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KICS)

banner1.gif
banner2.gif

인터넷서점
바로가기

알라딘서점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top^

로그인



mobilew.jpg 

 

[최근 출간서적]

[최근 댓글]

역사적 예수
2010.10.28 01:31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조회 수 129303 추천 수 1 댓글 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교회 안에서 목사님들과 성도들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평생을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결심을 하고 특별히 목회자의 소명을 느껴서 신학교에 왔지만, 희망이 컸던 만큼 실망감도 큰 것이 현실이다.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목회자이며 교회 지도자로서 훈련받는 신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도전정신일 것이다. 교수들이나 선배목사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학내사태나 교회분쟁처럼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질 때이다. 교회와 신학교에 대해 가졌던 기대가 무너져내려 낙심되고 절망스러울 때, 특히 교회 안에서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을 그렇게 훈련시키셨듯이 우리를 단련시키시기 위해 우리를 거친 광야로 내몰아 시험을 통해 훈련시키시는 순간이라는 믿음을 갖고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나서 먼저 자신을 살피고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분별해야 할 위기의 순간이다. 절망과 자포자기는 악마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어 타락시키기에 좋은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지적처럼, 신앙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희망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날이 갈수록 절망하기 쉬운 현실이지만, 그 절망적 현실을 돌파하여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모든 신앙인의 길이며,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역할이다. 


결국 절망적 현실에 도전하는 신학생들이 직면한 가장 큰 질문들은 첫째로 신학교라는 곳이 왜 이토록 사랑이 없고 자신의 이해관계가 직접 걸린 문제 앞에서는 얼음처럼 냉혹하며 몰상식한 교수들과 잔인한 선배들이 많은가 하는 질문이며, 둘째로 많은 목사들이나 신학생들이  도대체 왜 서로를 동역자로 여기지 못하고 왜 이토록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가 하는 질문이며, 셋째로 앞으로 25년 후에 과연 교회 안에 교인이 몇 사람이나 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첫째 질문과 둘째 질문처럼 일부 교수들과 목사들의 문제는 그분들도 신학생 시절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정의감이 무디어짐에 따라 지나친 권력욕, 명예욕에 원인이 있을 것이지만, 보다 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에고를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의식과 삶이 분열되도록 만드는 믿음중심의 신학과 차이를 사랑하고 용납하지 못하고 공격하는 독선, 그리고 지나친 열등감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은퇴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챙기기에 몰두하는 선배목사들을 비난하기 전에 나 자신도 그들처럼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들처럼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길이 중요하다. 어느 직업보다 자기분석과 자기성찰을 위한 심리학 공부가 매우 중요한 직업이 목회자들이다. 셋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무너져내리고 있는 전대미문의 시대에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전통신학(교실신학)만이 아니라 현재 세계 곳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영성을 분별해야 할 과제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런 참담한 외적인 문제들보다 신학생들에게 더욱 중요한 질문은 영혼구원의 사명감이 넘칠수록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영혼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자신의 영혼 속의 상처는 치유되었는지, 아직 남아 있는 영혼의 어둠(그림자)은 무엇인지, 무엇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알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내적으로 평화로운 사람이 되고,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정성을 다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민족복음화라든가 세상의 빛이 되려는 소명감은 항상 자기 밖의 이웃과 세상을 향한 사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지만,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한 배움, 자신을 구원하는 배움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결코 남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남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길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며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길이다. 특히 저성장 시대에 사회적인 약자들과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절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전도자 자신이 건강한 기쁨과 희망이 충만해야만 정직한 설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에게 연탄재 만큼이나 따뜻했던 적이 있었는지,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노숙자들이나 불쌍한 노인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면서 살아가는 이들인지, 아니면 추상적인 신학의 말장난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뼈저리게 반성할 일이다. 


18년 동안 중국의 감옥에 수감되었던 어느 티베트인 스님이 가까스로 인도로 탈출한 직후 달라이 라마를 만났을 때, 달라이 라마는 그에게 감옥에 있을 때 가장 큰 걱정이나 위험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그 스님은 단지 자기가 감옥에 있는 동안 중국인에 대한 동정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했다고 대답했다.(시몬 비젠탈, 해바라기, 169).


이처럼 구원이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중심, 생명중심, 사랑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이기에, 믿음생활이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으로서, 자신 속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장과 창조성을 새롭게 경험하는 과제, 남들과 삼라만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피조물로서의 거룩한 영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는 과제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더욱 두려운 일은 독일의 나치 정권 아래에서 학살을 주도했던 SS 대원들이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라틴 아메리카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반정부 해방운동에 가담한 청년, 노동자, 농민들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 거의 모두가 어려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집안에서는 착한 아들이었으며, 교회에서는 매우 평범한 신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학살자들로 만들었는가? 신학교에서는 이런 질문을 별로 묻지 않지만, 특히 신학도들이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다.


