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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0 21:39

교회개혁을 위한 25개 신학논제 - 김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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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을 위한 25개 신학 논제  


교회 안에서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기독교윤리학 전공)


1.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이것은 군사독재 정권이 1960년대부터 시작한 경제개발의 저곡가-저임금 정책과 도시화-산업화 과정으로 인해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급속도로 해체되고, 전통적 가치관이 혼란을 겪는 가운데,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 고향을 떠난 뿌린 뽑힌 사람들의 사회 심리적 소외감에 편승하여, 남한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될 만큼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1980년대부터는 민주화 투쟁을 거쳐 소비사회로 진입하게 되어, 체제에 대한 비판정신과 여가문화가 점차 확산됨으로써, 1990년대부터는 교회성장이 정체되고, 교회성장주의의 폐해가 본격적으로 드러남으로써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과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도시산업선교와 농촌선교, 인권운동 등을 통해 그 역사적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희망의 불빛이었고, 세계교회협의회와 연대하여 통일운동을 이끌어낸 견인차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자신들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을 실천하는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사회적으로 개혁의 대상으로 지탄받게 된 이유는 반독재 투쟁이 끝난 후, 한국교회협의회의 소속교단 확대로 인한 선명성의 문제도 다소 영향을 끼쳤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지난 30여 년 동안 계속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교회성장주의가 초래한 개교회주의와 대교회주의로 인한 교인쟁탈전, 무리한 교회 건축, 신학대학 졸업생의 과다 배출, 해외선교사 파송 경쟁, 교회의 사유화와 세습, 장로직분 매매, 여성 지도력의 부재, 교단분열과 교단장 선거를 둘러싼 억대의 금품살포와 파벌주의 등의 외적인 문제들, 그리고 한국교회의 신앙적인 측면에서 일반적인 기복신앙과 내세주의, 상명하복식의 비민주적 권위주의가 초래하는 온갖 폐해로 인해,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 본연의 사명을 망각한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특히 일부 성직자들과 기독교인들의 타락과 비리로 인해, 교회가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한 것에 대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 시작한 때문이다. 오랜 냉전체제가 끝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이후 국내에서는 진보세력들이 시민운동들을 뿌리내리며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사회문화적 격변 가운데, 인터넷을 통해 안티 기독교 사이트들이 한국사회의 반기독교 정서를 확산시키고, 매스컴들이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일부 대형교회들이 "시대의 표징," 즉 독재시대의 이분법적 논리가 점차 다양성에 기초한 "열린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하느님의 새로운 현실을 읽지 못한 채, 자폐적이며 비윤리적인 행태들에 그 원인이 있었다. 특히 감리교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가운데 하나인 K 교회의 K 목사는 1992년에 감신대 조직신학 교수 홍정수 박사에 대해 "예수 피 개/돼지 피 설"을 날조하여 일간신문에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홍 박사와 변선환 학장을 "통일교 비호자"라는 거짓 누명을 씌워 서울연회(당시 감독 N 목사)로부터 출교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공영 텔레비전을 통해 그 비리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교회 헌금 사용과 관련하여 실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임목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세계화의 거센 풍랑 속에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더욱 궁핍해졌으며,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한국사회의 대다수 생산계층이 실직의 공포에 내몰리고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형교회들은 경제적 불안심리에 편승하여 자신을 살찌우고 변칙적으로 세습시키는 데 분주할 뿐,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분담하는 일에는 인색한 모습이었다. 2000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분야는 일정부분 민주화/투명화 되고 있지만, 일부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마지막 남은 성역"으로서 비민주적 권위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정직한 질문을 봉쇄하고, 비판정신을 압살하고, 자주적인 사고능력을 박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탈권위주의에 반대하며, 국가보안법 철폐, 사립학교법 개정, 과거사 진상규명법 등 각종 개혁정책에 반대하면서 시청 앞에서 여러 차례 성조기까지 휘날리며 친미반북 집회를 개최하는 등, 극우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된 반개혁 세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최근 들어 "중도 보수" 혹은 "진보적 기독교"의 기치를 내건 기독교 운동 단체들이 등장했지만, 교회개혁운동에는 아직 별다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판단된다.

2.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개신교가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개혁을 더욱 시급한 과제로 만들고 있다. 한국의 17개 주요 개신교 교단이 각각 정부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인 수는 1995년의 1,450만 명에서 2001년의 1,282만 명으로, 6년 동안 약 11.6%가 감소하였다. 이처럼 급격한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은 젊은 층과 고학력자가 이탈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된 바 있으며, 이들이 기독교를 이탈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는 식의 반지성주의와 목사의 권위주의, 그리고 몰상식한 전횡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사회의 대졸자 비율이 74%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학력자와 젊은 층의 이탈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현재 농어촌의 몰락 속도와 도시 교회의 노령화 추세로 볼 때, 교회개혁은 한국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전세계적인 탈기독교 시대에 서양의 주요 교단들은 교인수가 매 30년마다 절반으로 줄어드는 추세에 있어, 한 세대가 지나면 제도적 교회의 죽음이 현실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국교회보다 더욱 훌륭한 교육시설, 교재, 교사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교회가 임종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더 이상 성장주의 신학과 현재의 교회 구조로는 이 근본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며, 이 근본적 위기에 대한 진지한 원인분석과 철저한 대책을 통해서만 교회개혁을 통한 생존이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졌다.

3.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모범적 사례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다. 16세기에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제도적인 구조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오직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경제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차적으로는 "복음의 재발견"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교회의 제도적인 구조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개혁의 원동력과 추진력이 되는 내면적인 개혁, 즉 신학적인 개혁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가 당면한 사회적 신뢰성 상실의 위기를 극복하여 교회의 쇠퇴를 막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신학적인 위기를 극복해야만 한다.

4. "복음"의 판단 기준은 다음 세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첫째, 교회가 "복음"으로 선포하는 내용이 신자들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죄의식을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방시키며, 자기중심성을 초월하여 하느님 중심의 자기희생적 삶을 살도록 하는 "기쁜 소식"인가, 아니면 신자들의 죄의식에 면죄부를 주어 자기중심적인 욕망들을 강화시키는 "기쁜 소식," 즉 시장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적 풍요와 성공에 대한 우상숭배로서의 "싸구려 위로와 소망"인가? 둘째, 복음이 선포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절망 속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존엄성과 희망을 주며 그들을 하느님 앞에서 부자들과 동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민중해방적 복음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들로 차별하고 굴종과 체념을 주입시키는 민중억압적 복음인가? 셋째,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에 사제들(목사들)의 중개역할을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제중심적 복음인가, 아니면 사제들의 역할을 단순히 대표적이며 직능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평등주의적 복음인가? 종교개혁 당시에는 스콜라 신학이 가르친 하느님의 능동적 의(active justice), 즉 심판하고 징벌하는 하느님의 의가 아니라, 루터가 발견한 수동적 의(passive justice), 즉 신자들이 하느님의 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의 반사제중심적 복음을 재발견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 1세기의 예수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유대교의 율법주의적인 하느님 이해, 즉 가난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민중들을 "세리들과 죄인들"로 차별함으로써 강압적으로 성전세를 징수하였던 사제중심적이며 억압적인 하느님 이해와는 정반대되는 예수의 민중해방적 하느님 이해, 즉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한 반사제중심적 "복음의 발견" 때문이었다.

5. 따라서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현실과 지배 이데올로기, 예컨대 분단체제와 국가안보체제, 그리고 시장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일반적으로 선포해왔던 복음이 반공주의-자본주의-군사주의에 대한 "대항문화적 대항공동체(countercultural counterforce)로서의 교회"(윌리엄 윌리몬)를 위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었는지, 아니면 그 체제와 결탁한 폭력과 경쟁과 사회적 배제의 이념을 "예수의 복음"으로 선포한 것인지,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한 민중해방적 복음인지, 아니면 "싸구려 은총"과 "싸구려 소망"에 근거한 "민중의 아편" 기능을 수행했는지, 사제중심적이며 계급적인 복음인지, 아니면 만인 평등주의적인 복음인지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반성이 요청된다. 이처럼 기독교의 위기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신학교육의 혁신 없이, 최근 신학대학교 총장들이 한국교회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영성교육과 정직성을 강조하고, 한국교회의 원로들이 죄책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교회의 쇠퇴 추세에 대응하기조차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

6. 기독교 교회의 본질은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다. 예수운동을 위해 교회라는 조직과 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운동과 예수의 정신이 살아 있지 않는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위기의 본질은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가 교회 안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예수의 부모들처럼(누가 2:44), 예수가 교회 안에서 실종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홍정수).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예수의 정신과 예수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천은 실종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모든 타종교인들을 비롯해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지옥 갈 사람"으로 정죄하고 차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미반공주의를 통해 레드 콤플렉스의 적개심과 증오심을 확산시켜왔으며, 아메리카제국의 전쟁신학을 지지하였고,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축복하고, 그 체제의 희생자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였으며, 전근대적인 신화적 세계관을 확산시켜 민주화에 역행하는 이기적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것은 한 마디로 교회 안에서 예수가 실종된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 없는 교회는 결코 기독교의 교회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이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의 뿌리이다.

7. 한국교회 안에서 예수가 실종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이유는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예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믿으라고 한 새로운 비전, 즉 "하느님의 나라"를 믿고 실행하기보다는, 예수의 손가락, 즉 예수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선포해왔던 복음은 주로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이 해석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즉 "구원자 그리스도 신화," 혹은 "예수에 관한 복음"이었지, "예수의 복음," 즉 예수 자신이 가르친 복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처음 제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했지,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당시 인종적 및 계급적 차별과 정치적 박해, 경제적 착취 속에서 지배와 착취와 차별이 없는 새로운 하느님의 질서를 가르친 "예수의 복음"을 접한 처음 제자들의 감격과 찬송으로서, 예수 안에서 경험한 "하느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인간 승리"에 대한 신학적 고백이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새로운 삶의 모델이었지만, 점차 "예수에 관한 복음"이 "예수의 복음"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로 당시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뿌리뽑힌 채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상실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사회악보다는 개인의 죄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생겨난 결과였다. 따라서 예수를 그 제자들의 가르침과 후대의 교리들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선포해왔던 원죄의 교리와 예수의 보혈에 의한 대속적 구원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주로 바울의 가르침인가? 이 세상(cosmos)과 인간의 육체(sarx)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인가?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들에게 노예의 도덕, 즉 굴종과 체념을 가르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 지도자들의 왜곡인가? 기독교인들의 탈정치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처럼 "예수의 복음"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누구의 제자들인지를 확인하는 정체성의 물음이며 신앙고백의 정직성의 물음인 동시에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8.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선포해왔던 "예수에 관한 복음," 즉 "그리스도 신화"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세상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여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언젠가는 재림하실 분으로서, 예수 자신, 곧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분이다. 전통적으로 이렇게 고백해왔던 "그리스도 신화"는 예수의 의미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한 특정한 해석이며 신화적 표현이었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억압과 성전 지배체제의 착취와 차별에 맞서서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의 질서에 정반대되는 통치질서, 즉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정치범으로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가 목숨을 바쳤던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사에서 신자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내세화되거나,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로 내면화되거나, 제도적 교회가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되어버림으로써, 탈정치화되고 사사화(私事化)되었고 비역사화되었다. 따라서 예수 자신이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든가, "피의 공로에 의한" 대속의 교리를 가르쳤다든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는 결코 가르친 바 없으며,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제자들이 뜻밖에 경험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삶 속에서 발견한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과 구원에 대한 체험과 감격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희생제사 제도와 속죄양 제도에 입각하여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그 어린양이 "흠없는 제물"이며 하느님의 아들이기 위해 동정녀 탄생 이야기로 고백되어지고, 예수는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신성을 지닌 분으로 신격화되었고, 고대 사회의 높은 영아사망률 때문에 영아세례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원죄 교리를 발전시키고, 마침내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교리를 발전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자 그리스도 신화"를 완성시켜나간 것이 교회의 정통주의가 되었던 것이다.

9. 비록 이처럼 "예수의 복음"이 "예수에 관한 복음," 즉 "그리스도 신화"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기독교 역사상 "그리스도 신화"에 근거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기독교인의 자유와 완전을 추구하며, 십자가의 복음에 근거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남들을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인 성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 신화"는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우연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주도적인 사랑, 즉 그의 독생자를 통한 희생적 사랑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무대가 냉혹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는 것임을 믿게 함으로써, 죽음의 불안과 삶의 무의미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위로와,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죄의 용서를 통해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하도록 도우며,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전하는 것이 사실이다.

