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K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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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목사라는 사람이 금란교회를 감리교 최대 교회로 성장시킨 이후에 정말로 감독회장이 되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무엇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나중에 만천하에 드러난 배 모 여인과의 관계처럼 정말로 무슨 큰 비밀을 서둘러 덮어야만 했는지, 그 복잡한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 변선환 학장과 포스트모던 신학을 소개한 홍정수 교수에 대해 종교재판을 꾸미기 시작한 1991년, 한국 사회는 강경대 군 사망 사건 이후 소위 "분신정국"이었다. 광주학살을 주도한 군부세력이 3당 합당으로 권력을 대물림할 음모를 꾸몄고 대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으며, 공권력은 무자비했다. 경찰에 맞아죽고 분신한 대학생들만 열 명이 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10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7241557001&code=940301

 

김홍도 목사는 1991년 말에 미국 뉴욕 뉴저지지방 연합부흥회(뉴브룬스윅 교회)에 강사로 와서 "한국의 대학생들이 분신을 통해 최후발악을 하고 있다"고 떠들었다. 강기훈 씨 유서대필 사건조작도 이런 정치공작 시대의 산물이었으며, 감리교 종교재판도 이처럼 험난한 역사 속에서 하늘의 뜻을 헤아리던 신학자 두 사람을  "통일교 비호자"로 몰아 출교시킨 교권주의자들의 공작이었다. (신학자에게 통일교 비호자라는 누명을 덮어씌우는 것은 빨갱이로 모는 것과 같다). 

 

결국 한국교회는 광주 항쟁 이후, 아니 일제 시대와 제주 4.3 사태와 한국전쟁 이후 그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의 신학적 의미를 밝힌 홍정수 교수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부흥사가 신학자를 상대로 하여 신학/교리적으로 기소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어느 졸업생(그는 곧바로 금란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의 거짓 제보에 기초하여 감신대의 몇몇 교수들과 공모하여 "통일교 비호자"라고 증거를 조작해서 출교시킴으로써, 역사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배우기를 거부했다. 교리수호대책위원회라는 고발자 집단이 재판위원 15명 가운데 13명을 차지한 상태였으니 더 이상 무슨 시시비비를 기대할 수 있으랴.

 

오랜 악몽과 같은 세월,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참으로 끔찍한 일이 감리교단과 감신대 안에서 벌어졌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종교재판의 진상은  홍정수 교수가 발표한 <포스트모던 예수: 감리교회 종교재판의 진상>(조명문화사, 1992, 98쪽)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온라인 서점에서 전자책으로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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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01.jpg 그러나 1992년 5월 7일, 김홍도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광림교회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서울연회 재판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에 대해 출교를 결정한 후, 홍 교수가 김홍도 목사와 유상렬 장로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소위 "예수 피, 개/돼지 피 주장")으로 고발하자, 피고인들은 출교 결정에서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한 "대학원위원회보고서"라는 비밀문서를 재판부에 제출했고, 홍 교수는 1993년 6월 1일, 처음으로 그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문서들이 비밀문서인 이유는 공식적인 문서에 반드시 필요한 문서 작성자나 문서 발송자의 도장이나 서명, 연회재판위원회의 공문서 접수자 도장과 접수 시간 도장 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홍 교수는 비록 출교되었다 해도 사립학교법에 의해 교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새로 학장이 된 K 학장은 1993년 가을까지 두 차례 징계위원회를 열어 홍 교수에 대한 파면을 결의했으며, 교육부 교원징계 재심위원회는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두 차례 모두 파면을 취소하자, K 학장은 3차 징계위원회를 구성했다.

따라서 종교재판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던 대학원위원회보고서를 기록한 위원회 서기 B 교수에게 구두사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부득이 1993년 10월 13일, 홍 교수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의 결정적인 위증문서 <대학원위원회보고서>의 음해조작 과정"(최종본은 A4 용지 23장)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당일 오후부터 수업을 거부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며, 석 달 넘게 투쟁을 계속했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사과도 없었다. 당시 고생을 많이 했던 학생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다. 1994년도 가을에도 학내사태가 발생하여 결국 전교생이 한 한기 유급하게 된 것은 종교재판 문제와 직접 관련된 학내사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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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통일교 간부 Y을 홍정수 교수가 비호했다는 허위 사실(홍 교수는 Y가 통일교 간부라는 제보를 받고 대학원 교무처에 통보했으며, Y의 졸업논문 심사를 거부함으로써, Y는 교수 두 사람만의 논문 심사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제보자 L은 당시 학부 2학년 학생으로서 목격했다는 것을 3년이 지난 뒤에 3년 전 "대학원 과장"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서 증언했다는 게 과연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홍 교수에게 제보했다는 증언을 "대학원 과장" 홍 교수에게 제보한 것으로 악의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또한 소위 대학원위원회에 참석했다는 교수들 역시 홍 교수가 3년 전 당시 "대학원 과장"으로서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몰아붙였고, 홍 교수는 마치 이것을 자인한 것처럼 꾸며져 있다.