실레지아에서는 설교단을 고래가 서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그래서 설교자가 설교단에 오르기 위해서는 고래의 몸속에 있는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 고래의 입으로 나와서 설교단에 섰다. 이것은 설교자가 요나처럼 하느님과 씨름하면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설교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Ian Morgan Cron, Chasing Francis (Zondervan, 2006), 195.


또한 기독교인들, 특히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항상 유념할 것은 믿음(좋다는 이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왜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 선 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율법학자들)이었는가? 돈 큐핏에 따르면, 성전중보체제(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브로커체제)의 수호자들(기득권자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브로커 없는 직접종교(예수의 종교)를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단이라는 브로커체제에 소속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또 다시 메시아를 학살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브로커체제의 기본 요소들, 즉 교회, 성직자, 경전, 성일, 성례전, 교리, 회중, 교단 신학 등은 모두 하나님의 신비를 가리키며 은총을 매개하는 수단들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들을 절대화할 경우에는 우상으로 둔갑하여 본래의 목적과 뜻을 압살하는 수단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성경문자주의와 교리수호를 외쳤던 자들이야말로 흔히 하나님의 은총을 압살하는 자들이었다. 


이처럼 종교적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웅장하게 드높이고 온전하게 만들며 또한 인류 역사를 선도했던 가장 진보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믿음의 광기와 야만성은 몰상식과 독선을 통해 이성을 짓밟고 가장 잔인한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종교가 흔히 선/악, 정결/불결을 나누고 자신은 선과 정결의 편에 서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침소봉대하는 반면에 자기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게 만들어 결국 에고를 확장시키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정신구조로 만들기 십상이라고 지적하는 리처드 로어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큰 이단은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선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처럼, 신앙의 이름으로 증오하며 박해하며 학살하는 집단이다. 종교적인 거짓 자아는 가장 방어적인 자아로서, 인종차별, 노예제도, 전쟁, 속임수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정당화할 수 있으며, 어떤 종류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의무를 수행한다"(요한 16:2)고 믿기 때문이다. 당신의 종교가 당신으로 하여금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종교는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문제 자체이다."


예수는 월터 윙크 교수가 <참사람>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특성 가운데 차별, 진노, 질투, 보복, 심판, 폭력을 제거했으며, 무차별적인 사랑과 무한한 용서의 하나님만을 가르쳤다. "최후심판자"와 "재림 예수"라는 금관을 쓰기 이전의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가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한 피바다(계 19장)가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은"(마가 2:22) 예수는 전통적 교리 수호에 목숨을 거는 전통주의자가 아니라 전통을 철저하게 재해석한 수정주의자였다. 구약시대에도 신앙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철두철미 믿었던 전통주의자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들로 판면되었었던 반면에, 신앙 전통과 달리 민족의 파멸을 초래할 하나님의 자유를 믿었던 수정주의자들은 참 예언자들로 판명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성서전통을 비롯해서 모든 종교 전통은 시대상황이 바뀌어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을 때, 신학자들이 성실하게 그 전통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면 그 전통은 계승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이 되어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다. 존 캅 교수가 여든 다섯 살에 발표한 책 <영적인 파산Spiritual Bankruptcy>(2010)에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자기파멸의 위기를 영성이 외면하도록 만들어왔기 때문에, 영적인 파산을 초래한 과정을 문명사적으로 또한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세속주의라는 거대한 흙탕물이 휩쓸게 된 과정 속에서 종교전통에 대한 창조적인 재구성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지적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복음의 일차적인 판단기준은 "풍성한 생명"(요한 10:10)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 안에서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격려하며 잔혹한 지배체제에 맞서서, 경쟁과 지배와 착취와 무관심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과 공감의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예수의 복음과 신학의 일차적인 판단기준이다.

 

그러나 성직자들과 정치권력이 보복과 심판의 하나님을 선호하는 이유,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리수호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보상과 공포의 심리학"을 이용하는 것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마다,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으며, 결국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요즘 말로 하면 대형교회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메시아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는 말이다.

 

