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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9.04.14 23:04

    발제 1. 세월호 트라우마와 목회자의 성찰

    “세월호 참사와 나”
    박인환 목사(화정교회)

    1. 2014.4월 16일 아침
    참담하고 암담할 뿐이었다.


    2. 비상식적인 일들
    세월호 참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비상식적인 일로 가득하다: 선원들. 해경의 태도, 가짜뉴스, 집권세력의 진상규명 방해, 세월호를 정치적 문제라고 말하는 사회의 분위기...
    가장 비상식적이고 엽기적인 것은 교회의 태도였다. 설교시간에는 (심지어 세월호 유족이 있는 교회 목사마저도) “세월호는 교통사고일 뿐인데, 세월호 가족이 정치화되었으며 야당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식의 설교를 가장한 폭력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기독교인 유족들 중 많은 수가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 성경책을 찢어버리고 아주 교회 밖으로 나가버린 이도 있다. 목사의 설교가 충격적이고, “아이가 천국에 먼저 갔는데 왜 아직까지 울어?”라는 식으로 위로한다는 교인들의 말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유족들이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을 교회가 용납하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단죄하였다. 유족을 노골적으로 쫓아낸 교회들도 있다. 세월호 유족 때문에 교회 분위기가 침울해지고 교회부흥이 막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현이엄마가 교회에서 쫓겨난 얘기는 참담하다. 창현이 엄마는 아이를 잃고서도 13년 동안 해오던 주일학교교사를 계속할 정도로 열심 있는 집사였다. 광화문에서 삭발을 한 그 주 주일아침에 주일학교 아동부장으로부터 “집사님, 주일학교교사를 그만 하셔야겠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왜요?” “머리를 삭발한 채로 아이들에게 나타나면 아이들이 놀라잖아요?” “그래요?,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알았어요. 목사님의 뜻이 그렇다면 순종해야죠.” 그런 대화를 하고 11시 예배를 위해 예배실로 올라간 창현이 엄마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섬뜩했단다. 그 날 창현이 엄마가 헌금위원이었는데 자기가 헌금바구니를 돌려야 하는 줄에 사람이 한 명도 앉아 있지 않더란다. 그 날로 창현이 엄마, 아빠는 그 교회를 나왔다. 지난 4년 이상 안산분향소 예배실에서 드려 온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온 그의 모습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으나 한국교회에 대하여는 신뢰하지 않는 유족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3. 세월호 유족들의 트라우마

    세월호 유족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이지만, 유족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청운동에서 유족들이 노숙농성할 때 포도 몇 박스를 들고 간 적이 있다. 우리교회 유경근대변인을 앞세웠다. “우리교회 목사님이십니다. 포도를 가져오셨어요.” “.....”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는 유족들의 분노어린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바다에 수장되는 아이들의 죽음을 TV중계로 지켜만 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괴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과 믿음이 무너진 데서 오는 절망감이 유족들에게 찾아온 트라우마의 첫 원인일 것 같다.
    구조에 책임이 있는 정부가 구조를 하지 않고, 구조를 방해하고 유족들을 괴롭힌 것도 상처이지만, 불의한 기득권자들 편을 들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괴롭히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권력자들이 만들어 퍼뜨린 세월호에 관련한 가짜뉴스들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일반시민들 앞에서 절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더 크게 절망한 것은, 자녀들만이 아니라 이웃마저 없어졌다는 데서 오는 허무함이었다. 참사 1주일 후, 어느 기자가 단원고 희생 학생의 옆집에 사는 할머니에게 “옆집 아이가 죽었는데 지금 마음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할머니의 대답은 “어휴, 옆집 아이는 그래도 효도하고 죽었지요. 우리 같은 서민이 언제 5억을 만져봐?”였다. 참사 이후에도 직장을 다니던 어떤 엄마는 자기가 듣는 것도 모르고 “쟤는 좋겠다. 보상 많이 받아서”라며 수군대는 직장 동료들의 말에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이웃들이 아이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는 배보상 받을 돈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아파하는 이웃은 보이지 않고 돈만 보였던 것이다.

    4. 교회의 해석과 반응

    거기에 더하여 세월호에 대한 교회의 해석과 반응은 놀랍다. 초기 유명 목사들의 개념 없는 말들은 차치하고라도 교회가 지난 5년간 세월호와 관련하여 보여준 태도가 유족들에게 꾸준히 상처를 주고 있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다니던 교회는 37개 교회이다. 그런데 5년째 이어져오는 ‘세월호유족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에 한 번이라도 온 교회는 네 개 교회로 파악되고 있다. 그 중 한 교회의 목사는 아이를 잃은 당사자이다.(자발적으로 찾아온 큰 교회는 하나도 없다) 얼마 동안 같이 울어주고 장례를 치러주는 것으로 교회의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세월호안산분향소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은혜와진리교회는 참사 2년째 되던 해에 세월호뱃지를 달고 교회에 나온 청년을 내쫓았다. 안산에서 세월호와 관련한 집회를 열 때마다 소리를 지르거나 방해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손에 전도지를 들고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 4주기 기억예배에 참석한 (희생자가 있는) 어느 큰 교회 목사가 마스크를 쓰고 고개 숙이고 예배에 참여(교회에서는 기억예배 광고를 하지 않고 혼자 왔다)한 사진을 보면서 그것이 성장신학이라는 가짜에 심취해 있는 한국교회 목사들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였다. 세월호를 얘기하면 교인들이 떠나갈까봐, 장로들이 싫어할까봐, 교회부흥 안 될까봐... 그런 목회가 과연 예수와 관계있는 것일까? 나도 교회에서 위기적인 순간을 경험하였다. 만 2년 지난 어느 날, 장로님들이 “강단에서 세월호 얘기 그만 하라”고 항의방문하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세월호 유족은 한 가정인데 나머지 60가정은 상관없지 않느냐”고 하였다. 화가 났다. “예수 믿는 사람들 맞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냐, 내가 30여 년 동안 당신들에게 그렇게 설교했느냐, 다른 교회도 아니고 희생자가 있는 화정교회의 장로들이 그따위로 얘기하느냐, 그런 얘기 오늘 한 번 들은 것으로 끝내겠다. 더 이상 하지 마라.” - 이틀 후에 한 장로님이 와서 사과하였다.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 후로 더 이상 딴 소리가 없었다. 만약 그 때 내가 장로들에게 굴복했다면 화정교회는 더 이상 세월호 유족들과 가까이 하지 못했을 것이고 유가족인 박 전도사네도 교회에 나올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우리교회는 세월호 때문에 떠난 교인은 하나도 없다. 그 후 교회가 오히려 부흥되었다. 오히려 세월호에 무관심한 교회 때문에 실망한 젊은 가나안 교인들이 찾아왔다.)