 

그러나 총장이 발행하여 위조하지 못하도록 스카치테이프까지 붙여서 떼어준 보직경력확인서(별첨자료 4)는 1987년이건 1988년이건 홍 교수는 대학원 과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당시 대학원 과장은 Y 교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감신대의 몇몇 선배 교수들은 학적부만 들쳐보아도 금방 들통이 나고 말 끔찍한 짓들을 벌였고, 이런 음해조작문서를 비밀리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 넘겼으며, 재판위원회는 당사자에게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출교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위증자들은 어느 누구도 구두사과조차 거부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학원위원회 보고서는 감신대 몇몇 선배교수들이 허위사실에 입각해 음해조작한 문서이며, 이를 근거로 작성된 기소장에 의해  홍 교수는 "통일교 비호자"로 출교되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결정적인 위증문서를 만들기로 작정했을까? 또한 누가 이런 음해조작 문서를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 넘겨주었을까? 어쨌건 통일교에 대한 비판적 논문까지 발표한 홍 교수를 "통일교 비호자"라는 누명을 씌워 출교시키기 위한 허위 문서를 조작하고 결국 출교시킨 후에,  1년 4개월이 지나 <대학원위원회 보고서의 음해조작과정>을 통해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홍 교수에 대한 3차 파면까지 밀어붙인 자들은 참으로 잔인한 선배 교수들/목사들이었다.

 

그 선배교수들은 오랫동안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홍정수 교수가 서울연회에서 출교당하고 이어서 감신대에서조차 파면될 당시, 홍 교수의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그들은 촉망받는 후배 신학자를 이렇게 생매장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까지 홍정수 교수가 발표한 책들은 <감리교 교리와 신학>(1989), <다종교와 기독론>(1990), <베짜는 하느님>(1991), 그리고 <상생신학: 한국신학의 새 패러다임>(1992)이었다. 그 밖에 세계신학연구원이 발행한 책들은 <좌우분열 속의 치유신앙>(1989), 홍현설의 <기독교 후기에 산다>(1990), 프레데릭 번햄의 <포스트모던 신학>(1990), 존 캅의 <종교다원주의와 오직 예수>(1992), <읽을거리: 포스트모던 신학>(1993), 존 캅의 <제니퍼를 위한 기도>(1993) 등이 있다.

 

박정희를 비롯하여 이명박,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독재권력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재일교포 유학생들과 납북 어부들처럼 한국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을 고문하여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 피해자들 대다수가 40년 세월이 지나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은 한 마디 사과조차 하지 않았듯이, 종교재판을 조작한 목사들/교수들 역시 전혀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도 교회도 크게 변하지 않은 거 같다. 특히 신학교는 날이 갈수록 학생들은 줄어들고, 일부 교수들은 더욱 비겁해지고 몰상식한 이사들의 눈치 보기에 바쁜 모습이다.

 

좌우간 1992년 종교재판 과정에서 "통일교 비호자"를 조작함으로써 출교판결의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한 "대학원위원회보고서"라는 위조비밀문서를 조작한 것은 신학교의 선배 보직교수들이었다. 그  조잡한 문서가 비밀리에 작성되고 또한 비밀리에 재판위원회에 전달될 당시 학장은  P 학장이었다(OMG!). 군대에서조차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부대 지휘관이 모든 책임을 떠 안고 후배 장교들을 보호하는 일이 보통이지만, 감신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발생한 것인가?

 

출교결정을 내린 서울연회 감독은 나원용 감독이었다. 그 후 새로 학장이 된  K 교수는 백주년기념관 건립을 위해 김홍도 목사로부터 돈을 받아내기 위해 사립학교법에 의해 보호받는 홍 교수를 축출할 징계위원회를 세 차례 열어 결국 파면시켰다. 상당수 교수들이 학장의 지시에 따라 매번 징계위원회에서 파면을 결의했다. 결국 신학교에서 동료 교수를 죽이기 위해 떼거리로 달려들어 물어뜯은 것은 외톨이가 된 자를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하이에나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학장의 지시에 따라 징계위원이 된 교수들 명단은 밝히지 않겠지만, 아무도 징계위원직을 사퇴하지 않았고, 학장에게 저항하여 학살을 막지도 않았다). 동료 교수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동료 교수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출교시킨 후 집요하게 공격하여 끝내 파면시킴으로써 확인사살까지 하는 짓들은  코끼리나 박쥐들도 결코 하지 않는 짓이다.

 

