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KICS)

banner1.gif
banner2.gif

인터넷서점
바로가기

알라딘서점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top^

로그인



mobilew.jpg 

 

[최근 출간서적]

[최근 댓글]

역사적 예수
2012.02.13 10:01

마가가 예수를 오해했는가? / 이덕주

조회 수 950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가가 예수를 오해했는가?

 

마가는 그의 복음서 4장에서 대부분의 비유들을 모아놓았다.[1] 바닷가에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는 비유를 통해서 가르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한 후 제자들이 예수에게 질문을 한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모든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약하다. 제자들의 아둔함에 예수의 질책이 이어진다. 그리고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그들에게 해석해 준다. 마가복음 4장에서 제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가 대답하는 형식에 따라 마가는 다른 비유들도 이어간다. 대부분의 가르침은 예수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제자들의 꾸짖음도 가르침도 모두 예수의 입을 통해서다.

 

예수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 이야기들을 크로상은 마가의 것과 예수의 것으로 갈라놓는다. , 마가의 의도와 예수의 의도로 분리하는 것이다. 이 논리가 크로상 (John Dominic Crossan)이 그의 최근 저서[2]를 통해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가가 예수를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후에 쓰여진 누가가 예수를 가장 잘 이해했기에 마가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사용하는 논리의 기준은 누가가 제공한 것이다. 특히 마가복음 4,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크로상에게는 마가가 예수를 오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첫째, 예수와 마가복음의 저자를 분리한다.[3] 그리고 예수가 비유를 사용하는 목적과 마가가 비유를 사용하는 목적은 서로 상이하다고 주장한다.[4] 예수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 내용을 분석한 후, 크로상은 예수의 의도와 마가의 의도를 다르게 여기는 것이다.[5] 그 증거로 마가의 예수가 인용한 이사야 6:9-10이 사용된다.[6] 비유를 사용한 이유가 보고 듣는 자들이 돌이키지 못하도록 해서 이들이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는 예수의 말을 마가의 주장으로 돌려 놓는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서 듣는 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였지만, 마가는 예수가 특별한 해석을 해준 내부자와 그렇지 않은 외부자를 구분하여, 외부자로 하여금 돌이키지 못하게 하여 용서받지 못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크로상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의 의도와 마가의 의도는 차이가 있고, 그것은 마가가 예수를 오해한 결과였고, 예수의 의도를 알아차린 누가가 마가의 잘못된 것을 고쳐줬다는 내용이다.

 

크로상의 이런 해석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왜곡된 시각은 많은 경우 잘못된 전제 (presupposition)에서 출발한다. 그 전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마가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를 구분할 수 있고, 누가는 마가보다 역사적 예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마가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로 부터 멀어져 있는 반면에, 누가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를 잘 반영하고 있다.

둘째, 예수의 이사야 인용은 마가의 해석이고,[7] 마가의 (또는 예수의) 외부자와 내부자의 분리는 예수의 의도를 왜곡한 것이다.

 

예수의 의도  vs. 마가의 의도

크로상의 주장, 즉 예수의 의도와 마가의 의도가 다르다는 것은 마가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를 분리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과연 이 구분이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주장은 신약이라는 문서를 오해한데서 출발한다. 신약 속의 다양한 문서들이 하나의 역사적 예수를 서술하고 있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Marinus de Jonge Gregory J. Riley 의 책들은 이런 주장이 불가능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8] , 하나의 기독론이나 하나의 그리스도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신약의 여러 책들이 표방하고 있는 예수, 즉 그리스도는 서로 상이하다는 것이다.[9] 복음서들을 섞어서 하나의 문서로 보려는 크로상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10] 역사적 예수를 연구했던 크로상 류의 학자들에게 이런 시각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11] 각자 복음서가 보여주는 특수성은 가려지고, 목적에 따라 필요한 것들을 여기저기서 끄집어내 필요를 충족시키면, 그 주장은 충분히 증명된 것으로 간주된다. 예수의 의도와 마가의 의도가 분리 가능한지 좀더 근본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공관복음 문제(Synoptic Problem)”가 될 것이다.

 

공간복음 문제 (Synoptic Problem)

“공관복음 문제(Synoptic Problem)”는 신약의 세 복음서들, 즉 마가복음, 마태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이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데서 출발한다. 그 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학자들은 공관복음 문제라 칭한다. 공관복음 문제의 결론은 복음서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기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마가복음과 큐(Q)를 소스로 규정한다.[12] , 마태복음와 누가복음이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과 큐(Q)라는 소스를 사용하여 편집,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마가의 예수와 큐(Q)의 예수[13]가 후대에 쓰여진 마태와 누가의 저작에 밀접한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마태와 누가는 이 두 소스를 후대에 사용하면서 때론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사용한다. 

 

크로상이 주장한 것처럼, 마가와 예수가 분리 가능한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필요로 한다. 모두 마가복음과 연관된 것이데, 첫째, 두 복음서의 소스로 사용된 마가복음은 어떤 소스를 사용하여 작성되었느냐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마가복음에 어떤 결함이 존재했기에 후대에 새로운 복음서들이 작성되었느냐는 것이다.

 

첫번째 질문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관복음에 적용했던 동일한 질문을 마가복음에 던져보자! 마가복음은 어떤 소스를 사용하였는가? 공관복음 문제에 있어서 두개의 복음서가 마가복음과 큐(Q)라는 소스를 사용했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도 어떤 소스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약 중 마가복음 보다 먼저 쓰여진 책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울 서신들 이다. 바울 서신들은 복음서들보다 적어도 20-60년 먼저 쓰여졌다.[14] 복음서들이 후대에 쓰여졌다는 의심할 수 없는 이런 사실은 바울 서신들을 마가복음이 이용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 조차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널리 퍼져있는 편견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삶을 소개하고, 바울은 교회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 두개의 문서들이 서로 다른 역사적 시대를 표방하고 있기에 바울 서신이 제공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내용들은 신약 학자들에게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고, 억압되어 왔다. 일부 학자들에게 복음서가 바울 서신들을 이용했다는 생각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사항이고, 크로상도 이런 부류의 Old School 에 속하는 학자이다.

