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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2011.10.23 08:11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 / 김준우

조회 수 62128 추천 수 0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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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34호(2011년 가을) 원고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1. 내가 동정녀 탄생을 고백할 때마다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된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동정녀 탄생이 어떻게 고백되기 시작했는지를 배우고, 처음으로 그 고백자들의 마음을 느끼게 된 다음부터였다. 인간 예수에 대한 기본적인 신화들이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예수에 대한 신화들을 벗겨내면 예수에게 무엇이 남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최근에 매우 명쾌하게 정리한 책은 미국 성공회에서 24년 동안 주교로 봉직했던 존 쉘비 스퐁의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원제는 Jesus for the Non-Religious, 2007, 번역판 2009)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탄생의 의미에 대한 이런 초보적인 논의를 다시 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은 세 가지다. 첫째로,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교회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몰락하는 시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통계에 의하면 유럽에서는 남아 있는 교회들이 매 십 년마다 1/4씩 사라지며, 한 세대마다 절반씩 감소하고 있다”(돈 큐핏,

 

 

 

 

 

 

2012년 갈릴리신학대학원 강연

http://idlseminary.com/moodle/mod/page/view.php?id=242

 

 

"신의 길 인간의 길 1부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 예수의 역사성, 동정녀 탄생, 기적, 어록 등에 관한 매우 중요한 영상

존 도미닉 크로산, 베자 버미스, 프리크 갠디 등 출연

https://www.youtube.com/watch?v=7hquYThYhXA&feature=player_embed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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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1.11.16 04:48

    <첫 번째 크리스마스>(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서평

    동정녀 탄생의 은유적이며 정치신학적인 의미

    김준우(한국기독교연구소)

     

     

    1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 남짓 이어지는 대림절기는 매일 역사의 어둠 속에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새롭게 느끼면서 예수처럼 후천개벽을 꿈꾸는 절기인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다시 재림하실 구세주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절기인가? 1%가 99%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세상, 자본과 제국의 지배 아래 전혀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오늘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을 만큼 악마가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대림절기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김진숙 위원이나 안철수 교수처럼) 자기 비움을 통해 우리의 현실로 만들어나가려고 다짐하는 절기인가, 아니면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희망과 운명을 다시 내맡기는 절기인가? 하루 평균 마흔 세 명이 자살하는 생지옥과 같은 나라에서,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6백만 명인 나라에서, 북녘의 아이들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인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북한에 식량 원조는 중단한 반면에 미국의 무기 구입에 매년 수십 조원씩 쏟아 붓는 나라에서, 전시작전권은 미국이 돌려주겠다고 해도 마다하면서 중국의 코앞에 미군 핵잠수함 기지를 건설하는 나라에서, 또한 새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더 이상 친일파 청산 노력과 광주학살과 6월 항쟁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역사청산과 후천개벽은 세례 요한이 가르친 것처럼 하나님의 강권적이며 초자연적인 개입(미륵하생)을 통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한 분 하나님"(신 6:4)의 대자대비와 "아빠"라고 부를 만큼 친근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서로 사랑과 나눔과 섬김을 통해 만들어나가야 할 나라(미륵상생)인가? 대림절기는 산모 하나님(에카르트)의 비통한 눈물과 거룩한 분노를 헤아리며 예수처럼 현실을 박차고 일어서는 절기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다시 단단하게 붙잡는 절기인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외아들로 높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애당초 그분은 우리와 DNA가 다른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죄인들은 그분이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시는 좁은 십자가의 길, 자기 비움의 길을 따라갈 엄두조차 낼 수 없다는 우리의 핑계를 정당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온몸으로 살아낸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우리 마음과 생각과 생활의 초점을 맞추는 수행으로서의 찬양과 경배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질문들을 묻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복합적인 위기들, 즉 국제금융위기와 재정위기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에너지위기, 기후위기, 식량위기, 그리고 대멸종 위기는 예수와 바울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위기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아무리 막강하고 잔인했다 하더라도 예수와 바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견딜 수 있었다. 세례 요한조차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심판 이후의 세상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후대전"으로 인한 인류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자기파멸까지도 예상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이다. 더군다나 최근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5년뿐이며, 2017년 이후에는 온실가스 농도를 450ppm 이하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한겨레, 2011/11/11). 이것은 현재의 온실가스 방출 추세로 볼 때, 지구 평균기온이 2040년경에는 섭씨 2도가 상승할 것이며 2070년경에는 섭씨 4도가 상승하게 되어 북반구의 대도시들은 최소한 그 두 배 이상 상승하게 되며, 아마존 숲의 85%가 파괴될 것으로 예측해왔던 기후과학자들의 최후통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 방출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미국과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방출하는 국가들이 그 방출량의 정점을 2015년으로 정하고 그 후 연간 3%씩 감축한다면 섭씨 4도 상승 이내로 제한할 가능성이 반반이지만, 현재로서는 4도 상승 이내로 제한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결국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수십 억 명이 죽게 될 것이라는 기후과학자들의 악몽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행복과 생존문제와 직결된 위기들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위기들을 외면한다. 일차적으로는 정부와 기업과 대학과 종교가 이런 위기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설마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랴" 하는 안이함과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속성, 정부 같은 큰 기관의 주장을 믿고 싶어하는 심리, "남들도 똑같이 당하는 거면 괜찮다"는 생각(정태인, "기어이 난파선에 타려는가?," 한겨레 21, 882호: 2011년 10월 24일, 18)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대림절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2

    {첫번째 크리스마스}(2007)는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함께 쓴 세 권의 책들 가운데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이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2006)이며 마지막 책이 {첫 번째 바울의 복음}(2009)이다. (세 권 모두 번역이 되었지만, 현재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중심 출판사가 절판시켜 구할 수 없다. 조만간 한국기독교연구소가 다시 출판할 계획이다). 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주도하여 200명 남짓한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 세미나]를 결성한 이래로 보그와 크로산은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종교적 배경은 보그가 루터교 출신이며 크로산은 가톨릭 출신이다. 성격적으로는 보그가 훨씬 온화하며 글쓰기도 친절한 반면에, 크로산은 아일랜드 출신답게 제국의 지배 문제에 대해 훨씬 민감하며 역사-사회학적 분석에서 훨씬 치밀하다. 예수 이해에서는 보그가 기본적으로 예수를 "종교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반면에, 크로산은 예수를 "사회적 혁명가"로 이해한다. 이처럼 서로 관점을 보완할 수 있는 두 학자가 함께 쓴 이 책들은 최근의 대표적인 신약학자들의 예수 이해와 바울 이해의 핵심을 쉽게 정리한 결정체들이라 하겠다. 
    이 책은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풍부하며 도전적인 의미들을 밝힌 책이다. 예수 탄생 이야기들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석은 이미 리차드 호슬리가 {크리스마스의 해방}(손성현 역, 2000)에서 방대한 자료들을 검토하여 탁월하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유대인들의 저항운동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복음서 본문들의 정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느라, 동정녀 탄생 이야기와 예수의 족보들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 또한 마태가 요셉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간음을 의심하여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초대 교회 이래로 예수가 "사생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았다.
    보그와 크로산은 우선 예수 탄생 이야기들에 대해 문자적-사실적 관점이 아니라 은유적-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 이야기들의 사실성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그 이야기들의 의미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고대의 본문들을 고대의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결론은 예수 탄생 이야기들은 "비유로 쓴 전주곡"으로서 각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전체의 내용과 형식의 "축소판"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문자적-사실적 관점에서 믿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입장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며, 원죄 없이 태어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흠없는 제물의 필수조건이라고 믿는다. 예수가 실제로 동정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보그와 크로산은 간단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과학적-산부인과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미신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둘째로, 저자들은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상황(context) 혹은 모체(matrix)가 로마제국과 하나님 나라의 대충돌이며, 예수 탄생 이야기들이 당시 세상을 뒤집어엎은 것은 제국신학의 핵심적인 토대를 붕괴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그리스-로마 문헌들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저자들은 우선 예수보다 먼저 어떻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신의 아들", "구세주", "주님", "평화를 주신 분", "온 세상의 빛"으로 숭배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당시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한 세기 동안 계속된 혼란과 내전을 종식시킨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이런 칭호들을 붙여 숭배한 것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이어서 저자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폴로 신의 아들로서 기적적으로 출생한 이야기와 비너스 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족보에 맞대응할 뿐 아니라,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나사렛 예수가 로마 황제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신의 아들", "구세주", "주님", "평화를 주신 분", "온 세상의 빛"이라는 점을 고백하고 변증하기 위해 처음 제자들은 동정녀 탄생 이야기들과 예수의 족보들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라와 한나의 임신처럼 단순히 신적인 잉태가 아니라 예수의 탄생이 반드시 "동정녀에 의한" 신적인 잉태여야만 했던 정치적-신학적인 이유를 밝힌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는 대응할 수 없었지만, 제국이 지배이데올로기로 선전한 제국신학에 대해서는 초기 크리스천들이 창조적인 신학으로 맞대응하고 자신들의 신앙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셋째로, 저자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해결책과 관련하여,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을 성서의 종말론과 연관시켜서 처음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한다. 예수의 처음 제자들은 다윗 가문의 (폭력적인 戰士 메시아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메시아로 고백함으로써, 1세기 유대교 안에서 메시아니즘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저자들은 "왜 유독 마태만 신에 의한 임신이라기보다는 간음에 의한 임신이라고 의심받을 수 있는 구절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집어넣었는가?"(141)라고 질문을 제기한 후, 그 해답을 모세의 잉태와 출생에 관한 당시의 미드라쉬들을 분석하여 명쾌하게 해명한다. 또한 저자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베들레헴 탄생, 이집트로의 탈출 등의 이야기들이 구약성서에 예언된 것인지에 관해 해명한다. 
    넷째로, 저자들은 "미국은 새로운 로마제국"(309)라는 관점에서,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현재적인 의미를 밝힌다. 저자들은 특히 "대림절기와 크리스마스는 본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것이다"(312)라는 관점에서, 초자연적인 종말론, 혹은 개입적 종말론이 아니라 참여적 종말론 혹은 협력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세계 변혁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과 꿈에 기독교인들이 기쁨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3.

    이 책을 번역하면서 분명해진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신약성서 안에 "평화"라는 단어는 100번 나오는 반면에 "화해"라는 단어는 고작 네 번 나온다는 사실(Willard Swartley, Covenant of Peace, x)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기독교 신학은 왜 예수, 하나님 나라, 구원, 교회의 사명, 종말론을 일차적으로 "평화"가 아니라 "화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왔는가? 또한 기독교가 이처럼 "화해"에 초점을 맞추었으면서도 줄곧 사람들 사이를 신자/불신자로 갈라놓고 의인/죄인으로 양분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종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같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도 교파들로 나뉘어져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종교재판과 종교전쟁과 같은 폭력도 불사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처럼 기독교 안에서조차 자신은 "구원받은 자"인 반면에 다른 교단들은 "잘못 믿는 사람들" 혹은 "저주받은 자"로 규정하여 서로 간에 "주님의 마지막 만찬"도 허락하지 않은 채, 같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서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는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더군다나 기독교가 이제까지 "화해"를 개인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과 이루는 "화해" 즉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심리적인 화해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성별과 사회계급들 사이 혹은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화해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생태학적인 화해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이처럼 심리적 차원의 화해, 즉 "마음의 평화"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 신학은 또한 "평화"를 미래 종말론의 차원에서 소망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원인은 무엇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학이 신약성서의 핵심을 외면해왔다는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서 기독교 교리와 신학 전체의 신빙성을 의심하도록 만든 결과를 초래한 신학적 원인들은 무엇인가?
    기독교가 테리 이글턴의 지적대로 "예수가 가까이 했던 하층민과 반식민주의의 비밀투사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약속이 아니라 교외에서 안락하게 사는 부유층이 주축인 신앙이 되어버린"({신을 옹호하다}, 79쪽) 탓인가? 아니면 "정치권력에 맹종해왔던 중세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형성한 교회 전통"(Willard Swartley, x) 탓인가? 심지어 "교회가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는 복음서 해석을 제시한 적이 없다"(테리 이글턴, 132쪽)고 비판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의 권력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기는커녕 거짓말쟁이 정치인과 부패한 은행가들, 광적인 네오콘들의 혐오스러운 위선의 도구가 되었으며, 교회 자체도 엄청나게 돈을 버는 산업이 되었다"(테리 이글턴, 80쪽)고 비판을 받게 되었는가?
    현재 우리가 봉착한 복합적인 위기들이 더욱 악화될수록, 기독교는 그 모든 재앙들의 책임과 해결책을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전가할 것인가? 결국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봉착한 위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기독교가 또 다시 비폭력적인 메시아를 거부하고 폭력적인 종교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난 4백여 년 동안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린 초자연적 유신론에 아직도 기초를 둔 기독교의 승리주의와 제국주의를 극복할 길은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전대미문의 집단적인 살육과 고통, 후천개벽을 향해 나아가는 연약한 자들의 저항 속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태어난 분"의 믿음(278쪽)이 아닐까?  

  • ?
    한기연 2011.12.06 15:30
     장창규  (2011-12-05 16:27:11 / 112.220.50.10)   
    첫째,
    예수의 탄생도 못믿겠다.
    예수의 부활도 못믿겠다.
    예수의 구원도 못믿겟다.

    그럼 예수를 믿어 뭐하시려는가요?


    둘째,
    선하게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이 쩨쩨하다면(사랑),
    온갖 나쁜짓을 다한다해도, 하나님이 무조건 받아주셔야만 해야 쩨쩨하지 않은데,,

    그럼,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아니, 내맘대로 살아도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심판한다는 것 자체가 틀려먹었는데

    뭣땜시 선하게 살아야하는가요?
    그냥 내맘대로 하고 살지

    아니, 하나님은 뭣땜시 선하게 살라고 계명까지 주셨는가요?
    계명주어서 왜 인간들을 괴롭히는가요?
    그냥 받아주면 편한것을,,,

    우리끼리 서로 치고 받고 뺏앗고, 죽이며 산들 뭐가 문제가 될까요?
    고거 심판하면 하나님이 쩨쩨해지는데,,,
     장창규  (2011-12-05 16:46:09 / 112.220.50.10)   
    교수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제가 감신다닐때 이 감게판에서 저하고 논쟁한적 있었습니다.
    그때, 논쟁중에 교수님은 학교교무실등을 통해서 제 뒷조사를 한적 있었죠,,,
    고발하겠다고,,,
    이게시판에서 윽박지르고 협박하던거 생각나시려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이 게시판이 익명으로 글쓰기가 가능해서 제 신분이 들통나지는 않았었는데,

    제가 당시 교수님께 무척 실망했었는데 이유는 당시 교수님께 수업을 들었는데 사랑을 매우 좋아하고 강조하셨거든요
    그런데, 교수님의 행위는 주장하는 사랑과 거리가 멀었다는 거죠
    사랑은 좋아하는데, 실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제자의 말한마디에는 고발하겠다고 뒷조사에 으름장까지 놓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의는 없고 사랑만 주장하시려면,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추종하시려면,
    교수님부터 그런 삶을 따라 살아야 하지 않는가요?

    그래야 그나마 주장하시는 것들이 설득력이 있겠지요
     김준우  (2011-12-05 18:04:16 / 220.127.226.39)   
    언제인지 모르지만 선생이라는 사람한테 무척 실망했었다니 내가 지금이라도 두 손 모아 사과합니다.
    당시에는 내가 학생의 그런 흑색선전으로 인해 인격이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생매장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널리 양해하기 바랍니다.

