래 미신이라고 몰아붙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기독교가 전래하는 시점에서 조상숭배는 미신적인 요소들을 담지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이들을 돌보고 배려하기 위한 조상숭배 예식이 오히려 살아있는 자들을 죽은 자들을 위해 희생시키는 미신으로 전락해가는 측면들이 없잖아 있었다. 이 논리를 연장하여 홍정수는 기독교의 부활신앙도 “탈”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부활은 ‘죽음’을 대속(redeem)하는 차원에서 해석해 오던 기존 정통 기독교의 해석은 부활 신앙의 본래 초점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대속이라는 전통 교리의 시각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강조되면서, 내세를 위한 기복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희석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홍정수의 관점에서 본래의 부활 신앙이 의미맥락을 갖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눈 감지 못하고 한을 풀지 못한 죽음(들)을 향한 메시지 때문이다. 정상적이고 평온한 삶의 과정 속에서 죽음은 무조건적인 회피의 대상만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삶의 각 과정들은 새생명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우리는 ‘죽었다’는 말을 ‘돌아간다’는 말로 전한다. 그가 본래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때로 어떤 죽음은 그것이 돌아가야 할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게 된다. 부활은 바로 그런 영혼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죽은 자의 부활은 그의 죽음이 죽음으로써 끝나고 잊혀지고 망각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미완결된 삶이 죽음으로 중단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기억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한 세력들에게 그의 부활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켰고, 이는 “한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실재를 확인 가능케 해주는 사건”인 것이다. 즉 부활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의 삶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다시금 살아남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이와 연관하여 홍정수는 민중이 부활의 주체라고 해석하는 민중신학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한 민중신학의 부활 이해는 신약성서의 본래적 강조점을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성서적으로 부활의 주체는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부활은 “계시의 사건”이자 “신앙의 사건”이다. 그렇게 눈 감지 못할, 미완결적인 죽음을 당해야 했던 예수가 부활하여 전한 메시지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용서의 메시지’였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며 삶을 완결치 못한 이가 부활하며 세운 하나님의 정의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고, 바로 이것이 한국적 신학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던지는 “상생”의 메시지이다.

● 사건의 신학

홍정수의 신학은 포스트모던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신학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데리다 이후 해체의 철학이 사건의 신학으로 진일보해가는 과정을 뚜렷하게 강조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정수의 신학 안에서 포스트모던 신학을 위한 ‘사건’의 계기가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탈’의 계기를 신앙의 “뿌리 경험” 사건에서 보았다. 말하자면, 신앙을 “탈”의 계기로부터 규정하는 홍정수의 시도의 핵심에는 신앙이란 결국 그를 탄생시킨 “외부로부터의 사건과의 만남”이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고, 이를 홍정수는 “뿌리경험”이라 본 것이다. 뿌리 경험이란, 홍정수에 따르면, “우리의 생활 전체와 생애 전체를 변혁시키는 놀라운 감격 사건”을 의미하며, 그 사건은 그 사건의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를 ‘지속적으로, 전폭적으로 변혁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의 삶의 의미와 희망의 뿌리(근원)을 형성한다. 따라서 신앙은 바로 뿌리 경험 사건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뿌리 경험 사건은 곧 그 체험자를 기존 세계관과 사유로부터 즉 기존 제도 종교가 부여해주는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이단적 사유자를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이제 그 사건의 체험자에게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를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그 뿌리경험은 구약에서 '출애굽'이고 신약에서는 "예수 경험"이다.

예수에게는 바로 이 사건의 경험이 있었다. 그 사건은 당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눈으로 보자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홍정수는 여기서 뿌리 경험 사건이 인간 예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증거로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을 다시 읽는다. 성서 증언에 따르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는 일”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건을 경험하는 당사자의 눈이 아닌 제삼자의 눈으로 보자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논리적 필연성’은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믿지 못한다. 하지만, “성서에 기적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는 성격의 사건’임을 전제로 함을 뜻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것이 제삼자에게 객관적으로 가능한 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기적을 과학적으로 혹은 사실적으로 입증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기존 기독교의 정통신앙은 이 기적이 객관적으로 입증가능하면, 하나님을 증명한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기적 이야기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집트 왕 바로는 모세의 기적들을 기적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이세벨 왕후는 엘리야가 행한 갈멜산의 기적을 전혀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뿌리 경험 사건에서 체험되는 기적이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논리와 합리성으로 입증가능한 사건과는 전혀 다른 류의 사건임을 간접적으로 증거한다. 오히려, 성서의 기적은 과학적으로 기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초일상적 사건”으로서, “흔하지 않는 사건,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란 점에서 아주 특수하지만,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그래서 이 세상(자연)의 법칙을 좇아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사건이다.”