    5. 자신을 돌아보다

    세월호 참사 당일, 팽목항에 내려가지 못하고 저녁시간에 예은이네 집에 가서 엄마를 만났다. 그 와중에서도 기도해달라고 울부짖는 예은이엄마의 손을 붙들고 기도는 하였지만 태어나서 가장 난감하고 민망한 시간이었다. 예은이가 일주일 만에 올라오고 장례를 치렀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 때 무슨 설교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장례식을 통하여 예은이 부모나 자매들을 조금도 위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왜냐면 목사인 나 자신부터가 위로받을 수 없었으니까. 예은이 장례식을 치른 후부터 죽음과 관련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1)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 2) 삶과 죽음은 같이 있다는 것.(현생과 이생을 분리하지 말아야.) 3) 미화된 천국 버리기 등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을 유족들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는다. 주님 잘 섬기는 자가 형통하다”는 설교를 수도 없이 하였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나의 그런 설교를 무참히 박살내고 말았다. 성장과 경쟁과 세속적인 축복이라는 화두 속에 머물러 있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비판하며 살아왔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화두에서 100%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과연 예수의 제자답게 살았는가를 반문하였다.

    6. 세월호활동을 시작하다

    내가 세월호와 관련한 활동들을 하게 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동기에서다.
    1. 우리교회 예은이를 기억하였고, 예은이의 희생 앞에서 슬픔과 분노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모들의 고통을 보고 그 곁을 조금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2. 세월호를 대하는 비상식적인 일들, 특히 교회(목사들)의 태도에 분노하였다. 남의 일처럼 아무런 말을 아무렇게나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해대는 목사들의 문제는 대형교회의 목사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안산 지역의 목사들마저 별로 다르지 않아보였다. 악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가 예수 믿는 집단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받기 원하는 무속집단 같아 보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예은이 아빠에게 내가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하니 “특별법제정을 위한 서명이 저희에게는 힐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부터 미친 듯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10,800명 받았다.
    어느 날 예은이엄마 박전도사에게 “교회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유족들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겠느냐고 물으니 주일날 교회를 가지 못하고 분향소에서 방황하는 유족들을 위해 와서 예배를 드려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세월호유족들과 함께 드리는 분향소예배’이다.
    처음에는 안산지역의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찾아오도록 하였는데, 전통적인 교리에 익숙해 있는 설교들이 오히려 유족들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외연을 넓혀 유족들에게 상처 되지 않을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가 있는 교회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렸다. 영월지방목회자들도 그 먼 거리에서 찾아왔다.
    오는 목사들에게는 교훈적인 설교, 섣불리 위로하는 설교(“애들이 천국갔으니 슬퍼 말라” 등) 같은 것을 하지 말라고 미리 부탁하였다. 예배 후 유족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울고, 공감하며 유족들과 함께 하겠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7. 세월호교회

    초기에는 교회를 떠나거나 쫓겨난 유가족들을 교회로 다시 돌아가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면 그들이 믿던 하나님(기도하면 들어주시고 구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교회가 죽었는데 다시 돌아가 봐야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난 5년의 세월동안 세월호 기독교인 유가족들의 변화이다. 교회와 목사들에게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긴 했지만, 고난의 5년 세월 동안,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이다. 아이들의 희생과 자기들의 삶을 예수의 십자가신학 안에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인 유족들은 매주 목요일 장신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목요기도회, 감리교회가 주축이 된 주일 오후 5시의 ‘찾아가는 예배’에 참여하였고 그들 스스로 매주 수요일 아침 성경읽기 모임을 가졌다.(분향소 폐쇄 때까지. 이것은 박은희 전도사가 신학을 공부한 이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읽기 모임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 크게 성숙하여진 것 같다. 그들이 ‘찾아가는 예배’ 후에 하는 발언을 듣자면 마치 학문이 깊은 신학자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교회와 목사들에게 실망하여 교회를 떠났으면서도 성경에 매달리는 그들의 모습이 짠하였다. 기존의 기복적이고 이원론적인(내세를 강조하는) 한국기독교의 설교는 이제 유족들에게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유족들은 지금도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세월호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언젠가 박은희 전도사에게 “목사안수를 받고 세월호교회를 담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적이 있다. 세월호 가족들을 다니던 교회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 보다는 고통을 통해 체험한 그들의 하나님체험과 믿음이 또 다른 한 신앙공동체로 탄생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있다.

    8.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에 머물러있는 사람들

    유족들은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416목공소에서 같이 일하는 미지아빠는(착한 사람이다.) “5년이 됐는데 분노가 더 치밀어요. 답답해 미칠 것 같아요. 그냥 죽이고 싶어요.”라고 말하였다.
    모두 병을 얻었다. 아이들의 부모 가운데는 아직 쉰 살이 되지 않은 이들도 있는데, 이들마저도 돋보기를 써야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많다. 너무 울어서 시력이 나빠졌고, 스트레스가 심하다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무기력증 현상이 나타나고 우울증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도 많다. 수면제가 아니면 밤잠을 자지 못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마음의 병뿐 아니라 각종 육체적인 질환에 모두 시달리고 있다.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실수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은 배보상 받은 얘기를 하면서 “이제 다 끝났지?”라며 묻는 목사들이 많다. 돈이면 끝나나? 보상금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도 많다. 아이의 생명 값인데 어떻게 쓸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다. 참사초기부터 오늘까지 유족들의 싸움은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모든 분야에서의 반성과 새로운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이거 국민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

    9. 출구?