심지어 당시 학장을 비롯해서 보직교수들이 경찰과 검찰 앞에서 홍정수 교수가 통일교 비호자인 것은 그가 세운 연구소 이름이 "세계신학연구원"처럼 통일교의 "세계일보"와 비슷하며, 그가 발행하는 신학잡지 이름이 "한몸"이었다가 "세계의 신학"(Worldly Theology)으로 바뀐 것은 통일교의 피가름을 통한 한몸의 구원론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전문적인 신학자들처럼 떠들어 결국에는 학교에서도 쫓아냈다.(감신대 학술잡지 이름이 <세계와 신학>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교수들이 세계라는 단어를 통일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김홍도 목사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소위 "예수 피 개 피")을 동부지청 이충* 검사 앞에서 인정하고, 한 시간 가까이 살려달라고 빌자, 홍 교수는 선배목사를 기소하여 또 다시 교단이 손가락질 당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적 차원에서 고소를 취하하고 합의각서를 작성했다. 그 후 보름 정도 지나서 김홍도 목사는 종교재판을 조작하여 홍 교수를 출교시킨 것에 대한 죄값으로 금란교회 재정담당이라는 정찬* 장로를 통해 8,000만원을 주택은행 자기앞수표로 지불했는데(물론 그에게 영수증을 끊어주었다), 그 최소한의 죄값을 받은 것이 "교수품위손상"에 해당한다며 교육부까지 학교 손을 들어주었다. 홍 교수는 고소를 취하하면서, 또한 그 이후에도 결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수 억 원을 지불하여 중앙일간지에 최소 6회, 교계신문에 최소 11회에 걸쳐 5단 광고를 통해 흑색선전("홍정수 교수는 예수 피를 개/돼지 피라고 썼다")을 유포함으로써 신학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가해자로부터 돈으로 배상받은 것이 설령 교수품위손상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1개월 근신이나 감봉이 아니라 파면이었다. 신학교 보직교수들과 교육부가 한 통속이었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였고 그만큼 교회 장로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의 눈치를 보던 때였다.

 

홍 교수는 왜 그토록 동료교수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으며 목회자들 사이에서 괘씸죄에 걸린 것일까? 동정녀 탄생과 육체 부활에 관한 그의 정직한 신학과 직설적인 말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집단에나 대다수는 누이좋고 매부좋고 식으로 그냥 적당히 넘어가지만, 원칙에서 벗어나면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 있게 마련이다. 신학교 안에서도 학장과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교수회의에서 원칙을 강조하며 판단력이 빠른 홍 교수를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생동안 십자가의 원수사랑과 화해를 입에 달고 사는 신학교 교수들이 홍 교수를 통일교 비호자로 몰아서 출교시키고 끝끝내 파면시킨 데에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싫은 사람에 대해 그냥 용납하거나 인정하거나 보듬어 안을 생각을 하지 않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쫓아낸 데에는 그의 삶의 방식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무의식이 작동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교수들처럼 대한민국 상위 1%의 연봉을 받아 아파트 평수 늘리는 대신에 그는 교수 근속 10년 표창패를 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13평짜리 연립주택에 살면서도 자비를 들여 동녘교회를 개척했고 세계신학연구원을 만들어 신학잡지(계간 발행이었다) 운동을 벌이고 많은 단행본들을 출판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삶의 방식과 다른 그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통일교 돈을 받으니까 저렇게 엄청난 돈이 드는 일들을 할 것이라고 의심하다가, 결국에는 그 의심을 누명으로 덮어 씌움으로써 자신들의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을 정당화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책을 발행하려면 인쇄소에서 문선공들이 활자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조판을 한 후, 교정작업을 거쳐 보통 활판인쇄를 해야만 했기에 출판비가 매우 비쌌지만,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된 이후에는 컴퓨터로 직접 편집작업을 한 후, 인쇄소에 파일을 넘겨주면 되었기 때문에, 출판비용이 훨씬 줄어들었다). 

 

감신대 교수단 내의 이런 알력과 질시가 시작된 것이 특히 1980년대 이후 특정 교수를 중심으로 한 미국 유학파와 독일 유학파 사이의 알력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인간 관계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음해문서를 조작할 정도로 집단적인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권력과 돈 맛에 취하면 흔히 정신이 마비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기 십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해방 전후의 혼란기, 한국전쟁, 독재정권을 겪는 동안,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후배 신학자를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해서 통일교 비호자로 모함해서 생매장시킨 것은 그들이 교수/목사가 되기까지 에고가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팽창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복음조차 그들이 평생 겪게 된 깊은 심리적 상처들과 그림자들을 결코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후 세대들조차 권력이 저지르는 불의와 부조리에 순응하게 된 이유는 집단 내에서 복종을 거부할 때 치러야 할 대가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복종과 침묵을 통해 자기 이익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홍도 목사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값을 돈 8000만 원으로 지불했지만, 신학교 선후배 교수들/목사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감리교단이 20여 년이 지나도록 종교재판이 명백한 조작극이었으며 학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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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홍 교수는 한국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로 가서, 그레고리 라일리 교수와 같은 신약학 교수들로부터  "예수세미나"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되어,  한국기독교연구소(세계신학연구원을 개편한 연구소)를 통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서들을 처음 소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홍 교수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아름교회를 개척하여 10년 가까이 목회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목회자 재교육을 위해 "갈릴리 신학대학원"을 세워 주정부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또한 "예수목회세미나"를 미국과 한국에서 해마다 개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07698.html

 

 

다음의 글은 종교재판의 도화선이 된 홍정수 교수의 신앙고백이었다.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1991. 3. 30. [크리스챤신문]에 기고한 홍정수의 부활절 "설교" -- 이 글은 91-92년도 감리교 "종교재판"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그는 이 글과 그의 저서 {베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단자"로 파문당하였다. 그는 당시 80년대 한국의 젊은 죽음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급히 썼다. 
 
