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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0 08:54

한국과 중국의 역사왜곡 - 김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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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약본>       '단일 민족'의 역사와 '多民族'의 역사
                  -韓中 양국 교과서의 역사 서술과 이해-
                                                                金  翰 奎
1. 머리말

    역사 교과서의 '國定'이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가 모두 국가에 의해 해석, 확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는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역사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전체주의적 성격이 강한 국가는 국민의 역사관이나 역사의식을 통일시키기 위해 기왕에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된 수많은 사실과 해석 가운데 국가의 의지나 이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여 국정 교과서를 만든다. 그러나 국가의 정치적 의지나 정부의 정책적 고려란 그 국가를 출현, 발전시킨 역사공동체의 역사적 전통이나 그 성원의 역사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정 역사 교과서는 그 국가를 출현시킨 역사공동체의 역사적 전통과 공동체 성원의 역사의식을 반영하기도 한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모두 국정 교과서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현재 양국을 지배하는 국가의 정치적 의지와 정부의 정책 방향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국의 역사적 전통과 양 국민의 일반적 역사의식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 이웃하여 오랜 기간 상관하면서 서로 많은 영향을 미쳐왔지만, 그 역사적 전통과 현재 처해져 있는 조건이 매우 다르다. 각각 특수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경유한 끝에, 현재 한국은 두 개의 국가가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지배하는 형편이고, 중국은 여러 개의 역사공동체가 하나의 국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한국인에게 주어진 가장 주요한 과제는 두 개의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여 정치적으로 통일된 역사공동체를 확립하는 것이고, 중국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복수의 여러 역사공동체를 융합시켜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지배하는 안정된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두 나라의 이처럼 각각 다른 지향은 양국의 역사 교과서 편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 서로 상이한 체재와 내용의 서술을 낳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중 양국 역사 교과서의 記述상 차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발견되겠지만, 특히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기술, 한중 양국과 더불어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였던 다른 나라들에 대한 기술,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에 대한 기술의 형식과 내용은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와 중국의 {中國歷史} 교과서는 대부분 서로 다른 주제를 기술하게 마련이지만, 양자의 관심이 일치되는 부분도 적지 않을 터인데, 그것이 바로 한중관계사와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관한 기술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과 중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인접국이었으며, 동시에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고 그 질서를 운영 혹은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협력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관한 양자의 기술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서로 상충되거나 상위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니, 그 까닭은 양국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현재 처해져 있는 서로 다른 조건, 혹은 양 국민의 상이한 역사의식이 가장 예민하게 투사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중 양국은 국가 정책을 인도하는 이념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학문적 경향도 서로 다르다. 이로 인해, 한중 양국 역사학계의 일반적 역사 연구의 목적과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양국의 역사적 전통과 현재 처해진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양국 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설정하는 역사 연구와 이해 혹은 기술의 단위도 같지 않다. 이러한 양국 학계의 일반적 연구 경향은 당연히 양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한중 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제시한 역사 교육 혹은 학습의 목적과 방법 및 역사 이해와 기술의 단위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고, 그 이유와 배경을 이해한 다음에, 양국 교과서에서 기술한 한중관계사와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대한 기술을 비교, 분석할 것이다.  
  
2. 역사 이해와 기술의 단위 - '多民族'과 '單一 民族' -
    한중 양국의 교과서는 역사 교육 혹은 학습의 목적과 방법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였다. 중국 {敎科書}의 '說明'에 의하면, 이 책은 학생들이 "조국을 熱愛하고 중국공산당을 열애하며 사회주의 사업을 열애하고 4항 기본원칙과 개혁개방정책을 견지하도록" 교육하기 위해 쓰여졌다. 이에 반해, 한국의 {중학}상-2 '머리말'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사를 사랑할 뿐 아니라, 오늘의 역사적 과제인 조국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이루는 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역사 교육이 '조국 통일'과 '민족 번영'이라는 현실적 목표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국가의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한중 양국 교과서는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 달성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사 교육의 현실적 목적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양국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안고있는 문제가 각각 달라서 역사 교육에 기대하는 목표는 각각 다르게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이나 관점에 있어서도, 한중 양국의 교과서는 서로 다른 방법과 관점을 제시하였다. 중국의 {敎科書} 서론(제1과)에서는 "사람들이 역사 인물과 역사 사건을 보는 방법은 아주 달라서, 어떤 방법은 완전히 상반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정확한 것인가? 오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사실을 분석하고 판단해야만 정확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하여,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역사유물사관적 역사 접근 방법을 명시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의 {중학} '머리말'에서는 "우리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로서의 역사적 사실이며, 그에 대한 기록이다"라고 하여, 실증적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역사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한중 양국 역사 교과서에서 제시된 서로 다른 역사관은 당연히 서로 다른 時代區分論으로 표현되었다. 중국 {敎科書}는 歷史唯物主義의 역사발전 단계론을 중국사에 적용하여, 신석기 혹은 전설시대를 '氏族 公社 시대'(1-16-17)로 규정하고, 夏商周 3代를 '고대 노예제사회 시대'(1-22, 27, 29)로, 戰國時代부터 阿片戰爭까지는 '封建制 사회 시대'(1-46)로 각각 규정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의 {중학}에서는 '반만년의 민족사'를 도구의 자질로 시대를 구분하는 일반적 방법으로 재단하여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철기 시대 등으로 민족사가 발전한 것으로 기술하기도 하고({중학}상-14), 왕조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전통적 방법이 적용되기도 하였다.
   중국 교과서의 역사유물주의적 입장과 한국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입장은 전설과 신화를 기술하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중국 {敎科書}1-8의 副文에서는 盤古의 開天 地 신화와 女蝸의 造人 신화를 소개하면서, "神話 故事는 필경 진실한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인류는 類人猿에서 진화되어 온 것이다"라는 단서를 부기하여, 신화와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도록 지도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桓因과 桓雄의 신화를 '도움글'에서 '단군의 건국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자세하게 기술하면서도, 그것이 신화임을 적시하지 않음으로써,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이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할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이 점에 있어, 한국의 교과서는 중국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과학적, 비실증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건국 전설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도, 양국 교과서의 입장에는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먼저 중국의 {敎科書}1-16-7 '씨족 公社시대의 居民'에서 "河姆渡와 半坡 원시 居民 생활의 세월은 古史 傳說 중의 伏羲氏와 神農氏의 시대에 상당한다... 전설 중에서 黃帝는 원래 황하 유역의 일개 부락연맹의 영수로서, 대략 4천년 이전에 생활하였다"고 하여, 이른바 三皇五帝 시대를 '氏族公社時代'로 규정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의 {중학}상-9에서는 "우리 민족은... 단군 이후 국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고, {중학}상-21에서도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기리는 이념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고 하였으며, {중학}상-24에서는 "단군 왕검의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하면서 '도움글'에서 '단군의 건국 이야기'와 '개천절의 유래'에 대해 詳述하여, 단군의 고조선 건국 연대를 {三國遺事}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하는 등,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도 한국의 교과서는 중국의 그것에 비해 보다 비과학적이고 비실증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교과서는 전통시대의 역사서에서 檀君 신화를 기재한 사실에 대하여 '자주적' 의식의 발로로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중학}상-140에서는 "삼국유사에는...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자주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하고, {중학}상-149에서는 "새 왕조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조선'이란 곧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뜻이며, 단군에게서 민족의 독자성을 찾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국호에는 유구한 문화 전통과 민족 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민족사에 대한 주체적 자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한국의 교과서에서 이처럼 '민족'의 역사와 그 자주성이 빈번하게 강조되는 까닭은 한국 교과서의 역사 이해와 기술의 단위가 바로 그 '민족'이기 때문이다.