    또한 내 글이 비록 서둘러 쓴 글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탄생도 부활도 구원도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으로 오해되고 더군다나 정의는 없고 사랑만 주장하는 것으로 읽혀지고 나부터 그런 삶을 따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충고는 나의 글 내용의 설득력만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한 설득력을 요구하는 것이니 다시 한번 깊이 새기도록 하지요.
    뒤늦게나마 솔직하게 지난 이야기 공개해서 마음의 앙금을 털어내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안봉기  (2011-12-05 18:13:41 / 183.107.146.29)   
    하나님에 말씀은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믿고
    할머니가 아기를 낳아도 믿는것입니다
    아멘
     이근석  (2011-12-05 18:50:58 / 59.8.221.69)   
    첫째, 예수의 탄생,부활, 구원을 못믿겠다.------기독교인이 아님.
    둘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무조건 용서하시지는 않음.
    왜 계명을 주셨나? 죄인임을 깨닫게하여 구원의 기회를 주기위해.
    바울의 설명대로 율법을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
    구원받은 자가 계명을 지키는것,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위해 지킴.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계명을 지키는것은 힘들고 어렵지만.....구원을 이루지도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지키는 계명은 힘들고 어렵지 않음.기쁨으로 지킴
     장병선  (2011-12-05 19:08:55 / 218.159.250.22)   
    믿음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적 신앙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일만한, 진정한 믿음에의 길을 탐구하려는 신학자의 노고를 쉽게 속단하는 것은 신학도로서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 말하고 싶군요.
     장병선  (2011-12-05 19:34:49 / 218.159.250.22)   
    마커스 보그.존도미닉크로산저, 김준우 역, '첫 번째 크리스마스" 최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희미하던 신학적 전망이 탁 트이는 영적황홀함을 경험하였으며,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아무 이성적 탐구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해도 좋다면 굳이 신학교육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김준우  (2011-12-05 22:11:38 / 219.241.112.15)   
    나이가 든 분들은 내 글을 읽으면서 짐작하셨겠지만, 내가 굳이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글을 다시 써야겠다고 작정한 이유는 20년 전 종교재판 때 김 아무개 목사가 시비를 걸었던 것 중에 하나가 동정녀 탄생과 육체 부활의 과학적 진리 여부였는데, 그 이후 2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처럼 중요한 문제에 관해 공개적인 신학적인 논의를 지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에 벌어졌던 종교재판에서 누가 승리했느냐? 내가 믿기로는 사탄이 승리했습니다. 지금 감리교 사태를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예수의 복음과 진리는 그 따위 종교재판으로 인해 죽어서 사라질 복음과 진리가 아니지요.
     민관기  (2011-12-05 23:16:19 / 114.204.90.121)   
    세상에 내가 이리 긴 글을 꼼꼼이 다 읽다니.
     민관기  (2011-12-06 00:25:21 / 114.204.90.121)   
    인내력 테스트하는것도 아니고.
     민관기  (2011-12-06 00:25:41 / 114.204.90.121)   
    너무 길어.
     민관기  (2011-12-06 00:25:57 / 114.204.90.121)   
    잔소리란 말이지.
     민관기  (2011-12-06 00:27:12 / 114.204.90.121)   
    뭔말을 꼬부랑꼬부랑.
    그냥 간단히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면 난 더 아들이다라고 말해.
     민관기  (2011-12-06 00:27:26 / 114.204.90.121)   
    내가 그거야.
     한덕희  (2011-12-06 03:38:45 / 98.236.120.170)   
    이런 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들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난 앞에 몇줄 읽으니까 질리던데...
    그래서 지금 역사적 예수 논쟁을 해서 뭘 어쩌자는 거요?
    기독교에서 동정녀 탄생, 부활신앙 빼버리면 뭐가 남는다는 말이요?
    그것 때문에 교회가 타락하고 쇠퇴했다고요?
    그래서 그것 빼면 다시 교회가 잘 될 것이라고?
    그러나 남아있는 신자들도 다 떠나가겄다.
    제발 정신차리시기를...
     변영권  (2011-12-06 08:32:56 / 118.44.193.125)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가요?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다라는 고백이 핵심 아닐까요?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뒤, 생물학적인 처녀로 복원되어서 평생을 처녀로 살았고(예수의 형제는 다 사촌동생들), 죽지않고 승천했다고 하는데, 이런건 믿으시나요?
     장병선  (2011-12-06 08:44:32 / 218.159.250.22)   
    사탄은 잠시 이겼으나,
    하나님이 내리시는 진노의 쓴 잔을 마시고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장병선  (2011-12-06 08:45:38 / 218.159.250.22)   
    이 시점에서 역사적 예수연구 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니까요.
     장창규  (2011-12-06 08:59:14 / 221.133.161.162)   
    교수님! 과거지사를 꺼내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만,

    흑색선전이라 하셨습니까?
    이래서 교수님을 더욱 신뢰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의 내용은 모 철학교수님의 강의였고,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조차 가르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말했던 내용들입니다.

    감신의 이런 분위기는 교수도 학생도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것들인데
    마치 모르는 척 하시는 그런언행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창규  (2011-12-06 09:08:24 / 221.133.161.162)   
    누구에게는 역사적예수 연구가 귀한것이 될것이고
    누구에게는 쓰레기와 같은 허접이 되겠죠
    그냥 둘다 믿음의 문제일 뿐이죠
     권순덕  (2011-12-06 11:01:45 / 121.159.103.85)   
    마리아도 돌아버리겠네,
    예수님은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고,,

    우리 아버지가 우리아버지 맞는지 난 한번도 의심한적이 없습니다.
    보는 사람들마다,,,
    [어쩜 너는 느그 아부지하고 똑같니?]

    너무 가난에 찌들었을때는 [재벌 아버지]가 새로 나타나서 내가 어릴때 너무 가난하여
    너를 버리고 갔었느니라,,,하면서,,(고행석만화에 보면 이런스토리 많습니다.ㅋㅋ )

    그랬다가도 거울보면,,이내 운명을 받아드리기도 했죠,

    아마도예수의동정녀 탄생을 과학적으로 믿으라든지, 신학적으로 믿으라고 했다면,,
    전 일찌감치 손들었을 것입니다...

    머리가 따라주지 못하여,,
    믿음으로 따라갑니다.
     김준우  (2011-12-06 11:14:15 / 220.127.226.39)   
    형제자매 가운데 한 사람이 신흥종교에 빠지게 되면 결국 그 믿음이라는 것이 형제자매를 완전히 갈라놓고 마는 걸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되지요. 대학생들에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면 언제나 듣는 대답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들이 동정녀 탄생처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이라는 것과 기독교인들이 위선적이며 비기독교인들에 대해 배타적이며 멸시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지요. 바로 이런 몰상식과 폭력성이 수많은 목사들로 하여금 종교재판에 동조하여 신학자들을 죽게 만들었지요. 심지어 최근에는 평생동안 신학자로 살았던 분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떠난 것도 바로 이런 몰상식과 폭력성 때문이었지요. 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참사람 예수를 만났고, 역사적 예수 연구는 기독교의 이런 몰상식과 폭력성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길이며 또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어 이 길을 소개할 따름입니다. 더군다나 기후붕괴와 대멸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조만간 인류문명이 붕괴될 위기 앞에서, "전 지구적인 아우슈비츠" 체제 속에서 구원의 희망이 될 "아우슈비츠의 복음"을 역사적 예수 안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연구가 밝혀준 참사람 예수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고 고백할 따름입니다.
     송창섭  (2011-12-06 11:21:14 / 14.33.26.24)   
    그래서 교수님의 답은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나요? 대안이 되었습니까?
    그들이나 교수님이나 어차피 핑계거리일 따름 아니겠습니까?
     변영권  (2011-12-06 11:25:09 / 118.44.193.125)   
    김준우 교수님 // 교수님 말씀도 맞습니다만,

    마리아 승천설, 교황 무오설을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현실은 원인이 무엇일까요?

    개신교 쇠퇴의 원인은 교리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이 있는것 같습니다.
     권순덕  (2011-12-06 11:31:42 / 121.159.103.85)   
    종교는 교리가 생명이 아니고,
    종교가 가지는 그 목적대로 사느냐의 문제일것입니다. ^^

    교리가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그 교리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그 교리를 죽여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길종  (2011-12-06 11:39:10 / 211.187.16.164)   
    20년전 청년부교사시절 청년들과 가까운 서울역에 길거리전도를 하러갔다가....
    1시간도 안되어 풀이 죽어 되돌아 왔어요. 많은 수는 아니지만 어떤이들의 하는 말이....
    '얘 이놈들아! 우리에게 전도하지 말고 너희교회 목사와 장로들에게 예수믿으라"고 먼저 전도해봐봐...
     민관기  (2011-12-06 12:41:20 / 114.204.90.121)   
    그노매지요니다.
     김준우  (2011-12-06 14:09:20 / 220.127.226.39)   
    동정녀 탄생은 사도신경에 분명히 나와 있을 만큼 기독교의 신조이며, 그 의미를 알아야 동정녀 탄생을 살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지요. 물론 역사적 예수 연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도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낸 성인들이 무수하게 많이 있지요. 그러나 지금은 자연과학과 역사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해서 우선 먼저 예수를 주님으로 믿으라고 전도하지요.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가 왜 어떻게 주님이 되셨는지를 먼저 이해하도록 인도하지요. 대학진학율이 80%가 넘는 나라에서 그 두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전도에 보다 효과적인지는 적어도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 이후 단계에서 신앙을 되찾고 있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단적인 예로, <기독교의 심장>을 읽고 난 후 세례를 받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샘지에 실린 이 글을 읽은 어느 평신도 역시 자신의 오랜 의문을 씻어주었다고 감사해하더군요.

    한편 한국에서 가톨릭이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냉담자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그리 간단히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개신교만큼 쉽게 몰락하지 않는 여러 사회학적인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만, 신학적으로는 가톨릭 역시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지난 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이번 교황 기간 동안에만 107명의 창조적인 신학자들을 침묵시켰을 정도로 경직된 상태라고 봅니다. 그나마 가톨릭이 버티는 것은 철저한 교리 교육과 묵주기도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민관기  (2011-12-06 14:51:02 / 114.204.90.121)   
    여전히 지요니다군요.
  • ?
    한기연 2011.12.08 08:44
    1. 기후붕괴와 대멸종의 현실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생명의 자궁인 지구가 파괴되며 당신이 오랜 세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낳으시고 키워오신 생명체들이 떼죽음당하여 이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들을 매일같이 지켜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실성하실 정도로 처절하게 느끼실 고통을 헤아려야 할 사람들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들이어야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현실에 대해 가장 둔감한 이유는 무엇인가? 동물들조차도 자기 새-끼들에 대한 보호본능을 갖고 있지만, 우리 세대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보호본능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책임한 세대가 되었다는 프란츠 알트의 지적(생태주의자 예수, 손성현 역)은 우리 세대의 집단적인 최면에 대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우리 세대에서 특히 기독교인들이 기후붕괴와 대멸종의 현실에 대해 가장 둔감할 정도로 집단최면에 걸려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오래 전에 예일대학교의 스티픈 켈러트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회 예배에 많이 출석하는 사람일수록 환경문제에 더욱 둔감한 반면에 예배에 거의 출석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생태적이며 자연친화적이라는 충격적인 결론을 보고한 바도 있다.

    2. 도대체 기독교인들의 이런 집단최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여러 가지 신학적인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전능성과 사랑에 대한 무조건적 신앙이다. 물론 하나님의 전능성과 사랑하심과 보호하심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갖게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그 은총의 고백이 만들어진 상황을 망각하거나 은총이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는 위험할 수 있다. 특히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처럼 성서에 기록된 신화적인 표현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의미를 살아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신화적인 표현이 문자적으로 생물학적-산부인과적인 진리라고 믿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이런 집단최면과 직결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정녀 탄생을 생물학적 진리로 믿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반제국주의적인 의도를 왜곡하는 것은 물론이다.


    3. 다음은 기독교사상 12월호에 쓴 <첫번째 크리스마스>(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서평의 마지막 부분이다.


    현재 우리가 봉착한 복합적인 위기들이 더욱 악화될수록, 기독교는 그 모든 재앙들의 책임과 해결책을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전가할 것인가? 결국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봉착한 위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기독교가 또 다시 비폭력적인 메시아를 거부하고 폭력적인 종교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난 4백여 년 동안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린 초자연적 유신론에 아직도 기초를 둔 기독교의 승리주의와 제국주의를 극복할 길은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전대미문의 집단적인 살육과 고통, 후천개벽을 향해 나아가는 연약한 자들의 저항 속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태어난 분"의 믿음(278쪽)이 아닐까?

    4. 빙하가 녹아내리거나 폭염으로 인해 작년에 러시아에서처럼 밀 생산이 1/4이 감소하거나 홍수가 나거나 해수면이 상승하는 일은 이제 더이상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자행하는 일이며, 이런 전대미문의 묵시적인 비극을 막는 일도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5. 하나님의 전능성과 사랑하심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후에 찬양한 신앙고백이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고 저항/탈출하는 일이 먼저였고 그 다음에 고백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 고백을 하게 된 절박한 컨텍스트와 저항/탈출을 망각한 채 하나님의 전능성과 사랑하고 보호하심이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처럼 되어 기독교인들을 집단최면으로 마취시키는 아편이 되어서는 우리 다음 세대의 운명이 너무 너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앞으로 5년 내로 우리 다음 세대들의 운명과 생명계 상당부분의 운명이 결정될 만큼 촉박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코펜하겐 회의 이후 가장 중요한 더반 회의의 결과는 이미 몇몇 나라들이 탈퇴할 정도로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6.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녀는 아직 참된 의미의 자녀라기보다는 철부지에 불과하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자라야 진정한 의미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정통신앙이란 부득이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통을 내세워 새로운 신학적 창조를 압살하려는 이들은 성서 자체가 얼마나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정통신앙을 새롭게 만들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의 창조적인 신학을 압살했던 예루살렘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내세웠던 정통주의와 다를 바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 ?
    한기연 2011.12.08 08:46
    동정녀탄생 논란에 부쳐..

    대강절기간이어서인지 동정녀탄생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나 실은 논란의 중심부엔 김준우교수가 있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기독교신앙의 중심적 테마에 논란의 불씨를 또 댕긴 것이다. 이번에는 동정녀탄생에 대한 믿음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지적이다. 김교수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뭐라 왈가왈부하기도 귀찮고.. 글 쓸 맛도 나지 않기에 자판을 두드리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현재 목회하고 있는 이들이나..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대다수 성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적잖다고 여겨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신학적으로 명확한 이해와 답변을 강구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어 평신도들을 의식해서 쉽게 풀어 가보고자 한다. 이를 계기로 독자들께서 기독교신앙에 대해 명확한 이해와 확신적인 태도를 가지기를 기도한다.

    1. 먼저, 우리가 살펴야 할 사실은 왜 끊임없이 동정녀탄생이 문제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오래 전에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 정리되었고, 교리상으로 종지부를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저의가 무엇이냐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오늘의 종교 간의 갈등, 그리고 기독교의 독단성 및 비타협적 성격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지난번 말씀드린바가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가 유일무이한 인간구원론의 주체자가 되지 않는다면, 단지 인간에 불과할 뿐이라면, 예수에 대해 하등의 시비를 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그 이유를 하나하나 밝혀보고자 한다.

