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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계시냐고요

                                             홍정수(전 감신대교수, 현  LA 한아름교회 담임목사)

 

1. “하나님이 계셔요?” 하고 묻는 사람들


철학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를 진지하게 묻는 이들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대개 이래도 저래도 좋은 한가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를 진지하게 묻는 이들은 무신론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린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를 진지하게 묻는 이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 오던 이들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무겁고, 그 대답 또한 간단하지가 않다. 필자는 L.A.에서 지난 2 년 반 동안 목회를 한답시고 이런저런 여러 사람들을 직접, 간접으로 만나다 보니, “하나님, 계셔요?”하는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절실하게 하는 훌륭한 신앙인들을 꽤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신학적 그림 하나를 꾸며 보려 한다.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

“목사님, 하나님이 정말 계셔요?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목사인 나로서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우선 우리 형제자매들이 지금까지 열심히 교회 생활을 잘해 오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연유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1


“목사님, 저에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다른 하나는 중학교에 다닙니다. 우리는 미국으로 이민 온 지 16 년이 되었지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이제는 L.A.의 사우스 센트랄 지역에 가지고 있는 리쿼 가게 덕분으로 집도 장만하고, 조금은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말이면 가끔씩 팜스프링이나 산페드로 해변에서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여유를 갖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지난여름 밤 권총 강도가 우리 집 아빠를 저 세상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강도를 기쁘게 할 만한 현금이 가게 안에 없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습니다. 밤늦도록 가게 안에 현금을 두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매일 오후 6시에는 현금을 별도로 맡기어 왔거든요.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막일이나 청소로 연명하다가 겨우 살만해졌는데, 우리들은 갑자기 남편과 아빠를 잃었습니다. 이별의 정을 나눌 여유도 없이 그 사람은 가버렸습니다. 남은 세 식구는 갑자기 하늘이 꺼지고 땅이 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일도 더 이상 즐겁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부 싸움을 하였다고 교회에 못나오기도 한다지만, 우리는 그게 마냥 부러울 뿐입니다. 부부 싸움도 행복한 이들의 일이라고요. 물론 아빠, 엄마,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웃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함께 억누르기 힘든 은근한 질투심에 빠지게도 됩니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하였기에, 우리 아빠가 뭘 그리 남들보다 더 큰 죄를 지었기에.... 남들은 모두 저렇게 웃으며 잘들 사는데, 우리들은 왜? 왜 하루아침에 우리 집안에서는 웃음이 사라져야 했나요?

하나님이 계시다고요? 우리도 옛날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아빠 장례식 때 교회에서 너무나 잘들 해 주셨기 때문에 교회에 여전히 나오고는 있지만, 주말이 되면 우리들은 우울해진답니다. 게다가 우리 가족은 지난 여름 이후로 말을 잃었습니다. 아무도 집안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절반쯤은 유령의 집 같은 형편입니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다니는 큰 딸 아이는 일체의 친구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 때문에 힘든 체도 하지 못하고 꿋꿋하게 일어서려 하지만, 저도 사람이에요. 너무나 힘들어요. 물론 이렇게 아직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지요. 과부가 되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루 아침에 크게 달라지더군요(물론 제 느낌입니다만). 정말이지 아이들이 아니면, 저도 그 이가 간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요? 옛날엔 우리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정말 계시나요?”


                                2


또 다른 한 형제가 뜨거워진 눈시울을 감추며 나직이 말을 늘어놓는다.


“그 여자는 너무나 불쌍해요. 저는 하나님 안 믿습니다. 본래도 잘 안 믿었지만, 이제는 정말 믿을 수 없어요. 제 처는 미국 오기를 정말로 싫어했지요. 한국에서는 작은 옷가게를 하며 그런대로 기쁘게 살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 저를 만난 게 병이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저는 신혼 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유학’ 운운하였고, 결국 처는 사랑하는 남자가 한을 품고 일생을 살게 할 수는 없다면서 이민 보따리를 쌌던 거지요. 그런데 작년 이른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물건을 사오던 길에 5번 프리웨이에서 빗길에 미끄러지는 트럭과 충돌하여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끝내 가버리고 말았답니다.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습니다. 욕심이었어요. 저는 미국 온 지 4 년 만에, 공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업을 한답시고 이 일 저 일 손대다가 지금은 자바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지요. 이미 대학생이 된 아들 하나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딸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내년쯤에는 돈을 좀 덜 벌더라도 주말에 편히 쉴 수 있는 장사를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만....

하나님이 계시다고요? 데려가려면 저를 데려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본래 교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처는 정말 예수 잘 믿었지요. 목사님들한테도 끔찍이 했고요. 저는 그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왜 미국을 왔던가? 혹은 왜 진작 사업을 바꾸지 못하였던가? 그 날 물건 운반은 내가 하는 건데.... 수없는 후회로 밤을 새우게 됩니다. 아들은 동부에 가 혼자 공부하고 있지만, 딸아이도 어미가 죽은 이후로는 아무 말이 없어요. 우리는 나무나 무서워 그 아픔에 대하여는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모두가 시치미 떼고 살고 있지요. 그저 그 사람이 그립고, 그 사람이 열심히 하던 일이라 교회에 계속 다니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겠어요, 목사님,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렇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착한 그 여자를, 그것도 호강 한 번 못해 본 그런 시절에 데려간답니까? 말이 안 돼요.”


