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목사 설교문]

우리들 미래를 빼앗지 말라
-로마서 5장 1절-5절-

 

 이 더위에 신학생들이 자신들 교단 지도자들을 향해 하소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교파와 교단은 다르나 신학도로 불려 진 그 뜻과 사명이 같기에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신학대학의 미래를 염려하며 거리에 선 것입니다. 500번째 맞을 종교개혁일, 그 숫자가 주는 무게감이 크건만 복음을 초라하게 만든 책임을 누구도 통절히 회개하지 않습니다. 교단마다 송사로 빌라도법정에 예수세우기를 반복하며 신학교마다 총장선거로 내홍을 겪고 있으니 세상이 조롱합니다. 죽어야 사는 길을 가르쳤으나 정작 제자들은 죽음 앞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여정에서 처럼 ‘누가 더 높은가’를 다투고 있으니 기막힌 노릇입니다. 이를 기록했던 성서기자 마가는 그런 제자를 눈멀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교계의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소경된 자들일 것인 바, 우리들 미래를 이들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입니다. 돈으로 권력을 사서 자주색 옷 입고 뽐내는 종교권력자들 그들이 우리들 지도자 될 수 없습니다.

 한 노(老) 신학자는 이런 실상을 일컬어 ‘영적파산’이라 했습니다. 작은 자되어 우리들 중에 섬기러 오신 예수를 잊었기에 영적치매일 것이고 세상과의 소통을 접고 자신들 만의 동굴 속에 갇혀 있기에 영적자폐라 할 것이며 하느님 대신 돈과 권력을 앞세웠으니 영적 방종이라 할 것인바 이를 영적 파산이라 총칭한 것입니다. 어느 덧 우리들 의식 속에도 교회가 크고 권력이 많은 이를 큰 목사로 여기는 훈습(薰習)이 생겼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다 보니 우리역시도 그 물에 젖어 버린 탓입니다. 권력을 갖고 상전 인척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들에게 빌붙어 생존을 구하는 노예 같은 존재양식도 생겨나는 법입니다. 어느덧 노예의식이 젊은 우리들의 삶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신학생다운 패기. 얼. 의지를 잃은 채 권력자들의 입맛을 좆는 젊은 친구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상전과 노예는 엉적 파산의 실상 일뿐 그리스도의 길일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 것’을 성서는 요구합니다. 세상이 종교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 함이 있는 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진리로 자유롭게 된 사람을 오히려 세상이 보살피고 지켜낼 것입니다.