예수의 복음은 쉐마에서 가르친 "한 분 하나님"(신 6:4)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악인과 선인, 죄인과 의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마태 5:45)이며, 이것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아무런 차별 없이 하나됨을 뜻하는 것이다. 종교인들의 고질병은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는 것이며, 특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심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모두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애당초 원수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날드 사이더 교수가 <복음주의적 양심의 스캔달>(2005) 1장에서 자세하게 전국적인 설문조사 통계들을 인용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특히 "거듭났다"는 복음주의자들이 흔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이혼, 아내구타, 인종차별 문제에서 더욱 폭력적이며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로날드 사이더 교수의 주장처럼 "주님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진노와 복수와 심판과 폭력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인간 누구나 갖고 있는 그림자를 인식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카를 융의 정신분석학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은 목회자들이다. 사람보다 교리를 앞세울 때, 그는 위험한 종교인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는 항상 교리보다 사람을 먼저 보았기에 사람들의 고통을 직시할 수 있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이 <비유의 위력>에서 자세하게 밝힌 것처럼,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잣대로 하여 타인의 믿음을 심판하고 죽이려드는 것에 대해서조차 언어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예수가 유대인들에 대해 "악마의 자녀들"(요한 8:44)이라고 비난한 것조차 실제로는 예수가 한 말씀이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예수를 죽인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인 반면에 나의 믿음은 옳다고 강변하면서 전통 교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해석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나의 믿음과 다른 믿음을 갖는 사람들에 대해 심판하거나 분노하거나 증오심을 갖고 있는 한, 또한 자신들의 믿음을 잣대로 나의 믿음을 비난하고 심판하고 죽이려드는 교리주의자들의 유치한 어리석음조차도 나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려고 기도하며 수고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신학교에서 배운 서구의 주로 백인 남성 중산층의 신학은 여성, 농민과 노동자들, 사회적 약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계급 문제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가난한 이들의 고통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 기득권자들의 신학이었다. 성경 자체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과 생태적 모순을 해결하시기 위해 온 힘을 쏟고 계신 구원과 창조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지만, 서구 신학은 성경을 현실의 모순 해결 과제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1. 어제 어느 학교 신대원 초청강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내가 신학생들 앞에 설 때마다 청바지를 입고 강연을 하거나 강의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교회주의와 성직자주의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어 완전히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계급의식은 노동자여야 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학생들이 감을 잘 잡지 못하기 때문에 온몸으로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교육은 100년 대계라고 흔히 말은 하지만, 신학교에서는 10년 혹은 20년 후의 목회 과제와 목회현장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신학생들의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화이트칼라이던 시대는 지났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대학원 다닐 때까지 대부분 막노동을 해보지 않은 채 책만 읽고 교회 일만 하던 신학생들은 자신들이 마땅이 노동자 계급이어야 하며, 때로는 부득이 막노동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무슨 수로 감을 잡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는 목수였던 아니면 농부였던 간에 노동자 출신이었던 것이 분명하며,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노동자로서 살았다. 안수를 받은 성직자는 결코 아니었다. 감독회장 사태 역시 근본적으로 그들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종교귀족들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며, 죽어가는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한 처절한 반성과 몸부림은커녕, 죽어가는 교회가 어떻게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또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브로커체제의 패거리의식으로 다투고 있는지를 온세상에 여실히 보여주는 해괴하고 한심한 작태인 것이다. 예수 당시에도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은 사치스런 저택들을 지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시골의 가난한 제사장들은 끼니 걱정에 시달렸을 만큼 해괴하고 한심한 작태들이 벌어졌다고 팔레스타인 고고학은 증언하고 있다.

 

2. 20여 년 전에 나이 마흔에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책은 당시 리처드 니버 세미나에서 읽었던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이었다. 예수의 종교이든 웨슬리의 감리교든, 다른 소종파들이든, 처음 시작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종교로 출발했지만, 두 세대 혹은 세 세대가 지나면서 중산층의 종교로 둔갑해버린 역사를 보면서, 내리게 된 결론은 분명했다. 인류 역사상 대다수 성직자들은 지배자들의 통치와 착취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기생충처럼 빌붙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성직자 계급의 일반적인 정치경제적 기능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던 내가 안수를 받은 후, 목사가 되어 권력의 하수인으로, 지배계급의 기생충으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에 Enrique Dussel의 남미교회사를 읽으면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정복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현실주의 전통과 함께, 원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라스 카사스와 같은 분들의 신비주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3. 이것은 목회자의 정체성, 특히 계급의식과 연관된 문제이다. 즉 목회자가 지배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안락한 성직자로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노동자 계급으로서 피눈물 흘리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처럼 안락한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철저하게 착취당해 가난과 전쟁, 문둥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귀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복음 이해가 자신의 뼈저린 가난 체험에서 비롯된 계급의식과 무의식 중에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분의 형님 역시도 부산에서 나환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이런 점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까.

 

4. 돈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시대에, 대학생들은 안전한 직장을 찾는 게 꿈이지만, 20대와 30대 합쳐서 약 1천만 명 가운데 청년실업자가 300만 명인 시대에, 신학생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의 종"으로서 목숨을 걸겠다는 이 시대의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다.

 

5. 문제는 신학생들이 대부분 목회자로서의 막중한 소명감 때문에, 특히 목사 가정이나 장로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어려서부터 순종적이며, 신학교에서 길들여지고, 목회 현장에 나가 선배들에 의해,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해 더욱 더 철저하게 길들여지기 쉽다는 점이다. 예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처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들사람 정신"으로 살아야 할 터이지만, 배짱이 있는 신학생들은 종종 목회를 접고 다른 길을 택하는 반면에, 닳고 닳아 중늙은이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목회 현장을 인내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평신도들과 달리 신학생들이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욕으로 들리는 이유가 이런 길들여짐이 두렵기 때문이다.