예수의 기적이 갖는 고유성은 오히려 그 기적들이 하나님만이 가졌다는 능력, 즉 죄 사함과 용서를 선포하는 메시지 행위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점이 당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중차대한 도발로 간주되었다. 기적과 용서는 도대체 어떻게 상관관계를 맺고 있길래 예수의 기적들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행위의 일부가 되었는가? 바로 이 물음이 예수 사건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적 메시지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하나님 개념은 세상을 초월한 전지전능자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표상하지만, 이 전통적인 신 개념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을 함의한다. 여기서 도대체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의 능력대로 임의대로 행하신다는 뜻인가?를 홍정수는 묻는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럼 하나님은 악한 신이 될 수도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 개념은 ‘악한 신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정하시고 바꾸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보다 뛰어나시며,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준다는 것, 즉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임을 뜻하는 기독교인들의 어법"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분에 대한 당대 신앙인들의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사실적으로 전능성을 확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인의 하나님 경험은 때로 "하나님께서도 못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데, 만일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전능하게 이루셨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눈감지 못하는 죽음'(한 맺힌 죽음)을 죽는 숱한 사람들의 사건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쓰나미로 한 순간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행실에 대한 벌을 받아서 그렇다는 어느 목사의 메시지는 정녕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전적인 무지의 소산이다. 오히려 성서는 현대인의 하나님 체험을 하나님의 '후회'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이 하나님의 후회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전통 신학의 개념에 대한 홍정수의 탈근대적 해석 시도이다. 전지전능한 초월적 창조주의 개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왜 선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라는 종교철학적이고 신정론적인 물음에 올바른 답을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다. 성서의 후회하시는 하나님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적 무기력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진실, 그리고 이 크나큰 슬픔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 극복해야 할 공동의 과제”임을 증언한다. 다시 말하자면, “악은 실재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것 때문에 탄식하고 계시다.” 이 후회와 탄식의 한복판에서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예인하는 원초적인 뿌리 경험을 사건으로 겪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 뿌리 경험 사건을 통해 들려지고, 그를 통해 미완의 예수의 삶이 우리 가운데 부활하여, 우리의 죄 많고 부족한 삶을 하나님의 나라로 예인해 간다.

● 용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 나아가는 능력: 상생의 신학

홍정수는 예수의 사역을 하나의 운동으로 조망한다. 당시 사두개파 운동, 바리새파 운동, 에세네파 운동 그리고 열심당 운동과 구별되는 제5의 운동, 바로 그것이 예수의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 운동의 핵심을 “먼저 용서하라”는 데에서 찾는다. 이전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면, 예수의 운동은 그들과 다름없는 죄인들의 자리 한 복판으로 찾아가, 그들에게 용서를 베푸는 일이었다. 심지어 기적조차도 용서를 베푸는 행위의 일부로 이루어진다. 이 용서 사역을 홍정수는 “상생” 운동으로 보고자 한다. 상생의 신학이란 “투쟁 일변도의 사회 변혁 신학을 반성하면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자하는 의지의 한 구현”이라고 홍정수는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바로 그 용서의 행위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여겨져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사람에게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었다.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할 때,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성숙한 인격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죄’란 보다 넓은 범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질병도 ‘죄’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다.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왜 그런가?