    2. 이 문제가 기독교적으로 심각한 이유는 동정녀탄생을 부인하는 대다수의 신학자나 신앙가들의 골수에 사무친 생각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적 태도에서 비롯된 사회적 문제, 종교간 갈등, 그리고 폭력적 사고 등등이 바로 이러한 기독교 근본원리주의에 바탕하여 비타협적인 절대적 신앙고수를 낳고 있으며, 그 신앙의 근본에 동정녀탄생에 대한 믿음이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 -  말하자면, 비상식적이며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그 옛날 천동설이나 믿고 지구가 평평하다는 세계관 속에서나 통용될 비과학적 비현실적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무지함이나 맹목적인 믿음이 21세기 사회 속에서 기독교를 더욱 고립화시키고 있다는 주장 - 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3. 요컨대, 오늘날의 기독교가 일으키는 모든 문제의 근원과 사단엔 바로 이와 같은 근본적인 맹목적 믿음이 주요 원인이요, 이 믿음을 소유한 기독교인들은 하나 같이 사회적 통합과 세대간 종교간 타인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주요 요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긴 하다. 골수적이고 원리주의적이며 도무지 사회적 통합에 대하여 보편적인 사고를 갖기를 거부하는 근본적 원리주의자 기독교인들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러나 그 문제는 기독교사회 내에서 조정되고 시정되어야 할 사안이지 기독교의 핵심교리의 골간을 깨뜨리거나 분쇄하여 해결책을 얻으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이다. 한 마디로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4. 그렇다면 왜 동정녀탄생을 기독교신앙의 중요한 골간이라 말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동정녀탄생은 예수가 인간이냐, 하나님이냐는 고질적인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통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이란 남녀가 만나서 결합을 이뤄 결실을 얻은 인간만이 해당된다 할 것이다. 이 생각이 과거 고대인들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런 점에서 예수는 참 인간이라 하기가 뭐했던 것이다. 그러면, 참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 역시도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인간일 수가 없기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예수는 뭔가,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이란 말인가? 이러한 도전과 질문 앞에서 초기기독교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이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론(신-인성) 문제는 초기 기독교 이단들에게 좋은 먹이거리가 되었다. 예수가 인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는 문제가 고대 기독교사회에서 보통의 시비꺼리가 아니었고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는가. 소위 신화적인 세계관이 뚜렷했던 그 시대에도 이 문제가 불거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논리들의 기초가 되는 동정녀탄생이론은 허설이며 괴설이다!! 이것이 초기이단종파나 불신자 또는 일부 유대인들이 기독교회에 제기한 강력한 도전이었고,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온 이론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양자론(Ebionism)과 가현설(또는 환영설, Docetism)이다.

    6. 양자설은 말 그대로 모범적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으셔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허점은 하나님과 비슷할 수는 있으나(유사본질) 하나님과 결코 똑같은 동일본질은 되실 수 없기 때문에(빌 2:5-6a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단사설로 정죄를 받았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에 의해서 신성성은 유지된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본체)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여호와증인들은 예수를 피조물 가운데 가장 우수하고 탁월한 피조물이라 여겨, 하나님 바로 밑에 있는 2격의 존재라 표현한다. 즉,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있다.)

    7. 가현설의 주장은 하나님이 도저히 인간이 되실 수는 없으니 하나님이 인간의 가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현현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도깨비이론)라서 역시 교회로부터 정죄를 받았다. 가짜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용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부수난설까지 등장했다(가장 그럴싸한 이론이지만). 즉, 하나님이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는 이론인데, 그러나 이 이론은 성경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라는 논리를 극복할 수 없기에 역시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정죄 받았다.

    8. 그렇다면 예수는 뭐란 말인가. 예수를 어떻게 규정해야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당대 교회의 최대의 이슈요 화두요 고민거리였다. 개인이 마음으로 믿는 것과 공동체가 공식적인 언어로 영구히 문서화하여 교회에 존속시킨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이 논쟁은 거의 몇백년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교회는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결국 성경이 답이었다. 전적으로 성경에 기초하여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그러면서도 완전한 인간으로서 기록되어진 말씀들을 중심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전혀 불협화음 없이 완전하게 온존하셔야 한다는 언어를 완성시켜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결정하였다. 다음은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선언문 중 그 일부다.

    9. "그리고 한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신 자이시며, 독생자이시다.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신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낳으신 자이시고 만들어진 자가 아니다.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존재케 되었다. 그는 우리 사람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성육신하셨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는다."

    10.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인간의 논리에게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즉 성경 안에서 찾았고 그곳에서만 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시간은 많이 지연되었지만, 결국은 그 문제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응답함으로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를 극복한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동정녀탄생에 대한 믿음이 기초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기에 교회가 그러한 결과를 공식적으로 도출한 것일까. 사실적인 기술을 해보자. 예수는 여인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하늘에서 여인 없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다. 여인을 통해서 분명히 출생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그러나 요셉은 출생에 전혀 기여할 수 없었다. 기여했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 요셉의 아들일 것이요, 그래서 평범한 인간일 뿐 결코 하나님과 동일성을 갖출 수는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론적 역사요, 사실적 신비요, 신앙적인 고백이다.

    11. 한번 역설적으로 질문해보자. 예수가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어떤 결과가 도출될 것인가? 예수는 인간이기에 죄인인 인간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상식적으로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죄인이 어떻게 죄인을 구원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격조건에 미달되며 구원론적 당위성을 소유할 수 없다. 오직 죄가 없으신 공의로우신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키를 가지고 계시기에, 죄인인 인간의 십자가 구원사건이란 허상에 불과하며, 나아가,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는 아직도 이 땅에 이르지 않은 실현되지 않은 예언이며, 따라서 교회란 존재는 불가능한 현실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엉터리 믿음 신앙일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2. 다시 또 질문해보자. 만일 예수가 참 인간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명이 아니신데 피를 흘려 속죄를 씻을 방도가 있겠는가. 영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죽으실 수는 없으니 영구히 속죄제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며, 따라서 참 인간이 아닌 영으로서의 예수는 그저 영이신 하나님이실 뿐이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이 인카네이션(성육신)이라는 방도를 거쳐 인간의 구원을 해결하실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 방도란 바로 동정녀탄생이라는 하나님의 신비스런 구원활동의 역사로서만 가능할 수 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흠이 없으신 하나님이 동정인 여자의 몸에서 나셔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비로소 희생제물이 되실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신 것이다.

    13. 그러므로, 동정녀탄생이론이 교회에서 거부된다면 기독론은 물론이지만 삼위일체론도 거부될 것이요, 속죄론도 부정될 것이고, 더구나 교회론도 무의미해지며, 재림론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성경이 거부될 것이다. 총체적으로 기독교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동정녀탄생이론이 하나의 간단한 문제인거 같지만 이것은 기독교를 지탱하는 토대요 기둥이요 지붕이요 전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녀탄생을 무위로 돌리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신앙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심지어 인간 예수조차도 아무 의미 없는 유령체로 만드는 것이다. 즉, 실존하지 않았던 실상에 불과한 논리로 궤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실상은 이 모두를 겨냥해서 동정녀탄생이론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그 속에 담겨진 질문의 의도는 의외로 주도면밀하고 교묘하며 고도로 계산된 계획적인 것이다. 결코 속지 말라.


    *

    *
     한덕희  (2011-12-08 05:25:27 / 98.236.120.170)   
    교수 양반, 하나만 물어봅시다.
    당신은 기후붕괴와 대멸종의 현실 앞에서(사실도 아니겠지만), 예수의 신성(동정녀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기독교인으로서 성숙한 어른답게 자손들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시오?
     김준우  (2011-12-08 05:31:33 / 219.241.112.15)   
    1.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의 <첫번째 크리스마스>를 번역해서 출판한 후에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은유로 쓴 전주곡"으로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는 역사적 분석에 대해 그 신학적-윤리적인 의미를 간단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글을 쓴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과학적-생물학적 진리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 자체를 오해하는 것이라는 저자들의 주장이 갖는 신학적-윤리적인 의미를 쉽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 동정녀 탄생이 생물학적-산부인과적인 진리가 아니라 종교적-신앙고백적인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으로 왜곡하는 것도 흔히 보아왔던 일이지요. 김성국 목사가 나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동정녀 탄생이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라 생물학적-산부인과적인 진리인지를 말해야 합니다.

    3.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동정녀 탄생이 생물학적-산부인과적인 진리라는 것을 정직하게 믿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시대에 복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지요.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자녀들은 그런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요.

    4. 동정녀 탄생이든 성육신이든 속죄론이든 모든 기독교 교리는 암기와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삶으로 살아내어 몸으로 증언하라고 만들어진 것인데, 생물학적 의미에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우리가 살아낼 방법은 없지요. 그러니까 예수는 우리와 DNA가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예수처럼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에 예수가 따라오라는 좁은 길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 되지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까지 내세우면, 예수가 오라 하신 그 길을 따라갈 필요도 없고 따라가서도 안 된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지요.

    5. 아우슈비츠 이후에, 더군다나 이제는 기후붕괴와 대멸종의 현실 앞에서, 이미 지난 4백년 동안 완전히 무너져내린 초자연적인 유신론의 동정녀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매달려 있는 철부지에 머물지 말고, 성숙한 어른답게 자손들의 운명에 대해 책임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할 때라는 주장이 마치 기독교와 성경을 파괴하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인 것처럼 오해되고 왜곡되는 현실이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김준우  (2011-12-08 06:48:47 / 219.241.112.15)   
    . 내가 김 목사 말처럼 정말로 주도면밀하게 기독교와 성경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갖고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대목을 고백할 때마다 내가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된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동정녀 탄생이 어떻게 고백되기 시작했는지를 배우고, 그 처음 고백자들의 마음과 그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 다음부터였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만의 성품과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의 생애를 인류 역사에 나타난 가장 큰 기적과 같은 사건으로 감사하며 예수의 혼과 꿈을 온몸으로 다시 살아내려는 가슴 벅찬 고백이지만, 하나의 신비한 기적의 교리로 박제화/추상화되면서 예수의 혼과 꿈을 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2. 김 목사가 동정녀 탄생 교리에 대해 교리논쟁사를 통해 설명한 내용들이 과연 우리의 피부에 와닿고 가슴을 울리는 설명들인지 아니면 박제화/추상화된 설명들인지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신학이 문제가 많다고 판단되면, 내가 쓴 글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를 적시하는 게 옳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토론을 통해 서로 배우는 기회가 아니라 일방적인 돌팔매질이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3. 지난 십여 년 동안 역사적 예수연구를 소개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왔던 이유는 예수의 혼을 되살려 오늘날 예수운동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이 교회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
    한기연 2011.12.08 18:29
    장병선  (2011-12-08 09:01:34 / 218.159.250.22)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창세기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동정녀탄생기사로 나타났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창세기가 기록된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오늘의 과학적 지식에 바탕한 현대인들의 세계관과 일치시키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김교석  (2011-12-08 09:30:48 / 175.207.159.64)   
    신앙고백이란 말이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면, 허황된 것을 고백하는 형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대다수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창조도 사실로 믿고, 동정녀탄생도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언급하여 신앙의 기반을 굳이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는 지 궁금합니다.
    물론 신학자로서 부단히 고민하고 연구해야 하지만, 현장과의 괴리는 혼돈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 들려주는 소리는 "신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설교자의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동정녀탄생에 대하여 뭐라 선포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해야 하는 것이 "신학자"가 할 일이 아닐까요?
     김성국  (2011-12-08 09:57:01 / 211.108.247.48)   
    인간이란 존재에게만 역사와 시간적 한계에 봉착할 뿐..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시간이란 무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성육신하심으로

    인간의 구원론적 계획을 실행하셨다. 시간의 한계 내에 있는

    존재인 인간이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이므로.. 고대나 지금이나..

    인간적 조건은 동일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없으며.. 동일하게..

    인간구원의 역사의 신비를 다 밝힐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이며 고백인 것이다.. 믿음은 선물이다..

    믿어지지 않는데에야.. 무슨 논리가 필요할 것인가..

    또한 믿는다는 데에야.. 무슨 논리가 필요할 것인가..

    동정녀사건만이겠는가..

    성경의 모든 사건이 그러한 것이 아니든가..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데.. 부활을 제아무리..

    정교하게 인간의 언어로 가다듬어 설명한들..

    믿어질 수 있을 것인가.. 십자가구원을 믿지 못하겠다는데..

    제 아무리 뛰어난 인간의 언어로 설득한들 그것이..

    귀 속으로 들어와줄 까닭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사 속에 성육신하신 것처럼.. 이 역시도..

    하나님의 은총이 개인의 심령 속에 들어오셔야..

    비로소 믿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김준우  (2011-12-08 11:07:19 / 219.241.112.15)   
    1. 김성국 목사의 말은 결국 동정녀 탄생은 성서의 문자대로 사실, 즉 생물학적-산부인과적인 사실(진리)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 같네요. 그리고 그것을 무조건 믿을 수 있어야만 믿음의 선물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나도 고백합니다. 그러나 김 목사의 자녀들 경우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이제까지 내가 기독교 대학들이나 일반대학의 강의실에서 만났던 거의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더군요. 기독교를 믿고 싶어도 그런 가르침들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괴로워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참 많이 있지요.

    2. 그러나 동정녀 탄생이 어떤 상황과 경험에서 고백된 것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 많은 경우 학생들은 머리를 끄덕이게 됩니다. 나의 경험만이 아니라 연세대 교목인 한인철 교수의 강의실이 늘 많은 수강생들로 차\고 넘치는 이유도 그렇고, 내가 소속한 청파교회에 해마다 새신자들이 수십 명씩 등록하는 이유 역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교회의 교리가 고백된 상황과 경험과 의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강의와 설교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3. 믿음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은 틀림없지만,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목회적인 방법은 아니지요. 성서에 은유로 기록된 이야기들마저 문자적인 사실(과학적-생물학적 사실)로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 안의 기성교인들에게는 가능하겠지만, 젊은이들과 새신자들에게는 많은 경우에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종종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결과를 초래하며, 청년들과 새신자들을 막아서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강희천  (2011-12-08 11:15:16 / 74.14.102.232)   
    "동정녀 탄생이 어떤 상황과 경험에서 고백된 것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

    간단하게 일단 여기다 설명해 보시면 어떨까요?
     김성국  (2011-12-08 11:23:00 / 211.108.247.48)   
    김준우교수 말씀대로.. 신학교에 와서 자신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저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해나가면서.. 신학에 깊이 몰두하면서..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영 잃고 떠난 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걔중에들 그 고민이 너무 힘들어.. 신학을 중도에 포기한 것인데.. 그것을..

    뛰어넘으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당시 신학교수들이

    자신들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결과.. 본인들도 신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면서.. 남들도 제대로 안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생각합니다..

    다행히 저는 그것을.. 뛰어넘었습니다만..

    지금 김준우교수도 그러한 일에 일조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어서 어리석음을 벗어나십시오..

    얼마든지.. 깊이 있는 신학을 체득하면서..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김준우  (2011-12-08 11:35:17 / 219.241.112.15)   
    유감스럽게도 동정녀 탄생에 대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생물학적-산부인과적인 사실로 선포할 것인가 아니면 은유적으로 해석해서 종교적-신앙고백적인 진리로 가르치고 살아낼 것인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 어리것고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정죄로 끝을 내는군요. 김홍도 목사 역시 똑같은 수법이었지요.
     김성국  (2011-12-08 11:48:42 / 211.108.247.48)   
    김교수님.. 교수님이 주장하는 바를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의미없는 일입니다.. 제가 아무리..