 

6. 또한 신학생 시절에 목회실습을 하게 되는 교회들, 혹은 학교 채플에서 만나게 되는 목사들은 대부분 종교 비지니스에서 성공한 큰 교회 목사들이다. 그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신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목회를 하게 되면 저 목사처럼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있으리라고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교인들이 사회저명인사들과 사귈 수 있는 각종 종교 비지니스를 잘 하는 대형교회에 나가지 않고 오히려 내가 개척한 교회에 나오게 되리라고 꿈꾸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만용이기 십상이지 않을까.

 

7. 신학생들의 미래는 학교도 교단본부도 그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감리교회도 미자립교회가 40% 정도인데, 이제는 대학원 졸업하고 그런 미자립교회 목회 자리를 얻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교회를 개척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들 말한다. 기득권 추구에 여념이 없던 대형교회들이 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들이 개척교회에는 "쇠망치로 정수리를 내려치는 것처럼" 교회 성장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어 전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8. 오늘날 미자립교회는 상당수가 큰 교회들의 선교비 지원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0년 혹은 20년 뒤의 상황은 더이상 이런 기대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그동안은 농촌교회 출신 교인들이 도시교회로 이동하고, 도시교회에서 교인들이 수평이동해서 대형교회를 이루었는데, 농촌교회가 빠르게 붕괴되고 있고, 또한 도시교회에서 대형교회로 수평이동의 고리들이 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빠른 노령화, 낮은 출산율, 노동자들의 절반 가까운 비정규직 등, 미래교회에 대한 전망은 매우 어둡다.

 

9. 기성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몰락하고 있다. 특히 서구 교회들은 30년마다 교인수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그동안 교회성장을 주도했던 오순절 교단과 침례교단의 전도 무기는 성공과 번영의 복음이었지만, 크리스탈쳐치의 파산에서 보듯이,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는 선전은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할 때는 그런 선전이 먹혀들어갔지만, 경제는 위기를 겪고 있는 현실이며, 경제가 회복된다 해도 고용은 늘지 않기 때문에, 예수 아무리 잘 믿어도 부자가 되는 세상은 지나갔다. 반면에 신흥종교들은 급성장하고 있다. 월간중앙 10월호에 실린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는 지난 10년 동안 신자가 100만 명이 증가했다고 한다. 신흥종교들의 급성장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철저한 세뇌교육 때문이다. 가톨릭이 그나마 유지되는 이유는 묵주기도를 통한 신앙의 생활화와 수녀들의 교육 때문일 것이다.

 

10. 종교시장에 대한 흥미로운 사회학적 분석이 있다. 종교시장 역시 일반 경제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느 교회는 성장하고 어느 교회는 몰락하는 이유는 회사들의 경쟁과 같다는 말이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들이 경쟁할 때 그 성패는 1) 회사의 조직, 2) 세일즈맨, 3) 제품, 4) 마케팅 전략인 것처럼, 교회의 성패 역시 1) 교단의 브랜드 혹은 교회의 장정, 2) 목회자, 3) 교리 혹은 복음, 4) 전도전략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첫째로 교단의 브랜드, 교회의 장정은 오늘날 매력은커녕 혐오감을 자아내기 십상이다.

 

둘째로 목회자는 자동차 세일즈맨이 그 제품에 대해 아는 것만큼 자신이 판매하는 제품("나의 복음")에 대해 꿰뚫고 있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신학교 커리큘럼은 너무 파편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수들은 자신들이 박사과정에서 배웠던 것들을 대부분 그냥 가르칠 따름이기 때문에, 목회를 위해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하나로 꿰어지지 않은 신학지식들은 목회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나의 복음"에 관해서는 아래 "나의 경험 -> 나의 복음 -> 나의 신학"에 관한 글을 참조할 것). 

 

셋째로 목회자들이 판매하는 제품으로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나의 복음"이다. 즉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신학적으로 정리한 my gospel인데, 현재 한국의 신학교육에서는 석사논문은 요구하지만, 자신의 신앙고백을 Credo로 정리하는 일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내가 SMU에서 공부할 때 석사학위 필수과목이었던 조직신학에서는 1년 동안 준비해서 독창적인 Credo를 쓰는 것이 요구되었다. 당장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을 교육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Credo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넷째로, 전도전략은 보통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16세기 신학으로 전도를 하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11. 기독교라는 배는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침몰하고 있으며 한국 감리교의 경우 대학원을 졸업해도 갈 교회가 없는 형편인데, 신학생들을 거의 전적으로 교회 담임 목회를 목표로 훈련시킨다는 사실은 신학생 개인으로서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되기 쉽고 교회적으로는 인력낭비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꾼들, 주의 종들이 해야 할 과제는 엄청나게 많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목회를 위해 부름 받은 것이며, 특히 신학생들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특별히 그 선봉에 서도록 부름받았다. 교회주의와 성직자주의라는 고정관념의 포로에서 해방되는 일이 시급하다. 더군다나 전 세계의 우수한 두뇌들은 이 죽임의 세계질서, Wall Street, IMF, World Bank, 제국들의 군산복합체, 석유회사, 곡물회사 등이 장악하고 있는 체제를 강화시키고 재생산하기 위해 수 만 명, 수 십만 명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IMF에만도 경제학 박사가 800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지배체제에 맞서서 하나님의 세상을 위해 영적인 싸움을 할 용사들은 소명감에 불타는 신학생들말고 누가 있겠는가?  