   중국 교과서가 역사 교육의 목적을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두고 그 학습 방법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유물사관'을 제시한 것과 달리, 한국 교과서가 역사 교육 목적을 '민족 통일'에 두고 그 이해의 방법으로 실증적 민족주의 사관을 제시한 것은, 양국의 역사적 성장 배경과 현재 처한 조건 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양국의 역사적 배경과 환경의 차이는 양국 교과서가 역사 이해와 기술의 단위를 서로 달리한 데에서 보다 더 잘 나타난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를 이해하려면, 먼저 중국 역사 교과서에 기재되는 몇 가지 기본적 역사 용어들, 예컨대 '我國', '民族', '國家', '王朝', '少數民族', '漢族' 등과 같은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 먼저 {敎科書} 1冊에 보이는 다음의 두 문장을 주목하자. "西漢과 匈奴의 和戰; 漢朝는 我國 多民族 국가 발전의 중요한 시대이다. 앞의 과목에서 당신은 이미 흉노라는 민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兩漢 시대에 이 민족은 我國 역사상 더욱 중요한 성원이 되었다. (주; 冒頓은... 我國 匈奴族의 저명한 정치가였다)"({敎科書}1-102)  "內遷의 各族; 東漢, 魏, 晋 시기에 북방과 서방의 少數民族들이 부단히 內遷하였다. 내천한 소수민족에는 흉노, 鮮卑,  ,  , 羌 등이 있었는데, 역사상에서 이들을 '五胡'라고 불렀다... 이들은 漢族과 장기간 雜居하며 서로 영향을 끼쳤으며, 그 뒤 민족의 한계가 더욱 축소되었다."({敎科書}1-141)
   위의 두 문장을 통해, 중국인들이 역사 교과서에서 사용하는 기본 용어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중국인의 '我國'(우리 나라) 즉 '中國'의 역사는 '漢朝' 등 여러 王朝 시대로 이루어졌다. 漢朝 등 여러 왕조 시대의 중국은 漢族이라는 민족과 기타 여러 少數民族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리고 漢族과 함께 중국을 구성한 '민족'들 가운데에는 匈奴와 鮮卑 등 '五胡' 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중국인의 '我國'(우리 나라) 즉 '中國'은 '多民族 國家'였다. 요컨대, 중국 교과서의 편찬자들에게는, 중국은 국가, 漢朝 등 여러 王朝는 시대, 漢族과 匈奴, 五胡 등은 民族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왕조 시대의 중국은 언제나 漢族과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국 교과서에서 '중국'에 포함된 '소수민족' 범위의 문제다. 위의 두 문장에서 匈奴와 鮮卑, 羌,  ,   등 이른바 '五胡'가 '중국의 소수민족'에 포함되었음은 이미 확인한 바 있거니와, {敎科書} 2-22 '和同爲一家'에서는 唐朝와 병존한 突厥 등 '북방 각족'을 중국인의 '我國' 혹은 '祖國'의 범위 안에 포함시켰으며, {敎科書} 2-24에 기재된 '唐朝 후기 강역과 邊疆 各族의 분포' 지도에서는 回紇, 葛邏祿, 吐蕃, 南詔, 黑水靺鞨, 渤海 등을 모두 '邊疆 各族'에 포함시켰다. 뿐만 아니라, {敎科書} 2-68 '五代十國의 경질과 北宋의 정치'에서는 "907년에 朱溫이 後粱을 건립한 뒤부터 1368년에 元朝가 멸망할 때까지는, 我國 민족이 진일보 융합하고 봉건경제가 계속 발전한 五代, 遼, 宋, 夏, 金, 元의 시기였다"고 하여, 漢族이 세운 宋朝와 함께 契丹과 女眞, 蒙古 등이 세운 국가들도 모두 中國의 국가로 간주하였고, 특히 {敎科書} 2-108 '元朝의 통치' 서문에서는 "蒙古族은 조국 대가정의 중요한 성원이었다"고 하면서, "그들이 我國 多民族 통일국가의 발전에 어떠한 공헌을 하였는가"를 주요 학습 과제로 제시하였다. 요컨대, 漢族이 中原에서 세운 국가와 국경을 나누면서 대립한 異民族(즉 非漢族) 국가들까지 '중국'의 국가로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원을 침략하여 漢族이 세운 국가를 멸망시키고 한족을 지배한 이민족 국가들도 '중국'의 국가로 포함시켰다. 이러할진대, {敎科書}4-187 에서 '소수민족의 사회주의 진입'에서, "我國은 56개 民族이 있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다"라고 하였듯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경내에 포함된 수 십 개 '민족'이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간주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중국 교과서의 '민족' 개념은 '나라' 혹은 '국가' 개념과 그 범주를 달리한다. 즉 '중국'이라는 '나라'가 漢族과 여러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었듯이, '秦' '漢' 등 중국의 국가들도 漢族과 여러 소수민족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러면 어떠한 민족은 '중국'의 민족에 포함되고, 어떠한 민족은 '중국' 민족에서 배제되는가? 그 기준은 {課本} 1-124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읽을 수 있다. "長安城 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소수민족, 즉 吐蕃, 突厥, 回紇, 契丹, 南詔와 西域 各族人들이 있었다. 장안성안에는 또한 아시아 각국에서 온 사람, 즉 新羅人, 日本人, 波斯人, 大食人 등이 있었다... 장안은 하나의 국제적 대 城市를 이루었다." 이 글에서 신라와 일본, 페르샤, 아라비아 등은 '아시아 각국' 즉 外國으로 간주되었고, 토번과 돌궐, 회흘, 거란, 남조, 서역 각족 등은 중국의 少數民族으로 분류되었다. 이 양자를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선이다. 즉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경내는 과거에도 中國이었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의 조상은 과거에도 중국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발해와 신라의 이해법이다. 뒤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발해와 중국(唐朝)을 '一家'라 하고 발해가 교섭한 중국을 '內地'라 하였지만 신라는 외국으로 간주하였는데, 唐朝와 양자의 제도적 관계는 모든 면에서 다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양자를 이렇게 구별한 까닭은, 발해의 구 영토가 현재 중국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는데 반해 신라의 구 영토는 현재 한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나 중국 학계, 특히 '민족관계사' 학계에서는 "중국이 中華民族의 국가"임을 강조한다. 즉, 중국을 구성하는 '다민족'이 融合하여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학계에서는 두 가지의 '민족' 개념이 통용되고 있다. 그 하나는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민족'을 가리키고, 또 다른 하나는 이들 56개 민족이 융합하여 만든 '중화민족'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자의 민족 개념으로 본다면 중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었으나, 후자의 개념으로 본다면 중국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이중적 민족 개념이 중국 학계에서 통용되는 까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여 단일 민족을 형성해야 한다는 이상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중국 교과서에는 아직 후자, 즉 '중화민족'이라는 단일 민족 개념이 적시되지는 않았으나, '민족융합'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강조되었다.
   이처럼 중국 교과서에서 일관되게 '多民族' 개념을 강조함에 따라, 그 역사 기술의 단위는 자연히 복수의 민족으로 설정되었다. 원래 '中國'이란 '中原에서 형성된 특수한 역사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중국'을 '통일적 多民族 국가' 개념으로 규정함으로써, '중국 역사'는 자연히 '여러 민족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교과서 {中國歷史}에서는 그 당시에는 결코 '중국인'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匈奴人이나 鮮卑人, 突厥人, 吐蕃人, 靺鞨人, 女眞人, 契丹人, 蒙古人, 滿洲人 등도 '중국 역사'의 주역으로 간주되었고 그들의 역사가 '중국 역사'의 일부로 기술되었다.  
