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예언자로서 초점을 맞춘 것은 성전(聖殿)이었는데, 그 성전은 지금 유월절 순례자들로 넘쳐났다. 이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많은 방문자들에게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남겼는데, 그들은 성전의 외형에 대해 한결같이 탄복하는 기록을 남겼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도시의 인구가 밀집한 지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그 거대한 기단(基壇)과 둘러싸고 있는 주랑(柱廊)들은 성전 건물이 있는 내부 뜰을 외부로부터 막아주었다. 성전 구역 남부 성벽을 따라 이루어진 최근의 발굴과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과 알 아크사 사원(al-Aqsa mosque) 지역의 유물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통해서, 성전의 형태와 배치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고대의 방문자들은 대부분 남쪽의 계단을 올라가 지하통로를 지나 성전 건물 남쪽의 넓은 광장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 광장은 헤롯 대왕이 건설한 화려한 주랑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순례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했다. 즉 종교의식에 사용하기에 흠이 없는 비둘기, 기름, 밀가루를 살 수 있는 시설들, 몸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침례 시설, 성전예배를 위해 흰옷으로 갈아입는 장소, 로마 세계의 각처에서 사용되던 동전들을 성전 금고에 맞는 돈으로 환전해주는 테이블들이 있었다. 입구의 광장을 지나면, 눈앞에 성전 구역이 신성한 섬처럼 나타나는데, 그 입구들은 성전 관리들인 레위인들이 감독하고 있는데, 이들 레위인들은 대대로 성전에서 섬기는 지파였다. 안 마당으로 입장할 수 있는 것은 정결의식을 마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으며, 이처럼 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시킴으로써 엄격하게 그 예배의 신성함을 지켜나갔다. 안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던 벽에 붙어있던 돌에 새겨진 글씨들이 복원되었는데, 이 글씨는 그리스어로 새겨지고 붉은 페인트로 강조한 것으로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며, 그 문장은 "외국인은 이 이상 안 마당과 성전 주변 난간 지역에 출입할 수 없다. 체포되면 처형당하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난간 지역 안쪽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배열된 위압적인 문들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몇 개의 마당이 있으며, 그 마당 건너편에 성전의 지성소 건물이 있었다. 첫 번째 마당은 소위 "여인들의 마당"으로서 공동체 모임을 위해 예배자들이 모였던 곳으로서 정결예식을 위한 방들과 나무와 기름 저장소로 이용되었다. 그 너머에 성전의 안 마당이 있었는데, 거대한 니카노르 문의 높은 청동 문을 통과한 다음에 반원형 계단 열 다섯 개를 올라가야 했다. 이 구역은 율법 낭독과 성전 음악 연주가들과 가수들의 공연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이들 역시 레위지파 출신들이다. 축제절기들과 공적인 예배 때는 그 청동 문이 열려져 있어서, 예배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안 마당의 커다란 중앙 제단에서 제사장들이 엄숙하게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제비뽑기로 뽑힌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을 위하여 산 제사를 드리며, 개인들이 정결 의식을 위해, 여러 종교적 의무를 위해, 또한 개인적 맹세를 위해 가져온 많은 헌물들을 제단에 바쳤다. 더 안쪽에는 성전 건물의 문이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황금색 분향제단, 헌물대, 금 촛대를 볼 수 있었는데, 금 촛대는 전체 성전 제의를 상징하게 되었다.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잠시 직접 만나는 곳이 바로 이곳 지성소에서였다.
이처럼 대리석과 황금빛으로 치장하고 분향과 피, 엄숙한 제의가 진행되는 예루살렘 성전이,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순례를 올라온 농민들, 일용직 노동자들, 어부들에게 얼마나 낯설고 인상적이며 위협적이었겠는가! 순례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사흘 동안의 체류와 비용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마을에서는 고작해야 인구가 몇 사람이 되지 않아 모두가 이웃 사람의 이름과 가족, 그 사람 됨됨이까지 알고 있었던 순례자들에게 낯선 것은, 산처럼 높이 솟은 성전 건축물의 위용과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사방으로부터 몰려든 귀족들과 제사장들의 근사한 옷차림들, 그리고 수천 명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또한 단지 예루살렘 성전이 농민들의 고단한 삶의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기관이라는 사실만도 아니었다. 솔로몬 성전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파괴된 이래로, 유대 지방 사람들과 나중에는 갈릴리 지방 사람들조차도, 성전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오고갔는데, (마카비 반란 때처럼)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 진심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든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십일조, 헌물, 세금이 늘어나 이에 대해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성전의 관리들과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은 전국에 걸쳐 찾아볼 수 있었는데, 제사장 "조"를 맡은 24개 가족들 대부분은 짧은 기간 동안에만 예루살렘에서 봉사했으며, 복음서들에 자주 언급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는 각자의 마을들에서 율법 전문가로서 종교 직무를 수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시골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았던 것이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특히 첫 열매와 수확기간에 그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수거하는 것을 감독할 때였다. 