    교수님에게 이러저러한 말씀을 드린들.. 교수님이 거기에

    설복 당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교수님이 저에게 그 무슨..

    논리로 저를 설득하신들.. 교수님의 주장이.. 저의 것이..

    되겠습니까.. 피차 피곤만 더할 뿐이므로.. 고만 하시죠..

    이 글은 교수님 보시라고 쓴 글이 아니고.. 감게판의 다른

    독자분들에게 도움이 되시라고.. 올린 글이니 괘념치 마셨으면 합니다..
     김성국  (2011-12-08 12:09:14 / 211.108.247.48)   
    제가 지난 학기에 우리 아이더러 김교수님 영서강독 강의를 들으라고

    했었습니다.. 제가 볼 때 그래도.. 신학생이.. 신학적인 깊은 사유를..

    동기부여 받는 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기에.. 김교수님에게..

    강의를 들어보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과목의 주제만큼이나..

    신선했고.. 좋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지금과 같은 글을 올리시듯이 매일 반복되는 집요한 교리설파(?)에

    지겨웠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다음 학기에도 신청하라..

    했더니.. 듣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교수님도 집요하게 자신의

    교리를 설파하면서.. 교회가 하는 전통적인 교리설파에는.. 왜..

    넌더리를 치십니까.. 그게 바로 우매한 인간의 전형적인 본보기입니다..

    김교수님은 바로 그러한 부분부터.. 다시 공부시작하셔야 합니다..
     한덕희  (2011-12-08 12:48:34 / 98.236.120.170)   
    강희천 의장님의 질문을 다시한번 올립니다.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대목을 고백할 때마다 내가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된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동정녀 탄생이 어떻게 고백되기 시작했는지를 배우고, 그 처음 고백자들의 마음과 그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 다음부터였다..."

    동정녀 탄생이 어떤 상황과 경험에서 고백된 것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보세요?
     한덕희  (2011-12-08 12:50:29 / 98.236.120.170)   
    그리고 저의 첫번째 질문도 답해 주세요?
     이대희  (2011-12-08 12:58:12 / 118.44.90.35)   
    1.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알 뿐만 아니라 믿습니다.

    2.14c 르네상스와 16c 갈릴레오 갈릴레이적 근대과학의 태동 이후 인류는 과학혁명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김교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과학적-생물학적 진리가 복음서 기자에 대한 오해라는 견해’를 거부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가지고 있었을 세계관과 당시의 과학적 사고가 현대 과학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적-생물학적 진리를 무시한 채 동정녀 탄생을 기록하였다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의 과학 이론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결과들에 대하여 김교수님은 너무 낙관적 경향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과학적 사고를 우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교수님이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과학적-생물학적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견해 자체가 이미 과학을 맹신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산부인과적 진리와 종교적(기독교적)-신앙고백적인 진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사고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합니다. 김성국 목사님의 주장에 종교적(기독교적)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내용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김성국 목사님은 양자를 다 받아들이는 균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김교수님은 철저하게 생물학적-산부인과적 견해는 무시하고 있을 뿐이며, 그렇게 믿는 이들을 <철부지, 미성숙 성인>으로 매도하는 탁월한 배타성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김교수님은 2,000여년의 교회 역사를 최근 한국교회-청파교회의 십수년 임상으로 보편화하려는 오류도 범하고 있습니다. 고등교육이나 대학교육 받은 몇 몇 이들의 신앙을 담지하는 모습이 마치 진리의 중심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 강림절 기간에도 동정녀 마리아의 그리스도 탄생을 선포하며 은혜를 받고 있고 많은 성도들이 마리아의 헌신과 순종, 은총을 통해 큰 신앙의 도전과 감격을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김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준 높은 서울의 고등교육자들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4. 이미 김성국 목사님께서 동정녀 탄생에 관한 내용적 진술을 하신 터라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모쪼록 김준우 교수님께서 거룩한 강림의 계절에 정혼한 마리아가 들었던 수태고지의 천사의 음성과 고통스러운 마리아의 순종을 깊이 묵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김성국  (2011-12-08 14:44:01 / 211.108.247.48)   
    이대희 목사님께서 추가적인 질문과 더불어 김교수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다 더 균형잡힌 시각을 엄중히 요구하시는 부분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목사님과 섬기시는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김원경  (2011-12-08 17:52:44 / 119.205.33.244)   
    김준우나 한인철 등의 변00 제자들처럼 다분히 19-20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 역사적 예수에 매혹되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거나 예수의 몸의 부활은 경시하거나 무시하면서 다만 성서에 은유로 기록된 이야기들로 치부하면서까지 그분의 정신적 부활에 주로 집착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역사적 예수 문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장병선  (2011-12-08 18:13:18 / 218.159.250.22)   
    양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군요.
    마치 남북이 분단된 것처럼,
  • ?
    한기연 2011.12.08 23:59
    1. 예수의 탄생 문제에서 동정녀 탄생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에 의한 잉태이며, 성경 전체의 신앙에서 보면 임마누엘 신앙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첫번째 크리스마스> “옮긴이의 말”에서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 이야기의 초점은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점보다는 오히려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점에 있다. 예수의 삶 전체가 온통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삶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과 능력을 남김없이 보여준 예수의 삶은 성령에 의해 잉태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었다”(331쪽)라고 썼다.

    2. <첫번째 크리스마스>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사실인지 우화인지, 아니면 비유인지부터 해명할 뿐만 아니라, 리처드 호슬리가 <크리스마스의 해방>에서 미처 해명하지 않았던 문제들, 즉 왜 예수의 잉태가 이삭이나 사무엘의 잉태처럼 단순히 하나님에 의한 기적적인 잉태가 아니라 반드시 처녀에 의한 기적적인 잉태여야 했는지, 왜 예수의 족보가 반드시 필요했으며 마태와 누가에 서로 다르게 나와야만 했는지, 왜 마태는 요셉이 마리아의 간음을 의심했다는 구절을 넣어서 결국 예수가 사생아라는 의심을 받게 만들었는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증거로 설득력있게 해명해주는 탁월한 책이다.

    3. 내가 “옮긴이의 말”을 무려 8 페이지씩이나 써야 했던 것은 두 성서학자들의 분석에 대해 신학적-윤리적인 의미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어서 <샘>지 34호에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감게에 “동정녀 탄생이 생물학적/산부인과적 진리인가 종교적 진리인가”)을 썼고, 기독교 사상 12월호 서평(“동정녀 탄생의 은유적이며 정치신학적인 의미”)을 썼다. 이어서 감게에 “동정녀 탄생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는 글을 썼다. 두 달 넘게 번역하느라 진이 빠진 상태에서 계속 글을 써야 할 만큼 절박한 신학적 이유가 있었으며 내가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을 함께 나누려 했던 것이다.

    4.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생물학적-산부인과적 사실로 믿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라는 점은 순복음신학교와 같은 일부 근본주의적인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신약성서 학자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식의 문자적인 해석은 젊은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과 은유적인 해석 가운데 어느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또한 어느 것이 전도에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 내가 논의를 시작한 핵심이었다. 아울러 내가 매우 중대한 문제로 보는 것은 그런 문자적 해석이 초래하는 몰상식과 폭력성이며, 기후붕괴와 대멸종의 현실에서 볼 때, 문자적인 해석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5. 여러 댓글들이 올라왔지만, 신학적인 토론은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내 글들에 대해 빈정거리거나 비난하기에 분주했을 뿐이지 단 한 사람도 마음을 열고 내 글의 의도를 파악하려 하거나 특정한 표현을 문제 삼거나 토론하기 위해 내 글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하거나 반박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막말조차 서슴치 않았다. 내가 가장 큰 문제로 보는 문자주의자들의 몰상식과 폭력성이 댓글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점차 나는 치가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종교심문관처럼 진리와 믿음과 은혜를 독점한 듯이, 신학자의 문제제기와 해석 자체를 정죄하는 목사들은 과연 평신도들의 질문과 의심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가 내 눈앞에서 분명히 그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6. 오후에 기말시험을 준비하면서 몇몇 신학생들에게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믿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들은 웃으면서 “생물학적인 사실로 믿는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쫓겨납니다”라고 대답했다. 신학생 시절부터 학생들은 자신들이 정직하게 믿는 진실을 증언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진심을 숨기는 데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7. 말끝마다 정통신앙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면서도 가슴에는 살기가 등등했을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치를 떨었을지 새삼 느껴진 하루였다.
     김성국  (2011-12-08 22:54:26 / 211.108.247.48)   
    하루종일 맘 고생하셨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껏 경험한 바의 교수선생님들께서는 항상..

    치고 빠지시는데.. 다 명수십니다..

    김교수님도 예외는 아니시고.. 아무튼 의미있었습니다..
     송창섭  (2011-12-08 23:03:23 / 14.33.26.24)   
    그러니까 교수님 말씀은 동정녀 탄생은 실제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관점과 해석을 위한 산물이라는 것이죠? 마태복음 기자와 누가복음 기자는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적인 관점과 해석을 제공하기 위해 일어날 수 없는/일어나지 않은 일을 지어낸 것이구요? '성령에 의한 잉태'로 초점을 살짝 돌리시는 건 매우 교묘하군요. 그건 '이단' 정죄를 피하시기 위함인가요?

    그건 그렇고 줏대 없는 신학생들은 왜 거기에 있답니까?

    예수를 믿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을 '실제'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것인데
    어찌 본말 전도를 부추기고 계시는지...
    실제를 부정한 채 해석함이 왠 말입니까????

    ※ 2011-12-08 23:22:28 에 "송창섭(foryhwh)" 에 의해 수정됨
     김성국  (2011-12-08 23:09:15 / 211.108.247.48)   
    김교수님.. 부탁드리건대.. 누구나 다 아는 그렇고 그런 허접한 얘기들 말고..

    감리교도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신앙의 유의미성을 찾는 그런 연구를..

    좀 올려주세요.. 그리고.. 잊어버릴만하면 폭탄투척하고 사라지는 행태는..

    이제 고만 접으시고요.. 그거 재미들리시면 자칫 양치기소년 되십니다..
     민관기  (2011-12-08 23:09:22 / 61.106.198.129)   
    입체와 무게로 존재하는 몸이 만든 무엇도 안 믿는 주제가 무형무취한 존재인 성령을 믿는다니 이보 다 더 큰 기적도 있는가?
     김기현  (2011-12-08 23:14:45 / 210.57.232.162)   
    확실히 7번에 속한 사람 중에 한사람은 김교수님 이십니다.

    신학생을 가르치려면 신학생 수준은 넘어서고 신학교는 졸업해야하는데 아직 신학생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군요.

    신학대에서 가르치시는 교수님들의 안타까움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도 말로는, 고백적으로는 다 인정한다고합니다.

    말 그대로 그런 믿음으로 사느냐가 문제이지요?

    학생들에게 말을 돌리지 마십시요.
     김기현  (2011-12-08 23:16:04 / 210.57.232.162)   
    오늘 본 댓글과 글 중에 김교수님의 글이 가장 폭력적으로 살기가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요?
     김원경  (2011-12-08 23:18:59 / 119.205.33.244)   
    귀하가 문자주의나 근본주의라고 비판하는 그것들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동정녀 탄생이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부인하면서 역사적 예수에 집착하는 귀하야말로 출구가 없는 가장 절망적인 사두개적 바리새인은 아닙니까?
     김준우  (2011-12-08 23:26:05 / 219.241.112.15)   
    내가 시비를 접겠다는 이유는 내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며, 내가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고 명토박아 말을 해도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내가 동정녀 탄생이나 몸의 부활을 부인한다고 어거지를 쓰는 몰상식한 이들과는 더이상 논의할 뜻이 없다는 말이외다. 남의 말귀조차 못 알아듣는 당신들의 지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대로 드러내는 창피한 짓은 그만 두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겠다는 말이외다.
     송창섭  (2011-12-08 23:47:18 / 14.33.26.24)   
    당황스럽네요. 그러면 동정녀 탄생을 '실제'로 믿으신다는 건가요? 지금까지 교수님 말씀은 '실제'가 아닌 '해석된' 동정녀 탄생에 관한 것 아니었습니까? 교수님의 이해와 해석에 오류가 있다기 보다는 굳이 생물학적/산부인과적 사실을 부인하며 그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폄하/정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말씀한 바 있지만 예수를 믿고 동정녀 탄생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믿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강제된 오류들도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소양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것이지 동정녀 탄생을 '실제화'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 2011-12-08 23:48:43 에 "송창섭(foryhwh)" 에 의해 수정됨
     김원경  (2011-12-08 23:47:20 / 119.205.33.244)   
    역사적 예수가 너무나도 중요해서 전통적 기독교의 틀을 유치하게 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반지성적이고 몰역사적이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바리새적이고도 당파적이면서도 작금의 교단사태에 가장 무능함과 드라이함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까?
     김기현  (2011-12-08 23:49:02 / 210.57.232.162)   
    김준우교수님, 시비라니요?

    감신에서 가르치시는 분이 이 정도 밖에 안됩니까?

    교수님의 신앙의 문제, 믿음의 문제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댓글을 접하고 대하는 교수님의 태도가, 신학자 이전에, 기독교인으로서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본인만 잘났다고 쓰는데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우리 아들이 감신에서 김교수님 닮을까 걱정되어 더 많이 대화하고 기도해야겠군요.

    이 곳은 교수님의 글에 댓글단 사람만 보는 게시판이 아닙니다.

    저도 보고만 있다 교수님의 태도에 화가나서 댓글을 쓰고 있습니다.

    목회자, 성도 심지어 비종교인까지 보는 게시판인데 어찌 그리 그릇이 적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십니까?

    믿음이전에 다른 의견, 지식, 믿음을 가진 사람과 글을 대하는 태도가 틀렸어요?

    ※ 2011-12-08 23:50:47 에 "김기현(kkhchurch)" 에 의해 수정됨

    ※ 2011-12-08 23:53:18 에 "김기현(kkhchurch)" 에 의해 수정됨
     장병선  (2011-12-08 23:56:40 / 218.159.250.22)   
    건전하고, 개혁적인 주장을 펼치는 동역자들이 한결같이 김준우 교수를 공격하는 모습이 참 안스럽군요.
    문자주의에 입각한 성서무오설이 신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듯 싶습니다.
    복음서 저자들끼리도 서로 다른 자료와 관점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 성서라는 것을 인정하고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면 충분히 이해되고 토론이 가능한 것을 마치 종교재판하듯 몰아부치는 것이 공교회의 신앙성숙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신학교에서 비평학을 전혀 배우지 않은 이들의 주장처럼 들리고 감리교 신학이 여기 까지 밖에 나가지 못하는가 해서 답답합니다.
  • ?
    한기연 2011.12.14 21:39
    김준우 교수님께
    이 름 남재영  
    날 짜 2011-12-10 20:05:13
    조 회 403
    글자크기
    정나미 떨어져-두 번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데도 두서없는 긴 글을 읽어주시고 답 글을 주신 걸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주신 글에 이렇게 답 글을 쓰게 해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저는 주일날 설교 전문을 주보에 싣습니다. 주보에 실은 설교문을 설교 시간에 제가 그대로 읽는 것이 매주 우리 교회공동체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말씀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습니다. 까닭은 어느 집회에서 성경 한 본문을 읽고는 자기자랑 반, 개념 없는 우스개 반으로 설교를 끝나는 그 부흥사와 제가 같은 목사라는 사실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사회적으로 웃음거리가 된 빤스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주일 준비를 이렇게 하는 걸 보고 진반농반으로 미련스럽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지요. 이러다보니 설교준비가 제대로 안되면 주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매번 토요일은 늘 짬이 없습니다. 아침에 교수님께서 올리신 글에 제가 읽었다는 마음의 표시만 하고-서둘러 주일준비를 마친 다음에 이제사 글을 올립니다.