                                3


뒤늦게 한 남자 분이 들어왔다. 병실에서 아내를 돌아보다가 왔다고 한다. 그는 겨우 말을 이어간다.


“저는 모르겠어요.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산다는 게 뭐고, 우리가 왜 이민을 왔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는 한 참을 쉬었다가 다시 억지로 말을 잇는다.


“작년 성탄절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아들을 잃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나갔다가 차 사고를 당한 거지요. 공부를 잘한다고 귀여워하며 차를 일찍 사 준 게 못내 후회스럽습니다. 그런데 97년 새해맞이 예배를 드리고 오다가 아내와 둘째 아들이 또 다시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아내는 아직 병실에 누워 있지만, 둘째 녀석은 자기 형 곁으로 갔지요. 이번에는 우리 식구들의 실수가 아니라 상대방 차의 운전사가 송구영신 파티를 하면서 마신 술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였습니다.

사고 당시 아들은 일 년 전에 먼저 간 형의 사진을 품속에 안고 있었습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 믿어지지 않아요. 무엇보다 속 쓰린 것은 교회의 잡무를 뒤로 미뤄 두고 제가 식구들과 함께 운전을 하고 오기만 하였어도 이런 날벼락은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냥 저의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아 우리 식구들은 큰아들이 쓰던 방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채 그대로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작은 아이의 방을 함께 정리해야 되는군요. 저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더 이상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죄가 많이 있지요. 죄 많은 사람을 데려가시려면 저를 데려가시지 왜 우리 아이들입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저는 ‘하나님, 어서 저도 데려가 주세요!’ 하고 많이 기도드렸습니다.”


                                4.

 

목사인 나는 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서 그 고통의 무서움을 그저 짐작만 하고 있다. 말을 못하고 있다. 그런 차에 담담한 말로 한 노인이 말을 꺼낸다. 그분은 칠순이 넘었지만 아직 정정한 청년 같은 분이시다.


“목사님, 저는요, 30 년 전에 제 아내와 큰아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제가 서산에 살 때였지요. 그 때도 먹고살기가 어려워, 어디 막노동이라도 하여 돈을 좀 벌어 볼까 하고 다른 지역으로 잠시 가 있을 때였지요. 우리 동네에 물난리가 난 게지요.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빗물이 쏟아져 마을에 있던 작은 개울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와 아이는 비탈 밭에 물길을 틀러 나갔다가 그만 다리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함께 익사하고 말았답니다.

처음에는 하늘을 많이 원망해 봤지요. 우리는 한국 개신교 초기부터 예수를 믿어 오던 집안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 죽일 놈은 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나님 문제도 천재지변도 사실상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속을 잘 할 수가 있었거든요. 제가 집에만 있었어도 그까짓 물난리쯤은 어떻게든 이겨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30 년이 지난 지금도 저를 용서할 수가 없군요.

지금도 소주 힘을 빌어서야 잠을 청할 수 있는 밤이 많답니다. 아마 죽어야 저를 용납할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 제 처와 아들을 한꺼번에 데려갔다고요? 저를 교육시키려고?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게 제 아내와 아이를 데려가셨다면, 저는 그런 하나님은 ‘사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는 않아요. 단지 제가 고통스러운 것은 사내 녀석이 가족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하는 자괴감이지요. 이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건 아니랍니다.”


                                5

 

옛 말이 생각난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 30 년의 세월이 갔어도 낡아 없어지지 않는 무겁고 무서운 게 아내와 자식을 한 날 한 시에 잃은 한 남자의 자괴감이란 말인가? 죽어야 없어진다는 말인가? 과연?

그런데 이 모든 아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아무 말을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닫고 있던 한 중년 남자가 마지막으로, 마지못해, 말을 시작한다.


“벌써 4 년이 지났군요. 작년에서야 겨우 현실을 인정하고, 아이의 짐들을 정리하였지요. 사실은 제가 한 게 아니고 평소에 나약해 보이던 제 아내가 다 했지요. 저는 아이의 짐을 정리하는 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23 년 전에 미국 땅에서 결혼하여, 둘이서 그냥 열심히 돈을 벌었지요. 집도 샀고, 가게도 커졌고, 작은 빌딩도 하나 마련하였지요. 그러는 동안에 큰 아이인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애는 서투르지만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사내 녀석은 중학교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더니 그게 점점 더 심해져 마침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되더군요. 그러나 저희는 그게 얼마나 그 녀석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한 번쯤 그런 홍역을 앓아야 하거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녀석은 그만 권총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말을 공개 석상에서는 처음으로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그 후에는 세상이 온통 변해 버렸습니다. 시집을 가야 할 딸이 있지만,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죽은 아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동안은 그와 함께 가던 햄버거 집이 있는 웨스턴과 7가 거리를 지나다니는 것조차 힘들어, 그 모퉁이를 피해 다녔습니다.

