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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찾아온 은총: 깨달음을 통한 주체적 신앙>(2012)에 실린 글

 

 

 

우주론적 삼위일체와 인간의 운명


김 준 우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에서

 

하느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사명을 주신 분’이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배반했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 손수 아침을 차리시며 또 다시 사명을 일깨워주시듯, 마지막까지 나의 가능성을 믿으심으로써 내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시는 분’이다. ‘새 날’을 주심으로써 악몽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시는 하느님은 나에게 ‘빛’이시다. ‘열심’(enthusiasm)이라는 말이 본래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감히 하느님 안에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의 수많은 선물들만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적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며 사는 은총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왔다.

하느님의 신비에 마음을 모으는 공부와 수행을 한 적이 없이, 머리로 배울 생각만 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현실의 부조리와 개인적 상처들로 인한 분노 때문에 세상과 교회를 향한 외적인 과제들에만 몰두하느라 자신의 내면을 잘 살피지 못했다. 애당초 종교적 신심이나 지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종교 체험을 하지 못한 탓이다. 또한 급진적 신학들은 내가 배운 교리들의 체증을 상당부분 풀어주기도 했지만, 많이 부대끼게 만들었다. 특히 ‘현대 신학의 이단자’로 불리는 돈 큐핏과 로이드 기링의 책들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지만 아직도 버겁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비실재론(non-realism)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시던 전능한 하느님은 분명히 ‘실직자’가 되었으며 ‘홈리스’가 된 세상에서, 또한 기독교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 세상에서, 더구나 급격한 기후붕괴와 대멸종 사태로 인해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토마스 베리)를 살고 있는 현실에서, 아둔한 사람이 신학도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광야를 헤매며 샘물을 찾아야 하는 운명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어머니 하느님’과 ‘피에 굶주린 흡혈귀 하느님’

 

전쟁이 끝난 직후 아버지는 마흔셋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서른셋에 혼자가 되셨다. 어린 두 아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어머니는 온갖 고생을 하셨다. 불쌍한 어머니를 돕겠다고 나 역시 어려서부터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했다. 신문 배달과 가정교사를 하면서 세상을 배웠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굳어져버렸다. ‘아버지의 부재’가 무신론자를 만든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부와 생계는 늘 앞만 보고 달리게 했다. 하느님을 사회적 모순들과 관련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가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모성적이며 해산의 고통을 겪는 존재로 다가오게 된 것은 어머니의 희생 때문일 것이다. 

그 삭막했던 시절, 교회를 통해 온가족이 삶의 기쁨과 의미를 배우고 더군다나 나로서는 목회에 대한 꿈을 갖게 된 것은 분명 은혜였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은 내게 인생의 보람을 가르쳐주었다. 어느 권투선수가 자신의 마지막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권투를 한다더니, 목사가 된다는 것은 내게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머리로 씨름만 했을 뿐 영적인 훈련에는 무관심했던 탓에 가슴의 교만과 황폐함을 깊이 성찰하지 못하고 그 은혜를 더욱 키워나가지 못했다. 신앙생활은 평생의 수행 과정이며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중고등학생 시절, 해마다 봄가을에 ‘심령부흥회’라는 것을 며칠씩 했다. 부흥사들 중에는 ‘박수부대’를 끌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하느님의 은혜’와 ‘성령’이란 실상 감사헌금을 갈취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대학생 때는 그 단어만 들어도 넌더리가 났다. 군사독재로 인해 숨 막히던 시절, ‘역사의 종교’ 기독교를 무당푸닥거리만도 못하게 만드는 부흥사들에 대한 분노는 매우 오랫동안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부흥사들만이 아니라 성서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을 마치 피에 굶주린 흡혈귀처럼 만든 것은 ‘보상의 종교’가 갖는 교육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란 매우 취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 귀족들의 평균수명이 30세를 넘기 시작한 것이 불과 200년 전이었으니, 유대-기독교 역사에서 종교 귀족들이 ‘보상과 공포의 심리학’을 애용한 것은 당연했다. 아직도 자연재해로 인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기독교의 복음을 ‘보상과 공포의 심리학’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자칭 ‘복음주의신학자협의회’에서 어느 신학대학 총장이라는 사람조차 그런 율법주의적 해석을 하면서도 자신이 복음주의자라고 완전히 착각할 정도로 한국 교회의 반지성적인 몰상식의 뿌리는 깊다. 성경문자주의만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 사제들과 신학자들의 기득권이 하느님 이해에서 그런 몰상식과 폭력성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신앙 없이