    이에 반해,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단일 민족'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중학}상-2 '머리말'에서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살아오면서, 단일 민족을 형성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이룩하여 왔다"고 하고, {중학}상-9 '단일 민족의 역사'에서도 "배달 민족이라고도 불리는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흩어져 살아 왔다. 단군 이후 국가 생활을 시작하여 마침내 통일된 민족 국가를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단일 민족 국가로서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 교과서에 보이는 '단일 민족' 개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한 핏줄(혈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학}하-194 '우리의 나아갈 길'(결론)에서 "우리 민족은 본래 한 핏줄로 이어져 내려온 단일 민족으로서, 하나의 국가를 이룩하고, 하나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한국 교과서에 보여지는 '단일 민족' 개념의 또 다른 특징은 한국 민족의 역사적 생활 공간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한반도'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중학}상-14에서는 "일찍이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를 생활 무대로 하여 활동하였다"고 하고, {중학}상-85-6에서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 지역이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는 아쉬움을 남겼다"고 하였다.
   한국 교과서에서 한국 민족의 원 거주지를 '만주와 한반도'로 보는 까닭은 한국의 첫 국가로 간주되는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와 한반도'였던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중학}상-14 '고조선의 성장'에서 "일찍이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를 생활 무대로 하여 활동하였는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였다... 고조선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세력을 떨쳤다. 기원전 4세기부터는...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에서 새로운 나라들이 일어났다. 북쪽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가 일어나고, 남쪽에서는 먼저 진국이 일어나더니 이어서 삼한이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고조선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였고 그 영토는 만주와 한반도였으므로, '만주와 한반도'는 원래 '우리 나라'의 땅이었으며, '만주와 한반도'에 살던 사람은 모두 한국 민족이었고, 고조선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들은 모두 한국 민족이 세운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계통론의 근거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한국 교과서에 발견되는 민족사론의 특점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도 위와 같은 역사계통론의 출발점인 '고조선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였다는 사실이 어떠한 근거에 의한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뿐만 아니라, {중학}상-29에서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잡고, 고조선에 이어 큰 국가를 이룩하였다"고 하고, {중학}상-30에서 "고구려는 주몽이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건국한 나라이다(기원전 37)"라고 하였으며, {중학} 상-31에서는 "북쪽에서 고조선이 발전하고 있을 때, 한강 이남 지역에는 진이라 불리는 국가가 있었다"고 하였지만, 부여와 고구려나 진 등이 고조선이나 한민족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국가인지, 역시 설명이 없다.
   한국 교과서에서 보여지는 민족사론의 두 번 째 특점은 한민족에 대한 설명이 서로 모순되게 서술되었다는 것이다. {중학}상-34에서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침략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였고,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에 진출하였다. 한편,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삼국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삼국은 각기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여 갔는데, 신라의 삼국 통일로 삼국의 문화적 전통은 하나의 민족 문화로 융합되었다"고 하였는데, '각기 독특한 문화를 이룩한' 삼국이 어떻게 하나의 '민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로 이해될 수 있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중학}상-45에서 "이 무렵의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최강국으로서, 우리 민족을 중국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고구려가 막아내었다는 '중국 세력의 침략'은 '우리 민족'에 대한 침략이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중학}상-66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신라의 삼국 통일로 우리 민족은 비로소 단일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통일 신라는 안으로 삼국의 문화를 융합하고, 밖으로는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곧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인해 비로소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고 동질적 문화를 함께 창조하고 향유하는 공동체, 즉 한국 교과서가 말하는 '민족'이란 것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전에 고구려가 중국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막아내어야 할 '우리 민족'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견 보아 모순된 서술로 보인다.
   {중학}상-66에 기술된 "고려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포섭하여 민족을 재통일하고, 민생 안정을 꾀하면서 민족 융합 정책, 북진 정책 등을 통해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고 한 문장도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설사 발해와 신라가 한 민족이었다 하더라도, 양자는 한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는데, 발해 유민을 포섭하여 민족을 재통일하였다는 것은 모순된 표현이다. 또한 '민족 융합'이란 다른 '민족'들이 만나서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일 터인데, 고려 태조가 실시했다는 '민족 융합 정책'은 무슨 '민족'과 무슨 '민족'의 융합을 위한 정책이었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중학}상-68의 "신라의 삼국 통일은 최초의 민족 통일로서 새로운 민족 문화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문장도 모순을 드러낸 문장이다. '민족 통일'이란 한 민족이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복수의 국가를 병립시킨 상황을 종식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중학}상-66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로 우리 민족은 비로소 단일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는 기술처럼, 신라의 삼국 통일 이전에 '한민족'이 복수의 국가로 분열된 적은 없었다.
   한국 교과서에서 기술된 '민족사'론의 세 번 째 특점은 꼭 필요한 설명이 생략되어 사실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문장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발해에 관한 기술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중학}상-83에서 "발해는 만주 지방에서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으나, 그 문화의 전통과 유민은 고려에 흡수되었다"고 하였는데,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임'을 거듭 강조하면서도 발해 지배층의 어느 정도 부분이 고구려인이었는지 설명되지 않아, 마치 발해의 모든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고 말갈인은 모두 피지배층이어서 민족이 민족을 지배하는 체제인양 오해하도록 서술되었다. 발해가 멸망된 뒤에 '그 문화의 전통과 유민은 고려에 흡수되었다고 하면서, 발해 전체 인구의 얼마만한 부분이 고려로 유입되었는지, 발해 문화의 어떤 면이 고려에 흡수되었는지 밝히지 않아, 마치 발해의 인구를 대부분 고려가 받아들였고 고려 문화가 발해 문화를 계승한 것처럼 오해하도록 서술되었다. 만약 발해 유민의 극소수만이 고려로 유입되었고 그 문화의 극히 일부분만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면, 발해에서 고려로 연계되는 '민족사'의 고리를 강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학}상-25에 기재된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그린 지도에서, '동이족의 분포지역'과 '고조선의 세력 범위'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다. 이 그림이 시사하려는 것이 고조선을 '동이족'이 세웠다는 것인지, 고조선을 세운 '한민족'이 '동이족'의 일부였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어있다. 이 그림에는 사실의 착오도 있다. 일본과 肅愼 등이 '동이족' 분포지역에서 빠져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민족'의 개념이 명료하게 정립되지 않아 '민족' 개념이 '나라', '국가'(왕조) 등과 혼동되고 있지만, '한국사'가 '한민족의 역사'임은 분명하게 명기되었고, 한민족이 한 혈통의 '단일 민족'이었다는 역사의식도 명확하게 표명되었다. '한국사'가 단일한 혈통의 한 민족의 역사인 만큼, 그 서술의 단위가 '한민족이라는 한 민족'이 되는 것임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점이 한중 양국의 역사 교과서 서술체재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와 더불어 '국사'의 공간적 범주를 규정하는 기준도 양국 교과서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 교과서는 현재 중국의 범주(즉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중국사의 공간적 범위로 규정하였지만, 한국 교과서는 '만주'를 잃어버린 영토로 간주하여, 한국사의 공간적 범위를 현재 한국의 범주(즉 대한민국의 선언적 영토)로 국한하지 않았다. 한국사의 공간적 범위란 곧 한민족의 역사적 활동 공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국 교과서에서 보이는 '민족' 개념은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중국 민족'과 '이민족'을 구분하는 중국 교과서의 '민족' 개념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
   중국의 역사 교과서가 현재의 중국(정확히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상의 중국과 외국을 구분한 데 반해,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혈통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상의 한국과 외국을 구분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기술에서 부득이하게 중복되는 부분이 발생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곧 '만주' 즉 遼東의 문제다. 요동은 중국 교과서의 기준으로 불 때는 당연히 중국의 일부이지만, 한국 교과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원래 한민족이 활동하던 근거지의 하나였다. 따라서 이 부분을 둘러싸고 양국 교과서에서는 기술상의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한국, 혹은 한중관계사에 관한 중국 교과서의 기술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특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역사상의 한국을 중국의 '외국'으로 파악하였다. 그것은 양국이 함께 포함된 지도에서 언제나 국경선 표시로 양국을 나누고 있는 것, 중국의 {세계역사} 교과서에서 한국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점, 그리고 중국과 한국(조선)을 '兩國'이라 표현하는 점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컨대, {敎科書} 1-113 '漢과 朝鮮, 日本의 우호 교왕'에서 "中朝 兩國 인민은 일찍이 3천년 전부터 왕래가 있었다. 東漢 시기에 朝鮮半島상의 各國은 我國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문화교류를 강화하였다"고 기술하였다. {世界} 1-58-9 '東亞와 西亞의 封建國家'에서도 "東亞에 위치한 朝鮮과 日本은 中國의 근린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국 교과서에서 朝鮮 즉 한국을 명확히 '근린'으로 규정한 까닭은 역사상의 한국이 현재의 한국과 같이 '한반도'에 국한하여 존립해 있었다는 역사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둘째, 한중간의 '밀접한' 역사적 관계를 거듭 강조하면서도, 전통적 정치외교관계, 즉 冊封朝貢 관계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일견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중국의 교과서가 책봉조공관계를 중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제도적 관계로 해석하면서, 동시에 역사상의 한국을 중국의 외국으로 보는 이상, 양국 국가들의 외교관계를 책봉조공관계로써 설명하는 것은 모순된 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책봉조공관계에 대한 설명을 배제하면서 전통적 한중관계의 외교적 측면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라 할 수도 있지만, 중국 교과서에서는 壬辰倭亂과 한국전쟁에서 중국인이 한국인을 도운 일, 즉 抗倭援朝와 抗美援朝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이는 한중 외교관계의 또 다른 측면인 事大字小 관계의 우회적 강조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치외교관계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한 기피, 혹은 절제하는 대신에, 중국 교과서에서는 경제 문화 교류관계를 매우 강조하였다.