    지난 5년 동안 유족들이 극심한 고통과 트라우마 가운데서도 열심히 버텨왔다. 그 힘은 1) 가족들이 모여 있는 것 2)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것, 3) 아픔 당한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 등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출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지만, 교회가 아픔당하는 자들의 곁에 서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또 한 가지는 교회의 언어를 정직한 언어로 바꿔야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헛되니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위로받자!” 이런 거 안 된다. 성령, 구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정의 평화와 같은 기본적인 교회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자꾸 ‘하나님의 뜻’을 이상한 데다 붙여버리면 책임질 자들과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종교언어가 혼잡되어 있으니 목사들이 무당이 되고 교인들이 이상한 이원론적인 신앙에 빠지고 변질되고 세상 사람들과 관계없는 이상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아직도 세월호 뱃지를 달고 다니냐?”며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들 못지않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 목사는 세월호 희생자가 있는 교회의 목사이니까 세월호 관련 활동을 아직 하는 것을 이해해 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럼 희생자가 없는 교회의 목사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인가? 이런 것만 봐도 오늘 목사들이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화순 목사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두 발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안다.”
    그들 곁에 서는 것은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 부끄러움과 변화에의 책임의식을 갖기 위함이다.
    비록 소수이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과 같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아파하는 자들에게 공감하고 발걸음을 그 곁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서려고 하는 소수의 의로운 자들의 믿음이 세월호 유족들의 치유의 시작점이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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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9.04.14 23:07

    발제 3: 성토요일의 성령론
    - 박시형 목사 (야곱의 우물 교회)

    트라우마를 증언하기 위해

    - 트라우마의 고통은 떠나가지 않는다.
    -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고통과 다르게 사건 당시에 경험했던 것들이 되살아나는 특징을 갖는다. 죽음의 사건이 삶 속에 지속되며 죽음과 삶이 뒤섞여 버린다.
    - 사회적 트라우마를 지켜보는 대중들은 시간이 갈수록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스, 세월호 사건 이후의 한국사회)
    - “트라우마를 연구하는 일은 생존자들이 겪은 끔찍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것을 뜻한다.” (Judith Herman)

    기독교 승리주의

    -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삶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 승리주의는 수난을 대충 얼버무리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
    - 승리주의는 고난을 극복하는 ‘부활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 승리주의는 계속해서 남아 있는 트라우마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제자들이 겪었던 트라우마

    - 제자들은 예수의 참혹한 죽음을 직면했다.
    - 막달라마리아가 경험한 트라우마 (요 20:11-18)
    - 깊은 슬픔 속에 있었다.
    -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는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경험한다.
    - 막달라 마리아는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 예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 예수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돌아보면서 예수를 알아본다. (대화를 나누면서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 성경 본문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 마리아는 예수를 만질 수 없다.
    - 마리아는 시각과 촉각으로는 예수를 증언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는 증언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 마리아는 예수의 현존과 부재가 공존하는 상태에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예수를 만난다.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을 통해 예수를 만날 수 없었다.)
    - 애제자가 경험한 트라우마 (요 20:1-10, 21:7, 21:15-24)
    -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발치에 서 있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
    - 빈무덤을 처음으로 들여다 본 사람 중 하나이며 빈무덤에 들어간 후 믿게 되었다.
    - 중요한 목격자임에도 익명으로 등장한다.
    - 부활 이후 애제자는 먼발치에서 예수를 알아본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예수는 베드로에게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이야기하고, 애제자는 “그가 살아 남아 있을 것”(메네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요 21:22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 애제자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증인으로 남는다. (요 21:24, 목격자, 증인, 살아남은 자)


    스페이어의 환상과 발타자르의 성토요일 신학

    - 아드리엔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r)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와 함께 요한공동체를 세웠다. 스페이어는 환상을 통해 발타자르의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 스페이어는 1941년부터 25년 동안 매년 성금요일 오후부터 부활절 아침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지옥에 내려가는” 환상을 경험했다. 발타자르는 이를 통해 성토요일의 의미를 발견하게 했다. 발타자르와 스페이어에게 성토요일은 하느님께 버려진 현장이다.
    - 발타자르는 지옥에서 성자는 죽음에 넘겨졌고(paradidonai, 요한복음의 어휘), 죽은자들과 함께 실제로 죽었으며, 그들과 함께 버려짐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페이어의 환상의 영향이었다.
    - 발타자르는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알 수 없는 혼돈의 한 방울(a chaotic drop)’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쏟으신 사랑 뒤에 ‘남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램보는 이것이 강력하지 않은 사랑, 지치고 무력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 성토요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죽음과 부활 사이, 지옥 심연에서의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 위르겐 몰트만과 카조 키타모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전통적인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는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 발타자르는 하느님의 고통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복음서의 삼위일체 이야기, 지옥으로 내려가신 그리스도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다른 신학자들과는 달리 십자가의 죽음을 하느님의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사랑 이야기라고 보았다.
    - 지옥에서 성자는 버림받은 이들을 영웅적으로 구원하는 대신 그들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사랑이 없는 곳으로 여행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 스페이어는 환상 속에서 그리스도가 성토요일에 겪으신 수동적인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
    - 그러나 발타자르와 스페이어가 지옥에 내려가신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방식은 여전히 ‘순종’과 ‘자기희생’이라는 십자가 중심적인 증언 모델이다.
    - 발타자르와 스페이어의 성토요일 묘사에서 성령은 아주 조금 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둘에게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연결이 가장 약해져 있는 때에 둘 사이의 사랑을 공고히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잇는 사랑의 끈)
    - 그러나 지옥의 심연으로 확장된 삼위일체의 사랑은 ‘승리하는 사랑’이 아니다.
    - 발타자르는 예수를 지옥 심연 위에 놓인 “파멸과 소생을 연결하는 실”이라고 선언한다.
    - 발타자르는 지옥 구렁 사이를 이을 수 없는 “짧은 밧줄”만이 존재하며 이것을 “하느님 손에 건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발타자르는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발타자르에게 신비로 남아 있다.
    - 발타자르는 새로운 삶은 하느님께 버려진 죽음과 단절되기보다는 죽음의 흔적을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과거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 꿈과 같다. … 당신이 알던 것이라고는 주님이 돌아가셨고, 당신이 함께 나누던 잔잔한 기쁨의 삶도 죽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 램보는 발타자르와 스페이어의 그리스도론적인 성토요일 신학을 성령론적으로 발전시킨다.
    - “마지막까지 쏟아져 나온 사랑이 남긴 것은 이제껏 새 창조를 향해 무기력하게, 멍한 채로, 힘겹게 졸졸 흘러간다.”
    - 램보는 지친 모습으로 살아남은 사랑이 성령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간(middle) – 성토요일

    - 램보는 트라우마 생존자가 살아가는 죽음과 삶 사이, 죽음과 삶이 뒤섞인 공간을 “중간”이라고 이름 붙인다. 수난과 부활 사이의 성토요일은 죽음과 삶이 뒤섞인 “중간”이며, 둘 모두와 연결된다. (수난과 부활, 죽음과 삶)
    -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성토요일은 죽음에서 삶으로(수난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에 불과했고, 그 날에 대한 진술은 묻혀져 있었다.
    - 램보는 고통을 대충 얼버무리고 승리로 넘어가는 성급한 구원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죽음을 이긴 부활”이라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새롭게 보도록 제안한다.