제 아내는 이런 사실을 모르겠지요. 저희 부부는 그 후 우리를 두고 먼저 가버린 녀석에 대하여 마주 앉아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지요. 어떻게 그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을 원망한다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귀여운 아들을 주셨는데, 부모인 저희가 잘못 키워, 아이가 참다못해 죽어 버렸는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30 년이 지났어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어르신네 심정을 저는 알지요. 죽을 놈이 있다면 저이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저 같은 죽일 놈이 아직껏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제가 그 녀석을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그러나 그 녀석 스포일시킬까봐 늘 겉으론 안 그런 척하며, 아비의 권위를 부린 적도 많았지요. 정말이지, 저는 아직도 그 녀석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것은, 죽은 그 녀석이 제 아빠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업이 되겠어요? 남들은 캘리포니아의 불황 때문에 저 사람 사업이 최근 들어 망했구나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식을 먼저 보낸 녀석이 사업이나 잘하면, 그건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던 거지요. 돈이 뭡니까? 자식이 세상 살기가 힘들다 하여 세상을 하직하는 마당에, 사업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 아내도 너무 힘들었나 봅니다. 한 동안은 한국으로 나가서 혼자 살다가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가정을 버리고 간 아내를 참을 수 없었겠지만, 자식을 앞세우고 난 다음이라, 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자식을 앞세우는 일도 참아야 할 놈이라면, 아내가 집을 뛰쳐나가는 일이야 얼마나 작은 일이랴! 견디자. 견디자. 아내를 더욱 사랑하자. 하늘이 맺어 준 운명이 아닌가?’ 물론 지금 저희는 사이가 좋아졌지요. 그러나 아직도 저희는 깊은 속을 털어놓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답니다. 혹 조용히 가라앉고 있는 자책감에 불을 지르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공연히 서로 엉뚱한 말다툼만 자주 하게 되지요. 물론 교회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지만, 그건 하나님 운운하는 얘기를 들으러 가는 건 아니에요. 억지로라도 사람의 체면을 지켜야 되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예전과 같이 보이려고, 교회에 다니는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죽을 놈이지요.... 정말 사랑했는데....”


2. 무능하고 나약한 목사의 기도


오, 하나님, 이런 이들에게 목사는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리고 전능하신 줄 알았던 당신은 또 무슨 소용이 있나요? 목사는 이런 이들에게 이제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버리고, 강단에서 내려와야 하나요? 아니면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라고 말해야 하나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희생당한 넋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하나님, 가르쳐 주세요.

하나님께서 저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신다면, 저들 가족들끼리 서로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혹은 이민 생활이 너무 고달픈 나머지, 혹은 잘 되는 사업이 전부인 줄 안 나머지 거룩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엄성을 망각할까 봐, 혹은 그렇게 되고 말 것을 미리 아시고 “질투의 하나님”께서 마침내 자비로운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사랑하는 신앙의 자녀들을 징책한 것이라고 말할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 가지고 왜 하나님까지 들먹이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먼저 그 좋은 하늘 나라로 데려 가셨으며,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이제 더 큰 복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너희는 왜 믿음이 없는가?” 이렇게 말할까요? 혹은 이들에게 일어난 모든 재앙은 “가면을 쓰고 찾아온 위장된 (사실은) 축복”인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이 되는데, 단지 인간이 눈 어두워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을 알지 못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나님, 이제라도 희생당한 이들의 넋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또 살아남은 이들에게 당신의 얼굴을 비추소서. 그리하여 저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내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게 잘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특히 “내 탓이야, 내가 죽일 놈이었지”라고 느끼면서 아직도 통곡하는 살아남아 있는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주소서. 살아남은 이들로 하여금 앞서간 이들도 하나님의 품안에 평안히 살아 있음을 믿게 하시고, 자신들을 용서할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3. 어느 하나님의 뜻?


위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의 가슴 깊은 상처를 보았다. 어떤 이들은 30 년의 긴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도 그 일로 인하여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이들에게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신 거지요. 이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을 주실 겁니다”하고 신명기 28장에 등장하는 전능하신 하나님(혹은 “자식을 바치라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물론 그 전능하신 하나님 얘기는 첫째로, 성경적이며(성경에 있다는 의미에서), 둘째로 목회적 배려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이들은 (대개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보다는 살아남으려는 본능적 의지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잊어버리려 하기 때문에, “미래 지향적인 축복” 이야기는 당사자들에게 참회와 새 희망의 계기를 줄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성경을 믿지만, 예수를 더욱 믿기 때문이다. 즉 예수가 걸어갔던 삶과 그의 설교에 비추어 성경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성경 속의 예수님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찾아가서, 욥의 친구들처럼, 권선징악의 상투적 논리와 세상만사를 경영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전통적 하나님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는 일도 아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예수의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웃들이 할 일은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하고 묻는 게 아니라 “고통을 치료해 주는 방책”을 강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참조 눅13:4 이하; 요9:2 이하).