10. 그러나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에는 "예수에 관한 복음"은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복음"을 대체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실천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니케아-칼케돈 기독론에서 보듯이,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본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교리는 "나는 신의 아들인 예수처럼 살 수 없다"로 이어져, 결국 "나는 예수처럼 희생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욕망에 대해 "신학적인 면죄부를 주었다"(한인철). 특히 "구원자 그리스도 신화"는 그리스도의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제국주의를 초래하였고, 현실 정치권력에 대한 신적인 재가를 뒷받침하고, 민중들의 죽음의 공포와 현실적 고통에 대한 위로와 심리적 안정감을 초월적으로 정당화하였으며,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유물론적 세계관과 풍요와 성공과 황금에 대한 우상숭배가 더욱 팽배하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성장주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자기비움의 실천을 간과한 채, 자본주의 사회 속의 물신숭배를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의 복음"이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 둔갑하여 권력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고, 민중들의 현실적 고통을 위로하고 심리적 안정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된 것은 실질적으로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 사이의 뛰어넘기 어려운 간격, 즉 "예수의 복음"의 철저한 자기희생적 명령들을 따르는 것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 차라리 그 명령들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타협을 "예수에 관한 복음," 즉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1. 어떤 이유에서건 이처럼 전통적으로 교회가 선포해왔던 복음이 예수 자신이 가르친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복음," 즉 "구원자 그리스도 신화"로 둔갑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적 적합성과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신인(divine-man) 영웅들과의 경쟁 속에서 그 선교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는 그 전통적 복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 신화"의 동정녀 탄생 교리와 육체 부활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대속의 교리 등은 결국 현대인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없는 복음은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의 복음이 될 수 없다. 신앙고백은 개인과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에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신앙고백에 정직하지 못한 경우, 기독교 신자들의 자기정체성과 행동, 교회의 행태는 신앙과 상관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존 캅의 지적처럼({교회 다시 살리기},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정직한 신앙고백만이 교회에 대한 헌신과 교회의 본질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12. 오늘날 한국교회의 관습적 신앙단계에서 매우 일반적인 예수상, 즉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한 신화적-문자적 고백은 창조과학만큼이나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심각한 윤리적 폐해를 초래한다. 교회에서 흔히 가르치는 것처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삼박자) 축복을 받고, 또 죽은 다음에는 영생을 누린다고 가르치는 마당에, 교인들이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는가?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비기독교인들보다 못지 않은 이유는 한국교회가 이처럼 "예수 이름으로" 은연중에 이기주의와 탐욕을 가르친 때문은 아닌가? 또한 세계적으로 1980년대 이후 경제불황 속에서, 특히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치열한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어, 기독교의 모든 주요 교단들이 급속하게 몰락하는데, 유독 가톨릭 교회와 오순절 교단과 복음주의 교단만 교세가 성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유산자들에게는 현세에서 자본의 무한 축적과 이윤의 무한 증식을 도모하게 하고, 무산자들에게는 내세에서의 영생을 약속하는 "예수에 관한 복음"은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주문만 외우면 복을 내려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거나, 현재의 착취와 경쟁, 박탈감을 견딜 수 있는 "민중의 아편" 기능을 충실히 감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교회 성장에 대한 판단기준은 그것이 예수를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성전체제와 같은  억압적 종교의 성장인지, 즉 예수가 저주했던 무화과나무처럼(마가 11:12-25) 백해무익한 종교체제의 성장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되는(요한 10:10) 예수 정신의 부흥인지를 판단기준으로 삼아야만 한다.  

13. 또한 언젠가 재림하여 마지막 심판을 통해 이 세상의 온갖 악을 청산할 예수는 교인들에게 마지막 심판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원수들에 대한 피의 보복과 전쟁의 화신으로 둔갑되지 않았는가? 상당수 평신도들이 "진노와 복수의 하느님/예수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의 대속의 교리가 가르쳐왔던 전통적인 하느님 이해, 즉 자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독생자의 "피"와 목숨마저 요구하는 하느님의 잔인성, 그 피에 굶주린 하느님의 모습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는가?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끔찍한 모습으로 그리는 하느님의 모습은 결코 예수가 믿고 가르쳤던 "아빠" 하느님의 자애로운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일부 성직자들은 이런 "진노와 복수의 하느님"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율법주의와 교회중심주의로 옭아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궁극적으로 지옥에 대한 공포심과 죄의식은 아동기의 네거티브 통제 방식일 뿐이지, 성숙한 인간을 위한 교육방식은 아니다. 환경파괴 문제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집단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 역시, 예수 재림을 통한 신자들의 휴거를 고대하는 희망이 이 세상 현실에 대한 무책임성을 조장한 때문이 아닌가?

14. 결국 "예수에 관한 복음"은 결과적으로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도 신화"가 특히 로마제국의 제국 종교가 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보편적 절대성에 입각하여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 "복종의 영성"(데이빗 그리핀)을 초래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로 설명함으로써 그 대리자를 자임하는 사제들의 권위주의와 교회 계급주의, 사제중심주의 등이 초래된 것은 예수의 섬김과 평등주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사탄적으로 행동한 것"(월터 윙크)이다. 기독교 2000 년 역사에서 "예수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만행들, 예를 들어, 유대인 학대와 재산탈취, 여성 억압,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종교전쟁, 노예제도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 유색인종에 대한 정복과 착취 등의 만행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특히 아메리카 제국의 보수 기독교 집단인 네오콘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과 점령,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을 사로잡고 있는 친미반공주의와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적 멸시와 차별은 예수를 잘못 믿어 생겨난 결과들이다. 지난 연말 동남아에서 수십만 명의 인명 피해를 냈던 쓰나미 재앙에 대해 어느 목사가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한 것은 목회자가 어떻게 "예수 이름으로" 하느님을 능멸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수십만 명의 이교도들의 목숨을 이처럼 파리목숨처럼 여기고 죽게 만드는 하느님은 기독교의 "그리스도 신화"가 낳은 괴물이지,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과는 전혀 반대되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이처럼 타종교인들에 대해 차별과 적개심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정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다. 즉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마태 5:45)을 가르친 예수는 타종교인들에 대해 적개심과 증오심을 가르친 바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일반적인 배타주의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이다. 기독교 역사상 예수의 정신에 따라 철저하게 이웃을 섬기며 평등주의를 실천하며 비폭력적으로 살려고 했던 종파들, 예를 들어, 메노나이트와 퀘이커 교도 등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는 사실 뿐 아니라, 교회가 예수를 배반하고 적그리스도가 된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다. 기독교가 역사상 가장 종족학살을 많이 자행했던 폭력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이며 가장 비영성적이며, 실제로 윤리적이라고는 거의 말할 수 없는 신앙이 되어 버린"(랭던 길키) 근본적 이유는 예수의 복음을 배반한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 신화"의 역사적 폐해들이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존 캅이 결론짓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들,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 유색인종들, 학자들, 동식물들에게 결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소식"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리들, 즉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그 배후에 놓인 역사적인 교리화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복음"을 다시 찾을 수 없다.

15.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정통적인 "그리스도 신화"의 거의 전부가 고대 지중해 지방의 밀의종교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똑같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예수는 신화다}), "그리스도 신화"에 매달려왔던 기독교의 절대성과 독특성, 진정성마저 부정되는 현실이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이제 더 이상 전통적인 "그리스도 신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있다. 즉 예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초기 제자들의 해석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특징적 면모들에 근거해야만 한다.

16. 그동안은 역사적 예수를 찾는 방법을 알지 못했었지만,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특히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을 통해 실종되었던 예수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는 자료 문제 때문에 복음서들 배후의 역사적 예수를 알 수도 없으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탐구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예수의 비유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예수 당시의 상황과 복음서들에 대한 학제간 연구, 새로운 문서들의 발견,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핵심적인 전통 교리들의 생성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예수의 가르침의 진정성 여부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 배경과 상황, 즉 유대인 전통의 종교적 배경과 로마제국의 지배 상황과 종교문화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 특히 예수 세미나의 연구는 "복음서들의 예수" 배후에 있는 "예수의 복음"을 규명하여, 예수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석된 복음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가르친 복음을 해명하고 그 복음에 충실하고자 한다. 초대교회의 예수 해석("복음서들의 예수")이 예수 체험("예수의 복음")에서 비롯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 연구는 초대교회 당시에 "메시아 마케팅"(로버트 펑크)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예수의 복음"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복음서들이 어떤 배경과 상황 속에서 어떤 구성원리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의 회당에서의 성서일과에 대응하기 위한 전통적인 미드라쉬적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이제는 매우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예수를 해방시켜라}).

17. "예수의 복음"은 예수 자신의 영적인 경험과 제국의 착취, 사회적 종교적 모순에 대한 경험에 근거하여 그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것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계속되어왔던 강대국들의 식민지 지배체제 속에서, 국가 회복의 꿈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가던 절망적 상황 속에서, 세례요한은 또 다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며 금식하면서 준비했던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였다. 그러나 "예수는 희망을 사랑으로 바꾸고, 미래의 종말론을 현재의 해방으로 바꿈으로써, 스스로를 종교와 묵시사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토마스 쉬한). 예수 세미나는 예수를 세례요한과 같은 묵시종말론자가 아니라, 유대교 신비가(마커스 보그)로서 인습적 지혜를 뒤집어엎는 전복적 지혜의 교사이며 사회적 혁명가(크로산)였다고 주장한다.

18. "예수의 복음"은 예수 자신의 하느님 체험에 근거한 복음으로서, 특히 사제들과 희생제사의 중개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 체험과 사회적 약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특별히 돌보시는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복음이다. 즉 성전체제가 가르쳤던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그에 입각한 사회종교적 차별에 맞서서, 그런 차별을 무색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정의에 근거한 예언자 전통의 복음이다. 예수 자신이 당시 제사장들의 고유 권한이었던 죄의 용서를 직접 선포했던 이유는 바로 예수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과 자비에 근거한 복음, 그 반사제중심적 복음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은 로마제국의 세계화 앞에서, 살인적 폭력과 착취, 성전체제의 억압과 배제에 맞서서, 황제의 나라와 그 통치가 아니라,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보여준 것이다. 즉 예수는 로마제국의 세계화라는 브로커 체제의 연고주의와 불의한 착취구조, 그로 인한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에 맞서서, 또한 성전체제의 "거룩의 정치학"이라는 사회종교적 차별과 배제의 구조에 맞서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근거한 무차별적 은총, 즉 인간의 무제약적 존엄성(버튼 맥)과 "함께 아파하는 삶의 정치학"(마커스 보그), 곧 평등주의에 입각한 "브로커 없는 나라"(크로산)를 가르쳤고 실행했다.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의 이런 체제전복성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탕자의 비유, 큰 잔치의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등에서 "내부인들," 곧 자신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그렇지 못한 "외부인들"에 대해 멸시하며 차별했던 자들이 마지막에는 그 자격을 박탈당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로버트 펑크). 또한 예수가 실천한 개방적인 밥상공동체와 무상의 치유, 그 평등주의는 "협력적 사회라는 복음"(아이슬러)의 공동체 운동이며, "지배 없는 탈지배적 질서"를 위하여 원수들에 대한 우리들 속의 증오심마저 뿌리뽑는 "비폭력의 복음"(월터 윙크)이다. 예수의 복음의 바로 이런 반제국주의적 성격과 반성전체제적인 예언자적 성격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었으며, 로마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정치범으로 처형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였다. 따라서 우리가 제국의 통치자나 재벌의 총수를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의를 위해 순교한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으며,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삶의 전형으로서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며, 또한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통치 질서가 우리의 인간성과 자유를 극대화하는 길이며, 공동체의 평화를 실현하는 진리임을 믿고 죽기까지 그를 본받아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 즉 이 땅 위에서 생명과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고백하는 것이다.