   셋째, 고조선에 대한 기술을 생략하였고, 삼국 가운데 신라는 강조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기술은 가능한 한 회피하였다. 즉, {敎科書} 1-113에서 "中朝 兩國 인민은 일찍이 3천년 전부터 왕래가 있었다"고 기술하였을 뿐, 고조선 등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일체 생략되었으며,  고구려에 대해서도 {敎科書} 2-5에서 "隋 煬帝는 3차례 高麗에 대해 전쟁을 발동하여 모두 실패하였다"고 하고, {敎科書} 2-32에서 "隋朝와 唐朝의 초기에 조선반도상의 국가와 中國은 모두 왕래하였다"고만 하였을 뿐, 구체적 언급은 생략하였다. 신라에 대한 기술이 자세한 데 반해, 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한 기술이 생략되거나 매우 소략한 것은 두 국가가 遼東과 한국에 걸쳐 존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국가를 요동의 국가로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국가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적 배려와 관계될 것이다.
   중국 교과서의 이 같은 조심스러움은 이른바 '漢四郡'의 기술을 생략하는 데서도 발견된다. {課本} 1-66에서 "漢武帝는 西南 소수민족 지구에도 사람을 보내어 四川 서남, 貴州, 雲南 등지에 郡縣을 건립하여, 內地와 서남의 관계를 강화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사건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동북방 군현(즉 한국사 상에서 '漢四郡'이라 이르는 것) 설치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 것이다. 이는 서남 군현 지역이 현재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지만, 동북 四郡 지역의 상당 부분이 현재 한국에 편입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중국 교과서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현재의 관점으로 판단, 이해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넷째, 발해를 중국의 일부로, 발해사를 중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명기하였다. {敎科書} 2-25-6 '車書本一家'에서 발해에 관하여, "松花江, 黑龍江 일대에 隋唐 시기에 靺鞨族이 거주하였다. 7세기 중기 이후에 靺鞨의 粟末部가 강대해졌다. 7세기 말에 속말부의 수령 大祚榮이 각부를 통일하고 정권을 건립하였다. 8세기 전기에 唐 玄宗은 대조영에게 渤海郡王을 주었는데, 이 때부터 속말말갈 정권은 渤海로 칭해졌다"고 하고. "발해는 경제가 발달하여 內地와 무역을 빈번하게 내왕하였다"라고 상술하면서, <渤海 上京 龍泉府 遺址 示意圖> <渤海 石燈塔> 등의 사진과 설명을 부기하였다. 이처럼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명확하고 단호하게 규정한 것은, 신라의 영토가 현재 한국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발해 영토의 대부분이 遼東, 즉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東北'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 중국 국가와 한국 국가의 국경선에 대한 중국 교과서의 지도 표기가 한국 학계의 성과나 한국인의 일반적 역사인식과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敎科書} 1-47에 게재된 '戰國形勢' 지도와 {敎科書} 1-72의 '公元前3世紀匈奴南下形勢' 지도, {敎科書} 1-73의 '秦朝彊域' 지도 등에서는 長城 혹은 遼東郡의 東端이 淸川江이나 大同江  유역까지 다다른 것으로 그려졌고, {敎科書} 2-24의 '唐朝 후기 강역과 邊疆 各族의 분포' 지도와 {敎科書} 2-69의 '五代十國前期形勢' 지도에서는 唐이나 五代와 渤海 사이의 국경선을 생략하였다. {課本}에 그려진 지도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물론 한국의 교과서나 한국인의 역사인식과 다를 바 없이 그려진 지도도 적지 않고, 고려의 영역이 압록강까지 확장된 것으로 그려진 {敎科書} 2-112의 '元朝彊域' 지도와 같이 오히려 한국측에 '유리하게' 그려진 지도도 없지 않지만, 중국 교과서에 그려진 지도의 대부분은 현재 중국 학계의 연구 경향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현대사 부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에 대한 불균형한 중국측의 편향적 입장이 계속 반영되고 있다. {敎科書} 4-140 '抗美援朝'에서 "미 제국주의는 소위 '聯合國軍'을 사납게 지휘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朝中 인민은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면서, 한국전쟁의 전황을 본문 5쪽과 사진 7장, 지도 2장, 통계표 1개 등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世界} 2-115에서는 金日成의 사진을 게재하고, "김일성은... 조선인민을 영도하여 장기적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하였다"는 설명문을 기재하였으며, {세계} 2-122-3 '미국의 조선 침략전쟁'에서도 한국전쟁의 과정과 '援朝抗美'에 관해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는데, 여기서는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측의 '援朝抗美' 입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중국 교과서의 한국사, 혹은 한중관계사에 대한 기술에서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중국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과 한국을 구분한다는 것으로, 이는 역사상 '중국' 혹은 중국의 역사에 대한 중국 학계의 일반적 연구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현재 한국은 중국과 독립된 국가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상의 한국도 당연히 중국의 외국으로 간주되었다. 단, 新羅나 高麗, 朝鮮 등은 현재 한국의 영토(즉 '조선반도') 위에 존립한 국가이기 때문에 명확히 외국으로 간주되었지만,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한국의 국가로 인식하는 渤海는 현재 중국의 영토(즉 '만주') 위에 존립한 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의 국가로 단호히 규정되었다. 古朝鮮이나 高句麗는 현재 한국 영토와 중국 영토에 걸쳐서 존립한 국가였기 때문에 구체적 기술을 회피함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미봉하려 하였다. 이러한 원칙이 논리적으로 합당한 것인지 여부는 학술적으로 따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나, 중국 교과서에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한중관계사에 관한 한, 일정한 원칙을 발견하기 어렵다. 한국의 교과서는 {중학}상-1 '머리말'에서 "역사 서술은 과거가 어둡다고 숨기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과장해서는 안 된다. 역사 서술은 치우침이 없고 엄격하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실제 역사 서술 과정에서는, 특히 한중관계사의 기술 과정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한국의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원칙은 민족적 자존이며, 이를 위해서는 과장과 생략도 절제되지 않았다.