 

12. 바라기는 신학생들이 다음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 해답을 찾은 후에 졸업 후의 진로를 선택하면 좋겠다.

 

첫째, 기독교는 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인 종교가 되었는가? 왜 부시 대통령처럼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종종 매우 잔인한 사람들인가? 기독교의 복음은 왜 흑인들, 여성들, 제3세계 원주민들, 동식물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는가? 예수님이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같은 배타주의를 가르치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둘째, 예수는 왜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막 11:17)이라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으며, 안식일, 제사장, 율법학자들, 율법, 특히 정결법 등 성전체제를 타파하려 했는가?

 

셋째. 왜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목사는 매우 드문가? 교회 세습과 감투싸움에서 보듯이 왜 목사들은 평생 설교한 십자가의 복음을 배반하는가?

 

넷째, 왜 예수를 따라서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목사들은 드물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목사들은 많으며 그런 목사들은 흔히 종교 비지니스에 성공하는가?

 

다섯째,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 "주의 종"에게 원하시는 일이 도날드 메서 교수의 지적처럼 교회업무(설교, 심방, 교육, 행정)뿐인가? 하나님은 오늘의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분노하며 무슨 일로 애통해 하시는가? 빈부격차가 심하고 기후재앙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신학생들은 부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을 찾고 졸업 후의 진로를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를 개척하더라도 건물 전세 내어 개척하는 대신에, 집이나 사무실에서 성경연구모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1965년에 척 스미스가 시작한 갈보리 채플은 미국에 600개의 교회와 해외에 100개의 교회가 있으며, 빈야드 교회도 1971년에 켄 굴릭슨이 시작하여 1982년에 존 윔버가 이어받아 미국내 400개의 교회, 해외에 200개의 교회가 있으며, Hope Chapel은 1971년에 랄프 무어가 시작한 교회로서 미국에 50개 지교회가 있지만, 이들 모두 집에서 성경연구모임으로 시작된 교회가 성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목회자는 주중에 일을 하면서 주말에 목회를 시작했으며, 교인이 50명 이상 되었을 때 목회자가 풀 타임으로 목회를 해서 성장하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김경재 교수님 증언에 따르면, 한신대는 1960년대까지도 신학생들에게 축산학이나 원예학을 가르쳐 졸업 후의 생계대책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이 신학생들을 졸업시켜 세상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노부모에게서 생활비는 물론 용돈까지 타서 쓰면서도 "주의 종"이라는 자의식으로 인해 노동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미래는 빈부격차와 기후재앙으로 인해 이미 다르푸르 내전에서 보듯이 더욱 폭력적인 사회로 변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생태마을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지역생태주의를 통해 자립경제와 영성수련공동체의 형성만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마지막 돌파구로서, 신생대가 급속하게 끝나가는 마당에 하나님께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시는 생태대를 열어가는 사업이라고 판단합니다. 


-------------------------------------------------------------------------------------------------------------



-----------------------

낮엔 교회, 밤엔 대리운전… '투잡(two job)' 목사님을 아십니까 (조선일보, 2014년 10월 2일자)

[조성돈 교수, 목사 904명 대상 '목회자의 겸직' 설문조사 해보니…]

月收 168만원 미만이 3분의 2… 생계·자녀 교육비 마련 위해 편의점 알바·일용직 노동까지
"배출하는 목사 수 조정 필요" 17일 세미나 열어 대책 모색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10시에 식당으로 출근합니다. 근무는 오후 10시까지,
12시간입니다. 예배가 있는 수요일은 오후 8시 퇴근합니다. 금요일 예배는 아내가
인도하고요. 주일은 온전히 교회 예배와 목회 사역을 합니다."

서울 송파구의 A목사. 50대 중반의 그는 한 달간 목회자로 일해도 '사례비(보수)'가 없다.
월~금요일은 식당 보조로 출근해 오후 10시까지 12시간 일한다.
다만 수요일은 '일찍' 오후 8시 퇴근한다. 수요 저녁 예배를 위해서다.
'금요 예배'는 부인이 인도한다. 대신 주말엔 열심히 예배와 교회 사역에 집중한다.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 편의점 아르바이트, 새벽엔 물류회사 하역, 우유·녹즙 배달원
그리고 낮엔 목회자(목사)…. 그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이 같은 현실은 실천신학대학원대
조성돈(47) 교수가 목회자 9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밝혀졌다.
조 교수는 이메일과 페이스북 그리고 전화를 통해 모두 904명의 목회자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주제는 '목회자의 겸직'. 목회자들을 상대로 이 같은 실태조사는 처음이었다.