    교수님!

    신학자와 목회자가 오늘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다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서로 자신의 생각을 진검 승부하듯이 그렇게 나서야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수님의 말씀대로 함께 한길을 가는 사람들이고-산을 오르다 보면 서로가 길을 잡고 가는 방향은 다를 수가 있지만 결국은 산 정산에서 만나게 되어 있는 그런 관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교수님이 가시는 길에서 바라본 산의 모습은 내가 가는 길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는 길만 산을 오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 알면 비록 길이 다르다 할지라도 함께 산을 오르는 다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ON-LINE의 속성은 빠르게 반응하나 상대에 대한 배려가 크지 않습니다. 사실 그게 뻔히 나뿐 속성인줄 알면서 우리도 모르게 젖어가는 까닭이겠지요. 결국은 우리 서로 함께 만나야할 사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이지 못한 시비로 오해가 깊어져 서로가 가슴앓이를 하게 만들고 있는 이 경우에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지금이라도 냉정을 회복하여 서로의 이야기를 더 진행시킬 수 있으면 감리교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사고방식의 차이는 세계관의 차이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 방식대로 풀면-사고방식의 차이는 같은 길을 가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세계관의 차이는 가는 길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고 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감게에서 확인된 교수님과 동료 목회자들의 그 입장의 차이는 크게 보면 사고방식의 차이이지 세계관의 차이는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나와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해도 결국 교수님도 가슴 뛰는 신앙고백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또 교수님의 그 신앙고백이 부정되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이런 관용의 태도가 제가 몸을 담고 있는 감리교회 신앙의 좋은 전통이요 자긍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 시대 복음의 과제를 안고 교수님께서-내가 생전 처음으로 천일기도를 작정하고 매일 아침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를 드리게-되었다는 고백은 신앙인이 그냥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실 저도 부끄럽지만 아직까지 그렇게는 작정기도를 못해봤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제 소망은 교수님과 똑같습니다. <서로의 신학적 입장에 차이가 있다 해도 그 차이를 이해하고 협력할 일이지 (이를 진부하게) 논쟁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할 만큼 한가한 때는 아니라 생각>에 백번 동의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어떻게 교수님의 말씀대로 이 차이를 넘어 함께 힘을 모아 갈 수 있을까. 그 길이 어느 길인지를 모두가 함께 숙고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교수님!

    우리 서로 입장은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서로 받아들이기 벽이 있음도 확인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찌 우리가 그 벽을 문으로 열고 함께 나갈 것인가 하는 것 아니겠습까? 이 벽을 문으로 열고 나가는 가장 큰 도구란 우리 안의 진정성이 아닌가 합니다.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를 보면서 이를 어찌할꼬 하며 절통한 가슴을 치며 그 진정성이 오늘 이 감리교회의 이 난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동지로 묶어 세워 주리라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로 입장을 칼로 들고 나서기보다는 그 칼을 각자 자기 칼집에 거두어 둔 채로 만나는 지점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금부터 감게가 그 희망을 모색하는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며 서로 사이에 간격이 별거 아니다는 안심을 하게 되고, 서로에게 마음의 평화를 지어주면서 함께 연대하고 힘을 모아 오늘 이 타락한 교회를 정화하는데 헌신하고-더 나아가 이 시대 생명과 평화와 정의라는 복음의 과제를 함께 실천하는 동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교수님이나 감게의 동역자들이 함께 고심하고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수님!

    사실 목회자는 신학자들처럼 그렇게 생각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이것이 목회자된 숙명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에게는 교회공동체가 목회자의 자유보다는 더 크고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이 부자유를 저는 바울에서 그 까닭을 찾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내가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고전9:19-20)] 이래서 목회자를 종이라 하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면 신학지식이 과잉인 이들은 저를 마치 번영신학에 오염된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목회에 제가 주님의 손에 잡힌 도구가 될 수가 있다면 기꺼이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제 생각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지금도 저를 겉핥기로 아는 어떤 신학자는 자신이 내는 어떤 간행물에서 저를 향하여-자기가 손가락질 하며 비판하던 그 기성교회를 그대로 닮아 가고 있다고 제 목회를 비난하는 글을 읽었다며-마침 오늘 그 글을 읽은 어떤 후배로부터 그 전화를 받았네요. 그랬거나 말거나-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 주신 교회공동체를 건강한교회로 세워나가는 것이 제 신명이라고 믿고 성심을 다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숙명적으로 신학자보다 더 호교론(護敎論)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입장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그렇습니다. 감게에서 교수님의 글에 거칠게 반응한 그 이면에는 몰상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어머니 감리교회에 대한 호교론적인 충정이 과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망가지고 시궁창에 처박혀 있어도 감리교회는 내 영적인 어머니라는 그 안타까움이 교수님의 글 앞에서 분기가 탱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전제들을 우리 서로가 보듬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대와 희망으로, 교수님께서 이 시대 교회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그 의제들에 대해서 저는 전면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수님에게서 시대정신을 붙잡고 씨름하는 한 신학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붙잡고 씨름하는 그 줄은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를 포함하여 모든 목사들도 붙잡고 씨름해야할 주제들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삶을 기울이고 있는 그 주제들에 이미 많은 목회자들이 교수님과 다른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기도 하고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수고하고 있다 하면 같은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 것이 삼단논법의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함께 하기에는 서로 사용하는 언어의 개념이 다르다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 교수님께서 분기를 느끼신 감게의 현상-어거지와 몰상식으로 내친 그 현장의 근본 원인은 언어의 개념이 서로 다른데서 오는 소통의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이 소통부재의 책임을 교수님에게 물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목회 초년에-목회를 잘 하려면 신학교에서 배운 그 신학을 다 비워버려야 한다는 선배들의 충고가 아직도 제 귀에 쟁쟁거립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비극으로 가게 된 단초는 여기에 있었다는 점에서 교수님의 신학적인 입장을 수긍하고 이해를 합니다. 물론 이해를 했다 해서 그 입장을 제가 다 수용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 시대적 과제에 대한 소명을 담고 있는 건강한 교회는 모든 목회자들의 로망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목회는 교인들과 교회공동체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되도록 자신의 헌신합니다. 저도 어릴 적 제 할머님이 끼니때마다 한 숟가락씩 성미를 뜨듯이-그렇게 날마다 목숨을 한 숟가락씩 떠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에 바치는 심정으로 헌신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나 늘 함량이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이나-교수님께서 설정하고 계시는-교회의 복음적 과제-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일,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만드는 일,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모두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는 어느 하나도 내려놓을 수 없는 복음적인 삶의 과제이자 선교적인 과제들입니다. 생평과 평화와 정의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는 이 과제들은 어떤 점에서는 인류공동체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과제로 붙잡아야만 하는 주제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시민운동단체가 이 가치에 매진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과제를 위하여 반드시 헌신하게끔 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교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로 구원과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복음이 아니고-복음이 교회로 하여금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자신의 짐으로 지게 했다고 고백합니다. 생명의 복음을 제대로 읽고-거룩한 성령의 감동이 우리 안에서 바르고 온전하게 역사를 하시면 우리가 받은 영감과 은혜는 생명과 정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이 <나의 또 다른 영혼>이라는 내 안의 영적인 각성이 없다면 이 사랑은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과 평화와 정의에 대한 지향을 버리지 않되 먼저 온전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는 우리가 자기 존재를 통째로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교인들 모두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가이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사는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내걸고 아래로부터 혁명으로 잡은 권력도 악마적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생명과 평화와 정의는 언제나 허무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이런 점에서 냉정하게 돌아 서서 질문하면, 생명과 평화와 정의도 생명의 말씀인 복음 안에서는 절대가치가 아니고 상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용할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꼭 있어야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일용할 말씀의 생명이고 영성이라고 믿습니다. 그 생명과 양식으로 힘을 얻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바로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아닐까요.
      
    교수님!

    저는 감게의 모든 동역자들이 이 문제를 보다 더 진지하게 교수님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오늘 우리 감리교회가 빠져있는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총의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불행은 항아리 안에든 쥐를 잡자면서 서로 다투다가 항아리를 박살내는 경우지요. 이제 저는 다투던 두 사람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서 반드시 쥐를 제대로 잡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철벽 앞에 서있습니다.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이 철벽을 문으로 열고 나가는 기적을 우리가 이렇게 함께 꿈꿀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점점 깊어가는 겨울 추위에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교수님의 건강을 잘 살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강희천  (2011-12-10 22:48:15 / 216.221.70.31)   
    주일 설교가 설교문을 주보에 싣고 주일에 그걸 읽는것이라구요.
    정말 궁금합니다. 예배에 참석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듭니다.

    그동안 제가 본 최고의 목사님은
    완전 공책에 설교문을 깨알같은 크기의 글씨로 빽빽하게 적습니다. (다른사람은 읽기도 힘듬)
    한번 그 공책을 몰래 본 적이 있는데 이런식으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라(이 부분은 힘을 주어서) 말씀하셨습니다(물 마시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저리로(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완전 그거 읽으면서 소름끼쳤다는....
     이길종  (2011-12-10 23:01:43 / 211.187.16.164)   
    남목사님~ 저도 함 보고듣고싶습니다.
    내년중 꼭 그 교회방문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그 원고들을 그대로 책으로 내면 되겠네요

    저는 주일 대표기도시 반드시 종이에 정서를 해서 강단에 나가 읽습니다. 내일 입니다.
    그 외의 기도는그렇지 않지요. 그러나 대표기도 만큼은 반드시 적어 읽습니다.
    왜냐구요? 그냥하면 헛소리하고 한소리 또 하고 중언부언할가봐^^

    저도 지금 기도문을 약 300개 정도를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언젠간 책으로 함 만들려고 합니다.

    강남의 어느교회는 장로들의 기도가 3분 되면 담임목사님이 전원스위치를 내리는 교회 있다던데...
    맞습니까?
     강희천  (2011-12-10 23:21:48 / 216.221.70.31)   
    그 교회는 기도가 대통령 정견발표 토론장인가 보죠....
    전원스위치 내리지는 않겠지요 그냥 해당 마이크만 끄겠지요 주 방송실에서...ㅋㅋ
     강희천  (2011-12-10 23:22:21 / 216.221.70.31)   
    내년에 같이가요 장로님
     김준우  (2011-12-11 06:27:53 / 219.241.112.15)   
    남 목사님.
    설교 전문을 주보에 실어 교우들과 함께 읽는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는데 내일모레 생명평화마당에서 발표할 원고를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탓에
    발표를 마친 후에 답글 올리겠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주일 지내시기 바랍니다.
     장병선  (2011-12-11 06:34:20 / 218.159.250.22)   
    정성을 다한 설교문, 기도문, 쭈욱 올려 주시면 모든 이들에게 좋은 본이 될 거예요.
    그것이 완전하지는 못하다 해도,
     유삼봉  (2011-12-11 09:07:41 / 115.21.167.238)   
    ㅋㅋ 그 공책 나도 주슨건데, 아님말구요,^^
     강희천  (2011-12-11 09:11:09 / 74.14.102.232)   
    헉 ~ 그런 분이 또 계셨거나 같은 분을 만났거나 ^^
     유삼봉  (2011-12-11 17:11:38 / 115.21.167.238)   
    아직까지도 원고설교를 하시는 선생님들께서 원고를 써서 하라고 하신 말씀을 30년 전에부터 들어왔습니다, 귀가 따갑도록요, 원고지도 얻구요, 그런데 스무여나문 번 밖에요, 죄송해요 선생님, 오늘도..
     남재영  (2011-12-11 17:35:55 / 183.107.196.194)   
    김준우 교수님!

    지친 심신을 주님께서 보듬어 주시고
    새 힘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교수님 통해서 생명평화마당에 참석하신 분들 모두가
    이 시대의 복음적인 과제에 함께 응답하는
    좋은 시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시고
    늘 강건하시기도록 교수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남재영  (2011-12-11 17:43:41 / 183.107.196.194)   
    감세협 의장 되시는 강희천 목사님!

    ㅎㅎㅎ 섬기시는 교회 비우지 마십시오.
    잠시 짬을 낸 그 틈새로 누가 담임목사 자리
    후딱 팔아치워 버릴지...전 책임 못집니다.
    -우는 사자가
    요령소리 나도록 설치면서 목사님을 노리고 있슴다.

    워낙 강목사님이 국제적인 인물이시라...
    심려가 됩니다.



    글고! 장병선 목사님
    우리 교회공동체에서 선포된 설교말씀을
    감게에 까지 올리는 거는 좀 그러네요.

    제대로 설교는 하는지 궁금하시면
    제 블로그에 들러 감찰(?)하시면 되옵니다.
    블로그는 http://goodpastor.blog.me/



    유삼봉목사님.
    주운 공책 있음 우리 함께 공유하십시다. 공개하십숑
    ㅎㅎㅎ 주일 잘 보내셨나요?

    ※ 2011-12-11 17:47:28 에 "남재영(goodpastor)" 에 의해 수정됨
     남재영  (2011-12-11 17:51:09 / 183.107.196.194)   
    이길종장로님!
    보내주신 교회100년사 잘받았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것도 아닌데 우리 교회에 까지 찾아오시는 것은 아니되옵니다.
    장로님께서는 뭔 일이 있어도 주일 본 교회에서 성수하셔야지요.
    누구라도 교회의 장로님께서 본교회를 두고 다른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거
    저는 반댑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다를 때 한번 뫼시도록 하겠습니다.
    수요일 밤 같을 때 말입니다.
    장로님께서 원하신다면...말입니다.

    강희천목사님과 동행은 절대반대!!!!
    강목사님 같은 국제적인 인사는
    우리 교회로써 감당이 안됨.
     장병선  (2011-12-11 18:22:10 / 218.159.250.22)   
    멍구는 잘 올리던데..., 멍구니까 그렇지..
    어느새 강목사님이 국제적 인물 되얐구만,
    감게가 큰 인물 키워냈어!
     남재영  (2011-12-11 20:00:51 / 183.107.196.194)   
    ㅎㅎㅎ
    장병선 목사님께서
    드뎌 삐치셨네욤?

    비가오나 눈이오나
    풍랑이일고 파도가쳐도
    주구장창 감게를 지키시는
    장목사님!