 
1. 서울의 강북에서 한강을 건너가면, 우리 나라 최고의 명당 자리에 이름하여 '국립묘지'가 있다. 독재자 박정희 장군의 묘지도 그 한가운데 있으며, 그 후예들의 묘지도 내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발밑으로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크고 작은 우리 시대의 영웅적 전사들이 '말없이' 누워 '눈을 감고' 있다. 아마 이것을 보고 누군가가 말했던 모양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참으로 고귀한 삶을 살다간 무명의 병사들도 더러는 거기에 누워, 잠들고 있다. 
독일주재 한국 대사관 직원 하나가 얼마 전 갑자기 그 직을 사임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갔다. "저게 뭐요?" "아, 제가 6.25 때 너무나 용감히 싸웠다고 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달아준 훈장들이랍니다." "그래요?" "왜 놀라십니까?" "우리 독일 사람들은 서로를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기 때문이랍니다. 설사 그런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을 역사 앞에서 참회했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훈장을 달아주지는 않았을거예요."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민만 가지 않았다면 그 직원도 아마 동작동에 묻힐 수 있었을텐데....... 
 
2. 얼마 전에 한국 교회들의 장례식 예문집을 들춰보았다({세계의 신학} 7호). 아니나 다를까, 그것들은 이교도들의 장례식 예문과 다를 바 없었다. 세계적인 칼빈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가 만일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과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교의학 개요})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따라서 바르트식으로 말하면, 한국 교회의 장례식 예문들 속에 나타나 있는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예문집들은 하나같이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동시에 믿고 있기 때문이다({세계의 신학} 10호 참조). 즉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낙원'이나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 이것은 바로 헬라적 신앙이다. 부활 없이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고 하는 구원의 종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모자라는지 하나님과 함께 있던 영혼은 공중이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낡은 옷과 같은 '육체'를 덧입게 되는, 소위 '부활'을 또한 믿는다. 이 두 신앙은 엄연히 서로 다른 두 체계의 신앙인데, 우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둘을 동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인간이 죽어 그 영혼이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를 누리게 된다면, 그것으로서 기독교적 구원은 완성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인간의 편에서 말하면, 임마누엘- 그것 외에 그 무엇이 더 있어야 인간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불신앙이다. 마치 선물을 들고 오는 아빠보다는 선물이 더 좋은 철부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신앙이라고나 할까.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불로장생을 더 바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신앙을 가리켜 이교도적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이런 신앙이야말로 무신론적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한국 교회는 부활에 관한 한 무신론자들이다. 
이같은 무신론적, 이교적 부활 신앙은 한국 교회만의 혼란은 물론 아니다. 가톨릭 신학자 발터 카스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부활 증언에 대한 해석학적 토론(의미 규정)이 별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주로 신앙의 증언을 단순하게 반복해서 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였다"({예수 그리스도}). 즉 기독교는 '그냥' 믿고 전해 주었을 뿐, 부활의 메시지를 알아들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태만은 교회의 설교자들과 일반 신도들로 하여금 부활의 메시지를 제멋대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우리는 부활의 메세지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믿어왔다. 용감하게도.... 
 
3. 최근의 신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독교가 이렇게 큰 혼란에 빠져 있었던 사실의 배경에는 성서의 언어 세계에 대한 무지가 깃들어 있다. 성서의 언어 세계는 헬라 문화의 언어와 다를 뿐 아니라, 17세기 이후의 지구인들을 지배해 왔던 과학적 사고 방식(모더니즘)과도 현저히 다르다. 이러한 반성을 신학의 초점으로 삼고 있는 신학을 소위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한다. 포스트모던 신학의 지적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성서의 언어 세계가 뜻밖에도 한국인의 일상적 언어 세계와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그같은 전제에서 예수의 부활 신앙과 또 한국인들을 향한 그의 부활 사건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자. 
 