19. 이런 "예수의 복음"에 근거한 "예수에 관한 복음," 그 "그리스도 신화" 가운데 우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독생자)"이라는 고백은 구약에서처럼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예: 왕, 예언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표현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출발하여, 점차 생물학적인 표현(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하느님)으로 이해되었고, 마침내는 형이상학적 표현(삼위일체의 제2격인 성자)으로 이해되었다. 즉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하느님의 아들"은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명된 시점 역시 바울에게는 "부활 때"(롬 1:4), 마가에게는 "세례 때"(1:11), 마태와 누가에게는 "잉태 때", 요한에게는 "태초에"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초대교회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명된 때가 앞당겨졌다는 사실은 예수에 대한 신격화 작업이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는 예수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예수처럼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 창조와 구원의 과정에 헌신할 때, 예수처럼 우리도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우리에게 주신 잠재력을 극대화시킨 "하느님의 딸/아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20. 또한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문자적으로, 마리아의 자궁 속에 단 한 방울의 정액조차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예수가 임신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복음서 기자가 이처럼 문자적인 의미로 기록했다면 그는 마리아를 인간이 아니라 단성생식하는 아메바 같은 존재로 간주했다는 말이 된다. 또한 동정녀 탄생이 문자적으로, 산부인과적인 의미에서 사실이라면, 고대세계에서 예수 이외에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주장된 인물들, 예를 들어, 알렉산더 대왕, 플라톤, 크리슈나, 네로, 석가모니, 모하멧 등도 신성을 지녔다는 뜻이 되지만, 그들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은 그들이 신적인 존재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는 말이다. 마태복음서 저자가 1장에서 "처녀"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사야 7:14의 "알마"(젊은 여인)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그리스어 70인역에서 "파르테노스"(젊은 여인 혹은 처녀)라고 번역하면서 비롯된 것이며(스퐁 감독),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보그). 즉 동정녀 탄생은 인간 예수의 삶 속에서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과 구원을 경험한 제자들의 놀라움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예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인간성이 극대화된 상태"(스퐁 감독)를 위해 분투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의 성품과 능력"을 경험하도록 하려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확증으로 이해해야 한다.

21. 또한 "예수의 부활 및 승천"은 성경 문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디오로 촬영할 수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제국들의 살육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승리의 고백, 즉 "죽임의 죽음"(홍정수)이며 실제적인 체험으로서의 "육체 부활"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부활 이전에 이미 역사적으로 부활신앙이 먼저 태동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면,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폭력적으로 자행한 억울한 주검들에 대한 하느님의 해원(解寃)이 부활신앙의 핵심으로서, 제국들의 살인적 통치와 불의한 법 집행이 무효임을 판결한 하느님의 정의를 고백한 것이다(호세 미란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전략이 예수의 제자들의 "살과 피"를 통해 그대로 재현됨으로써(행 4:32-35), 예수의 "살과 피"가 계속적으로 경험되었으며, "강하게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였다는 의미에서 육체부활이다"(크로산).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부활의 증인," 곧 부활한 예수로서, 역사적 예수의 비전인 "하느님 나라"와 그 전략을 본받아 살아가려고 애쓰는 가운데, 하느님의 정의에 입각하여 이 땅 위에 생명과 평화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사람, 즉 하느님의 구원과 창조 역사에 헌신하는 사람이다.  

22. 예수의 "영혼 구원"은 제1 차축시대(800 BCE-200 CE) 이후 종교의 공통적인 구원론이었다. 즉 예수를 비롯해서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인도의 고타마 붓다, 중국의 공자, 노자, 장자,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이 이 시대의 정신적/종교적 거인들이었다. 이들이 모두 그 이전 시대의 원시종교의 특성들, 즉 인종적-부족적이며 일원론적이며 제의적인 자연종교들의 한계를 절감하고, 개인적으로 "시공의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을 음미"하고,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영원하며 초월적인 "저 세상"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추구하게 된 것은 고대 제국들의 무자비한 정복전쟁과 권력집중적 지배체제로 인한 민중들의 가중된 고통과 직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제1 차축시대 이후의 역사적 종교들이 지향했던 영원하며 초월적인 "저 세상"에 기초한 신화는 기독교의 근본이 되어, 성경은 저 세상으로부터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다시 저 세상으로 올라가고, 신자들은 죽은 후 저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신화를 낳았다. 그러나 로이드 기링이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것처럼, 제2 차축시대(1600-1800 CE)를 지나면서,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종교학, 성서학 등의 발전을 통해, 비판의 핵심은 "저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제2 차축시대 이후에는 예전의 역사적 종교가 세속적 종교로 바뀌며, "저 세상성"은 "이 세상성"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기독교가 전통적인 이원론적 세계관과 영육 이원론을 극복하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구호를 "이 세상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로 바꾸며, 이 세상에 대해 책임 있는 통전적인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그동안 무시해왔던 몸의 신학, 땅의 신학, 세계의 신학, 진화의 신학, 지구 공동체의 신학을 발전시킬 단계에 접어들었다.

23. 오늘 우리의 상황은 예수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화와 사회적 빈부격차의 심화, 종교적 차별과 사회적 약자들의 절망감이 매우 깊은 현실이다.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초국적 자본의 지배와 주변 제국들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직면한 상황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및 독도 영유권 주장, 그리고 미국의 대북 개입전략 등 제국주의에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예수의 복음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분명하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 즉 생명과 평화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을 가장 방해하는 세력은 제국들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세상 제국들의 지배와 착취에 맞서서 개인의 생명과 공동체의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하느님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성서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제국주의를 찬양할 수 없으며, 제국의 필연적인 멸망과 제국의 전쟁신학의 폭력의 가면을 벗기고 그에 저항하는 과제를 맡고 있다(월터 윙크). 예수는 제국의 정복과 폭력과 지배와 착취에 정면으로 맞서서, 섬김과 나눔과 비폭력과 협동을 가르쳤다. 사회적 경쟁과 배제, 차별과 무관심에 정면으로 맞서서, 예수는 서로 의존하고 품어 안을 것을 가르쳤다. 종교적 자만심과 증오심에 정면으로 맞서서 하느님의 자비에 기초한 사랑과 자비를 가르쳤다. 극심한 취업난과 높은 실업률,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의 악화 속에서 인간의 자아실현보다는 취업을 위한 비인간화 현실에서 예수의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모든 인간,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무제약적 존엄성과 서로 간의 섬김과 나눔, 협동과 함께 아파함의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구현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며 우리 이웃들도 잠재력을 극대화하도록 도울 때이다.  

24. 결론적으로 교회개혁은 교회 안에서 실종된 예수와 "예수의 복음"을 정직하게 되찾아 그의 비전과 전략을 계승하는 신학적 개혁이 원동력이 될 것이며, 예수의 정신에 입각한 구조개혁이 이루어질 때 성공할 수 있으며 사회적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특히 교회개혁의 일차적 추진자는 교회의 지도력을 갖고 있는 사제들(목사들)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특권과 권위주의를 포기하는 일에서부터 교회개혁은 구체화될 것으로 판단한다. 사제들(목사들)이 우선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은 호칭의 권위주의, 설교와 성만찬의 권위주의, 축도의 권위주의 등으로서, 이런 독점적 권위주의를 포기할 때, 예수의 정신과 예수의 복음이 뿌리내리기 시작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우리말 "목사"는 한문으로 牧師로서, 평신도를 "양떼"(짐승)로 간주하며 자신은 그들을 돌보는(牧) 스승(師)으로 간주하는 권위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더군다나 가톨릭의 "신부"는 한문으로 神父, 즉 하느님(神)의 권위와 아버지(父)의 권위 모두를 쥐고 있는 절대적 권위로 치장한 호칭이다. 유교 전통이 아직도 우리의 생활과 의식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현실에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이런 외적인 권위는 예수의 정신을 가리는 것이 되기 쉽다. 차라리 담임자, 혹은 사제라는 호칭이 예수운동을 계승하는 교회에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더군다나 민주적인 질서에서 성장한 세대들은 호칭이나 지위를 통한 외적인 권위에 대해 식상해 하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존경심에 기초한 진정한 권위를 받아들이기 마련인데, 사제들의 진정한 권위는 삶의 성실성과 언행일치, 하느님의 통치질서의 기본인 섬김의 자세를 통한 지도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와 성만찬, 축도 역시 예수가 반대했던 "브로커 체제," 즉 연고주의와 사제중심주의와 계급중심주의를 되살리는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성경공부 중심으로 하며, 평신도들도 설교와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훈련시키는 일이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판단한다. 끝으로 평신도들을 위한 신학교육은 교회개혁뿐 아니라 교회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으로서, 영아세례는 있고 견신례(입교식)를 위한 집중교육은 없는 현실, 심지어 세례예비자 교육마저 형식적으로 하는 현실은 사제들(목사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실로서 시급하게 시정되어야만 한다.

25. 종교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유대 기독교 전통의 "하느님의 강"(그레고리 라일리)은 고대 제국들의 지배체제의 억압에 맞서서 해방을 갈구하던 노예들에 의한 탈출과 반란에서 시작되어 가나안의 거친 골짜기들과 험난한 광야들을 거치며 메소포타미아, 특히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에서 흘러온 지류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지류들과 합류하여 점차 다양한 요소들을 품은 큰 강물이 되어 서구를 거쳐 줄기차게 흐르다가 한반도까지 촉촉하게 적시는 강물이 되었으며, 이제는 지구촌 시대에 전 지구적인 "신앙의 바다", 그 생명의 바다로 힘차게 흘러들고 있다. 하느님의 강은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의 심성과 한국의 문화에 어떤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으며, 어떤 폐해를 안겨주었는가? 가부장적이며 신분제 사회에서 운명론과 미신에 빠져 하느님의 정의와 도움을 갈망하던 목마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강은 맑은 샘물이었다. 즉 하느님 앞에서의 존엄성과 평등성, 성령 안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일깨워주었으며, 유교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초월적 하느님에 의한 현실의 상대화와 처음으로 "회개"를 통한 새로운 변혁의 주체적인 삶을 가능케 하였으며, 제국의 지배에 맞서 싸우던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공동체 현실을 희망 가운데 바라보며 헌신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한국교회의 폐해를 극복하여, 오늘날 세계사의 탁류와 한반도의 먹구름 속에서, 특히 오늘날처럼 교회 안과 밖에 사탄의 세력들과 우상숭배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생명의 강줄기를 통해 우리의 개인적 삶과 공동체를 정화시키며, 다음 세대들을 위해, 그리고 세계적 종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지구적 영성"을 위해, 우리가 이 "하느님의 강"에 새롭게 창조적으로 덧붙일 요소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오늘 우리들 예수의 제자들의 믿음과 실천이 이 두 가지 역사적 과제 모두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본인은 아직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스물 다섯 개 신학논제를 한국의 신학대학들과 교회들의 대문들 위에 걸어놓고,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적 논의가 시작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하는 바이다.
                                                                    
                                             2005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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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07.10.21 09:02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논제"에 대한 해명


    김준우(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 기독교윤리학 전공)

    본인이 2005년 4월 25일에 발표한 "한국개신교의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논제 17개"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말을 듣고 간단히 해명할 필요를 느낍니다. 본인은 신학자의 글이 문제될 때 흔히 "신학은 자유주의적이지만 신앙은 보수적"이라는 식으로 해명하는 태도는 신학자의 신앙양심을 속이는 짓이며, 신학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신앙의 고백임을 믿습니다.

