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처형으로 인해 예수가 꾸었던 꿈들은 꺼져버린 듯 했지만,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마을생활을 다시 활성화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후 몇 십 년 동안, 그의 추종자들은 예수에 대한 기억들을 중심으로 몇몇 집단을 이루어, 몇 가지 독특한 갱신운동을 벌여나갔다. 이 집단들은 스스로 이스라엘 전통 속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그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결국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비록 여전히 이스라엘의 믿음과 종교제의에 대한 많은 지역적 변형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매우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지역의 상황들과 사건들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갈릴리의 짓눌린 마을들에서는 사람들이 예수의 인격과 메시지에 감동을 받았었지만, 예수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점차 시장과 마을에서 퍼져나갔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비극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로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계속적인 테러 속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참된 예언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비극적 운명의 또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단지 슬픈 표정으로 혀를 차면서, 예수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갱신에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들의 의구심이 확인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갈릴리 농민들이나 어부들, 노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성(聖) 금요일과 부활절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빈 무덤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는 훨씬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두드러진 주제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갈릴리의 추종자들 가운데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비극적인 유월절 순례를 지켜보았던 집단들조차도 예수가 묻힌 정확한 장소나 심지어 예수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존 도미닉 크로산이 복음서 속의 수난 이야기들과 초대교회 전통에서 그 수난 이야기들의 중요성에 대한 연구에서 강력하게 지적한 것처럼, 당시에 예수의 처형이 얼마나 끔찍하게 보였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의 가장 잔인한 측면 가운데 하나는, 심지어 그 희생자가 죽은 다음에도 대부분 그 시신을 십자가 위에 그대로 내버려두어, 까마귀들이나 개들이 뜯어먹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로마제국에 감히 도전했던 노예, 농민, 반역자들이 당하게 되는 처벌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로마 군인들이 그 시신을 내려 아무렇게나 얕게 묻어버리기도 했는데, 가족 무덤에 안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외적인 경우는 그 희생자의 친구들과 가족이 권력이 있거나 부자여서 해당 관리들을 매수할 수 있었거나, 유죄판결을 받아 처형된 범죄자와의 친분관계를 밝혀도 무방할 경우에만 그 시신을 요구하여 안장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벌인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이 그처럼 안장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세푸스는 로마인들에 대한 몇 차례의 반란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거의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했는데, 우리는 (적어도 로마인들의 눈에) 평온한 시기에도 살인과 절도, 혹은 집단 저항에 대한 처벌로서 그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고대 예루살렘의 남쪽, 동쪽, 북쪽 외곽지역에 즐비한 무덤들에서 발굴된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백 개의 가족 무덤과 수 천 명의 개인 유골들 가운데, 십자가 처형 흔적(발목뼈를 관통한 대못)이 있는 유골은 단 하나 뿐이었다. 로마제국이 유대 사람들에게 잔인한 질서를 부과하기 위해 십자가에 처형했던 수 천 명의 다른 유골들은 짐승들이나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고고학적 기록에서 사라져버렸다. 또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의 가족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그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죽은 이들을 생각하며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처형의 마지막으로 잔인한 치욕이었다. 따라서 크로산을 비롯해서 몇몇 학자들은, 아리마대의 요셉이 빌라도로부터 예수의 시신을 넘겨받아 안장했다는 복음서들의 이야기는 후대의 더욱 잔혹한 현실 속에서 예수의 매장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린 것이었으리라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나중에 더욱 윤색된 이유는 로마인들의 손에 죽은 예수의 운명이 그만큼 불명예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물론 성 금요일과 부활절에 대해 매우 현대적이며 회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예수의 매장과 빈 무덤의 기적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들로 간주되었다. 유일한 질문은 예수의 처형과 매장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였다. 