    중간의 성령

    - 창으로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요한복음에서 물은 생명과 연결되고, 결국 성령과도 연결된다.
    - 십자가에서 예수는 “영을 넘겨 주셨다.”(요 19:30) 공동번역에는 “숨을 거두셨다”, 개역개정에는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파라디도나이’(paradidonai, 넘겨주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예수가 숨을 내쉬며 명시적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활 이후지만(요 20:22), 성령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제자들이 있는 죽음의 공간(램보가 중간이라고 부르는 성토요일)으로 넘겨졌다.
    - 중간의 성령은 십자가 사건 및 부활 사건과의 연결 끈을 놓지 않지만, 성령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해체한다. 중간의 성령은 부활 이후의 성령이나 성령강림절의 성령과 동일한 모습이 아니다.
    - 몰트만의 성령론은 “생명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있다”고 주장한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부재한다고 보았다.
    - 램보는 하느님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토요일의 성령을 이야기한다. 램보에게는 성령을 생명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온전한 설명이 아니다.
    - 성토요일의 성령은 죽음과 삶이 뒤섞인 생존의 목격자이다. 끈질기게 지속되는 죽음을 증언하고, 살아남은 사랑을 증언한다.


    어떻게 구원이 가능한가?

    -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전통적인 구원 내러티브: 생명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했다.
    - 삶과 죽음은 정반대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삶과 죽음은 뒤섞여 있다.
    - 죽음과 삶이 뒤섞인 트라우마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부활의 승리를 통한 고난 극복을 이야기하는 승리주의는 트라우마 생존자들을 더욱 절망으로 빠뜨린다.
    - 몰트만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전통적인 승리주의를 해체했다.
    - 그러나 ‘고통’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희생을 미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고통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내러티브는 희생을 미화하고 강요했다.
    - 중간에서 볼 때, 구원의 원천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한 가운데 버티고 있는 사랑이다.
    -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은 집요한 죽음의 고통 속을 살아간다. 성령은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목격하면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


    마지막 질문: 우리는 이런 울부짖음을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을까?

  • ?
    한기연 2019.04.16 20:14

    발제 4: <세월호 5주기의 시간에 셸리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를 읽고:
    성토요일의 성령론과 한국 여성신학>

    이은선(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1. 시작하며

    세월호 5주기, 사순절 기간에 아주 귀한 책을 읽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이 책을 지은 셸리 램보라는 미국의 여성신학자, 그 책을 자기 삶의 경험과 연관시키며 잘 번역해주신 번역자 박시형 목사님, 그 램보라는 여성신학자를 키운 나의 ‘동료 같은’(?) 여성신학자 캐서린 캘러 교수, 램보나 캘러 교수 등의 미국 여성신학자로 하여금 그와 같은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더욱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만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희생자들의 고뇌와 고통, 남긴 이야기와 기억 등, 많은 것들이 서로 ‘연결’(multiplicity)되어서 이 책이 나오게 되었고, 거기에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목사님의 수고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러한 성찰이야말로 특히 한국 신학계에서 고유하게 나올 수 있는 책이고, 또한 한국 여성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난해까지 4.16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해 온 성찰이 나름의 유사한 것이었다는 생각이었으며, 작년에 출판한 본인의 책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동연, 2018)이 있다. 여기서도 세월호라는 끔찍한 재난을 겪고 난 이후의 유족과 한국 사회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견지할 수 있을까의 물음에 천착하면서 특히 ‘부활’과 ‘몸의 죽음’, ‘영’ 등의 물음과 더불어 전통 신론과 기독론의 재구성을 탐색했다.
    특히 올해 그 5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71주기의 제주 4.3사건 이야기, 3.1 독립운동 백 주년을 맞이해서 지난 백여 년의 시간 동안 묻혀있던 각종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겪어온 삶이야말로 바로 서구 여성신학자 램보가 부각하고자 하는 성토요일의 삶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그들이 이때까지 살아남았고, 살아남아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다시 한 번 목숨과 얼굴과 안락을 감수하게 만든 힘과 숨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성토요일의 성령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는데, 그녀는 작가 김숨의 언어를 빌어서 지난해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라는 ‘증언소설집’을 남겼다. 만 14세의 나이로 속아서 일본군 전쟁터 위안소로 끌려가 겪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트라우마를 그녀는 올해 9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참으로 길게 견뎌내야 했으며, 그 증언집은 독실한 불교도인 그녀가 겪는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현대문학, 2018.
    그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그녀는 이후의 삶을 통해서 세계가 주목하는 여성인권운동가가 되었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성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녀는 불교도로서 살면서 자신이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도 다시 유사한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으며, 삶의 감각이 극심하게 손상된 채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들을 넘어서 죽는 순간까지 일본 정부의 공적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투쟁에 몸담았으며, 세상을 떠나면서는 가진 것을 재일 조선학교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 내놓으면서 자신의 저항과 투쟁과 경험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했다. 그녀 속의 ‘생리’(生理), 램보의 이야기로 하면 “숨”과 “사랑”의 “성령”이 그녀의 트라우마 속에서도 남아서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 교회와 목회의 현실은 한국 역사와 특히 근현대사만 하더라도, 그리고 오늘 우리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고통, 죽음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의 현실이 심각한데도 이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오직 승리와 부활과 성공과 빠름의 이야기만을 선호한다. 이 책의 가치와 소중함은 바로 이러한 현실로 인해서 빛나고, 특히 바로 며칠 전 강원도 고성과 속초 등에서의 산불과 같은 자연 재앙도 이제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초와 기본을 그 근간에서부터 다시 검토하기를 요청하고, 그러나 저자인 서구 여성신학자보다 훨씬 더 중층의 다원성과 복합적으로 누적된 트라우마와 접하고 살아가는 한국 여성신학자로서 그 제안의 한계와 불철저성도 보면서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밝혀보고자 한다.