    국제적인 인물님이나
    저처럼 병방에서 우짖는새냐

    우리 모두가
    장목사님의 그 손바닥에서
    놀고 있는 있는 줄 믿습미아~
  • ?
    한기연 2011.12.14 21:45
    반지성이 아닌 영성이 문제였다-김준우교수께는 존경을 담아서
    이 름 남재영  
    날 짜 2011-12-09 05:16:09
    조 회 513
    글자크기
    김준우교수의 동정녀탄생에 관련된 글은 신학적인 교양을 위해서 의미하는 바가 있었다. 세계적인 신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석학들의 입장을 단편이지만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있었고-혹자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하지만-그럼에도 나는 그동안 전혀 상상도 못해온 <산부인과적인 관점>이라는 표현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성경의 사건을 보는 관점의 지평을 좀 더 열어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더하여 동정녀 탄생과 관련하여 김준우 교수의 자신의 신앙고백이-내가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감게에서 거칠게 그의 논지에 대한 시비가 아닌-좀 더 논리적으로 피차 서로의 이야기를 전개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실 이글은 그 아쉬움 때문에 쓰게 된다. 하지만 김준우교수 본인이 <논란>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판을 접어버린 상태이기에 조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래서 관점평 정도로-이미 접어버린 동정녀탄생 논란의 판에 뒷북을 치듯 이야기를 보탠다.    



    결론적으로 김교수의 글 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에 대해서 갖는-특별히 최근 <역사적 예수론>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신학자들에 대해서 사실 나도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문제의식을 갖는 점이 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신학>을 <신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예수론은 분명 현대교회가 위기라는 진단에서 나왔다.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서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역사의 예수로 다시 돌아가서-2천년 전 역사에 실재했던 예수가 뭘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어떤 가치를 설파했고 또 어떻게 그 역사와 공동체에 자신의 정신과 뜻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했던가-하는 점을 정말 역사적으로 현장감 있게 한번 제대로 보자는 점에서 충분하게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의 위기에서 문제를 찾으면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전혀 엉뚱하게 처방하고 있다는 점이 여기 신학자들이 내리는 과오라고 생각한다. 김준우교수도 오늘 교회에 대한 문제를 <교회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몰락하는 시대>에 < 20-34세 사이의 연령층에서 10년 동안 교회를 이탈한 기독교인 숫자가 60만 명에 이른다>는 이 현상을 <교회가 가르치는 핵심 교리들에 대해 젊은 세대가 더 이상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그 대안을 교회를 떠나는 이들-특히 젊은이들이 믿을 수 있는 과학적인 언어로 교회가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동정녀탄생이나 예수의 부활에서도 더 이상 신화적인 이야기 말고 과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산부인과적으로 이야기해보자고 했을 것이다.

    김교수가 이렇게 논지를 펴가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반지성주의 아래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습득하게 된 이런 전근대적 몰상식은 대형교회일수록 흔히 드러내는 담임목사의 세습과 전횡처럼 반기독교적이며 반민주적인 권위주의적 작태의 온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제에서 수구반동적 태도를 재생산하고 있다. 문제는 지구경제가 더욱 악화되고 생태계 파괴로 인한 재앙이 악화될수록, 기독교의 몰상식과 수구반동적 폭력성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는 한국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그 입장에서 김교수는 진정으로 한국교회를 염려하고 바른 해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동정녀탄생에 관한 자신의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린 의도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또 그 내용 또한 그가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의 생각이라는 점에서는 뭐라고 재단하고 싶지 않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점이 바로 거기에 연유하고 거기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데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이를테면 동정녀탄생뿐만 아니라 성경의 사건들을 사람들이 잘 알아듣는 언어-즉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하고-한국교회의 수구꼴통적인 작태들과 폭력성이 한국교회의 반지성인 성경해석에서 문제의 근본을 찾는 김교수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김교수가 염려하는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같은 분량의 염려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문제의 원인과 처방에서 내 입장은 김교수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늘 교회의 위기는 영성의 위기이지 사고나 언어의 개념이 과학적이지 않아서 생긴 위기가 아니다. 영성의 출발점은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에서 출발한다. 일례로 나는 몸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묻는 질문이 기독교 영성의 근본을 묻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나 배꼽이 아니고-아픔이 있는 곳이다. 시끼(?)발가락이 아프는 모든 신경이  시끼(?)발가락으로 쏠리고 그 아픈 시끼(?)발가락이 몸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 생명운동을 하는 몸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김교수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반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영성의 문제로 본다. 한국의 주류교회가 보이고 있는 패악과 죄악은 바로 이 영성의 생명이 작동하지 않고 죽어서 생긴 당연한 결과로 본다. 그래서 무엇보다 영성의 회복이 시급하다는 것이 김교수와는 다른 내 결론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뭔가를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하기 보다는 영혼에 감동의 줄 수 있어야 한다. 영성이 죽어있으니 뭔 감동이 있을 거며-이런 현실에서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줄을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니겠는가.



    김교수가 말하는 예수의 혼과 정신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고 전태일열사이다. 전태일열사는 1970년 11월13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는 절규를 하며 분신을 했다. 김교수가 말하는 예수의 정신과 혼을 한국 현대사에서 전태일 만큼 제대로 구현한 모범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민중신학적인 성찰의 출발점은 바로 그 전태일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열사를 통해서 우리 살아가는 신앙적 삶을 성찰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렇다고 전태일이 우리 신앙고백으로까지 끌고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의문은 어떻게 역사적인 예수가 영혼구원에 대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영혼의 문제는 치열한 혼과 정신의 실천이라는 문제로 다 답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영혼구원의문제가 영생의 소망과 이어져 있고, 더 나아가 그 구원의 지평이 천국과 지옥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총량이라 할 수 있는 <믿음>과 <행위>와 <심판> 그 앞에 서게되기까지 우리 존재는 영혼구원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 가운데 있다. 그래서 복음서의 동정녀탄생과 십자가사건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이 <역사적 예수 사건>은 한 사건 사건 마다 영혼구원이라는 코드가 그 사건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영혼구원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역사적 예수 사건>을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가 영생의 소망 가운데서 천국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 삶이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복음서의 역사적 예수사건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되고 <역사적 예수 사건>이 내게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역사적이었으나-그 표현양식에서 신화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뭔 문제가 되는가? 나는 그 사건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믿고 살아가자고 교회공동체에서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참고로-내가 섬기는 빈들교회는 교인들은 진보적인 교회라는 점에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그런 교회이다)

    복음서의 <역사적 예수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아닌 다른 잣대를 들이대어-동정녀탄생이 과학적/생물학적/산부인과학적으로 논하는 것이 신학교양적인 수준에 머무르면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김교수처럼 그 근거에서 신앙을 바탕을 찾자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고 필연 이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비켜나가는 신앙적인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반지성이 문제이듯이-한국교회에서는 지금 신학자들의 지성과잉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고 생각한다. 신학에서 과학적인/생물학적인/산부인과적인 기재는 영혼구원을 내용으로하는 기독교의 신앙을 무장해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역사적예수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예수의 정신과 혼을 따르자는 것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자 함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은 정신과 혼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이 고백했듯이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은 혼이나 정신과는 다르고 또 몸과도 다른 우리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생명을 육체적인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게 아니가. 어런 의미로-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바울의 선언에 대한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까닭은 우리가 영으로 영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의 문제로 보자면 이 땅의 삶은 인생의 본론이 아니고 서론에 불과하다. 인생의 본론은 죽음 이후에 비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고백이 여기에 서있지 않으면 영생의 소망이란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보면-김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수구적인 행태들과 반동적인 작태들은 성경해석이 과학적이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신앙의 이름을 가장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의 결과이다. 이 역시 성경을 해석하는데 과학적/생물학적/산부인과적인 이해가 일천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고 적확하게는 영성의 문제이다. 한국의 주류교회는 이미 자본에 포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본을 섬기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시내산에서 금송아지예배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그 시내산 우상숭배가 오늘 한국의 주류교회의 예배이다.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반지성의 문제가 아닌 바로 이 영성의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

    감리교사태의 원인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근본은 바로 맘몬우상숭배이다.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교권(감독과 감독회장)도 돈으로 사는 맘몬우상숭배라는 지배질서가 내부적으로 지들끼리 충돌하여 생긴 자뻑(?)이 오늘 감리교사태이다. 맘몬우상숭배는 감리교회에서도 개체교회이기주의를 강화하여 공교회를 완전 해체시키는 결과로 운동해왔다. 오늘 감리교회사태는 맘몬우상숭배의 명백한 물증이다. 이것이 어찌 과학적 언어가 결핍해서 생기는 문제인가. 이 문제는 명백하게 영성의 문제라고 해야 길을 찾을 수가 있다. 세습이나 담임목사직을 사고파는 성직매매 역시 맘몬우상숭배가 낳은 또 다른 자식을 뿐이다. 감리교사태 처음부터 나는 이점을 주장해왔고 앞으로도 감리교회가 거룩한 영적 순결성을 회복할 때까지는 계속 주장해나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를 김교수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반지성>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교회의 죄악은 반지성의 문제가 아닌 성경해석의 문제가 아닌-영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정말 한국교회가 문자적인 해석에 충실했다면 어찌 교회를 세습하고 담임목사직을 사고 팔며 은퇴를 하면서 십수억씩 챙겨냐가는 죄악들이 횡횡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책 문자에 있는 그대로-지옥이 무서워서도 영원한 형벌이 무서워서도 감히 그 짓을 할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해온 성경해석은 김교수가 말하는 반지성적이고 문자적인 해석도 아니고-지편한대로 , 지들 입맛대로 마구잡이로 해온 해석이었다다.    



    신학도 과학의 한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과학/사회과학/인문과학으로 나눈다면 신학은 인문학의 한 갈래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과학으로써 신학은 얼마든지 다양하고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가 역사에서 방향을 상실하여 길을 잃었을 때-‘저기가 길이야’ 하고 가르쳐 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교회를 거기로 끌고 가려해서는 안된다. 그 방향을 찾아가는 것은 교회가 가야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역사의 표지판 일뿐이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 서울을 가다보면 서울을 알려주는 수없이 많은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고속도로 상에 서울 방향을 알려주는 대형표지판이 있다 해서-그 표지판 앞에 차를 세우고 표지판을 붙잡고 여기가 서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울이라고 서있다고 해서 거기가 서울은 아닌 것이다. 신학도 그런 것이 아닐까. 동정녀탄생을 산부인과학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게 동정녀탄생을 믿는 우리 믿음의 진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믿는 신앙은 성경의 진리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생명운동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과오도 있었고, 문제도 있었지만 거시적인 눈으로는 거룩한 성령의 인도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다. 그걸 도그마라고 하던 뭐라고 하던지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지어오신 거룩한 역사의 결과물을 믿고 고백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신앙이 신학에 잣대로 잴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있어야 한다며 신학이 신앙의 그 한도를 설정해주는 것-이것이야 말로 산학의 오만이고 바리새적인 지성과잉의 태도가 아닐까? 나는 오늘 역사적예수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에게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런 현상을 <지성과잉이 가져온 신앙에 대한 무지>라고 말한다. 오늘 내노라하는 신학자들 가운데서 특히 이 중세가 심하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



    신앙세계는 바다와 같다. 바다에는 여러 종의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 때로는 좋은 고기도 있지만 7광구의 과물 같은 김머시기 같은 인종도 거기 있는 것이다. 그 바다에서 신학은 그물과 같다. 그물은 바다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고기는 잡을 수 있어도 결코 바닷물을 끌어 올릴 수는 없다. 신학은 오늘 교회가 뭐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신학으로는 바닷물과 같은 참된 신앙을 건져 올려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동정녀탄생에서 신화를 벗기고 과학적/생물학적/산부인과적으로 목욕을 시킨 예수는 신학의 관심인지는 모르지만 전혀 신앙의 관심이 아니다. 신화를 벗겨내지 않으면 반지성적인 신앙의 과오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는 신학자들의 염려와 주장은 과잉지성의 오버이고, 지성과잉이 낳은 기우이다. 내가 생물학이라는 과학에 무지하다고 해서 우리 애를 씻기고 난 구정물을 버릴 때 반드시 애까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내 아이도 아버지가 생명과학적으로 무지하다해서 자신을 구정물과 함께 내다버리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뭔 설명이 더 필요한가. 이런 점에서 오늘 문제 많은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김교수가 주장하는 산부인과적인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을 마치면서-김준우 교수님께

    교수님! 교수님의 장문을 글을 출력해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어서 올라오는 글들과 두 번째 글-그리고.....

    저는 교수님을 더러운 맘몬우상숭배로 오염된 오늘 한국교회 영성의 몰골을 저와 함께 지켜보며 가슴앓이를 하는 동시대의 동역자요 신학자라고 믿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교수님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 사회를 걱정하고 이 시대의 아픔을 껴안으려는 기독인들의 현장에서 지나치듯 만난 적은 있었지만-한 번도 진지하게 서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교수님이 그 어느 신학자보다는 한국감리교회 아픔과 같이 아파하면서 그 아픔의 현장에 비켜서지 않았던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시대의 아픔과 교회의 무너진 영성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신학자다운 실천을 해오셨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이점을 높이 사고 존경합니다.  

    오늘 감리교회가 당하는 이 아픔에 그냥 침묵하고 있는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에는 그 누구보다도 신학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있는 신학자들은 신학을 하는 지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배운 신학이라는 교양을 밑천으로 밥벌이를 하는-신학이라는 교양을 팔아먹는 장사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감리교회의 신학대학에는 이런 장사꾼들이 판을 장악하고 스스로 자신을 권력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김준우 교수님을 높이 존경합니다.

    또 이번 논쟁을 지켜보면서 교수님께서 논쟁을 접자면서 밝힌 심경-내가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고 명토박아 말을 해도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내가 동정녀 탄생이나 몸의 부활을 부인한다고 어거지를 쓰는 몰상식한 이들과는 더 이상 논의할 뜻이 없다-며 분기를 담고 필을 접으시는 모습에 참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목회자로, 저는 비록 나와는 다른 지점에 서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아쉽게도 교수님만한 신학자를 최근에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점 또한 감리교회로서는 대단히 불행입니다.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늘 강건하시기를 지금 기도 중에 글을 올립니다.
     김원경  (2011-12-09 06:02:50 / 119.205.33.244)   
    귀하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거의 몽땅 마녀사냥식으로 파괴적으로 매도하고는 그것을 교조화해서 어린 신학생들에게 당파적으로 의식화하는 일에 집착하는 그를 칭찬하는 것으로 봐서, 귀하도 상당히 반성서적이고 반지성적인 인물로 보입니다 그려!

    일례로, 전통기독교의 속죄론이 나쁘다면 어떤 점에서 나쁜지를 지성적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속죄론 그 자체를 쓰레기 통에 처박아버린 변교수처럼 그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한다면, 그의 주장은 귀하가 그토록 진절머리를 내는 번영주의의 맘몬보다 더 사악한 것임을 아십니까?
     김원경  (2011-12-09 06:07:06 / 119.205.33.244)   
    월간목회 창간 기념 박아론과의 논쟁에서, 변선환은 다음과 같은 존 마일리(John Miley)의 논지로써 싸워야 했다고 생각하는 다음의 내용을 보시고 comment를 바랍니다.

    "Nor has the atonement in vicarious suffering any tendency or liability to Antinomianism. From its own nature it is a provisory or conditional ground, not a causal ground of forgiveness and salvation. From such an atonement no license to sin can be legitimately taken. Antinomianism is utterly outlawed.

    We know very well that Satisfactionists very generally discard this heresy. They will deny that it has any logical connection with their theory. Yet in the history of doctrines Antinomianism stands with the soteriology of Satisfaction. Nor does it seem remote from a logical sequence to such an atonement. There is substituted punishment, and also substituted('imputed'-인용자 주) righteousness.
    Whatever penalty we deserve Christ bears; whatever obedience we lack he fulfills. He takes our place under both penalty and precept. What he does and suffers in our stead answer for us in the requirements of justice and law as though personally our own. In view of such facts, Antinomianism is far worse in its doctrine than in its logic.

