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KICS)

banner1.gif
banner2.gif

인터넷서점
바로가기

알라딘서점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top^

로그인



mobilew.jpg 

 

[최근 출간서적]

[최근 댓글]

조회 수 146560 추천 수 344 댓글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목회수상 ▣



목사 개(dog)론


한 성 수
뉴욕주 Port Jefferson교회 담임


        벌써 30여 년 전, 1960년대에 한국에서 상아탑(象牙塔)인가 우골탑(牛骨塔)인가 하고 불렸던 대학교 교정을 서성이며 드나들던 때, 내게 제일 골치 아프고 종잡을 수 없던 과목들은, 대개 교양 과정에 속하는 무슨 무슨 "개론(槪論)"들이었다고 기억된다. 철학 개론, 종교학 개론, 심리학 개론, 사회학 개론 등등. 영어로는 흔히 Survey니 혹은 Introduction이니 하고 번역하는 모양인데, 대충 두루뭉수리로 예 집적 제 집적, 게으른 사람이 처삼촌(妻三寸) 무덤에 벌초하듯이 건성으로 훑어 가고는, 학기말에 시험을 볼 때가 되면, 아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뭔지 분간이 안 되었다. 아는 것도 별로 없거니와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없는 듯이 떠들어 보는 허영의 뒤안길에는, 매우 한심스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꽤나 속상하게 만드는 거, 그게 바로 "개론"이라는 것들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꽤 오래되어, 섣불리 미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기가 무척 거북한 기분이 들기는 하는데, 하여간 요즘은 어떤지 모르나, 오래 전 한국의 대학이라는 데서는 "개론(槪論)"은 주로 분필 잡는 세월이 아직 오래지 않은 풋내기 강사들 차지이고, "각론(各論)"쯤 되어야 고명하신 교수님들이 강의를 맡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개론"일수록 저명하신 교수들이 맡아서 강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요컨대 숲을 보느냐 나무를 보느냐의 차이인데, 하기사 젊고 팔팔한 사람이라야 발빠른 걸음으로 이 나무 저 나무 숲속을 헤집고 다닐 것이요, 늙고 흐느적거리는 다리로야 그저 한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일이겠지....

        각설하고, 지금부터 15년 전 내가 펼쳤던 "목사 개론"을 이제라도 뒤늦게 다시 한 번 강론하게 되니, 진실로 감개무량한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목사 개론"을 펼 때는 나는 아직도 노상 배알이 꼴리는 이른바 평신도 시절이었기에, 홧김에 내뱉은 것이려니 여기고, 이제는 나도 목사랍시고 안수를 받고 설교단에 서서 감히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얼굴 가죽의 두께를 늘인 세월이 이러구러 12년이나 되었으니, 옛날의 철없이 떠들었던 "목사 개론"을 철회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회개하고 싶은 기분도 또한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지금도 그때 떠들어댄 "목사 개론"은 세월이 흘러도 시퍼렇게 살아서 내 가슴을 때리는 각성의 메시지로 다가 오기에, 오늘에 이르러 이를 철회할 생각이 별로 없어, 이렇게 개진하는 터이다.

        때는 1981년 12월 31일, 한국에서 어떤 목사님(L 목사님이라고 해 두자)이 마침 뉴욕의 내 집에 오셔서 자그마치 한 달을 머무시면서, 노상 맨해튼(Manhattan)의 Metropolitan Museum이나 아니면 Greenwich Village Soho 거리를 헤매고자 매일 기차로 출근을 하시던 때라, 섣달 그믐날 나와 내 아내와 L 목사님과 세 사람이 밤새워 1일 부흥회(?)를 하였것다. L 목사님은 본시 식품가공학을 전공하셨다던가, 각종 술을 빚는 기술이 전문가의 경지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언제나 밝고 넉넉하신 인품이 그 대머리만큼이나 시원하신 분이다. 어쩌다 그의 고단하신 젊은 신세가 그만 신학교 문전에서 멈추어서, 옛날에는 "주(酒)님을 마셨고", 나중에는 "주(主)님을 모셨으니", "마" 다르고 "모" 다른 세월의 지혜를 잘도 겸비하신 분이었다. 세 사람이 다들 한때는 서대문 찬샘물(冷泉)을 조이 마셔 댄 이력이 있기에, 화제는 종횡무진하여, 옛 스승들 일화에서부터 현대 신학과 각종 목사 흉내에 이르기까지, 웃기도 하고 울분도 토하면서, 그 긴 밤을 거의 새다시피 "주님을 마시고 주님을 모시면서" 얻어낸 결론이, 그게 곧 "목사 개론"이다. 여기 "개론"은 내 1960년대의 골치 아팠던 각종 "개론(槪論)"이 아니라, "개(犬, dog)"에 대한 논의를 뜻하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목사는 개다!"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행여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목사님이 계시면, 여기쯤에서 벌써 속이 슬금슬금 끓어 오르실텐데, "목사놈이 글을 쓰면서, 목사는 개라고 주장하면, 그게 드러누워서 하늘에 침 뱉기지... 목사의 품위를 목사가 스스로 깍아내려 점잖지 못한 자기비하(自己卑下)를 하면, 이미 그 순간 목사 안수 받을 때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주신 권위에 스스로 똥칠을 하는 거야. 그렇게 개(犬)가 되고 싶으면, 제 혼자나 되지 왜 남까지 도매금에 끌어넣자고 나서. 고얀 놈!" 마음을 넉넉히 가지십시오. 여러 종류의 목사들이 낙동강 하구 울숙도의 철새들만큼이나 들끓는데, 나 같은 괴물 하나 더한들, 뭣이 그리 해롭겠습니까?

        본시 "목사는 개다!"라고 주장하고 나서게 된 동기는, 하도 목사들이 평신도들을 "양떼"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면서, 자기들 목사들은 "목자(牧者)"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양(羊, sheep, 촌)과 목자(牧者, shepherd, 로이)의 관계는 유비(喩比)적인 표현이라, 옛 이스라엘의 히브리 성경에서도 툭하면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그려낸 오랜 전통이 있어 왔으니, 뭐 새삼스럽게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들의 골수에 깊이 박힌 관념으로 정착한 것이 어찌 오늘만의 문제랴. 교회 문전은 그만두고, 기독교인 장례식에 몇 번만 다녀와도 이내 익숙해지는 저 유명한 시편 23편도 이렇게 시작하지 않던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개역성경: 나는 이 번역문에 대하여 약간의 불만이 있지만). 본시 "목자(히브리어 로이)"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 나오기는, 이미 창세기 46장, 특히 49장 24절,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라고, 곧 다가올 운명을 앞둔 야곱이 이른바 그의 열두 자식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신세를 많이 진 아들 요셉을 두고 유달리 흠뻑 복을 쏟아 붓는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자, 그런데 목사들은 왜 평신도들을 양떼라고 부르기를 좋아할까? 그거야 물론 자기들은 성직자(聖職者)요, 기름 부음을 받은 하느님의 종이요, 교회라는 목장에서 양떼를 기르는 목양자(牧羊者)요, 그러니 아무래도 양떼들과는 격이 다른 고상한 위치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면서 살아야 직성이 풀리게 된 것 아닐까? 양떼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은 짐승떼요, 목자는 짐승이 아닌 사람이니, 평신도와 목사를 갈라놓는 가장 차별적인 관계, 즉 한 쪽은 끌려 다니고, 먹여지고, 길들여지고, 심하면 잡혀 먹히는 쪽이요, 다른 쪽은 인도하고, 먹이고, 때로는 잡아먹는 쪽이 되는데, 이러고도 고분고분 교회에 나가는 평신도는 도대체 뭔가? 요한복음 맨 끝 부분에 실려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더불어 주고받으신 저 유명한 대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모든 것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 세 번 거푸 물으시고, 세 번 거푸 당부하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것이 바로 오늘의 목사들을 베드로의 후계자들로, 그리하여 양을 치는 목자로 인정케 한 든든한 근거가 된 것이나 아닌지?
        좀더 세밀하게 읽어보면, 신약성경에서 "목자(牧者, shepherd, 포이멘)"란 단어는 모두 17번 나오는데(마태 3번, 마가 2번, 누가 4번, 요한 5번, 히 1번, 벧전 2번), 그 중 예수님을 목자에 비유한 곳이 마태 25:32, 26:31, 마가 14:27, 히브리 13:20, 벧전 5:4, 그리고 특히 요한 10:2, 11, 12, 14, 16에 있다. 매우 아름다운 축도(祝禱, Benediction)로 끝내는 히브리 13:20은 예수님을 "양(羊)의 큰 목자(the great shepherd of the sheep)"로 고백하는 초기 교회의 흔적이나, 흔히들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의 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요한복음 10장에 집중적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의 입을 빌어, "나는 선한 목자이니..."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천들의 관계를 읽고,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구약성경 에스겔 34장에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을 질타하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로 선포하시는 절절한 뜻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10장과 더불어 쌍벽(雙璧)을 이루어, 가장 연민에 가득 찬 목자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뒤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저 유명한 길 잃은 양의 이야기(누가 15, 마태 18) 또한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아, 예나 이제나 우리를 찾고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그려내려고 한 비유가 아니겠는가?
        훗날 베드로 전서 5장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 sordid gain)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主掌, lord over)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초기 교회의 이른바 장로(長老, elder, 프레스뷔테로스)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의 역할을 위임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장(牧者長, the chief shepherd, 아르키포이메노스)"으로, 그리고 장로들(오늘의 목사들)을 목자로 명명(命名)하는 교회의 질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른 곳에 나오는 감독(監督, Bishop, 에피스코포스)과 더불어 장로(長老)는 초기 교회의 목자들을 일컫는 직위인데, 이 전통이 발전하여 후일 로마 교황에 이르기까지 장황한 교회 직제를 편성케 한 것을 어찌 부인할 수야 있으리요?
        다만, 이 비유를 그대로 믿고 이른바 양무리를 치는 오늘의 목사상, 또는 목자상이 어쩐지 으시시한 느낌이 드는 것이 문제다. "양무리를 친다"는 게, 양떼를 "두드려 팬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계신 듯한 목사님들이 꽤 있어서(실제, 나는 "교인과 땅콩은 달달 볶을수록 맛이 난다"라고 강조하는 한심스런 분도 만났다), "나는 '친다'는 게 아니고 '먹이고 기르고 돌본다'는 뜻인 줄 알고 있노라"고 자신 있게 다짐하시는 분들께서는 좀 언짢으시겠지만, 요즈음 "성숙(成熟)한 평신도(平信徒)" 타령을 열심히 하면서도, 속으로는 "정숙(靜肅)한 병신도(病身徒)"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으신 목사님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겠는가? 이른바 "영력이 넘치시는" 목사로 인정받는 분들은 어이하여 한결같이 목줄기에 힘이 잔뜩 들어 그 위세가 기고만장(氣高萬丈)하고, 큰 교회의 "당회장(堂會長)"으로 불리기를 즐겨하는, 그리하여 제왕(帝王) 같은 권위를 잡고 서 있는 목사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저 시골구석에 처박힌, 그리고 저 바닷가에 거니는 쫄때기 전도사 나부랭이들은 허구한 날 고작해야 궁항(窮巷)의 무지랭이들 뒷치닥거리나 할까, 무슨 영력(靈力)이 있으리요? 하기사, 일구월심(日久月深) 기도하고 호소하고 열망하기를, 언젠가는 나도 서울의 초대형 교회의 강단에 서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 내어, 연예인 뺨칠 인기 있는 명설교자가 될 날만 학수고대(鶴首苦待) 하는 자라면, 그런 말 들어 싸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회장(堂會長)"이라는 칭호는, 내가 알기로는 본시 장로교회의 "당회(堂會, Session)"를 주재하는 사회자를 이름이다. 장로교회도 아닌 교회들에서 웬 전통에도 없던 장로 제도를 도입하여서, 장로 1명에 목사 1명 있는 교회에서도 이른바 "당회"를 구성하고는, 목사님께서 떠억하니 "당회장"에 취임하고, 이어서 명함에도 "당회장 아무개 목사"라고 박아 넣어 다니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아주어도 권력(power)에 환장(換腸)한 인상을 주는 걸 어쩌랴. 사실 "당회장"이야 교회 내부용 명칭이 아니던가? 당연히 "담임 목사"라는 명칭이 전 교인을 상대로 목회하는 직분이요, "당회장"이야 고작 장로 몇 명과 목사가 구성하는 소수의 그룹을 회의 주재한다는 뜻밖에 더 되랴. 그런데 왜 "담임 목사"라는 칭호보다는 "당회장"이란 칭호를 한결같이 선호하는 것일까?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주무르는 큰 회사의 "사장" "회장"들이 부럽기는 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절묘한 수를 내기로 한다. 세속에서 아무리 높으신 "사장님, 회장님"도 거룩한 교회에 오면 그 칭호는 모두 무효, 그 대신 신령직이란 허울을 씌워 "장로"로 임명하면, 자동적으로 당회장의 권위 아래 굴복하게 되는 것, 그러니 "사장" 위에 "회장" 있고, "회장" 위에 "당회장" 있음을 만천하에 으시대고 싶은 것이리라. 아니면, 도대체 "당회장, 아무개 목사"가 왜 필요한가? 가장 거룩한 것을 빙자하여 가장 세속적인 권위를 배우려는 교회가 오늘의 교회다. 당회원이 10명이면, 교인은 적어도 300명 이상이란 뜻인데, 왜 나머지 290명 교인들은 팽개쳐 버리고, 구태여 10명 당회원들의 장(長)이 되기를 원한단 말인고?
        한국에 다녀오신 어느 병신도 아닌 평신도가 내게 들려준 말이 가슴에 찔린다. 자기 동창들 가운데 큰 회사의 사장이나 이사를 하는 사람들 사무실과 몇 교회 목사님 사무실, 이른바 당회장실을 다녀온 경험을 비교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그 굉장한 규모나 사치함, 그 면담 절차의 복잡함으로는 한국 교회의 당회장실을 능가할 곳이 없다!"고 했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렇게라도 해서 명예와 권력에 대한 대리 충족을 느껴 보려는 목사님들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쫀쫀하고 측은하고 가엾은가?  