    2. ‘트라우마의 렌즈’(lens of trauma)와 성토요일의 발견, 성토요일의 성령론과 요한복음의 부활 증언

    1) 사실 이미 오래전에 『교회와 제2의 性』,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 등의 저자인 미국 여성신학자 메리 데일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교리상에 나오는 모든 기독론은 ‘그리스도 우상주의’(christolatry)에 빠진 것이고, 일종의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은선, “페미니즘 몸담론과 역사적 예수 그리고 다원주의적 여성 그리스도론”, 『한국 여성조직신학 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4, 101-102쪽.
    그것은 지금까지의 기독교 그리스도 이해가 철저히 영육 이원론에 빠져서 그리스도의 몸성과 인간성, 역사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묻어두고 단지 그 신성과 영웅주의, 승리의 부활만을 강조해온 것이라는 비판이다. 램보의『성령과 트라우마』도 같은 비판적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의 기독교 복음이 신론과 기독론에 집중된 것을 넘어서 ‘성령론’의 시각에서 새롭게 보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성령론의 시각에서 신론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새로이 이해하려는 이러한 기도는 오늘 우리 시대에 만연하게 된 ‘트라우마’라는 ‘외상 증후군’과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우리가 겪은, 또는 겪을 많은 일이, 심지어는 죽음의 경험이라는 것도 단지 한 번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삶 속에서, 매일의 일상에서, 살아있음과 더불어 반복적으로 겪는 상처와 고통이라면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이 단선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자동으로 ‘부활’을 말하고, 막강한 힘의 담지자로서 저 어딘가 외부에 의심 없이 ‘존재’하는 신의 있음을 말한다든가, 또는 항상 승리로 이끄는 ‘요술 방망이’처럼 어떤 강력한 성취와 성공의 힘으로만 이해되는 ‘영’ 이야기는 더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런 정황을 다시 살피기 위해서 돌아보는 단어가 ‘성토요일’(Holy Saturday)이고, 이에 근거해서 저자는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구원 내러티브’를 다시 살피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2)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에 “신은 죽었다, 나의 내면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라는 언어로 ‘세월호 以後 교회’를 말해온 나 자신도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부각하는 ‘성토요일’에 대한 이상은 갖지 못했었다. 그래서 저자의 이 책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고, 그 성토요일에 대한 상상과 더불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또다시 새롭게 펼쳐지는 것을 느낀다. 저자 램보는 칼 바르트와 같은 세대의 스위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폰 발타자르(H. U. von Balthasar)의 ‘성토요일 신학’과 그 신학의 전개를 가능케 해준 여의사 출신의 평신도 여성 신도 아드리엔 폰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r)의 신비 체험에 주목한다. 스페이어는 1941년 이후 25년 동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지옥으로 내려가서 겪는 무시무시한 고독과 버림받음, 포기를 환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해 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통(정통) 신학에서는 이 극도의 고통의 시간이 간단히 지워져 있었고, 금요일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곧바로 일요일의 승리에 찬 부활이 말해지면서 토요일의 죽음의 시간, 삶과 죽음이 교차하면서 극도로 외롭고, 어떤 희망과 재생의 가능성도 없이 철저히 내던져진 ‘지옥’의 고통과 죽음의 경험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토요일의 경험을 우리가 겪고 듣는 ‘트라우마’의 경험과 연결한다. 그것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결코 부활이나 승리를 쉽게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찬 경험이며, 그리고 그것이 정말 고통스러운 이유는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알 수 없이 ‘반복’되고 ‘지속’되어서 이 지옥과도 같은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을 ‘견뎌내고’, ‘버티면서’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성토요일의 성령론’은 바로 이러한 가운데서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그리는 신학이다. 저자 셰리 램보는 그러나 성토요일의 신학을 말하는 발타자르조차 그 신학이 여전히 ‘기독론’ 중심적이고, ‘삼위일체론’에 묶여있다고 비판한다. 즉 발타자르가 전통의 신학이 주목하지 못하는 성토요일의 고통과 죽음의 시간을 발견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삼위일체적(trinitarian)으로 ‘구원’의 그리스도가 부각되어서(soteriological) ‘지옥’이나 ‘몸의 고통’이나 ‘성령’ 등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램보는 성토요일의 신학은 더욱더 ‘성령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그 성령론의 해석에서도 전통적 성령론이 주목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을 밝히기 위해서 특히 요한복음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증언과 애제자 요한의 증언을 살핀다.
    저자는 요한복음의 증언을 살피기 위한 첫 출발로서 요한복음 19:33-34절의 숨을 거두신 후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기록에 주목하면서, 특히 거기서 피보다는 ‘물’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그 물이란 ‘생명’과 연결되고, 결국 ‘성령’과 관계된다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저자는 예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여기서 드러나는 성령은 사도행전 등에서 전하는 ‘성령강림절의 (확실한) 성령’이 아니라 죽은 예수의 옆구리에서 ‘남은’ 물이 흐르듯이,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 예수의 무덤에 찾아가서 만난 예수의 부활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다른 종류의 존재”로 있었고, “현존과 부재가 섞여 있는 영역”에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곳에 현존”하는 방식의 영이라고 한다. 즉 저자가 여기서 새롭게 드러내고자 하는 성령과 부활은 전래의 인습적 성령과 부활 이야기대로 그렇게 분명하고 확실한 성공적 메시지의 것이 아니라 부재이기도 하면서 현존하고, 죽음이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는 증언이고, 그것은 그래서 “죽음의 여파 속에서 삶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증인들”의 증거라고 한다. 셰리 램보 지음, 『성령과 트라우마-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박시형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9, 179쪽.