철학자 카푸토(J.D. Caputo)는 ‘용서’란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베풀어주는 자비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의미를 바꾸는 보다 광의의 행위라고 말한다. 과거의 존재(being)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과거라는 사실 자체가 용서를 통해 의미 변화를 겪게 된다. 여기서 사실과 의미의 이분법은 더 이상 유통가능하지 않다. 사실과 의미가 분리되는 것은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작동할 때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관이 사전에 투영되지 않은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 시스템은 이미 그에 앞서 일정한 가치 시스템을 정치적 동기로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이미 정치적이다. 더 나아가, 라뚜어(Latour)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사실과 가치의 문제가 서로 혼융되어 등장하는 시대이다. 줄기세포는 단지 과학적 사실의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생명의 가치 문제를 그 자체로 담지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사건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특정의 사건을 경험하는 것은 개인의 삶과 지식 체계 속에 기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부터의 부름(calling)을 듣는다는 것이고, 그 부름이 이제 이후의 그 사람의 삶의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예인해 간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가치관과 다른 목적을 향해 말이다. 카푸토에 따르면, 용서는 본래 ‘give forth’라는 말로부터 유래한다. ‘미리 준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용서란 ‘선물의 사건’이다. 그가 나에게 구하지 않아도, 구하기 전에 미리 앞서 준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용서란 선물(gift)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물은 “불가능한 것의 경험”이라는데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선물을 내 것으로 삼는 순간 그 선물은 더 이상 타자에게 ‘미리 주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물’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 타자를 향해 앞서 베푸는 경제 구조 속에서 가능하지만, 우리의 모든 체제는 “교환의 논리,” 즉 주고-받음의 논리에 근거해 있다. 자본주의란 돈을 매개로 주고-받음의 상호적 이타주의가 철저하게 각자를 위한 최선의 이익이란 관점으로 재구성된 체제이다. 그런 체제 속에서 아무런 대가없이 베풀어주는 선물이란,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처럼, “은혜/선물의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 of grace/gift)이다.

● 21세기에 조명하는 ‘상생의 신학’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다양성과 관용의 시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절대-주의를 절대로 거절하는 시대는 곧 가치의 다원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원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가치의 상대성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과 다른 문화와 다른 가치관을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태도는 표면적으로 대단히 성숙한 태도 같지만,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결국 내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자기-중심주의와 모든 것을 결국 상대적 가치로 환원하는 태도 그래서 결국 궁극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은 없으니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관점대로 사태를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주의’의 문제이다. 홍정수는 『베짜는 하나님』에서 다원주의적 해법을 지향하면서도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으로 ‘상생’의 관점을 제시한다. 만물과의 상극적 투쟁의 관점을 넘어서서 이제 그 모든 상극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불이(不二)의 제3 논리”가 상생의 논리이다. 예수가 당대의 모든 상극적 태도를 거절하고 넘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신분이나 직업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사랑하였다. 그리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자신을 통해 발휘하려는 기도이거나 혹은 경건한 묵상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절규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도였다. 제자들은 이러한 기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사랑한다면 무언가 해야 할 것 아닌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는 율법 아닌가? 왜 한심하게 아무 것도 못하면서 기도하는 척 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때, 그냥 잤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을 향한 사랑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만이 기도하지 않은 채 하루를 지낼 수 있다.” ‘용서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그래서 불경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행동 방식과 예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정반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가 감히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 이 불가능한 것이, 즉 용서의 실현이 요청되어진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혹은 발판으로 살아가게끔 이 지구촌 무한경쟁체제는 우리 삶을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명증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은 나는 내가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다른 누군가에게 내 삶을 위해 가해를 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푸토는 용서를 단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베풀어주는 피해자의 자비로운 선처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보았다. 창세기 1장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증언하지 않는다. 성서에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 조차 없다. 오히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거기에는 흑암이 있었고, 물이 있었고, 바람이 있었다. 그 어두운 물과 대지 위로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하고 황폐한 대지 위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 왕조들이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가서 세월을 보내던 이들에게 세상은 처음부터 어둡고 황량하고 찬 바람이 무는 정 떨어지는 곳이다. 그 곳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선포하시듯, 우리는 ‘용서’를 선포한다. 그것은 누가 나에게 구하는 용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해자가 나에게 요청하지 않아도, 아니 그가 나에게 가해를 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 과거 위에 ‘용서의 빛’을 선포하고, 그리고 과거의 어둠 속에 묻혀있던 시간들은 이제 그 빛을 받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되어진다. 그렇게 용서는 내 시간, 즉 내가 과거의 기억을 통해 소유하고 있는 시간들을 전혀 다른 시간으로 창조해 나가는 사역이다. 그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박멸하고 새로운 시간을 새롭게 써 나가는 창조가 아니라, 그 부끄러움과 수치를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의 빛’으로 조명하여 새롭게 변혁해 나가는 창조이다.