4. 예수의 언어 세계의 골격이 유태민족사일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페르샤 문화와 헬라 문화에 의하여 오염된 세계에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유태인이었다. 아니 그는 그 민족을 의식하며 살았고, 또한 목회했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페르샤적 껍데기와 헬라적 탈을 예수와 그 제자들의 진정한 메시지로 혼동하는 일을 피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절 메시지를 오늘의 한국인들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의 하나는 동작동과 망월동을 함께 생각하면서 그것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5. 우리 시대의 의인들, 충신들은 지금 동작동에 묻혀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죄인들, 역적들은 대부분 망월동에 묻혀 있다. 그런데 동작동 부근에 가면 "정숙"이라고 하는 대형 경고판이 붙어 있다. 어르신네들의 영원한 쉼을 혹시라도 방해할까 걱정을 해서이다. 그런데 망월동에도 그런 표지판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는 당신들이 말하는 곳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기에 아직도 눈감지 못하고 있는,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저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하는 뜻으로 말이다. 
이 두 공동묘지를 나란히 두고 성서의 부활 사건 이야기를 읽으면 그 의미는 이렇게 분명해진다.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 묻혀 있던 죄인, 역적 하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역사 속으로 되돌아 오게 된 사건"이요, 또한 천지개벽의 시작이었다. 즉 이미 영원한 쉼을 쉬고 있던 자들 중의 하나가 징그럽게도 무덤을 박차고 되살아난 사건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임금이 역적과 죄인이라고 처형해 버린 불의한 자들, 곧 망월동에 묻혀 있던 자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난 사건"이다. 이것은 썩다가 만 한 인간의 부활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시작을 뜻한다. 이것을 어렵게 말해서 "종말적 사건"이라고 한다. 현존의 정치 질서, 곧 각종 구조적 갈등과 민족적 분단의 세계를 정의로운 세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몸으로, 삶으로 저항하다가 그들에 의하여 고문당하고 죽어갔던 한 청년이 하나님에 의하여 되살아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처형한 그 죄인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을 심판할 새로운 정의로서 확정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서 시작되어 동작동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망월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시작과 완성(재림)의 중간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6. 이렇게 놓고 볼 때, 우리는 부활 사건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예수의 제자들과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사명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부활의 소식은 제자들에게 기쁨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였다(눅 24:38, 막 16:11). 왜? 왜 자기들의 스승의 부활이 불안과 공포가 되었겠는가? 이 비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부활절 메시지는 완전히 이교도적인 설교가 될 것이다. 부활이 인간의 무궁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 특히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 동작동의 사람들,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는 부자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정의의 회복)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부활한 사람이 바로 우리 모두가 역적이요 반역자라고 죽여버린 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가 되살아나 우리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면, 우리는 영락 없이 죽은 목숨이다. 이 어찌 두렵지 않으리요! 당시의 예수의 제자들은 (가룟 유다 만이 아니라) 세상과 짝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즉 이 세상의 훈장을 받으려고 동작동으로 가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들이 역적이라고 하여 죽인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가 되었다는 소식은,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소식이었다. 망월동에다 거짓 역적들을 묻어놓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안심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다가 동작동에 묻혀 이제는 다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망월동 원혼이 되살아나고 그들에 의해서 세상이 새로와지며, 더 나아가 이미 죽은 자들도 되살아나 그들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면 이 어찌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으랴?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부활은 핵심이지만, 그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정의가 결코 죽지 않았다는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삶을 탐하고 죽기를 서러워하는," 비겁하고 허황된 인간 욕망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 1 / 손승호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966 

 

 

 

"한국의 개벽사상의 빛에서 본 기독교의 부활신앙" 

 

 

財團法人 省谷學術文化財團 貴中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224-1 쌍용 빌딩 5100-748

종류 : 個人 學術硏究 人文分野

 

硏究課題題目 :

 

韓國開闢 사상의 빛에서 본 基督敎復活信仰

 

논문작성자: 洪 丁 洙

소속: 감리교신학대학

주소: 은평구 갈현2523-75 연린 203

사무실: 서대문구 충정로299-19

세계신학연구원(312-4778/313-9698)

제출일: 19921211(미국에서 우송함)

 

<요약> “復活開闢

 

필자가 이 연구를 하는 데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각종 신학적/신앙적 혼란의 저변에 놓여 있는 신앙 언어의 혼동을 조금이라도 해명하려는 것이며, 둘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있었던 한민족의 불행, 때 이른 죽음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접근의 전초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하여 제1장에서는 소위 포스트모던 신학의 개념과 그것이 등장하게 되는 신학사적 이유를 간단히 논하고 나서, 한국인들이 최근에 겪었던 각종 불행한 죽음들과 그것에 대한 교회의 불성실성을 지적하였다. 이것이 이 논문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오늘날의 우연한 문제가 아니라, 18세기 한국 실학자들의 신랄할 비판을 이미 받은 바 있는 뿌리 깊은 문제임을 밝혔다.

2장에서는 부활의 전통적 이해의 한 견본으로 칼빈의 부활 사상을 다루었다. 칼빈의 사상은 오늘날 서방 기독교와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아직도 대표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부활 사상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죽음의 극복이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고 모형”(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부활 사상은 만일 그것의 근저가 되는 타락이 사실(事實/史實)이 아님이 밝혀질 경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3장에서는 기독교의 부활 사상을 그 본래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신약성서 일반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중간기에 씌어진 소위 묵시문학의 산물임을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통하여 밝히었다. 그리고 신약성서 연구에서 어떻게 하여 오늘날처럼 묵시문학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를 논하면서, 특히 쉬바이쳐와 케제만의 공헌을 피력하였다. 물론 묵시문학과 바울의 신학은 연속성이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켁의 논리도 담았다. 만일 신약성서가 묵시문학을 배경으로 하여 읽을 수밖에 없는 문서임을 성서학자들이 밝히어 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제로 부활이야말로 묵시문학의 종말론, 곧 하나님의 정의(신절론)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기독교인의 언어라는 우리의 명제를 확보할 수가 있다.

4장과 5장에서는 조금 독특한 작업을 하였다. 즉 부활을 묵시문학의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면, 우리 민족은 성서의 그 언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토착적 질문에 답하기 위한 준비/기본 작업으로서, 한국인들의 종말론이라 할 수 있는 무속의 원, , ()신 사상을 검토한 후, 불교의 미륵/미타 사상을 검토하였다. 이들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늘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어 오기는 했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새 세상/시대(신천지)”을 소망하는 한이 서려 있음을 논구하였다. 특히 5장에서는 희망과 좌절의 격동기였던 한국의 19세기의 민족종교 운동들, (김일부와) 水雲, 甑山, 少太山 등의 종교/사회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開闢에서 한국인의 부활 언어의 가능성을 논하였다.