    저자가 여기서 중시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남아 있다’ 또는 ‘머무른다’의 뜻을 가진 ‘메네인’ (menein)과 ‘넘겨주다’라는 뜻을 지닌 ‘파라디도나이’(paradidonai)다. 저자는 자신의 성토요일의 성령론과 새로운 부활 이해를 펼치기 위해서 이 두 단어를 여러 맥락에서 다양하게 풀어낸다. 저자는 요한복음 19장 30절의 예수가 신포도주를 맛보신 후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의 영(spirit/pneuma)을 넘겨주셨다’라고 증언한 대로 예수의 죽음 후 무언가가 분명히 ‘남겨졌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영’, ‘예수가 죽을 때 내쉰 숨’을 제자들이 ‘넘겨받았으며’, 순교한 베드로와는 달리 ‘남아 있는 자’가 되어서 그 영을 넘겨받은 예수의 애제자는 예수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숨이 말하는 진실’을 ‘넘겨주는 일’을 맡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즉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며, 이은선, “세월호 참사와 우리 희망의 근거: 세월호 1주기,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인가?”, “부활은 명멸(明滅)한다: 4.16 세월호 2주기의 진실을 통과하는 우리들”,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 117-128; 129-164.
    성령은 “승리하는 힘이 아니라 끈질기게 지속하는 힘이며, ... 견디어내는 힘”이고, 셰리 램보 지음, 『성령과 트라우마-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214쪽.
    그래서 우리는 ‘증언’(부활)은 “죽음과 삶이 만나는 곳인 동시에 죽음과 삶으로부터 생겨나는 증언의 장소이기도 한 독특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고, 같은 책, 234쪽.
    ‘생존’은 “남아서 사랑하라는 독특한 명령을 통해 주어진 모습”이기 때문에 “이제 부활한 삶에 대한 개념도 달라”져서, 부활한 삶이란 “승리한 새 삶” (victorious new life)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증언”(persistent witness to love’s survival)이라고 강조한다. 같은 책, 235쪽.


    3. 램보 성토요일 성령론의 한계와 불철저성
    이렇게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 몸과 영의 불이적(不二的) 관계에 대한 전복적 성찰을 하면서 성령과 부활의 보다 진실한 실재에 다가서려는 저자의 노력은 의미깊다. 원래 이 저술의 시발점이 그러하듯이 특히 오늘날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삶과 죽음이 혼재한 트라우마 현실의 만연 앞에서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 복음과 ‘구원’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더욱더 신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보기에 저자의 이러한 탐색에는 여전히 불철저하고, 분명하지 않은 측면들이 여럿이 보인다. 그리고 그 가장 주된 원인은 저자가 여러 차원에서 전통적 기독교 사고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다원적’으로 사고하고 ‘중간성’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본인이 보기에 그녀의 시도는 여전히 기독교 전통 안에만 머물러 있고, 그 성령론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기독론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가 죽을 때 내쉰 숨(death breath)이 넘겨졌다”라고 서술하면서 같은 책, 228쪽.
    이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랑”(remaining love)이며, “남아 있는 성령”(the remaining Spirit)이라고 언급한다. 같은 책, 286쪽.
    하지만 동시에 거기서의 ‘영’(숨)이 ‘예수’의 영인지, ‘성령’인지 “불분명”하다고 말하고, 같은 책, 229쪽.
    또한, 이 장면에 대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증언을 비교하면서 누가복음의 예수는 자신의 영을 “성부”의 손에 부탁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이 “누구에게 넘겨지는지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바로 우리가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같은 책, 252쪽.
    본인에게는 저자의 이러한 질문과 그렇게 의미있게 들리지 않는 분석은 그가 여기 이 세상과 고통과 몸의 실제와 다원성의 중시에도 불구하고 전통 기독교의 완고한 이원주의와 개체주의적(인격주의적) 神 이해 사고에 갇혀있기 때문에 ‘영’으로서의 실재 이해가 철저하지 못해서 야기되는 것을 보인다. 물론 저자는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은 캐더린 켈러의 ‘테홈’(tehom, 심연)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전통적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 이야기’(ex nihilo)를 극복하고 창조(시작)와 부활도 직선적이고 일회적인 것보다는 반복되고 지속되는 나선형의 ‘되어감의 사건’(continual becoming)으로 이해한다. 같은 책, 266쪽.
    하지만 그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예수 부활 사건에까지 적용시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즉 전통 기독교가 여전히 놓지 않는 ‘부활’ 사건, ‘예수 부활’ 사건을 하느님 영(테홈)의 반복 불가능한 유일회적 배타성으로 보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성토요일의 성령론은 예수에게서 마지막으로 넘겨진 영이 ‘하느님의 영’인지, ‘예수의 숨’인지, 아니면 생전에 예수가 자신이 가고 제자들에게 찾아올 것이라고 이야기한 ‘성령’인지의 구분을 묻는다.
    최근 한 페이스북 친구가 2001년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산에 모시고 돌아온 며칠 후 꿈속에서 만났던 어머니에 대해서 구술해 주었다. 그 어머니는 평소의 옷차림으로 등에 약수터에서 길러오는 물통에 물을 한 통 지고 오셔서 병원 중환자실 옆에서 쭈그리고 있는 자신에게 작은 소반에 삭힌 고추와 깻잎장아찌를 반찬으로 밥상을 차려주며 먹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와 구술자가 밥을 물에 말아서 먹으며 “엄마, 죽은 거 괜찮아?”라고 물으니 말씀은 안 하시고 괜찮다는,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구술자는 살아생전에 가난한 삶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소풍날까지도 텃밭에서 키운 파로 파무침을 해주는 것을 보고, 계란과 멸치 반찬, 김밥을 싸 오기도 하는 친구들과 비교해서 창피한 생각에 소풍을 가지 않겠다고 서럽게 울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파무침, 삭힌 고추가 자신의 사랑하는 일상의 양식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일용할 양식은 이런 밥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라고 하며 그렇게 “깻잎 같은, 무나 배추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들...”의 삶을 반추한다. https://m. facebook.com/이규원, 4월 10일.