● 현대 포스트모던 신학과 상생의 신학 간의 만남

홍정수의 사건 개념에서 가장 근대적인 유산은 바로 “철저한 비판정신”을 자신의 신학적 원리로 삼고 있는 대목이다. 이 비판 정신은 “설득력과 일관성”의 원리에 기반하는 냉철한 이성의 작동을 전제로 한다. 그에게서 ‘탈’의 원리를 가능케하는 것은 곧 미신적 요소들, 즉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들을 현대인의 합리적인 사유 구조에 맞게 새로운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비신화화 과정은 이성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의 소위 포스트모던 신학은 이성과 신앙의 적절한 균형을 바로 잡는데 중점이 놓여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에게 신학이란 “이성의 도움으로 이같이 신앙의 일관성과 연관성을 묻고 대답하는 작업”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홍정수의 신학은 여전히 근대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사건 개념을 축으로 정의의 도래를 추구하는 최근의 포스트모던 신학은 그와 같은 비판 정신이라는 내적 원리가 아니라, 사건 체험이라는 철저한 외적 원리의 침입을 통해 펼쳐져 나아간다. 이성의 합리성이란 사태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아의 내적 원리이다. 그런데 사건이란 그러한 판단의 근거 자체를 총체적으로 허물어 뜨리는 난입에 가깝다. 기존의 사유 체제를 붕괴시키고 혼란을 초래하는 사건 말이다. 우리 시대에 ‘포스트-모던’적 사유를 전개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비판정신’이나 ‘합리성’ 혹은 ‘일관성’과 같은 근대적 명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존 사유 체제로 품어낼 수 없었던 비합리성과 비일관성을 찾아내는데서야 가능하다. 우리의 합리적 사유라는 것은 무시간적인 판단기준이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계층 어느 인종 누군가의 관점에서 ‘합리적 잣대’를 적용하느냐에 따라 합리성은 매우 유동적인 개념이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이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미신 타파’의 기치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시대 오히려 그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우리의 지식 체계에서 추방되었던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사유를 다시 끄집어 내어, 그 전래의 사고 속에서 우리 시대의 일관성과 합리성을 탈주해 나가는 흐름을 포착하는데서 포스트-모던은 시작한다. 이점에서 홍정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은 한국 신학계에 ‘해체’의 물꼬를 도입했지만, 미처 신학적 토론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장되고 말았다. 종교재판을 통해 홍정수 교수는 출교당했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매개로 한 신학은 진일보하지 못했고, 토착화 신학과 한국적 신학은 종교권력의 검열이 위반으로 판단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만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감으로서, 더 이상 ‘탈의 신학’을 추구하지 못해왔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신학과 상생의 신학은 어디서 조우할 것인가? 그것은 지구촌 시장 자본주의의 체제가 전 세계를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영토나 민족이나 인종에 기반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지구촌 제국주의를 구축하고 있는 시대에 요청되고 있는 정의의 함성에서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활은 ‘하나님의 정의’의 메시지라고 홍정수는 말했다. 우리는 그 정의가 우리 삶의 현실 속에 실재하지 않음을 경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정의를 정의의 현존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정의한 현실을 바라보면, 정의를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정의는 실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시대의 기득권의 눈으로 보면 그저) 환상의 실재(reality of fantasy)로 여겨질런지도 모른다. 우리 눈에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부정의가 저지르는 참혹한 해악이기 때문이다. 그 정의가 부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땅이 사람이 하늘이 정의를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다. 그 정의의 함성 속에서 홍정수의 상생의 신학과 포스트모던적 사유는 접점을 찾는다.

● 과거의 for-give-ness: 1992년 종교재판으로 돌아가서

한국 감리교신학자들에게 1992년의 종교재판과 출교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겼다. 신학적 사유가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신학적 사유가 전혀 신학적 사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의 손에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20년이 흘러가는 지금, 그 재판의 당사자들은 이제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더러는 세습으로 교권을 이어가기도 했고, 더러는 은퇴했다.),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던과 같은 용어들은 신학적으로 거의 금기가 되어왔다.

어느덧 1992년의 대한민국과 2012년의 대한민국은 상당히 달라졌다. 이제 다인종, 다민족, 다종교 사회가 한반도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주민 1세대가 국회의원이 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늘어가는 이민자들 때문에 외국인 혐오증의 낌새가 느껴지기도 하는 시절이다. 이렇게 다양화되어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제는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정통-교리’(orthodoxy)를 대신하여 ‘다원적-교리’(polydoxy)가 신학적 주제어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제 인종과 민족과 종교가 다원화 되어가는 것은 실현되어야 할 어떤 현실이 아니라, 이미 기존하고 있는 사회 질서의 일부가 되어있다. 이렇게 달라진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진리의 담론들’을 재구성해 나갈 것인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특정 종교가 정권의 특혜를 받는다는 것이 이슈가 되고, 종교 특혜나 종교 탄압이 뉴스 주제어로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진정으로 대화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벗어나 상대방의 입장을 환대할 수 있는 태도와 철학이 요구된다. 그것을 데리다는 ‘환대’(hospitality)라 하였다. 그에 앞서 레비나스는 (불어로) 손님을 의미하는 hôte는 동시에 주인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나와 다른 타자를 손님으로 주인으로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없다면 주인도 없다. 그래서 주인의 존재는 전적으로 손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즉 타자가 없다면 자아도 동일성도 있을수 없다. 나의 정체성과 고유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타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타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타자로 존재하는 이들을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이제 ‘주인으로 섬길수 있어야 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그것은 고정된 사유의 구조를 탈주하여, 진리의 언표불가능한 측면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유목적 신학 사유를 요청한다.