        영어로 목자(牧者)를 shepherd라고 하는 것도, sheep herd(양떼를 돌본다는 뜻에서)와 연관되겠거니와, 흔히 한국말로 독일산 큼직한 개를 "쎄빠트"라고 불렀던 기억과 더불어, 목자와 개(dog)는 아무래도 긴밀한 연상을 이루게 한다. German shepherd dog(Deutscher Schaeferhund)이라는 긴 영어를 줄여, 결국은 "쎄빠트"라고 강하고 세게 발음하여 불렀던, 그 몸통이 큼직하고 귀가 날카롭게 하늘로 뻗쳐 있는 개는, 사실 보기만 해도 은근히 겁이 나는 것이 내 어릴 적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이 있다. 그러나 내가 "목사는 개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 무섭던 사냥개를 겨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만일 평신도들을 양떼로 본다면, 교회는 당연히 목장, 또는 이른바 푸른 초장일 것이요, 목자는 아무래도 예수님 자신이 되셔야겠고, 아무리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한다고 하지만 목사들이 감히 예수님과 동격으로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으려면, 어느 목장에나 흔히 있는 목장견(牧場犬, sheep dog) 정도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목장견(牧場犬)이 할 임무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잘 짖어야 한다. 저 언덕 위에 지팡이를 짚고 들판에 흩어져 있는 양떼를 굽어보고 우뚝 서 있는 목자의 모습은 아무래도 예수님께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간혹 제 갈 길을 가는 양들을 잘 짖어서, "딴 데로 가지 말로, 저기 저 언덕 위에 서 계신 목자를 따르라!"고 하는 것이, 개가 해야 할 첫째 중요한 임무요, 또한 교회의 목사의 설교라는 게 결국은 이 소리에 다름 아니다. 개가 잘 짖어야 하듯이, 목사도 잘 가르쳐야 한다. 목사인 나를 따르라는 것을 설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라!"고 짖는 것, 그것이 설교이다.
        둘째는, 잘 뛰어야 한다! 목장의 개가 다리 병신이 되어, 흩어져 달아나는 양들이나 또는 야생 동물들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한 양들을 신속히 쫓아가 돌보지 못하면, 그건 목장의 개가 될 자격이 없다. 사실 평신도들의 삶의 처소에 수시로 달려가는 목사의 심방이 그래서 중요한 게 아닌가? 현란한 입술과 정교한 혀를 지닌 목사라도 발이 느려서 거동이 굼뜨면 평신도들이 목사의 도움을 필요로 호소할 때 결국 가까이 할 수 없는 종교 귀족이 되고 만다. 부지런히 뛰어 다니는 것은 개와 목사가 지닌 공통점이다.
        셋째, 잘 느껴야 한다! 양떼들이 노니는 목장에는 언제나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뜻밖의 변화가 일어난다. 병들어서 건강을 지탱하지 못하는 양이나 양의 가죽을 쓰고 살며시 스며들어서 이 양, 저 양의 다리를 물고 다니는 늑대를 첫눈에 알아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귀로 들어도 보아서, 이를 발견해 내는 감각이 발달해야 한다. 평신도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눈치코치 없는 둔감한 목사, 세상 돌아가는 것이 도대체 어는 방향으로 가는지 깜깜한 목사는, 그래서 언덕 위의 목자를 향하여 양떼를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을 향하여 인도하는 격이 된다. 목사는 사태의 변화에 대한 판단과 관측에 민감해야 한다. 둔감한 목사는 병든 개다.
        넷째, 잘 물어야 한다! 아무리 눈이 밝아서 양의 탈을 쓴 이리와 늑대를 대뜸 알아보았다고 해도, 이를 일격에 물어서 물리침으로써 양떼들을 보호할 날카로운 이빨이 없으면, 그런 개는 툭하면 꼬리를 샅에 끼고, 오히려 늑대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일로 변신하고 만다. 세상을 현혹하고 사람을 착취 억압하는 일에 앞장선 목사가 되는 일은, 늑대를 물어 죽이기엔 이빨이 약하고, 겨우 양떼를 물어 해칠 이빨 정도밖에 없는 목사가 흔히 하는 짓이다. 높은 권력자들 앞에서는 가증스런 아양을 떨고, 노상 '조찬 기도회'라나 무어라나 열어 주기에 바쁘고, 낮고 천한 사람들 앞에서는 거드름을 개기름으로 흘리는 그런 무리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떼들을 먹이고 치라고 하신 말씀 하나 믿고, 감히 목사 길에 나선 사람들은, 자신이 뭐 굉장한 출세와 영달에 이른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노라고 자랑하는 투로 나설 것이 아니라, 양떼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양들의 개가 되는 것도 마다 않고 나선 길이라고 각오하는 겸손이 우선 앞서야 한다.
        예수 잘 믿었더니, 옛날에는 피죽 한 그릇도 먹기 힘들었던 내가, 지금은 냉장고 4개 가진 목사관에, 교인 몇만 명 가진 교회 당회장이 됐다고 자랑하고 다니다가, 드디어 무슨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노라고 목에 힘을 주는 종님(?)은, 단연코 개가 아니다. 그는 개보다 훨씬 힘센 늑대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겠노라고 자못 순교자적인 소명을 자랑할 수 있기 이전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개가 하는 짓이라도 기쁨으로 나서겠다는 각오, 그게 참된 목사의 길이 아닌가? 모두들 더욱 높아지지 못해서 안달들인데, 세상에는 스스로를 더욱 낮추는 것이 하늘의 뜻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친히 가르치신 분을 따라, 나도 낮아지되 주님의 개(shepherd dog) 또는 양들의 개(sheep dog)가 되겠다는 이런 결단은 사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명문 대학을 나왔다는 젊은이들이 신학교로 몰려들 온다니, 기쁜 현상이기는 하나, 그게 정말 개가 되어 보겠다는 갸륵한 소명감 때문일까?
        하루의 고단한 일과가 끝나면, 양떼들은 자기들의 우리로 몰려가 저희들끼리 뭉쳐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잠든다. 개는 목자이신 주인이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개야!" 하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면 그만 감격해서 꼬리를 흔들고 좋아서 야단을 떨지만, 잘 못하면 주인의 꾸중과 발길질을 당하고 마당에서 쫓겨나 어둠 속에 혼자 웅크리고 외롭게 서럽게 잠들어야 한다. 차라리 양이 되어 양 틈에 잠드는 것을 부러워할 일이다. 요사이는 개를 끌어들여서 침대에서 같이 자고, 고급 식품으로 주인과 한 식탁에서 먹고, 온통 사람보다 더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는 애완용 개들이 지천으로 늘어난 세상이지만, 목장의 개야 어디 그런 대접을 감히 생각하고 하루 종일 뛰고 짖고 하겠는가? 그저 고작 바라기는, 목자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같은 상에서 부스러기나마 먹게 하고, 밤 깊어 목자가 자는 침상 아래에 잠드신 목자를 곁에 느끼며 더불어 쉴 수만 있다면, 하루의 고단함이 아무런들 어떠랴? 그때 숲속의 늑대는 어둠 속에 이를 갈며 추위에 떨며 끊임없이 방황하게 되리라.
        목사가 된 사람이 철저히 깨달아야 할 것은, 평신도들과 어울려서 허물없이 지내는 자유스러움에 칭찬 받고 너무 기분 좋아하지 말고, 언젠가는 평신도들은 목사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놀아야 할 시간이 있음을 미리 알아서, 개는 어디까지나 개지, 양들과 어울려 쉴 수 없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도, 목사가 된다는 것은 목자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dog)가 되어야 할 것을 거꾸로 하느님(God)이 되어 보겠다는 이른바 영력이 넘치신다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영어의 스펠링이 절묘하게도 이 점을 깨우치고 있다. 목자이신 하느님(God)을 바로 믿지 않고 거꾸로 잘못 믿으면, 그만 개(dog)인 목사를 믿고 마는 한심스러운 병신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을 dog로 만들고, 자신이 God이 되기를 바라는 놀라운 설교자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 사태가 오늘의 사태가 아닌가?
        이사야 56:10-11에는 듣기에 차마 민망한 표현들이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두고 퍼부은 말씀이어서, 오늘도 나 같은 목사는 어느 총명한 평신도들이 이걸 볼까 봐 겁이 날 정도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silent dog)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shepherd)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든지 자기 이(利)만 도모하며...." 그러니까 나는 좋은 뜻으로 목사는 목장의 개 같아야 하며, 너무 오만하게 목자로 자처하기보다는 목장견쯤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다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정도였거늘, 일찍이 제3 이사야는 이토록 준엄한 경고를 통하여, 부패한 종교 지도자는 짖지 못하는 개라고 일갈해 버린 지 이미 2,500년이 넘었다.
        밤 새워 "목사 개론"을 펴고, 히히덕거리던 우리들 세 사람은, 밝는 날 새해 1982년 1월 1일 정초를 당하여, 근처에 계신 C 목사님 댁에 세배를 갔다. C 목사님은 당시 뉴욕 지역에서는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인 모 교회의 당회장님이셨다. 마침 동행한 L 목사님과 또 전도사들인 우리 내외를 만나, 평신도들이 듣지 않으니까 마음놓고 격의 없이 하시는 첫 말씀이, "교인들이란 그저 개(dog)야!"였다. 무슨 일이 그 교회에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가 막힌 우리 셋은 서로 눈을 맞추며 소리 없이 웃었다. 밤새워 지껄인 "목사 개론"이 졸지에 "교인 개론" 앞에 무색해졌기도 했지만, 그 C 목사님이 교인(평신도)들은 곧 개들 같다고 갈파하신 뜻은 결코 우리들이 펴낸 "목사 개론"의 개와 같은 뜻이 전혀 아니었음을 모두가 재빨리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개(dog, 히브리어로는 켈레브, 헬라어로는 퀴온, 퀴리온)를 좋게 본 곳이 별로 없다. 송장의 살을 뜯어먹거나(왕상 14, 16, 21, 22, 왕하 9, 시 68, 렘 15), 멸시의 대상이거나(삼상 17, 왕하 8), 사악한 것들이거나(사 56, 빌 3, 계 22), 심지어는 성전 남창(男娼)을 가리키는 말(신 23)로 사용되고 있어서, 감히 목사를 이런 종류의 개에 비유한다는 것은, 목사 자신들은 물론 목사를 하늘같이 우러러보려는 평신도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죽하면 나 자신도 목사인데, "목사는 개다!" 하고 나서겠는가? 쓸데없는 목사 개론을 펴다 보니, 결국 나 자신만 개가 되고만 기분이 들어서, 글이고 나발이고 다 개판이 되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혹시 동물 애호가들이 이 글을 읽게 되는 날에는, "이런, 어디 너희들 목사들이 감히 우리들 개에다 비교하는 거야? 개보다 훨씬 못한 놈!"하지 않겠는가?