    본인은 이러한 구술 앞에서 오늘 여기서의 한 평범한 구술자가 ‘영’으로 만난 어머니 이야기가 요한복음 21장 고기 잡는 제자들의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그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시고 고기와 빵도 마련하여 지친 제자들을 먹이시며 나의 양을 치라는 사랑의 명령을 남기시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를 묻고자 한다. 이 두 그림은 매우 유사하게 진정으로 몸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죽음 속에 남겨진 영의 사랑의 힘으로 큰 고통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삶이 다시 시작되며, 살아남은 자는 그 영의 이야기를 계속 구술하고 전하면서 새로운 삶의 장소가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5주년이 되어가고 요사이 <생일>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를 다시 찾고 있는 세월호 참사의 여러 유족이 들려주는 ‘죽음 이후’와 ‘영’에 대한 이야기, 그 이전에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들려주는 80년 5월 광주 항쟁에서 희생된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 등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메시지를 받는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과 이 ‘평범한’ 사람들의 부활, 요한복음의 부활 증언과 우리가 오늘 주변에서 듣는 ‘부활’ 이야기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이은선, “세월호, 고통 속의 빛, 영생에 대하여”,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 104-111쪽.

    ‘정통’ 기독교는 지금까지 2천여 년 동안이나 기독교나 서구, 또는 유대인 남성 예수의 존재론적 유일회성을 주장하면서 그 외의 다른 문명이나 종교, 여성과 비성직자 등을 차별하고 소외시켜온 근거로 바로 이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인 근거로 주로 내세웠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근거가 바로 이 부활로서 어느 종교 전통에도 그렇게 예수처럼 몸이 부활하는 사례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묻고자 한다: 이 주장을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가져와서 매우 급진적으로 그 정통을 전복시키려는 램보조차도 이 물음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니 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임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본인은 비서구 평신도 여성신학자로서 지금까지 겪어왔던 존재론적 소외와 불평등, 부정직과 의심을 억누를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4. 한국적 聖,性,誠 여성신학의 복수론적 기독론과 ‘구원하는 자기’(the redemptive self)의 다른 이해

    1) 다른 신론: 지금까지 한국적 유교 전통과 대화해온 한국 여성신학자로서 본인은 신론과 기독론, 성령론의 새 이름으로서 ‘聖, 性, 誠’의 세 가지를 제안해 오고 있다. 맨 먼저 저술로 이 이름을 명기한 것이 1997년이니 20여 년도 더 넘었다. 이은선,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 여성신학-유교, 페미니즘, 교육과의 대화 속에서』, 분도출판사, 1997.
    본인은 저자 램보가 많이 의지하는 캐더린 켈러의 ‘테홈’이라는 하느님의 새 이름을 아주 좋게 여긴다. 그러나 그와 많은 유사점을 가졌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 보다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초월의 이름으로 신유교 전통의 ‘태허’(太虛), ‘무극’(無極)이나 ‘태극’(太極), ‘천/리’(天/理) 등의 이름을 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언어들은 하늘과 땅, 초월과 현실, 정신과 몸, 이 세상과 저세상, 영과 육, 삶과 죽음 등을 보다 더 크게 융합하고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 본인은 그 모든 이름을 더욱 일반적으로 ‘聖’(거룩)으로 표현하며, 그 속성을 ‘통합성’(the integrity)으로 해석해 왔다. 그런 통합성의 聖의 영성에서 보면 하느님이나 예수의 영만을 ‘성령’이라고 보지 않고, 온 우주에 편재한 영을 같은 생명적 ‘성령’으로 말할 수 있고, 이것을 한국의 유교 전통은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 하늘과 땅의 만물을 낳고 살리고 보살피는 마음)이나 ‘생리’(生理, 낳고 살리는 영), ‘인’(仁, 인간성) 등의 언어로도 드러내 왔다. 이은선, “한국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미래”,『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6, 179쪽 이하.
    램보가 밝히고자 하는 성토요일의 성령의 활동을 나는 이러한 통합성의 영성(聖)으로 더 적실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 본다.

    2) 다른 기독론(구원론): 성토요일의 죽음과 고통, 상처, 즉 트라우마는 우리 삶에서 진정 ‘타자’이다. 같이 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고, 항상 억누르고자 하고, 단번에 처치하고 싶지만 우리 삶이 다하는 동안 ‘남아서’ 어떻게든 우리는 그와 관계해야 한다. 본인은 聖性誠의 여성신학에서 두 번째 중간의 性을 ‘타자성’(the otherness)으로 풀면서 우리의 신적 본래성인 통합성의 聖과 함께 동시에 이 세상성, 몸성, 섹슈얼리티, 낯선 여성성 등을 지시하는 언어로 말해 왔다. 그 性은 우리가 먼저 ‘타자’로 취급하지만, 그 타자야말로 진정 우리 거룩(聖/神)의 현현의 장소임을 밝히는 의미인 것이다. 이은선, “여성으로 종교 말하기”,『한국 여성조직신학 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46쪽.
    오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몸의 욕망과 욕구, 특히 섹슈얼리티를 이 性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사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 性은 보통 부정적으로 이해되고, 정신과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 대신에 어두운 동물적 속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점점 더 이 性이야말로 우리가 저버릴 수 없고 억누를 수 없는 인간성의 또 다른 핵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아간다. 그래서 본인은 이 性이라는 단어로 램보가 트라우마에 대한 탐색에서 다각도로 밝혀준 대로 죽기까지 계속해서 다시 등장하면서 우리가 그와 관계 맺어야 하는 ‘트라우마’를 표시하는데도 부족하지 않다고 여긴다. 더군다나 동아시아 신유교 전통(性理學)에서 그 性이란 결코 부정성이 아니라 바로 하늘의 태극(聖)이 우리 안에, 인간 안에 인간적인 모습으로 내재하여 있는 하늘적 씨앗(性)을 드러내는 단어로 쓰여왔다면, 램보가 죽음의 성토요일과 트라우마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기독교의 부활과 성령 담론을 더욱 더 삶(긍정성)과 죽음(부정성)의 불이적 관계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을 보면 이 한국적 性 이야기가 더 적실하게 또 다른 기독론, 또 다른 인간론과 트라우마론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들려주는 부활과 새로운 시작과 영의 이야기는 우리가 트라우마(性)를 통해서 더욱 참되게 인간답게 성장할 수 있고,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사랑의 실천을 위한 남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해준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性을 통해서 다음 세대를 낳고, 전하고, 증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모두 한편으로 性의 존재라면 이제 2천 년 전 유대인 청년 예수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복수론적(複數論的) 그리스도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램보는 켈러와 함께 ‘부활(시작)’의 복수성은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수성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블랙홀’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 감각으로 인식되는 이 우주촌과 지구촌의 시대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서구 기독교 전통 안에만 머물러 있다.