 

돌이켜 보면, 영문학을 배우며 감동적으로 읽었던 소포클레스의 Prometheus Bound와 까뮈의 <시지푸스 신화>에 나타난 인간의 엄중한 소명과 신들에 대한 불굴의 저항 정신은 교회에서 배운 신앙과 정리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었다. 독수리가 심장을 쪼아대는 고통에도 당당하게 버티는 것은 존엄한 인간의 자기 확신 때문이라고 믿었다. 신들과 기꺼이 맞짱뜨는 영웅들의 모습이 진정 인간다운 길인 것처럼 느꼈다. 이런 프로메테우스적인 인간상에는 토마스 머튼이 지적한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내게는 신앙의 가장 기본인 하느님에 대한 신뢰(fiducia)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는 인간이 최선을 다 하기 전에는 결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自力] 없이는 하느님의 은총[他力]이 없는 것이라 믿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고 그분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오랫동안 느끼지 못할 만큼 나는 육체적으로 건강했고 정신적으로 자신만만했으며 영적으로는 미숙했다. 


‘낫과 망치를 든 하느님’

 

신학 공부를 시작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교리들에 대한 체증 때문이었다. 신앙을 이해하려고 불트만과 루터로 논문을 쓰고서도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대속’과 ‘부활’과 같은 전통 교리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지적인 동의’ (assensus)가 되지 않으니 ‘신뢰’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서 지배계급의 시녀로서 억압과 폭력과 몰상식에 공헌했다는 비판의식이 생긴 후부터 사회적 모순 분석과 신학적 비판 작업에 오랜 세월 매달리게 된 이유는 신앙이 머리에 앞서 가슴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을 미처 몰랐던 탓이다. 성경과 그 해석의 역사는 제국들에 의해 피바다를 이룬 참담한 역사의 현장에서 하느님께서 예비하시는 상생해원의 미래를 믿음으로써 절망과 체념을 극복한 치열한 삶의 고백이며 역사의 돌파구(카렌 암스트롱)였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때문이다. 교리들은 살아내야만 깨닫게 된다는 것을 미처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객석에 앉아 있다가 부름 받아 무대 위로 올라온 사람은 이제까지 <성경 속에서 펼쳐진 드라마>에 따라 내게 맡겨진 배역을 실천하면서 스스로의 각본을 써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버나드 앤더슨 교수는 가르쳤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폭력과 억압, 착취의 현실이었다. 이런 ‘대량학살 체제’에 맞서 저항할 방법에 몰두하게 된 것은 신앙의 기본이 되는 ‘신뢰’나 ‘지적인 동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에 대한 관점’(visio)과 ‘충성’(fidelitas) 그리고 ‘실천’(praxis)을 붙잡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처럼 ‘신뢰’ 없이 외적인 과제들, 특히 거짓 신학과의 싸움에 몰두하는 것은 내면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겠다는 식으로 허공을 치는 것에 불과했다. 폭력적이며 비인간적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과 신학의 과제는 분명했지만,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방법이 문제였다. 이것이 해방신학과 생태신학을 공부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처음에는 김지하에게서 “낫과 망치를 든 하느님”을 배웠다. 역사 속에서 혁명적 인간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마르둑 신이나 이집트 제국의 태양신과 달리, 성경의 야훼 하느님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위해 사람들에게 복종과 체념과 죽임을 요구하는 거짓 신이 아니라, 천민들에게도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제국과 결탁한 기득권층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민중해방은 말할 것도 없고,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식민지 신학’의 영육 이원론, 육체와 물질과 세상을 경시하는 태도를 극복하는 과제조차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통치자의 칼을 녹슬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희생자들의 피뿐이며, 탱크를 녹일 수 있는 힘은 반전촛불시위뿐이었으니, ‘짐승의 시대’에서 “낫과 망치를 든 혁명가 하느님”이 펼치는 구원의 길은 결국 십자가의 길뿐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기보다는 “낫과 망치”를 들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분’이며, 이 과업은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이소선 여사를 중심으로 한 청계피복노조 역사를 기록한 책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오도엽)는 우리 시대에 기록된 대표적 ‘사도행전’이며 ‘성령의 역사’라고 나는 믿는다. 개인의 운명이든 불의한 지배체제이든 간에, 그에 맞서 “충만한 생명”을 위해 저항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나는 고백한다.