 

마가가 어떤 소스를 사용하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최근 연구들을 소개하는 것은 옳은 순서가 될 것이다. Thomas Nelligan 2010년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마가가 그의 복음서 1장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고린도 전서 1장과 2장을 모방(mimesis)[15]했다고 주장한다.[16] 복음서가 바울 서신들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처음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학자들이 누가가 사도행전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특히 후반의 바울 이야기는 바울 서신들을 이용했다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이야기다.[17]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서신들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그의 복음서에서도 사용했다는 주장 또한 일반적이다.[18]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복음서는 예수의 삶, 바울은 교회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선입관이 학자들로 하여금 마가가 바울 서신이 전하는 예수와 제자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도록 해왔다. 따라서 바울 서신과 첫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연관성은 무시되어 왔다. 마가복음 4장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을 분석한 책, Sowing the Gospel을 쓴 Mary Ann Tolbert 조차 바울 서신들과 마가복음의 연관성을 각주에서 가볍게 취급하고 만다.[19] 두 문서의 밀접한 문학적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마가복음이 바울 서신을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편견은 기독교 역사의 잘못된 전통 때문이다: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였다”는 전통이다. 물론 이 논리는 사도행전에서 출발하고 그 기조는 기독교 역사안에서 계속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바울 서신이 반영하고 있는 바울 자신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런 류의 전통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울 서신들이 반영하고 있는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는 적대적(polemical) 이다 (Gal 2, cf. Acts 15).[20]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인데, 누가의 사도행전이 이 두사람의 관계를 개선했고, 그 사도행전적 전통이 이 두사람의 관계를 후대에 설정하는데 있어서 지배적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21] 그 후 기독교 역사는 이 오염된 관계를 유지해온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문서들(신약)을 쓰여진 순서에 따라서 읽다보면, 누가의 사도행전적 전통은 바울 서신을 연구하는데 사용될 수 없거나, 이차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22]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입장을 수용하고 있고, 누가가 바울 서신을 사용할 수는 있어도, 먼저 쓰여진 바울 서신들이 누가의 사도행전을 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바울 자신이 쓴 자신의 이야기와 사도행전이 반영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당연히 바울 서신을 우선시 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23] 따라서 늦게 역사에 끼어든 바울과 베드로의 우호적 관계는 사도행전적 전통을 이어받은 후대 전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usebius가 전하는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 였다는 주장은 더이상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Joel Marcus는 그의 논문에서 마가를 “바울의 해석자”라고 주장한다.[24] 마가와 바울 서신이 예수의 죽음을 같은 선상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Nelligan은 한발 더나아가, 고린도전서와 마가복음의 문학적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삶의 과정이 바울 서신을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5] 이 주장을 뒷받침한 구체적인 지적은 마가복음 4장을 분석하면서 분명해질 것이다. 이제 두번째 질문을 다룰 차례다. 마가복음에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마가복음을 소스로 사용한 두 복음서들,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나중에 쓰여졌느냐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왜 쓰여졌는가?

이 두번째 질문을 David Sim이 그의 논문에서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26] 다시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장 중 하나를 소개하면, 복음서들의 독자들은 복음서 공동체들이라는 가정이다. 부언하면, 마가복음은 마가 공동체가, 마태복음은 마태 공동체가, 누가복음은 누가 공동체가 수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마태와 누가의 공동체들이 마가복음을 적극 수용했다면, 마태복음이나, 또는 누가복음이 쓰여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신약학에서 인기있는 질문은 아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복음서를 역사 속에 존재했던 예수에 대한 전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왜 쓰여졌냐는 질문의 필요성은 마가복음을 편집한 마태의 태도나 누가의 성향를 분석하면 더욱더 분명해 진다. 95%의 마가복음을 사용하는 후세의 두 복음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편집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은 매우 필요하다.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복음서에서 제외시킨 마가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두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David Sim은 그의 논문에서 마태나 누가 공동체가 마가복음을 적극 수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가복음이 마태 공동체가 원하는 방향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기에 마태복음이 쓰여졌고, 이런 면에서 누가 또한 마가복음을 마태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단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각각의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진 후, 이들 공동체는 마가복음을 더이상 수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제자들에 대한 태도, 예수의 부모와 형제에 대한 입장, 유대적 전통에 대한 수용등, 서로 다른 전통들을 만들고 수용해서, 마태와 누가는 마가와 전혀다른 입장을 표방하고, 각각의 공동체는 변질된 전통들을 적극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이나 마가복음에서 수용 불가능한 스토리들을 마태와 누가가 그의 복음서들에서 편집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자리가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 공동체나 누가 공동체, 심지어 요한 공동체까지 그들의 공동체들 속에 마가복음이 계속 회자되는 것을 막았을 것이라는 David Sim의 주장은 설득력은 갖는다.

 

누가가 마가보다 나은가?

크로상에 의하면, 누가가 마가보다 예수를 더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지적한 공관복음 문제와 마가의 소스, 그리고 David Sim의 주장은 크로상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저자 마가는 바울의 해석자이고, 마가의 예수는 바울적 예수이다. 이 바울적 예수를 자신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재 해석한 복음서들이 바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된다. 이 후대 복음서들은 어느정도 바울과 마가복음에 대해서 적대적 지평에 서 있다. 두 복음서에 표현된 예수의 모습은 마가의 예수에 대해서 어느정도 적대적이다. 그들의 수용성은 삶의 자리가 허용하는 만큼만 열려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 반영된 예수가 마가의 것보다 더 우월하거나, 역사적 예수에 가깝다는 주장은 전혀 불가능하다. 누가복음의 자리매김은 상당히 용이하다. 왜냐하면, 그가 소스로 이용하는 마가복음을 어떻게 편집했느냐, 또는 바울의 서신들을 어떤 방향으로 왜곡하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다.[27] 더우기 마가와 예수가 서로 다른 의도를 가졌다는 크로상의 문제 제시는 누가적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부언하면, 크리상은 누가 중심적이다. 이 문제는 마가복음 4장과 누가의 평행구(Mk 4:3-20 // Lk 8:4-15)를 분석함으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마가복음 4장 분석

마가복음 4장은 크로상이 지적한 것처럼 예수의 가르침(διδαχ)으로 시작한다. 무리는 바닷가에 모여있고, 예수는 바닷가로 나가 배 위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가 선생, 즉 가르치는 사람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예수가 가르칠 때 한가지 형식(form)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비유(παραβολ). 가르침은 비유라는 하나의 통로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Mk 4:2). 가르침은 내용(content)이고, 비유는 형식(form)이 된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은 비유라는 형식과 분리될 수 없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Mk 4:3-9) 또한 가르침(διδαχ)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비유라는 형식(form) 또는 장르(genre)가 예수의 가르침, 즉 내용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는 크로상의 주장은 매우 성급하다. 이 비유를 자세히 읽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씨뿌리는 자는 씨가 떨어지는 땅을 고르지 않는다. 그저 씨를 뿌릴 뿐이다. 씨가 떨어지는 장소만 다르다. 떨어진 장소에 따라 씨의 운명이 달라진다. 길가에 떨어진 씨, 돌짝밭에 떨어진 씨, 아니면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각자 다른 운명을 경험한다. 이들 모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저마다의 다른 이유들 때문에.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다. 씨가 뿌려진 장소가 씨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내용이 바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이런 비유를 통해서 주어진 예수의 가르침이 그 뜻이 숨겨져 있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판단은 매우 성급하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특별한 해석을 붙이지 않아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라는 형식안에 충분한 설명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해석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씨가 이성(Mk 4:13 λγος)이고, 받아들이는 장소들이 사람들 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해석은 크로상이 우려한 것과는 반대로 어렵지 않다. 이 이성(λγος)을 듣고,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는 것은 좋은 땅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여러 다른 이유들 때문에. 크로상은 특별한 해석이 있어야 비유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취급하지만, 기실 비유의 뜻은 이미 비유안에 주어져 있다. 예수의 설명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비유의 해석