6장 결론에는 지금까지 논한 것을 기초로 간단히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였다.

 

1) 신약성서의 부활은 인간의 자연스런 죽음의 문제에 대한 대답(인간론적 접근)아니며;

2) 신약성서의 부활은 지구 또는 우주의 종말에 대한 도래를 알리는 경고(우주론적 접근)도 아니며;

3) 신약성서의 부활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정의의 죽음을 경험하였던 특정 시대 유 태인들의 신앙의 언어(신정론적 접근)로서;

4) 한국인들의 경우, 그것을 개벽이라고 번역해 준다면 오히려 몇 가지 장점이 있다.

 

 

<ABSTRACT>

 

'Resurrection' in the Light of Kaebyuk by Jeong Soo Hong

 

 

This paper deals with two related issues in Korea: first, the Korean people have experienced the suffering of premature deaths in socio-political context; secondly, the Korean church has fallen into a deep confusion of their understanding of "religious

language," i.e., resurrection, death, parusia and so on. From this account, this paper proposes a new Korean interpretation of the traditional Christian concept of "Resurrection."(#1)

In chapter two, the root of premature understanding of 'resurrection' is inquired. The Christian myth of the "Fall" illustrated in the Reformers' thought would be a main cause. Especially, Calvin claimed that the three evils will be all overcome in the Resurrection at the End of History, while he insisted that the (Greek form of) immortality should be kept in the Christian faith of Resurrection(#2).

In chapter three, being sensitive to such misunderstandings and arbitrary interpretations,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idea of Christian resurrection demands a close inquiry on the original context and its influence. In this sense, the true meaning of resurrection should be considered in the light of apocalyptic literacy and its relation with eschaton. As a result, the intrinsic idea of resurrection is an answer to the Righteousness of God, so called theodicy as apocalypse was another answer to the same question.

Finally, in the chapters of four and five, the question of 'how we the Korean interpret the resurrection-language in the Bible properly?' would be raised. Answering to this question will be an agent task for the indigenization of Christianity for today. This task in turn demands a close examination of the Korean traditions, i.e., shamanistic suffering, reconciliation and god(s), Buddhist concepts of Amida and etc. This research shows commonly the expectation of "New Heaven and New Earth." Particularly, the national religions in the 19th century concentrated this traditional concept in terms of "KaeByuk." From this perspective, the concept of "KaeByuk" will be a strong alternative for that of resurrection.

Summary statements are shown in the chapter 6 as followings:

 

1) The meaning of 'resurrection' in the New Testament is not the answer to the problems of natural death. It repudiates humanistic approach in itself.

2) The meaning of 'resurrection' is not a signal warning the end of the Earth or Cosmos. It refuses cosmological approach.

3) Thus, 'resurrection' is a kind of religious language of the Jew who experienced the death of divine righteousness. It is an answer of (Judeo-Christian) theodicy.

4) From this account, for the Korean today, the term of "KaeByuk" will be an alternative translation which has many theological strengths.

 

 

韓國開闢 사상의 빛에서 본 基督敎復活信仰<목차>

 

I. 부활을 새롭게 이해하려 하는가

1. 신앙언어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

1) “포스트모던 신학의 등장 이유

2) 포스트모던 신학의 전제와 목표

2. 최근 한국인이 겪었던 눈감지 못하는 죽음

II. ‘부활의 일반적 이해와 그 비판

1. 타락과 원죄

2. 불멸성과 부활

3. 구원의 완성과 부활

4. 잠정적 평가

III. ‘부활언어의 맥락 -- 묵시문학

이제 본장에서 우리가 논증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1) 신약성서는 대체로 소위 중간기 묵시문학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2) ‘부활은 특별히 그러하다.

1. 묵시문학의 재발견

2. 신약성서와 그 묵시문학적 배경

3. ‘부활의 맥락으로서의 묵시문학

IV. 한민족의 부활 언어 -- 開闢

시작하는 말

1. 무속에서의 죽음과 신

2. 불교의 미륵 신앙과 말법 사상

1) 미타(彌陀)미륵(彌勒) 정토 신앙

(1) 미륵정토 사상과 지배 이데올로기

(2) 미타정토 사상과 지배 이데올로기

(3) 민중의 미륵정토 사상

2) 혁명적 미륵, 미타 사상과 말법 사상

V. 한민족의 부활 언어 -- 개벽

1. 開闢의 일반적 의미

2. 水雲開闢 사상

3. 甑山開闢 사상

4. 少太山開闢 사상

VI. 한국인의 復活로서의 開闢

1. ‘부활에 대한 3 유형의 오류

2. “開闢復活

 

* 이 논문은 인터넷 서점에서 전자책으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홍정수, 개벽과 부활, pdf file, 3000원.