    1. 신학논제를 쓰게 된 동기

    본인이 "신학 논제"를 발표한 이유는 그 다음날 감신대 신학과 학술제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주제로, 유태엽 교수가 발제하고 본인과 조경철 교수에게 논찬이 맡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인은 신약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 년 동안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 성과를 번역 소개하는 일에 헌신하였기 때문에 학술제 주최측에서 논찬을 맡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태엽 교수의 발제문이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과 자료 문제 등 지나치게 기초적이며 세부적인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의 소견으로는 오해의 소지도 많았기 때문에, 논찬을 통해 유 교수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할 뿐만 아니라(별첨자료 참고), 최근의 예수 연구의 교회사적 의미와 신앙적 의미를 학생들에게 포괄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쇠퇴 위기와 관련하여 새로운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천명하고, 새로운 종교개혁을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신학적 개혁(복음의 재발견)을 위해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었기 때문에, 학술제에 참석하는 신학생들에게 그 연구 성과의 신앙적 의미를 간결하게 요약해서 설명하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신학논제" 형식을 빌어 급하게 썼던 것입니다. 그 글의 마지막에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본인은 이 열일곱 개 신학논제를 한국 개신교회의 대문들 위에 걸어놓고,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적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물론 그 후 몇 차례 수정을 거쳐 "25개 논제"로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본인은 그동안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를 번역 소개하면서, 21세기의 기독교 신학은 반드시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들을 진지하게 검토해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서구의 탁월한 예수 연구가들은 새로운 문서들의 발견, 새로운 방법론의 개발, 특히 학제간 연구를 통해 매우 놀라운 학문적 업적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21세기의 목회자들이 최근 예수 연구의 성과들을 도외시한다면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단단한 기초를 쌓지 못한 채 신학 작업을 하게 되어, 신학적 성찰이 부족한 채로 목회를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세계화로 인해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될 뿐 아니라, 인구의 노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또한 농촌이 급속도로 붕괴하는 현실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생 동안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하게 될 가능성까지 있는 신학생들에게 예수의 복음과 영성을 올바로 가르치는 것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개신교 주류 교단의 전반적인 쇠퇴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예수 연구는 평신도들의 예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붐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성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정직한 신앙"을 특별히 강조하는 "진보적인 작은 교회 공동체"(progressive small Christian communities)가 미국 전역에서 2만여 개씩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의 예수 연구가 "성장 이후 시대"의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수 연구의 성과들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할 필요를 느껴 그 "신학 논제"를 쓴 것입니다.
    셋째로, 한국에서 그동안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를 진지하게 검토해온 신학대학들은 한신대 신학대학원,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영남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강남대학교 신학과 등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본인이 운영하는 한국기독교연구소로 매 학기 교재 주문이 들어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연세대학교의 남재현 박사와 한인철 박사는 오랫동안 일반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각각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 연구서를 교재로 가르쳐왔습니다. 이처럼 일반대학생들조차 예수 연구의 대가들의 저술을 교재로 배우는 상황에서, 본인은 감신대가 토착화신학 전통을 확고한 성서적 바탕 위에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감신대의 좀더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를 숙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 논제를 썼으며, "신학적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학문적 열정으로, 비록 부족한 글이지만 신학적 논의를 위한 기본 논제는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감신대 교수들 모두에게 그 글을 배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기대했던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적 논의"는 단 한 번도 시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치 역사적 예수 연구가 "이단적"인 것처럼 비난과 단죄부터 난무하는 것을 본인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본인이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를 소개한 방식이 다소 서툴렀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 연구의 성과들이 지니는 신앙적 의미를 가능한 한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조금 과격하게 느껴지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약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은 본인의 예수 연구 소개를 비난하기는커녕 매우 반기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 4월 27-28일 충북 영동 단해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전국조직신학자대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이러한 교회개혁과 발전에 대한 열망과, 신앙의 터전을 역사의 예수에게로 돌이킴으로서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전제를 떠나서 개개의 표현에 집착하여 문제를 지적하는 신학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입장에 대한 대전제를 놓치지 않는다면 본인의 신앙고백과 교회 신앙 발전의 여망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본인의 신앙적 배경과 신학적 문제의식

    본인은 어머니의 삶을 지켜보면서 신앙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서른 세 살에 남편을 잃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교교회에서 한준석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삶의 위로와 용기를 얻고 찬송과 기도로 두 아들을 목사로 키우신 분입니다. 본인 역시 어려서부터 교회를 통해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항상 감사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본인이 중고등학생 시절과 대학 시절에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분들은 박근옥 선생님, 박종선 목사님, 고 마경일 목사님, 조영민 목사님, 그리고 박대선 감독님입니다. 그분들은 모두 "정직한 신앙"을 가르쳐주셨으며, 신앙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본인이 1972년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감신대에 학사편입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1983년 미국 남감리교 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거쳐 1992년 드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본인의 신학적 문제의식은 언제나 이 세상의 엄청난 고통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겪고 계시는 産苦의 고통과,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고통과 눈물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고통과 눈물을 없애주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을 기도로 바꾸어줄 만큼 기쁨을 주는 해방의 소식이며, 교회는 그런 구원을 경험하고 나누는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형편에서도 본인의 아내가 평택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햇살 사회복지센터를 시작하도록 적극 후원하였던 것입니다.

    3. 교회의 쇠퇴 위기와 그 원인분석 및 대책으로서의 역사적 예수 연구

    본인이 한국교회의 쇠퇴 위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입니다. 본인이 쓴 <21세기 기독교 총서> 발간사는 이 세상의 무고한 생명체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의 현실 앞에서 한국교회가 당면한 쇠퇴 위기, 특히 젊은층과 고학력자가 교회를 이탈하는 지적인 위기와 윤리적인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고, "정직한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한 글로서, 김경재 교수는 "김준우는 '21세기 기독교총서'를 발간하는 변에서 최근 한국 기독교 교인증가세의 둔화와 신뢰도 하락의 원인분석을 총체적으로 잘 밝혀놓았다"고 평가한 글입니다(한국조직신학회, {성장 이후 시대의 교회와 신학: 회개와 화해}, 2007, 7). 심지어 수원가톨릭대학교의 한 교수님도 그 "발간사"를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말을 직접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본인이 "신학논제" 앞부분에 설명한 것처럼, 본인은 젊은층과 고학력자가 교회를 떠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은 "정직한 신앙"을 회복하는 길이 교회개혁의 관건이라고 보고,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는 "정직한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발달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신화적이며 문자적인 신앙단계와 관습적인 신앙단계를 거쳐, 청년기의 비판적이며 주체적인 사고방식을 배우게 될 때, 물려받은 신앙과 교리에 대한 지적인 혼란을 겪기 쉬운데, 이 시기에 일반적으로 "정직한 신앙"을 가르쳐주지 못하기 때문에, 젊은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직접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대가들인 로버트 펑크, 존 도미닉 크로산, 마커스 보그, 월터 윙크, 리처드 호슬리 등의 예수 연구서들과 미국 감독교회 감독으로 24년 동안 봉직한 존 쉘비 스퐁 감독, 토마스 베리의 중요한 저작들을 직접 번역 출판했으며, 그밖에도 존 캅, 로이드 기링, 리처드 루벤슈타인, 버나드 브랜든 스캇, 그레고리 라일리, 돈 큐핏 등 세계적인 대가들의 저술들을 번역 의뢰하여 대부분 그 저자들의 책들을 국내에서 최초로 출판했습니다. 또한 <영성시리즈>로 11권과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 시리즈>로 에버리 덜레스, 윌리엄 윌리몬, 그래함 존스톤 등 실천신학의 대가들의 저술 등, 모두 70여 권의 책을 출판한 것은 모두 한국교회를 갱신하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을 주기 위한 본인의 신앙적 노력과 땀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4. 신학논제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에 대한 해명

    본인이 "신학논제"의 제목을 "교회 안에서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고 붙인 것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그 글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첩경은 "교회 안에서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며,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를 통해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논지를 주장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의 신자들이 기독교 전통 교리들("예수에 관한 복음") 속에 표현된 당시의 신화적 언어들을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전통 교리들의 역사적 뿌리경험(예수 안에서의 하나님 체험)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교리들의 생성과정을 정직하게 학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들은 "예수의 복음"을 정직하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논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의 "신학논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선포되는 복음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삶과 죽음을 초기 예수의 제자들이 당시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해석한 "예수에 관한 복음"(신앙)이며, 예수 자신이 가르친 "예수의 복음"(역사적 사실)과는 상이한 것이라는 신약학자들의 오래된 결론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예수에 관한 복음"(교리들)은 신학적으로 애당초 "예수의 복음"(역사적 체험)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과, "예수에 관한 복음"의 핵심인 성육신 교리, 대속론 교리, 삼위일체 교리 등을 오늘날 고등교육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배운 이들이 더 이상 정직하게 고백할 수 없게 된 이유는 그 신화적 언어들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복음"이 그 역사적 토대인 "예수의 복음"에서부터 이탈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리고 최근의 예수 연구를 통해 "예수의 복음"이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 발전된 역사적 교리화 과정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 교리화 과정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면 "예수에 관한 복음"(신앙)을 다시 "예수의 복음"(역사적 사실)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어, "예수에 관한 복음"(교리들)을 주체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주장한 것입니다.
    본인은 특히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교회사에서 "예수 이름으로" 저질러진 많은 폭력적 만행들은 교회가 예수를 배반한 때문이며, 존 캅이 지적했듯이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한 채 제국주의적이며 배타적인 모습으로 둔갑하게 된 교리적 이유를 밝히고, 최근의 예수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예수의 복음"을 간략하게 요약했으며, "예수의 복음"에 기초한 "예수에 관한 복음" 중에서 특히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와 "동정녀 탄생"과 "영혼 구원"에 대한 이해 등을 어떻게 오늘날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닐 수 있도록 새롭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가를 본인의 신앙 양심에 따라 최대한 명료하게 제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전통 교리들에 대한 이런 교리사적 발전과정, 조직신학적 재해석은 교회의 일반적인 신앙적 정서와는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며, 최근의 예수 연구의 성과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일반 목회자들로서는 위험하게 생각되는 것이 당연할 테지만, 오늘날 세계의 대부분의 권위 있는 신학대학들에서는 강의실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 연구의 성과들을 통해 본인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육체부활의 교리화 과정을 배움으로써,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육체부활에 대해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본인의 신앙을 더욱 경건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신학논제"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보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였던 것은 "예수에 관한 복음"에 입각한 것이며,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와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예수의 복음"에 근거하여 "예수 믿기"는 곧 "예수 살기" 혹은 "예수 따르기"를 뜻하는 것이어야 하며, 한국교회가 이처럼 "예수 살기"로 바뀔 때, 진정한 교회개혁이 가능하며, 한국교회의 쇠퇴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목회자들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어느 신학자든 예수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임을 본인은 지난 1992년의 감리교 종교재판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축자영감설과 성경문자주의에 입각한 한국의 대부분의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교회 현실에서, 전통 교리를 수호하는 교회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정직한 고백이 교회의 신앙 전통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교권으로 억압하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대학 강의실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며 미래의 목회자들인 신학생들을 상대로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을 현재 교단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이 전통 교리를 수호하는 보수주의적 신앙 관점에서 문제삼을 경우에는 창조적인 신학이 발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세계적인 대가들의 예수 연구 성과를 정직하게 소개하는 일조차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오늘날 신학자의 신학 방법론은 예수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 철저하게 따르는 길이 진정한 보수주의 신학이며 복음주의적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는 당시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수호하려 했던 전통 교리들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의 방법론("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을 택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처형하는 데 앞장 선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자신의 신학 방법론에서 비롯된 새로운 하나님 고백, 새로운 복음의 선포 때문이었다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본인은 이제까지 신학을 공부한 30여 년 동안 감리교의 웨슬리의 사회복음주의적이며 개방적인 신학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으며, 감리교단에서 성장할 할 수 있었던 것과 더불어 15년 넘도록 시간강사로서 혹은 비정규직 교수로서나마,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왔음을 고백하는 것으로써, 본인의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논제"에 대한 해명의 글을 마치겠습니다.(2007년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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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8.26 02:16

    2005년 감신대 신학과 학술제 논찬

    역사적 예수 연구사의 새로운 돌파구

    김준우 교수

    유태엽 교수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현재와 바람직한 방향성"이라는 글의 1부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고, 2부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한계와 바람직한 제안을 (1) 자료 문제, (2) 이적의 문제, (3) 역사적 예수와 실제적 예수, (4) 상황과 텍스트, (5) 방법론에 대한 평가와 제안의 순서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본 논찬자는 신약학 전문가가 아니라 기독교윤리학은 전공한 학자로서, 단지 최근의 예수 연구, 특히 [예수 세미나]의 핵심 학자들인 존 도미닉 크로산과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월터 윙크, 존 쉘비 스퐁, 버나드 브랜던 스캇, 로이드 기링, 그리고 그레고리 라일리와 리처드 호슬리의 주요 저작들을 근거로 하여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1. 우선 유태엽 교수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면서, 오늘날 교회가 "예수"가 실종된 상태라는 사실도 모른 채, 즉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던 예수의 부모들처럼, 예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교회가 깨닫지 못한 채,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 신화"만 믿고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특별히 지적하지 않고 있다. 예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을 보고 믿기보다는, 예수의 손가락, 즉 예수 자신을 믿음의 대상(그리스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초래되는 각종 폐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믿고 의도적으로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십자가를 졌다던가, 피의 공로에 의한 대속의 교리를 가르쳤다던가, 자신을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는 결코 가르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삶 속에서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한 초기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희생제사 제도와 속죄양 제도에 입각하여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고백하고, 점차 예수를 신격화시켜 "구원자 그리스도 신화"를 만들어나간 것이 교회의 정통주의가 되었지만, 오늘날까지 그 신학적 폐해들 역시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존 캅이 결론짓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들,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 유색인종들, 학자들, 동식물들에게 결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교회가 선포해왔던 복음이 예수 자신이 가르친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복음," 즉 "그리스도 신화"로 둔갑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신앙고백적 필요성과 선교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리스도 신화"의 동정녀 탄생과 육체부활 등에 대한 문자적 이해로 인한 근본주의의 폐해들, 즉 전근대적이며 신화적 세계관으로 해석된 "그리스도 신화"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교리에 입각한 유일회적 구원사건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교리들로 만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 그리스도의 직분을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로 설명함으로써, 그 대리자들인 사제들(목사들)의 권위주의와 사제 중심주의 및 교회 중심주의 등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Timothy Freke & Peter Gandy의 The Jesus Mysteries(1999, {예수는 신화다}), Jesus and the Lost Goddess(2001)을 통해, 기독교의 "그리스도 신화"의 거의 전부가 고대 지중해 지방의 밀의종교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똑같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리스도 신화"에 매달려왔던 기독교의 절대성과 독특성, 진정성마저 부정되는 현실에서,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교회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2. 유태엽 교수는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비유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예수 당시의 상황과 복음서 본문들에 대한 학제간 연구, 새로운 문서들의 발견,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들의 생성과정에 대한 연구들은 실종된 예수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 본 논찬자의 판단이다.