‘하느님의 영광’과 찬양은 우리를 위한 것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속성들은 인간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임을 배웠다. 칼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예배하도록 제사 제도를 정하신 이유를 설명하면서, ‘온 인류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하느님의 영광에 손톱만큼이라도 보탬이 되는가?’ 하고 물었다.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이 영광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예배 제도를 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그것이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제물을 받아 직접 잡수시는 것처럼 우리들 곁에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시시때때로 기억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예배 제도를 정해주셨다는 설명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그처럼 강조한 칼빈조차도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를 항상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 앞에서”(Coram Deo)를 강조한 루터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속성들 역시 우리의 깨달음과 헌신을 위한 것임을 배웠다. 즉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하느님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살겠다는 각오를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 ‘위로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 역시 우리가 그처럼 사랑하고 용서하며 위로하고 구원하며 생명을 살리며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는 각오 없이 고백할 경우에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찬양이란 “그분의 관심을 우리 자신의 관심으로 만드는 일”(A. 헤셸)이다.


예수의 하느님: 미륵상생신앙

 

종교재판 사건 이후에,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번역 출판하면서, 동정녀 탄생과 부활과 대속과 재림에 관한 교리들이 본래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고백되어졌는지를 알게 되어,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크로산과 보그, 스퐁, 스캇, 윙크, 라일리를 통해, 추상화되고 박제화 된 교리들 배후의 ‘참 사람 예수’를 만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가 어떻게 살았기에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을 드러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신격화되었는지를 배웠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에 관한 종교’의 토대가 된 ‘예수의 종교’였으며, 예수의 비전과 전략이었고, ‘예수에 대한 믿음’(faith in Jesus)보다 ‘예수의 믿음’(faith of Jesus)이었다. 예수 당시에 세례 요한은 하느님의 폭력적 심판에 대한 ‘미래의 소망’(미륵하생신앙)을 통해 당시의 절망을 극복하려 했지만, 예수는 그런 ‘미래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고, 하느님 나라를 현재에서 살아내는 ‘사랑’(미륵상생신앙)을 통해 정면 돌파했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 달리, 하느님과 역사에 대해 묵시적이며 타력구원적 기대가 아니라, 상식적이며, 비폭력적이며, 보다 자력구원적인 이해와 실천의 돌파구를 뚫었다고 믿는다.(최선을 다해야 은총이 허락된다는 점에서 크로산의 ‘협력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예수의 하느님은 예수가 어려서부터 매일 암송했던 ‘쉐마’(신 6:4-9)의 ‘한 분 하느님’이다. 이 ‘한 분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은 ‘한 분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의존 되어 있는 존재론적 ‘동체’(同體), 혹은 ‘불이’(不二)다. 이처럼 비폭력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하느님 나라(kingdom)를 폴 니터 교수가 하느님의 ‘가족’(kindom)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예수는 ‘한 분 하느님’과의 합일을 통해, 이웃과 원수, 죄인과 의인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이 믿음 때문에 당시 위계적이며 차별적인 로마제국과 종교 귀족들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 믿음을 계승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신 존엄성과 무차별적인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예수가 ‘살과 피로’ 부활한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또한 역사는 생명의 세력과 사망의 세력이 대결하는 무대이며, 예수의 하느님은 비폭력적이며, 홀로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라, <비유의 위력>(크로산)을 통해 의식화작업을 행하여 깨어난 자들과 협력하는 분이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넌 것(출 14)에 대한 랍비들의 설명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추격해오는 이집트 군대 앞에서 대다수 백성들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으며, 몇 사람은 바닷가 언덕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나손 아비나답은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닷물이 무릎에, 배에, 목에 차오를 때까지도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물이 입에까지 차오른 후에 바다가 갈라졌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딜 때에야 비로소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전능한 ‘마초 하느님’은 완전히 격파 당했지만, <여성의 얼굴로 나타난 하느님>(Melissa Raphael)을 경험한 것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여성성 속에 ‘임마누엘’ 하느님, 혹은 ‘쉐키나’ 하느님(의 형상)이 살아계심을 증언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의 이런 자기 초월이 하느님의 기적이며, 믿음의 능력이며 신비라고 믿는다.