그들은 성전과 그 복잡한 희생제의들이 모든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시키느라 열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희생은 이미 지나치게 많은 세금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는 농민들의 희생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제의와 엄격하게 구분된 공간들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자신들의 주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독립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계약 정신에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성전의 가장 큰 패러독스였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 사상을 간직하기 위해서, 중앙 제의 장소에 거대한 관료조직이 세워졌으며, 방대한 민간 조직, 즉 서기관, 행정가, 회계관리, 예배 인원, 성전 관리, 대제사장 가족들 등 모두 성전 수입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봉사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토라에 따르면, 성전의 십일조와 헌물들은 이스라엘의 농업 생산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증한다는 뜻으로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전은 시골 주민들에게 다른 세금과 공물이 부과된 상황에서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반면에 성전의 제사장 계급은 사치스럽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유대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 로마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황제의 안녕을 위해 매일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허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성전이 정말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준수하는 기관인지 아니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억압적 기관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활동을 살펴야만 한다. 예수는 화려한 로마 스타일의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기 위해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예언자로서 예루살렘에 들어왔는데, 그 때는 왕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시골 공동체들의 이스라엘 갱신운동을 통해 실현되고 있던 때였다. 이런 예언자의 출현 자체는 이스라엘 전통에서 전혀 새로울 게 없었다. 전통적 예언자들은 거듭거듭 성전을 고발했는데, 그것은 성전체제를 지원하는 왕정체제와 더불어 백성들의 촌락생활을 파괴하며 계약의 기본적인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기보다는 배반하는 것 때문이었다. 심지어 하늘의 성전에 대한 놀라운 환상(6:1-5)을 경험했던 예언자 이사야조차도 경제적으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성전 제의들과 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단죄를 선포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1:11). 이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선포했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1:13-14).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계명들의 진정한 목적을 인식하고 그 계명들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1:16-17)는 말씀을 상기시켜주었다. 아나돗 출신의 예언자 예레미야 역시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끊임없이 도둑질하고 살인하며 거짓으로 맹세함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있으면서도, 성전의 제의를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성공적으로 가라앉히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성전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심이 끝났다고 선포했다. 예레미야는 미가의 선포를 다시 들려주듯, 하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실 것이라고 선포했다. "시온이 밭 갈 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26:18).
성전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목표의 수단이었지, 성전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안전과 넉넉함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백성들이야말로 참된 "시온"이며 "주님의 산"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이 마음속에 그렸던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은 세상의 격변을 통해 올 것이 아니라, 모세 계약의 본래적인 비전이 마을의 생활과 부족의 유산으로 확보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되었던 사회정의와 공동번영의 초기 단계로서 동터올 것이었다. 