   먼저, 중국 교과서에서 古朝鮮에 관한 기술을 생략한 데 반해, 한국의 교과서는 고조선, 특히 이른바 '檀君 朝鮮'에 관하여 '한국의 첫 국가'로서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그러나 고조선 가운데서도 중국과 깊이 관련된 이른바 '箕子 朝鮮'과 '衛滿 朝鮮'에 관해서는 기존의 사료를 불신하여 기술하지 않든지 대폭 생략하였다. 즉, {중학}상-24 '고조선의 성장'에서, "그 후,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 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하여, 기자 조선에 관한 기술을 아예 배제하고 위만 조선의 기원에 대한 기술을 생략하였다. 또한 {尙書大傳}과 {史記} 등 중국의 옛 문헌에 중국인으로 기술된 箕子와 衛滿의 東來에 대하여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고대 한국의 정치적 자주성을 훼손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을 거부하였다. {고등}상-27 주에서는 "기자 조선을 조선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 내부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또는 동이족의 이동 과정에서 기자로 상징되는 어떤 부족이 고조선의 변방에서 정치 세력을 잡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라고 하여, 기자 조선에 대한 전통적 기록을 전면적으로 불신하고, 기자를 조선의 일부 세력으로 보는 학계의 일부 견해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또한 위만조선에 대해서도, {고등}상-27의 주에서 "위만은 입국할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서 살던 조선인으로 생각된다. 위만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여, 위만이 조선인이었다는 李丙燾 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실로 기재하였다.
    고조선의 영토에 관한 서술도 과장되거나 애매 모호하다. {중학}상-24에서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고 하여, 고조선의 강역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이라 애매 모호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중학}상-25에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나타내는 지도를 기재하였는데, 같은 지역을 본문에서는 '통치 지역'이라 하고 지도 제목에서는 '세력 범위'라 하여,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영토이든, 세력 범위이든, 그것이 어느 시기의 것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고조선이 전 시기를 통해 그러한 범위의 영토, 혹은 세력 범위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이 요동 서부를 점유한 것은 초기(戰國 시기)이고, 요동 동부의 諸國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후기(위만조선시기)에 국한되었다.
    이른바 '漢四郡'이 존립한 시기는 무려 400여 년에 이르렀고, 한국 교과서의 편찬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한사군이 한국에 설치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한국 교과서에서는 한사군의 설치와 그 존립에 대해서는 {중학}상-24에서 "한은 고조선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반격을 받고 물러갔다"고 하여, 극히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중학}상-44 '고구려의 팽창'에서는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낙랑군을 공격하여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 내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았다(313)"고 하였는데, 고조선과 고구려가 어떤 관계이기에 '옛 땅을 되찾았다'고 할 수 있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고구려 등 삼국과 중국 국가들의 관계에 관한 기술도 과장되거나 생략된 사실이 적지 않다. {중학}상-60 '삼국의 대외 관계'에서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는 전성기를 맞아 동북 아시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백제는 중국의 요서, 산둥 지역과 일본의 규슈 지역을 연결하는 세력권을 형성하여 해상 무역 활동을 활발히 펴 나갔다"고 하면서, '도움말'에서 '백제의 해상 세력권'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고, 백제가 '요서'와 '산둥'을 경략하였다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의 각국들과 책봉조공관계를 맺고, 그 국왕이 중국 국가의 '將軍' 등으로 책봉되어 이른바 '幕府體制'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당시 고구려, 백제와 중국 국가들이 대등한 외교관계를 가졌거나, 심지어는 우월한 국제적 지위를 가진 것처럼 기술하였다. 신라에 대해서도, {중학}상-68에서 "당군의 계속적인 침략에 맞서 신라는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당은 마침내 안동 도호부를 평양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겨 한반도로부터 물러나고 말았다"고 하였지만, 안동도호부를 퇴각케 한 가장 주요한 요인은 唐이 吐蕃에 대패한 大非川戰役이었다.
   요동에서 출현한 통합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한국 교과서의 기술도 은닉을 위한 생략과 과장으로 일관되어 있다. 먼저, {중학}상-125에서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 오랜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평화를 바라게 되어 강화가 성립되고 사신을 교환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강화의 대가로 고려가 택한 책봉조공관계의 수립에 관한 기술은 생략함으로써 거란-고려 관계의 전체상을 사실상 왜곡시켰다. 또한 여진의 금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학}상-126에서 "고려에서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이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의 사대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하여, 고려가 금의 요구대로 금에 '事大'하게 되었음을 시사하면서도, 역시 금과 책봉과 조공을 교환하게 되었음은 기술하지 않았다. 몽고 혹은 원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학}상-129에서 "고려는 몽고와 화의를 맺게 되었다...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원과 고려와의 공적 연락 기관으로 운영되었다"고 하였으나, 화의의 결과 무엇을 대가로 지불하였는지를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동행성이 단순한 '공적 연락 기관'의 기능을 넘어 원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였음은 언급하지 않았다.
   용어의 사용이 적절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 상황을 잘못 이해하도록 유도한 경우도 있다. {중학}상-132-4에서 "고려는 원과 강화한 뒤, 원의 여러 가지 압력과 간섭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등, 원과 고려의 관계를 거듭 '간섭'이라 표현하였지만, 이것은 한국사상 가장 심각하게 자주성과 독립성을 훼손 당하였던 시기의 양국 관계를 표현하기에는 적절한 말이 아니다. {중학}상-148에서도 "고려에서는 최영 등이... 명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까지 수복하고자 군사를 출동시켰다"고 하였는데, 고려가 요동 지방을 점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복'이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조선과 명의 관계는 전형적인 冊封朝貢 관계요, 事大字小 관계였다. 그러나 한국 교과서는 이러한 양국 관계를 사실 그대로 기술하지 못하였다. {중학}상-150에서 "조선 왕조는 밖으로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하고, 여진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평화 유지에 힘썼다"고 하여, '명과의 친선 관계'와 '여진이나 일본과의 교린 관계'를 대비시켰지만, '교린 관계'와 대비되는 '친선 관계'가 어떠한 관계인지 밝히지 못하였다. {중학}상-173의 '학습개요'에서도 "조선은 명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그들의 명분을 살려 주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국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실리를 추구하였다"고 하여, '친선 관계'라는 애매 모호하고 내용이 없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여 역사적 실체에 대한 이해를 계속 호도하였다. 단지, {중학}상-174 '명과의 관계'에서는 "조선은 조공을 통하여 명의 명분을 살려 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였다"고 하여, 조선이 명에 '조공'하였음을 어렵게 언급하였으나, 이 경우에도 '조공'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책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朝明간 책봉조공관계의 정치적 의미를 소거하려 하였고, 책봉조공 관계와 더불어 조선과 명의 관계를 특징짓는 사대자소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양국 관계의 전체상을 왜곡시켰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의 사대자소 관계가 그 실질적 의미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명이 파병한 것은 '脣亡齒寒'의 논리에 따라 遼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대의 명분은 조선의 '事大'에 대한 '字小'의 보답이었으며, 실제로 명의 원군은 왜란의 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학}상-191 '왜란의 극복'에서는 "의병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해지고, 수군의 계속적인 승리로 전세가 조선측에 유리해져 가고 있을 때, 명나라의 군대까지 합세하여 반격을 가하였다"고 간단하게 기술함으로써, 마치 전란의 극복에 명의 원군은 부차적 역할을 한 것처럼 이해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는 명 원군의 역할을 결정적인 것으로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여 '援朝抗倭'의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한 중국 교과서와는 대조적이다.