그뿐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히브리 성경(구약성서)도, 비록 하나님께서 전능하시어 능히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는 하지만, 세상만사를 하나님 뜻대로 일방적으로 통치하시지는 못하며, 그래서 가끔씩은 후회도 하시며, 탄식도 하시며, 그 뜻을 수정하시기도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창세기, 민수기 참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밖에 안 되는지, 즉 왜 완전하신 신께서 세상을 불완전한 채 내버려두시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신학교 신학은 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그 이상의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 따라서 재난을 당하고 통곡하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가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위장된) 축복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도 예수적인 것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둘째, 그것은 목회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본능적인 혹은 이기적인 사람들일 경우, “이것은 더 큰 축복의 기회입니다”라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자”를 아직도 사랑하는 경우, 그런 위로는 차라리 저주일 수 있을 뿐이다. 사업이 망한 경우나 직장이나 사회적 지위를 잃은 경우라면, 그것은 “더 큰 축복”의 기회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까짓 재물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까짓 지위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사람의 생명,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의 생명을 두고, “다음에 더 좋은 기회”를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로 잔인한 행위이다. 불교 신자가 혹 이 글을 읽으면서 “생사여일(生死如一)하거늘 죽음과 삶에 왜 그리 집착들 하시오”라고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생명을 비웃으라는 게 부처님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집착하지 말고 “잘 살라”는 말씀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4. 목회자의 고통스런 사명


그렇다면, 아무 특별한 능력도 없는 목회자가 이들에게 해 줄 일/말은 무엇인가? 무슨 말로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말 전부는, 우선,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도 또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이다.

먼저, 자연 재해에 의한 죽음이든 인위적인 사고로 인한 죽음이든 타살인 경우라면, 목회자가 해 줄 말은 하나님이나 그 사람들(가해자들)을 너무 많이 미워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이나 사람들(가해자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인간이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연유로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 먼 훗날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고” 만나 뵙게 될 때 물어 보기로 하고, 우리에게서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자연이나 사람들을 많이 원망하지는 말자. 특히 가해자가 사람들인 경우, 그리고 비록 그들이 권총을 들고 고의로 사람을 해친 경우라고 할지라도, 참으로 그들이 원하였던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 자체가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필요한 몇 푼의 돈이었을 뿐이다.

아무도 악을 계획적으로 의도하지는 못한다. 불완전한 피조물들의 행동에는 많은 경우, 아주 많은 경우 본래 일차적으로 목적하였던 것과는 상관없이 “부작용”이 발생한다. 즉 그들이 우리 남편이나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것은 그들이 저지른 행동에서 일어난 “부작용”이었다는 말이다.

이같은 이치는, 둘째로, “자살”인 경우에 더욱 주목해야 할 요소이다. 내 아들의 자살, 그것은 그가 원하였던 일차적 행위가 아니라 이차적인 부작용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내 아들이 원하였던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의 신속하고 확실한 해방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가 원하지도 않은, 때 이른 죽음이 온 것일 뿐이다. 그러니 부모를 두고 먼저 간 아들을 너무 많이 원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가 참으로 원했던 것은 남모르는 깊은 고통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의학에 의하면, 자살이란 당뇨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병이라고 한다. 작은 외부의 압력에 대하여도 남달리 크게 반응하며, 그 긴장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신적/물리적 질환의 결과라고 한다. 병을 앓다가 결국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일찍 떠나게 되는 많은 경우처럼 자살은 일종의 정신/신체적 질환이라고 한다. 그것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 부족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막을 수 없었던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잘 지켜 주지 못한 부모가 자신들의 못 다한 사랑 때문에 한의 열병을 죽도록 앓는 일만은 중지할 수 있으리라.

셋째,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자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못 다한 사랑, 이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으로 믿자. 그리고 훗날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켜 주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할 마음의 준비를 하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자. 즉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 주지 못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 하나님을 믿고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이에 대하여는 이런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 비록 힘이 없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끝까지 지켜 주시지 못하였지만, 우리가 그 하나님을 버리게 되면, 달라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제 와서 하나님을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삶에는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네 인생에서 무엇이 과연 소중할 게 있겠는가?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 인생에 아직도 사명이 있고, 일이 있으며, 수고하고 짐을 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만일 우리가 이제 와서 하나님을 버린다면, 그것이 하나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닐까? 하나님 없이 어떻게 우리네 무거운 인생을 영원한 안식에 이를 때까지 꿋꿋이 이끌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의 세계가 크게 무너졌는데,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마저 버린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실패가 아니겠는가? 누군가가, “나는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 낼 수 있을 만큼 인생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그렇다면, 형제여, 하나님을 버리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너무 늦지 않은 훗날에라도, 필요하다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계의 신학>에 실렸던 글인데 <사별의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1998)에 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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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2.10.12 09:30
     