요한의 하느님: 미륵하생신앙

 

기독교만의 독특한 교리는 성육신 교리와 삼위일체 교리다. 말씀이신 하느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 교리는 유대교의 종교적 이상과 정반대라는 것이 유대교 랍비 로렌스 쿠쉬너의 설명이다. 아하! 유대교에서는 육신이 말씀(하느님)의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 방법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여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요한은 하느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가르친다. 당시 세례 요한의 미륵하생신앙에 반대해서 미륵상생신앙을 가르친 예수를 요한복음 저자가 또 다시 미륵하생신앙의 관점에서 이해한 이유는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노약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온종일 노동해도 입에 풀칠하기에 바빠서, 혹은 육체의 질병 때문에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내려오셨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 바니에 신부는 교회의 중심을 차지할 사람들은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이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철저하게 무기력한 시대에는 미륵하생신앙이 등장하게 마련일 테지만, 그 사회적 비전은 미륵상생신앙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주의 선율에 맞추어 춤추게 하시는 하느님

 

생태계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인식은 나에게 사회적 해방을 위한 프로그램에 앞서서 우주와 생명의 신비에 대해 눈뜨게 했으며, “우주의 선율에 맞추어 춤추게 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했다. 토마스 베리 신부의 영향이다. 우주-지구-생명-인간의 역사는 “하나의 우주 이야기”로서, ‘우주의 진화/창조과정 속에 펼쳐진 하느님의 신비한 드라마’였다.

그 우주적이며 생명사적인 드라마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은 다양성(diversity)과 주체성(subjectivity), 교제(communion)라는 것이 베리 신부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우주와 생명의 역사에 대한 진화론적 관점은 ‘오직 성서,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외친 개신교의 성경적 폭력성과 배타주의와 몰상식한 믿음주의를 단번에 극복하는 보편주의의 길이다. 먼저 다양성은 수천 억 개의 갤럭시들만이 아니라, 예컨대, 전 세계적으로 개미가 1만2천 종, 국화는 2만여 종, 오징어 10만여 종, 육지의 달팽이만 3만5천 종이라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둘째로, 주체성은 아메바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최대한의 신경조직과 뇌 조직을 발달시켜 각자 주체가 되도록 자기를 조직화해온 것을 말한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잠재력을 극대화할 때 비로소 창조(진화의 주체화 과정)가 일어난다고 나는 믿는다.(‘서로주체성’을 주장한 김상봉 교수의 입장이 더 보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셋째로, 교제는 우주 안의 인력의 법칙처럼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상호의존되어 있음을 말한다. 특히 식물과 곤충들의 공진화 과정은 생명들 사이의 교제의 원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베리 신부는 이 우주-생명의 세 원리를, ‘성부-성자-성령’이라는 가족 모델, 심리적 모델, 사회학적 모델과 달리, “우주론적 삼위일체 모델”이라 불렀다. 하느님은 다양성과 주체성, 교제를 지향하며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주 안에서 줄기차게 창조/진화를 이끌어가는 우주와 생명의 신비한 창조성의 원천, 그 창조적이며 영적인 힘을 나는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금성 신드롬’과 대멸종 사태를 온몸으로 겪는 하느님

 

최근 들어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 기후붕괴 현실과 대멸종 사태 앞에서 하느님은 자식을 잃은 어미처럼 지구를 부여안고 실성한 채 몸부림치고 계신다고 믿는다. ‘생태대’로 나아가는 길을 뚫기 위해 마지막 피땀을 쏟고 계신다고 믿는다. 멸종은 하느님이 억겁의 세월 동안 정성껏 키워 오신 종자들이 우주 안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기후학자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30년 뒤에는 지구평균기온이 섭씨 2도, 60년 뒤에는 4도, 100년 뒤에는 6∼12도 상승할 정도로, ‘금성 신드롬’(제임스 핸슨)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금성도 처음에는 지구와 비슷한 화학적 조건이었지만, 땅 속의 모든 이산화탄소가 방출된 ‘탈주효과’ 때문에 섭씨 450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구의 운명 역시, 이미 ‘탈주효과’가 시작된 메탄수화물(‘시한폭탄’이라 부른다)이 지구 역사상 지금이 가장 많이 ‘장전되어’ 있어서(제임스 핸슨에 따르면 약 5천 기가톤), 지구평균기온이 섭씨 100도(제임스 핸슨의 시나리오처럼 2525년?)를 향해 나아가든가, 아니면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가든가 둘 중 하나다. 코펜하겐 회의와 더반 회의는 전자를 택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구 역사에서 이제까지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지만, 결국 매번 생명의 힘이 죽임의 힘을 극복했다는 사실도, ‘금성 신드롬’으로 인해 지구가 금성처럼 완전히 불모의 땅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는 낙관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을 외면한 채 ‘전능한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최후승리’를 말하는 것은 세계 에너지재벌들의 하수인이 된 교회가 나누어주는 ‘아편’이 되고 있지 않는가?