   조선과 청도 조공과 책봉, 사대와 자소를 교환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지만,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생략, 혹은 은닉하였다. 단지, {고등}하74-5에서 "강화도 조약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였지만, 그것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와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 기회를 노리던 청나라의 알선으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하여, 청과 조선의 전통적 관계가 宗屬關係, 즉 宗主國과 藩屬國의 관계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하였으나, 중학교 교과서에는 이러한 시사조차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국사에서는 渤海를 한국사의 주요한 요소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한중 양국 교과서의 내용상 가장 큰 차이점이다. 중국 교과서는 발해를 唐朝의 일개 지방정부로 간주하여 발해를 중국의 일부로 명확하고 상세하게 기술하였는데 반해, 한국 교과서에서는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보아 한국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중학}상-83 '발해의 발전'의 학습개요에서, "발해는 만주 지방에서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하였다.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또, 만주를 지배하여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유지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고구려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으나, 그 문화의 전통과 유민은 고려에 흡수되었다"고 하였고, {중학}상-84-5 '발해의 건국'과 {중학}상-85-6 '대외 관계', {중학}상-86 '발해의 문화' 등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거듭 강조되었다. 따라서 {중학}상-84 '발해의 영역'의 지도에서 발해와 당의 경계를 국경선으로 분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도의 내용에 있어서도, 발해의 영토에 압록강 하구와 대동강 하구를 포함시킴으로써, {敎科書} 2-24의 '唐朝 후기 강역과 邊疆 各族의 분포' 지도에서 渤海의 영토에서 압록강과 대동강 하구, 즉 평안도 서부를 제외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단지, 발해가 그 후기에 요동성 등 요동을 점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과서에서, 중국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遼東城 등 요동 중부를 그 영토 범위 안에서 제외한 것은 특이하다.
   한국 교과서에서 발해를 한국의 한 성분으로 상술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민족'적 자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 문화교류 관계에 관한 서술은 오히려 문화적 열등의식을 들어내고 있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중국 문화의 한국 전입을 매우 적극적으로, 그리고 매우 자세하게 기술한 반면 한국 문화의 중국 전입에 대해서는 인색하였는데, 한국 교과서에서도 중국 문화의 한국 전입이나 한국 문화의 일본 전파만 강조하고 한국 문화의 중국 전입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민족'이나 역사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가 문화적 동질성임을 감안한다면, '민족'적 자존을 내세우면서 문화적 열등감은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중국의 교과서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편중된 입장을 보였듯이, 한국의 교과서에서도 사상적 편향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한 예로, {중학}하136-8 '독립군의 항전'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조선의용대 등 사회주의 계통의 활동에 대한 기술은 전무하였다. 이 역시 역사 서술의 '생략'을 통해 전체의 역사상을 왜곡시키는 사례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한중관계에 관한 한국 교과서 기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국 교과서와는 달리 일정한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만주' 즉 요동을 중국의 일부로 보고 그곳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중국사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중국 교과서의 기술 태도는 현재 중국의 영역을 기준으로 역사상의 중국을 판단한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과서는 요동에서 성립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은 한국의 국가로 보면서 같은 요동에서 거주, 활동한 거란인, 여진인, 몽고인, 만주인 등은 중국인으로 이해하고 그들이 세운 요, 금, 원, 청 등은 중국의 국가로 규정하면서,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한국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원칙은 '민족'의 자존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과장과 생략을 절제하지 않음으로써 전체 역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저해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4,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질서
   한국과 중국은 전통시대에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한 가장 주요한 성분이었고, 특히 중국은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으며, 冊封朝貢 관계와 事大字小 관계를 핵심적 내용으로 하는 한국과 중국의 전통적 관계는 이러한 '중국적 세계질서'의 주축이 되었다. 따라서 한중 양국의 교과서에 이 문제에 대한 기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 천자를 자칭한 周와 제후를 자칭한 주변 성읍 국가들 사이에 교환된 책봉과 조공의 제도적 과정은 秦漢 시대 이후에는 중국의 국가와 중국 바깥의 국가 사이에서도 교환되었으며, 이러한 교환을 통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질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중국의 교과서에는 이러한 책봉조공 관계를 통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관해서는 전혀 기술되지 않았다. 춘추전국 시대에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구축된 이후 중국 국가와 비중국 국가의 관계로까지 확대된 事大字小 관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언급되지 않았다.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중국 교과서에서 기술하지 못한 까닭은 아마도 두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중국과 주변국의 대등하고 독립적 관계를 강조하려는 정치적 배려에 의한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기준으로 소수민족과 외국을 가름한 데서 초래된 문제일 것이다.
   전통시대에 중국의 국가들은 주변의 다른 역사공동체에 소속된 국가들과 冊封과 朝貢을 교환함으로써, 독특한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구축하였다. 중국 국가와 책봉조공 관계를 수립한 非中國 국가들 가운데에는 匈奴 등 五胡와 突厥, 吐蕃, 南詔, 契丹, 靺鞨, 渤海, 蒙古, 女眞 등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 국가들은 모두 중국 교과서에서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으로 규정된 바 있다. 이들이 '외국'이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으면서, 중국 국가와 이들의 관계를 통해 세계질서, 혹은 국제질서가 형성된 것으로 기술되기는 어렵다. 이처럼 중국 교과서에서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기술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들을 중국의 일부로 규정한 데서 초래된 논리적 자가당착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국가와 국가간의 국제적 관계로 볼 수 있는 경우를 국내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관계로 보는 사례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교과서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역사상의 모든 사건을 중국사로 이해하고 그 역사의 주역들을 중국인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匈奴와 突厥, 吐蕃, 契丹, 渤海 등 명백히 중국 국가와 병존, 혹은 대항한 非漢人 국가들까지 중국 국가로 간주함으로써, 이들 비한인 국가들과 중국 국가들의 관계를 국내 통치관계, 즉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관계로 규정하고, 그 관계의 조절과 유지를 위해 존립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 예컨대 漢代의 (西域)都護制, 唐代의 都護府-都督府制(즉 羈 府州制), 明代의 都(指揮)司制와 土司制, 淸代의 (駐藏)大臣制 등 冊封朝貢制에 의해 운영된 일체의 제도들을 모두 국내 통치제도로 기술하였다. 동아시아사 상에서 국제관계라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중국'의 국내 관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중국 교과서에서 역사상의 국제관계에 관한 기술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중국 교과서에도 '외국'의 개념은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敎科書}2-36 '海內存知己'에서는 新羅와 日本, 波斯(페르샤), 大食(아라비아) 등을 '아시아 각국'이라 칭하였고. 이들 외국 가운데서도 특히 조선과 일본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지면을 할애하였다. {敎科書}1-113 '漢과 朝鮮, 日本의 우호교왕'에서 "中朝 兩國 인민은 일찍이 3천년 전부터 왕래가 있었다"고 한 다음, 조선(한국)의 고대사와 한중관계사에 관해 상술하였음은 전술한 바 있거니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슷한 지면을 배분하여 기술하였다. 특히 {敎科書}2-33 '唐風洋溢奈良城'에서, "中日 양국은 수당시기에 밀접하게 교왕하였다. 隋朝 시기에 이미 日本은 遣隋使를 中國에 보내었다. 貞觀 연간부터 중국에 보내기 시작한 일본의 遣唐使는 모두 13차례나 되었다"고 하여, 일본인의 對中國觀을 나타내는 '遣隋使'나 '遣唐使'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양국 관계의 대등성과 비제도성을 나타낸 것은 주목된다.