        이른바 영성이 뛰어나고, 구령열(救靈熱)에 불타서 나섰다는 어떤 목사님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에만 헌신하기에는 너무 능력이 넘쳐서, 아예 미국에 있는 한국계 일간지에까지 5단 광고로 5대양 6대주에 연중 부흥회 일정을 깨알같이 박아 놓고 있다. 그 정도로 몰아치려면, 사실 몸인들 오죽이나 피곤하겠는가? 예수님의 사역은 고작 갈릴리 바다 근처를 한 3년 헤매어 보셨지만, 이토록 부지런한 목사들에 비하면 새 발에 피다. 더러는 듣자 하니, 부흥회입네 하고 헌금 받아 일정 비율로 분할하여 챙기고, 말씀에 홀딱 반하고 은혜를 주체 못할 만큼 넘치게 받으신 여성 평신도께서, 저녁이면 피곤하신 하느님의 종님(?)의 몸을 자근자근 마사지도 해 주고, 아마 다리도 주물러 주겠지. 그리고 또... 사실 이런 정도면 개들이 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니, 이런 분들께는 "개보다 뛰어난 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종교 지도자들에게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음성은 에스겔 34장에도 나온다.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들을 돌아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아, 이 몸도 이민 교회 목사 노릇 잘하고, 황혼이 지고 나서, 나중에 목자의 손에 머리 쓰다듬키는 개만큼만 인정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내게 꼬리가 없으니, 온몸이라도 흐드러지게 흔들며 기뻐하고 싶은데....

세계의 신학 34호 (1997년 봄호: 69-79)