"지옥에는 더 이상 악마가 남아 있지 않다" / 김준우 

http://historicaljesus.co.kr/xe/article/18657

 

그것이 알고 싶다. 붉은 유령: 보도연맹 사건의 전말

https://www.youtube.com/watch?v=EuHx4kLG384&index=1&list=RDEuHx4kLG384

 

사학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 / 정대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92022215&code=990304

 

 

민간인 학살 발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6314.html

  • ?
    한기연 2016.01.18 14:39

    The Man He Killed


    by Thomas Hardy
     

    Had he and I but met

    By some old ancient inn,

    We should have set us down to wet

    Right many a nipperkin!

     

    But ranged as infantry,

    And staring face to face,

    I shot at him as he at me,

    And killed him in his place.

     

    I shot him dead because - 

    Because he was my foe,

    Just so: my foe of course he was;

    That's clear enough; although

     

    He thought he'd 'list, perhaps,

    Off-hand like - just as I -

    Was out of work- had sold his traps -

    No other reason why.

     

    Yes; quaint and curious war is!

    You shoot a fellow down

    You'd treat, if met where any bar is,

    Or help to half a crown.
     
     

    그가 죽인 사람
     
    그와 내가
    오래된 한 선술집에서 마주쳤더라면
    우리는 함께 앉아 술잔을 기울일 수도 있었겠지
    단번에 여러 잔의 맥주를!
     
    하지만 보병으로 배속되어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가 나를 향해 총을 쏘듯 나도 그를 향해 쏘았고
    그는 내 손에 죽고 말았네
     
    나는 그를 죽였지
    그가 나의 적이었기 때문에
    그래, 그는 나의 적이었어
    그건 아주 분명한 사실이야, 허나 그래도,
     
    아마 그도 나처럼 별 뜻 없이
    군인이나 되겠다고 생각했을 거야
    일자리도 잃고, 세간살이마저 처분해버렸으니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을 거야
     
    그래, 전쟁이란 참으로 이상한 거야!
    우리가 선술집에서 만났더라면
    술도 사고 돈도 좀 보태줬을지도 모를
    그 사람을 내 손으로 쏴 죽이다니

    ----------------
    개인적으로 "냉천동 잔혹사"를 떠올릴 때 가끔씩 생각나는 시다. 냉천동에서 만나지 않고 어디 다른  대학이나 어느 선술집에서 만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냉천동에서 만나 그처럼 못되고 험한 꼴들을 보였구나. 시인은 비록 전투 현장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부득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조차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계속 머뭇 머뭇거리면서 자신의 깊은 상처와 슬픔과 회한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냉천동 사람들과는 매우 달랐지만 말이다. 
    
  • ?
    한기연 2017.12.27 21:18

    성한 신학교가 하나도 없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1735


    신학교는 지금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905


    2017년 신학교 학내 사태 종합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5066


    


    오랫동안 참으로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지극정성으로 존중하며 선후배 사이에도 동역자로서 서로 아끼며 돌보아주어야 하는 곳이 신학교이며,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들임을 실제로 경험해야 하는 곳이 신학교여야 하지만, 도대체 왜 온갖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며, 심지어 학내사태가 마무리되는 과정에서는 보통 정치목사들이 교수들과 한패가 되어 학생들은 대체로 일방적으로 패배하든가 아니면 타협하고 마는가 하는 문제는 정말로 궁금한 수수께끼였다.


    일반대학에서는 선배라고 해서 후배들에게 상당히 친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반말을 지껄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신학교 선배라는 자들 가운데는 초면에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후배를 향해서도 반말을 지껄이는 자들이 많았다. 심지어 1980년대에는 신학교 기숙사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빠따를 치는 것이 전통이 되기도 했으니, 참으로 기막힌 모순이다.


    또한 이사회는 흔히 정치목사들이 집결하는 기구이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왜 교수이며 목사라는 사람들이 그토록 터무니없는 짓들을 벌이는가? Ph.D.가 Permanent Head Damaged를 뜻한다는 농담이 신학교에서처럼 자주 사실로 확인되는 경우들이 또 있을까?


    실제로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선 자들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었던 이유는 돈 큐핏의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성전중보체제는 하느님과의 직접적 만남을 가르치는 직접 종교를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위협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제사장과 같은 종교 브로커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예수의 직접종교를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재판 이후 20여 년이 지나서, 신학교의 일반적인 몰상식과 잔인함의 원인을 찾은 것은 리처드 로어 신부를 통해서였다. 특히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남자들의 영성에 관한 성찰 >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근본 문제는 성직자라는 신분이 최고의 자기 방어적 페르조나를 갖게 만들며, 또한 시골 출신이 비교적 많은 신학교에서 남들보다 성적 잘 받아 유학가고 박사학위 받고 돌아와 교수에 임용되면, 그야말로 인생에서 멈춤 없이 승승장구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십상이라서, 에고가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팽창되기 쉽기 때문이다. 요나처럼 인생에서 뼈아픈 실패나 좌절을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성직자나 신학교 교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십자가의 자기비움, 겸손을 배울 기회가 그만큼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게 벌거벗은 채로 자기 그림자를 성찰하는 일이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대학들에 비해서 온갖 해괴하고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기 쉬운 곳이 신학교 아닐까 싶다. 