    담임선생님 예수



    홍 정 수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쓰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쓰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방식은, 질문이 던져진 상황, 질문자의 욕구에 따라 그 대답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적이냐 동지냐를 묻는 질문일 수도 있고, 촌수를 따지는 질문일 수도 있고, 국적, 동창 등 집단 소속을 따져보자는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런 질문들은 어쩌면 대답하기가 그리 어려운 질문들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대답하면 그만이요, 그 대답들은 일정 기간 동안 늘 정답의 자리를 지킬 수가 있을 게다. 그러나 만일,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사람의 속알맹이, 정체성을 묻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사뭇 달라진다. 어쩜 정답이 없는 질문일지로 모른다. 특히 나 자신에 묻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곧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생의 가을을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이제껏 의지하고 살아온 그 이유를 마침내 잘 모르겠다는 서글픈 지점을 통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방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자주 생각해 본다: 출신? 업적? 수입 정도? 인종과 국적? 속한 단체(회원권), 즐기고 있는 놀이(골프 회원권)?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은 그 사람(나, 그리고 당신)의 속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연과 역사적 상황의 작용이, 그런 변수들에 대하여는, 아주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사람의 정체성은, 믿음, 희망,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혹은 희비(喜悲, 희로애락)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혹은 꿈/비전에서 드러난다고.

    그리고 나의 경우, “나의 예수”를 말하는 게 곧 그 대답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가? 그것을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에 대하여 말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2. 나는 종교적 배경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종교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 한편, 무당 문화에 대하여는 친숙하지만, 그것은 일상 외적 현상이었다. 오늘날의 연예 프로그램 같은 것이었다.

    종교가 만일, 신(하나님이든 한울님이든)과 관계되는 일, 성직자와 관계되는 일, 고정된 일정 가르침, 전통적인 집단 행위 등에 관계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종교에 흥미를 둔 적이 없다. 옛날, 어린 시절에도 그러하였고, 환갑이 넘은 지금, 목회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도 그러하다. 교회에 참여하고, 신도들을 돌보는 일은 나에게 종교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범주 하나를 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학교 놀이이다.

    인간의 유한성, 인간의 부단한 초월 갈망1)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특정 대상을 믿고, 의지하고, 받드는 행위는 인간 자존심에 대한 공격이라는 어린 시절의 생각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예배하는 신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누군가 나에게 성실히 들려준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인간 완성에 결정적 도움을 준다면, 물론 그런 신을 예배하는 일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테다.

    예를 들면, 무당(무속) 문화에 나는 익숙해 있다. 바닷가2)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 어린 시절에는 연예 활동이 전무한 탓으로, 교회의 부흥회와 떠돌이 약장수의 놀이마당을 제외하면 굿은 흥미진진한 마을잔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굿을 벌이고, 구경하는 것은, 나중에 접하게 된 기독교 문화와는 근본에 있어 다르다. 내가 개인적으로 직접 발을 들여 놓고 참여함이 기독교와 나의 관계 설정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나, 굿은 그냥 “구경”만 하면 되었다. 즉 내가 실존적인 관계를 설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굿에 대하여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자라났다. 친척 중에도 무당이 있었지만, 무속인들은 나를 자기네들의 집단행동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전도)을 하지 않았다. 결코. “구경”이 끝나면, 우리는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굿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곧 잃어버린 일상 속의 제 자리, 그 제 자리로의 복귀, 그것이 굿의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무당에게는 돈벌이가 목표이겠지만). 이 점에도 오늘날의 연예계 활동과 본질에 있어 닮았다. 그들의 일은 나의 일상 외곽 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나의 일상에 도움을 준다. 잘 굴러가도록. 그러나 기독교는 어떠한가? 예수를 만남은 어떠한가? 적어도 나의 경우, 그것은 일상 중앙의 일이었다. 이 점에서, 굿이나 연예물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리고 이 점이 나의 일생을 사로잡았다. 내 삶 속에도 일거리가 비로소 생긴 셈이다.


    3. 나의 어린 시절에는, 경제적 힘, 정치적 힘을 겪어보지 못하였다. 단지 담임선생님이 최고의 실력자였고, 나에게 예수는 담임선생님이셨다.