비록 복음서들은 사람들이 예수가 성전에 대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불길한 저주를 한 것이 "거짓 증거"였던 것으로 연결시키지만(마태 26:59-61; 마가 14:56-59), 예수가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한 것에 대한 여러 전승들(마가 13:2; 15: 29)과 요한복음에서 그런 전승과 관련하여 예수가 단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2:21)이라고 애써서 설명한 것은 이런 전승의 역사적 기초를 더욱 확고하게 해 줄 따름이다. 불의에 대해 고발하는 것은 참된 예언자의 의무였다. 또한 예수가 성전 뜰에서 취한 상징적 행동들 역시 이런 관점에서 매우 강력한 고발이었다. 예수가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을 내친 것에 대한 신학적 해석들은 예수가 종교개혁자로서 성전의 타락에 대한 의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예수가 성전의 비열한 종교의식들과 환전상을 척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개혁하고 순수한 예배를 위해 이방인들까지 포함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예수의 대담한 행동은 기독교적인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을 배경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즉 상을 둘러엎고, 동전들이 땅바닥에 흩어지고, 희생제물용 비둘기들이 갑자기 새장에서 벗어나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과거의 예언자들의 시위행동을 반영한다. 즉 실로의 아히야는 다윗 왕국의 임박한 파멸을 상징하기 위해 자신의 새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었으며(왕상 11:29-39),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또한 예언자 예레미야는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 몇 사람과 나이든 제사장 몇 사람"과 더불어 예루살렘의 힌놈 골짜기에서 항아리를 깨뜨리며 하나님의 위협을 선포하기를, "토기 그릇은 한번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쓸 수 없다. 나도 이 백성과 이 도성을 토기 그릇처럼 깨뜨려버리겠다"고 선언했다(19:11).
성전에서 예수가 한 행동을 안티파스의 오만함에 대한 조롱과 더불어 생각한다면,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의 임박한 행동을 예언자로서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면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전통이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선택하신 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는 갈릴리의 농민들과 어부들, 노동자들 가운데서 팔다리가 말라버린 사람들을 치유해주며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예언자로서 행동했던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음을 선포하며, 사회적인 불의에 가담하고 있는 자들로서 문제 해결에 헌신하지 않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성전의 환전상들과 비둘기 판매상들의 탁자들은 그 자체로서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농민들의 희생과 헌물로 유지되는 거대한 제의 체계의 일부분이 되어 경제적 자원을 빨아들였는데, 성전이 그 자원을 빨아들이지 않고 달리 사용된다면 농민가족들과 마을 전체를 생존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자원이었다. 성전 예배가 몇몇 제사장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에 대해서 예수가 과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또한 헤롯 대왕 치하에서 제사장 직분의 역사적 굴곡과 로마인들에 대한 제사장들의 굴종을 예수가 파악하고 있었던지 혹은 못했던지 간에,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들이 모두 갖고 있었던 좌절감, 즉 새로 지어진 헤롯 성전의 그 거대한 청동 대문들과 코린트식 기둥들이 정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좌절감을 표출했다. 성전의 바깥마당에 있던 순례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단지 또 한 명의 성가신 인물로 간주하고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행동하는 것을 오해했을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탁자들을 내리치고 은(銀) 동전들을 바닥에 흩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농민 예언자의 불같은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를 사로잡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의 우아한 빌라에 살고 있던 몇몇 대제사장 가족들은 헤롯 대왕에 의해 그 권력의 자리에 앉았는데, 예수의 행동으로 인해 심기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중들과 로마제국의 오만한 관리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성전 건물들과 기관들을 대대적으로 확장한 이후, 이들 대제사장 가족들과 성전 금고, 작업장, 창고, 보급시설들을 맡고 있던 관리들의 가족들은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특수한 임무와 특권과 재산을 후손들에게 세습시켰다. 전국에 흩어져서 살던 스물 네 개의 제사장 과정의 구성원들과는 달리, 이들 사제직 관리들은 예루살렘에 상주했는데, 이들의 주택들에서 발굴된 고고학적인 유물들은 이들의 생활방식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보여준다. 1970년대에 발굴작업에 참가했던 고고학자들은 그 넓은 주택들에 대해 아무런 주저함 없이 "저택들"이라 불렀는데, 그 응접실과 식당의 바닥은 모자이크 그림들로 정교하게 장식되었으며, 벽에는 치장 벽토와 그림들로 장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기, 유리 그릇, 돌로 새겨진 식탁 표면과 그밖에 내부장식, 우아한 주랑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사치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 집들 가운데 하나의 벽에 성전의 메노라(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장식 촛대)가 새겨져 있으며, 대제사장 가족들 중에 하나였던 '바르 카트로스'라는 이름이 새겨진 저울추가 발견된 것은 그 집 주인이 성전 귀족과 연관된 사람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유대 사회에서 이들 대제사장들의 재산과 특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이들이 예루살렘 변두리에 만든 정교한 가족 무덤들이다. 