    이처럼 중국 교과서에 외국으로 간주된 국가로서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인도와 중동 제국 등인데, 이들 국가들 가운데서 전통시대의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였던 성원은 한국과 일본뿐이다. 이로 인해, 중국 교과서, 특히 {세계역사} 교과서에서는 동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만이 외국으로서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중국 교과서에서 한국과 일본이 외국으로 상술된 것은 이들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선 밖에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나라 가운데 독립 국가를 영위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 일본, 몽고, 越南(베트남) 등인데, 이 가운데서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외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몽고는 그 절반이 현재 內蒙古自治區로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 교과서에서도 역사상의 '소수민족'으로 취급받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중국 교과서에서 월남을 외국으로도, 소수민족으로도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존재 자체가 철저하게 무시된 것이다. 월남에 관한 기술은 단지 {世界}2-115와 124-5 등에서 越南民主共和國의 성립과 '미군의 월남 침략전쟁'을 상술하면서 '援越抗美'만을 강조하였을 뿐, 전통시대의 중국-월남 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기술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課本}1-47에서 "越族은 我國 남방의 오래된 소수민족이었다"고 하였는데, 越南이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 越族에 의해 세워진 나라로 이해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월남이 1천 여 년 간 중국 국가의 군현적 지배를 받았기 때문인가? 혹은 월남전 직후의 中越 국경분쟁 이래 쌓아진 양국의 갈등이 반영된 것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분명한 것은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월남이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몽고와 월남까지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제외된다면, 남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 일본뿐이다. 그나마 일본의 경우는, 특수한 시기를 제외하고서는 양국의 역사적 관계로부터 제도적, 지속적 외교체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독립적이나 불평등한 외교관계로서의 책봉조공 관계나 사대자소 관계라는 독특한 외교체제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에서만 확인될 뿐이니, 이들 두 국가의 관계만 가지고서 어떻게 세계질서를 운운할 수 있겠는가? 특히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혈맹관계로 인해 과거의 특수한 외교관계(즉 藩屬 관계 혹은 宗屬 관계)를 역사 교과서에 기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중국 교과서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한 대부분의 주요한 구성원들을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리고 현재 주변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정치적으로 배려함으로써,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독특한 '중국적 세계질서'를 기술할 명분과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과 중국은 서로 대등하고 독립적 관계를 시종일관 유지한 것으로 기술되었고,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는 아무런 질서도 형성하지 못한 채 평면적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었다. 중국의 {중국역사} 교과서에도, {세계역사} 교과서에도 역사상의 '중국적 세계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가지 부언한다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의 소수민족인지 외국인지를 가름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대외전쟁에 대한 평가도 이러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 즉,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안에 편입된 '민족'에 대한 역사상의 정치적 간섭이나 군사적 침입은 간섭이나 침략이 아니라 지방정부에 대한 통치행위로 평가된다. 한 예로, {敎科書}4-139의 '전국 영토 기본 해방'에서, "新 中國이 성립된 뒤... 1951년 5월에는 西藏이 평화 해방되었다"고 하였는데, '西藏' 즉 티베트에 대한 침공을 '해방'이라고 표현한 것은 침공한 자와 침공 받은 자의 관계가 "중앙인민정부와 서장 지방정부"의 관계로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이른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관해 기술하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중학}상5 '역사의 의미'에서 "우리는 이웃 여러 민족이나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대하여 공부함으로써 민족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세계사 상에서의 한국사의 특성을 관계사 혹은 비교사적으로 이해하게 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실제 서술 과정에서는 전통시대 한국의 국제적 환경, 즉 동아시아의 독특한 세계질서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아마도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에서 한국이 중심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다른 나라들과 유지한 제도적 관계도 '숨기고 싶은'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전통시대에 한국의 국가들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수행한 국제적 역할은 중국의 국가나 중국을 통합한 국가들과 책봉조공 관계와 사대자소 관계를 가짐으로써 중국 중심의 안정된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데 공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봉과 조공의 禮을 교환하고 事大와 字小의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들의 국제적 관계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지만 결코 서로 대등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국제관계는 현금 국제적 관행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두운'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머리말'에서 스스로 공언한 것과는 달리, 교과서에서 기술하는 것을 기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明이나 淸 등 중국 국가 혹은 중국을 지배한 통합국가들과 한국의 국가들이 가진 외교관계가 책봉조공 관계였다거나 사대자소 관계였다는 사실의 기재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사신을 교환하였다"거나, "화의를 맺게 되었다"는 등, 애매 모호하게 표현하여, 양국이 맺은 제도적 관계의 실상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였다.  
    중국 교과서는 역사상 동아시아 세계의 주요한 성분들을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규정함으로써 '중국적 세계질서'의 존재를 스스로 무시하여 기술하지 않았다. 한국 교과서는 '머리말'에서 "역사 서술은 과거가 어둡다고 숨기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강조한 바와는 달리, 실제 서술과정에서는 숨기거나 과장함으로써 '중국적 세계질서'에 대한 기술을 생략하여 사실을 은닉하였다. 그리하여 양국의 교과서는 비록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중국적 세계질서'에 대한 기술을 생략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5. 맺는 말
   중국의 역사 교과서를 관통하는 기본 원칙은 현재 중국의 영역(실제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을 기준으로 역사상 중국과 중국사의 범주를 획정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원칙이 합리적 인식과 역사적 사고의 결과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상의 중국은 현재의 중국과 결코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이란 역사공동체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잣대로 과거의 중국을 규획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나 중국 역사 교과서에서 이러한 원칙을 세우고 고집하는 까닭은 56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에 건립되면서 떠맡은 최대의 과제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해소였지만, 특히 민족모순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험스러운 문제로 남아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안에 살고있는 56개 민족, 특히 漢族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이 스스로 한족과 더불어 하나의 '中華民族'으로 융합되어 함께 '중국인'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위에서 건립된 역사상의 모든 국가가 모두 中國의 국가였고 그들의 역사는 모두 中國史였다는 사실을 역사 교육을 통해 확인시키는 일이 필요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하여금 정치에 '服務'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 교과서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복수의 역사공동체를 하나의 국가가 통합, 지배해온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교과서는 현재 한국의 영역을 기준으로 역사상 한국과 한국사의 범주를 획정하는 것이 아니라, 혈통상 '단일 민족'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국사'로 규정하였는데, 혈통이란 역사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혈통적 관계를 확인하는 일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역사상 한국과 한국사의 범주를 규획하는 기준이나 원칙이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한민족'의 자존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과 은닉만이 발견될 뿐이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한국이 독립된 국가를 영위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출현하여 일종의 독립운동의 지적 수단으로 활용된 이른바 민족주의 사관이란 것이, 정치적 독립을 회복한 지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국정 교과서라는 매체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한중 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이 양국의 역사적 배경과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음은 여러 차례 지적하였지만, 한중 양국 역사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사실의 왜곡은 1차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無知에 기인되었고, 혹은 편협한 沒我的 시각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국 교과서에서 都護府 혹은 羈 府州制 등을 통해 운영된 책봉조공체제를 국내 통치체제로만 이해하거나, 한국 교과서에서 安東都護府의 퇴각 원인을 新羅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려 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역사적 시각을 자국의 범위에만 국한시킨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史實에 대한 부적절하고 불충분한 이해는 학계 수준의 전반적 향상을 통해 기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역사 이해의 편협한 시각은 전체와 개별을 동시에 보는 자세, 즉 동아시아 세계 전체 안에서의 중국 혹은 한국을 보려는 總合的 접근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교과서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비합리적이며 비역사적인 기준을 내세워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왜곡시키거나, 한국 교과서가 낡은 민족주의 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채 민족의 자존만을 내세워 과장되고 생략된 기술로써 역사 이해를 오도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양자 모두 역사 이해나 역사 서술의 단위를 잘못 설정하였다는 데에 있다.