    3) 다른 성령론: 램보는 성령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며, 활동으로 현존한다”라고 하면서 그 힘은 “지속하는 힘”이며 “견디는 힘”이고, 셰리 램보, 같은 책, 214쪽.
    “새로운 삶의 모습을 낳는 성령론적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성령은 형체(form)를 만들어 내는 숨”이라고 밝혔다. 같은 책, 258쪽.
    이런 이야기는 한국적 聖性誠의 여성신학이 세 번째의 誠을 ‘지속성’(the endurance/ continuity)으로 풀면서 한국적 성령론으로 이해하는 것과 잘 통한다. 유교 전통의 『중용(中庸)』은 ‘지속성은 하늘의 길이고, 그 지속성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길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하면서 ‘지속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不誠無物)라고 했다. 또한, 한국의 신학자 윤성범은 오래전 그의 ‘誠의 신학’에서 중용적 ‘誠’을 요한복음 1장의 ‘말씀(言)이 육신이 되었다(成)’라는 의미로 풀어내면서 誠(지속성)을 그 신학적 사고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런 모든 것들을 살필 때 켈러와 램보의 새로운 성령론과 부활 담론이 동아시아의 誠 이야기로 많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와 신학이 그러한 고유한 자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신학에 대한 해바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 교회가 스스로가 고유한 종교적 전통과 신학적 탐색 안에 서구적 ‘정통’ 신학의 승리주의와 제국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보물들을 풍성히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에 대한 탐색이 우리의 첫 번째 신학적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의 현실 기독교와 목회 현장은 오히려 여기서 램보나 켈러 등이 비판하는 서구 교회의 ‘정통주의’보다도 더욱 경직되어 있고, 가부장주의적이며 폭력주의적 성취지상주의에 차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4) 다른 구원하는 자기: 본인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한국적 聖性誠의 여성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유교와 기독교 대화의 새로운 ‘상상력’으로 기독교 여성신학자 램보는 비판한 ‘구원하는 자기’(The Redemptive Self)의 담론을 ‘다르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램보는 책 마무리에 성인발달심리학자 맥아담스(Daniel P. McAdams) 교수의 성인 미국인 삶의 내러티브 연구를 가져와서 트라우마와 성토요일의 죽음과 실패에 대한 의식이 없는 미국식 기독교의 ‘구원 이야기’가 어떻게 미국인들의 의식과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히고 있다. 맥아담스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자기 삶 이야기는 항상 ‘구원하는 결말’(redemptive ending)을 위한 ‘구원하는 자기’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고 한다. 이러한 의식은 미국인들 정체성의 최고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최악의 단점”이 되어서 성공하기 위한 폭력과 자기애를 정당화하고, 강한 개인주의적 경향과 특별함에 대한 요구와 선택받았다는 믿음의 “미국 우월주의’를 강화하여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침략을 묵과하기도” 하고, 삶 속에 “일종의 학대”를 유발하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극히 해로운 것일 수 있다”라는 것이다. 같은 책, 299-304.

    사실 이런 지적은 특히 오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요사이 패권주의적 미국과 사사건건 씨름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로서는 매우 수긍이 가는 것이고, 또 매우 경청해야 하는 연구이다. 하지만 본인은 오늘 한국 기독교의 과도한 기독론 중심주의, 서구 바라기와 배타적 그리스도 우상주의 등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앞에서 살핀 대로 복수론적 기독론, 트라우마와 고통의 현실에서도 견디며 스스로를 이루어나가는 誠으로서의 성령론 이해에서는 이렇게 스스로의 주체성 속에 내재하는 지속하고, 형태를 이루고,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남겨진 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성령의 힘으로서의 ‘구원하는 자기’의 담론이 요긴하다고 여긴다. 물론 그 담론이 가지는 사각지대에 대한 의식이 있지만, 미국과 한국 교회의 처한 정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래서 한국에서는 미국식 정통의 구원 이야기가 유교나 불교 등 아시아 종교 전통과의 대화 속에서 ‘다른 정통의 모습’ (polydoxal possibility)으로 실행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요청된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 한국 기독교가 서구 남성 그리스도 우상주의에 빠져서 한편으로는 앞에서 맥아담스 교수가 지적한 미국식 정체성의 해악이 심한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하는 자기’ 담론보다 더 오래되고, 특히 그것이 큰 우주적 공동체 의식(天下爲公)과 깊이 연결되는 자기 구원의 이야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진정한 의미를 다시 찾아내야 한다고 본다. 구원하는 자기의식을 잊고서 노예성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에게 그래서 본인은 진정으로 복수론적 기독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또 다른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새롭게 상상해 보도록 권하고 싶다.

    5. 마무리하는 말
    지난 주일 안산 화랑유원지 내 생명안정공원 부지 내에서 열렸던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 예배에 가보니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세월호 유족의 엄마들이 어떻게 새로운 그리스도로 부활해 있는지가 보였다. 이제 세상이 세월호 유족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의식으로 성토요일의 길을 가고 있는 유족들이, 그 트라우마와 더불어 얻어낸 생명과 진실의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와 한국 사회를 살려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직 겨우 그렇게 희생된 아이들의 기억을 함께 모으기 위한 추모관 건립을 위한 부지만 마련된 상황이고, 앞으로도 그 일을 위해서 가야 할 길이 무척 험난해 보이지만, 그녀들은, 그 유족들과 지금까지 지속해서 함께 해온 시대의 증인들은 여전한 슬픔 가운데서도 떳떳했고, 당당했으며, 고통 속에서 다져진 모습으로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한편 이렇게 예배드리는 바로 길 건너편에는 이들 세월호 유민들을 그만두라고 하고 그들이 겪은 것이 개인 여행 참사라고 호도하면서 쫓아낸 ‘은혜와 진리 교회’가 높다랗게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지만 이미 해체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본 책의 저자가 꼼꼼하고 성실하게 밝혀준 성토요일의 성령론이 어떻게 한국의 세월호의 트라우마 현실 속에서도 그 빛과 진실을 드러내는지를 잘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세월호 유족들에게뿐 아니라 우리 교회와 사회에 진실한 위로의 책으로서 더 부지런히 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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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 2019.04.16 20:17

    세미나에 대한 뉴스앤조이 보도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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