A목사의 하루.
결과는 놀라웠다. 월 사례비 기준으로 120만~180만원이 21.7%, 180만~250만원이 18.9%,
80만원 미만이 16%, 받지 않는다는 경우도 15%에 이르렀다.

2014년 보건복지부의 4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 월 163만원에 못 미치는 경우가 66.7%나 됐다.
전국 교회의 80% 정도가 미자립 상태이고 목회자 대부분이 최저생계비 이하의 수입을 올린다는
것은 그동안에도 더러 알려진 사실. 하지만 목회자들이 생활비·자녀 교육비를 벌기 위해 대리기사,
퀵서비스 아르바이트까지 한다는 건 낯선 풍경이다. 앞에 열거한 직업 외에도 주유소 주유원,
과외 강사 등도 있다. 조 교수는 "설문 결과를 보고 충격받았다.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목회와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이 중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물론 교회가 중요하지만
가정을 먼저 세워야죠.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선다? 저는 그것은 반대예요."
부업을 가진 목회자들은 "좋은 점도 있다"고 답했다.
"노동하며 돈 벌어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됐다"
"목사라고 밝히고 일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상담하러 오더라.
거기가 바로 선교 현장이다" 등등이다.

설문에 응한 목회자들은 겸직에 대해 73.9%가 '찬성' '적극 찬성'했다. 젊을수록 찬성
비율은 더 높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교단법으로 목회자의 겸직을 금지하고 있다.
사실상 비현실적이고 사문화(死文化)된 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성돈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의 근본 원인은 교인 수는 그대로이거나 줄고 있는데, 목회자는
너무 많기 때문"이라며 "그동안 교세 확장과 과시를 위해 목회자를 양산해온 각 교단이
이제는 신학대학원을 통해 배출하는 목회자의 수를 조정할 시점에 왔다"고 진단했다.


  • ?
    한기연 2011.06.25 19:25
    1. 김성국 목사가 미국성서학회 역사적 예수분과 위원장을 역임한 크로산을 신약학계의 아웃사이더로 간주하며 또한 평생을 바친 그의 예수 연구를 마치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한 기이한 해석이며 계산된 도발인 것처럼 폄하한 것을 읽으니 새삼 눈물이 난다.

    2. 지난 10여 년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를 소개하느라 나로서는 진이 빠질 만큼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결국 한국교회의 몰상식과 폭력성의 온상인 성경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와 교회주의는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예수의 타는 목마름과 하나님나라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군다나 4대강과 핵발전소 문제만이 아니라 눈앞에 닥쳐온 기후재앙의 현실 앞에서 특히 우리 세대가 저지르고 정치적 저항을 통해 막아내지 못한 재앙에 대해 하나님의 뜻으로 돌림으로써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교회가 철저하게 버림받을 것을 생각하니, 불의한 세상을 수리하는 일에 믿을 자들은 너희들뿐이라고 그 일을 맡기신 분의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3. 많은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상당수 신학생들조차 신학을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은 자신의 신앙체험과 기독교 전통을 가장 설득력있게 해명하는 것인가, 혹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풍성한 생명을 오늘날 가장 적절한 운동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어느 신학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학인가 하는 것이 평가의 기준이다. 20년 전에 종교재판으로 신학자 두 사람을 생매장할 때도 상당수 목회자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었다. 종교다원주의신학과 포스트모던신학이 자신들의 목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종교재판에 신학적으로 동의한 목회자들은 종교재판의 공모자들인 셈이며 이런 교회주의와 성장주의 목회자들은 오늘도 무수하게 많을 것이다.

    4. 이런 점에서 언제나 목회자들에게 신학의 핵심적인 문제는 교회론일 것이다. 교회와 목회를 일차적으로 돌봄(pastoral care)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창조적인 계승으로 볼 것인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읽을 마땅한 신학 책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목회를 일차적으로 돌봄으로 볼 경우 신학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않기 마련이다.

    5.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전체제의 관점에서 정의되어,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이거나 신앙공동체로 정의되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브로커체제이며 세상 속에서 게토에 불과하다. 교회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정의는 실제로는 기존종교체제, 즉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의이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6. 예수는 성전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 즉 안식일, 예배, 제사장, 성전, 정결법, 교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그 성전체제의 핵심적 요소들을 비판하고 무시하고 뒤엎은 것 때문에 예루살렘성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

    7. 그 이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과 하나님나라 중심의 신학이 성전체제의 종교비지니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를 죽인 것은 성전체제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던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었으며, 그 밑에 깔린 계산은 돈이었다.