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 교과서 편찬자들은 모두 역사 이해 혹은 역사 서술의 단위로서 '민족'을 내세웠지만, 이들이 말하는 '민족'이란 역사의 실제에서는 존재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역사 서술의 주체로 삼은 '중국'이나 '한국'은 역사의 실제에 있어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역사상의 '중국'은 중국 교과서에서 규정한 것처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나 그 영토와 일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黃河 중하류 유역의 '中原'에서 형성된 역사공동체를 이름하는 것이었다. 역사상의 '한국'도 한국 교과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주'와 한반도에서 활동한 국가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형성, 발전된 독특한 역사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와는 다른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중국의 국가와 독립된 자주적 국가들을 산생시킴으로써, 독자적인 역사체계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역사의 실제에 존재하지도 않은 '민족'이란 관념적 존재를 역사 이해나 서술의 단위로 삼지 않고, 역사의 실제에 존재한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역사공동체를 역사 이해나 서술의 단위로 설정한다면, 역사학 연구와 역사 교육을 정치에 노역하는 존재로 타락시키지 않아도 좋을 것이고, 역사학 연구와 역사 교육을 민족주의 사관이라는 자존적이고 선동적인 이념체계로부터 해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이라는 역사공동체를 역사 이해와 서술의 단위로 설정하면, 무엇보다도 양자 사이에 개재하여 양자의 관계를 조절해온 '만주' 즉 遼東의 국가와 그 역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요동을 매체로 하여 이루어진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소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전공; 東아시아史
현직; 西江大學校 史學科 敎授
저서; {古代 中國的 世界秩序 硏究} (一潮閣, 1981)
     {古代 東亞細亞 幕府體制 硏究} (一潮閣, 1997)
     {한중관계사} I, II (아르케, 1999)
     {티베트와 중국 -그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이해-} (소나무,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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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독교연구소 신학을 비롯한 인문학 석사, 박사 과정의 요점 한기연 2019.09.23 474
공지 환경소식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숨 쉬기 어렵게 된다/ 화석연료산업 제어방법 14 한기연 2019.08.28 265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의 파격적인 가르침들은 어떤 경험들에서 생겨났을까? 1 한기연 2019.08.01 320
공지 조직신학 예수초청장/참새예수 - 홍정수 박사의 조직신학교실 (동영상) 6 한기연 2019.07.15 269
공지 조직신학 홍정수 박사 신학특강(동영상) 1 한기연 2019.06.06 244
공지 가정사회소식 식인사회의 킬링필드, 이주노동자들 착취, 중대재해기업처벌법 23 한기연 2019.05.11 193
공지 기독교윤리 인류의 '마지막 싸움' / 배를 돌리자 24 한기연 2019.01.14 241
공지 가정사회소식 남성, 여성 아닌 제3의 성(간성) 3 한기연 2019.01.11 419
공지 교회사 웨슬리 [표준설교 정신] 이어 받은 기도문들 52개 pdf파일 file 한기연 2018.11.22 813
공지 조직신학 아우슈비츠에서의 하느님의 여성적 얼굴 1 file 한기연 2018.08.18 1406
공지 기독교윤리 빨간 지구 - 온실가스 시한폭탄에 이미 불이 붙었다 36 file 한기연 2018.08.17 388
공지 기독교윤리 벌레들의 나라,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기독교 파시즘의 망령 39 file 한기연 2018.06.30 473
공지 가정사회소식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남성의 탄생 8 한기연 2018.04.19 327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2010) pdf파일 9 file 한기연 2017.12.04 10526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 (2012)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23 10688
공지 기독교윤리 <생태계의 위기와 기독교의 대응>(2000)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10 11743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변화와 생태신학의 과제 (2017) 30 file 한기연 2017.11.04 12252
공지 가정사회소식 노령화: 남은 시간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장덕진 11 file 한기연 2016.04.26 19282
공지 역사적 예수 기후변화와 대멸종 시대의 예수의 복음 5 file 한기연 2015.11.12 19095
공지 기독교윤리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신학적 의미와 사목 과제 15 file 한기연 2015.10.06 21385
공지 역사적 예수 홍정수 박사가 말하는 예수 르네상스 (강의 동영상) 한기연 2015.04.01 25728
공지 기독교윤리 세월호참사 -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 133 file 한기연 2014.04.18 38066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생태대를 향한 출애굽 - 녹색의 세계관과 생태주의 인문학 아카데미 29 file 한기연 2013.11.12 34086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 시대의 교회의 역할 17 file 한기연 2013.08.24 34620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예수 살기 / 하늘이 낸 참사람들 11 file 한기연 2013.03.13 34488
공지 기독교윤리 엘리 위젤, <하나님에 대한 재판> 서평 1 file 한기연 2012.07.12 6913
공지 기독교윤리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한국 교회의 평화운동 자료 33 한기연 2012.04.24 57434
공지 조직신학 하나님이 계시냐고요 / 담임선생님 예수 / 홍정수 4 한기연 2012.04.11 89557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와 대멸종 시대에도 하나님은 전능하며 예수는 구세주이며 교회는 거룩한가 / 김준우 31 file 한기연 2011.12.12 97764
공지 역사적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 / 김준우 12 file 한기연 2011.10.23 62569
공지 조직신학 나의 종교경험 -> 나의 복음 -> 나의 신학을 일관성 있게 한 마디로 정리하기 4 한기연 2011.08.21 125087
공지 실천신학 대안교회의 가능성 / 한성수 1 file 한기연 2011.08.02 129009
공지 기독교윤리 핵위험 사회 치닫는 대한민국 1 73 한기연 2011.03.28 174376
공지 조직신학 감리교 종교재판의 전말/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6 file 한기연 2010.11.22 142095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담론의 종교문화사적 의미 / 김준우 4 file 한기연 2010.11.14 145130
공지 역사적 예수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7 한기연 2010.10.28 129445
공지 기독교윤리 2015년까지 모든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라! 14 file 한기연 2010.10.02 166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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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조직신학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1 한기연 2010.03.29 145103
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한기연 2010.03.27 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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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독교윤리 두달만에 - 북극 지역 빙하의 크기 변화 2009/9 22 한기연 2009.09.19 182522
공지 가정사회소식 소득 5분위 배율 비교 25 file 한기연 2009.09.13 18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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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북극해의 해빙 속도와 기후변화, 한반도 가뭄과 사막화 위기 19 file 한기연 2008.05.14 20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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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실천신학 목사 개(dog)론 / 축도유감 /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 / 한성수 3 한기연 2004.08.30 146715
공지 실천신학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성만찬/ 혼인주례자 상담체크 리스트 1 file 한기연 2003.09.30 29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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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목회정보 6개 교단 교인수, 2011년 대비 15.8%, 139만여 명 감소 1 한기연 2020.10.12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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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8 가정사회소식 보수 개신교와 성교육 한기연 2020.09.12 46
1057 기독교연구소 한국의 특수 성역 검찰 특수부의 반민주적 행태 한기연 2020.09.09 72
1056 설교 및 예화 모든 죽은 자를 위한 애도 / 정경일 한기연 2020.08.28 54
1055 환경소식 최종수의 버섯이야기, 야생버섯의 신비 한기연 2020.07.07 54
1054 미 대법원, 성적 지향에 따른 고용 차별은 위법 한기연 2020.06.18 22
1053 기독교윤리 전쟁산업을 대변하는 미국정부 / 원익선 한기연 2019.11.23 37
1052 기독교윤리 과학자들 1만 천 명 기후비상사태 선포/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4 한기연 2019.11.06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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