구 시가지 남쪽 3km 떨어진 곳에서 최근에 발굴된 한 무덤에서는 아람어로 "예호셉 바르 카야프"(Yehoseph Bar Kayyaf)라는 글자를 새긴 납골당이 출토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이름이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순례를 할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요셉 가야바(Joseph Caiaphas)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처럼 현란한 유물들의 배후에는 우리의 정신을 깨우는 역사적 현실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가족들이 대를 이어가며 누리던 재산과 정치적 특권은 로마당국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경건함과 의로움은 더 이상  대제사장들의 성공적인 임기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었다. 아켈라오가 왕위에서 쫓겨난 (기원후 6년) 이후에는, 대제사장들이 로마당국에 대해 유대인들의 실질적인 대표자들이었으며, 예루살렘 안에서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맡겨졌던 것이다. 로마 관리들은 마음대로 대제사장들을 임명하거나 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그를 돕던 고위 관리들은 명목상 성전을 관장하면서 순례자들의 헌금과 수입금이 늘어나는 것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지만, 그들은 세력을 장악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은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축제절기들에 몰려든 군중들에 의해 인질로 잡혀 있는 꼴이었는데, 이들 군중들은 하나님, 자유, 돈, 축제가 함께 섞여 폭발하게 될 것을 꿈꾸었던 사람들로서, 이 폭약이 도시의 거리들이 공공질서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폭발시키지는 않을 것이지만, 공공질서란 절호의 기회를 만나면 깨지기 쉬운 합판에 불과한 것이었다. 대제사장들은 또한 보다 낮은 지위의 하급 제사장들의 행동들에도 인질로 잡혀 있었는데, 이들 하급 제사장들을 시골에서 차출되어 한 주간 동안 성전에서 축제절기의 업무를 돕도록 투입되었다. 그러나 만일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 제사장들이 그들의 부유한 상급자들의 행동이 틀렸으며 제의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고 선언하기라도 한다면, 성전의 통치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이던 유대인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메시아로서" 입성한 사건에 대해 대제사장과 고위 관리들이 얼마나 자세하게 알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예수가 성전구역 안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성전 안에는 레위인 경비병들과 감시원들이 늘 순찰을 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의 북서쪽 모서리에 붙어 높게 서 있는 커다란 안토니아 요새에는 로마제국의 외국인 수비대가 항상 주둔하고 있어, 축제절기에는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주랑 지붕 위를 오가면서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순례 군중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소란과 선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요세푸스는 한 번 이상, 성전 뜰에서 벌어진 소요사태가 적어도 잠시 동안 그냥 진행되도록 내버려두었던 적이 있었다고 전해준다. 그러나 일단 군중들이 떼를 지어 행동에 들어가거나 소요사태가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파급될 기세를 보일 때는, 성전 당국자들이 물러나고 군대가 개입해 들어왔다. 실제로 1세기 동안에는 군중 시위와 폭동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특정 사태에 대해 당국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복음서 이야기들은 몇 십 년 후에, 예수의 죽음에 대한 구전 전승과 그 의미에 대한 해석에 기초해서 기록되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 사건의 목격자들이나 행정관리들을 인터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체포와 재판에 관한 복음서 이야기들에 대해 선례가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랍비문헌의 법규들과 로마 행정관리들의 연대기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예수의 성전 사건과 그 이후의 사태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한 정책상의 원칙이나 제국의 행정적 선례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당시 상황을 성전 당국자들의 관점에서 상상해보자. 예루살렘은 순례자들로 넘쳐났으며 로마제국의 당국자들도 긴장한 상태였다.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군기 사건(105쪽 참조)과 수도교 건설 사건(106쪽 참조)이라는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 이 지방의 걸핏하면 대드는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단호하지만 은밀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한편 헤롯 안티파스가 유대 지역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그가 좀더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했으며, 아마도 유월절 축제 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판국에, 이미 갈릴리 마을들에서 잘 알려졌던 농민 예언자가 느닷없이 왕을 조롱하는 "승리의" 입성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또 다시 그의 추종자들을 대동한 채 성전구역에 들어와 탁자들을 뒤엎고 성전 기물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런 종류의 행동을 눈감고 넘어갈 행정당국이나 종교당국은 없을 것이다. 