    3. 유태엽 교수는 (5) "방법론에 대한 평가와 제안"에서 "교차문화적 연구는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아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 논거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면, 크로산은 세례요한이 정치적 상황에서 죽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요세푸스를 인용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역사는 믿을 만한가? 크로산에 의하면 마가의 이야기는 무시되고, 변절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역사가이기에 상당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연구방법론을 오해한 것이다. 우선 크로산이 {역사적 예수}에서 밝힌 예수 연구 방법론은 "교차문화적이며 통시적인 사회인류학을 이용한 거시적 차원과, 헬레니즘 혹은 그리스-로마의 역사를 이용한 중간적 차원, 그리고 예수에 관한 특정한 말씀과 행적, 이야기, 일화, 고백과 해석의 문헌을 이용한 미시적 차원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47)이며, "이 세 가지 차원, 즉 인류학적이며, 역사적이며, 문헌적인 차원들 모두는 효과적인 종합을 위해 충분히 동등하게 협조해야만 한다"(47)고 말한다. 그러나 크로산은 이런 종합적이며 상호보완적인 연구방법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본문 자체의 문헌적 차원을 어떻게 취급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48)고 못박고, 실제로, 요세푸스를 매우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심지어 크로산은 요세푸스를 비판하기 위해 한 장 전체(제5장: 귀족 출신의 역사가)를 할애하고 있으며,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은 전체적으로 크로산이 요세푸스를 비판적으로 읽는 탁월한 방법을 보여준다.

    또한 유태엽 교수는 (1) 자료 문제에서,

    "이러한 몇 가지 방법론에 비추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주도하는 몇몇의 학자들의 작업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급진적인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는 외경 복음서들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정경 복음서보다 시대적으로 앞서며, [예수는 누구였는가]를 말할 수 있는 더욱 더 신뢰할만한 가이드라고 전제한다. 예를 들면, [도마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어록들은 60년 혹은 60년대에 이미 존재하였던 것의 수집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고 (특정 학자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채) 지적하고, (5) 방법론에 대한 평가와 제안에서도,

    "예수 세미나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정경복음서보다 월등한 가치를 정경 외 자료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 지적했다. 그러나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이 "정경복음서들보다 정경 외 자료들에 월등한 가치를 두고 있다"는 유태엽 교수의 주장은 예수 세미나 학자들의 방법론에 대한 오해일 뿐, 사실과 다르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의 의미}에서 도마복음이 2세기 전반에 기록된 것으로서 자신의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가 아니라고 못박는다.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은 약 50년 전에 에집트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Q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들(모두 114개)을 수집한 것이다. 현재의 형태로 된 도마복음은 아마도 2세기 전반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나는 도마복음이 공관복음서들과는 독립된 것이며, 다른 자료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몇 초기 전승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는 아니다.(37)

    한편 로버트 펑크는 {예수에게 솔직히}에서, 도마복음의 초기 판본이 이야기 복음서들보다 앞선다고 주장하지만(186), 그러나 {예수에게 솔직히}의 핵심 부분인 제2부 "예수의 복음"에서, 펑크는 도마복음서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외경 복음서들에도 별로 의존하지 않은 채, 거의 전적으로 정경 복음서들의 비유들에 근거하여, "예수의 복음"을 해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3부 "복음서들의 예수" 역시 거의 전적으로 정경 복음서들에 근거하여 예수 전승의 순화과정과 메시아 마케팅 과정을 해명하고 있다.

    또한 도미닉 크로산 역시 {역사적 예수}에서, 스티픈 패터슨의 연구를 인용하여 "62년 야고보가 죽기 전에 집성된 것이 그 후에 현재의 본문처럼 확대되었음을 암시한다"(608쪽)라고 인용하지만,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초점이 된 제1 전승층(30-60 CE)의 13개 자료들 가운데 하나로서 취급할 따름이며, 도마복음과 Q복음의 병행구절들에 상당수 의존한다는 점에서, "정경 외 자료들에 월등한 가치를 둔다"는 비판은 옳지 않다고 판단된다. 특히 크로산은 예수 전승 522개의 단락들(complexes)을 다루는 그의 "방법론적 원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본문의 출처가 많을수록 "더욱 진지하게 다루어야만 한다"(55)는 원칙 아래, 복수출처의 본문들에 비중을 두어 치밀하게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하였기 때문에, 유태엽 교수의 주장처럼 "월등한 가치를 정경 외 자료들에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역사적 예수}의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도 그렇거니와, 제3부 "브로커 없는 나라"의 분석 자료는 학제간 연구를 위해 필요했던 "정경 외 자료들"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그 핵심적 논거는 거의 전적으로 정경의 자료들에 근거한 것이다.

    4. 유태엽 교수는, 최근의 예수 연구자들이 예수의 치병 이적을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한다고 판단하고, 예수가 실제로 "병을 치료했다"는 입장에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커스 보그는 예수가 "탁월한 치병자였음에 틀림없다"고 못박는다({예수의 의미}, 115). 그러나 로버트 펑크는 비유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예수의 치병 기적은 메시아 마케팅의 일부로 간주한다. 또한 크로산은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해, {역사적 예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13장 "주술과 식사"에서, 귀신 축출이 "제국주의라는 마귀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정신분열적 상태를 치유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개인화된 상징적 혁명"(509)이라고 판단하며,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에서는, 예수가 행한 치유기적에서의 중심문제를 다루면서, "예수는 그 질병에 따르는 제의적인 불결과 사회적인 배척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가련한 사람의 고통을 치유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132)이지만, 물리적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보다 "사회적 세계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인데, 이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132)라고 주장한다.

    5. 예수의 수난 이야기와 [베드로 복음서]와의 연관성과 관련하여, 유태엽 교수는 "크로산의 판단에 의하면 수난 이야기는 실제로 발생한 것의 기억이 아닌 구약성서 구절들에 의해 제안되어진 상상적 창조들에 의해 기초되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매우 초기의 설명을 포함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크로산 교수의 치밀한 수난 이야기 분석뿐만 아니라, 복음서들의 구성원리에 관한 마이클 고울더 교수의 이론과 그것을 발전시킨 존 쉘비 스퐁 감독의 {예수를 해방시켜라}의 설득력 있는 관점에서 평가할 때, 매우 이해하기 힘든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6. 결론적으로 유태엽 교수는 "최근의 학자들의 노력은 역사적 예수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주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제안을 위해서라도 그러한 상상을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만약에 학자들이 학문적 시도를 통해 실제에 가까운 예수(?)를 발견해준다면 우리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아픔이 있어도 그것을 수용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러한 예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본인의 판단으로는, 최근의 예수 연구자들, 특히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160여 명의 학자들이 사용한 자료들과 치밀한 방법론을 통해, 이제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사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였으며,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아래 실종되었던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에 성공하였다고 보며, "복음서들의 예수" 이전의 "예수의 복음"을 발견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로이드 기링이 자세하게 해명했듯이, 지난 400년 동안의 지성사는 더 이상 "그리스도 신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유태엽 교수가 말하는 "실제에 가까운 예수(?)"는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선포해왔던 "그리스도 신화"가 말하는 신화적 도그마의 예수인가, 아니면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재구성한 역사적 예수인가? 과연 어느 예수가 더욱 설득력을 지니며, 교육받은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주는가? 이런 점에서 [예수 세미나]의 핵심적 학자들이 재구성한 예수상은 오늘의 컨텍스트, 즉 아메리카 제국이 주도하는 지구화 시대와 탈기독교시대를 맞이한 제3천년기에 기독교의 갱신과 교회개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신학적 돌파구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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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0.08.26 02:31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 논제 17개

    교회 안에서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1.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이것은 군사독재 정권이 1960년대부터 시작한 경제개발의 저곡가-저임금 정책과 도시화-산업화 과정으로 인해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급속도로 해체되고, 전통적 가치관이 혼란을 겪는 가운데,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 고향을 떠난 뿌린 뽑힌 사람들의 사회 심리적 소외감에 편승하여, 남한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될 만큼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1980년대부터는 민주화 투쟁을 거쳐 소비사회로 진입하게 되어, 체제에 대한 비판정신과 여가문화가 점차 확산됨으로써, 1990년대부터는 교회성장이 정체되고, 교회성장주의의 폐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30여 년 동안 계속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교회성장주의가 초래한 개교회주의, 대교회주의로 인한 교인쟁탈전, 무리한 교회 건축, 해외선교사 파송 경쟁, 교회의 사유화와 세습, 상명하복식의 비민주적 권위주의, 교회내 여성 지도력의 부재, 교단분열과 교단장 선거를 둘러싼 억대의 금품살포와 파벌주의 등의 외적인 문제들, 그리고 한국교회의 신앙적인 측면에서 일반적인 기복신앙과 내세주의가 초래하는 온갖 폐해로 인해,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 본연의 사명을 망각한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특히 일부 성직자들과 기독교인들의 타락과 비리로 인해, 교회가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한 것에 대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 시작한 때문이다. 더군다나 2000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분야는 일정부분 민주화/투명화 되고 있지만,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마지막 남은 성역"으로서 비민주적 권위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정직한 질문을 봉쇄하고, 비판정신을 압살하고, 자주적인 사고능력을 박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탈권위주의에 반대하며, 국가보안법 철폐, 사립학교법 개정, 과거사 진상규명법 등 각종 개혁정책에 반대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된 반개혁 세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 한국의 개신교회가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개혁을 더욱 시급한 과제로 만들고 있다. 한국의 17개 주요 개신교단이 각각 정부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인 수는 1995년의 1,450만 명에서 2001년의 1,282만 명으로, 6년 동안 약 11.6%가 감소하였다. 이처럼 급격한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은 젊은 층과 고학력자가 이탈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한국사회의 대졸자 비율이 74%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학력자와 젊은 층의 이탈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현재 농어촌의 몰락 속도와 도시 교회의 노령화 추세로 볼 때, 교회개혁은 한국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전세계적인 탈기독교 시대에 서양의 주요 교단들은 교인수가 매 10년마다 절반으로 줄어드는 추세에 있어, 한 세대가 지나면 제도적 교회의 죽음이 현실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국교회보다 더욱 훌륭한 교육시설, 교재, 교사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교회가 임종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더 이상 성장주의 신학과 현재의 교회 구조로는 이 근본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며, 이 근본적 위기에 대한 진지한 원인분석과 철저한 대책을 통해서만 교회개혁이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졌다.