  • ?
    한기연 2010.12.22 12:51

    축도 유감


    한성수
    뉴욕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축도(祝禱: Benediction)가 뭔가?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 뉴욕연회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일선 목회에 나선 세월이 이러구러 10년인데, 여태 축도가 뭐냐고 묻고 나선다면 이게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아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정말 "여태 뭘 했수?" 하고 누군가가 비아냥거리기만 해봐라, 그런 거룩하고 잘난 사람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근사한 축도를 밤새워 보내고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고 할 작정이니까. 안팎으로 까뒤집고 살펴보아도 진득한 맛이라곤 당최 없는 사람됨 탓인가. 나는 매 주일 예배가 끝날 때 올리는 그 축도라는 것을 할 때마다, 지난 10년 동안 해온 그 일이건만 지금도 이상스럽게 매우 긴장을 한다. 한국교회에만 흔히 있는 이른바 "회중 대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가끔 경망스런 교인들이 목사 기죽이느라고 하는 말, "하이고, 오늘 예배에는 장로님 기도에서 은혜 받았네..." 그 청산리 벽계수 같은 기도의 흐름, 어쩌면 고렇게 성경 말씀까지도 신약 구약을 잘도 섞어서 똑 따내듯이 인용하여 가면서, 게다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y) 찜쩌먹을 그 은근히 떨리며 저 깊숙이 파고드는 음성, 그런 기도를 들으면서 벌써 한 많은 인생이 아슴아슴 녹아 내려가는 위안감...그러니, 목사가 여간한 말재간이 없는 한, 무슨 재주로 소나무 뿌리 부여잡고 밤새워 삼각산 산자락을 뒤흔들었던 산기도나, 혹은 토굴 속에 담뇨때기 뒤집어쓰고 눈물로 애원하였던, 그래, 저 가련한 기억 속에서 체득했노라고 자랑하던 기돗줄도, 이른바 평신도들 중에 진솔하게 기도 잘하는 사람 앞에서, 솔직히 더는 효과가 별로 없게 되었을 때, 할 말이 무엇인가? "아, 기도가 말 재주로 되는 거여? 기도는 영롱해야 되지, 입술만 밴지르르하면 뭘해?" 뭐 그렇게 구차한 말 둘러대기 하지 말고, 만천하 목사님들이여 들으시라, 여기 특효약이 있습네다. "다 좋지, 다 좋아, 그러나, 목사에게는 축도권이 있다구..."
    언젠가 뉴욕 훌러싱에 있는 큰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광고가 대문짝 만하게 났는데, 강사님이 지금은 한국에서 그분 이름 모르면서 교회에 다닌다면 의심받을 K 목사님, 워낙 훤출하게 잘생기시고 (난 사실 그렇게 잘 생긴 목사만 보면 은근히 부럽더라) 목소리에 벌써 신령끼가 넘치시고, 웃음은 너그러우시고 노여운 표정은 근엄하시고, 게다가 설교하시는 말씀은 또 얼마나 권위가 있으신지, 말씀마다 주옥이요 보검이라 심령을 뒤흔들어 쪼개고, 눈시울도 어느결에 스물스물 부풀어오르게 하시니, 진실로 당대의 설교자요 존경받아 마땅하실 목회자이시라, 저쯤 되시니, 단 몇십 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지금은 한국에서도 서울, 서울에서도 강남에, 동양 최대의 건물을 자랑하는 대 교회로 성장했고, 그러니, 그 교회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셨다지 않던가? 하, 크신 종님(?)은 역시 뭔가 다른 데가 계시는 게야. 솔직히 나는 그때 그 K 목사님에게 많이 반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어른을 모조리는 아닐지라도 많은 점에서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무슨 말씀들을 하셨는지는 세월도 한참 되었고, 내 본시 하리망탕한 머리를 가진 탓에, 오직 한 말씀만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그래봤자 뭐합니까? 목사에게만 축도권이 있단 말입니다." 아, 그 도도함, 아, 그 권위, 그래 사실 목사가 뭐 별난 게 있다고, 감히 목회를 한다고 설쳐, 대체로, 지난 세월에 못된 짓 많이 하고, 예수 믿어 새 사람되어 이제 그 입은 은혜에 감복하다 못해 복음에 빚진 자되어(바울처럼?), 세상 영화 다 버리고(목사 안되었으면 세상 권력과 재물과 온갖 영화 다 누렸을 텐데?) 이렇게 말씀 증거하러 다닌다는 사람들, 죽을 병 걸려 백약이 무효요 화타와 편작이 열이라도 못 고칠 질병에서, 예수 믿고 죽을 목숨 살아나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심에 너무 감격하여, 지옥갈 백성들 천국으로 인도하기로 맘먹고 나선 이들, 동기들이야 다 감격스럽고 그 갸륵한 마음씨에 눈물겨울 지경이지만, 솔직히 그래 하느님 사랑 한번 안 입어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고, 자기들만 별종인 양 내세울 경험이 그토록 구별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권위로 특별한 체하는 거요? 홀연히 깨달아지는 말씀, 그래 목사는 "축도권이 있다" 이거야.
    이른바 말씀에 능력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키고, 죄악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복음선포의 증언자, 설교 잘해서 목사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요새는 성경도 워낙 좋은 주해성경이 히브리어 희랍어 설명까지 넣어 웬만큼 눈이 따진 평신도 앞에서는 옛날에 성경 지식 자랑하던 목사가 더는 울거 먹을 실력 자랑도 시들하고... 그런데, 목사는 평신도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축도권"이 있다니, 그거야말로 불가침의 영역이지... 설교라는 것도 이젠 그놈의 카세트 테이프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아니, 기독교 방송에서 날이면 날마다 읊어대고 틀어대는 명설교자들의 명설교들 때문에, 개체교회 목사가 우물안 개구리식 설교로 목줄에 힘깨나 쓰던 시대는 어느결에 지나갔다. 게다가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웬놈의 설교집이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나 같은 땡초 목사도 더러는 설교집 좀 내보라고 권하는 소리도 들어봤는데, 그 때는 은근히 '내가 설교를 꽤 잘하나보다' 하고 참 민망스러운 오해도 해보았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남의 설교집이나 설교 녹음 테이프를 꽤 열심히 읽고 듣는 목사 중에 하나라고 자부한다. 내 성격상 남의 것을 홀랑 베끼는 짓이야 할 수 없음을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증언해 줄 것이지만, 그래도 남들은 어떻게 뭐라고 설교들을 하나 영 궁금해서, 남의 설교집이나 녹음 테이프를 읽고 듣고 난 후에 땅 바닥에 수도 없이 패대기를 치면서도, 오늘도 그 버릇은 못 고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많은 설교집을 내놓으시는 목사님들이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적인 병에 걸려 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자기가 아주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착각증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기는 하느님 말씀을 정말로 정직하게 선포한다는 망상병" 말이다. 물론 개중에는 과연 눈이 번쩍 떠지는 참 훌륭한 설교집도 있어서, 문득 그 목사님을 직접 한번 뵙고 싶어지는 분도 아주 없는 바는 아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그런 설교집 한 5권쯤 읽었다고 기억된다. 혹시 설교집 내신 목사님들 중에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신다면, 바라옵건대 당신이 바로 그런 목사님이라고 믿어주시기를...) 그러나 한편, 노아의 홍수가 온 땅위의 생명을 죽이는 물결이었듯이, 요즈음에는 설교의 홍수가 오히려 사람을 숨길 답답하게 만드는 세상이 된 기분이 든다. 말, 말, 말, 어디를 가나 말들이 넘쳐난다. 마치 서울 거리의 자동차들처럼... 그러니 바라건대는, 노아의 방주를 오늘에 다시 짓는다면, 방수처리가 아닌 방음처리를 해야할 것 같다. 예수님은 당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샘물로 치유하셨는데, 공해시대에는 마실 물조차 온갖 찌꺼기들로 넘쳐 나서 등산객들의 갈증도 이제는 산에서 흐르는 약수가 아닌 집에서 담아온 수돗물로 달래야할 판이란다. (지금 이 글을 컴퓨터에 찍어 넣고 있는 내 모습도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고... 아! 말 좀 덜하고 살 길은 없나? 그렇지만 또한 이렇게라도 소리 질러보지 않으면, 그나마 속이 터질 지경이라, 객설이라도 늘어놓는 이 못난 인생을 독자여 부디 용서하시라.) 그러나, 목사라는 직업이 주로 입을 가지고 사는 터라, 심지어는 축도까지도 흔히 한국교회에서 많이 보듯이 손을 쳐드는 동작만 빼면, 이 또한 입으로 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축도 때문에 여러 차례 시련을 겪은 경험이 있다. 1985년에 나이 40이 넘은 불혹의 중년이 되어서야 이른바 목사 안수를 받고, 뒤늦게 목회 현장에 파송(Appointment) 받은 남보다 일찍 흰 머리가 뒤덮인 중늙은이 모습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방에서 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표적이 될 철없는 행동을 끊임없이 저질렀다. 우선, 그 한문 투성이의 개역 성경을 집어치우고, 공동번역 성경을 사용하였다. (좀 토를 단다면, 나는 어려서 한문을 한 3년, 그것도 유명한 한문 스승 밑에서 남보다 특출나게 종아리 맞는 것으로 이골이 난 경험이 있어서, 한문이라면 별로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허어...그렇구만.)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이민으로 사는 현장에서, 커가는 아이들에게 무슨 재주로 그 어려운 개역성경의 한문 투성이 문장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처음(천주교 200년, 개신교 100년 역사상)으로 신구교 양쪽에서 대표를 내어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이니, 다소 문체에 문제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아, 그렇지만 구약 부분은 참 멋지게 번역되었다. 거, 누가 번역하셨는지...), 에큐메니칼 정신이 먼저 할 일은 성경의 통일이라고 나름대로 고집을 부린 것이다. 예배 중에 돌리는 헌금 바구니를 없애고, 예배실에 들어오면서 바로 각자가 헌금을 미리 하는 헌금상자를 설치하였다. 목사 설교가 좋으면 오른쪽 호주머니의 20불짜리를 꺼내고, 목사 설교가 신통치 않으면 왼쪽 호주머니의 5불짜리 지폐를 꺼낸다는 속설도 무시할 겸, (만날 5불짜리만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더구나 남의 눈치 보면서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는 양 소매치기도 아닌데 공연히 자연스럽지 못해하는 교인들의 야릇한 표정도 없앨 겸, 집을 나설 때 미리 그날 헌금할 돈을 준비하게 하는 성과도 노려서, 재정위원장의 비난에 가까운 반대를 묵살하고 헌금상자를 만들어다 놓았다. 되돌아보면, 못난 독사 하나 만나서 마음 고생들 많이 했던 옛날 교인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긴 하지만, 대체로 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사회적 신분도 내세우는 불과 몇 명 안되는 사람들에게는 두통꺼리 목사요, 쫓겨나기 십상인 짓을 잘도 저질렀다. 그러다가 잦은 방귀 끝에 뭐 터져 나오듯이 맨 나중에 걸려든 것이 바로 나의 축도(Benediction)였다.
    나는 축도를 할 때, 양손이든 한 손이든, 손을 쳐들지 않고 축도를 할 때가 더 많다. 내 생각은 아주 간단하다. 축도는 그 축도를 하는 사람의 마음, 그 말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손을 쳐드는 종교 상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혹 두 손을 펴들고 축도를 할 때는, 어지러운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는 교인들을 마치 감싸 안기라고 하는 기분으로 둥그스름하게 팔을 휘어서 예배당 안 이쪽 저쪽을 두루 살피면서 축도를 한다. 그럴 때는 교인들보고,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지 말고, 오히려 축도하는 내 손을 내 얼굴을 쳐다보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물론 얼굴이야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백발에 납짝 코에 도끼 눈을 박아 붙인, 대체로 스스로 불만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축도를 할 때 사람들이 쳐다보면 상당히 엄숙하거나 때로는 자애로운 표정을 짓느라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걸 어릿광대라고 한다던가? 한 손을 쳐들고 축도를 하는 버릇은 버린 지 오래다. 한 20년 전에 당시 인기가 대단하셨던 모 목사님(지금은 모 신학대학 교수)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아주 멋있게 오른손 하나만 처억 들고 축도를 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어서 나도 목사가 된 후 처음에는 그 모양을 흉내내기라도 하는 양, 한 손 들고 축도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오만한 한 손은 꼭 히틀러(Adolf Hitler) 통치하의 독일 사람들 인사거나, 좀 높다는 사람들이 공연히 한 손 펴들고 사람들 앞에서 목에 힘주는 모양을 연상시켜서, 어느 결에 싫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대체로 한 손이든 양손이든 손을 쳐들지 않고 축도를 한다. 간혹 손을 사용하고 싶을 때는, 그 대신 두 손을 마주 잡고 합장하듯이 축도를 한다. 누가 나를 보고 스님을 닮아 불교식 합장이냐고 반문한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겠지만, 또 동시에 왜 불교식 합장이면 뭐가 안되냐고 따지고 들 셈이다. 왜 축도에서 손을 쳐드는 것에 이토록 신경질적인 조심을 하느냐고 묻는 이에게 나는 다음 실화를 들려주고 싶다.
    꽤 오래 전, 뉴욕 한인교회 협의회에서 연중 가장 큰 행사로 해마다 7월 초 독립기념일 전후로 벌이는 "할렐루야 전도 대회"에 한국의 강남에 있는 K 모 목사님이 주강사로 초빙되었었다. 그 어른이 지금은 교단의 감독회장이라는 자리에 숱한 화제를 뿌린 끝에 당선이 되셨지만, 그 당시에도 대 교회 목회자들만 주로 초빙되는 영광(?)을 그 분이 받아, 연 4일 밤 수 천명이 모인 청중 앞에서 회심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나는 90마일 떨어진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자동차를 2시간 몰고 내려와 그 굉장한 열기에 싸여, 장차 목회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던 과정에서 뭣 좀 배울 것을 기대하면서, 유학생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열심히 시간을 내어 그 전도 대회에 참석하였던 터이다. 그 때 나는 K 목사님으로부터, 목사의 축도가 이른바 평신도들을 억압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앞에서 말했던 다른 K 목사님으로부터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수천 명 모인 청중을 앞에 두고 이른바 대형 교회 목사들이 하는 설교는 대체로 비슷하기에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나도 크게 탓할 것도 없다. 다들 그러니까. 그러나 나는 그 K 목사님이 들려준 한 가지 예화를 잊지 못한다. 자기가 공군 군목으로 있었을 때,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도 자기가 축도를 하고자 손을 쳐들었더니 곧 고개를 숙이는데,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어느 장군이 고개를 숙이지 않기에, 손을 든 채로 박정희 대통령을 눈짓하면서 쏘아보았더니 그만 별자리도 고개를 푹 숙이고 말더라면서, "지가 안 숙이고 배겨?" 하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목사의 축도하는 손은 대통령의 고개도 숙이게 만든다는 대단한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 기독교인들 앞에서는 목사의 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주심 앞에 겸손한 자세로 설명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자랑삼아 내세우는 태도는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여우가 호랑이 가죽 쓰고 위세를 부리는 것(狐假虎威)"과 무엇이 다른가? 하늘을 날던 새도 날개를 접고 떨어질 위세의 박정희 대통령도 하느님 앞에서는 한갓 죄인에 불과하니까 (실제로 훗날 박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그런 표현을 한 사람은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 한 분뿐이었지만), k 목사님의 손이 축도를 하고자 높이 치켜 들렸을 때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그 축도의 강복(降福)을 받도록 겸손해지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장군의 목을 꺾었다고 기세 좋게 예화를 드는 k 목사님의 속셈은 영판 다른 데 있다고 느껴졌다. 지나친 오만은 열등감의 소치이듯이, 아무것도 으스댈 것이 없으면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은 이해가 가지만, 이것은 축도에 대한 이해를 오도할 우려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축도하기 위해서 높이 쳐든 목사의 손은 평신도들 머리를 짓누르기 위한 제스추어와 연상시켜서, 목사와 평신도 사이를 차별하는 억압의 징표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 만일 축도할 때 두 손을 쳐드는 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면, 가령 레위기 9자 22절(제사장 아론의 축도)이나, 누가복음 24장 50절(예수님의 승천 직전 제자들을 위한 축도)에서 보듯이, 그 손이 사람의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게 만드는 억압의 제스추어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제 막 승천하실 예수님의 마지막 축도의 모습을 눈감고 작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누군가가 눈뜨고 보아 두었으니까 예수님께서 양손(희랍어에서는 손들-케이라스-이라고 복수를 썼으니)을 쳐드셨다고 후일 복음서 기록을 위해 증언하지 않았겠는가? (성서 축자영감설 믿는 분은 이제 이 글 그만 읽으시기를...) 구약시대에 유태인들이 기도하던 모습은, 알려진 대로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또 두 눈을 분명히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소리쳐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면 자연히 손바닥이 서로 마주보게 하늘을 향하여 펴졌지, 결코 사람 머리를 손바닥으로 찍어누르거나, 백보를 양보하여 사람들 머리 위에 덮어 씌워 무슨 성령의 단비라도 뿌리는 기세로 손바닥이 땅을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주교회나 성공회나 루터란 교회의 모든 전례 의식서에서 두 손을 들어올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 (임마누엘)"(The Lord be with you!) 하는 기원의 표시이고, 이윽고 회중들이 "목사님(신부님)에게도 함께 하여 주시기를"(And also be with you)하고 응답할 때는 신부(목사)는 자기의 두 손을 자기 가슴 위에 모아 합장하는 것이 전형적 방법이다. 목사가 축도를 할 때면 모든 평신도들은 꼭 고개를 숙이고 (마치 옛날 상감 앞에 설설 기던 옛날 조종 대신들처럼) 눈조차 감고, 꼭 그렇게 해야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고개 숙이고 눈감지 않으면 내려오던 하늘의 복이 어디 다른 데로 새기라도 하는가? 목사의 손바닥이 무슨 중국의 쿵후 마스터가 장풍(掌風)을 내듯이 성령의 바람을 불어내는 기구라도 된단 말인가? 더러는 손바람을 일으켜서 평신도들을 땅바닥에 쓰러뜨리는 기묘한 기술을 자랑하는 영력이 충만하다는 목사들도 있는 줄 알지만, 목사가 축도할 때 교인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겸손히 임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보기에도 좋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목사의 축도가 유효하게 되는 조건은 아니다. 내가 본 어떤 미국 교회 여자 목사는 축도를 할 때면 언제나 사람들을 웃음으로 권면하면서, 교인들(숫자가 적어서 가능하기는 하겠지만)을 일일이 눈 맞추고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축도를 하여 보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손을 쳐들고 안쳐들고가 문제가 아니고, 손을 쳐들면서 이 행동 속에 목사의 권위가 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목사는 축도권이 있다"고 주장하게 한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축도라는 것이 오직 목사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라고 주장은 하면서도, 어떤 대중 집회에서 순서중 맨 나중에 나오는 축도는 대체로 연장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처음에는 아마도 그토록 중요한 축도이니만큼, 축도야말로 그 중 가장 존경받는 선배 목사님 차지로 미리부터 점찍어 놓았던 것이었으리라. 축도야말로 가장 간단히 끝낼 수 있는, 또 가장 간단히 끝내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맡겨지는 모양인데,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게 마련이고 서운한 마음도 겹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날 보고 간단히 마감해 달라고 체면상 부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아니될걸. 이왕 올라 왔으니 나도 할 말 좀하고 내려가리라..." 하고 심지어는 아예 길고도 지루한 축도 아닌, 마음 다져 먹은 긴 설교를 앞에다 덧붙이고, 끝으로 마지 못해 두 손을 들고 비로소 예수의 은혜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축원하는, 얼굴에 두꺼운 가죽 쓰시는 참으로 못 말릴 목사님들도 좀 많으신가? 그런 분들이 어떻게 자기 교회에서 평신도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교육하는지 궁금하다. 누가 말하기를 주일 예배에서 두 번씩 설교를 듣자니 죽을 맛이라고. 눈뜨고 듣는 설교(목사님 설교)는 그래도 미리 준비한 것이라서 좀 낫지만, 눈감고 듣는 설교(장로님 기도)는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꿰뚫어 성경귀절을 인용해 가면서 엮어대는데. 참다 못해서 예배실 밖으로 나왔더니, 어떤 사람이 먼저 나와 있다가 하는 말이 "어이, 지금 어디쯤 왔어?" "응, 이제 엘리야야" "난 여호수아 때 미리 나와 버렸어" 하고 주고받더라던가? 설사 그 지경까지는 안 갔어도, 축도를 부탁 받으면 "허, 이젠 나도 축도목사로 전락하고 마는구나..." 고작 늙은이 대접으로 맨 끝에 치장 삼아 한 자리 내어주는 주최측에 항의할 수도 없고, 그래도 좀 눈치가 빠른 분들은 축도 하나는 깨끗 산뜻하게 짧게 잘 끝내 주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야, 부탁하려면 설교를 부탁하지 웬 축도는 부탁하느라고..." 하고 속으로 뇌까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서글퍼하시는 분은 또 안 계실건가? 사정이 이러하니, 축도하는 사람에게는 축도하는 일이 오히려 저주와 같은 기분이 안 들겠는가? (너무 심했나?)