예수의 이런 행동은 그 당국자들이 내세우는 질서와 체면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들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로마당국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위협했다. 따라서 축제기간 동안에 군중을 선동한 미친 사람에 대한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후 몇 십 년 뒤에 바울이 성전에서 체포된 사건과 요세푸스가 기록한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성전의 경비병들과 안토니아 요새의 군인들은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만일에 소동이 매우 심각하고 성전 뜰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들은 즉각 개입하여 그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순례자들의 흥분이 가라앉고 도시가 조용해질 때까지 그 주동자들을 체포하지 않은 채 기다리곤 했다. 예수의 경우가 이런 경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밀고자가 정보를 제공하거나 아니면 당시 성전 뜰에 있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벌여, 당국자들은 예수의 행방을 알아냈고 체포하도록 만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예수는 과거의 엘리야나 예레미야처럼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하였고, 또한 자신의 행동과 선포를 철회하는 것도 거부하였기 때문에, 예수의 운명은 하급 보안장교들의 행정 처리로 결정되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수난 이야기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당시 상황을 간결하게 처리하여, 복음서들 속에서 매우 자세하게 덧칠해진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분석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설명한다. 즉 "예수처럼 보잘것없는 성가신 농부에 대해서는 지휘계통에서 높이 올라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빌라도 앞에서 자세한 재판은 말할 것도 없었고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조차 형식적인 심문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경우에는 체포와 처형 사이에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처리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단지 혼자서 영적인 메시지를 선포한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매질을 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30여 년 후 기원후 62년에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 즉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에, 그 도시가 충분한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을 때,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초막을 세우는 게 습관이었던 절기에,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라는 버릇없는 농부가 성전 안에서 갑자기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동쪽에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서쪽에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사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예루살렘과 성전에 반대하는 소리가 들린다. 신랑과 신부에게 반대하는 소리가 들린다. 모든 백성에게 반대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밤낮으로 도시의 모든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외쳤다. 시민들 가운데 일부 지도자들은 그 불길한 말에 화가 나서 그를 체포해서 심하게 혼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자신을 때리던 사람들에게도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예전처럼 외치고 다녔다. 그러자 행정관은 그가 실제로 어떤 초자연적 힘에 사로잡혀 그렇게 외친다고 짐작하여 그를 로마총독 앞에 데려갔다. 거기서 그는 채찍을 맞아 뼈가 드러날 지경이 되었지만 자비를 청하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은 채, 채찍을 맞을 때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있을지어다!'라고 가장 음울한 저주를 퍼부었다. 알비누스 총독이 그에게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기에 그렇게 외치는가를 물었을 때도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쉬지 않고 그 도시에 대한 저주만 내뱉었다. 결국 알비누스 총독은 그를 미치광이라 선언하고 내쫓았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단지 매질을 해서 쫓아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시골 마을들에서 커가고 있는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헤롯 안티파스와 성전에 맞서서 예언자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현 체제의 악행들과 불의를 치밀하게 단죄하고 있었다. 