예루살렘의 공개적인 처형 장소는 오랫동안 민담과 민간 전승에서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4세기 초에 첫 번째 기독교인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의 무덤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런 민담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헬레나 황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 탐사자들이 예수의 무덤만이 아니라 근처의 골고다와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잔재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기독교 왕국의 가장 거룩한 지점을 보존하고 기념하기 위해 성묘(聖墓)교회를 짓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새롭게 세워진 예배당들, 원형 돔, 기둥들과 지표면에 드러난 바위는 십자군과 순례자들의 영적이며 실체적인 목표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숭배되었다. 그러나 성묘교회가 예루살렘 도시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고대 유대인들의 정결법에 비추어 시신과 무덤을 위한 장소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심지어 19세기의 완고한 개신교 신자들조차도 성묘교회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했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역사적 실재에 대한 일반인들의 믿음을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성묘교회의 진정성을 의심한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예루살렘 성벽 북쪽의 조용하고 공원과 같은 지역에서 예수의 무덤을 찾았다고 주장하며 "정원 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다.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학자들이 골고다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장소에 관해 그토록 많은 논쟁 이후에 합의를 본 것은 성묘교회의 터가 결국 진정한 곳일 수도 있다는 결론이다. 1967년 이후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도로 밑바닥과 유적들과 노천 공간에 대한 방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로마 시대 초기에는 예루살렘의 성벽이 매우 불규칙한 선을 따라 이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성묘교회의 터가 예수 당시에는 구불구불한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 있었으며, 그 지역이 실제로 로마 당국자들이 처형하던 도시 외곽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또한 그 교회 예배당들 일부의 바닥 아래서 발굴된 전형적인 1세기 묘실들은 그 지역이 매장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며, 성묘교회의 역사적 신빙성을 더 이상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복음서들에 나오는 십자가 처형 이야기와 아리마대 요셉의 개입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며, 또한 예수와 가까운 몇몇 추종자들이 아마도 무덤 주변에서 밤을 새웠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처형되고 매장된 자세한 이야기들은 예수 운동이 극적으로 발전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를 처음 주창한 이가 무섭게 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노력은 갈릴리의 마을들에서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예수가 처형되었다는 아찔한 소식은 북쪽 갈릴리와 그 주변 지역으로 신속하게 퍼졌을 것이며, 갱신운동의 가장 중요하며 가장 오래 계속된 형태가 살아남은 곳은 바로 예수의 고향 지역에서였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틀림없이 낙심하여 그 운동을 포기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헌신을 다시 확인했다. 실제로 갱신운동은 그 중요한 목표나 새로운 종교의례를 도입하지 않은 채 이전처럼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런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에 관한 최초의 전승들(우리가 증거를 갖고 있는 전승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부활, 혹은 신적인 지위에 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최초의 예수 전승들은 (부활한) 예수가 선택된 사도 집단 앞에 기적적으로 나타나,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고 말한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최초의 예수 전승들은 그 대신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간결하며 생기 있는 말씀들로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특수한 관심사항들을 자세히 다룬 전승들이다. 즉 시골 마을 공동체들에서 어떻게 언약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지, 어떻게 새로운 공동체들이 그 운동 속에 참여할 수 있는지, 개인들이 그 억압자들과 원수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사항들을 자세히 다룬 전승들이다.