    한국 교회에서는 전도사가 멋모르고 축도를 했다가 호되게 당하는 일도 있었음을 들은 바 있다. 나도 전도사 시절에 목사가 손을 터억 쳐들고 축도를 하는 것을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들거니와), "나는 언제나 저렇게 축도를 해보나" 하고 서운해도 참고, 흔히 남들이 하는 대로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한 일이 생각난다. 교인들도 전도사의 축도 아닌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 문을 나서는 것이, 뭔가 소중한 은혜를(여기 은혜란 말은 잘못 사용되고 있지만) 못 받고 나선다고 느끼게 하는 그 일이 못내 아쉽고 허전해서, 언제나 우리도 목사님의 은혜스러운 축도를 받아보나 하고 마음 허전하게 만드는, 그 축도는 어서 바삐 개정하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축도권"은 꼭 목사에게만 허락되어야 한다는 옛 시대의 관행은 개혁되어야 한다. 축도(祝禱)는 "받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라야 한다. 축도도 기도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물론 누군가가 자기를 위하여 기도를 해준다는 것은, 그 기도의 내용을 넘어서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하느님 앞에서 이루는 깊은 효용이 있는 것은 별도의 얘기이다. (젊은 날 연애하는 사이에서 연인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그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정성껏 올리는 기도(이런 기도가 야고보서 5:13, 16의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인데)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예컨대 성직자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보통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대통령 되려는 그런 욕심 말고)이 했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 상달되지 않을 리가 없다. 왜 보통 사람은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으로 하면 괜찮고,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이른바 바울의 삼위일체 축도를 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나는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끝내는 관행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태 6:9)" 하고 시작되는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문(The Lord's Prayer)은 기도의 모범되는 정신을 집약한 것이지, 무슨 모임을 끝내는 축도대용 기도문으로 사용하기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오해하는 일이라고 느껴진다. 오히려 주기도문은 우리들이 기도를 드리기 전에 한번 기억해보고, 우리들의 기도가 중언 부언 제 욕심을 빨랫줄 늘이듯이 헛길로 나가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을 바로 짚어 가르치신 예수님의 마음을 명심하는 징표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 교회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기독교회가 목사를 성직자로 구별하는 일을 시작한 이래, 흔히 설교와 성례(세례, 성찬식)와 축도만은 원로 장로님 아니라 수석 장로님이라도 못하게 해온 것은, 나름대로 이해는 간다. "아, 누구나 다하겠다고 덤비면, 목사는 그럼 뭐여? 기름부음 받은 종님(?: 종이 님으로 불리우는 게 얼마나 재미있나)이 평신도와 뭐든지 다 똑같으면, 누가 목사질 할라고 하겠나..." 교회라는 기관이 생기고 조직화되면서 자연 직제가 점점 화석화되어 가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직제가 평신도(나는 이 용어도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우선 사용한다)를 우습게 만드는 그런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할 짓은 분명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축도"하면 거의가 다 고린도후서 13:13의 이른바 바울의 삼위일체 축도로 널리 알려져 왔다. 혹시 지나친 말인지 모르겠으나, 고린도후서 13:13의 기도문만이 축도전문용 기도문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교인들이나, 심지어 목사님도 계시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제 모임을 끝내고 떠나는 사람들(바울의 경우엔 편지를 끝내면서)을 향하여 간절히 빌어주는 기도(祝:빌 축, 禱:빌 도)의 내용은 뚯밖에도 간결하기 이를 데 없다. 딱 3가지를 빌어주는데,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 셋째는 성령의 교통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 이 순서(예수, 하느님, 성령)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하느님(성부), 예수(성자), 성령의 순서로 축도했다가, 목사가 그 정도로 신학적인 기본이 안되어 있다고 어느 부흥사가 후려패는 예화를 들은 적도 있다. 요컨대,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비로소 성령과 교제(교통)할 수 있는 것이니, 이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진적, 인과적 논리를 펴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밥을 먼저 먹고 반찬을 입에 집어넣어야지, 반찬부터 집어먹고 밥을 나중에 집어넣으면 안된다면, 그것 또한 너무 절차만 따지는 까다로움이 돋보이지, 씹어 먹는 사람의 취향도 있음을 너무 일방적으로 정돈하는 느낌도 든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목사님들 축도하는 것 자세히 들어보면, 그리스도의 은혜, 하느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 앞에 각각 찬란한 수사를 덧붙여 듣기 좋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고, 특히 얼마나 덧붙이는 말을 근사하게 늘어놓는가로 겨우 축도하는 능력의 차이를 보이고 싶어하는 속셈이야 크게 나무랄 것은 없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맨 마지막 "성령의 교통(또는 교제: Communion:Koinonia)"이라는 말이 어느결에 "성령의 감화 감동 역사" 하심으로 둔갑을 하고, "교통(교제)"이란 말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별로 신통치도 않은 억지 설교를 해놓고는, 이런 말씀도 그저 하느님 말씀이 되도록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성령이 감화 감동을 일으키는 역사"를 해야한다고 반 강제적 협박을 하는 교묘한 심리적 수법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목사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듣는 교인은 (사실, 아예 목사의 설교를 꼬집어 뜯어야겠다고 처음부터 손톱을 세우고 덤비는 사람도 꽤 있긴 하지만), 그 책임이 목사의 신통치 않은 설교 내용 때문이 아니라, 교인의 가슴 속에 악령이 성령대신 자리잡고 있다고 책임 전가를 하려는 숨은 의도가 보인다. 그러니, 성령이 감동 감화 시켜주기를 기도하는 목사의 심정의 간절함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건 설교 직후에나 할 기도이지, 이제 교회당 밖으로 성도들을 파송하면서 할 기도의 내용은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은혜라니 무슨 은혜인가? 희랍어의 "카리스(Kharis)"란 단어를 영어로는 grace, 한문으로는 恩惠(은혜)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본시 이 말은 희랍어에서는 "유쾌하고 기쁜 것, 매력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 친절하여 호의를 베푸는 것, 감사한 것"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한번도 "은혜"라는 말이 쓰인 적이 없고, 공관 복음서 중에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눅4:22-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눅1:30-마리아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2:40-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 "지혜가 충족하며 하느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눅2:52-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 "하느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요한복음서에서는 오직 요한복음 서론(1:1-18) 중에서 3군데만(1:14, 16, 17) 나온다. 그러나 이 은혜라는 말이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뜻하는 기술적 용어("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면서, 그 출현 빈도 수는 놀랍게 늘어난다. 바울 서신 중에서만 101회(총 156페이지 중), 나머지 신약성경 전부 중 51회(총512페이지 중) 나타나는 비율로 보아, 이 단어(은혜)가 얼마나 바울의 애용을 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은혜"라는 낱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짝지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라는 표현으로 나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보다 더 많다. 예수님은 하느님 은혜의 가장 효과적인 전달자(중계자)로 부각된다. 물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느님의 은혜"가 별도인 것은 아니고, 표현상의 차이이지만 (그래서 "하느님과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도 곧잘 나온다: 살후1:12, 롬5:15, 고전1:3) 바울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일방적 호의(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관계없는)를 뜻하여, 주로 편지 서두의 인사나, 편지 끝에 축복의 인사로(고린도후서13:13이 대표적)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사용되는 "은혜"라는 말은 "감동"이라는 말과 혼동되어 오용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거의 일반화되어 별 문제가 없는 듯하다. "목사님 오늘 말씀 제게는 참 깊은 감동을 일으켰습니다"해야 될 말을, "목사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해야 더 은혜(?)스러운 것일까? 전통적으로 우리 한국인들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받은 호의를 도로 갚아 드려야 할 것으로 말할 가령 "부모님 은혜, 스승의 은혜" 등을 말하면서, 사용하여 왔다. 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갚아야할 것으로 예컨대, "부모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은혜를 어이 다 갚을소냐..."하고 말했지 않았던가? 더구나 회의를 진행 중, 어떤 사람이 좀 까다롭게 굴면, 흔히 하는 말이 "우리 회의를 은혜스럽게 진행합시다"할 때, 여기 은혜는 그저 좋고 좋게, 두리뭉수리로 넘어가되, 목사님 의도대로 적당히 끝내자는 뜻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은혜라는 말이 사슴 가죽에 쓴 "가로 왈" 글자처럼(녹비에 가로 왈: 가로로 잡아당기면 가로 왈(曰), 세로로 잡아당기면 날 일(日), 제멋대로 해석되어, 베풀어주신 사랑도 되고, 가눌길 없는 감동도 되고, 심하면 담넘어 가는 구렁이도 되니, 이거야말로 한국인의 능소능대한 심성이 아니고야 제대로 헤아릴 길이 있으랴... 허긴, 역사상 서양에서도 "은혜(grace: 카리스)"라는 말은 약간씩 다른 뉴앙스를 주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으니, 가령 오리겐(Origen)이나 아타나시우스(Atanasius)같은 희랍교부들은 "계시나 구원받음의 객관적 사실에 의하여 마음 속에 나타나는 주관적 깨달음이나 자유함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신비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이에 반하여 터툴리안(Tertullian)같은 라틴 교부들은 "의로움과 영생의 보속을 주는 신적인 에너지로 물질적인 이해에 가까운 작용성"을 강조하여 이해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어거스틴(Augustine)이나 아퀴나스(Aquinas)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은혜의 종류를 갈라놓기도 했으니, 훗날 마르틴 루터(Luter)나 칼 바르트(Barth)같은 이들이 나타나서 골치 아픈 이 복잡성을 뒤집고, 하느님이 한 분, 예수님이 한 분이시니 은혜면 한 가지 일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성령의 교통(Traffic이 아니고 Communion이다)이 뭔가? 사도신경에도 끝부분에 가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 : Communio Sanctorum)"이 나오는데, 오해되기 십상인 표현이다. 교통이란 말은 요즈음 한국어에서는 차라리 자동차, 비행기, 선박 등을 이용한 통행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니, "성도가 서로 사귐" 정도로 바꾸면 어떨지? "성령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하였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좀 이해가 달라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하였으니, 한국어 문맥대로라면 성령이 주체적으로 교통(교제)을 사람(너희 무리)에게 이루는 사건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희랍어 원문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을 사용하고 있어서(Koinonia tou bagiou pneumatos) 오히려 사람이(너희 무리) 성령 안에 참여하는 사귐을 말하고 있다. 마치 한 우물 물을 마시는 시골 동리 사람들이 사귀는 그런 공동체적인 사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후 13:13의 이른바 삼위일체 축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은 은혜와 사랑의 주체(주격 소유격: Subjective genitive)임에 반하여, 성령은 교제의 객체(목적적 소유격)로 적용하므로 삼위의 평행이 깨어진다. (그럼 삼위일체가 아니잖아?) 성령을 주고받는 술잔 삼아 나누는 교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나, 여기 목적적 소유격으로 사용할 경우, 사람들이 성령 안에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교제를 뜻하는 것이다. 한 우물을 퍼마시나 결국 물이 사람 뱃속에 들어가듯이, 성령도 사람 가운데 분급(Impartation)되어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 감화, 역사, 교통"이라고 섞어 놓으면, 앞의 세 개(감동, 감화, 역사)는 분명코 성령이 주격적 소유격으로 사용되는 것(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되니까)을 뜻하여, 성령이 주체적으로 사람에게 감동, 감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고, 끝의 교통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성령 안에 참여하여 교제를 이루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이들은 한꺼번에 섞어서 비빔밥처럼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감동, 감화, 교통하심이"라고 두루 섞어서 중국음식 짬뽕식 축도를 해서라도 맛만 있으면 된다고 우기는 사람에게는,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리요?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발전되어, "꿩 잡는 게 매"라는 명언이 풍미하는 시대가 된 것을 미쳐 몰라본 사람이 면구스럽게 머리나 긁적이고 있을 수밖에...
    게다가 축도 하면 고린도후서 13:13 뿐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보다는 민수기 6:24-26의 저 유명한 아론의 축도를(루터교회에서는 1526년 이래 루터의 고집으로 공식화해 놓았거니와) 가끔이라도 첨가하는 사람이 좀 더 융통성이 있어 보이고,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느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멋진가?)를 알고 있으면 더 풍성해 보이고, 빌립보서 4:7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특히 성공회에서 성찬식과 연결하여 사용)도 인용해 봄직하며, 나 개인적으로는 자주 히브리서 13:20-21을 사용하는 편이거니와, 유다서 24-25절도 때를 따라 인용해 보면 얼마나 신선하고 감동적일 건가? 더구나, 전례 의식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용감하게 성경 밖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도문을 인용하거나, 최후로 자기 자신이 미리 정성껏 준비하거나 즉석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온갖 긴장을 넘어가면서 성도들을 향한 눈물겨운 사랑의 마음을 엮어서 축도를 하면, 그 얼마나 갸륵하고 창의적인가? 하느님께서 싫다고 아니하실 것이고, 오히려 가상하다 아니 하시겠는가? 사실 축도야 양손이건 한 손이건 손을 들고 하든, 아니면 손을 합장하고 하든, (그렇다고 뒷짐을 지는 꼴을 칭찬하는 것은 아니고), 아예 손을 사용하지 않든, 또는 앞에서 말한 여러 성경 귀절 중 하나를 인용하든, 아니면 자기 창작으로 올리든, 그게 무슨 그리도 큰 문제랴, 그 마음이 문제이지, 두 손을 들었어도 신심으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냐, 아니면 "이 손이 어떤 손인데 어느 놈이 감히 고개를 쳐들어!" 하는 마음으로냐, 그게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손을 들지 않고 축도를 했다고 따지고 드는 어느 평신도에게 나름대로 설명을 했건만, "아, 하라면 하라는대로 하기나 하시오!" (여기 머릿 글자만 엮어보면 '아하하하하'가 되거니와)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그 사람 앞에서, 뭘 모르는 목사로 봉변을 당했다. 더구나 그는 말하기를 "어떤 성도가 눈을 뜨고 보았는지 모르나, 목사님은 손을 들지 않고 축도를 한다는데, 거 사실이요?" 어떤 성도는 무슨 어떤 성도, 바로 자기지... (대개, 남들이 다들 그러더라면서 찾아와서 고자질하듯이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장본인이고).
    그나저나 축도야말로 그래도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순서가 아닐지? 몸을 비비꼬며 이제나저제나 예배가 끝나기만을 "동백 아가씨"가 님 기다리듯 하다가(헤이일수어업시 수많은 바므을...아, 그 간드러지게 넘어가는 가락: 이게 목사가 쓰는 글이여?), 저 익숙한 고린도후서 13:13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소리가 들리면, 아니, 목사님이 만세 부르듯이 양손을 번쩍 치켜들면, 평신도 중에도 "하이고, 드디어 끝나는 구나" 하고, 정말 해방의 만세 부르고 싶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그러니, 복음이 따로 있나, 축도가 복음이제...