크로상에게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Mk 4:10-12이다.[28] 크로상은 바로 이 인용을 마가와 예수를 갈라놓는 지평으로 사용한다. 예수가 자신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τό μυστριον τς βασιλεας το θεο)이 주어졌는데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παραβολ)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Mk 4:11-12; Isa 6:9-10).[29]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 선언과 비유의 해석은 제자들의 질문에서 비롯된다 (Mk 4:10; Mk 7:17). 제자들에게만 비유의 해석을 해주는 예수를 크로상은 마가의 의도로 생각한다. 내부자와 외부자로 가르고 내부자에게만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비유의 해석”을 의미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누가의 편집성이 보여주는 마가의 의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과 “비유의 해석”이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밀(μυστριον)이란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한 번 쓰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번 사용되었으나, 그것이 비밀과 연관되어 사용된 것은 오로지 한 번이다.

 

예수는 일찍이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다고 선포하였고, 선포 후에 계속된 예수의 삶이 비밀에 해당된다(Mk 1:14-15).[30] 크로상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μυστριον)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크로상에게 비밀은 숨겨져 있는 것이다.[31] 크로상의 생각과는 달리 마가복음에서 비밀μυστριον)은 드러나기 위한 것(Mk 4:22 φανερν)이다. 등불을 가져다가 등경 위에 놓는 것(Mk 4:21), 땅에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는 것(Mk 4:26-29),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아래 깃들게 되는 것(Mk 4:31-32)이 비밀(μυστριον)이다. 따라서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남을 재면, 같은 방법으로 재어질 것이고 (Mk 4:24), 비밀을 가진 자는 비밀을 이해하지만, 그렇지 못한자는 이해가 불가능한(Mk 4:25) 것이다.

 

마가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다는 구절은 예수가 비유를 해석하는 기회를 만들어 줄 뿐이다. 비밀이란, 내부자에게만 주어졌다는 의미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외부자들에게 모든 것이 비유로 주어졌다는 말이 외부자와 내부자를 가르는 것으로 평가하면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외부자란,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의미하듯, 또는 마가복음 4 2절에서 분명히 했듯이 해석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르침(διδαχ)은 비유(παραβολ)라는 형식을 통해서 주어졌다. 비유의 해석을 예수로 부터 듣는 자들이 내부자가 아니라, 비유를 듣고 인정하고 열매맺는 사람들이 내부자가 되는 것이다(Mk 4:20). 따라서 마가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τό μυστριον τς βασιλεας το θεο)”은 “비유의 해석”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유를 해석 할 기회를 제공하며, 제자들의 아둔함을 걱정하는 예수를 드러낼 뿐이다 (Mk 4:10, 13).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불편한 진실을 삭제해 버린다 (Lk 8:11).

 

제자들의 아둔함

다시 언급하지만 비유란, 예수의 해석이 있어야 청자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에게 비유를 질문한 제자들의 아둔함이다 (Mk 4:13; 6:52; 8:17).[32] 크로상의 주장과는 반대로, 내부자인 제자들의 마음이 아둔함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갈릴리 이후 지속적으로 예수의 삶을 지켜본 제자들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엉뚱하다. 지적한 것처럼,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유들의 뜻을 예수에게 묻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크로상이 언급한 포도원의 비유(Mk 12:1-12)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의 포도원의 비유를 들은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향한 것을 인지하고 예수를 잡으려고 노력한다(Mk 12:12). 예수가 전혀 해석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비유와 연관해서 제자들의 아둔함이 좀더 극적으로 표현된 것은 역시 마가복음 7 18절이다. 예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정결법 논쟁을 마친 후, 제자들이 질문을 한다. 질문이 걸짝이다. 이 논쟁을 제자들은 비유로 여긴다 (Mk 7:17). 따라서 예수에게 묻는다. 이 비유의 뜻을! 예수의 대답 또한 걸짝이다. 너희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οτως κα μες σνετο στε;)? 비유만 나오면 아둔해지는 제자들이다. 마가복음 4 13절의 반복이다. 예수의 특별한 설명은 오로지 제자들을 위해서다. 크로상의 생각과는 달리 마가의 내부자는 외부자요, 외부자는 내부자가 된다. 내부자인 제자들은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요, 외부자들은 예수의 해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국, 크로상이 주장하는 마가의 의도와 예수의 의도는 사용될 수 없는 패러다임이다.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은 비유 뿐만이 아니다. 한 가지만 더 소개하면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빵(ρτος)에 대한 에피소드다. 5000명과 4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빵만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고민한다. 예수는 다시 그들의 아둔함을 탓한다. 그들은 인지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Mk 8:17, 21). 마가는 내부자인 제자들이 특별 대우를 받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의 특별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Mary Ann Tolbert은 그의 저서에서 제자들을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짝밭(π τ πετρδες)에 비유한다.[33] 예수의 부름을 듣고 처음에는 잘 따르나, 그것은 일시적이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뿌리가 없어 곧 결려 넘어지는 사람들이라 주장한다. 크로상이 제자들을  내부자 취급하는 것과는 정 반대다. 예수가 잡힌 후, 제자들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부언하지 않아도, 제자들이 내부자가 아니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누가의 비유 편집

이제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마가복음의 평행구를 어떻게 편집했는지를 살펴보자 (Mk 4:3-20 // Lk 8:4-15). 누가는 어떤 소스를 사용하던지 내용을 분명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그의 목적을 달성한다. 물론 누가의 목적은 마가의 목적과 크게 다르다. 마가복음 4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누가의 것과 비교하는 것으로 둘의 차이가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누가는 마가의 비유와 해석을 모두 편집한다. 먼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편집하여 자신이 원하는 해석이 가능하도록 비유를 편집하고, 해석 부분도 그에 맞추어 편집한다.