이것이 유명한 "Q" 말씀 복음(Sayings Gospel)인데, Q는 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크벨레'(Quelle)에서 온 말이며, 19세기에 성서 신학자들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단락들 가운데 그 단어 사용이 거의 똑같은 구절들을 치밀하게 분류함으로써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자료다. 학자들은 성서 본문을 주의 깊게 비교한 결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모두 그 이전부터 있었던 예수의 어록(語錄)을 사용하여 마가복음의 이야기 자료와 함께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엮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처럼 예수의 전기(傳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없는 순전한 어록집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들 가운데서 그와 비슷한 "도마의 말씀 복음"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와 같은 명백한 자료로서, Q 자료는 훨씬 오래된 것이며 예수의 갈릴리 추종자들의 마음 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이들 갈릴리 추종자들은 복음서 이야기들 속에서 무리를 지어 예수에게 나와 치유를 받고 배고픔을 채우고 그의 설교를 들었지만,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떠난 다음에는 갑자기 복음서들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Q 복음 속의 연설들은 예수의 처음 추종자들을 사로잡았던 문제들과 관심사항들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런 전승들이 수집되어 수십 년 동안 보존되고 누가와 마태에 의해 기록되기 전에 구전 전승으로서 상당 기간 동안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이 전승들이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은 신앙공동체들이 간직했던 믿음과 기억을 대표하는 것임을 뜻한다. 그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Q 복음을 보다 폭넓게 그리스-로마의 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연구한 일부 학자들은 Q 복음을 간직했던 사람들을 그리스 세계의 견유철학자들(Cynics)과 같은 사람들로 보았다. 견유철학자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인습적인 지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철저한 개인주의와 재산, 부모, 예절 등으로부터 해방되라는 대항문화적 생활태도를 설교하며 떠돌아다니는 자유 사상가들이었다. 이처럼 "견유학파"라는 관점에서 예수운동을 해석하는 오늘날의 학자들은 Q 복음을 구체적 맥락에 대한 언급 없이 개인주의적인 윤리 모음집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며, 예수의 가장 유명한 말씀들 가운데 일부는 예언자들보다 더 언어적인 유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는 도발적인 현자로서 재치 있는 말대꾸의 달인이었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마태 5:3; 누가 6:20)라는 선언에서, 예수는 지혜의 교사로서 그 추종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누가 6:27-28),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마태 7:1-2; 누가 6:37)고 가르친 스승으로 기억되었다. 이 역사적 관점에 따르면,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1세기의 히피족처럼,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누가 9:60; 마태 8:22) 하는 것이 사명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의 갈릴리 선교를 살펴보면서, 예수의 말씀들은 추상적인 윤리적 명령들이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가르침들로서, 갈릴리의 성읍들과 마을들에서 진행되던 정치 경제적 및 종교적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위한 필수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들이 구체적인 시공간에 뿌리박지 않은 채, 개인들 즉 고대의 견유철학자들처럼 지배문화로부터 소외되어 있지만 여전히 그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에게 매력적인 대항문화적 지혜를 고취시키는 것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들이 예수의 짧은 공적인 목회를 전후하여 갈릴리 마을들에 팽배했던 가난과 억압이라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강력한 공동체적 응답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수와 그의 처음 제자들을 "견유철학자들"로 규정하는 것은 예수운동을 개인주의적인 문화비판으로 축소시키는 것인데, 이런 문화비판은 지속적인 공동체나 집단 의식을 창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세기 갈릴리는 계급 구분이 분명하여 매우 고통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던 현장으로서, 엘리트 문화는 통제와 억압의 수단이었고, 전통적인 민족적 정체성은 아무리 희미하게 기억되고 정치적 경계선을 넘어 퍼져 있었다 할지라도 최소한이나마 자율성을 유지하려 애쓰던 공동체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오늘날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학자들은 그리스-로마 사회의 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근본적인 불평등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즉 그리스-로마 사회는 기술과 문화적 표현의 열매를 누리던 사람들과 그들의 행복을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원주민들 사이에 엄격한 구별이 존재했다. 오늘날 많은 주석가들은 그리스어가 확산되고, "극장, 경기장, 학교를 포함하여 헬레니즘의 제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도시들이 확립되었다는 고고학적인 새로운 증거들은 모든 사람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견유철학의 대항문화적인 경향들이 심지어 농민들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었던 통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처럼 사회적인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은 갈릴리 사람들의 반복적인 저항을 간과하는 생각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새로운 생활방식과 논리 속에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포함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빼앗아버리는 권력 지형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호슬리 & 실버만, 5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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