    세계의 신학 26호 (1995년 봄호: 25-40)

  • ?
    한기연 2013.03.24 02:36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

     

    한 성 수

     

    한문서당 생활과 종교혐오감

    11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학령(學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동네 동무들이 가는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시골에서 한문서당을 다니면서 좌절된 희망을 씹으며 음울한 사춘기에 들어갔다. 한문서당 3년 동안에 이른바 43경을 읽어대는 유학(儒學)을 공부하면서, 나는 공자(孔子) 맹자(孟子) 주자(朱子)를 비롯한 상당한 유학자들, 특히 송대(宋代) 이후 등장한 성리학(性理學)의 세례를 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일찍부터 하늘 천()자를 내 두뇌 속에 집어넣었다. 이것이 나중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의 종교, 즉 증산(甑山)사상의 방계로 이루어진 이른 바 태극도(太極道: 이것이 변하여 오늘날 대순진리회)의 수련을 강요받게 되었을 때, 나로 하여금 일찍부터 종교에 대한 반발심을 강화시켜준 터전이 되기도 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땅 파먹고 사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땅을 믿고 땅에 안겨서 살아온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내 몸에 흙냄새를 지니게는 했지만, 하늘 천()자를 이리저리 얽어서 사람 기죽이는 데 사용하는 종교란 것이 이상한 철학냄새를 풍기면서 무식한 사람들을 농락하는 모습들에 나는 때 어린 분노를 길러왔다. 케케묵은 성리학에 찌든 한문 선생님을 나는 별로 존경하지 못했으나, 그분의 도저하신 유학의 온축(蘊蓄)이 한당(漢唐) 시문(詩文)에까지 이르신 것에는 참으로 매혹을 느낀 것은 확실하다.

    고등학생 시절의 지극한 반감으로 형성된 종교혐오감, 나는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남몰래(비겁했지만) 태극도 도주(道主)의 무덤에 올라가 그 봉분에다 오줌을 갈겼다. 종교의 이름으로 가난한 민중(인민)을 수탈하는 도력(道力) 높다는 이론가들이나,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도 속는 줄도 모르고, 아니, 자신들의 한 맺힌 사연을 그렇게라도 풀고 이른바 소원성취(所願成就)를 하고자 모여든 가련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 게다가 그런 무지렁이들을 모아놓고 그들 위에서 고개를 높이 들고 으스대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하여, 나는 일찍부터 멸시를 퍼부었다. 그런 내가 후일에 목사가 되었으니.....