 

그러면 누가가 비유부분을 어떻게 편집하는지 살펴보자. 누가복음 8 5절에서 누가는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 “밟힌다”고 전한다. 마가복음에 없는 이 말을 삽입함으로서 씨가 길 위에 떨어진 것을 확실히 해두고자 한다. 누가는 또한 두번째 장소인 “돌짝밭”을 명사형으로(π τν πτραν) 고쳐놓는다(Lk 8:6). 네가지 장소들 중에서 마가는 유독 형용사형의 “돌짝밭(π τ πετρδες)”을  사용했는데,[34] 누가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네가지 모두 명사형으로 장소를 표현하여 통일해 버린다. 돌짝밭에 대해서 한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누가가 땅을 중요시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마가가 강조한 땅이 없음이나(που οκ εχεν γν πολλν Mk 4:5), 땅의 깊이가 없음을(δι τ μ χειν βθος γς Mk 4:5) 삭제한다 (Lk 8:6). 따라서 마가와 누가 모두 씨가 말라버린다는 결론에 도달하나, 그 원인은 달라진다. 마가에게 씨가 말라버린 이유는 뿌리가 없기 때문이지만 (δι τ μ χειν ῥίζαν Mk 4:6), 누가에게는 물기가 없기 때문이다(δι τ μ χειν κμδα Lk 8:6).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누가복음에서 세번째 장소인 가시덤불 속(ν μσ τν κανθν Lk 8:7)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맺는다.  마가복음에서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καρπν οκ δωκεν Mk 4:7), 누가복음에서는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나중에 누가는 마가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가한다. 누가는 해석 부분에서 열매가 완성되지 못한다고 전한다 (ο τελεσφοροσιν Lk 8:14). ,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제대로 열매를 성장시키지 못할 뿐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의 네번째 땅은, 크로상이 지적한 것처럼, 마가의 30 배와 60배를 생략하고 100만 남겨 두었다. 부정확하게 느껴진 마가의 표현을 바꿔놓은 것이다 (ποησεν καρπν κατονταπλασονα Lk 8:8).[35]

 

마가와 누가의 진정한 차이는 누가의 해석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Lk 8:8-15). 먼저 누가는 질문의 주체를 예수의 제자들로 (ο μαθητα ατο) 바꿔놓는다 (Lk 8:9). 마가복음에서 질문한 사람들은 열둘을 포함한 예수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다 (ο περ ατν σν τος δδεκα) (Mk 4:10). 불확실한 마가복음의 질문의 주체를 확실히 하기위해서 일 것이다. 질문의 내용도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누가의 제자들은 모든 비유들에 관해 질문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은 이미 이해했고, 이 비유만 확실하지 않아 의견을 듣고 싶을 뿐이다.[36] 만약 예수가 설명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다는 의미는 사라진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고, 씨뿌리는 자의 비유도 그저 예수의 생각을 들어보고자 하는것이다. 그 결과로 마가의 예수와는 달리 누가의 예수는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Mk 4:13 // Lk 8:11).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는 예수의 말을 누가가 생략해서 얻은 결과다. 제자들에 관대한 누가의 제자들 구하기다.[37]

 

마가복음 4 11절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부분인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열둘에게 이미 주어졌다고 예수가 선언한다. 누가의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τ μυστρια τς βασιλεας το θεο) 아는 것이 주어졌다고 (δδοται γνναι) 변형 시킨다 (Lk 8:10).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대신, 제자들의 이해력을 강조한다. 누가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후에 주어지는데, 바로 믿어서 구원 되는 것이다 (Lk 8:12). 이것이 바로 누가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 (το θεο)의 소유격을 이성 ( λγος) 뒤에 붙인 결과다 (Mk 4:14 // Lk 8:11). 하나님의 생각을 ( λγος το θεο)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는  이 비유를 해석해야 한다. 마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누가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론: 크로상의 문제점들

이 책에서 행한 크로상의 주장을 두개의 질문으로 대치될 수 있다. 복음서의 저자와 예수를 분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쉬운 질문 처럼 여겨진다. 복음서의 저자와 역사적 예수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마가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가 분리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마가적 예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질문은 누가가 마가보다 예수를 더 잘 이해했냐는 것이었다. 공관복음 문제를 통해서 분명해진 것은 누가가 마가보다 예수를 더 잘 이해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적 예수를 해석한 마가의 예수를 마태와 누가는 적대적 지평, 즉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재 해석했을 뿐이다. 누가의 예수가 마가의 예수보다 우등하다는 주장은 분명 크로상의 편견이다.

 

마가복음 4장을 분석함으로 분명해진 것은 마가와 예수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마가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크로상이 주장한 내부자와 외부자는 성립되지 않는다. 비유의 설명을 들었던 내부자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소유하지 못했다. 드러나는 것들이 비밀이라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비유의 설명을 할 수록 제자들은 아둔한 사람들이 되고 만다.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을 만들어 내는 자들이 바로 크로상이 주장하는 내부자들이다. 제자들의 철저한 실패는 예수가 잡힌 후에 일어난다. 크로상의 가정이 성립할 가능성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누가복음 8장이 보여주는 누가의 편집성은 마가와 예수를 분리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누가의 삶의 지평이 마가를 변형시키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누가가 마가를 편집함에 있어서, 누가가 마가를 이해하고 있었는지 조차도 분명치 않다. 만약 누가가 마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누가복음에 기댄 크로상의 기대는 불행한 선택이 되고 만다. 설령 누가가 마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가정해도, 2세기 초의 더욱 복잡해진 누가의 삶의 자리는 마가가 전하고 있는 순수한 예수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보다 제자를 구해야 하는 그의 삶의 자리는 예수를 보다 더 폼나게 서술하고 있어도 바울적 예수나, 마가적 예수와는 너무 멀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예수에 대한 아주 늦은 시대의 해석일 뿐이다.

 

크로상이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첫째, 기독교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공시적 (synchronic) 입장을 강요한 결과, 통시적 (diachronic) 분별력을 잃고 만 것이다. 이말은 어떤 발전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가 종교로 형성된 것을 무시하고, 마가, 마태, 그리고 누가를 공시적으로 모아놓고, 그 중 누가가 가장 현명했다거나, 그를 비교 우위에 둘 수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정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교리뿐이다. 오늘 날 기독교의 부작용이 바로 이 편협성에서 출발한다.

 

두번째 문제점은 유대적 영향이 강한 마태나 누가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재 해석하는데 있다. 어떤 종교를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 옳게 위치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앞서 언급한 편협성은 기독교를 특정 종교를 배경으로 출발했다고 강요한다. 크로상은 그레코-로만 문화를 배경으로 유대교와 대결 구도에서 시작된 기독교를 유대문화를 배경으로한 친 유대적인 기독교로 탈바꿈 시킨다. 크로상의 이런 행위는 앞에서 언급한 역사성을 무시하고, 후대 문서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오류를 선호하는 편파적 행위에서 기인한다.