    중3, 졸업반, 이른 봄날, 수요일 저녁, “놀러가자!” 하는 친구들 서너 명의 말을 듣고 따라 나선 것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넌 셈이 되었다. 강원도, 탄광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탄광촌이라는 말은, 죄송하지만, 인정을 주고받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을 뜻한다. 깜깜한 땅 밑에 들어가 가족을 위해 채광을 하는 광부들, 그들에게는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들, 그리고 생계 걱정, 그것이 전부였다. 돈이 조금만 모이면, 훌쩍,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어디론가로 떠나게 된다. 따라서 낯선 사람에 대한 감정, 그것도 긍정적 감정이라는 건 있을 필요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내가 친구들에게 끌려, “놀러간” 곳은 바로 철암장로교회였다. 문간에서부터 나를 웃음으로 맞이해주는 한 학생의 친절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학생은 나와 같은 성 씨(우리는 “종씨”라고 불렀다)였는데, 그 한 사람의 미소가 나의 생애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함정(혹은 구명정)일 줄은 당시엔 정말 몰랐다. 그날 교회라는 곳으로 “놀러나갔던” 친구들은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교회라는 곳이 사춘기 남학생들에게 “놀 만한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달랐다. 크게 달랐다. 원초적인 호기심이 발동하게 되었다. 이 색다른 한 사람의 친절, 미소, 그 배후에 도대체 뭐가 있을까? 무곡 찬송가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어느 날(찬송가책이란 게 본래, 다, 그런 줄 알았다), 성경책이라는 걸 사람들이 들고 다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교과서 외에는 돈을 주고 책을 사 본 경험이 나에겐 없었다. 살 필요도 없었고, 살 돈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성경책이라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책에 무슨 비밀스런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탄광촌 한가운데서도 색다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아직은 나쁜 기독교인들도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터였다). 수소문 하여 책방을 찾아냈다. 신약성서라는 책, 누런 종이 표지의 얇은 책, 20원이었다. 나에게는 10원밖에 없었다. 책방 주인에게 외상으로 책을 구입하였다. 얼마나 감격하였던지.

    그러나 집에서 와,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아뿔사 ...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낳고 ... 낳고 ... 낳고 .... 근데, 그 이름들이 도대체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왜 그때 누군가가 신약성경은 여러 권이 한데 묶여 있는 책이며, 둘째 권부터 읽어도 된다고 말을 해 주지 않았던고! 그러나 그 덕분에 일찍부터 성경은 거짓말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4대, 14대, 14대 ... 족보를 세어보았다. 순전히 읽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은 지금, 몰몬 경이나 코란을 읽을 때 똑같이 경험한다). 그리고는 알아냈다. 14대가 아닌 대목도 버젓이 들어 있다는 걸, 혼자서 알아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학생은 여전히 말 걸어 주고, 환대해 주는 유일한 학생이었으며, 나는 그 배후를 알고 싶었으니까.

    이렇게 하여 나는 예수를 믿는 매력적인 사람3)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 인연은 호기심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그 후 내가 거기에 계속하여 묶여 있게 된 건 “풀어야 할 숙제”를 그 안에서 발견한 덕이다. 한 사람을 저렇게 매력적으로 만든 힘, 그 힘의 비밀을 내가 알아내면, 천 사람, 만 사람도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들로 변화되게 하는 데 보탬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설레임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중학생 시절에 내가 만난 인생 숙제 1번이었다. 한 사람의 매력, 그 뒤에 숨어 있는 힘은 무엇인가?


    4. 고교시절, 오순절계통의 체험을 충분히 하였지만, 그것은 나에게 호기심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였다. 그 체험에 실생활에 주는 차이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숙제 2번은 고등학교 시절에 만났다. “예수님이 신이라는 걸 믿으셔요?” 세례문답 시간, 담임 목사님의 질문이었다.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는 질문, 잠시 망설이다 ... 눈치로 대답하였다. “예, 믿습니다.” 나는 교회라는 곳에서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걸 눈치로 때려 맞추려는 참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곧 이어, 목사님은 질문을 또 던졌다.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걸 믿으셔요?” 어~~엉! 나는 아연실색, 앞이 깜깜해졌다. 아, 교회라는 곳은 뭔가 세상과는 다른 어법을 사용하고 있구나! 참새면 참새, 할미꽃이면 할미꽃, 어찌 할미꽃이면서도 동시에 참새인 물건이 존재한단 말인가? 왜 교회는 그런 걸 믿으라 강요하는가? 나는 그냥 있었다.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목사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도 믿어야 합니다.” “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 도대체 그 매력적이던 인간성의 배후 세력이던 기독교, 이제는 간 곳 없고, 왜 기독교는 “말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가? 그 사연이 알고 싶어졌다. 그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교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들리는 많은 이야기를 가르쳤다. 예컨대, 곰의 후손인 나의 운명이 이스라엘 사람 아담 탓으로 오래 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둥 ... 사람은 나면서 죄인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둥 ...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둥 ....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둥 ... 참으로 기막힌 소리만 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기독교라는 것에서 느낀 매우 심각한 부정적인 경험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이런 이상한 말들에 대하여 불편하지 않을까? 내가 그 이유를 알아보리라. 닥치는 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뭔가를 알고 있을 법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내가 미친 듯이 부흥회를 쫓아다닌 것도 이 숙제를 풀기 위함이었다. 내노라는 부흥사들, 전국을 휩쓸고 있던 “유명한 사람들”을 시골, 동해에서도 고스란히 만나보았다. 그런데 그 부흥사들은 하나같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체험”을 강조하고 있었다. 당시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나에게는 어쩜 “종교적” 체험을 실제로 해 본다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이해하는 더 없이 좋은 지름길일지도 모른다는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방언, 치유, 입신(이것만은 내가 직접 한 건 아니다), 귀신 추방 등등을 체험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숙제 1번을 푸는 데도 2번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꺾일 수 없는 호기심 덩어리인 나는 “종교체험”을 “깊이”한 사람들의 실생활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작은 마을에서 형제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청년 회원들의 실생활을 시간을 두고 나 홀로 관찰하였다.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투시의 은사,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는 입신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 귀신들과 대화를 하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 그들의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하여 “아름답도록 큰 매혹”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내가 체험한 각종 신비체험에 대한 이해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관심의 뚜껑을 덮고,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종교 체험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데, 왜 부흥사들은 자꾸만 체험을 강조한단 말인가? 왜 기독교인들은 말 안 되는 소리와 행동을 서슴지 않는가? 그 깊은 비밀을 캐고 싶었다(목회자가 될 생각으로 신학교에 들어간 건 전혀 아니다. 그래야 한다는 걸 몰랐다.)