 다수 목회자들이 영적 파산된 교회를 모른 척 외면하며 파멸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홀연히 신학생 연합회가 일어났으니 하늘의 은총이자 성령의 사건입니다. 큰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권력에 해바라기 되지 않고 처음 자신을 불렀던 예수만 바라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종교개혁 500년이 지척인데 아직도 자리다툼, 기득권 싸움, 법정 송사, 편 가르며 이전투구를 일삼는 기성세대를 향해 ‘자신들 미래를 빼앗지 말 것“을 엄중 경고하며 ’그만하라‘ 소리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 천 만원의 빚과 함께 교문을 나서야 하는 다수의 신학생들, 그들 미래를 염려치 않고 총장자리 다투고 권력 하수인 자처하는 교수를 보며 이들은 지금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거룩‘이란 옷을 입고, 신앙을 들러리 삼아 돈과 권력을 탐하는 기성 목회자들, 감독과 총장, 교수들을 향해 학생들은 마치 돌이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기독교 계, 자신들 교단 내에 의인 열사람 없어 누구도 소리 내지 못할 때 길가에 나뒹구는 돌처럼 흔하고 값없는 이들 신학생들이 불려 졌습니다. 소리치는 이들, 젊은 예언자들은 예수만 바라볼 것을 수차례 다짐하며 오늘 이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만 바라보려는 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교단 권력으로도, 돈의 힘으로도, 교수란 자격으로도 이들의 외침을 잠잠케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약한 이들 소리를 듣고 자신들 죄악을 그치지 못한다면 하늘은 기독교를,  우리들 교단을 그리고 신학대학을 역사의 심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 다음 대상이 사학비리 척결이라 하니 신학대학들 역시 두려워 떨일 입니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에게 하느님 영광에 이를 소망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인 칭의(稱義)는 여기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된 미래를 소망하며 그 소망을 자랑하며 사는 데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한다면 복음을 지속적으로 조롱거리로 만들었던 종교권력자들은 이런 소망을 빼앗은 존재로서 결코 칭의의 존재들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영광을 자랑할 수 없도록 만든 이들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해치는 적폐의 대상이라 하겠습니다. 정치에만 적페가 있지 않고 종교에도 적폐가 있으니 종교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이를 두렵게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지닌 자들은 그 소망 때문에 환난을 당하며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의 존재(Sein in Christo)란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기에 그 환난까지도 자랑하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왜냐면 이 희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붙들고 환난 중에도 인내하고 우리들 인격을 단련시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라 했습니다. 그러나 고급차 타고 교회 대물리는 종교인들 그들 행동거지가 얼마나 세상을 닮았는지 가관입니다. 이들 욕망은 더욱 천박하고 일천합니다. 이웃 사랑을 말하나 자기 자식밖에 안중에 없고 자기 패거리들 외엔 친구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들 권력자들이야말로 믿음 없음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이들에겐 하느님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모든 것 다 가진 이들에게 하느님은 의례적인 언사일 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신학생들이여, 비록 힘없어 길가의 돌처럼 소리치고 있으나 당신들이야말로 하느님 미래를 기다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품고 환난을 견디며 그 환난을 자랑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 자격을 값없게 포기하지 말고 빼앗기지도 맙시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감신대 이사회가 파행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페북에서 접했습니다. 이사와 교수들 잘못을 지적하며 16일간을 단식한 학생이 있고 종탑에서 그 기간만큼 정상화를 외치며 기도한 여러분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 욕심을 위해 이들의 수고와 고통 그리고 순수한 절규를 한순간에 무(력)화시켰습니다. 3년이나 끌어 온 학내 사태가 멋지게 종결되어 새로운 감신 만들 기회 되기를 그리도 원했건만 우리들 미래를 송두리째 무너트렸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 생명처럼 여리나 살아있던 모교 감신을 죽여서라도 자신들 몫으로 챙겼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빼앗기고 탈취 당했으나 120년 감신의 얼은 이들을 그냥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옛날 일아(一雅) 선생이 말했듯 최병헌, 이용도 그리고 정경옥이 지켜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를 함께 염려했던 김재준을 비롯한 안병무, 서남동의 혼(魂)도 이들과 함께 할 것을 믿는 탓입니다. 돈으로 샀던 법으로 신앙을 짓 밞으며 권력의 정상에 섰기에 이들의 권력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린 신학생의 꿈을 짓 밞고 수백 수천 감신 동문들의 바람을 져버린 종교권력이기에 이들 권력자들은 결국 하느님마저 내쳐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향후 하느님이 어떻게 악한 영을 추방하시는 지를 똑똑히 지켜 볼 일입니다. 하느님 물레방아는 서서히 돌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완전히 갈아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이런 파행이 감신대만의 일이겠습니까? 교파를 막론한 한국 교계와 신학대학 모두 이렇듯 사악해졌습니다. 옛적 성직자들처럼 예수를 또다시 법정에 세우면서까지 자신들 이익을 얻고자 신앙을 맘껏 모독하고 있는 중입니다. 500주년 종교개혁이 눈앞인데 하느님의 미래이자 우리 신학생들 미래를 빼앗아 현실을 암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이런 기독교가 주는 물에 목말라 하겠습니까? 교회(계) 내 복음이 없기에 세상의 복음화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었습니다. 말에 삶이 실리지 않았기에 힘을 잃었습니다. 목사들 설교가 공허한 말(虛言)이 되었고 교수들 논문은 연구비 얻기 위한 수단되었으니 이들의 말을 듣고 글을 읽는 후학의 삶도 어느덧 이들을 닮아가 하느님 미래는 물론 우리들 미래도 실종시켜가고 있습니다. 신학대학 내에 진골, 성골이란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는 바, 어찌 용납되는 일이겠습니까?

 이렇듯 모두가 침묵하며 암묵적으로 동조할 때 잃을 것 없는 여러분들이 ‘신학도 연합회’ 이름으로 일어났고 말하기 시작했으니 이는 분명 성령의 역사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삶의 방향을 바꾼 사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종교권력자의 편에 서는 한, 상전인 척하는 그들에게 노예처럼 삶을 의탁하는 한 하느님의 영광된 미래는 물론 여러분 자신들의 미래도 없습니다. 피로, 눈물로 지켰던 신앙 선배들의 유산을 탕진하며 흥청거리는 오늘의 영적 타락을 바로 잡을 힘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과거 신앙유산을 탕진하고 미래주역들의 삶을 빼앗는 종교 권력자들에겐 신학생들이 보잘 것 없는 무지렁이처럼 보이겠으나 여러분들은 들판의 풀처럼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풀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밟히고 또 밟혀도 다시 곧게 일어나 외치길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만 바라보자’는 표제어의 본뜻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날, 하느님의 영광된 미래를 소망하며 딴 곳으로 눈 돌리지 말고 예수만 바라봅시다. 종교개혁 500주년 2017년에 바로 여러분들이 마틴 루터입니다. 웜스 국회에 홀로서 자기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루터처럼 우리도 각 교단 본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주님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나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지금도 저 종탑 고공에서 대학 정상화를 위해 홀로 기도했던 학우를 생각하여 우리 모두 용기를 내봅시다. 이들의 열정과 고통과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맙시다. 내가 그 사람이고 그가 우리인 까닭입니다. 우리들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지금 힘쓰지 않으면 여러분 후배들 역시 여러분을 향해 소리치지 않겠습니까? 그 때 무엇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겨울 정부를 향해 촛불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향해서, 교회를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다른 기독교, 다른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그리 하십시다. 그것이 이 시대에 신학생된 우리들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