    3.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모범적 사례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1세기 예수운동이다. 16세기에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제도적인 구조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직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경제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차적으로는 "복음의 재발견"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1세기의 예수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유대교의 하느님 이해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 이해에 근거한 "복음의 발견" 때문이었다. 즉 교회의 제도적인 구조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개혁의 원동력과 추진력이 되는 내면적인 개혁, 즉 신학적인 개혁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가 당면한 사회적 신뢰성 상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신학적인 위기, 그 지적인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위기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신학교육의 혁신 없이, 최근 신학대학교 총장들이 한국교회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영성교육과 정직성을 강조하고, 한국교회의 원로들이 죄책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교회의 쇠퇴 추세에 대응하기조차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

    4.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위기의 본질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집으로 돌아오던 예수의 부모들처럼(누가 2:44), 예수가 교회 안에서 실종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처럼 예수 없는 교회는 결코 기독교의 교회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이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의 뿌리이다. 즉 예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믿으라고 한 새로운 비전 하느님 나라를 보고 믿기보다는, 예수의 손가락, 즉 예수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선포해왔던 복음은 주로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이 해석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 신화"였지, "예수의 복음," 즉 예수 자신이 가르친 복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처음 제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했지,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를 예수의 제자들의 가르침과 후대의 교리들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선포해왔던 원죄의 교리와 예수의 보혈에 의한 대속적 구원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주로 바울의 가르침인가? 이 세상(cosmos)과 인간의 육체(sarx)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인가?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들에게 노예의 도덕, 즉 굴종과 체념을 가르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 지도자들의 왜곡인가? 기독교인들의 탈정치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처럼 "예수의 복음"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누구의 제자들인지를 확인하는 정체성의 물음이며 신앙고백의 정직성의 물음인 동시에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5.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선포해왔던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 신화"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세상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여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언젠가는 재림하실 분으로서, 예수 자신, 곧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분이다. 전통적으로 이렇게 고백해왔던 "그리스도 신화"는 예수의 의미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한 특정한 해석이며 신화적 표현이었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억압과 성전 지배체제의 착취에 맞서서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의 질서에 정반대되는 통치질서, 즉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가 목숨을 바쳤던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사에서 신자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내세화되거나,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로 신령화되거나, 제도적 교회가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되어버림으로써, 탈정치화되고 비역사화되었다. 따라서 예수 자신이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든가, "피의 공로에 의한" 대속의 교리를 가르쳤다든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는 결코 가르친 바 없으며,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제자들이 뜻밖에 경험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삶 속에서 발견한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과 구원에 대한 체험과 감격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희생제사 제도와 속죄양 제도에 입각하여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신성을 지닌 분으로 점차 신격화시키고, 고대 사회의 높은 영아사망률 때문에 영아세례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원죄 교리를 발전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자 그리스도 신화"를 만들어나간 것이 교회의 정통주의가 되었던 것이다.

    6. 이처럼 전통적으로 교회가 선포해왔던 복음이 예수 자신이 가르친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복음," 즉 "그리스도 신화"로 둔갑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적 적합성과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신인(divine-man) 영웅들과의 경쟁 속에서 그 선교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는 그 전통적 복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 신화"의 동정녀 탄생 교리와 육체 부활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대속의 교리 등은 결국 현대인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없는 복음은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의 복음이 될 수 없다. 신앙고백은 개인과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에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신앙고백에 정직하지 못한 경우, 기독교 신자들의 자기정체성과 행동, 교회의 행태는 신앙과 상관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존 캅의 지적처럼({교회 다시 살리기},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정직한 신앙고백만이 교회에 대한 헌신과 교회의 본질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7. 오늘날 한국교회의 관습적 신앙단계에서 매우 일반적인 예수상, 즉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한 신화적-문자적 고백은 창조과학만큼이나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심각한 윤리적 폐해를 초래한다. 교회에서 흔히 가르치는 것처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삼박자) 축복을 받고, 또 죽은 다음에는 영생을 누린다고 가르치는 마당에, 교인들이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는가?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비기독교인들보다 못지 않은 이유는 한국교회가 이처럼 "예수 이름으로" 은연 중에 이기주의와 탐욕을 가르친 때문은 아닌가? 또한 세계적으로 1980년대 이후 경제불황 속에서, 특히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치열한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어, 기독교의 모든 주요 교단들이 급속하게 몰락하는데, 유독 가톨릭 교회와 오순절 교단과 복음주의 교단만 교세가 성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유산자들에게는 현세에서 자본의 무한 축적과 이윤의 무한 증식을 도모하게 하고, 무산자들에게는 내세에서의 영생을 약속하는 "예수에 관한 복음"은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주문만 외우면 복을 내려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거나, 현재의 착취와 경쟁, 박탈감을 견딜 수 있는 "민중의 아편" 기능을 충실히 감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8. 또한 언젠가 재림하여 마지막 심판을 통해 이 세상의 온갖 악을 청산할 예수는 교인들에게 마지막 심판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원수들에 대한 피의 보복과 전쟁의 화신으로 둔갑되지 않았는가? 상당수 평신도들이 "진노와 복수의 하느님/예수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의 대속의 교리가 가르쳐왔던 전통적인 하느님 이해, 즉 자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독생자의 "보혈"마저 요구하는 하느님의 잔인성, 그 피에 굶주린 하느님의 모습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는가?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끔찍한 모습으로 그리는 하느님의 모습은 결코 예수가 믿고 가르쳤던 "아빠" 하느님의 자애로운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일부 성직자들은 이런 "진노와 복수의 하느님"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율법주의와 교회중심주의로 옭아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궁극적으로 지옥에 대한 공포심과 죄의식은 아동기의 네거티브 통제 방식일 뿐이지, 성숙한 인간을 위한 교육방식은 아니다. 환경파괴 문제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집단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 역시, 예수 재림을 통한 신자들의 휴거를 어서 속히 고대하는 희망이 이 세상 현실에 대한 무책임성을 조장한 때문이 아닌가?

    9. 결국 "예수에 관한 복음"은 결과적으로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도 신화"가 특히 로마제국의 제국 종교가 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에 입각하여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를 초래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로 설명함으로써 그 대리자를 자임하는 사제들의 권위주의와 교회 계급주의, 사제중심주의 등이 초래된 것은 예수의 섬김과 평등주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다. 기독교 2000 년 역사에서 "예수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만행들, 예를 들어, 유대인 학대와 재산탈취, 여성 억압,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종교전쟁, 노예제도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 유색인종에 대한 정복과 착취 등의 만행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특히 아메리카 제국의 보수 기독교 집단인 네오콘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과 점령,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을 사로잡고 있는 친미반공주의와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적 멸시와 차별은 예수를 잘못 믿어 생겨난 결과들이다. 지난 연말 동남아에서 수십만 명의 인명 피해를 냈던 쓰나미 재앙에 대해 어느 감리교 목사가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한 것은 목회자가 어떻게 "예수 이름으로" 하느님을 능멸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수십만 명의 이교도들의 목숨을 이처럼 파리목숨처럼 여기고 죽게 만드는 하느님은 기독교의 "그리스도 신화"가 낳은 괴물이지,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과는 전혀 반대되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이처럼 타종교인들에 대해 차별과 적개심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정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다. 즉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마태 5:45)을 가르친 예수는 타종교인들에 대해 적개심과 증오심을 가르친 바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일반적인 배타주의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은 아니다. 아니, 기독교의 일반적인 배타주의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이다. 교회가 예수를 배반하고 적그리스도가 된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다. 기독교가 역사상 가장 종족학살을 많이 자행했던 폭력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이며 가장 비영성적이며, 실제로 윤리적이라고는 거의 말할 수 없는 신앙이 되어 버린"(랭던 길키) 근본적 이유는 예수의 복음을 배반한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리스도 신화"의 역사적 폐해들이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존 캅이 결론짓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들,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 유색인종들, 학자들, 동식물들에게 결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소식"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리들, 즉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그 배후에 놓인 역사적인 교리화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복음"을 다시 찾을 수 없다.

    10.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정통적인 "그리스도 신화"의 거의 전부가 고대 지중해 지방의 밀의종교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똑같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리스도 신화"에 매달려왔던 기독교의 절대성과 독특성, 진정성마다 부정되는 현실이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이제 더 이상 전통적인 "그리스도 신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있다. 즉 예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초기 제자들의 해석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특징적 면모들에 근거해야만 한다.

    11. 그 동안은 역사적 예수를 찾는 방법을 알지 못했었지만,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특히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을 통해 실종되었던 예수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는 자료 문제 때문에 복음서들 배후의 역사적 예수를 알 수도 없으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탐구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예수의 비유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예수 당시의 상황과 복음서들에 대한 학제간 연구, 새로운 문서들의 발견,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핵심적인 전통 교리들의 생성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예수의 가르침의 진정성 여부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 배경과 상황, 즉 유대인 전통의 종교적 배경과 로마제국의 지배 상황과 종교문화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복음서들의 예수" 배후에 있는 "예수의 복음"을 규명하여, 예수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석된 복음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가르친 복음을 해명하고 그 복음에 충실하고자 한다. 초대교회의 예수 해석("복음서들의 예수")이 예수 체험("예수의 복음")에서 비롯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 연구는 초대교회 당시에 "메시아 마케팅"(로버트 펑크)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예수의 복음"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12. "예수의 복음"은 예수 자신의 영적인 경험과 제국의 착취, 사회적 종교적 모순에 대한 경험에 근거하여 그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것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계속되어왔던 강대국들의 식민지 지배체제 속에서, 국가 회복의 꿈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가던 절망적 상황 속에서, 세례요한은 또 다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며 금식하면서 준비했던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였다. 그러나 "예수는 희망을 사랑으로 바꾸고, 미래의 종말론을 현재의 해방으로 바꿈으로써, 스스로를 종교와 묵시사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토마스 쉬한). 예수 세미나는 예수를 세례요한과 같은 묵시종말론자가 아니라, 유대교 신비가로서 인습적 지혜를 뒤집어엎는 전복적 지혜의 교사이며 사회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13. "예수의 복음"은 예수 자신의 하느님 체험에 근거한 복음으로서, 특히 사제들과 희생제사의 중재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 체험과 사회적 약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특별히 돌보시는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복음이다. 즉 성전체제가 가르쳤던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그에 입각한 사회종교적 차별에 맞서서, 그런 차별을 무색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정의에 근거한 예언자 전통의 복음이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은 로마제국의 세계화 앞에서, 살인적 폭력과 착취, 성전체제의 억압과 배제에 맞서서, 황제의 나라와 그 통치가 아니라,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보여준 것이다. 즉 예수는 로마제국의 세계화라는 브로커 체제의 연고주의와 불의한 착취구조, 그로 인한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에 맞서서, 또한 성전체제의 "거룩의 정치학"이라는 차별과 배제의 구조에 맞서서, "함께 아파하는 삶의 정치학"(마커스 보그), 곧 인간의 무제약적 존엄성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브로커 없는 나라"(크로산)를 가르쳤고 실행했다.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의 이런 체제전복성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탕자의 비유, 큰 잔치의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등에서 "내부인들," 곧 자신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그렇지 못한 "외부인들"에 대해 멸시하며 차별했던 자들이 마지막에는 그 자격을 박탈당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로버트 펑크). 또한 예수가 실천한 개방적인 밥상공동체, 평등주의는 "협력적 사회라는 복음"(아이슬러)의 공동체 운동이며, 원수들에 대하여 우리들 속의 증오심마저 뿌리뽑는 "비폭력의 복음"(월터 윙크)이다. 예수의 복음의 바로 이런 반제국주의적 성격과 반성전체제적 성격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었으며, 로마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통치 질서가 우리의 인간성을 극대화하는 길이며, 공동체의 평화를 실현하는 진리임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14. 이런 "예수의 복음"에 근거한 "예수에 관한 복음," 그 "그리스도 신화" 가운데 우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독생자)"이라는 고백은 구약에서처럼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예: 왕, 예언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표현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출발하여, 점차 생물학적인 표현(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하느님)으로 오해되었고, 마침내는 형이상학적 표현(삼위일체의 제2격인 성자)으로 오해되었다. 즉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 =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명된 시점 역시 바울에게는 "부활 때"(롬 1:4), 마가에게는 "세례 때"(1:11), 마태와 누가에게는 "잉태 때", 요한에게는 "태초에"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초대교회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명된 때가 앞당겨졌다는 사실은 예수에 대한 신격화 작업이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는 예수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15. 또한 동정녀 탄생이 문자적으로, 마리아의 자궁 속에 단 한 방울의 정액조차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예수가 임신되었다는 말인가? 복음서 기자가 이처럼 문자적인 의미로 기록했다는 말인가? 동정녀 탄생이 문자적으로, 산부인과적인 의미에서 사실이라면, 고대세계에서 예수 이외에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주장된 인물들, 예를 들어, 플라톤, 네로, 석가모니 등도 신성을 지녔다는 뜻인가? 동정녀 탄생은 인간 예수의 삶 속에서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과 구원을 경험한 제자들의 놀라움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예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인간성이 극대화된 상태"(존 쉘비 스퐁 감독)를 위해 분투 노력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이며,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확증이다.