    5. 그러나 내가 신학교에서 만난 교수들은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만난, 성실하고 실력 있는 교사들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에서 어설프게 주어들은, 익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남은 길은 한 가지, 내 인생의 숙제를 풀기 위해 유학의 길을 택하는 수밖에.


    6. 유학 기간 4년 동안 내가 교수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 무엇이 기독교인들을 매혹적인 사람으로 만드는가? 말 되는 기독교 이야기는 없는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철저히 하나의 초점을 갖고 있었다. 즉 사람인 예수 이야기로부터!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그건 신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줄기차게 이 한 질문을 던졌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아니면, 안 되는 건 뭐란 말인가? 예수, 그는 무엇이 그리 유별난가(what's so special)?4) 어거스틴 세미나 시간을 마친 후, 말라드 교수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많은 걸 배웠다.” 즉 어거스틴을 평생 읽어온 교수였지만, 어거스틴의 글들 속에 타종교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계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7. 유학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대가들일수록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놀라운 사실, 그것은 배우고 익히고, 물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내가 신학의 거장이라 할 학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본 질문은, “왜 하필 예수를 믿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눈을 떠 보니, 나는 이미 기독교인이었다 하는 것이다: “It just happened to me.” 이것은 철저한 칸티안인 고든 카프만(Gordon Kaufman)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너의 문제이니, 네가 풀어야 한다.”5)


    8. 그러면 나의 대답은 무엇인가?

    예수는 신인가? 십자가 사건은 나에게 무엇인가? 부활은 또 무엇인가? 그의 한계는 무엇인가? “오직 예수!”는 버려야 하는가? 이런 통상적인 질문들을 간략히 다루면서, 나의 숙제에 대한 나의 해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8-1. 질문: 예수가 신인가?

           대답: “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도대체 왜 등장하는가?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사람들의 일상과 일상 언어를 들여다보면 이미, 그리고 아직도 그런 “탈선적” 어법이 사용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수호천사입니다.” “당신 없인 난 못살아요!” “내 목숨은 당신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사용하는 예수 신격에 대한 말들이 이렇듯 우리들의 일상 언어와 이어져 있고,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언어라면, 우리가 그런 고백(상징)을 수락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일상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러면 나는 왜 왜 예수에게 신격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마가 7:13)


    복음서의 많은 말들 중 이 구절이 나와 나의 예수의 접선장이다. 예수는 교사요, 혁명가이며, 열정의 사람이라는 점이 이 한 마디에 충분히 드러나 있으며, 예수의 짧은 생애는 이 한 마디 말로 충분히 해명된다. 즉 “기성 정답은 정답이 못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가르쳤고,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셨고, 그것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구원(완성)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방식이 나의 눈을 열어 주었고, 입을 열어 주었고, (시골, 고정관념에) 갇혀 살던 생명이 해방되어 꽃을 피우게(온 세상을 상대로 하는 삶을 구가하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올 “신”이란 존재가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 신이 이보다 더 큰일을 나에게 해 주랴! 그는 오후 4시의, 버려진, 남겨진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나에게 다가와, 필생의 숙제를 안겨 주셨다.


    8-2. 질문: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대답: 달리 죽었다 할지라도, 그는 나의 메시아!

    나는 사람의 피, 혹은 자기 자식의 피를 하늘에서 받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다음, “아들아, 네 이름을 부르는 죄인들의 죄악에 대하여는 내가 눈감아 주마!” 하고 조크를 하시는 신을 한 번도 예배해 본 적이 없다. 어떤 제사도 나는 거부하였으며, 특히 어떤 명분으로든 인간희생제를 요구한다면, 나는 그런 신을 단연코 “사탄”이라 이름 부를 것이다. 예수가 나의 메시아인 것은 그가 죽을 때 “피 흘림”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피 흘리고 죽는 죽음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많다. 예수의 “신”격이 인간의 시적, 상징적 언표이듯, “십자가” 역시 하나의 상징적 언표이다. 옥살이 끝에 자연사하였다면, 우리는 “옥살이”를 상징으로 내걸 것이며, (흑암이 사람을 벼랑으로 몰아붙여, 항복을 강요하고 있는 찰나에, 투항을 거부하고) “부엉 바위에서 투신자살”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예수의 일생을 “부엉바위 투신자살”로 상징할 것이다. 다른 방도가 있을까? 십자가, 그것은 그의 삶의 압축파일이요 정점이지만, 그 특정 형식은 부수적, 우연적 요소일 뿐이다. 결코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8-3. 질문: 예수 부활은 뭘 말해 주는가?