철학자 지젝(Slavoj Žižek)은 기독교의 고유성은 인간이 신이 되는 영지주의적 계기가 아니라 신이 인간의 낮은 자리로 내려와 죽음을 당하는 계기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대타자는 없다”는 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몸짓이었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 어떤 절대의 토대도 절대로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포스트모던의 한 몸짓이었다면, 우리 시대는 신학이 못하는 해체의 과제를 철학이 이미 감당하고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을위한 해체인가? 이 물음은 언제나 해체의 철학자들에게 따라붙는 물음이다. 그 어떤 절대도 절대로 부패하니까? 만일 그런 예측에 근거해 절대의 해체를 주장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맹목적인 해체 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좌파 철학자 테리 이글턴은 예수는 “아나빔(anawim)이라 부르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하여 그들을 “대표”하는 존재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글턴의 지적은 기독교란 바로 그 낮고 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지 못해도, 가진 게 없어도,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파렴치한이라도,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의 계기는 바로 인간이 신이 되기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이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예수는 낮은 자들만을 위한 예수는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당대의 사람들이 파렴치하고 부정의하다고 손가락질하며 혐오하는 세리 마태도 있었다. 낮은 자들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함께 연대하며 상생을 도모하는 공동체, 그것이 기독교다. 그것이 근대의 서구중심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적 태도를 ‘탈’한 진정한 포스트모던적 기독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1992년을 이제 ‘용서’(for-give)해야 되는 때가 아닐까? 그들은 아무런 후회나 죄책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의 트라우마를 넘어서기 위해, 그 과거에 인간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의 정신으로 예수가 살았던 삶을 다시금 부활시키기 위해 우리 시대의 정의의 빛으로 1992년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린도전서 1장27절은 ‘하나님은 없는 자들(ta me onta)를 선택하셔서, 있는 자들(ta onta)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다’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없는 자들이란 무(無)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노숙자, 이주민, 성매매 여성들 등.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셔서, 이 땅에서 있는 자들로 살아가는 이들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만드신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의 이 표현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이 추구하는 절대와 기득권의 해체의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기독교는 진정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의 울타리를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능력을 내려놓고 인간이 되셔서 인간처럼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야 했던 성육신의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대가 되었다. 바로 여기서 2012년은 그 포스트모던 신학이 20년 전에 던져준 메시지를 다시금 부활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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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역사적 예수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7 한기연 2010.10.28 129525
공지 기독교윤리 2015년까지 모든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라! 14 file 한기연 2010.10.02 166084
공지 조직신학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2 한기연 2010.04.12 155698
공지 조직신학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1 한기연 2010.03.29 145174
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한기연 2010.03.27 150585
공지 역사적 예수 김기석의 종횡서해 <첫번째 바울의 복음> 한기연 2010.03.18 7049
공지 역사적 예수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5 한기연 2010.02.24 153885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홍정수 13 file 한기연 2010.02.19 168320
공지 기독교윤리 두달만에 - 북극 지역 빙하의 크기 변화 2009/9 22 한기연 2009.09.19 182629
공지 가정사회소식 소득 5분위 배율 비교 25 file 한기연 2009.09.13 18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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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북극해의 해빙 속도와 기후변화, 한반도 가뭄과 사막화 위기 19 file 한기연 2008.05.14 20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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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실천신학 목사 개(dog)론 / 축도유감 /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 / 한성수 3 한기연 2004.08.30 146822
공지 실천신학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성만찬/ 혼인주례자 상담체크 리스트 1 file 한기연 2003.09.30 29646
969 조직신학 믿음만으로는 모자란다 / 정진홍 교수 한기연 2013.03.29 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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