    8.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비지니스에 도움이 되는가? 많은 목회자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솔직히 예수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예수처럼 살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고 고백하는 목회자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교회비지니스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1990년대 이후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진보적인 작은교회 운동(Hal Taussig, A New Spiritual Home: Progressive Christianity at the Grass Roots, 2006)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직한 예수에 목말라하고 있으며, 교회비지니스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도 크로산,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존 쉘비 스퐁, 월터 윙크, 고든 카우프만의 책들을 읽고 신학적인 회심과 해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9. 더욱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 자신의 당당한 정체성이다. 크로산과 같은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정직하게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목회자들은 교회가 아무리 작아도, 생계가 아무리 힘겨워도, 세상을 짓밟는 악한 권세들에 맞서서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계승한다는 우주적인 사명감과 자부심과 당당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10. 교회를 하나님나라운동으로 정의할 경우, 예수가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영적인 권세들(그 핵심은 제국과 결탁한 지배체제)과 맞서 싸우고 그분이 나누려했던 "풍성한 생명"운동을 오늘의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나아가는 생명정의평화운동이며 나 개인적으로는 기후문제와 식량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본다.

    11. 지질학적으로 생태대를 향해 출애굽하는 과제를 위해 나아갈 때 지금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반생명적 반민중적 사탄의 세력은 모세나 예수나 바울이 맞서 싸웠던 세력보다 수십 배 수백 배 훨씬 더 막강한 세력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부름받았다고 믿는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지혜와 힘을 뫃아도 모자랄 판국에 사소한 문제로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 ?
    한기연 2011.09.08 21:15

    대학 순위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서 점수를 매겼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신학대학들이 매우 낮은 순위를 기록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상식적으로는 학생 충원율, 전임교원 비율, 학생 일인당 장학금 평균액수, 취업율 등을 계량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들은 모두 제 살길 찾기 바쁘다는 핑계로 이 세상의 지배체제에 노예처럼 복무하기 십상이다.

    그에 맞서서 신학대학 재학생들은 수준이 낮은 학교를 다니면서 주님의 명령대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 세상을 뒤집어 엎을 믿음과 용기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성자 프란체스코의 고백처럼 "나의 삶 전부이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그런 믿음과 용기만 있다면, 대학순위 따위야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런 믿음과 용기가 없다면, 신학대학들이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싶다. 

  • ?
    한기연 2011.09.10 10: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300322285&code=940202

    전광훈목사, 어버이연합에 천만원 지원해서 부산 희망버스 차단 실토

  • ?
    한기연 2012.04.26 16:01

    대학 졸업 후 신학교에 학사편입한 이후부터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15년 정도 걸렸다.

    귀국해서는 교권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는 일에 꼬박 4년을 쏟았다.

    지난 15년 동안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기후변화 문제에 연구와 출판의 초점을 맞추었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파시즘과 기독교 신학 문제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어째 이리도 오랜 세월이 걸릴 만큼 아둔했던고!

    후학들에게는 곧바로 역사적 예수 연구를 발판으로 삼아 

    기독교 신비주의와 정치적 저항의 신학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 ?
    한기연 2012.08.28 05:29

    교회 팔아먹은 목사들, 그들도 피해자들이다 / 김진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7345

  • ?
    한기연 2014.12.05 16:40

    가나안 교회, 교회 밖 신앙 - 한국의 종교인 통계에 나타난 개신교인 감소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53

  • ?
    한기연 2015.06.25 09:47

    한국인 삶의 질 만족도 세계 117위, 이라크보다 낮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100&artid=201506241709171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 진입을 앞두고 있다지만 그것은 주로 극소수의 특권층의 이야기이며