    16. 예수의 "영혼 구원"은 제1 차축시대(800 BCE-200 CE) 이후 종교의 공통적인 구원론이었다. 즉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인도의 고타마 붓다, 중국의 공자, 노자, 장자,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이 이 시대의 정신적/종교적 거인들이었다. 이들이 모두 그 이전 시대의 원시종교의 특성들, 즉 인종적-부족적이며 일원론적이며 제의적인 자연종교들의 한계를 절감하고, 개인적으로 "시공의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을 음미"하고,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영원하며 초월적인 "저 세상"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추구하게 된 것은 고대 제국들의 무자비한 정복전쟁과 권력집중적 지배체제로 인한 민중들의 가중된 고통과 직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제1 차축시대 이후의 역사적 종교들이 지향했던 영원하며 초월적인 "저 세상"에 기초한 신화는 기독교의 근본이 되어, 성경은 저 세상으로부터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다시 저 세상으로 올라가고, 신자들은 죽은 후 저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신화를 낳았다. 그러나 로이드 기링이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것처럼, 제2 차축시대(1600-1800 CE)를 지나면서,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종교학, 성서학 등의 발전을 통해, 비판의 핵심은 "저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제2 차축시대 이후에는 예전의 역사적 종교가 세속적 종교로 바뀌며, "저 세상성"은 "이 세상성"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기독교가 전통적인 이원론적 세계관과 영육 이원론을 극복하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구호를 "이 세상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로 바꾸며, 이 세상에 대해 책임 있는 통전적인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그동안 무시해왔던 몸의 신학, 땅의 신학, 세계의 신학을 발전시킬 단계에 접어들었다.

    17. 오늘 우리의 상황은 예수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화와 사회적 빈부격차의 심화, 종교적 차별과 사회적 약자들의 절망감이 매우 깊은 현실이다.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초국적 자본의 지배와 주변 제국들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직면한 상황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및 독도 영유권 주장, 그리고 미국의 대북 개입전략 등 제국주의에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예수의 복음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분명하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을 가장 방해하는 세력은 제국들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세상 제국들의 지배와 착취에 맞서서 개인의 생명과 공동체의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하느님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성서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제국주의를 찬양할 수 없으며, 제국의 필연적인 멸망과 제국의 전쟁신학의 폭력의 가면을 벗기고 그에 저항하는 과제를 맡고 있다(월터 윙크). 예수는 제국의 정복과 폭력과 지배와 착취에 정면으로 맞서서, 섬김과 나눔과 비폭력과 협동을 가르쳤다. 사회적 경쟁과 배제, 차별과 무관심에 정면으로 맞서서, 예수는 서로 의존하고 품어 안을 것을 가르쳤다. 종교적 자만심과 증오심에 정면으로 맞서서 하느님의 자비에 기초한 사랑과 자비를 가르쳤다. 극심한 취업난과 높은 실업률,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의 악화 속에서 인간의 자아실현보다는 취업을 위한 비인간화 현실에서 예수의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모든 인간,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무제약적 존엄성과 서로 간의 섬김과 나눔, 협동과 함께 아파함의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구현할 때이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예수의 복음"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그 복음에 충실할 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으며,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성을 회복하여, 교회의 쇠퇴를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형평성에 공헌하며 민족사의 가장 큰 과제인 통일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본인은 이 열일곱 개 신학논제를 한국 개신교회의 대문들 위에 걸어놓고,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적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2005년 4월 30일
    김준우 박사

  • ?
    한기연 2010.11.21 00:41
    교권수호? 교권탈취? 교권박살? 교단분열?
    이 름 김준우  
    날 짜 2009-01-31 09:36:29
    조 회 917



    장로님.
    어제 게시판에서 장로님이 이틀 뒤 금란교회에서 열리는 소위 "교권수호 비상기도회"를 적극 지지하는 글을 쓰신 것을 읽고 착잡한 심정으로 편지를 드립니다. 제가 신학대학 졸업하고 처음으로 교육전도사로 나갔을 때, 당시에 장로님은 제 기억에 중고등부 부장으로서 저와 함께 일하던 때가 벌써 30년이나 흘렀군요. 당시에 은퇴를 앞둔 담임목사님의 태도 때문에 함께 속을 많이 끓이던 일 기억하시나요? 담임목사님이 설교시간마다 또다시 사적인 감정에 휩싸여 당신이 섭섭하게 생각하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풀이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가슴 졸이던 시간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교회가 무엇인지, 교인들을 성도로 양육하는 목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처음부터 혹독하게 가르쳐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교권수호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을 보니 문득 지난 일이 떠오르는군요. 김홍도 목사가 개체교회 담임목사로서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로 성장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어이 감독이 되어 교단까지 장악하고 싶은 욕심에 총대들의 표를 얻고자 "교리수호대책위원회"(김홍도, 유*열)라는 조직을 꾸린 지 18년 만에, 이번에는 그 아우가 "교권수호대책위원회"를 만든 것은 제 생각에 그야말로 "갈수록 태산"입니다. 부흥사로서 교단 안에 지지세력이 별로 없었던 김홍도 목사는 감독이 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으로 "교리수호"를 내세우고, 감신대에서 가장 독창적인 신학 논문들을 발표하고 후진 양성에 가장 열심이었던 조직신학 교수 두 사람에게 "통일교 비호자"라는 거짓누명을 뒤집어씌워 결국 서울연회재판위원회를 통해 쫓아내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마침내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동부지청 이*호 검사 앞에서 제발 살려달라고 한 시간 이상이나 빌어야 했지요. 김영삼 장로가 대통령을 할 때였지만, 아무리 대형교회 목사일지라도 국법을 어기면 실형을 받게 마련이었지요. 나중에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 사람들은 김홍도 목사가 종교재판을 시작한 것이 감독에 대한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개인적인 부도덕한 문제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지요. 어쨌거나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어도 김홍도 목사의 거짓선동에 현혹되어 종교재판을 밀어부쳤던 이들이 아직도 자신들이 한국감리교 역사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사과조차 하지 않는 것은 마귀의 집단최면에 걸린 때문이지요. 주님도 어쩌지 못하셨던 "어둠의 자식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번에 김국도 목사와 그 추종세력이 명분으로 내세운 "교권수호"는 애당초 감독선거관리위원회의 불법 농간으로 빚어진 선거 파행 때문에 결국 법원이 "감리교 교회법에 근거하여" "김국도 목사의 후보 자격 상실과 당선 무효"를 선언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교권수호"라는 명분으로 주장하겠다는 것이니 참으로 딱합니다. 교회법에 입각한 법원의 판결을 거부함으로써 교권을 수호하겠다는 이번 비상기도회는 "교권수호"가 아니라 "교권탈취" 혹은 "교권박살"이라고 해야 옳지요. 김국도 목사가 감독회장이 되는 것은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이미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교권수호는 불교의 법난 사태처럼 정부가 종교의 질서를 유린할 때 저항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단분열을 도모하는 기도회라면 교권수호가 아니라 "교단분열"을 위한 기도회라고 해야 최소한 신앙양심에 정직한 것 아닌가요?

    교단분열을 도모한다면, 과거의 "갱신 총회"처럼, 최소한 교단분열을 합리화할 수 있는 대의와 존경받는 인물들과 신학이 있어야 하는데, 적어도 지금까지의 김국도 목사와 그 추종세력의 행태는 해병대 출신답게 패거리들의 조폭정치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무리들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복음주의"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이 교단분열을 도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째로 악마에게 넘겨주는 꼴입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노예제도라는 사회악을 폐지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며, 한국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서 순교를 각오하고 예수의 복음을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김국도 목사처럼 동두천에서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기 위한 촛불집회와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반복음적 좌파들의 운동"으로 매도하는 제국주의자는 결코 복음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으며 제국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교회(catholic)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두 가지 종류의 교회가 있으며, 목사들도 두 종류가 있다는 현실을 장로님도 익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메시아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처럼 교권을 강화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제국에 빌붙어서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휘날리며 기도회를 거행하는 것은 로마제국에 아부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에 임명되던 자들의 행태와 꼭 닮았지요. 대형교회 목사들이 장갑차에 깔려죽은 여중생들의 비명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그들이 제국의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복음"을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제국의 복음"으로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대형교회로 성장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감독이 되려는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의 거짓 선동에 놀아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 두 사람이 한스 큉이나 매튜 폭스와 같은 창조적인 신학자들을 107명이나 무더기로 침묵시킬 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며,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폭력과 증오심 그리고 몰상식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급속하게 몰락하며, 한국 감리교회에서 감독회장이 되겠다며 불법을 자행하는 현실에서 교회개혁의 때는 이미 무르익었지만, 예수의 복음과 제국의 복음을 구별하지 못하며, 목사를 세습시킬 정도로 교회를 자신이 세운 기업 정도로 생각하며, 성직자의 태도와 깡패의 태도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교단분열을 도모하는 것은 마귀조차도 크게 웃을 코메디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길은 숫자에 있지 않고 비폭력의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어머니인 교회,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신앙을 낳아주고 기도와 기쁨으로 양육하는 교회는 불법적인 패거리 행동이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생살까지 째서 내어주는 어머님의 애타는 마음을 살아내는 이들에 의해 유지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어머님을 배반하는 자식은 자신의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는 자식일 뿐 아니라 남들의 어머니에게도 피눈물을 안겨주는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아침이 밝았군요.
    이 땅의 노동자들은 생활고에 지치고 농민들은 가뭄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데, 기왕에 비상기도회로 모이시면 차라리 기우제라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장로님과 감리교단 위에 주님의 크신 은총을 빕니다.

    2009년 1월 31일
    김준우 올림

     최상철  (2009-01-31 09:45:44 / 118.47.236.116)   

    김준우목사님 감리교회를 사랑하시고 장문의 글쓰신 진정성이 담긴글 감사합니다.

     조성욱  (2009-01-31 10:40:30 / 210.223.59.51)   

    A-men

     김교석  (2009-01-31 10:49:30 / 121.170.241.177)   

    잘 읽었습니다. 공감합니다.

     김원기  (2009-01-31 11:00:32 / 121.142.76.160)   

    서울연회에 고소되어 176명의 고소연명자가 고소에 참여함으로 서울연회 재판과 총회재판을 오가며 우여곡절을 겪다가 총회재판이 돌려보낸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서 '유죄이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었다.
    만약 이번에도 감리교회가 김*도목사 치리를 미적거린다면 이후 어떤 목회자가 어떤 못된 이유로 대법원 유죄판결을 받고도 '어디 치리해 봐라'하고 대들 것이 자명하다.- 2006년5월 성공회 자유게시판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미 그당시에 예견된 일입니다. 이후로도 되풀이되지말라는 보장이 없지요.

     장병선  (2009-01-31 11:16:12 / 124.80.45.224)    

    이번 기회야 말로 부패의 극에 달한 김씨일가와 그 추종자들을 쓸어내고, 감리회를 정화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결코 그들의 악한 의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경수  (2009-01-31 12:03:15 / 211.38.190.145)   

    김준우 목사님, 잘 읽었었습니다.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남재영  (2009-01-31 16:56:59 / 218.158.162.194)   

    김준우목사님의 글, 가슴으로 공명합니다.
    좋은 글 좋은 생각 감사드립니다.