    신학교들이 이처럼 몰상식하고 잔인한 곳이 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인 것으로 생각된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신학교 교수들이 대체로 일반대학 교수들에 비해서 연봉이 적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교수들 사이에 우애와 유머와 동지의식이 깊었지만, 1982년부터 신학교 학생 정원이 대폭 늘어남과 함께 1987년 이후부터는 신학교 교수들의 연봉이 대폭 올라가고 심지어 때로는 일반대학 교수들 연봉보다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상당수 교수들이 맘몬이라는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자 점차 서로 돌봄은 사라진 대신에 시기심과 지독한 파벌들이 생겨나고 우애와 동지의식도 사라지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악령에 사로잡혀 있으니 "성한 신학교가 하나도 없다"는 현실이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신학교에 온 이들에게 이처럼 신학교가 사랑의 공동체로서 천국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지옥을 경험하는 곳이라는 혹독한 모순을 겪게 하시는 데에는 어떤 뜻이 있지 않을까? 냉혹한 정글 속에 던져 넣으심으로써 교회 현장이라는 곳이 흔히 살벌하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현장임을 미리 깨닫게 하며, 마치 원시부족들의 잔혹한 성년식처럼, 순수한 영혼들이 피눈물을 통해 유약함에서 벗어나도록 단련하여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인간의 양면성과 특히 학자들의 위선을 깨닫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처럼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지는 못한다 해도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앞세우는 냉혈한이 되지 않고, 분별력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도록 단련시키는 한편 여러 유형의 반면교사를 통해 그런 몰상식과 냉혹함을 결코 배우지 말도록 신학생 시절부터 혹독하게 훈련시키시는 은총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온갖 상처들과 그림자를 직시하지 못한 채, 지독한 열등감이든 시기심이든 명예욕이든 맘몬이든 악령에 사로잡혀 눈물을 잃어버린 괴물이 될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의 고난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문이라는 가르침처럼, 모순과 역설마저 끌어안고 함께 연대하여 피뢰침처럼 사람들의 증오심과 적개심마저 온몸으로 받아 녹여내겠다는 결기와 모든 사람들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끈질기게 간직하는 강인한 사랑의 전사가 될 것인지는 각자 경험한 은총에 따른 선택과 수행의 결과일 것이다. 또한 신학교는 "한 분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우리의 피붙이로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우고, 예수는 그 진리를 위해 죽었다는 점을 배우는 곳이지만, 몰상식과 폭력이 자주 나타나는 교회와 신학교 안에서 완장차고 설쳐댄 참으로 못난 선배들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음과 폭력의 죄업을 씻어내는 길이란 바로 남은 고난을 온몸으로 걸머지고 험난한 역사의 고개길을 넘어갈 방법을 찾는 거룩한 길이며, 그래야만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나갈 수 있다는 것 역시 후배들의 피할 수 없는 몫이라는 것도 엄중하게 깨닫게 하시는 정화의 장소일 것이다. 사랑과 따스함이 없는 신학은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신학사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신학도의 삶 자체이며, 또한 신학 박사들보다 청소부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더 깊을 수 있다는 말은 신학생 모두가 평생 기억해야 할 충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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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8.01.18 13:01

    국민의 절반이 가톨릭 신자이고 그 나머지는 루터교인인 나라,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나라인 독일에서 홀로코스트(the Holocaust)가 일어났다.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를 반드시 다루어야만 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그렇게 전적으로 무력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희생양이신 예수님을 예배한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가 역사 속에서 수없이 희생양을 만들어온 주된 사람들이 되었다. 유대인, 이단, 죄인, 마녀, 동성애자, 가난한 사람, 다른 교단, 다른 종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악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고 거기에서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며, 그 악을 미워하는 패턴은 모든 사람들의 본성 속에 있다. 결국, 우리의 과제는 악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지 않은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사고 과정, 즉 배타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항상 어떤 차원에서는 폭력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 리처드 로어, <성서의 숨겨진 지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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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8.01.2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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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8.02.09 19:42


    1894년 9월 말,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모조리 섬멸하라"는 명령에 따라 전국을 폐허로 만들어나갔고, 마침내 해월 선생은 "앉아서 죽기보다야 서서 죽는 게 낫다"며 대동원령을 내렸다. 10월 말부터 시작된 공주공방전은 마침내 11월 8일부터 4일간 우금치에서 총력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수만 명이 살해되었고, 도망친 농민군들은 그 이후 나주, 장흥, 강진, 보은, 영암, 해남 등지에서 토벌군에 의해 수만 명씩 학살당하고, 얼어죽고 굶어죽은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광야의 떨기나무처럼 이름없는 이들이 때로는 그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불타오르고 학살당하지만 그 저항의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저항하고 자녀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물려주려다가 처절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거나 연대하는 기쁨을 통해 거룩함에 참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어느 누구의 영혼도 어떤 이유에서건 파멸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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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8.02.23 11:00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일제의 그림자 / 서승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211026001&code=990100

     

    어린 아기들까지 학살하는 이런 잔인성이 일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 모두에게 있다는 점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잔인해질 수 있다. 특히 어느 집단이든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오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고백은 우리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이며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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