‘금성 신드롬’이 이미 시작된 시대에, 세례 요한이 믿었던 하느님의 ‘강권적인 미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예수처럼 상식적이며 협력적인 미륵상생신앙의 토대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전도서 기자가 함축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한 ‘우주 질서’로서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 ‘비인격적 창조력’(로이드 기링)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의 인격성이 부정되는 시대에 필요한 미륵상생신앙의 토대라면, ‘하늘은 무심(無心)하다’거나 ‘불인’(不仁)이라는 인간중심주의보다는 오히려 ‘우주 질서’이신 하느님이 ‘금성 신드롬’과 대멸종을 직접 겪고 있는 ‘비인격적 창조력’이라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자손들의 운명과 지구에 대해 유일하게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약한 종자들부터 차례로 떼죽음당하는 현재의 ‘전 지구적 아우슈비츠 체제’에서 국가들이 점차 우경화하는 마당에, 또다시 파시즘의 선봉에 설 가능성이 매우 높은 기독교 우파들에 맞서서 ‘비인격적 창조력’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수호하는 일은, ‘지구가 유일하며 절대적이며 창조적인 하느님의 자궁’이라는 믿음과 ‘만물동체’라는 믿음에 근거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투(死鬪)이기에, ‘우주의 두뇌’인 인간의 거룩한 존엄성과 신앙 공동체의 기쁨과 ‘생태대’를 향한 희망의 근거가 된다.