           대답: 그의 비전은 죽음 세력도 이긴다!

    모든 때 이른 죽음은 억울하다. 예수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죽었지만, 그의 삶과 죽음의 명분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채 당한 것이라는 점에서 “억울한 죽음”을 죽은 것이다. 그리고 훗날, 따르는 자들은 그의 죽음(삶의 압축파일)에서 들려오는 “살아 있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음성을 통하여 예수 추종자들은, 그의 사후, 예수를 계속하여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핵심은 예수의 말, 예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린 그림이 지금도 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느냐 않느냐 함이 중요할 따름이다.


    8-4. 질문: 역사 속에 살았다면, 예수의 가르침에도 한계가                 있을 것 아닌가?

           대답: 물론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 문서는 그 시대의 것이다. 이름하여 “조건적”이다. 예수의 삶은 종교-정치적 압제라는 특정 구조-문화 속에서 시달리는 짓눌린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산다는 게 이런 거야!” 하는 감격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큰 공헌이요, 독특한 가르침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당하고, 같은 희망을 가꾸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오늘날 무수한 목회자들이, 그리고 신도들이 역사 속에 살았던 구체적 인물 예수에게보다는 “신”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 속의 인물 예수는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결코 아니다.

    예컨대, 가정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자식의 육아와 진학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일에 쫒기고 있는 블루칼라들, 싫컷 살았으되 아직도 더 살아야 하는 치매 노인들, 정신적 장애인들 등등 많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줄 위로는 없다. 물론 사람들의 존재 조건이란 게 그 깊은 데서는 공통되기 때문에(예, 유한성, 개체성, 관계성 등등) “원론적” 영감을 줄 수 있다.


    8-5. 그렇다면 질문: “오직 예수!”는 버려야 하는가?

           대답: 그럴 필요는 없다.

    “오직 예수!”라는 구호를, 만일, 감격을 겪은 예수 추종자들이 실제로 내뱉은 말이라면, 나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며, 개인적으로, 지금도 옳은 혹은 유용한 단판이라고 믿는다. 내가 예수 안에서 얻는 놀라운 감격, 나의 숙제에 대한 애정이 그 어떤 스승의 영감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늘 재확인하는, 그런 자리라는 말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르침, 낯선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호기심을 가지고 달려들지만, 결과는 언제나, 아직도, “나에게는 역시 예수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이민을 왔듯이, 바울이 개종을 하였듯이, 어느 날 “아, 이것이었구나!” 하고 새로운 가르침 앞에 나를 바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진지하게 열려 있다. 재론의 여지가 필요 없는 당연한 이치이다.


    9. 예수, 아름다움의 사람

    내가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내가 내 방식으로 신약성서를 통하여 읽어낸 예수이다. 진짜 예수가 아닐 수도 있다. 진짜 예수라는 게 예수님 생전에 그가 그 자신을 이해한 방식의 예수를 가리킨다면 말이다.

    그는 진리나 정의를 넘어서 있는 지대에 이른 사람, 곧 아름다움의 맛을 안 사람이다. 고관대작들이라 하여 버리거나, 낮고 천한 서민이라 하여 그 자체로 우러러 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계급, 집단을 단위로 “편을 드는” 사람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개별자의 정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편을 들지만” 계급 자체 때문에 편을 들지는 않는다 말이다. 전라도 편을 들고, 북한 편을 들고 등등 ... 그런 조잡한 살구는 아니다. 사람은 집단 속에 살지만, 개체성이 있고 특수한 정황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내 맘대로 믿는다. 섬세한 감각의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이 말이 특정 집단의 공유성을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상한 말로 해석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진리라는 이름이, 정의라는 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던고! 그런 추상명사 하나를 굳이 사용하여, 예수의 길을 상징하고자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아름다움” 곧 “함께 어울리는, 고통스런 평화”를 들고 싶다. 그리고 최근의 과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예수의 이 비전은 곧 생명사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상생자가 상극자를 이기라는 꿈).

    이 질서에 참여하는 자는, 내가 희망하기는, 이 땅에서 능히 하늘의 기쁨을 누린다. 그는 혼자 남을 때 오히려 속으로 웃을 수 있다: 내가 참여한 길이 생명의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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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3.02.18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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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3.05.25 20:32

    교회개혁은 신학교육 개혁에서부터 / 홍정수 교수 강의 동영상

    http://vimeo.com/37357704

  • ?
    한기연 2013.12.21 07:32

    캐럴을 들으며, - 무신론의 의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6176.html?_fr=m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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