    But the atonement in Christ does not make void the law. Nor has the true doctrine any liability to such a perversion. The atonement in vicarious suffering has this advantage, and is thereby commended as the true one."
    ( 아펜젤러의 스승이었던 존 마일리교수의 '조직신학'2의 속죄론 P.159에서)

    " And, with no absolute necessity for the punishment of sin, it seems that but for the requirements of rectoral justice, compassion would triumph over the disposition of a purely retributive justice."(동3장에서)

    ※ 2011-12-09 06:25:35 에 "김원경(kwkc)" 에 의해 수정됨
     남재영  (2011-12-09 06:13:34 / 183.107.196.194)   
    김원경목사님

    제 글이 김준우교수님의 주장을 칭찬하는 것으로 들렸나요?.

    그분의 주장과 달리 그분의 태도에 대해서
    김준우교수님보다 나이 어린 제가 감히 칭찬이라는 말을 써도 결례가 안된다면
    백번 칭찬하고 싶습니다.

    말은 아주 양처럼하며 행동을 개차반으로 하는 인간들의 태도에 비하면
    김교수님이 백배 났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김목사님께 충고하자면
    산 앞에 서서는 눈을 크게 뜨고
    나무를 보고 숲도 보십시오
     장병선  (2011-12-09 06:17:37 / 218.159.250.22)   
    남재영목사님의 글에 감사를 드리고, 현대교회의 문제는 '영성의 문제'라는 주장에 공감하며, 논의가 더 깊어지기를 바라면서,
    '동정녀 탄생을'금과옥조로 주장하는 이들중에는 사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갖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권위를 얹어놓을 반석이 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편의상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유리하니까 그러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 감게판에 나와 진지하게 토론하는 이들은 예외로 하고요.
    결국 좋은 믿음이란 실천적 행위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데, '동정녀 탄생'을 믿는 다면 어찌 그토록 반윤리적인
    범과를 태연히 저지르며, 돈으로 교권을 사려하며 공교회를 사유화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아예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틑림없어요. 그들에게 성경은 든든한 장사 밑천인 셈이지요.
     남재영  (2011-12-09 06:25:30 / 183.107.196.194)   
    장병선 목사님!

    댓글이 어찌 지워졌네요.

    동정녀 탄생을 소리 높이면서 패악질을 하는
    맘몬 우상숭배자들은
    지성-반지성의 개념 조차도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움직이지
    복음의 진리에 따라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저들이 복음의 진리를 소리 높일 때는
    자기 이익이 눈앞에 확실하게 보일 때라고 보면 됩니다.
     장병선  (2011-12-09 06:25:46 / 218.159.250.22)   
    그런데요. '정직한 영성'이 산부인과적 질문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이들은 '영성'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느낌인데요.
    영성은 정직, 아픔..이런 것들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김원경  (2011-12-09 06:28:19 / 119.205.33.244)   
    나무가 좋으면 숲도 좋다고 하던지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나무가 노랗게 병들어 죽어가는데 숲을 좋다 힐 수 있습니까?
     장병선  (2011-12-09 06:31:03 / 218.159.250.22)   
    김원경목사님, 누가 뭐라고 말했다는 것 보다 나는 어떻게 믿느냐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불가에서 '부처가 나타나면 부쳐를 죽여라'고 하는 것은 곧 '진리의 우상화'를 경계하여서가 아닐까요?
    예수께서도,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하셨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 수준에서 한 발자욱도 못 나가고
    벌벌 떨고 있는 것 같아요
     김원경  (2011-12-09 06:36:02 / 119.205.33.244)   
    전통적 기독교를 다분히 폄하하는 매우 선동적인 민중신학이나 역사적 예수논쟁이 지성적이라 생각합니까?

    작금의 한국개신교의 문제점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지성적이지 않고 당파적인데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펜젤러의 스승 마일리의 글을 천거하면서!

    ※ 2011-12-09 06:46:34 에 "김원경(kwkc)" 에 의해 수정됨
     남재영  (2011-12-09 06:46:41 / 183.107.196.194)   
    장목사님!

    저는 정직한 영성은 현실의 교회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방향으로
    운동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역사적인 예수만 전부라고 할 수 없지요.
    구속사의 예수는 그럼 역사적 예수론자들의 논리대로
    믿을 가치가 없다는 겁니까?

    역사적 예수론자들이 오늘 교회에서 문제를 발견하교
    역사의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역사의 예수만 믿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실제로 역사적 예수세미나에서
    제가 잘아는 교수도
    교회가 믿는 하나님을 안믿는다고
    자신이 장로가 된 것도 하도 목사가 하라해서 억지로 해줬다(?)고
    감리교 장로까지 지낸 양반이 은퇴후 교회에 나가지 않는걸 무슨
    자랑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은 역사적 예수만 믿지 구세주 예수는 안믿는 다고요.
    물론 그 사람이 오늘 신학자들의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이런 게 역사적 예수신학자들이 받을 수 있는 오해이고
    또 극복해야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공동체의 언어를 무시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남재영  (2011-12-09 06:51:59 / 183.107.196.194)   
    김원경목사님!

    제가 어떤 생각 어떤 주장을 하든지 간에
    제가 김준우 교수를 좋게 말하는 것 자체가 기분나쁘다는말로 들리네요.
    목사님의 그런 생각은 사려깊지 않고 자칫하면 제게는 매우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지성을 이야기하는 분은 지성답게 전체를 보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앞으로 댓글 다시려면 영어 원문을 그대로 올리지 마시고
    해석을 해서 올려주시는 배려도 부탁드립니다.
     장병선  (2011-12-09 06:55:21 / 218.159.250.22)   
    역사적 예수를 드러내려 하는 것은 '구속사의 예수'를 역사 전면에 제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서
    출발하지 않았는가 싶은데요.
    제가 뭘 모르고 횡설 수설하는건지, 원.
     김원경  (2011-12-09 07:01:49 / 119.205.33.244)   
    귀하는 번영주의의 맘몬에 대해서는 분개하지만 역사적 예수만을 고집하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당파적이고 파괴적인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감리교사태가 그런 자들의 재등극을 알리는 기회가 된다면, 감리교회는 미래가 없다고 봅니다.
     남재영  (2011-12-09 07:02:47 / 183.107.196.194)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직 그런 신학자를 못만나 봤고요.

    예수천당 불신지옥만 알았지만 한없이 그냥 맹목에 가깝도록
    섬겨온 제 할머님의 신앙은 신학적인 세례가 더 필요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지요.

    이기심과 탐욕에 젖은 목사들에게는 신학적인 세례가 아닌 영성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 근거를 역사적인 예수가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제 부족한 생각입니다.
     장병선  (2011-12-09 07:18:47 / 218.159.250.22)   
    '역사적 예수'연구가들이 '구세주 예수'는 안 믿는다는 것은 큰 오해라고 봐요.
    그들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드러내므로서, '구세주 예수'를 더욱 선명하게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좀더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봐요. 신화속의 예수가 아닌, 현실역사속의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군신화를 역사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다고 신화가 의미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김원경  (2011-12-09 07:21:40 / 119.205.33.244)   
    아니, 이기심과 탐욕에 젖은 목사들에게는 먼저 신학적인 세례가 진정 필요합니다.
    교단문제는 신학적인 것이라 사료됩니다.
     남재영  (2011-12-09 07:22:37 / 183.107.196.194)   
    제발! 김목사님!

    이성의 끈을 제대로 붙잡고
    감정의 덫에서 해방되시기를
    제가 지금 김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남재영  (2011-12-09 07:27:43 / 183.107.196.194)   
    장목사님!

    그 어떤 절망적 현실에서도
    신화는 현실에 물들지 않고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지요.

    복음의 이야기는 전부
    현실의 절망을 스스로 넘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런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ㅎㅎㅎㅎ

    이제 저는 볼일이 있어 나갑니다.
    장목사님과 함께 한 시간들-감사하고 줄거웠습니다.
     김원경  (2011-12-09 07:31:16 / 119.205.33.244)   
    귀하가 이성의 끈을 제대로 잡았는지는 마일리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였는지에 달렸다고 해고 과언이 아닙니다.
    이선희 교수에게 찿아가서 그가 소지한 마일리의 글에 대한 comment를 부탁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귀하의 지성을 믿을만 하다고 여기기 어렵군요.

    작금의 신세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 2011-12-09 07:39:57 에 "김원경(kwkc)" 에 의해 수정됨
     남재영  (2011-12-09 07:36:32 / 183.107.196.194)   
    아!
    나가려고 했는데 김목사님 댓글이 저를 잡네요.

    목사님께서 올리신 글
    [이기심과 탐욕에 젖은 목사들에게는 먼저 신학적인 세례가 진정 필요합니다. 교단문제는 신학적인 것이라 사료됩니다.]는 글은 한측면에서 맞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대부분 사람은 아는대로 사는 것 같지만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저는감리교 목사들이 뭘 몰라서 감리교회를 이렇게 방치해 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 생기는 것이 없으니 움직이지 않습니다.

    교단이 뿌리에서 썩어 허물어져도
    오늘 내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게
    감리교사태를 이리 걷잡을 수 없이 키워가고 있지요.


    이런 점에서 감리교 목사들 너나 할 것없이
    재를 뒤집어 쓰고 옷을 찟으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감리교 목사들의 신학적인 소양이 부족해서 이 지경이 된게 아니고
    비겁해서 이리된 거지요.

    이 목사들으 비겁은
    신학의 문젭니까?
    영성의 문제입니까?

    ********************
    김원경목사님!

    오늘 제가 목사님께 과한 부분이 있었다면 용서하십시오.
    이제 더 이상 댓글을 올릴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이 제게 다 전해지고 있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좋은 날 되시기를 기도하며
    이만 퇴합니다.
     남재영  (2011-12-09 07:41:37 / 183.107.196.194)   
    어찌 잠시 댓글을 다는 사이에 김목사님 댓글이 바꿨네요 ㅎㅎㅎ


    마지막으로
    저는 목원대학의 이선희 교수에 대해서-요즘 모습은 좀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웃기는 짬뽕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선희교수의 그런 그동안의 행태에 대해서
    요즘 누구보다도 후회하는 분이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기회닿으면 제 이야기도 하시고
    이선희교수에게 확인해보시기를.........

    이제 정말 갑니다.
     김원경  (2011-12-09 07:42:44 / 119.205.33.244)   
    진실(진리)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할 수 있습니다!
     김원경  (2011-12-09 07:46:41 / 119.205.33.244)   
    M. Luther, " I cannot recant"
     장병선  (2011-12-09 07:51:37 / 218.159.250.22)   
    하나님이 곧 진리이십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오만하지도, 무례하지도, 이미 다 얻은 줄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한덕희  (2011-12-09 09:41:12 / 98.236.120.170)   
    남 목사님과 김 목사님의 토론, 참 멋 있습니다.
    제가 볼땐 두분의 진단이 다 맞습니다. 한국교회는 영성과 신학 둘다 부재한 상태입니다. 남 목사님 말씀처럼 한국교회 목사들은 대부분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지들편한대로, 지들 입맛대로 철저히 자기들 유리한대로 그렇게 갖다 붙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평소의 그의 삶은 모르지만, 이곳 감게에서의 글 쓰기 내용이나 형태만을 보아서는 칭찬할게 전혀 없는 김준우 교수를 "교수님만한 신학자를 최근에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극찬하는 남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참 이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지지리도 지도자(목회자, 신학자) 복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재영 목사님이나 김원경 목사님 같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이 일치하는 실천(목회)적 학문을 하는 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가르치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 2011-12-09 10:05:32 에 "한덕희(handukhee)" 에 의해 수정됨
     장병선  (2011-12-09 09:45:09 / 218.159.250.22)   
    김준우 교수님은 남의 귀를 간지럽게 하는 말에는 서툰 것이 분명합니다.
    사교적이지 못해서 늘, 어디서나 불이익을 당하며 살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속이지 못하는 정직한 학자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남재영  (2011-12-09 10:11:20 / 183.107.196.194)   
    한덕희 목사님!

    지나치게 저에 대해서 과찬을 하셨네요. 사실 저는 그런 깜냥이 안됩니다.

    다만 제 관심의 모든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시대를 진실 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까 하는 겁니다.
    가장 쉽게 제가 찾은 정답은 <예>할 때서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이었습니다.

    목사가 예 해야 할 때 예하지 않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지 않는 것이
    뭔 대단한 목사적인 처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 이었습니다.
    오늘 어머니 감리교회의 억장이 무너지는 이 사태도 그 근본에는 목사들의 이 잘 못된 처신이 화를 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준우교수처럼 자기 주장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분들은 좋아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전혀 아닌 것처럼 꼬리를 내리고, 강의실에서학생들 앞에서 제왕처럼
    권력자가 되는 감리교회 신학대학의 교수들의 행태는 사실 쉬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팔아 호구지책을 하면서 교수라고 폼잡는 한심한 인종들을 보면 참 역겹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김준우 교수님은 감게에서 목회자들과 소통하는 유일한 감리교 신학자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신학이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분의 이런 삶의 태도를 존경합니다.
     박선우  (2011-12-09 12:22:25 / 112.150.44.150)   
    김준우 교수님도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메시야 예수를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시면 논조가 달라질 것으로 믿습니다.
    아직 주님을 직접 만나고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고, 그분의 인도 지도에 복종하는 삶이 실제로 되어지지 못한 분들이 교회의 선생과 목자가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전에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물든 모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님이 사모님이 암에 걸려 죽게 되자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하면서 치유를 위해 기도하다 난생 처음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 예수를 만나고, 자신의 신학을 통째로 버리고 새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어느 목사님께 들은 적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 신학 이전에 체험적 영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2011-12-09 12:33:49 에 "박선우(grace)" 에 의해 수정됨
     민관기  (2011-12-09 12:28:53 / 114.204.90.121)   
    생각은 많고 감동은 적고 마음은 굳어있고.. 체험안됨.
    반대로 생각이 없고 감동은 많고 마음이 비어있다면 체험됨.
    근데, 마음을 비울 방법이 없거든.
     민관기  (2011-12-09 17:00:34 / 114.204.90.121)   
    김준우 교술 전혀 존경하지 않지만 존경하는 선배들이 해임당하는 지경에서 구출하기 위해 단식이며 농성이며 한다기에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지만 일주일 여를 안산에서 상경하며 농성에 참여하며 일이 해결되기를 바랬고..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던차 그 때가 아마 2005년경?? 감리교회 사태가 불거진게 2008년?인가에서 2009년으로 넘어서인가 감게에 김준우란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 거의 1년을 그 김준우와 이 김준우가 동일인물인지를 파악못하던 즈음 어떤 동기목사님이라는 분에 의해 동일인물임을 정확히 파악. 오늘에 이르름.

    그 때 생각. 참 안된 인물이군. 자길 위해 수십명의 목회자들이 긂고 거시기하길 몇날며칠인데 인사사례도 전혀 없었고 게시판에 등장하며 갖은 주장과 홍보를 하며 본글은 쓰고 댓글은 안쓰고 댓구도 안하며 주장만하더니 누가 누군질 구분도 못하게 하던 인사.