 


 

Bibliography Cited

Allison, Dale C. The intertextual Jesus: scripture in Q. Harrisburg, Pa: TPI, 2000.

Brodie, Thomas L. The birthing of the New Testament: the intertextual development of the New Testament writings. New Testament monographs. Sheffield: Sheffield Phoenix Press, 2004.

Crossan, John Dominic. The Power of Parables: How Fiction by Jesus Became Fiction About Jesus. San Francisco: HarperOne, 2012.

Fleddermann, Harry T. Q: A Reconstruction and Commentary. Biblical tools and studies v. 1. Leuven; Dudley, MA: Peeters, 2005.

Goulder, M D. “Did Luke know any of the Pauline letters.” Perspectives in Religious Studies 13, no. 2 (Sum 1986): 97-112.

Hays, Richard B.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 Pr, 1993.

Jonge, Marinus de. Christology in Context: The Earliest Christian Response to Jesus. 1st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8.

Kloppenborg, John S. Excavating Q: The History and Setting of the Sayings Gospe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 The Formation of Q: Trajectories in Ancient Wisdom Collections. Studies in antiquity and Christianit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Koester, Helmut. “GNŌMAI DIAPHOROI : the origin and nature of diversification in the history of early Christianity.” Harvard Theological Review 58, no. 3 (July 1, 1965): 279-318.

Leppä, Heikki. Luke’s critical use of Galatians. Helsinki, 2002.

---. “Reading Galatians with and without the Book of Acts.” Pages 255-263 in The Intertextuality of the Epistles: Explorations of Theory and Practice. Sheffield Phoenix Press, 2006.

Leppä, Outi. The making of Colossians: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purpose of a Deutero-Pauline letter. Publications of the Finnish exegetical society. Helsinki;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3.

MacDonald, Dennis Ronald. Christianizing Homer: The Odyssey, Plato, and the Acts of Andrew.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 The Homeric Epics and the Gospel of Mark.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2000.

Marcus, Joel. “Mark-Interpreter of Paul.” New Testament Studies 46, no. 4 (October 1, 2000): 473-487.

Nelligan, Thomas P. “Exploring Mark’s Possible Literary Connection to the Epistles of Paul: Where to Start and how to Proceed”. Unpublished Paper, 2010.

O’Leary, Anne M. Matthew’s Judaization of Mark: Examined in the Context of the Use of Sources in Graeco-Roman Antiquity. Library of New Testament studies 323. London: T & T Clark, 2006.

Pervo, Richard I. Acts: A Commentary.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

---. Dating Acts: Between the Evangelists and the Apologists. Santa Rosa, CA: Polebridge Press, 2006.

---. “The Paul of Acts and the Paul of the letters: aspects of Luke as an interpreter of the corpus Paulinum.” Pages 141-155 in Reception of Paulinism in Acts. Walpole, MA: Peeters, 2009.

Riley, Gregory J. One Jesus, Many Christs: How Jesus Inspired Not One True Christianity, but Many: The Truth About Christian Origins. 1st ed.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97.

Sim, David C. “Matthew 7.21–23: Further Evidence of Its Anti-Pauline Perspective.” New Testament Studies 53, no. 03 (2007): 325-343.

Sim, David C. “Matthew’s anti-Paulinism: a neglected feature of Matthean studies.” Hervormde teologiese studies 58, no. 2 (June 2002): 766-783.

---. “Matthew’s use of Mark: did Matthew intend to supplement or to replace his primary source?” New Testament Studies 57, no. 2 (Ap 2011): 176-192.

The Critical Edition of Q: Synopsis Including the Gospels of Matthew and Luke, Mark, and Thomas with English,German, and French Translations of Q and Thomas. Leuven: Peeters, 2000.

Tolbert, Mary Ann. Sowing the Gospel: Mark’s World in Literary-Historical Perspectiv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Vielhauer, Philipp Adam Christoph. “On the ‘Paulinism’ of Acts.” Perkins School of Theology journal 17, no. 1 (Fall 1963): 5-18.

Walker, William O. “Acts and the Pauline corpus reconsidered.”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no. 24 (June 1, 1985): 3-23.

---. “Acts and the Pauline corpus revisited : Peter’s speech at the Jerusalem conference.” Pages 77-86 in Literary studies in Luke-Acts. Macon, Ga: Mercer Univ Pr, 1998.

 

 


 

Mark and Luke’s Parallels

 

 

Mark 4:3 κοετε.

δο ξλθεν σπερων σπεραι. 

4 κα γνετο ν τ σπερειν

μν πεσεν παρ τν δν,

 

κα λθεν τ πετειν κα κατφαγεν ατ. 

5 κα λλο πεσεν π τ πετρδες που οκ εχεν γν πολλν,

 

κα εθς ξαντειλεν δι τ μ χειν βθος γς· 

 

6 κα τε ντειλεν λιος καυματσθη

κα δι τ μ χειν ῥίζαν ξηρνθη. 

7 κα λλο πεσεν ες τς κνθας,

κα νβησαν α κανθαι

κα συνπνιξαν ατ,

κα καρπν οκ δωκεν. 

8 κα λλα πεσεν ες τν γν τν καλν

 

κα δδου καρπν ναβανοντα κα αξανμενα

κα φερεν ν τρικοντα κα ν ξκοντα κα ν κατν.

 

 9 κα λεγεν·

ς χει τα κοειν κουτω.

Luke 8:4 Συνιντος δ χλου πολλο κα τν κατ πλιν πιπορευομνων πρς ατν επεν δι παραβολς·

Luke 8:5

ξλθεν σπερων το σπεραι τν σπρον ατο.

κα ν τ σπερειν ατν

μν πεσεν παρ τν δν

κα κατεπατθη,

κα τ πετειν το ορανο κατφαγεν ατ.

6 κα τερον κατπεσεν π τν πτραν,

 

κα φυν

 

 

 

ξηρνθη δι τ μ χειν κμδα. 

7 κα τερον πεσεν ν μσ τν κανθν,

κα συμφυεσαι α κανθαι ππνιξαν ατ. 

 

 

8 κα τερον πεσεν ες τν γν τν γαθν

κα φυν

ποησεν καρπν κατονταπλασονα.

 

 

τατα λγων φνει·

χων τα κοειν κουτω.

 

Mark 4:10 Κα τε γνετο κατ μνας,

ρτων ατν ο περ ατν σν τος δδεκα τς παραβολς. 

11 κα λεγεν ατος·

μν τ μυστριον δδοται τς βασιλεας το θεο·

 

κενοις δ τος ξω ν παραβολας τ πντα γνεται,

 

12 να βλποντες βλπωσιν κα μ δωσιν,

 

κα κοοντες κοωσιν κα μ συνισιν,

 

μποτε πιστρψωσιν κα φεθ ατος.