    이처럼 삶의 질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무슨 복음을 선포하기에 한국사회는 이처럼 참담한 현실인가?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환경소식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숨 쉬기 어렵게 된다/ 화석연료산업 제어방법 7 한기연 2019.08.28 64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의 파격적인 가르침들은 어떤 경험들에서 생겨났을까? 1 한기연 2019.08.01 113
공지 조직신학 예수초청장/참새예수 - 홍정수 박사의 조직신학교실 (동영상) 5 한기연 2019.07.15 88
공지 조직신학 홍정수 박사 신학특강(동영상) 1 한기연 2019.06.06 106
공지 조직신학 절룩거리는 그리스도 / 카릴 하우스랜더 2 한기연 2019.05.18 121
공지 가정사회소식 양육강식하는 식인사회의 킬링필드 /김훈 9 한기연 2019.05.11 68
공지 기독교윤리 우리 인류의 '마지막 싸움' / 신영전 24 한기연 2019.01.14 147
공지 가정사회소식 남성, 여성 아닌 제3의 성(간성) 3 한기연 2019.01.11 259
공지 교회사 웨슬리 [표준설교 정신] 이어 받은 기도문들 52개 pdf파일 file 한기연 2018.11.22 391
공지 조직신학 아우슈비츠에서의 하느님의 여성적 얼굴 1 file 한기연 2018.08.18 1252
공지 기독교윤리 빨간 지구 - 온실가스 시한폭탄에 이미 불이 붙었다 36 file 한기연 2018.08.17 252
공지 기독교윤리 벌레들의 나라,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기독교 파시즘의 망령 38 file 한기연 2018.06.30 361
공지 가정사회소식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남성의 탄생 8 한기연 2018.04.19 249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2010) pdf파일 9 file 한기연 2017.12.04 10398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 (2012)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23 10583
공지 기독교윤리 <생태계의 위기와 기독교의 대응>(2000)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10 11606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변화와 생태신학의 과제 (2017) 30 file 한기연 2017.11.04 12120
공지 가정사회소식 노령화: 남은 시간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장덕진 10 file 한기연 2016.04.26 19195
공지 역사적 예수 기후변화와 대멸종 시대의 예수의 복음 5 file 한기연 2015.11.12 18977
공지 기독교윤리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신학적 의미와 사목 과제 15 file 한기연 2015.10.06 21204
공지 역사적 예수 홍정수 박사가 말하는 예수 르네상스 (강의 동영상) 한기연 2015.04.01 25600
공지 기독교윤리 세월호참사 -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 133 file 한기연 2014.04.18 37950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생태대를 향한 출애굽 - 녹색의 세계관과 생태주의 인문학 아카데미 29 file 한기연 2013.11.12 33981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 시대의 교회의 역할 17 file 한기연 2013.08.24 34496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예수 살기 / 하늘이 낸 참사람들 11 file 한기연 2013.03.13 34373
공지 기독교윤리 엘리 위젤, <하나님에 대한 재판> 서평 1 file 한기연 2012.07.12 6759
공지 기독교윤리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한국 교회의 평화운동 자료 33 한기연 2012.04.24 57349
공지 조직신학 하나님이 계시냐고요 / 담임선생님 예수 / 홍정수 4 한기연 2012.04.11 89425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와 대멸종 시대에도 하나님은 전능하며 예수는 구세주이며 교회는 거룩한가 / 김준우 31 file 한기연 2011.12.12 97634
공지 역사적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 / 김준우 12 file 한기연 2011.10.23 62251
공지 조직신학 나의 종교경험 -> 나의 복음 -> 나의 신학을 일관성 있게 한 마디로 정리하기 4 한기연 2011.08.21 124946
공지 실천신학 대안교회의 가능성 / 한성수 1 file 한기연 2011.08.02 128852
공지 기독교윤리 핵위험 사회 치닫는 대한민국 1 73 한기연 2011.03.28 174294
공지 조직신학 감리교 종교재판의 전말/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6 file 한기연 2010.11.22 141939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담론의 종교문화사적 의미 / 김준우 4 file 한기연 2010.11.14 145030
» 역사적 예수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7 한기연 2010.10.28 129303
공지 기독교윤리 2015년까지 모든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라! 14 file 한기연 2010.10.02 165939
공지 조직신학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2 한기연 2010.04.12 155422
공지 조직신학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1 한기연 2010.03.29 144963
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한기연 2010.03.27 150430
공지 역사적 예수 김기석의 종횡서해 <첫번째 바울의 복음> 한기연 2010.03.18 6857
공지 역사적 예수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5 한기연 2010.02.24 153705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홍정수 13 file 한기연 2010.02.19 168034
공지 기독교윤리 두달만에 - 북극 지역 빙하의 크기 변화 2009/9 22 한기연 2009.09.19 182336
공지 가정사회소식 소득 5분위 배율 비교 25 file 한기연 2009.09.13 182897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 읽는 순서 추천 4 file 한기연 2008.12.03 179174
공지 기독교윤리 세계/교회/신학의 물적 토대 - 신학의 출발점 9 file 한기연 2008.09.01 180429
공지 북극해의 해빙 속도와 기후변화, 한반도 가뭄과 사막화 위기 19 file 한기연 2008.05.14 201517
공지 역사적 예수 교회개혁을 위한 25개 신학논제 - 김준우 5 한기연 2007.10.20 182189
공지 실천신학 목사 개(dog)론 / 축도유감 /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 / 한성수 3 한기연 2004.08.30 146560
공지 실천신학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성만찬/ 혼인주례자 상담체크 리스트 1 file 한기연 2003.09.30 29480
1049 기독교윤리 전쟁산업을 대변하는 미국정부 / 원익선 한기연 2019.11.23 5
1048 기독교윤리 과학자들 1만 천 명 기후비상사태 선포/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4 한기연 2019.11.06 23
1047 기독교연구소 신학을 비롯한 인문학 석사, 박사 과정의 요점 한기연 2019.09.23 241
1046 기독교윤리 21세기판 '전환시대의 논리' /이권우 한기연 2019.07.02 41
1045 환경소식 한국 환경정책의 모순 / 피게레스 한기연 2019.06.14 16
1044 환경소식 4대강 삽질, 그 후 십 년 한기연 2019.06.07 19
1043 한강 하류에 끈 벌레 이어 기형 물고기들 한기연 2019.04.16 101
1042 교회사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한기연 2019.01.01 87
1041 교회사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1961) 한기연 2019.01.01 164
1040 교회사 회칙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한기연 2019.01.01 74
1039 교회사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한기연 2019.01.01 7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3 Next
/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