심지어 권력자들에 대한 예수의 예리한 공격을 강조하는 일에 매우 조심스러운 공관복음서들조차,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여러 지배집단들과 날카롭게 대결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예를 들어, 공관복음서들에 나오는 "악한 소작인" 비유(마태 21:33-46; 마가 12:1-12; 누가 20:9-19)는 1세기 유대와 갈릴리 소작 농업에서 소작인과 부재 지주의 마름 사이의 긴장관계와 노골적인 폭력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제사장 계급과 헤롯 왕가의 귀족들 중의 대지주들이 시골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지만 그들 역시 소작인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치 있게 보여주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땅의 유일한 참 "소유주"이셨기 때문에,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포도밭을 성실하게 경작할 의무를 회피하거나 정당한 상속자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들의 "소작권"을 박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사르에게 주어야 할 동전에 관한 이야기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 마가복음 12:13-17(병행구절 마태 22:15-22; 누가 20:20-26)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가운데서 몇 사람"이 예수를 반역죄로 몰아가기 위해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유대에서는 20여 년 전에 아켈라오를 내쫓은 이후로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에 세금을 내는 문제는 공개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곤 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자신들의 통치자가 아무리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해도 그에게 많은 세금을 바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자신이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이교도 황제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를 금지한 모세 율법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했다. 유다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비록 오래 전에 앗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왕이나 성전의 세금을 통해 조공을 바친 적은 있었지만, 시골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보낸 회계 감시원, 인구조사원, 장부계원, 세금징수 청부인 등에 의해 직접적으로 또한 계속해서 시달렸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로마의 세금 징수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사라질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에게는 세금징수가 관건이었다. 세금은 제국의 존재 이유였다. 로마인들이 세금을 징수할 권리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말한 유명한 이야기는 예수가 그렇게 말한 의도와 그 청중들이 이해한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와 국가" 혹은 "세속적" 왕국과 "영적" 왕국 사이에 구분이 있었을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환상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여기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하는 그 반대자들의 술책을 피하려했던 것이다.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황제가 이 세상의 최고 소유자이며 구세주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언약에 속한 사람은 결코 그런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에게 덫을 놓기 위한 질문을 받아,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불법 통치를 한마디로 단죄하는 방식으로 대답했다.
예수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가져오도록 하여, 그 질문자에게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헤롯 안티파스의 동전에 새겨진 제국의 상징들이 일반인들에게 힘이 누구 손에 있는지를 확산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동전들은 왕의 권력을 광고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굴복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통화였다. 따라서, 동전을 제시하거나 아마도 단지 동전에 적힌 글자를 반복함으로써, 예수는 재치 있게 그의 청중들에게 카이사르의 통치는 오만하며 악하며 허망한 것임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런 후 예수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무엇이 황제에게 속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했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예수는 암호문 같은 말을 통해 황제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예루살렘의 통치당국, 즉 제사장들과 헤롯 왕족들과 로마의 행정관리들은 아량을 베풀다가 민중 소요사태로 발전할 경우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수가 성전에서 벌인 소동을 무시하고 그의 위험한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본받도록 부추길 따름이었다. 단순히 매질을 해서 돌려보내는 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보기에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어줄 따름이었다. 신속하고 결정적인 조치를 취해서, 성전에 모였던 순례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참된 예언자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이었다. 사형에 처할 권력은 로마총독의 특권이었지만, 그는 성전 당국자들만큼이나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일과 훌륭한 행정관리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호슬리 & 실버만, 4장에서