     박희로  (2009-01-31 20:20:58 / 221.149.242.13)   

    김준우 목사님 감사 합니다 .전도사님으로 수고하실 때도 올고든 성품 을 늘 존경 했씁니다 .미국 유학 기간에도 잘보이지 않으셔서 무척궁금하던 차 에 어느총회 석상에서 뵙게 되어 반가웠지요 평신도 입장에서 목사님들 세계는 잘 모름니다. 학연 써클 지연 등 그러나 평신도들은 정치적으로 순진하고요 누가 감독회장이 되는 일에 큰 관심 없씁니다
    신앙적으로 깨끗하면 평신도가 누구면 어떻씁니까 ? 고**쪽 이던 김**쪽이던 진정한 지도자로 전감리교회가 존경하는 분이면 동의 합니다 .하지만 금번선거의 양진영의 행태는 동의 할수 없씁니다, 50대 50입니다 유권해석 절차나 신경하 감독회장의 리더쉽이나 100만원 벌금이나 70만원 벌금이나 교회법생략 하고 사회법에 먼저 고소 하므로 현제 부작용이 전국에서 일어나고있씁니다, 평신도들의 생각은 새롭게 재선거로 새술은 새부대로 새판 짜는것을 원합니다 .저도 되도록이면 고**님에 대한 글이나 댓글은 인내로 참고 있씁니다 .저에게 댓글로 도전 할때 마다 응전한 것뿐입니다 감리교회는 감리교회법으로 회귀해서 튼튼한 감리교회 초석이되기를 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거의 성격상 다수가 동의 했다면 그쪽이 합리적 이라고 믿고 십씁니다.선거는 표심이고 민심임을 부인하지 안씁니다.재선거가 아니면 총회의 다수결로 결정 하는것이 지름길 이라고 믿고 십씁니다 .현재로선 정상화는 그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2009-01-31 20:29:45 에 "박희로(j7843)" 에 의해 수정됨

    ※ 2009-01-31 20:46:22 에 "박희로(j7843)" 에 의해 수정됨

     김준우  (2009-01-31 21:50:53 / 59.7.18.163)   

    갑자기 공개편지를 드려서 장로님 마음 상하셨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저희들 목사들이 종종 눈이 흐려지고 욕심이 많아서 믿음의 본을 올곧게 보이지 못해 순박한 장로님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우선은 이번 감독회장 선거 문제로 인해 서로 너무나 상처들을 많이 입혀서 지금은 우리들이 온몸으로 그동안의 갈등과 미움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녹여내는 피뢰침의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똥통에 빠진" 교단이 법원의 판결 이후에 겨우 그 혼란이 정리되어가는 마당에 금란교회에서 열리는 이번 "교권수호 기도회"는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도회라고 볼 수 없는 것은 그 기도회의 명칭과 주최하는 인물들과 장소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최하는 목사들이 교권탈취나 교권박살 혹은 교단분열을 도모하는 기도회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교단분열" 혹은 "교단창립"을 위한 기도회라면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워낙 몰상식한 일들이 벌어지는 척박한 교회 현장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교단분열의 수순을 밟는 것이라면, 매우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18년 전 "교리수호"라는 그럴듯한 명분에 휘둘려 종교재판에 가세하여 감리교 신학자 두 사람을 생매장하고도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떠는 경우처럼, 이번에도 "교권수호"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개인적인 욕심이 빚어내는 거짓 명분과 선동에 또다시 농락 당하여 감리교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만은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늘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장병선  (2009-01-31 22:58:25 / 124.80.45.224)    

    '재선거'주장은 김씨 일가의 또 다른 술책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재선거 바람을 일으켜 자신들의 하수인을 당선시켜 교권을 장악하려 오래 전부터 '재선거' 불씨를 지펴왔습니다. 그러나 재 선거는 '교회법'을 또 다시 유린하는 일이며 이후로, 교회법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특정한 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교회법'에 따른 법적 정통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싸우는 것입니다.

     박희로  (2009-01-31 23:31:00 / 221.149.242.13)   

    술책이라고 하기전에 44.4%=17% 는 총회 선거인단 숫자인데요 17%로 감리교단 견인할수있다고 생각하나요 .참모면 참모다운 결단이 필요 합니다 . 당장 감독회의 소집 했지만 두분이 참석 했지요 바른 감리교회 모임 몇명 모였나요 . 금란교회 전국에서 1만명이 모인다고 해요 본인이 장소는 금란이나 임마누엘은 안된다고 전화 했씁니다 .체육관이나 한강고수부지나 감리교회 희망광장이나 제삼지역이면 좋을것 같다고 했씁니다 .1만명이상 수용이 안되고 비용 많이 들인다고 비판에대한 걱정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씁니다 .제일중요한 감독회의 통재도 못하고 실행위원회통재도 불투명하고 이대로 식물 감리교회로 얼마나 더 갈수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치는 힘의논리입니다, 총회를 개최한다고하면 순탄하게 총회가 진행되어도 총회전날까지 총회재판에 제소하면 감리교회법으로 감독회장 직이 유보되는것이 법입니다 .끝이 안보입니다. 사회법 국법하는데 감리교회는 국가안에 감리교회법이 존재하고 그법으로 지금 까지 감리교회를 지켜 왔습니다 .판사가 감독회장 만들어주면 국가가 감리교회부담금 주고 교단 유지시켜 줍니까? 감리교회를 지키는 이들은 한사람한사람 감리교회 성도들 입니다 .힘있으면 감독회의 소집하고 유지재단이사장 취임하고 총회 실행위원회열고 총회열고 감독회장 취임 하시고 빨리 정상가동 하세요.운동만으로는 안됩니다.평신도가 염려 하는것은 빠른시일에 정체성을 회복 하는것은 다시 시작하여 새판짜는것이 제일 빠른방법 이라고 이심전심 이라고 말합니다.열명도 안되는 인테넷 정객이 할수있다면 속히 정상화 시키세요 .지금도 지켜보고 있씁니다.

    ※ 2009-01-31 23:52:21 에 "박희로(j7843)" 에 의해 수정됨

     장병선  (2009-02-01 00:50:44 / 124.80.45.224)    

    감리회 신도 156만명인데 1만명은 1%도 되지 않습니다.
    44%지지라지만, 매표, 조직, 학연 표 빼면 몇 표 안 남을 것입니다.
    56%는 반대표고요.

     박희로  (2009-02-01 10:13:12 / 221.149.242.13)   

    그렇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겟네요 급하다고 바늘 허리매고는 못쓰지요 . 총회 선거인단 6300명중 44%는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다 무시하고 우직하게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선거는 왜하나요 우열을 가리기 위하여 합니다,신선한 선수교체도하고요 .틀렸나요 .50대50 에서 끝까지가면 어느쪽일까요 승패는 분명합니다.

     장병선  (2009-02-01 22:15:17 / 124.80.45.224)    

    다 무시해도, 쥐약 먹은 놈들은 여전히 제 정신 못 차리고 표를 몰아줄 것이 뻔한데요?
    이 참에 불법을 저지른 자들을 대청소 해야 합니다.

     김준우  (2009-02-01 23:50:58 / 59.7.18.163)   

    장로님.

    현재 감리교단의 갈등 역시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며 빛과 어둠의 싸움입니다. 과거에 "교리수호"에 가담했던 무리들이 감신대 교수 두 사람, 그것도 감리교 신학을 창조적으로 가르치던 교수 두 사람을 생매장함으로써 수호했던 것은 결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특정인의 감투 욕심을 위한 거짓 날조("예수피 개/돼지피"설, 통일교 비호설)였던 것처럼, 이번 "교권수호"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수호하려는 것 역시 교회의 법적인 권리와 순수성이 아니라 특정인의 감투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불법 농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교회법에 근거한 법원의 판결은 김국도 목사가 "감독 후보의 자격을 상실"했으며 그가 득표한 44.4%의 투표는 "무효"라는 것이 분명하지요. 또한 당시 치러진 감독선거는 "유효하다"는 판결이었지요. 내일 기도회에 1만 명이 아니라 100만 명 혹은 1,000만 명이 모인다고 해서 이 명백한 판결 내용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김국도 목사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감독회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0.0001%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해하지는 않기 바랍니다. 저는 고수철 목사를 지지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넘쳐나는 억울한 죽음들과 신음소리 때문에 주님은 지금도 서울의 철거민 동네를 울면서 거닐고 계실 터인데도 불구하고 교회 내의 한가로운 감투싸움에서 비롯된 송사가 세상 법정에까지 간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면, 법원의 판결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정말로 법원의 판결이 교회의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어느 특정인의 병적인 집착에 동조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눈은 둘째치고 법적으로도 "자격을 상실한 자"를 "민심 운운"하며 기어코 감독회장으로 세워야 하나님 보시기에 자랑스런 교단이 된다는 말입니까? 재선거를 하기 위해 후보자격을 상실한 특정인에게 후보자격을 주는 조항을 억지로 만들도록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것이 정말로 교회법상 옳은 일이며 또한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이 무슨 해괴망칙한 "교권수호"란 말입니까?

    장로님,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힘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 주님께서 목숨까지 바치시며 생명과 구원의 도리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섬김과 사랑과 비폭력적 희생이 아니라 그런 "힘의 논리"와 "돈의 논리"로 교단정치를 하려는 자들은 제국의 "귀신들린 자들"이며, 그들의 개인적인 욕심이 항상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되어 총대들을 속였습니다. 그런 목사들은 교회의 존재이유인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나 교회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 혹은 평생 설교해왔던 예수의 "십자가의 도"는 전혀 안중에도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목사들을 역겨울 만큼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짓이 진실을 생매장하는 짓을 막아내야 할 때입니다.

    장로님이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 7:14)는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득권자들의 논리를 따르는 길은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입니다. 만일에 메시아를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제사장들처럼 "힘의 논리"를 따라 세상의 귀신들과 한편이 되시겠다면, 제가 더 이상 말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문제에서 주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인 힘과 돈의 논리를 따르는 교회는 결국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백해무익한 교회로서 주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마가 11:12 이하)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내일 기도회에서 하나님의 예상치 못한 선한 역사가 나타나기만을 기도합니다.

  • ?
    한기연 2011.08.03 05:14
    예수를 죽인 것은 결국 돈 문제였다
     
     
    1. 김성국 목사가 미국성서학회 역사적 예수분과 위원장을 역임한 크로산을 신약학계의 아웃사이더로 간주하며 또한 평생을 바친 그의 예수 연구를 마치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한 기이한 해석이며 계산된 도발인 것처럼 폄하한 것을 읽으니 새삼 눈물이 난다.

    2. 지난 10여 년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를 소개하느라 나로서는 진이 빠질 만큼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결국 한국교회의 몰상식과 폭력성의 온상인 성경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와 교회주의는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예수의 타는 목마름과 하나님나라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군다나 4대강과 핵발전소 문제만이 아니라 눈앞에 닥쳐온 기후재앙의 현실 앞에서 특히 우리 세대가 저지르고 정치적 저항을 통해 막아내지 못한 재앙에 대해 하나님의 뜻으로 돌림으로써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교회가 철저하게 버림받을 것을 생각하니, 불의한 세상을 수리하는 일에 믿을 자들은 너희들뿐이라고 그 일을 맡기신 분의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3. 많은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상당수 신학생들조차 신학을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은 자신의 신앙체험과 기독교 전통을 가장 설득력있게 해명하는 것인가, 혹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풍성한 생명을 오늘날 가장 적절한 운동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어느 신학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학인가 하는 것이 평가의 기준이다. 20년 전에 종교재판으로 신학자 두 사람을 생매장할 때도 상당수 목회자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었다. 종교다원주의신학과 포스트모던신학이 자신들의 목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종교재판에 신학적으로 동의한 목회자들은 종교재판의 공모자들인 셈이며 이런 교회주의와 성장주의 목회자들은 오늘도 무수하게 많을 것이다.

    4. 이런 점에서 언제나 목회자들에게 신학의 핵심적인 문제는 교회론일 것이다. 교회와 목회를 일차적으로 돌봄(pastoral care)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창조적인 계승으로 볼 것인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읽을 마땅한 신학 책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목회를 일차적으로 돌봄으로 볼 경우 신학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않기 마련이다.

    5.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전체제의 관점에서 정의되어,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이거나 신앙공동체로 정의되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브로커체제이며 세상 속에서 게토에 불과하다. 교회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정의는 실제로는 기존종교체제, 즉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의이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6. 예수는 성전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 즉 안식일, 예배, 제사장, 성전, 정결법, 교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그 성전체제의 핵심적 요소들을 비판하고 무시하고 뒤엎은 것 때문에 예루살렘성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

    7. 그 이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과 하나님나라 중심의 신학이 성전체제의 종교비지니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를 죽인 것은 성전체제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던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었으며, 그 밑에 깔린 계산은 돈이었다.

    8.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비지니스에 도움이 되는가? 많은 목회자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솔직히 예수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예수처럼 살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고 고백하는 목회자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교회비지니스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1990년대 이후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진보적인 작은교회 운동(Hal Taussig, A New Spiritual Home: Progressive Christianity at the Grass Roots, 2006)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직한 예수에 목말라하고 있으며, 교회비지니스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도 크로산,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존 쉘비 스퐁, 월터 윙크, 고든 카우프만의 책들을 읽고 신학적인 회심과 해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9. 더욱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 자신의 당당한 정체성이다. 크로산과 같은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정직하게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목회자들은 교회가 아무리 작아도, 생계가 아무리 힘겨워도, 세상을 짓밟는 악한 권세들에 맞서서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계승한다는 우주적인 사명감과 자부심과 당당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10. 교회를 하나님나라운동으로 정의할 경우, 예수가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영적인 권세들(그 핵심은 제국과 결탁한 지배체제)과 맞서 싸우고 그분이 나누려했던 "풍성한 생명"운동을 오늘의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나아가는 생명정의평화운동이며 나 개인적으로는 기후문제와 식량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본다.

    11. 지질학적으로 생태대를 향해 출애굽하는 과제를 위해 나아갈 때 지금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반생명적 반민중적 사탄의 세력은 모세나 예수나 바울이 맞서 싸웠던 세력보다 수십 배 수백 배 훨씬 더 막강한 세력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부름받았다고 믿는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지혜와 힘을 뫃아도 모자랄 판국에 사소한 문제로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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