우주론적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보상과 공포의 종교’에서 벗어나, 단지 불교도들처럼 지구 운명의 덧없음까지 받아들이는 성인(돈 큐핏)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우주의 두뇌’ 역할을 다 할 것을 요청한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생명의 선물들에 대한 감사와 고통에 대한 공감과 감히 합일을 꿈꾸게 하는 자비의 원천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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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조직신학 절룩거리는 그리스도 / 카릴 하우스랜더 2 한기연 2019.05.18 131
공지 가정사회소식 양육강식하는 식인사회의 킬링필드 /김훈 11 한기연 2019.05.11 81
공지 기독교윤리 인류의 '마지막 싸움' / 배를 돌리자 24 한기연 2019.01.14 157
공지 가정사회소식 남성, 여성 아닌 제3의 성(간성) 3 한기연 2019.01.11 273
공지 교회사 웨슬리 [표준설교 정신] 이어 받은 기도문들 52개 pdf파일 file 한기연 2018.11.22 428
공지 조직신학 아우슈비츠에서의 하느님의 여성적 얼굴 1 file 한기연 2018.08.18 1267
공지 기독교윤리 빨간 지구 - 온실가스 시한폭탄에 이미 불이 붙었다 36 file 한기연 2018.08.17 278
공지 기독교윤리 벌레들의 나라,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기독교 파시즘의 망령 39 file 한기연 2018.06.30 369
공지 가정사회소식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남성의 탄생 8 한기연 2018.04.19 251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2010) pdf파일 9 file 한기연 2017.12.04 10408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 (2012)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23 10588
공지 기독교윤리 <생태계의 위기와 기독교의 대응>(2000)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10 11627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변화와 생태신학의 과제 (2017) 30 file 한기연 2017.11.04 12135
공지 가정사회소식 노령화: 남은 시간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장덕진 10 file 한기연 2016.04.26 19203
공지 역사적 예수 기후변화와 대멸종 시대의 예수의 복음 5 file 한기연 2015.11.12 18986
공지 기독교윤리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신학적 의미와 사목 과제 15 file 한기연 2015.10.06 21215
공지 역사적 예수 홍정수 박사가 말하는 예수 르네상스 (강의 동영상) 한기연 2015.04.01 25604
공지 기독교윤리 세월호참사 -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 133 file 한기연 2014.04.18 37957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생태대를 향한 출애굽 - 녹색의 세계관과 생태주의 인문학 아카데미 29 file 한기연 2013.11.12 33996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 시대의 교회의 역할 17 file 한기연 2013.08.24 34515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예수 살기 / 하늘이 낸 참사람들 11 file 한기연 2013.03.13 34383
공지 기독교윤리 엘리 위젤, <하나님에 대한 재판> 서평 1 file 한기연 2012.07.12 6773
공지 기독교윤리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한국 교회의 평화운동 자료 33 한기연 2012.04.24 57353
공지 조직신학 하나님이 계시냐고요 / 담임선생님 예수 / 홍정수 4 한기연 2012.04.11 89437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와 대멸종 시대에도 하나님은 전능하며 예수는 구세주이며 교회는 거룩한가 / 김준우 31 file 한기연 2011.12.12 97649
공지 역사적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 / 김준우 12 file 한기연 2011.10.23 62295
공지 조직신학 나의 종교경험 -> 나의 복음 -> 나의 신학을 일관성 있게 한 마디로 정리하기 4 한기연 2011.08.21 124959
공지 실천신학 대안교회의 가능성 / 한성수 1 file 한기연 2011.08.02 128875
공지 기독교윤리 핵위험 사회 치닫는 대한민국 1 73 한기연 2011.03.28 174296
공지 조직신학 감리교 종교재판의 전말/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6 file 한기연 2010.11.22 141967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담론의 종교문화사적 의미 / 김준우 4 file 한기연 2010.11.14 145045
공지 역사적 예수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7 한기연 2010.10.28 129320
공지 기독교윤리 2015년까지 모든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라! 14 file 한기연 2010.10.02 165943
공지 조직신학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2 한기연 2010.04.12 155436
공지 조직신학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1 한기연 2010.03.29 144994
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한기연 2010.03.27 150439
공지 역사적 예수 김기석의 종횡서해 <첫번째 바울의 복음> 한기연 2010.03.18 6864
공지 역사적 예수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5 한기연 2010.02.24 153716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홍정수 13 file 한기연 2010.02.19 168044
공지 기독교윤리 두달만에 - 북극 지역 빙하의 크기 변화 2009/9 22 한기연 2009.09.19 182351
공지 가정사회소식 소득 5분위 배율 비교 25 file 한기연 2009.09.13 182941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 읽는 순서 추천 4 file 한기연 2008.12.03 179192
공지 기독교윤리 세계/교회/신학의 물적 토대 - 신학의 출발점 9 file 한기연 2008.09.01 180440
공지 북극해의 해빙 속도와 기후변화, 한반도 가뭄과 사막화 위기 19 file 한기연 2008.05.14 201551
공지 역사적 예수 교회개혁을 위한 25개 신학논제 - 김준우 5 한기연 2007.10.20 182198
공지 실천신학 목사 개(dog)론 / 축도유감 /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 / 한성수 3 한기연 2004.08.30 146579
공지 실천신학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성만찬/ 혼인주례자 상담체크 리스트 1 file 한기연 2003.09.30 29485
135 역사적 예수 난징과 오키나와, 제주와 광주 2 한기연 2018.06.01 114
134 역사적 예수 제본을 든든하게 1 file 느림보 2016.07.14 3286
133 역사적 예수 한상균 그리스도 / 김인국 2 한기연 2015.12.19 4297
132 역사적 예수 평신도의 모험 / 애도, 기억, 저항 / 정경일 3 한기연 2013.11.05 4111
131 역사적 예수 하느님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 / 박경미 교수 1 한기연 2012.12.25 5640
» 역사적 예수 우주론적 삼위일체와 인간의 운명 / 김준우 2 한기연 2012.10.22 6785
129 역사적 예수 마가가 예수를 오해했는가? / 이덕주 한기연 2012.02.13 9512
128 역사적 예수 지구촌과 한국사회 병든 현실을 치유하기 위한 생명과 평화 담론 / 김경재 교수 1 file 한기연 2011.02.04 14113
127 역사적 예수 나는 왜 아직도 기독교인인가? / 김준우 1 한기연 2011.01.29 12616
126 역사적 예수 예수 부활의 유대적 성격 / 크로산 한기연 2010.11.19 10107
125 역사적 예수 기적은 하늘로부터가 아니라 / 김준우 file 한기연 2010.11.15 10077
124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아직도 충분히 알 수 없는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가? / 김준우 한기연 2010.11.15 9586
123 역사적 예수 Future of Chrsitianity / Bishop Spong 강연 동영상 한기연 2010.10.16 8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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