     

    물리학도가 성당을 찾아간 이유

    내가 대학생이 되어 이제는 부모님의 종교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 물리학(物理學)을 공부하던 과학도가 돌연히 로마 천주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 귀의하게 된 것은 사실 부모님에게 저항하는 덜떨어진 치기(稚氣)의 감상(感傷)이 있었다고도 여겨진다. 대학교 2학년 때였는데, 어느 날 파스칼(Blaise Pascal 1623.6.19-1662.8.19)<빵세(Pensees)>를 읽고 나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파스칼은 수학의 천재소년이었고, 그가 16살 때 쓴 원추 곡선론에 대한 기하학의 증명은 당대의 지성 데카르트가 지적했듯이 그 나이의 소년의 능력으로는 불가사의한 수학적 능력을 드러낸 것이었는데, 그런 수학자요 물리학자였던 천재의 신학적 단상(斷想)들이 나 같은 젊은 수리물리학도에게는 좀 위압감을 가지고 다가온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 대학교 친구들 몇 명이 천체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던 천문학과 옥상에서 한 여름 밤의 소주 파티를 벌이게 되었다. 우리들은 천문학과의 친구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 천체망원경을 가지고 여름 밤하늘을 훑어 볼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이라니..... 도대체 우주(宇宙: Cosmos)라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굉대(宏大)한 것인가?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을 안고 태어난 나라는 존재는 또 얼마나 왜소한, 아니, 없으나 있으나 별 문제가 아닐 것만 같은 존재인가? 가장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 앞에 가장 작아진 하나의 먼지 알 같은 존재, 아니, 무존재요 비존재로 서 있는 자신의 절망적인 허무감! 사실 그때 나도 자꾸만 죽고 싶었었다. 그것은 간단히 염세나 우울이나 감상이 아닌, 자기 존재감에 대한 모멸이었고, 그런 사정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운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내 발로 걸어서 돈암동 천주교 성당의 문을 두드렸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성당 돌계단에 앉아서 서럽게 울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은 그때 왜 울었는지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마침 카리타스(Caritas)라는 독일인 수녀가 나를 맞아주었고, 그리하여 그분의 지도로 이른바 영세(領洗)를 받는 준비반에 등록을 하였다. 이때가 내 종교 인생의 가장 순정했던 낭만기였다.

     

    나는 성경의 하느님을 배신했는가?

    어딘지 아련한 그리움과 기묘한 상실감이 교차하는 오늘, 나는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감상을 거부할 수 없다. 나는 에덴(Eden) 동산에서 쫓겨난 지 이미 오랜 세월을 경유하여, 돌아가는 불 칼이 지키는 에덴의 동쪽을 아직도 서성이고 있다. 기독교에 입문한지 45, 감리교 신학대학, Yale 신학대학원, Union 신학대학원 등에서 신학이란 것을 공부한지 30여 년, 목사 노릇만도 25, 이만하면 뭘 좀 알아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나는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음도, 그리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도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강원용 목사님 때문에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옮겨왔고, 안병무 선생님 때문에 신학교에 가게 되었으며, 문익환 목사님 때문에 목사질을 때려치우지 않았으니, 내 신앙의 길에서 만난 그분들 때문에 오늘의 못난 모습을 쓰다듬는 내가 되었다고 부끄럽지만 감사한 고백까지는 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차라리 없이 계시는 하느님(다석 유영모)이 내게 무엇인지 죽는 날까지라도 묻고 또 묻다가, 계신다 해도 없으신 것으로 여길 나의 성숙(?)함을 그분의 넉넉함 앞에 떳떳이 내놓고 싶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제는 그만 하느님을 떠나고 싶다고 할까? 아니, 하느님 없이 살고 싶다고 해야 되겠지. 도대체 그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시기에 내 젊은 날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찾아가게 하였고, 늙은 나이에는 차라리 하느님을 놓아 드리고 싶게 만드시는 분이신가? (길희성의 오만한 책 제목 <하느님을 놓아주자>). 흔히 말하는 인격신으로서의 유일신론(Monotheism)의 하느님은 내게서도 이미 오래 전에 장례식을 치렀고, 그렇다고 호킹(Stephen Hawking)이나 도킨스(Richard Dawkins)나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밀즈(David Mills)처럼, 철저한 과학적 무신론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영성(초월적)이 포착하는 정도로만 의미 있는 그런 하느님, 그러니까 내가 만든 하느님, 내가 던진 질문의 모양에 따라 파동(波動)도 되고 입자(粒子)도 되어 나타나시는 하느님을 믿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내가 드디어 성경이 말씀하는 하느님의 배신자가 되었다고? 아니, 그건 배신이 아니라 나의 늙어감이 불러온 자연스런 변신(變身)이겠지. 젊어서는 온 몸이 근질거리던 달아오른 본능에 몸부림친 흔적이, 늙어가면서 아득한 그리움에 불과해진 정사(情事)의 추억이랄까? 그 안타깝고 아쉬운 그리고 아름다웠던 오르가즘의 하느님으로 잊어야 할 분이 되신 게지.

     

    죄인에서 빚진 자

    내가 구원(救援) 받아야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젊어서는 노상 내 죄()를 찾느라고 부산했었고, 죄를 찾는 길이 거룩함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었다.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하던가? 내가 죄인임을 아는 순간이 곧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는 첫 걸음이라고 다짐도 했다. 한때 루터(Luther)30대 내 고뇌의 영웅이었다, 마치 내 10-20대의 꿈같던 날 아인슈타인(Einstein)이 그랬듯이 말이다. Yale 신학대학원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도서관에서 Luther 전집(Weimar Ausgabe)을 감히 다 읽어내겠다고 얼토당토 않은 무모한 도전도 했었으니까(물론 실패했다). 돌아보니 나는 그다지 대단한 능력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미국 유학생활에서 솔직히 기가 죽은 것이 아마도 결정적이었다고 기억된다. 특히 내 인생 걸어오면서 만난 수많은 잘난 사람들에게 바친 경의와 경탄을 기억하면서, 나의 왜소한 존재에 대하여 탄식도 해보았지만, 그런 비교와 탐욕을 놓아버린 이후로 나는 이제 비로소 편안해졌다. 요즈음에는 주기도문이라는 것에서 우리 죄(, sin, trespass)를 용서하여 주옵시고하는 말의 (sin)라는 단어 대신에 (debt)이란 단어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에 나도 동의한다. 내 죄를 찾는 일이 너무도 나 자신을 우습게 만들고, 허위의 탈을 쓴 인간으로 여기게 하는 것에 비하여, 내 빚짐을 찾는 일은 언제나 나를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죄와 죄책감으로 시달린 적은 별로 없었는데 (그래서 Luther가 못되었나?), 이는 나의 삶의 궤적이 대체로 졸장부 수준에서 그려온 탓이기도 한데, 자꾸만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일에 좀 지쳤다고나 할까. 그에 비하여 나의 생존, 나의 삶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엇엔가는 신세를 진, 빚을 지고 사는 삶이란 생각은 훨씬 현실적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점에선 나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화엄세계의 장엄한 정치(精緻)한 가르침을 기꺼이 수용한다. 내 생명이 하느님께서 내게 내리신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래, 나는 하느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산다. 생각해보면 내 창자 속에서 음식물을 소화시켜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각종 미생물, 세균들에게도 빚을 지고는 있고, 이웃 집 어린이의 반가운 아침 인사에도 하루의 상쾌한 삶의 출발을 빚지고 있지만, 내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건네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면서, 나의 영적인 삶이란 것을 겨우 만들어가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들었는가?”

    그래서 나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질문이 평생 풀기 어려운, 그럼에도 왜 포기하지 못하는지 나도 잘 모르는 과제다. 교회가 가르쳐온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셨다는 신념은 사실 일찌감치 포이에르바하(Feuerbach)식 전환, “인간이 하느님을 만들었다로 내 가슴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아니, 하느님이란 그 무엇이 이미 영원부터 존재하여 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존재론 타령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나의 관심과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고, 그 하느님을 내 안에 품어 섬기는 데는, 옛날 어느 코미디언이 노래로 부르던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인천 앞바다만큼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없이는 못 마신다. 그런 뜻에서 내가 섬기는 하느님은 나의 정신세계에 잡힌 만큼만 유효한 것이기에, 나의 하느님은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는 것은 만드는 것이다(히브리 yadah). 인생에서는 설명 불가능한 것에 대한 불만을 넘어서려는 과학적 추구도 있지만, 설명이 되고 나면 그만 오히려 불만이 되는 신비에의 추구도 있다. 모르는 구석이 있어야 신비감을 자아내는 그 무엇이 남아 있어 사람의 호기심과 경외심을 이끌어내는 것이지, 홀딱 설명하고 나면 대체로 실망의 잔재로 되는 법이다. 젊어서 상대성 이론이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것을 배울 때, 처음에는 얼마나 놀라운 신비감조차 자아내는 그 놀라운 물리학의 힘에 사실 경탄을 하고, 전 생애를 그런 일을 추구하는 이론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안달을 했다. 마치 짝사랑의 대상에게 바치는 연모(戀慕)의 불꽃처럼 절절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그런 이론의 구조를 이해하고 났을 때는, 마치 불사조(不死鳥)가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새로운 무엇에 대한 흠모로 이미 마음이 들떠 올랐던 것이다. 마치 결혼하고 나서 다른 여자에게 한눈파는 사람처럼 잠재울 수 없는 욕망을 따라 낯선 길을 떠나고 싶은 근질거림에 들떠 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허수(虛數)와 같은 하느님

    오래 전 1979년에 내가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썼던 학사논문을 이제 와서 떠올리는 것은 좀 우습지만, 그때 내가 내 걸었던 비유, 즉 하느님은 수학에서 흔히 말하는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와 같은 존재라고 한 것은, 지금도 내게는 유효하다. 중학교 3학년 수학에 나오는 이차방정식을 풀다보면 그 허수(제곱하면 영보다 적어지는)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데, 처음엔 사람들이 이 수의 성격을 전혀 몰랐고, 현실에 실재하는 것이 아닌 상상의 수()로만 여겼던 것이다. 지금은 허수 없이는 고등과학이나 수학을 공부할 수 없는 필수요소로 되었지만, 지금도 실수(實數)의 세계에서만 문제를 풀어도 좋은 사람에게는 허수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수다. 아니, 차라리 없다고 하는 것이 속 편하다. 가령 허수의 세계에서는 크기의 비교, 어느 것이 더 크니 작으니 하는 것은 아예 성립이 되지 않는, 즉 계량(計量)과는 관계없는 그런 이상한 수()들이지만, 계량 가능한 실수의 어려운 계산을 돕는 절묘한 역할을 잘 수행하면 여간 편리한 게 아니고, 그것의 존재가 비로소 크게 여겨지는 수(). 하느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단순하게 행복할 수도 있다! 그 단순한 행복이 깨어지는 때가 오면, 마치 실수의 세계에서 복소수의 세계로 깨쳐 일어나듯, 하느님의 존재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오면, 그때 비로소 허수의 힘, 하느님의 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른바 몸나에서 얼나로 솟아오른다는 복잡한 행복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을 굳이 행복의 의미로 말하지 말고, 인간의 이성이 지닌 필연적 초월성으로 보면 될 것이다. 캐어묻는 것이 이성(理性)의 속성인데, 그런 속성은 필연적으로 그 아득한 추구 끝에서 초월(超越: Transcendence)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이성(理性: Reason)과 계시(啓示:Revelation)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성의 벼랑 끝자락에서 만난 절벽 같은 것이라, 이른바 백척간두(百尺竿頭)진일보(進一步)란 말이 계시라는 것이다. 거기서 함부로 한 발걸음 더 나아가는 죽음의 모험이 있다. 그런 죽음으로 만들어낸 삶을 영생이라고 하면 좋겠지. (: sex)을 즐기다보면 그 끝에서 가끔씩(혹은 자주) 오르가즘(orgasm)을 만난다. 그렇다고 사람이 노상 오르가즘만 즐기려고 애를 쓴다면 이런 인생은 제대로 사는 길이 아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도 그런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도 오르가즘 정도로만 만나면 충분한 것 아닌가? 사람이 어떻게 항상 성생활(性生活)에만 몰두하고 살 수 있겠는가? 하느님에의 욕심도 지나치면 생명을 위축시키는 탐욕으로 발전한다.