Luke 8:9

πηρτων δ ατν ο μαθητα ατο τς ατη εη παραβολ. 

10 δ επεν·

μν δδοται γνναι τ μυστρια τς βασιλεας το θεο,

 

τος δ λοιπος ν παραβολας,

 

να βλποντες μ βλπωσιν

 

κα κοοντες μ συνισιν.

 

Mark 4:13 Κα λγει ατος·

οκ οδατε τν παραβολν τατην, κα πς πσας τς παραβολς γνσεσθε; 

14 σπερων τν λγον σπερει. 

15 οτοι δ εσιν ο παρ τν δν·

που σπερεται λγος κα ταν κοσωσιν,

εθς ρχεται σατανς

κα αρει τν λγον τν σπαρμνον ες ατος. 

 

16 κα οτο εσιν ο π τ πετρδη σπειρμενοι,

ο ταν κοσωσιν τν λγον εθς μετ χαρς λαμβνουσιν ατν, 

17 κα οκ χουσιν ῥίζαν ν αυτος λλ πρσκαιρο εσιν,

ετα γενομνης θλψεως διωγμο δι τν λγον εθς σκανδαλζονται. 

18 κα λλοι εσν ο ες τς κνθας σπειρμενοι·

οτο εσιν ο τν λγον κοσαντες, 

19 κα α μριμναι το αἰῶνος

κα πτη το πλοτου

κα α περ τ λοιπ πιθυμαι εσπορευμεναι συμπνγουσιν τν λγον

κα καρπος γνεται.

20 κα κενο εσιν ο π τν γν τν καλν σπαρντες, οτινες κοουσιν τν λγον

κα παραδχονται

κα καρποφοροσιν ν τρικοντα κα ν ξκοντα κα ν κατν.

Luke 8:11 στιν δ ατη παραβολ·

 

 

σπρος στν λγος το θεο.

12 ο δ παρ τν δν εσιν ο κοσαντες,

 

ετα ρχεται διβολος

κα αρει τν λγον π τς καρδας ατν,

να μ πιστεσαντες σωθσιν. 

13 ο δ π τς πτρας

ο ταν κοσωσιν μετ χαρς δχονται τν λγον,

 

κα οτοι ῥίζαν οκ χουσιν,

ο πρς καιρν πιστεουσιν

κα ν καιρ πειρασμο φστανται. 

 

14 τ δ ες τς κνθας πεσν,

οτο εσιν ο κοσαντες,

κα π μεριμνν

κα πλοτου

κα δονν το βου

πορευμενοι συμπνγονται

κα ο τελεσφοροσιν. 

15 τ δ ν τ καλ γ,

οτο εσιν οτινες ν καρδίᾳ καλ κα γαθ

κοσαντες τν λγον κατχουσιν

κα καρποφοροσιν ν πομον.

 



[1] 마가복음 4장에 비유를 모아놓은 것은 후대의 구분이다.

[2] John Dominic Crossan, The Power of Parables: How Fiction by Jesus Became Fiction About Jesus (San Francisco: HarperOne, 2012).

[3] 예수와 마가가 동시대 인이 아니기에 분리는 당연한 것처럼 여길 수 있으나, 뒤에 가서 분명해 지겠지만 크로상의 의도는 이런 맥락에 있지 않다.

[4] 주어진 글에서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데, 그는 역사적 예수와 마가적 예수를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 크로상이 분명히 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의도”에서 “예수”가 어떤 예수인가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예수의 의도”를 “역사적 예수”의 의도로 취급할 것이다.

[6]마가의 예수”란 마가복음에 그려진 인물(character)로서의 예수를 의미한다. 이글에서 마가적 예수와 동일하게 사용된다. 확장하면, 바울의 예수, 또는 바울적 예수도 같은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다.

[7] 예수 이사야를 직접 인용한다 (Mk 4:12).

[8] Marinus de Jonge, Christology in Context: The Earliest Christian Response to Jesus (1st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8); Gregory J Riley, One Jesus, Many Christs: How Jesus Inspired Not One True Christianity, but Many: The Truth About Christian Origins (1st ed.;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97).

[9] Riley 가 그의 저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 다양성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의 책 제목, 하나의 예수와 많은 그리스도 (One Jesus, Many Christs) 가 잘 보여주고 있다. Jonge 가 분석한 다양한 기독론의 존재도 동일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10] 이런 시도는 보수적인 학자들과 특히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연구자들에게 널리사용되는 방법론이다. 신약 문서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보다 통일성이 강조된다.

[11] 크로상 류의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연구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방법론을 의미한다.

[12] Harry T Fleddermann, Q: A Reconstruction and Commentary (Biblical tools and studies v. 1; Leuven; Dudley, MA: Peeters, 2005); John S Kloppenborg, The Formation of Q: Trajectories in Ancient Wisdom Collections (Studies in antiquity and Christianit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John S Kloppenborg, Excavating Q: The History and Setting of the Sayings Gospe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The Critical Edition of Q: Synopsis Including the Gospels of Matthew and Luke, Mark, and Thomas with English,German, and French Translations of Q and Thomas (Leuven: Peeters, 2000).

[13] 이 글에서 “마가의 예수 (as an implied character in the Gospel of Mark)”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다. Q문서가 전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협소한 인물(implied character)로서의 예수를 의미한다.

[14] Richard I Pervo, Dating Acts: Between the Evangelists and the Apologists (Santa Rosa, CA: Polebridge Press, 2006); Richard I Pervo, Acts: A Commentary,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 5. R. I. Pervo는 사도행전을 2세기 초반(115 C. E.)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15] Dennis Ronald MacDonald, The Homeric Epics and the Gospel of Mark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2000), 8; Dennis Ronald MacDonald, Christianizing Homer: The Odyssey, Plato, and the Acts of Andrew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302–316; Outi Leppä, The making of Colossians: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purpose of a Deutero-Pauline letter (Publications of the Finnish exegetical society; Helsinki;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3), 53–58; Thomas L. Brodie, The birthing of the New Testament: the intertextual development of the New Testament writings (New Testament monographs; Sheffield: Sheffield Phoenix Press, 2004), 43–49; Richard B.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 Pr, 1993), 29–32; Dale C Allison, The intertextual Jesus: scripture in Q (Harrisburg, Pa: TPI, 2000), 10–13; Anne M O’Leary, Matthew’s Judaization of Mark: Examined in the Context of the Use of Sources in Graeco-Roman Antiquity (Library of New Testament studies 323; London: T & T Clark, 2006), 19–23.

[16] Thomas P Nelligan, “Exploring Mark’s Possible Literary Connection to the Epistles of Paul: Where to Start and how to Proceed” (Unpublished Paper, 2010), 1.