    여기까지가 내가 김준우에 대한 인식.
    다른글에 조금의 부연을 할 생각.
     남재영  (2011-12-09 17:17:53 / 183.107.196.194)   
    민관기 목사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김준우 교수님께서 민목사님 글 보고
    민목사님께 먼저 전화라도 해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대 교수들-감게에 올라 온 글은 다 읽으면서도
    수준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런지-사실 지들 수준도 별거 아니면서
    감게에는 얼씬도 안하는 것처럼 처신하는
    잘난 신학교수들에 비하면
    그래도 어쨌든 감게에서 만난 분이 김준우교숩니다.

    김교수님을 대변하고 변호해야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다만 이런 기회로 민목사님의 뜻이 잘 전달되어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민관기  (2011-12-09 17:30:43 / 114.204.90.121)   
    그러쵸. 아무튼 등장은 조은거라 봐요.
    언뜻 강화에서 뵜던거 가타요. 모자쓰고 안 쓰고 걸으며..
     민관기  (2011-12-09 17:34:27 / 114.204.90.121)   
    처음 이름이 등장했을시 같은 이름인가 그 분인가? 의아했지만 그냥 지켜봤고요. 아닌거 같기도하고 긴거 같기도하나..
    등장하며 나 누구 어떤 인물인가를(왜냐? 홍보성 글을 많이 쓰고 특히 책 홍보를 하니까. 장사꾼이란 의민 전혀 아님)아주 조금만 눈꼽만큼이라도 표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더랬습니다.(누구에게 물어봐 확인하거나 주소록 같은건 전혀 참조안 합니다)
     남재영  (2011-12-09 19:05:34 / 183.107.196.194)   
    민목사님!

    아마도 이번에 김준우 교수님께서
    민목사님이 지금 지적하시는 부분을 깊게
    숙고 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피차에 그리고 감리교회를 위해서 이런 마음들이
    잘 소통이 되고 서로 공명이 되기를 기대하고요.

    감사합니다.
  • ?
    한기연 2011.12.15 20:21
    김준우 교수의 동정녀 탄생 이해에 대한 반론
    이 름 박기창  
    날 짜 2011-12-14 23:25:23
    조 회 251
    글자크기
    김준우 교수의 동정녀 탄생 이해에 대한 반론


    1. 들어가는 글
    1) 본인은 김준우 교수의 동정녀탄생에 대한 개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하여 교리와 장정에 나타난 단서들을 근거로 공개질의를 한 바 있다. 교수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문제를 놓고 신학적 윤리적 면에서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 사상지에서 동정녀 탄생은 은유적이며 정치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감게에는 동정녀 탄생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으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고 언급하였다.

    2) 또한 동정녀 탄생을 문자적인 면에서 생물학적 그리고 산부인과적 진리로 믿는 것은 '몰상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교역자들을 폄하하고 자신의 생각을 거듭 주장하면서 문자적 해석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3) 본인은 위와 같은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기독교 대한감리회가 교리적으로 믿고 있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단서들을 교리와 장정을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특별히 감리회 교역자를 배출하는 신학교 교수로써 동정녀 탄생이해에 관한 위와 같은 입장은 감리회는 물론 기독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감리회에 속한 감리교도로서 반론을 제기하면서 본인은 문제제기를 통해서 교수의 동정녀 탄생이해에 대한 사실여부를 감리회 관계위원회에서는 속한 시일 내에 교수를 통해 재확인한 후 감리회의 분명한 입장을 밝혀주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쓴다.

    2. 교리와 장정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 이해
    1) 교리와 장정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에 관한 단서 1
       ① 교리와 장정 제 1편 역사와 교리 제 2장 교리 제 1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제 14단 서두에서
        "기독교 대한 감리회는 모든 개신교들의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함께 고백한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를 두며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고대 교회는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확정하고 니케아(325년), 콘스탄티노플(3811년). 칼케돈(451년) 신조들과 사도신경을 기독교 신앙의 표준으로 확립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을 선포하고 기독교 교리의 정통성을 보존하려는 교회의 노력이었다."고 언급하면서

      ② 교리와 장정 제 1편 역사와 교리 제 2장 교리에 나타난 단서 중 종교 강령 제 16단 제2조에서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이 참 사람이 되심이라는 제목으로
       "성자는 곧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요 성부와 동일하신 본질인데 복 받은 동정녀의 태중에서 사람의 성품을 가시셨으므로 순전한 두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과 사람의 성품이 나뉘지 못하게 일위 안에 합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시오 참으로 사람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신데 참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기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매장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제물이 되시었다. 이는 사람의 원죄만 위할 뿐 아니라 범죄한 것까지 위함이시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2) 교리와 장정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에 관한 단서 2
      ① 교리와 장정 제 2편 헌법 제 1 장 총칙 제68단 제 3조 (교리)에 보면,
        "감리회 기초교리는 기독교 개신교파가 공통적으로 믿는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다. 이 교리는 존 웨슬리의 설교와 강론 그리고 찬양시집과 우리 교회의 신앙적 개요, 교리적 선언 및 신앙고백에 설명되어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② 그리고 위와 같은 교리의 포괄적인 내용 중에는 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인 신앙고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교리와 장정 제 2장 교리 제 3절 우리의 신앙고백 제 52단 2 감리회 신앙고백(1997) 2번에서는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시므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3. 문제 제기
    1) 위와 같은 교리와 장정에 나타난 교리적 단서들은 한결같이 동정녀 탄생이 생물학적이며 산부인과적임을 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수는 감게를 통하여 몇몇 학생들에게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믿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들은 웃으면서 “생물학적인 사실로 믿는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쫓겨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기술하면서 “신학생 시절부터 학생들은 자신들이 정직하게 믿는 진실을 증언하기 보다는 생존을 위해 진심을 숨기는데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였다.

    2) 이는 신학생 모두가 교수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는 양 신학생들을 매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교수는 전공분야에서 어떤 학문이든 교수하고 주의와 주장을 강론할 수 있다. 이는 교수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학설이 옳다”라고 교수할 때는 자신과 신학교가 소속된 종교단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3) 어느 종교단체에 속한 신학교 교수로서는 이런 면에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본다. 혹자는 교리와 학문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당연한 조언이다. 본인도 공개질의 마지막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는 교수의 주장이 학문을 넘어선 신앙고백일 때는 자신이 속한 종교단체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학교가 속해있는 종교단체에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다는데 있다.

    4) 본인은 동정녀 탄생에 대한 교수의 이해가 교수의 신앙고백이라고 이해되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본인의 이해가 옳다면 이와 같은 교수의 입장을 감리회는 어떻게 정리하여 기독교계로부터 이단성 시비를 불식시켜야 하겠는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본다. 거듭 지적하지만 앞으로 속한 시일 내에 교수로부터 동정녀 탄생이해를 확인한 후 본인의 우려가 사실이라면 감리회 안에 있는 ‘총회’나 ‘신힉정책위원회’에서는 입장을 정리하여 보도를 통해 밝혀주시길 간절히 기대한다.    

    4. 나오는 글
    1) 위와 같은 내용들을 기술하면서 행여나 감리회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많은 고심을 하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위와 같은 내용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만일 동정녀 탄생이 은유적이고 정치 신학적이라면 교리와 장정 제 1 편 역사와 교리 제 2장 교리 16단 2조에서 “참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매장되시어”라고 기술하고 있는 예수님의 실체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2) 그리고 제17단 제 3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리스도께서 과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완전한 인성이 붙은 모든 것과 육체를 다시 가지시고 천국에 오르시며 마지막 날엔 만민을 심판하시려고 재림하실 때까지 앉아계시다.”라는 생물학적인 부활의 주님의 실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3) 이는 기독교의 근본을 뿌리째 흔드는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기에 그리고 한 교수에 의해 쓰인 글에 의해서 125년의 역사를 지닌 감리회가 행여나 이단으로 비춰져서는 안 되겠기에 더욱 위 글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비난의 글이 있다 해도 결코 멈춰서도 안 된다고 다짐했다.  
    4) 끝으로 본인은 거듭 조속한 시일 내에 감리회의 책임 있는 회나 위원회에서는 김준우 교수로부터 동정녀 탄생이해에 대한 확인을 거쳐 분명한 입장을 157만여 감리회 성도들께는 물론 기독교계에 밝혀주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

    새천년교회 박기창목사
  • ?
    한기연 2011.12.15 20:22
    [re] 김준우 교수의 동정녀 탄생 이해에 대한 반론
    이 름 송기수  
    날 짜 2011-12-15 14:00:08
    조 회 69
    글자크기

    박기창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중요한 점에 대해서 문의 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지금 감리교 교리적 선언의 내용을 생물학적이며 산부인과적이라 주장하셨습니다. 이는 신앙적 내용과 과학적 내용을 일치시키는 주장으로 감리교 교리적 선언을 신앙고백이 아닌 과학적 가설 정도로 폄하시키는 심각한 문제라 사려됩니다.

    신앙고백은 내가 또는 교회가 주님과의 영적 교감을 통한 체험을 통해 주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 그리고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절대적인 것으로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경험한 사람은 구원의 경험,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경험, 생명을 얻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즉 신앙고백은 앎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적 언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이성주의 언어인 과학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학과 산부인과적인 언어는 과학의 언어로서 경험적이며 과학적 검증을 통한 실증이 전제되어진 언어입니다. 이 안에는 절대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주장도 가설이 되어지고 이론이 되어질 뿐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이론인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하여 세상에는 빛보다 빠른 속도는 존재치 않는다는 주장이 이번에 어떤 실험을 통해 반박되었다고 합니다. 즉 반박당하지 않는 어떠한 과학적 가설도 존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목사님께서 주님의 독생자 출생을 생물학적이며 산부인과적이라 주장하신다면 이제 주님의 탄생에 대한 과학적 검증을 통해 실증해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신앙 고백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믿고 고백할 필요가 없이 그냥 실험을 통해서 입증해 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폐기될 수 밖에 없는 가설이 됩니다. 즉 목사님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앙고백을 상대적인 과학적 가설로 폄하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리교의 신앙고백이 언제든 과학적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지지 못한다면 폐기될 수 밖에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십니까? 우리를 자유케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 이제 과학적으로 검증을 받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 수정이 가해져야 하는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까?

    19세기의 과학적 언어에 근거한 모든 주장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떠한 주장도 신앙고백과 같은 절대적인 언어가 되어질 수 없습니다. 실험 또는 검증을 통해 반론이 제기되어 그 가치를 잃는다면 폐기되어야 하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백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 고백이 김준우 박사님과 같은 비신화화를 통하여 변증되어질 수 있고 또 19세기 언어에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는 과학적 사실로 변증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고백은 결코 과학적 검증을 통해 입증되어질 수 있는 지식(knowledge)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여 추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내가 또는 공동체가 경험한 것이며 과학적으로 실증되어질 수는 없지만 고백(confess)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통해 주님을 믿고 구세주로 고백한다면 주님의 약속처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고백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지속적인 교회 내의 기독교 신앙 고백에 대한 과학적 검증에 우려를 표합니다. 19세기 이성주의 시대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내용이 과학적 사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신화를 담은 고전 정도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내용이 과학적으로 충분히 실증해 낼 수 있다 하여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함으로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 아닌 과학적 가설로 격하시켰습니다. 비록 그 결과는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주전 천년 경부터 주후 100년경까지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을 19세기의 과학적 언어로 재단한 것입니다. 모두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를 따진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 한가 만을 따진 것입니다. 즉 과학적 가설로 인정할만하냐 안하냐를 따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이라 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과학적 사실, 객관적 역사 기록보다는 주님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한 소개와 그 분을 통해 어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21세기의 언어로 주님의 말씀을 변증하여야할 의무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을 추구하려는 신학자들의 노력에 기대를 합니다. 바라기는 학교에 계시는 교수님들을 비롯하여 교회를 섬기는 많은 신학자분들 목회자분들께서 전혀 비전공인 과학적 검증에 목매는 것이 아니라 전공인 말씀 선포에 최선을 다하여 21세기의 살아있는 말씀을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장병선  (2011-12-15 16:54:51 / 218.159.250.22)   
    송기수목사님이신가요?
    정곡을 찌르는 말씀에 공감과 감동을 표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할 때 마다 전율을 느끼며, 주님에 대한 숭경의 마음을 가집니다.
    한편 신학자들의 정직하고 치열한 이성적 탐구에 깊은 존경심을 갖습니다.
    도그마에 매여, 안전한(?) 신학에 안주하는 학자들의 지적 게으름에는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 ?
    우아 2011.12.20 23:26

    참 많은 얘기들이 오갔군요. 평소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을 애독하는 독자로서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이미 희망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사랑해서 구원해야 한다고 하는 불신자(?)들과 더 이상 소통하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고 고백한 1세기 그리스도인들(마태 공동체)의 치열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그 고백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났다는 고백은 예수가 그들의 메시아요 하느님이라고 하는 그 신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나지 않았다고 한들 예수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통해 본 하느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그런 강력한 하느님도, 위대한 하느님도 아니었으며 사생아라는 오명 속에 태어난 나약한 아기였으며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갔던 사형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런 하느님을 원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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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독교윤리 세월호참사 -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 133 file 한기연 2014.04.18 37922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생태대를 향한 출애굽 - 녹색의 세계관과 생태주의 인문학 아카데미 29 file 한기연 2013.11.12 33944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 시대의 교회의 역할 17 file 한기연 2013.08.24 34447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와 예수 살기 / 하늘이 낸 참사람들 11 file 한기연 2013.03.13 34355
공지 기독교윤리 엘리 위젤, <하나님에 대한 재판> 서평 1 file 한기연 2012.07.12 6732
공지 기독교윤리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한국 교회의 평화운동 자료 33 한기연 2012.04.24 57310
공지 조직신학 하나님이 계시냐고요 / 담임선생님 예수 / 홍정수 4 한기연 2012.04.11 89368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와 대멸종 시대에도 하나님은 전능하며 예수는 구세주이며 교회는 거룩한가 / 김준우 31 file 한기연 2011.12.12 97587
» 역사적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 / 김준우 12 file 한기연 2011.10.23 62128
공지 조직신학 나의 종교경험 -> 나의 복음 -> 나의 신학을 일관성 있게 한 마디로 정리하기 4 한기연 2011.08.21 124912
공지 실천신학 대안교회의 가능성 / 한성수 1 file 한기연 2011.08.02 128774
공지 기독교윤리 핵위험 사회 치닫는 대한민국 1 73 한기연 2011.03.28 174276
공지 조직신학 감리교 종교재판의 전말/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6 file 한기연 2010.11.22 141873
공지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담론의 종교문화사적 의미 / 김준우 4 file 한기연 2010.11.14 145013
공지 역사적 예수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 7 한기연 2010.10.28 129270
공지 기독교윤리 2015년까지 모든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라! 14 file 한기연 2010.10.02 165912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 26 file 한기연 2010.06.11 163398
공지 조직신학 예수, 그는 우리에게 대속자인가 선생인가 / 홍정수 2 한기연 2010.04.12 15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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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한기연 2010.03.27 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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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가정사회소식 소득 5분위 배율 비교 25 file 한기연 2009.09.13 182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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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1 교회사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한기연 2019.01.01 56
1040 교회사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1961) 한기연 2019.01.01 53
1039 교회사 회칙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한기연 2019.01.01 55
1038 교회사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한기연 2019.01.01 35
1037 환경소식 정부 환경정책이 주는 신호 / 윤순진 한기연 2018.10.26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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