     

    오르가즘처럼 찾아오시는 하느님

    ()의 현현(顯現: Epiphany) 앞에서 황홀한 감동으로 망아(忘我)의 황홀경, 엑스터시(ecstasy)에 빠진 경험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경험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교체험은 그야말로 오르가즘 없는 성(sex)을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렇다고 사람이 어떻게 노상 황홀경 속에서만 헤맨단 말인가? 종교체험의 실체는 굳이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그의 신비체험의 대비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종교체험을 폄하하거나 과대 진술하는 것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노자(老子)라는 분이 한 말씀 한 모양인데,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던가. 나의 경우 신 현현의 체험이 도무지 의심스러운 것은, 그게 성령(聖靈)의 역사라기보다는 악령(惡靈)의 역사가 아니었다는 확신을 어떻게 말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라는 한 젊은이를 움직였던 정신, 굳이 거룩한 영()이라고 부르면서, 그 정신 아래에서 신의 현현과 신에게 드리는 삶의 거룩함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한 때 나는 문익환 목사라는 분이 모시고 살았던 어떤 것이라면, 설사 그게 악령이라고 해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다. 이 생각은 아직도 철회할 의도가 없다. 문익환이 믿고 따르는 분이 예수라는 분이라고 하기에, 나는 그때부터 그가 비판한 대속론(代贖論: Atonement)의 허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서 예수님은 굳이 이상한 비유를 들자면, 인천 바다같이 떠있는 사이다(cider) 하느님을 퍼마시는 곱뿌(cup)라고 하면 좀 거시기한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런 사이다, 아니, 생수(生水)라는 것도 내가 목마르지 않았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존재인 것이요, 막상 날아갈 듯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쩌다 한 번이 아니었을지 하는 태만한 기억이다. 굳이 짓궂게 표현한다면, 나의 하느님은 어쩌면 그렇게도 오르가즘처럼 다가오시는지, 악전고투해도 나타나지 않으시다가도, 기어코 다가오면 며칠씩은 그 생각만 해도 생기가 솟아오르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고, 시들해지면 다시 그리워 몸 달아올라, 목말라 애타게 그리다가도, 실수 계산 끝난 자리의 허수처럼 그렇게 선선히 말없이 버려지시는 하느님.

    그래도 분명히 내 삶의 복잡한 고뇌를 넘어서 죽음도 겁내지 않게 되어,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생명의 시작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나의 생명의 종장은 하느님께 빚지지 않고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인사였으면 좋겠다. 하느님이 지켜보시면서 어서 오너라! 하실 때 내가 이 땅 위에서 빚을 갚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게 되겠지. 그때는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에의 동경이나 추억조차도 무연히 넘어가는 저녁 햇살 같이 평안한 일몰(日沒) 뒤의 검은 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야. 동터오는 새벽의 종은 다른 사람들이 울리게 하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 속에서 하느님은 이제 나를 잊으실 것이야. 영원 속에서도 하느님이 내내 나를 기억하고 계실 부활은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니, 이제야 진정 샬롬(Shalom), 철저한 무화(無化)를 얻을 것이리라. 그게 무()에서 나를 만드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나의 무화(無化) 회귀(回歸). 아니, 혼돈이 낳아 놓은 나의 몸이 명징한 영화(靈化)의 길에 도달하는 것이다.

  • ?
    한기연 2013.03.24 02:47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은 <내게 찾아온 은총: 깨달음을 통한 주체적 신앙>(2012)에 수록된 글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환경소식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숨 쉬기 어렵게 된다/ 화석연료산업 제어방법 7 한기연 2019.08.28 64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의 파격적인 가르침들은 어떤 경험들에서 생겨났을까? 1 한기연 2019.08.01 113
공지 조직신학 예수초청장/참새예수 - 홍정수 박사의 조직신학교실 (동영상) 5 한기연 2019.07.15 88
공지 조직신학 홍정수 박사 신학특강(동영상) 1 한기연 2019.06.06 106
공지 조직신학 절룩거리는 그리스도 / 카릴 하우스랜더 2 한기연 2019.05.18 121
공지 가정사회소식 양육강식하는 식인사회의 킬링필드 /김훈 9 한기연 2019.05.11 68
공지 기독교윤리 우리 인류의 '마지막 싸움' / 신영전 24 한기연 2019.01.14 147
공지 가정사회소식 남성, 여성 아닌 제3의 성(간성) 3 한기연 2019.01.11 258
공지 교회사 웨슬리 [표준설교 정신] 이어 받은 기도문들 52개 pdf파일 file 한기연 2018.11.22 391
공지 조직신학 아우슈비츠에서의 하느님의 여성적 얼굴 1 file 한기연 2018.08.18 1252
공지 기독교윤리 빨간 지구 - 온실가스 시한폭탄에 이미 불이 붙었다 36 file 한기연 2018.08.17 252
공지 기독교윤리 벌레들의 나라,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기독교 파시즘의 망령 38 file 한기연 2018.06.30 360
공지 가정사회소식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남성의 탄생 8 한기연 2018.04.19 249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2010) pdf파일 9 file 한기연 2017.12.04 10398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 (2012)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23 10583
공지 기독교윤리 <생태계의 위기와 기독교의 대응>(2000) pdf 파일 file 한기연 2017.11.10 11606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변화와 생태신학의 과제 (2017) 30 file 한기연 2017.11.04 12120
공지 가정사회소식 노령화: 남은 시간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장덕진 10 file 한기연 2016.04.26 19195
공지 역사적 예수 기후변화와 대멸종 시대의 예수의 복음 5 file 한기연 2015.11.12 18977
공지 기독교윤리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신학적 의미와 사목 과제 15 file 한기연 2015.10.06 21204
공지 역사적 예수 홍정수 박사가 말하는 예수 르네상스 (강의 동영상) 한기연 2015.04.01 25600
공지 기독교윤리 세월호참사 -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 133 file 한기연 2014.04.18 37950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생태대를 향한 출애굽 - 녹색의 세계관과 생태주의 인문학 아카데미 29 file 한기연 2013.11.12 33981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 시대의 교회의 역할 17 file 한기연 2013.08.24 34496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예수 살기 / 하늘이 낸 참사람들 11 file 한기연 2013.03.13 34373
공지 기독교윤리 엘리 위젤, <하나님에 대한 재판> 서평 1 file 한기연 2012.07.12 6759
공지 기독교윤리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한국 교회의 평화운동 자료 33 한기연 2012.04.24 57349
공지 조직신학 하나님이 계시냐고요 / 담임선생님 예수 / 홍정수 4 한기연 2012.04.11 89424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와 대멸종 시대에도 하나님은 전능하며 예수는 구세주이며 교회는 거룩한가 / 김준우 31 file 한기연 2011.12.12 97634
공지 역사적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 / 김준우 12 file 한기연 2011.10.23 62251
공지 조직신학 나의 종교경험 -> 나의 복음 -> 나의 신학을 일관성 있게 한 마디로 정리하기 4 한기연 2011.08.21 124945
공지 실천신학 대안교회의 가능성 / 한성수 1 file 한기연 2011.08.02 128851
공지 기독교윤리 핵위험 사회 치닫는 대한민국 1 73 한기연 2011.03.28 174294
공지 조직신학 감리교 종교재판의 전말/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6 file 한기연 2010.11.22 141939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담론의 종교문화사적 의미 / 김준우 4 file 한기연 2010.11.14 145030
공지 역사적 예수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7 한기연 2010.10.28 129303
공지 기독교윤리 2015년까지 모든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라! 14 file 한기연 2010.10.02 165938
공지 조직신학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2 한기연 2010.04.12 155422
공지 조직신학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1 한기연 2010.03.29 144963
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한기연 2010.03.27 150430
공지 역사적 예수 김기석의 종횡서해 <첫번째 바울의 복음> 한기연 2010.03.18 6857
공지 역사적 예수 사영리와 사생리 / 나는 왜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는가? / 그분을 찾습니다 / 한인철 5 한기연 2010.02.24 153705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홍정수 13 file 한기연 2010.02.19 168034
공지 기독교윤리 두달만에 - 북극 지역 빙하의 크기 변화 2009/9 22 한기연 2009.09.19 182336
공지 가정사회소식 소득 5분위 배율 비교 25 file 한기연 2009.09.13 182897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 읽는 순서 추천 4 file 한기연 2008.12.03 179174
공지 기독교윤리 세계/교회/신학의 물적 토대 - 신학의 출발점 9 file 한기연 2008.09.01 180429
공지 북극해의 해빙 속도와 기후변화, 한반도 가뭄과 사막화 위기 19 file 한기연 2008.05.14 201517
공지 역사적 예수 교회개혁을 위한 25개 신학논제 - 김준우 5 한기연 2007.10.20 182189
» 실천신학 목사 개(dog)론 / 축도유감 / 그 안타깝고 아쉬운 오르가즘의 하느님 / 한성수 3 한기연 2004.08.30 146560
공지 실천신학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성만찬/ 혼인주례자 상담체크 리스트 1 file 한기연 2003.09.30 29480
1049 기독교윤리 전쟁산업을 대변하는 미국정부 / 원익선 한기연 2019.11.23 5
1048 기독교윤리 과학자들 1만 천 명 기후비상사태 선포/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4 한기연 2019.11.06 23
1047 기독교연구소 신학을 비롯한 인문학 석사, 박사 과정의 요점 한기연 2019.09.23 241
1046 기독교윤리 21세기판 '전환시대의 논리' /이권우 한기연 2019.07.02 41
1045 환경소식 한국 환경정책의 모순 / 피게레스 한기연 2019.06.14 16
1044 환경소식 4대강 삽질, 그 후 십 년 한기연 2019.06.07 19
1043 한강 하류에 끈 벌레 이어 기형 물고기들 한기연 2019.04.16 100
1042 교회사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한기연 2019.01.01 87
1041 교회사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1961) 한기연 2019.01.01 164
1040 교회사 회칙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한기연 2019.01.01 74
1039 교회사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한기연 2019.01.01 7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3 Next
/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