[17] M D. Goulder, “Did Luke know any of the Pauline letters,” Perspectives in Religious Studies 13, no. 2 (Sum 1986): 97-112; William O. Walker, “Acts and the Pauline corpus reconsidered,”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no. 24 (June 1, 1985): 3-23; William O. Walker, “Acts and the Pauline corpus revisited : Peter’s speech at the Jerusalem conference,” in Literary studies in Luke-Acts (Macon, Ga: Mercer Univ Pr, 1998), 77-86.

[18] 특별히 성찬식 구절 (Mark 14:22-25 와 평행구들)을 분석한 학자들의 주장은 누가가 고린도 전서 11:23-26장을 사용했고 한다. 성서학자로서 두 구문을 비교해보면, 이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19] Mary Ann Tolbert, Sowing the Gospel (Minneapolis: Fortress, 1989). 현제 이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 footnote 페이지는 생략한다.

[20] 두사람의 관계를 바울의 측면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는 모든 정보를 정지시키고, 바울 서신들을 먼저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 후에 사도행전을 읽으면 두 문서의 관계를 정직하게 놓을 수 있다.

[21] Walker, “Acts and the Pauline corpus reconsidered.”

[22] Philipp Adam Christoph Vielhauer, “On the ‘Paulinism’ of Acts.,” Perkins School of Theology journal 17, no. 1 (Fall 1963): 5-18; Richard I. Pervo, “The Paul of Acts and the Paul of the letters: aspects of Luke as an interpreter of the corpus Paulinum,” in Reception of Paulinism in Acts (Walpole, MA: Peeters, 2009), 141-155; Heikki Leppä, Luke’s critical use of Galatians (Helsinki, 2002); Heikki Leppä, “Reading Galatians with and without the Book of Acts,” in The Intertextuality of the Epistles: Explorations of Theory and Practice (Sheffield Phoenix Press, 2006), 255-263.

[23] Pervo, “The Paul of Acts and the Paul of the letters.”

[24] Joel Marcus, “Mark-Interpreter of Paul,” New Testament Studies 46, no. 4 (October 1, 2000): 473-487; Helmut Koester, “GNŌMAI DIAPHOROI : the origin and nature of diversification in the history of early Christianity.,” Harvard Theological Review 58, no. 3 (July 1, 1965): 279-318. Marcus가 지적한 것처럼 이 제목은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Mark as the interpreter of Peter)였다는 Papias의 주장에 기인한다 (Eusebius, E.H. 3-39.15). Koester 는 일반적으로 마가의 복음을 바울적이라 생각한다 (p. 313). 

[25] Brodie, The birthing of the New Testament, 189–195.

[26] David C. Sim, “Matthew’s use of Mark: did Matthew intend to supplement or to replace his primary source?,” New Testament Studies 57, no. 2 (Ap 2011): 176-192; David C. Sim, “Matthew’s anti-Paulinism: a neglected feature of Matthean studies,” Hervormde teologiese studies 58, no. 2 (June 2002): 766-783; DAVID C. SIM, “Matthew 7.21–23: Further Evidence of Its Anti-Pauline Perspective,” New Testament Studies 53, no. 03 (2007): 325-343.

[27] 누가가 반영하는 큐(Q)를 편집하는 성향도 누가복음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대변한다. 

[28]

Mark 4:12 12 να

βλποντες βλπωσιν κα μ δωσιν,

κα κοοντες κοωσιν κα μ συνισιν,

 

 

 

μποτε

 

 

πιστρψωσιν

 

κα φεθ ατος.

Is. 6:9 κα επεν Πορεθητι κα επν τ λα τοτ

κο κοσετε κα ο μ συντε

κα βλποντες βλψετε κα ο μ δητε·

10 παχνθη γρ καρδα το λαο τοτου,

κα τος σν ατν βαρως κουσαν

κα τος φθαλμος ατν κμμυσαν,

μποτε δωσιν τος φθαλμος

κα τος σν κοσωσιν

κα τ καρδίᾳ συνσιν

κα πιστρψωσιν

κα ἰάσομαι ατος.

위 예가 보여주듯이, 신약은 헬라어로 번역된 희브리 성서, 즉 칠십인역(LXX)을 인용한다. 희브리 언어로 된 희브리 성서가 아니다.

[29]왜 마가는 4:12에서 이사야 6:9-10을 인용하는가? 보거나 듣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용서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 자신의 말로 썼으면 됐을 것이다. 자신의 말로 쓰는 것과 인용하는 것이 동일한 효과를 낸다면, 인용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마가가 예수의 입을 통해서 이사야 6:9-10을 인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서신이나 복음서에서 인용된 LXX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지식이 필요하다. 헬라적 유대교에 대한 선지식이 없다면, 인용은 문자적 의미 이외에 아무런 뜻도 전달하지 못한다. 독자의 배경에 따라 인용된 LXX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마가의 이사야 인용은 반 유대적이거나, 또는 LXX의 선지식을 가진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의 이사야 인용은 이 인용을 이해할 수 있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한 것이다.

[30] γγικεν βασιλεα το θεο (Mk 1:15); 여기서도 사용된 동사는 완료형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고 해석되는 것이 옮다. 

[31]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정체성은 바로 이 비밀에 속한다. 숨겨진 것(πκρυφον)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φανερν)이다. 예수의 정체성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바로 씨앗(λγος)이다. 이 드러난 예수의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드러난 정체성, 즉 씨앗이 떨어진 땅을 분별하는 기능이 더 중요하다.

[32]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은κατ μνας or κατ᾿ δαν 가 사용되었다(4:10, 34; 9:28; 10:10).

[33] Mary Ann Tolbert, Sowing the Gospel: Mark’s World in Literary-Historical Perspectiv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34] 마가가 형용사를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한 의도를 누가가 이해했었는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35] 이부분의 해석은 쉽지 않다. 누가의 편집이 보여주는 것을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누가가 마가를 이해하지 못 했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마가의 의도를 이해했음에도 자신의 삶의 자리가 편집을 주도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6] Luke 8:9 τς ατη εη παραβολ. 여기서 사용된 동사(εμ)optative이다.

[37] 누가의 제자들(ο μαθητα) 구하기는 여기서 끊나지 않는다. 예수가 붙잡힌 후, 도망친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밖힐 때, 멀리서 사람들과 함께 구경한다(Lk 23:48). 누가는 마가의 제자들과 전혀 다른 제자상을 그리고 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환경소식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숨 쉬기 어렵게 된다/ 화석연료산업 제어방법 7 한기연 2019.08.28 64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의 파격적인 가르침들은 어떤 경험들에서 생겨났을까? 1 한기연 2019.08.01 113
공지 조직신학 예수초청장/참새예수 - 홍정수 박사의 조직신학교실 (동영상) 5 한기연 2019.07.15 88
공지 조직신학 홍정수 박사 신학특강(동영상) 1 한기연 2019.06.06 105
공지 조직신학 절룩거리는 그리스도 / 카릴 하우스랜더 2 한기연 2019.05.18 117
공지 가정사회소식 양육강식하는 식인사회의 킬링필드 /김훈 9 한기연 2019.05.11 67
공지 기독교윤리 우리 인류의 '마지막 싸움' / 신영전 24 한기연 2019.01.14 145
공지 가정사회소식 남성, 여성 아닌 제3의 성(간성) 3 한기연 2019.01.11 258
공지 교회사 웨슬리 [표준설교 정신] 이어 받은 기도문들 52개 pdf파일 file 한기연 2018.11.22 391
공지 조직신학 아우슈비츠에서의 하느님의 여성적 얼굴 1 file 한기연 2018.08.18 1251
공지 기독교윤리 빨간 지구 - 온실가스 시한폭탄에 이미 불이 붙었다 36 file 한기연 2018.08.17 250
공지 기독교윤리 벌레들의 나라,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기독교 파시즘의 망령 38 file 한기연 2018.06.30 359
공지 가정사회소식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남성의 탄생 8 한기연 2018.04.19 248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2010) pdf파일 9 file 한기연 2017.12.04 10397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 (2012)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23 10583
공지 기독교윤리 <생태계의 위기와 기독교의 대응>(2000)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10 11606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변화와 생태신학의 과제 (2017) 30 file 한기연 2017.11.04 12119
공지 가정사회소식 노령화: 남은 시간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장덕진 10 file 한기연 2016.04.26 19194
공지 역사적 예수 기후변화와 대멸종 시대의 예수의 복음 5 file 한기연 2015.11.12 18976
공지 기독교윤리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신학적 의미와 사목 과제 15 file 한기연 2015.10.06 21204
공지 역사적 예수 홍정수 박사가 말하는 예수 르네상스 (강의 동영상) 한기연 2015.04.01 25598
공지 기독교윤리 세월호참사 -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 133 file 한기연 2014.04.18 37948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생태대를 향한 출애굽 - 녹색의 세계관과 생태주의 인문학 아카데미 29 file 한기연 2013.11.12 33980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 시대의 교회의 역할 17 file 한기연 2013.08.24 34493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예수 살기 / 하늘이 낸 참사람들 11 file 한기연 2013.03.13 34373
공지 기독교윤리 엘리 위젤, <하나님에 대한 재판> 서평 1 file 한기연 2012.07.12 6758
공지 기독교윤리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한국 교회의 평화운동 자료 33 한기연 2012.04.24 57346
공지 조직신학 하나님이 계시냐고요 / 담임선생님 예수 / 홍정수 4 한기연 2012.04.11 89422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와 대멸종 시대에도 하나님은 전능하며 예수는 구세주이며 교회는 거룩한가 / 김준우 31 file 한기연 2011.12.12 97633
공지 역사적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 / 김준우 12 file 한기연 2011.10.23 62250
공지 조직신학 나의 종교경험 -> 나의 복음 -> 나의 신학을 일관성 있게 한 마디로 정리하기 4 한기연 2011.08.21 124945
공지 실천신학 대안교회의 가능성 / 한성수 1 file 한기연 2011.08.02 128851
공지 기독교윤리 핵위험 사회 치닫는 대한민국 1 73 한기연 2011.03.28 174293
공지 조직신학 감리교 종교재판의 전말/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6 file 한기연 2010.11.22 141936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담론의 종교문화사적 의미 / 김준우 4 file 한기연 2010.11.14 145029
공지 역사적 예수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7 한기연 2010.10.28 129303
공지 기독교윤리 2015년까지 모든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라! 14 file 한기연 2010.10.02 165938
공지 조직신학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2 한기연 2010.04.12 155422
공지 조직신학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1 한기연 2010.03.29 144960
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한기연 2010.03.27 150429
공지 역사적 예수 김기석의 종횡서해 <첫번째 바울의 복음> 한기연 2010.03.18 6855
공지 역사적 예수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5 한기연 2010.02.24 153703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홍정수 13 file 한기연 2010.02.19 168032
공지 기독교윤리 두달만에 - 북극 지역 빙하의 크기 변화 2009/9 22 한기연 2009.09.19 182332
공지 가정사회소식 소득 5분위 배율 비교 25 file 한기연 2009.09.13 182895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 읽는 순서 추천 4 file 한기연 2008.12.03 179174
공지 기독교윤리 세계/교회/신학의 물적 토대 - 신학의 출발점 9 file 한기연 2008.09.01 180428
공지 북극해의 해빙 속도와 기후변화, 한반도 가뭄과 사막화 위기 19 file 한기연 2008.05.14 201516
공지 역사적 예수 교회개혁을 위한 25개 신학논제 - 김준우 5 한기연 2007.10.20 182188
공지 실천신학 목사 개(dog)론 / 축도유감 /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 / 한성수 3 한기연 2004.08.30 146557
공지 실천신학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성만찬/ 혼인주례자 상담체크 리스트 1 file 한기연 2003.09.30 29479
135 역사적 예수 난징과 오키나와, 제주와 광주 2 한기연 2018.06.01 113
134 역사적 예수 제본을 든든하게 1 file 느림보 2016.07.14 3284
133 역사적 예수 한상균 그리스도 / 김인국 2 한기연 2015.12.19 4293
132 역사적 예수 평신도의 모험 / 애도, 기억, 저항 / 정경일 3 한기연 2013.11.05 4109
131 역사적 예수 하느님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 / 박경미 교수 1 한기연 2012.12.25 5634
130 역사적 예수 우주론적 삼위일체와 인간의 운명 / 김준우 2 한기연 2012.10.22 6783
» 역사적 예수 마가가 예수를 오해했는가? / 이덕주 한기연 2012.02.13 9505
128 역사적 예수 지구촌과 한국사회 병든 현실을 치유하기 위한 생명과 평화 담론 / 김경재 교수 1 file 한기연 2011.02.04 14111
127 역사적 예수 나는 왜 아직도 기독교인인가? / 김준우 1 한기연 2011.01.29 12614
126 역사적 예수 예수 부활의 유대적 성격 / 크로산 한기연 2010.11.19 10102
125 역사적 예수 기적은 하늘로부터가 아니라 / 김준우 file 한기연 2010.11.15 10077
124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아직도 충분히 알 수 없는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가? / 김준우 한기연 2010.11.15 9583
123 역사적 예수 Future of Chrsitianity / Bishop Spong 강연 동영상 한기연 2010.10.16 896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